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사전 (보급판 문고본) - 기지와 해학 위트의 백과사전
앰브로스 비어스 지음, 정시연 옮김 / 이른아침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사전(辭典)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어떤 범위 안에서 쓰이는 낱말을 모아서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싣고 그 각각의 발음, 의미, 어원, 용법 따위를 해설한 책」

사전적 정의상 사전은 분명한 책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전을 읽는다고 하지 않고 본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의미를 명확히 하거나 글을 쓰는데 어떤 도움을 받기 위해서 ‘찾아보는 책’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헌데, 보는 사전이 아닌 읽을 수밖에 없는 ‘이상한’ 사전이 있다. 1906년 앰브로스 비어스라는 작가가 쓴 <악마의 사전>(이른아침, 2008)이 바로 문제의 책이다. 이 책은 어느 모로 보나 ‘어떤 범위 안에 쓰이는 낱말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한’ 사전(辭典)이다.

사전이긴 사전인데 ‘악마’의 사전이다. 그도그럴것이 이 사전의 단어 풀이는 사악하고, 냉소적이며 발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지와 해학 그리고 풍자가 넘친다. 사전을 ‘읽고’있노라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이 교묘한 이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신랄한’ 비어스가 풀어놓고 있는 단어의 의미를 따라가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랬다.

가난  poverty  명
개혁을 주장하는 쥐들의 이빨을 갈기 위해 고안해 낸 줄칼. 가난을 없애겠다고 제안된 입안(立案)의 횟수는 가난에 고통 받는 개혁주의자들의 머릿수에다가 가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학자들의 머릿수를 보탠 것과 같다. 이 가난의 희생자들은 온갖 미덕을 몸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 번영의 땅이 있을 것이라며 자신들을 그곳으로 데려다주려고 노력하는 지도자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나이  age  명
자신이 시도하기 어려운 악덕을 매도함으로써, 자신이 여전히 즐기는 악행을 상쇄하는 인생의 기간.  


돌봐주다  accommodate  동
은혜를 팔다. 장래에 억지를 쓸 수 있는 기반을 굳히다.   


망각  忘却  oblivion
사악한 인간이 악행을 그치고, 마음이 따분한 자도 안식을 얻는 상태. 명성의 최종 도착지인 쓰레기장. 고매한 이상을 넣어두는 냉동고. 야심만만한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것보다 뛰어난 작품에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 곳. 자명종 시계가 없는 기숙사.

 

무감동의  無感動  apathetic  형
결혼해서 6주일이 지난.  

 

불안  不安  fear  명
가까운 장래에는 완전히 몰락할 감각(感覺).  

 

뻔뻔스러움  impudence  명
대담과 야비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수다  loquacity  명
상대방이 말하기를 원할 때, 자신의 혀를 제어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질환.

 

심통  心痛  distress  명
친구의 성공을 본 것이 원인이 되어 걸리는 질환

 

온정  溫情  cordiality  명
우쭐한 기분을 당장 누리고 싶은 자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간지러운 행동. 
 

절세미인  絶世美人  prodigy  명
그 아버지의 눈코를 물려받지 않은 신생아.

 

지인  知人  acquaintance  명
돈을 빌릴 정도의 안면은 있어도 이쪽에서 꿔줄 정도는 아닌 사람. 상대방이 가난하고 하찮을 때는 고작 얼굴이나 아는 정도라고 말하고, 돈푼이나 있고 유명할 때는 절친하다고 말하게 되는 우정의 정도.

 

친교  親交  intimacy  명
어리석은 자가 신의 섭리에 따라 서로를 파탄내기 위하여 휘말리게 되는 관계.

 

코러스  chorus  명
오페라 가수가 숨쉬고 있는 동안 관중의 넋을 빼놓는 고행승의 울부짖음.

 

타락  墮落  degradation  명
일반인 신분에서 정치 고위직으로 가는 도덕적 사회적 진보 단계의 하나.

 

투표  投票  vote  명
자기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자기 나라를 어렵게 만들고자 자유인이 행사하는 권리.

