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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아름다움
필립 시먼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군대간 친구 녀석이, 마음 못잡고 헤매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책 한권을 추천했다. 항상 제 또래보다 어른스럽고 싶어하는 녀석이라 마치 삶의 의미를 통달이라도 한 냥 끄적거렸길래, 대체 무슨 책인가 호기심 반 의심(!)반 집어든 책.
극한 상황이나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굴하지 않고 꿋꿋히 역경을 헤쳐나가는 주인공들의 영웅담은, 진실을 포장한 가식의 가벼움때문에, 감동을 '조장하는' 진부한 수식 때문에, 그 속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그런 종류의 책'으로 치부되곤 한다. 저자가 루게릭병으로 인해, 서른 다섯의 젊은 나이에 "찻숟가락으로 한숟갈씩 생명을 덜어내는"고통을 겪으며 지은 책이라길래, 약간은 반감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축복이라 여기는 저자의 참 마음과 관계없이, 그런 고통을 모르는 나에겐 그냥 그런 뻔한 스토리로 다가오진 않을까. 혹은 다른사람의 고통에서 내가 이 사람보다 더 나은 상태라는 위안을 얻는다는게 잔인해서. 혹은 책 읽는 순간의 감동들이 책을 덮음과 동시에 같이 책상속으로 깊숙히 꽂혀버릴까봐. 삶에 대한 통찰력은, 그것을 얻기위해 보냈던 수많은 밤을 모르는 사람에겐, 늘 어디선가 들었던 경구 쯤으로 잊혀지고 만다. 특히 나처럼 가슴으로 읽지 못하고 머리로만 얕게 읽는 '가련한 독자'에겐.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독자에게 어떤 교훈이나 깨달음을 주려고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병을 얻고 나서 변화되는 자신의 모습들과 심리상태에 대해 나지막하게 중얼거릴 뿐. 5년이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으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아가게 될까. 분노 체념 절망 상실감...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죽음을 남일처럼 모른체 하는'사람들에 비해 삶에 대한 애정이 깊다. 저자역시 '불치병'때문에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지만, '병'을 대상화하진 않는다. 누구나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자신이 겪는 병은 보편적 현상의 특수한 형태일 뿐. 조금씩 근육들이 마비되고 이젠 거의 손을 쓸 수 없지만 그는 그 모든 결핍과 상실을 사랑한다. 자연의 모든것들은 태어나고, 변화하고, 소멸한다는 당연한 진리속에 기꺼이 들어가 온몸으로 눕는다.
다른책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과거 혹은 미래만 있다. 현재는 과거의 찬란한 미래였지만, 숨쉬고 있는 지금은 어떤 미래를 위해 달려가는 과정일 뿐이다. 모든것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했던가. 저자는 시간이 영원하다면 우리가 숨쉬는 매 순간순간을 충실히 살아냄이 곧 영생이라 말한다. 틱낫한 스님의 말 "그릇을 깨끗이 하기 위해 설거지 하지 말고, 설거지 하기 위해 설거지 하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이것저것 따져보거나 지나간 일들을 곱씹으면서 현재를 보내는 것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 결국 모든 순간들에! - '살지'못하는 것이다.
죽음이 실체로 다가오지 않는 나에겐, 이 책의 진지함이 충분히 스며오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는동안엔 책 속에 빠져들었음에 위안을 삼는다. 의사들의 예측을 벗어나 7년째 생존하고 있는 저자가, 앞으로도 많은 순간들을 '살아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