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니엘 그린 -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 위인들의 어린시절
하워드 페캄 지음, 오소희 옮김 / 리빙북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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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다니엘 그린의 어린 시절을 주로 다루고 있는 위인전이랍니다. 나다니엘 그린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인은 아니죠. 하지만, 미합중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주요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워싱턴 장군의 오른팔 격이라고 보면 된답니다.

 

이 나다니엘 그린은 메노나이트 교인입니다. 메노나이트는 재세례파(유아세례를 부정하고 다시 세례를 받아 이렇게 불립니다)의 한 종파로, 재세례파는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의 한 종파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양편에게 엄청난 박해를 받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다른 대륙으로 이주를 했던 종파이기도 합니다. 메노나이트 교인의 많은 수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땅으로 이주를 했답니다. 나다니엘 그린은 바로 그 후예인 거죠.

 

이런 메노나이트의 여러 특징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극단적인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실천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결코 싸움을 하지 않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그래서 나다니엘 역시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 앞에서도 다투기보다는 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다니엘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무조건 피해야만 할까? 상대가 나쁘다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나다니엘은 동생이 맞는 모습에 상대를 때려눕히기도 합니다. 생애의 첫 주먹다짐이었죠.

 

부모님의 모든 가르침에 나다니엘은 순종하며 잘 따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왜’ 그래야 하는지 자신에게 묻곤 합니다. 그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질문을 하곤 합니다. 더 옳고 좋은 길이 있지 않을까 질문하는 거죠.

 

이 위인동화에서는 바로 이 점을 우리는 봐야 합니다. 나다니엘 그린은 결코 반항하지 않습니다. 순종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 없이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결국 나다니엘로 하여금 독립을 위해 군인이 되게 만듭니다.

 

극단적 평화주의자인 메노나이트 교인이 군인이 되어 전투에 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확신에 따라 옳은 일을 따르려는 그 자세가 나다니엘로 하여금 군인이 되게 만들고, 결국엔 독립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 아이들 역시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들의 가르침에 반항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옳은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이 없다면, 옳지 않은 일에도 순종하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이것이 이 책에서 꼭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순종은 좋은 것이지만,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순종이란 말을 참 많이 합니다. 순종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통과하지 않은 순종은 도리어 범죄의 동조자가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 없이 그저 순종만을 강요하고 가르칩니다. 실제 교인들은 그런 순종에 길들여지게 됩니다. 양 같은 교인이 되는 거죠. 좋은 것 같지만, 실상은 더 큰 문제를 내포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나다니엘 그린은 순종하며, ‘왜’라는 질문을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의 부제가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입니다.

 

또 하나를 생각해본다면, 나다니엘은 어린 시절 집안이 운영하던 대장간에서 사고를 당해 평생 다리를 절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가지고도 군인이 되고, 장군이 됩니다. 더 나아가 초강대국이 되는 미합중국의 독립을 이끌어내는 주역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문제들이 내 삶에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육체적 장애일 수도 있고, 삶의 고통스러운 상황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 모두가 이런 용기를 붙잡을 수 있다면 좋겠네요.

 

『나다니엘 그린: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 이 책은 표지가 참 옛스러워 쉽게 손이 가지 않을 책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참 좋답니다. 아이들이 꼭 읽어보면 좋을 그런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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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거나 먹거나 - 실학자 이덕무의 비밀 친구 이야기
김주현 지음, 문종훈 그림 / 학고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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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들 가운데에는 책을 너무나도 사랑하던 분들이 계셨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분이 이덕무란 분이랍니다. 이분은 책읽기를 너무나도 좋아하셔서, ‘책만 보는 바보’라고 불리곤 했답니다. 이를 유식하게 표현하면, ‘간서치(看書痴)’입니다. 말 그대로 ‘책만 보는 바보’입니다.

 

이처럼 책을 사랑하던 이덕무 선생이 어느 날 보니 책 좀벌레들이 자신의 책을 갉아 먹은 것 아닙니까? 이 일로 화가 잔뜩 났던 이덕무 선생은 문득 생각해보니, 책벌레가 향기로운 글자만을 갉아 먹은 것이 기특하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과연 이렇게 좋은 글자를 갉아 먹은 벌레에게선 얼마나 좋은 향이 날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죠.