 

편애  偏愛  predilection  명
환멸의 준비 단계

 

학식  學識  erudition  명
텅 빈 두개골 속에 털어놓은 책의 먼지.

 

허무주의자  虛無主義者  nihilist  명
톨스토이 이외의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러시아인. 이 파의 지도자는 톨스토이.

 

2천 여 개에 달하는 단어들이 거의 이런 식이다. 그렇다고 품위 없는 풀이는 거의 없다. 문학 작품 속에서 사용된 표현을 사전 풀이에 절묘하게 대응시켜, 냉소와 위트 그리고 독설과 해학의 극한을 보여준다.

이제까지 누구도 시도할 수 없었던 풍자와 신랄한 비판이 돋보이는 20세기 최고의 사전이자 언어의 보물상자이다.

부디 악마적인 사전 ‘읽기’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를...


[덧붙임]
1. 풀이가 영단어의 어원과 영미문학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꽤 된다. pun수준의 위트 있는 풀이도 있어 영미 문화에 정통한 사람이 보면 훨씬 더 절묘한 위트를 느낄만하다는 것이 주관적인 생각이다.
2. 고등학교 때 이런 사전을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어려운 단어도 그냥 암기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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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08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붙임에서 확 끌리네 그냥~~
이건 손으로 쓰신 거 맞군요^^

yamoo 2010-09-08 09:43   좋아요 0 | URL
손으로 썼다고 봐주신 마기님께 감솨를~~^^

이 책 꽤 괜찮은 책 같아욤~ 책에 보면 좀 길게 돼 있는 풀이도 있는데요, 서양문학을 관통하는 위트있는 내용이 정말 좋더라구요~ 꼭 한번 일독해 보셔요~

책가방 2010-09-08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감동의)...ㅋ 완전 웃겨요...ㅎㅎㅎㅎㅎㅎㅎ

yamoo 2010-09-08 09:52   좋아요 0 | URL
무감동에 꽂히신 책가방님^^

제가 일일히 다 소개를 못했는데요, 이 사전 속에 있는 의미 풀이들이 재밌는 게 많습니다..고교시절 영어단어장이 저렇게 돼 있다면 정말 좋았겠다라는 생각이에요..ㅎㅎ 무감동의..라는 영단어가 그대로 암기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ㅋㅋ

oren 2010-09-0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책에서도 가끔씩 등장하던 '악마의 사전'을 슬쩍 펼쳐 보여주시니 눈길이 확~ 당기네요.

저는 [학식 學識 erudition 명]과 [심통 心痛 distress 명]의 뜻을 제대로 알게되어 인상깊네요.

제가 조금 더 '인용'해 보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덧붙여 봅니다.
(여기서도 엠브로즈 비어스의 사전 내용이 포함되어 있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인간의 비극 599

여러 시대에 걸쳐 인간의 조건을 관찰했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비극을 지적해 왔다. 사람들은 이웃들보다 낫다고 느낄 때 행복하고, 그들보다 못하다고 느낄 때 불행하다.

그런데, 아! 다른 사람의 눈으로 행복을 들여다보는 것은 얼마나 씁쓸한 일이냐!
- 윌리엄 셰익스피어(《뜻대로 하세요》5막 2장)

행복 [명사] 타인의 불행을 생각할 때 생겨나는 흡족한 기분.
- 앰브로즈 비어스

성공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실패해야 한다.
- 고어 비달

곱사등이가 즐거워할 때는 언제인가? 다른 사람의 등에서 더 큰 혹을 보았을 때다.
-이디시 속담

(이 책의 출처도... 지겹긴 하지만... 스티븐 핑커의 <마은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입니다.)

