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 <윤리학>책을 검색하다가 우연찮게 P.W. 테일러의 <윤리학의 기본원리>를 찾게 되었다.  

 

 

 

 

 

 

 (바로 요책!)

근데, 순간적으로 내 눈을 잡아 끈 것은 이 책의 가격이었다. 정가가 무려 18000원이나 나갔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을 나는 2년전에 중고서적에서 500원을 주고 샀기 때문에 더더욱 책값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내가 구입한 책은 85년판으로서 정가가 5500원으로 표기되 있다. 

근데, 지금 고백하는 말이지만 이 책이 2만원을 넘었어도 난, 이 책을 구입했을거란 사실이다. 

2007년부터 나에게 고민을 던져준 말이 있었다. 

07년부터 논리학과 윤리학에 대한 책들을 욜심히 독파하고 있었는데, 한 교수가 그랬다. 논리학과 윤리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이 두 학문을 공부할수록 도저히 그 말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완전히 다른 학문인 것 같은데 왜 그 교수는 그런 이상한 말을 했을까..라는.. 

헌데, 미치겠는건 또 다른 교수도 그렇단다..뭐, 더 공부해 나가면 깨달을 거라나.. 

분명한 공통점은 있었다.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학문이 시작됐다는 거~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혼자 제창학 학문과 마찬가지며, 윤리학은 그가 최초로 윤리학의 범주에서 논해지는 것들을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 명명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한 사람에 의해서 잉태된 철학의 두 분과 학문이 매우 이질적인데, 어떻게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인지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올 6월에 테일러의 <윤리학이 기본원리>(그리고 한면희님의 <환경윤리>)를 읽으면서 논리학와 윤리학의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왜 두 분 교수가 그렇게 말했는지 드디어 고개가 끄덕여 졌다~ 

500원에 구입한 책이...그것도 2년 간 박스 속에 있던 책에서 궁금증을 해결한 것이다~  

<윤리학의 기본원리>가 얼마나 대단한 책인지는 읽어봐야 알 수 있다. 약간 교과서적인 체계가 아쉽지만 그래도 윤리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와 기본적인 원리들이 빠짐없이 망라되어 있다.  

게다가 윤리학의 문제와 쟁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검토까지 하고있으니, 윤리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매우 요긴한 책이 아닐까 한다.  

 

알라딘 책 검색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기쁜 마음에 많이도 주절거렸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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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0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18000원짜리 책을 500원에 그럼 책 만드는 사람들은 뭘 먹고 살까요?
윤리학,논리학이라...넘,어렵지만 참고는 하겠습니다.(,.)

yamoo 2010-08-08 00:06   좋아요 0 | URL
중고서적에 가면 책 가격은 천차만별인거 같습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환장할 노릇이겠지만, 책의 감가상각은 그 어느 물품보다 큰 것 같고요..필요한 사람에게는 정말 큰 가치가 있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난 신문과 같지 않을까요? 중고서적에 가면 이 사실을 좀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윤리학과 논리학..어떻게 보면 어렵고 어떻게 보면 그렇지 않지만 대충 보면 가장 인기 없는 분야의 책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suon 2010-08-2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읽기가 어렵지는 않지만, 술술 읽히지는 않네요~
원문을 직접 봐야하지만 실력은 안되서...ㅠ
암튼 파이팅입니다.ㅎㅎ
 
엑스페리먼트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한 토론 모임의 논쟁에서누군가 그랬다.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있느냐? 

그런 건 없다. 단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 뿐이이라고..아주 강력하게 주장했더랬다. 

난, 계속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는 사실을 여러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했었는데, 씨알이 먹히지 않았었다. 

근데,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금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 2002년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판으로 먼저 봐서 충격은 훨씬 덜했지만 아래와 같은 사실을 좀더 명확히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인간의 행동은 지위에 따라 결정될  수 있고, 

둘째, 견제 장치가 없는 권력은 남용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셋째, 상징에 대한 의미부여가 구성원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 

넷째, 외부와 접촉이 차단되고 고립된 상태에서는 행동에 대한 자기통제력이 전혀 힘을 발휘 할 수 없다는 점.