 

여기까지가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작가는 그런 ‘간서치’ 이덕무 선생과 책벌레간의 이야기를 상상 속에서 만들어냈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예쁜 동화, 『책, 읽거나 먹거나』입니다.

 

책을 먹고 사는 좀벌레는 자신의 호를 ‘반와’로 삼았답니다. ‘반와’는 ‘성균관 개구리’란 뜻인데, 성균관 선비들이 언제나 밤낮으로 책만 읽는데, 그 읽는 소리가 마치 와글와글 개구리 소리와 같다 하여 부르는 말이랍니다. 책벌레는 바로 이 이름이 좋아 자신의 호로 삼았답니다. 무슨 벌레에게 호가 다 있냐고요? 그러니까, 동화죠. 동화의 세계에선 일어나지 못할 일이 없답니다.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거든요.

 

아무튼 이 반와 선생은 책을 갉아 먹는데, 글씨 중에서도 맛난 글씨만을 갉아 먹는답니다. ‘목란(木蘭)’이나 ‘추국(秋菊)’과 같은 향기로운 글자를 말입니다.

 

한편 책읽기를 무엇보다 좋아하는 간서치 이덕무 선생은 자신의 책을 갉아먹은 못된(?) 벌레들을 찾다가 결국 책벌레들 가운데 아빠 벌레인 반와 선생과 만나게 된답니다. 한 쪽은 책 읽기를 가장 좋아하는 분이고, 또 한 쪽은 책 먹기를 가장 좋아하는 좀벌레죠. 한쪽은 글자를 지켜내야 하는 입장이고, 또 한쪽은 글자를 먹어치워야 하는 입장이랍니다. 하지만, 그 둘은 만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친구가 되어버렸답니다.

 

친구가 된 이후에 반와 선생에게 걱정이 많네요. 왜냐하면 자신은 글씨를 갉아 먹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가난한 살림에 책을 엄청 좋아하는 친구의 책이 상하게 되니까요. 이런 상황을 과연 어떻게 해결 할까요?

 

이 동화 속에서 친구가 된 두 책벌레, 반와 선생과 간서치 선생은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글자를 먹을까,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까 생각하며 마음이 설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친구들은 어떤가요? 그리고 우리 부모님들은요? 과연 책을 읽을 일에 마음 설레나요? 부모님의 습관이 자녀들의 습관이 되는 것 아시죠? 우리 함께 반와 선생과 간서치 선생처럼 책을 읽거나 먹거나 하는 건 어떨까요?

 

또 한 가지, 책좀벌레 반와 선생이 옮겨간 곳은 바로 마을 최도령이랍니다. 왜냐하면 최도령은 과시욕은 있어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데, 책을 읽진 않는답니다. 그래서 책벌레에겐 최적의 조건이죠. 맛난 책들은 많은데, 주인이 책을 펼치지 않으니, 마음껏 글씨를 갉아먹으면 되니 말입니다.

 

