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이삭줍기 3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인간에게 있어 그림자는 무얼까?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열림원, 2002)를 읽고 ‘그림자’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나 오래 붙잡고 있는 내가 좀 우스워 보이긴 한다. 인간에게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 아무것도 아니기에.

 

플라톤의 철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림자는 실체가 아닌 허상이라는 걸 초등학생도 안다. 그냥 빛을 받는 유기체가 드리우는 실체의 흐릿한 모사일 뿐이다.

 

그런데 소설 한 권이 잊고 있던 인간의 ‘그림자’에 대해 성찰을 촉구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멋진 우화를 통해서,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의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사실, 이 소설은 자본주의 비판서로 평가받아 온 듯하다. 물론 플롯 구조상 인간의 가치와 돈을 대비시키고 있기에 이런 평가는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소설 속 ‘그림자’로부터 인간의 가치를 생각하면서 노자 사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의 사상 말이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는 ‘유무상생(有無相生)’과 상통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우주 만물은 유와 무의 대립과 긴장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단다.

 

있음은 없음을 전제로 하고, 없음은 있음을 전제로 한다. 침묵이 없으면 말(언어)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말은 침묵을 전제로 가치를 갖는다. ‘쓸모 있음’도 매한가지다. ‘쓸모 없음’이 있어야 비로소 그 ‘쓸모 있음’의 가치가 생긴다.

 

 

 

2

 

 

인간의 그림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림자로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자가 고뇌를 덜어주지도 않는다.

 

바쁜 일상생활에서 인간이 그림자의 존재를 생각할 겨를은 거의 없다.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 슐레밀은 무가치한 자신의 그림자를 악마에게 쉽게 내 준다. 그 대가로 슐레밀이 얻은 것은 금화가 무한하게 나오는 행운의 가죽 주머니. 슐레밀은 이 주머니로 갑부가 된다.

 

하지만 그는 태양이 뜨는 밝은 날을 피하게 된다.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게 된다. 이 나라에서는 그림자가 없을 경우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림자 없는 슐레밀을 보고 수다스런 청년들은 빈정거린다. “성실한 사람은 태양 아래서 걸어갈 경우 자신의 그림자를 잘 간직하는 법이지.” (p32)

 

슐레밀은 금화를 사용해 명성을 누리지만, 그 자신은 그가 지은 성 안에 꼭꼭 숨어서 지내다 태양이 사라진 밤에만 돌아다닌다.

 

급기야 그림자가 없다는 단 하나의 사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하인에게 빼앗기고 그는 절망한다. 그제서야 그는 절실히 깨닫는다. 쓸모 없던 그림자의 가치를.

 

그림자는 그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명예를 얻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였다. 선한 일에 돈을 쓰고, 그로 인해 명성을 얻었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로 그 모든 가치가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없어지는 경험은 슐레겔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가 그림자만 보여주면 혼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고, 하인이 태양아래 주인님의 그림자만 보여주면 충실한 하인으로 남겠다고 단언한다. 그럼에도 슐레겔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가슴이 타 들어가는 순간만을 경험해야 했다.

 

슐레겔은 이전에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모든 재산을 바쳤지만, 지금은 오로지 그림자만 없기 때문에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눈앞에서 잃고 있다. 그는 스스로 묻는다. “이제 나는 이 지상에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p33)

 

 

 

3

 

 

이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곱씹어 볼수록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림자’가 갖는 상징적 위상을 계속 돌아보게 한다.

 

천민자본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직장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가진 ‘그림자’를 모두 저당 잡히고 있다. 회사 밖에서는 일말의 가치도 없는, 그리고 눈에 잡히지 않는 업무를 위해 나의 시간과 정열을 모두 소진시키고 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아침에 일어나기 싫고, 회사에 가기 싫지만 돈을 벌기 위해 나는 가야한다. 상사의 갑질과 거래처의 갑질을 견디지 않고는 하루가 지나가지 않는다. 마른 걸레에서 구정물을 뽑아내고 나면, 나는 점점 닳아 없어진다.

 

그러면서도 놀라운 건 우리 스스로가 슐레겔이 자기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을 좀처럼 던지지 않는다는 거다. “이제 나는 이 지상에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오후 3시의 햇살을 받으며 여의도 공원을 걸어보는 자유.’ 샐러리맨들은 누려볼 수 없다. 이 산책은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치 있는 일도 아니다. 태양 빛에 드리우는 그림자와 같은 거다.

 

10년 간 대기업 산하 연구소 연구원 생활을 하고 직장에 사표를 던진 한 여자가 그날 오후 3시 여의도 공원을 산책하면서 느낀 지점이다. 그녀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뭘 위해 살았는지 모르겠노라고 했다.

 

그렇다. 이 기본적인 인간의 자유를 샐러리맨들은 누릴 수 없다.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를 누릴 수 없는 사람을 우리는 노예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샐러리맨들은 모두 노예다.’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수없이 회자되는 ‘그림자’는 현대 사회에서 돈과 바꾼 ‘인간의 가치’와 정확히 유비될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무가치한 듯 보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4

 

 

인간은 쓸모 있는 부분과 쓸모 없는 부분이 서로 섞여 있는 존재다. 자신을 이루는 쓸모 없는 부분이 무용하다고 해서 돈과 바꿔버리는 순간(여가를 일로 바꾸는 순간) 자신의 가치는 없어져 버린다.

 

잊지 말자. 소설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전하는 귀중한 메시지를.

 

“벗이여, 만약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이라면 부디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 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 주게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더 나은 자네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면 말이지.”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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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5-0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낯설지가 않네요. 저도 읽은 것 같기도한데 말입니다.
제목만큼 아주 재미었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확실히 기억을 못하는 걸 보면...ㅠ
그런데 야무님 글을 읽으니 정말 그렇게도 이해될 수 있었던 책이군요.
탁월하십니다.^^

yamoo 2016-05-10 16:02   좋아요 0 | URL
전 이 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본래 아동용 동화로 많이 편집돼서 출간되었던 모양입니다~ 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근래 들어서 그냥 휘리릭~ 읽었던 소설은 이 작품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흠...제 독후감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cyrus 2016-05-0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를 모으는 중인데, 유독 샤미소의 작품은 찾기 힘드네요. 어린이용 번역본은 사기 싫어요. ^^

yamoo 2016-05-10 16: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 이삭줍기 시리즈 거의 다 모았는데, 3번 샤미소의 이 책은 구할 수가 없네요..ㅜㅜ

어린이용 번역본이 많나 봅니다..ㅎㅎ

transient-guest 2016-05-10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만화로 본 기억이 있네요. 83-84년 무렵의 `보물섬`이란 어린이만화잡지였어요.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고...세부적인 디테일은 다르지만요...

yamoo 2016-05-10 16:05   좋아요 0 | URL
저도 보물섬 구독했었는데요...거기서 저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작품을 본 기억이 전혀~~~없습니다. 몇 작품은 생각나는게 있지만 제목은 전혀 생각나지 않네요..ㅎ

그나저나 보물섬이라...추억의 만화잡지죠. 어깨동무, 아이큐 점프와 함께 구독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만...^^;; 트랜스님 때문에 엔날 생각이 나래르..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