비로그인 2010-09-08 14:25   좋아요 0 | URL
아~~셰익스피어....
단 한마디의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군요.
오렌님이 댓글에도 추천~~~

yamoo 2010-09-08 21:38   좋아요 0 | URL
음...셰익스피어도 비어스와 비슷한 표현을 쓰는군요!ㅎ

사전에 행복에 대한 풀이 그대로 있습니당~~

근데, 진짜 스티븐 핑커의 책을 얼마나 읽으셨길래 이런 인용이 가능한가욤?? 대단!
아, 근데요...인간의 비극 599..이게 뭐에요? 인용하신 부분에 항상 있어 궁금해서요~

마녀고양이 2010-09-08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움베르트 에코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 생각나는 책이군요.
솔직히 저는 한바퀴씩 꼬아놓은 말이나 책, 즉 말장난을 싫어해서,
반 읽다가 치워버렸습니다만..... ^^
흥미는 있네여.

그리고, 오렌님의 댓글 역시....... ^^

yamoo 2010-09-08 21:42   좋아요 0 | URL
에코도 슬쩍 뒤짚는 표현들을 많이하지요..ㅎㅎ <바보들에게~>이 책은 잼나게 읽었습니다만..ㅎㅎ 근데, 말장난 같은 표현은 별로 없구요...제가 기억하기론 엎어치고 메치는 내용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읽다가 때려친 책들을 주워사 다시 읽어보면 2가지 결론이 나옵니다..다시 때려치든가, 아니면 재미의 재발견 이든가...후자가 간혹 나오긴 해요..ㅋㅋㅋ

양철나무꾼 2010-09-08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류 좋아해요.
젤 먼저 마기님이 생각났다는~~~
이젠 그런 류의 시 안쓰시남여?

저도 다른 책에서 종종 봤던 내용이 있네요~
암튼,장바구니에 쏘옥~입니다.

비로그인 2010-09-08 14:25   좋아요 0 | URL
내가 뭐, 응?
푸히히~

yamoo 2010-09-08 21:44   좋아요 0 | URL
오호~ 마기님이 그런 시를 쓰셨다구요?
웅~~~근데, 요즘은 왜 안쓰실까나~~~ㅎ

나무꾼님, 읽으시고 리뷰남겨 주세여~~헤~~

마기님, 시 쓰셔야종~~기대기대~~^^

oren 2010-09-09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븐 핑커의 책을 얼마나 읽으셨길래 이런 인용이 가능한가욤? 인간의 비극 599..이게 뭐에요? 인용하신 부분에 항상 있어 궁금해서요]

---> 정확하게는 '두 번' 정독했구요. 최근에 별도로 (언제든지 리마인드하거나 혹은 인용하기 쉽도록) 밑줄친 부분을 중심으로 '요점 정리'까지 상당 분량을 타이핑해서 갈무리해놨기 때문에... 어떤 유형의 문제(?)가 나와도 쉽게 해답을 찾아 쓸 수가 있을듯 싶어요..ㅎㅎ(추후에도 불쑥 불쑥 인용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시기를 '미리' 청합니다.)

'인간의 비극'은 제가 임의로 작은 타이틀을 붙여본 것이구요. '599'는 책의 해당 쪽수랍니다. 책 내용의 특정 부분만을 인용하게 되면 가끔씩 뜻이 왜곡될 수도 있겠다 싶어, 혹시라도 전후좌우의 문맥을 찾아 읽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라도 쪽수는 밝혀두는 게 좋을 듯 싶어서요...



yamoo 2010-09-09 21:41   좋아요 0 | URL
아하~ 그렇군요..핑커의 책은 엄청 두껍던데..

저는 블로그에 오렌님이 하셨던 작업을 했다가 귀찮아서 그만 뒀었어요..근데, 다시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불~끈! ㅎ

언제나 좋은 인용을 해 주셔서 넘 감사드립니다~

pjy 2010-09-09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인'에서 빵 터졌습니다ㅋㅋㅋ

yamoo 2010-09-09 21:40   좋아요 0 | URL
하하, 그 부분도 인상깊죠..^^

김용의 소오강호를 보면 사대악인이 나오잖아요...그 사대악인이 하는 말이 아마도 저럴거에요~ pjy님도 재밌게 보실수 있을 거 같아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