 

재탕인 영화여서 몰입도는 좀 떨어졌지만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은 이 실험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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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쟁이 2010-08-05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영환가요? 보고 싶어하고 있는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데, 보고 나면 너무 인간성에 대해 너무 비관적이 될까봐... ㅎㅎㅎ

yamoo 2010-08-05 11:52   좋아요 0 | URL
아주 괜찮은 영화입니다. 처음 보면 섬뜩할 수도 있습니다. 내재된 인간의 광기가 어떤 것인지를 목격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02년판을 추천해 드립니다. 동명영화이고, 이 영화는 02년 영화의 헐리우드 버전이에요~

양철나무꾼 2010-08-0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자를 추종하시는군요~?

근데,영화는 재밌나요?
리뷰가 일목요연하네요~^^

yamoo 2010-08-05 11:54   좋아요 0 | URL
예~ 전 순자의 성악설을 지지해요..ㅎ 그렇다구 추종자까지는 아니구요..
영화 재밌습니다. 하나의 실험을 영화로 찍었다 생각하시면 좋을 거 같아요..02년판이 좀더 다큐지향적 색채가 강했다는 인상입니다. 보시면 후회는 안하실듯해요~

pjy 2010-08-05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미산을 빨아먹을것도 아니면서, 길가의 개미군단을 손가락으로 처절하게 계속 눌러죽이는 천진한 아이를 생각해 본다면 저도 인간은 악하다에 한표!

yamoo 2010-08-05 20:28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천진한 아해의 그 행동...아무것도 모르는 행동 속에 도사리는 악한 본성~~토론에서 왜 이 사례가 생각이 나질 않았나 모르겠네요...^^;;

마태우스 2010-08-06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태우스라고 합니다 꾸벅. 음, 저 역시 성악설을 신봉하는지라 갑자기 보고 싶어지네요. 근데 이 영화가 리메이크인가봐요? 글구 토론모임도 있으신가보군요!

yamoo 2010-08-06 12:02   좋아요 0 | URL
와우~ 마태우스 교수님 반갑습니다! 꾸벅, 꾸벅.^^ 성악설을 신봉하신다면 이 영화 강추합니다~ 02년 엑스페리먼트의 헐리웃판입니다~ 예~ 토론모임을 2개 했는데, 지금은 시간이 없는 관계로 아주 가끔씩 얼굴만 비추고 있어요^^
 

방바닥에 널부러져있는 책더미들을 본다. 

한숨만 나온다. 

휴가 포함 2주 동안 산 책이 모두 96권이다! 

이 책을 사는데 도합 13만 8천원이 들었다. 

헌데, 휴가 기간 포함 읽은 책은 달랑 5권이다. 

이 미친 증상이 한동안 나타나지 않아 안심했는데, 오늘 보니 증상이 더 심각해 진 것 같다. 

책들은 아직 분류도 하지 못한 채 택배온 순서대로 아무렇게나 쌓여져 있다. 

아~ 어찌 하면 좋을까.. 

휴가 전에 읽겠다고 벼르던 책들을 책상 바로 옆에 쌓아 놓았는데, 그 중 읽은 책은 겨우 2권 밖에 없다!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토론 때문에 2번 정독한 거 빼고는 김영사에서 나온 <데리다>를 읽은게 전부다. 난 왜 여기 있는 책을 읽지 않고 엉뚱한 책을 읽고, 또다시 많은 책들을 사재기만 한 걸까?? 

물론 때가 되면 허겁지겁 다 읽겠지...근데, 그게 언제인지도 알 수 없고... 

진짜 미쳐버리겠다.. 

헌데, 더 중증인건 쌓여 있는 책더미 속에서 절판된 책이 눈에 띄면 희죽희죽 웃고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미치지 않고는 보일 수 없는 심각한 증상인 거 같다.. 

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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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쟁이 2010-08-03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입니다. 뜯지도 않은 택배상자로 벽돌 쌓기 놀이가 가능해요.

yamoo 2010-08-03 23:57   좋아요 0 | URL
헉! 저보다 심한 분이 있다니...믿어지지 않아요~~~ㅎㅎ

pjy 2010-08-03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효효..제가 한때 그 미친듯이 웃으면서 사재기 증상으로 후유증이 심각했죠~파본인데 1년만에 바꾼적이 있습니다ㅋ

yamoo 2010-08-03 23:58   좋아요 0 | URL
pjy님도 사재기 증상이 심각하셨군요~ㅎㅎ 근데, 저보다 중증이셨나요?? ㅎㅎ

양철나무꾼 2010-08-0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곳 몇분들의 서재를 줄타기 하며 느낀 건데...
딴 말이 필요없군요,우린 서재 폐인들이군요~^^
근데,궁금한게요~
96권이 138000원이면 너무 저렴한 거 아닌가요?
만화책이나 중고서적이 끼어있었나요?

