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저자 : 앙리 베르그손
역자 : 최화
출판사 : 아카넷
(이 <시론>은 이전에 <시간과 자유의지>로 삼성출판사에서 출간)
앙리 베르그손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3번 읽었다. 책장을 덮고 나니 무한한 감동이 밀려온다. 철학책을 읽고 이러한 감동을 느끼기는 참으로 오랜 만이다. 그것도 명성으로만 들었던 베르그손의 사상을 직접 접해보니, 명성보다 더 위대한 것 같다.
베르그손 하면 반주지주의, 반이성을 대표하는 철학자인데, 글은 어찌도 이리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논증 구조를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진짜 베르그송의 글에 딱 들어맞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완벽’이리라.
읽으면서 줄을 치고, 베르그손 사유의 전개 과정에 감탄을 쏟아냈다. 하지만 문뜩 문뜩 떠오르는 그 감탄에 대한 단상을 잡아두기에는 내 표현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절감해야 했다. 애써 글로 잡아보았지만 일천한 독서량과 생각의 얕음만 확인할 따름이다.
생각은 베르그손이 인도하는 대로 같이 나아가는데, 내 글은 생각의 속도를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 나왔다가 바로 사라지는 생각의 편린들. 이미 지나가 버린 생각을 글로 주워 담아 보니, 베르그송이 가르쳐주던 그 입체적인 조감도는 어느새 사라진다. 써 놓은 글은 완전히 이질적인 괴물이다. 이럴수가~
아, 슬프다. 이렇게 빈곤한 표현력이라니...ㅜㅜ
+++++++++++++++++++++++++++++++++++++
이 책을 3번 읽은 이유가 있다. 내가 아카넷 본(최화 역)을 선택한 이유는 베르그손 전문가 중 한 분인 황수영씨가 자신의 책 <베르크손>에서 아카넷본 번역이 탁월하다고 추천해 놨기 때문이다. 아카넷본에 대한 리뷰도 잠깐 살펴보니, 탁월한 번역이라는 둥, 완벽한 번역이라는 둥, 글 읽는 맛이 난다는 둥 전부 찬사 일색이다.
그래서 펴든 것인데....아, 이 번역본은 정말 탁월하지 않다! (역자는 딱 읽을만한 수준으로 번역했다는데, 그도 아니다!) 이 분은 문장을 무척 어렵게 쓴다. 직역을 했는지, 의역을 했는지 종잡을 수 없다. (아마도 직역을 했을 거란 느낌이다) 2장과 3장으로 갈수록 번역의 질은 현저히 떨어졌다. 1번 일독하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곳이 많아 삼성출판사 번역본인 <시간과 자유의지>를 꺼내 읽었는데, 이 책이 읽기에는 훨씬 낫다. 삼성출판사 역자는 정석해님인데, 이 분의 번역도 그리 좋은 건 아니다. 아카넷본이 더 잘 된 곳도 있다. 하지만 읽기에는 삼성출판사 본이 훨씬 좋다. 일단 아카넷본은 말이 안 되는 비문이 너무 많다. 헌데, 어째서 다들 이 번역본이 탁월하다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3번째 읽을 때, 두 판본을 꼼꼼히 비교해서 봤기 때문에 나중에 여기에 대해서 좀 투덜거려 볼란다~
베르그손이 그렇게도 훌륭한 문장가 였다는데...이 명저를 번역이 망쳐놓은듯하다. 베르그손이 말하고자 한 바에 근접한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다면, 누구라도 베르그손의 엄청난 사상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을텐데, 정말 아쉽다. 갑자기 자국어로 베르그손의 사상을 읽는 프랑스인들이 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