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이론 이론읽기 - 라깡, 데리다, 크리스떼바
마이클 페인 지음, 장경렬 외 옮김 / H.S MEDIA(한신문화사)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정말 아주 웃긴 일이긴 합니다만, 책을 처분하기 위해 선별하는(책 읽는) 작업에서 의외로 대어를 낚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처분할 책 더미(물론 이 책들은 전에 읽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사들인 책이지만)에서 책을 빠르게 훑고, 발췌독을 하면서 진짜 처분할 책인지 그렇지 않으면 읽고 소장할 책인지 마지막 점검을 합니다.

 

 

대개는 그냥 처분해야 할 더미에서 처분할 박스로 담기지요. 하지만 개중에는 간간히 처분하면 큰 일 날 뻔한 책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조세희 작가의 <침묵의 뿌리>(열화당, 1985)가 그랬고, <곰에서 왕으로>(동아시아, 2005)가 그랬습니다.

 

 

 

 

모두 헌책방에서 너무도 저렴하게 구입한 책(2000원 씩)이라, 그리고 평소 즐겨 읽던 분야가 아니라 처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알아보고, 넘겨보고, 발췌독 해 보니 이건 소장해야 될 책이라는 걸 직감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살아남은 책들입니다.

 

 

어제와 그제 다시 한 번 솎아낼 책을 정리하다가 정말 대어를 낚았습니다. (인문학의) 좋은 책들이지만 번역이 좋지 않거나 앞으로 읽을 가능성이 희박한 분야(평론 분야)를 정리하는 와중에 만난 책입니다. 모리슈 블랑슈의 <미래의 책>, 만프레드 파랑크의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롤랑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을 과감히 처분할 박스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뒤따라 오는 마이클 페인의 <읽기이론/이론읽기>(한신문화사, 1999)이란 책을 감별하려고 손에 들었지요. 겉 표지도 없어 보이고(디자인이 매우 구립니다), 개인적으로 읽을 일이 없겠다 생각하고 있는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와 관계된 책이었습니다. 이들 세 학자의 텍스트를 심도 있게 해설하고 비평하는 책이라 시큰둥하게 넘겨보았지요.

 

 

아, 근데 이 책은 책장을 넘겨 읽어 갈수록 처분해 버리면 안 될 거 같은 예감을 받았습니다. 라깡의 <에끄리>, 데리다의 <기록학에 관하여>,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 등 각 텍스트를 아주 심도 있게 해설해 주고 있는데, 문외한인 제가 봐도 바로바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번역이 탁월했습니다.

 

 

라깡과 데리다의 책들을 읽어 본 결과 번역 때문에 관심이 확 줄었는데, 번역만 좋다면 그 사상에 빠져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이론들이었습니다. 왜 황당한 번역으로 명작들을 망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 1997)이 그런 사례지요.

 

 

어쨌든, 라깡 추종자들과 데리다 추종자들이 괜히 많았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줬습니다. 문외한인 저로서는 각 텍스트를 살짝만 맛본 상태였지만 이 책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고, 이 텍스트들이 왜 중요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지금까지 읽어 본 프랑스 철학 번역서 중에서 <들뢰즈-존재의 함성>과 함께 최고의 가독률을 자랑한 책이었습니다. 읽으면서 바로바로 이해되긴 처음~

 

 

물론 단일 역자가 번역한 게 아니라 3인(장경렬, 이소영, 고갑히 공역)이 책의 3부분을 나눠 번역했기에, 아쉬운 역자도 있었습니다. 라깡 <에끄리>를 번역한 이소영 씨 번역이 가장 떨어졌지만, 그래도 읽을 만 했습니다. 데리다와 크리스테바 부분에서 이상한(?) 문장이나 단락으로 인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없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책으로 인해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를 다시 펴 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1장에 소개된 ‘라깡의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왜 문학자들이 텍스트 비평에 매달리는지 보여주는 시금석과 같았다 랄까요.

 

 

1956년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문학 해석에 관한 가정을 수정하도록 요구한 그 시도가 바로 이 세미나였다는 군요. 현재는 이미 문학 비평의 대세로 자리 잡은 모양새라 이 땅에서 라깡의 위세를 실감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깡의 주저인 <에끄리>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현실이지요. 그래서 간접적으로나마 이런 라깡의 텍스트를 다룬 비평서나 해설서에서 라깡의 이론을 접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책에서는 몰라도 이 책에서는 아주 쉽고 명확하게 라깡의 가치를 알 수 있지요. (물론 저는 라깡이 수학식으로 도배하기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이 책은 라깡만 다룬게 아닙니다. 번역 때문에 골치를 앓는 데리다의 텍스트도 쉬운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기록학에 관하여>는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지 않은데, 마이클 페인은 상당한 분량으로 <기록학에 관하여>를 분석/비평 해 주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루소, 워버튼, 비코, 콩디악 등의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차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페인이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라깡과 데리다를 쉽게 이해하여 쉬운 영어로 써서인지, 아니면 역자들이 우리말 구사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정말 쉽게 이해됩니다. 사실 라깡과 데리다에 관계된 논문이나 해설서를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매우 이례적인 듯합니다.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도 라깡과 데리다의 텍스트 연장선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테바가 여러 저서들을 내 왔지만, 이 책이 가장 중요하고 빼어나답니다. 크리스테바의 국가박사 학위 논문이기도 하다는 군요. 반갑게도<시적 언어의 혁명>은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 페인의 이 책과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을 같이 읽으면 긍삼첨화 일듯합니다.