yamoo 2010-08-05 12:03   좋아요 0 | URL
하하~ 서재 폐인이라...그렇기도 하군요..ㅋㅋ
전 좀 비싸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ㅎㅎ 만화책은 없구요..새책과 중고책이 섞여 있습니다. 중고서적이라고해도 거의 새책이나 다름 없는 책들이에요..단지 오래전에 절판된 책은 좀 낡았습니다만..그래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운이지요^^ 좀 바랬지만 새책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색된 정도입니다.
 
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서구 철학계에 동양의 학자가 회자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양철학사를 꽤뚫고 있어야 하며, 서구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그 개념을 갖고 텍스트의 맹점을 비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20세기 이후 서양에 알려진 동양의 학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전무하지는 않다. 두 사람이 있다. 심리철학을 연구하는 재미 철학자 김재권과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바로 그들이다.

철학자 김재권은 아예 서양철학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제창한 ‘수반이론’은 심리철학계의 거의 모든 문헌에서 언급될 정도이다. 김재권은 한국인이지만 서양철학의 중심으로 파고들어갔고 거기에 한 획을 그엇다고 평가받는 ‘서양철학자’이다.

그렇다면 가라타니 고진은 어떤가? 그는 문학 평론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그의 문제의식이  서양철학으로 향하면서 현실의 문제 해결을 서구의 사색 속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행한 일련의 비평과 평론이 서구에 알려지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양의 철학을 바라보는 그를 서구 학계가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안가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일단 대가라고 통용되기 위해서는 선배 대가의 비판을 넘어 대가들의 사상을 자기 언어로 자유자재로 풀 수 있어야 된다. 칸트에 대해서 쇼펜하워가 그랬고, 헤겔에 대해서 맑스가 그랬으며, 스피노자에 대해서 들뢰즈가 그랬다.

모두 선배 대가들의 철학을 자기 철학으로 체화하여 다시 독창적으로 전개 시킨 사람들이다. 여기에 가라타니 고진을 올려 놓을 수 있다.

<윤리 21, 사회평론>을 읽으면 가라타니가 왜 대가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칸트에 대해서 쇼펜하워가 그랬던 것처럼 가라타니는 칸트의 윤리학을 통해 그 자신의 문제의식을 해결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21세기에 가라타니가 화두로 들고 나온 것이 ‘윤리’라는 사실이다. 헌데, 그 윤리가 한 물 간 것으로 평가되는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현대 윤리학의 지배적인 위치는 공리주의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지만, 윤리학계의 다수설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21세기에 칸트의 윤리를 들고 나온 것일까? 그것은 일본의 특수한 상황이 초래한 저자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저자가 칸트의 윤리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책에 소개되어 있다.

“수년 전부터 나는 전쟁책임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책임이란 무엇인가, 윤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다. 그 때 나는 칸트의 『비판』이 지금도 가장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논의의 출발점은 책임이다. 어떻게 전쟁 책임을 지울 것이냐의 고민이 일본의 상황과 맞물려 자유와 책임의 문제로 심화된다. 논의는 간단하다. 자유 없이는 책임도 없다는 사실이다.

형이상학적인 논의의 차원으로 넘어가기 앞서 가라타니는 현실문제의 윤리적 양상을 짚는다. 고베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면서 아이의 잘못을 왜 부모가 책임을 지고 자살하느냐를 반문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모가 사과하며 책임을 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가라타니는 그것이 잘못됐으며 비윤리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부모가 아이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순간, 그 아이의 자유는 없고 따라서 그 아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이런 논리 전개는 그대로 천황의 전쟁책임론으로 이어진다. 태평양 전쟁은 천황이 일으킨 전쟁이다. 천황이 모든 명령을 했고 그 밑의 군사들은 그 명령을 이행한 것 뿐이다. 따라서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천황인데, 천황이 책임에서 제외되니 ‘일억총참회’라는 어정쩡한 주장이 나오게 된다.