최도령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네요. 저에게도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무척 많거든요. 그 책들을 야금야금 먹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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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을 달리는 수피아 숨쉬는책공장 너른 아이 1
곽영미 글, 율마 그림, 남영은 감수 / 숨쉬는책공장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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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을 달리는 수피아』는 여성 할례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에 대한 그림책이랍니다. 그래서 그림책이지만, 저학년들이 읽기에는 어쩌면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이 함께 읽고, 지구 반대편에서 ‘전통’이라는 불합리함 속에서 고통당하는 여성들에 대한 아픔을 함께 공유해 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그림책의 주인공 수피아는 여덟 살이고 케냐에 살고 있답니다. 비록 궁핍함 가운데 있지만,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고 있는 소녀랍니다. 그런 수피아의 언니 아미아는 이제 곧 진짜 여자가 된답니다. 그런데, 진짜 여자가 되기 위해선 할례를 받아야만 한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랜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언니는 그 일이 두렵지 않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언니의 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있답니다. 언니가 할례 받던 날, 몰래 뒤따라갔던 수피아는 멀리서 들려오는 언니의 비명소리에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수피아는 자신은 커서 결코 할례를 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어른이 된 언니는 결혼도 할 수 있답니다. 두려움 가운데서도 할례를 감수한 것은 할례를 받아야 어른이 되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언니는 늙은 아저씨와 결혼하고 마네요. 아빠가 염소와 설탕을 받아 버렸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모습에 수피아는 결심합니다. 자신은 달라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수피아의 결심처럼 많은 이들의 삶이 달라지면 좋겠네요. 전통이라는 괴물에 의해 고통당하는 이들이 없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고, 여성들이 약간의 재물에 팔려나가는 그런 모습도 이젠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도 수피아는 외친답니다. “난 엄마, 아빠를 사랑해. 케냐를 사랑해. 그리고 여자인 나를 사랑해.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이 책을 읽고 아이들과 함께 잘못된 전통에 대해, 그리고 보장받지 못하는 인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겠네요. 책 뒤편에 나오는 여성 할례에 대한 설명을 함께 읽고 느낌을 말해보는 것도 좋겠고요.

 

수피아의 외침이 거짓 최면이 아닌, 진정한 외침이 될 수 있다면 좋겠네요.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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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전 빛나는 우리 고전 그림책 시리즈 8
조혜란 글.그림, 권순긍 자문 / 장영(황제펭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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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냥년이란 부끄러운 말이자 욕으로도 쓰였던 이 말이 만들어진 건 바로 병자호란 때랍니다.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우리 조선을 쳐들어온 전쟁이랍니다. 이 전쟁은 당시 나라를 지켜내야 할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무능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입니다. 당시 모든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남자들이었죠. 그러니 이 전쟁은 결국 남자들의 무능에 의해 벌어진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전쟁의 피해는 항상 가장 약한 사람들이 입게 된답니다. 그래서 당시 약자들인 여성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죠. 특히, 수많은 여성들이 적군에게 포로로 끌려갔답니다.

 

그렇게 남자들의 무능으로 끌려갔던 여성들이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기다리던 건 따뜻한 환대가 아닌, 부끄러움과 수치의 눈길뿐이었답니다. 여기에 더하여 “환향년”이라는 부끄러운 딱지를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달았답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참 비겁한 행동들이죠.

 

바로 그런 부끄러운 시대, 부끄러운 사건을 배경으로 기록된 책이 『박씨전』이랍니다. 물론, 새롭게 쓰여진 『박씨전』이고요.

 

박씨는 금강산의 신선 박처사의 딸이랍니다. 그런 그녀가 이 대감 댁에 며느리로 들어가게 된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박씨는 못나 터진 바윗덩이였답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 박씨가 못마땅했죠. 하지만, 시아버지 이 대감은 그런 아들을 꾸짖고, 며느리를 위해 별당을 지어준답니다.

그리고 그곳에 박씨는 복숭아나무들을 심는답니다. 못난 박씨이지만, 박씨에는 남다른 능력이 있네요. 시아버지가 입궁할 때, 입을 조복을 멋지게 만들기도 하고, 남편에게 건네준 연적은 신비한 힘이 있어, 답을 술술 쓰게 하네요. 아내 덕에 과거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남편은 아내에게 감사해 한답니다. 이런 남편의 모습에 바윗덩이 아내는 허물을 벗고, 원래의 예쁜 모습을 되찾았답니다.

 

이처럼 신비한 능력을 가진 박씨는 현명해서 청나라가 쳐들어올 것을 예견하기도 하네요. 자객을 무찌르기도 하고, 전쟁이 나자 적군 장수를 무찌르기도 한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할 때, 그들을 보살핀 사람도 박씨랍니다.

