학벌사회 -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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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난 2004년에 한의대에 입학한 - 지금은 다행히(!) 한의대 커트라인이 많이 낮아지는 추세지만 04년만해도 상당수가 '서울공대 가느니 지방의대/한의대를 가겠다'는 분위기였다. - 한의대생이다. 고3때 다니던 학원 같은반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대/연세대/고려대를 갔고 현재 내가 다니는 학교엔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다시 수능봐서 입학하신 분들이 많다. 사회경험이 없는 나는 서울대 출신, 혹은 명문대 출신이 누리는 사회적 특권을 몸소 경험해보지 못했고, 사회가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탓인지 명문대 친구들은 암울한 공대생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고  명문대 출신 동기분들은 하던 일이 맘에 안들어서, 혹은 돈을 더 벌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한의대에 들어왔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다. 즉, 내 주변의 '명문대 출신'들은 별로 '특권'을 누리는 것 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여 이 책에서 알게된 '서울대 출신'의 특권은 - 따지고 보면 나와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 처음엔 그리 와닿지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몰랐던'게 아니라 '모르고 싶었던'것일 게다. 애초에 한의대 아니면 안가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서울대'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고 - 학교 선생님은 '서울대 합격자'가 되길 바랬지만 - 원서도 넣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서울대'에 한의대가 없었기 때문이지 내가 '특정 학벌'이 되길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의 나는, 근소한 점수차로 한의대를 대표하는 "K"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리라는것에 세상이 끝난것처럼 슬퍼하던, 소위 "주류 한의학계"에 들어가길 소망하던, "K"대학에 합격한 아이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끼던, 그런 아이였다. 당시 서울대에 합격한 내 친구들은 - 적어도 나의 주관적인 판단에서는 - 흔히 포장되는 것처럼 "똑똑하고 우수한" 아이들이 아니라 단지 연/고대 혹은 다른 학교에 입학한 친구들보다 수능에서 몇 점 더 받은 "운 좋은"경우에 속했고 솔직히 말하건데 지적/창의적 능력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해가 지나면서 연/고대 혹은 다른 대학 친구들은 (분명 '명문대학'임에도!) 왠지 모르게 의기소침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몇몇 아이들은 다시 수능보겠다며 잠적하기도 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의대에 합격한 친구들 중에도 "명문 의대"에 가겠다며 몇몇 그런 경우가 있었다. '대학 서열'이 미치는 영향력을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적극 말리지 않았다. 그저 친구가 잘 되길 응원해주는 정도. 학교가 어디든 자기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말해주기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지레 겁을 먹었던 건지도.

저자가 말하듯, 서울대생들이 연/고대 생들보다 두세배로  뛰어나다면, 혹은 명문대생들이 보통 대학생보다 지적 능력이 현저하게 뛰어나다면 그만한 보상을 받는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분명 상위권 대학으로 갈수록, 특히 서울대에는 '우수하고 뛰어난' 학생들 비율이 높은건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어느대학'출신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특권을 받는 경우가 훨씬 많다. 문제는 그 특권 때문에 누군가는 피해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단지 특정대학이 아니란 이유로. 부당한 특권을 누리기 위해, 혹은 부당한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모두들 특정대학으로 몰리고, 소수의 선택받은 학생이 되기 위해 지금의 치열한 '입시전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타율적 노예'를 양성하는 현 교육체제, 더 나아가 사회체제를 바꾸기 위해선 서울대를 (자체 신입생을 받지 않고) 다른 국/공립대에 개방하여'서울대 학벌'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체다. 독일식이라는 대학통합방안은 개인적으로 생소한지라 선뜻 동의할 순 없지만 책에서 제시하는 학벌의 사회적 역기능 - 불공정한 권력독점, 노예화 교육 등 - 은 대체로 수긍이 간다. 책을 보며 분노하는 나를 보고 어느 서울대 졸업생은 '정말 분노해야 한다'며 분노를 격려할 정도였으니! 서울대 졸업생들 중에도 서울대를 다른 국/공립대에 개방/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사실 나도 "한의대생"이라는 특권으로 고수입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분노'만 할 입장은 아니라는 것. (하긴, '서울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약간의 차별(!)을 받긴 한다. 그래도 뭐. 이것도 특권인건 맞다.) 둘째. 과외하면서 점점 느끼는 거지만, 아이들이 점점  의문을 가질 줄 모른다. 대부분을 암기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공부의 방법을 모른다거나. 그런데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자기 관리도 잘 안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혹은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건, 일대일 지도로도 쉽지 않은,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이런것들을 공교육에서 담당하려면 정말 많은 개혁이 필요할텐데.

여담으로, 저자의 책 중 내가 읽은 것은 이것 포함 세 권이다 - 도덕 교육의 파시즘, 서로주체성의 이념 - 세 권이 모두 주제가 다르지만 모두를 꿰뚫는 화두는 '서로주체성'이다. 타인과 더불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화두다. 이 책을 읽는 다면 그 두 권을 꼭 같이 읽어보길 권한다.

아무래도 난, '김상봉'이라는 사람에게 반해버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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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거 벌써 다 읽었어? :) 빠르네. 이제 김상봉 씨 책은 더 이상 추천할게 없네. 내가 더 이상 읽은게 없으니까. 이것도 읽다 만거 추천한건데. 다른 저자들에게도 관심을 나눠줘. :)

Jade 2007-09-10 11:25   좋아요 0 | URL
ㅎㅎ 주말에 할일이 없어 내리 읽었어요 ^^ 근데 김상봉씨 책을 읽으려면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밑바탕에 깔고 읽어야 할듯...^^

시비돌이 2007-09-27 06:4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다른 저자들에게도 관심을 나눠주세염. ㅋㅋ

Jade 2007-09-29 03:09   좋아요 0 | URL
어머 시비돌이님 "하나의 대한민국 두개의 현실" 리스트에 있는데 넘 기대되요~ 박노자, 진중권, 홍세화 등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루룩이라 - 9월 지출이 커서 10월 첫 수입이 들어오길 고대하고 있답니다. ^^

비로그인 2007-09-1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이드님도 나만큼이나 속독인가보다~ ㅎㅎ
근데 난 어려운 책은 빨리 못읽는다는 거 ~

Jade 2007-09-10 11:2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는 속도는 빠른 편이예요..저도 어려운 책은 끙끙대다 덮어두는 경우가 많은데....^^

cplesas 2007-09-2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김상봉이란 이름을 쫓다가 이까지 왔네요. 여러 가지 페이퍼 잘 보고 갑니다-

Jade 2007-09-26 21:3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소나무 2020-05-3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년이 지난 오늘 글을 봤습니다. 전문서평가는 아니지만 글을 쓰는 직업을 둔 사람으로서 좋은 글에 감명 받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