가라타니는  여기에 일침을 가한다. “일본에서는 개개인이 과거를 알고 반성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 말은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미묘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최고 책임자의 책임을 물은 뒤에야 비로소 국민 개개인의 정치적 책임 및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p151)

일본에서는 왜 이러한 현상이 빈발하는가? 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을 혼동하여, 철저히 원인을 밝혀내는 것을 철저히 책임을 묻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라타니는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문제다. 원인은 철저하게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 문제와는 구별해야 한다.”(p40)

왜냐하면 “어떤 사건에 관해 원인을 아는 것은 인식의 문제이며,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실천(윤리)의 문제”(p53)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원인을 묻는 것은 형이하학적인 반면, 책임을 묻는 것은 항상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영역과 관련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라타니는 책임질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 가라타니는 자유의 형이상학적 탐구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나오는 제3 이율배반으로부터 시작한다.

◆ 정명제- 자연법칙에 따르는 인과성은 그것으로부터 세계의 모든 현상이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인과성이 아니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외에 자유에 의한 인과성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 반대명제- 무릇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따라서만 생겨난다.

정명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반대명제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 두 이율배반적 명제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시도한다. 두 명제를 인식의 영역과 윤리의 영역으로 구분한 것이다.

스피노자-마르크스 계열의 구조론적 인식하에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우리의 행동을 보면 모두 원인이 있다. 개개인이 자유의지로 결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pp55-56)

"예컨대 아이가 다마고치나 포켓 몬스터를 갖고 싶어할 때, 자신의 자발성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남들이 갖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타자의 욕망 혹은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지 자유(=자기원인)은 아닌 것이다." (p96) 

한편, 가라타니는 인간에게 자발적인 자유가 있다는 것을 칸트의 정언명법으로부터 도출한다. 하지만 이 의무가 공동체의 의무(=도덕)로 봐버리면 다시 스피노자적 결정론으로 빠지기 때문에 가라타니는 이 의무를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가라타니는 이것을 ‘윤리’라고 명명한다.

“자유는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즉 그것은 결정론적 인과성을 배제하라는 명령이다.” (p71)

가라타니는 이렇게 인식의 영역은 결정론, 윤리의 영역은 자유로 대응시킨 후, 이 양자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식대상이며 동시에 하나의 윤리적 판단 대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요컨대, 칸트의 의무, 그러니까 정언명법을 저자는 “자유로워지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럴 때에야 두 명제가 양립하게 되고, 칸트가 의도했던 게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덕과 윤리를 키에르케고르의 구분법을 차용해 양자의 개념이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자유와 책임 문제를 검토한 후(전쟁의 세기에 대한 마침표) 가라타니는 마지막으로 ‘존재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윤리의식을 건드린다. 바로 ‘죽은 타자’와 ‘태어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의무이다. 가라타니는 말한다.

“뭔가 새로운 지점에 도달할 때 우리는 과거를 다시 본다. 그것은 죽은 자와의 관계 변화라고 말해도 좋다. 그 경우 죽은 자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죽은 자가 처음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억압하고 있던 ‘타자’가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p180)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조금도 완료되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과거의 ‘타자’와 우리의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p182)

이는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도덕법칙을 견지하는 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 과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미래도 역시 현재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논지이다.

“우리는 합의를 필요로 한다. 덧붙여 말하면 오히려 위기를 체험하는 것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살아 있는 어른의 ‘행복’만을 생각해서는, 또 그들 사이의 ‘합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윤리성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의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 미래의 인간에게 그 계산서를 돌린다면, 그들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p190)

 

‘전쟁과 혁명의 세기에 마침표를 찍고, 21세기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는 윤리 테제’라는 부제가 어울리는 <윤리21>이다. 우리 시대,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책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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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통 강의할 때 모든 것을 준비해서 그대로 읽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학자의 삶에서 가장 비극적이며 원시적인 것이 바로 강의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항상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며, 이것은 내가 준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강연할 때 나는 청중들에게 대화를 건네려하며, 그 대화는 누군가 중심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말하는 그러한 방식이 아니다. 그리하여 나의 짧은 강연의 마지막에는 당연히 활발한 토론이 있을 것이며, 이 토론은 자신의 고유한 지평의 경계를 넘어서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다. 모든 대화는 자신의 고유한 경계를 일깨우게 하기 때문에 값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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