 

 

 

 

<읽기 이론 / 이론 읽기>를 소장하기로 하고, 알라딘에서 검색을 해 보니 이 책에 대한 리뷰가 한 건도 없군요. 우리나라에 라깡과 데리다의 추종자들이 그리도 많은 거 같은데,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쓴 사람이 없다는 게 많은 의구심을 자아내게 합니다. 도서관에서 라깡과 데리다 관련 코너의 입문 책들은 전부 많이 빌려본 흔적이 뚜렷하여, 그만큼 인기를 실감하게 하는 데 말입니다.

 

 

라깡, 데리다, 기호학, 프랑스 철학, 문학 비평 이론서나 입문서 등을 보면 하나같이 번역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태반이라 그냥 책을 손에 들었다가 던지게 됩니다. 그만큼 이 분야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매우 한정돼 있다는 거겠지요.

 

 

제가 본 바로는 내용이 어려운 게 아니라 비문을 쏟아내어 원문을 암호화한 역자들 때문입니다. 제대로 번역되어 만나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주저들은 읽어 이해 안 될 내용이 없습니다. 이미 <들뢰즈-존재의 함성>을 보고 경험 해 봤습니다.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 / 이론 읽기>는 좋지 않은 프랑스 사상 역서계(譯書系)에 단비와도 같은 책입니다. 이런 좋은 책이 왜 널리 읽히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유명한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를 다룹니다! 그럼에도 술술 읽을 수 있습니다. 입문자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구요!

 

 

적어도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가 어떤 주저를 썼고, 그 책이 다루는 핵심 내용이 뭔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입문서로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읽어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암호문은 없으니까요.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의 주요 핵심 사상이 뭔지 알고 싶으신 분은 이 책을 읽으세요.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의 관심사가 뭐였는지 알고 싶으신 분 역시 이 책을 선택하세요.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가 어떤 이론적 관련을 맺고 있는지 알고자 하는 분 역시 이 책을 잡으세요.

 

 

후회하지 않고, 알고 싶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더군다나 기호학으로 그림을 분석하는 ‘그림 읽기’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학 비평을 위한 이론적 도구로 그림을 읽을 수 있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그림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도 유익할 것입니다.

 

 

여기에 <라깡이 이용한 프로이트의 독일어 용어들>과 <크리스테바의 용어들>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습니다. 이들 학자에게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분명히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겠지요.

 

 

근래에 보기 드문 좋은 번역서인데, 리뷰도 없고, 100자 평도 없기에, 저라도 리뷰를 부가 해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될 듯해서요.

 

 

덧.

다음이나 네이버 책 검색 사이트, 그리고 교보에도 뜨는 책 이미지가 왜 알라딘에는 없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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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30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팔기 전에 신중하게 정리하면서 분류해야합니다. 팔았던 책이 중고가가 높게 나오는 희귀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면 땅을 치게 됩니다. ㅎㅎㅎ

yamoo 2016-05-30 21: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정말 신중하게 잘 분류해야지요..ㅎ 그래서 팔기 전에 희귀본을 잘 골라 내어 후회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ㅋㅋ 사이러스 님 몬가 좀 아시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3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곰에서 왕으로.. 시리즈 가지고 있습니다. 총 4권으로 된...
이 책 재미있습니다..ㅎㅎ 반갑네요. 여기서 보다니.. 후후..

yamoo 2016-06-01 15:40   좋아요 0 | URL
호~ 이 시리즈를 갖고 계시군요! 2권 있었는데, 한 권은 처분하고 이 한권을 마저 처분하려다가 관뒀지요. 재밌다니, 4권을 모두 기대하면서 소장해야 겠습니다..ㅎㅎ

2016-05-31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1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6-0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바주 시리즈라고 해서 책장 보니 5권이 한 세트네요.. 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의외로 재미있었어요. 생각하지 안ㄶ았는데 말입니다..

yamoo 2016-06-01 17:31   좋아요 0 | URL
헐~ 5권이나 된단 말입니까!! 흐미~~ 5권을 언제 모은다냐..--;;

열매 2017-01-03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의 《기록학에 대하여》는 그 유명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라는 책을 말하는 것입니다.한국어판으로는 김웅권(동무선), 김성도(민음사) 2개의 번역본이 있구요.몰라서 그렇게 번역한 건 아니고 gramme이라는 문자/기록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려는 고민이 것 같습니다. 그라마톨로지라는 조어가 더 낯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