이처럼 이 이야기는 여성 박씨를 초인적인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답니다. 그건 바로 남성들에 의해 상처받고, 버림받은 여성들, 남성들에 의해 오랜 시간 멸시받던 여성들에게 도리어 이처럼 커다란 능력이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겠지요. 작가는 남성지배이데올로기 아래에서 고통당하였던 여성들을 재조명하고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와 성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무시하거나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오랜 세월동안 남성들에 의해 여성들이 차별을 받았으니, 이제는 여성들의 권위가 바르게 세워질 수 있다면 좋겠네요. 물론, 그 역차별도 걱정스럽긴 하지만 말이죠.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기에 여성들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죠. 하지만, 여전히 실제 삶 곳곳에서는 여성들이 차별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랍니다. 어느 누구도 성의 구분을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중받게 된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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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족의 역사 북멘토 그래픽노블 톡 1
리쿤우 지음, 김택규 옮김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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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내 가족의 역사』는 전쟁에 대한 장편만화다. 작가는 이 책에서 항일전쟁(중일전쟁의 중국식 명칭)에 대한 단편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골동품 시장에서 우연히 일본과 청나라가 싸우는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인이 그린 39컷의 그림. 자신들 중국을 침략한 적국의 시각으로 전쟁을 접근한 그림을 통해,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 즉 청일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일본은 그 전쟁을 침략전쟁이 아닌, 정벌전쟁이라 이해했던 것.

 

정벌과 침략의 차이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침략에 대해선, “남의 나라를 침범하여 영토를 빼앗음”이라 되어 있다. 반면, 정벌은 “다른 나라나 죄 있는 집단을 무력으로 침”이라 되어 있다. 그러니 같은 의미인 듯싶지만, 많은 차이가 있는 다른 의미인 것. 침략전쟁이라면, 탐욕에 의해 벌인 더러운 전쟁인 반면, 정벌전쟁이라면, 상대가 죄가 있어 무력으로 혼을 내준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즉, 청나라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하였기에 자신들이 정벌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시키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정벌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겨갔다. 결국 침략전쟁이었던 것. 그리고 이때 맛본 것을 잊지 못해, 30년 뒤 다시 중일전쟁을 벌이게 된 것.

 

주인공은 골동품점에서 발견한 이처럼 귀중한 그림을 빌려 보게 되고 나중에는 중일전쟁 당시의 일본기자들이 찍은 수많은 사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수많은 사진들을 다시 옮겨 찍고, 그 사진들을 정리하며, 주인공은 전쟁에 대해 돌아보게 되며, 아울러 그 전쟁이 자신과 무관한 먼 역사의 한 페이지만이 아닌, 바로 본인의 장인어른의 다리를 앗아갔던 역사, 가족의 역사였음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작가는 이렇게 전쟁을 자신 가정의 역사와 연관 짓는다. 그래서 책 제목이 『내 가족의 역사』인가 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장편만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아마도 전쟁은 결코 나와 별개의 것이 아님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전쟁의 아픔은 바로 내 가족의 아픔이다. 아울러 이것은 전쟁을 경험한 모든 중국인들의 아픔이다. 더 나아가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아픔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전쟁을 경험한 분들보다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더 많은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쟁은 나와 관계가 없는 역사책에서나 보는 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 우리들에게 작가는 그 아픔의 역사가 결코 나와 관계없는, 그저 역사책 속의 지나가버린 시간들이 아님을 말한다. 무관한 듯싶지만, 이처럼 바로 나 자신의 가족의 역사이기도 하며, 친지의 가족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이미 지나가버린 케케묵은 책속의 한 줄 내용에 불과한 것으로 전쟁을 생각하는 오늘 우리들을 향한 작가의 사자후가 아닐까?

 

아울러, 작가는 이처럼 지난 역사를 끄집어내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해묵은 감정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억을 되새기는 것이다. 건드릴 수 없는 상처가 가장 아프다. 중국인도 그렇고 일본인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는 지나간 역사, 지나간 아픔을 다시 끄집어냄으로 오히려 중국과 일본 간의 해묵은 감정을 풀기를 원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 다물고 모르쇠로 일관해서는 서로간의 해묵은 감정이 풀릴 리 만무하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와 일본의 해묵은 감정이 해결되었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변질되고 악화되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작가의 말처럼,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 그 일이 우리의 아픈 상처를 건드는 일이라 할지라도, 다시 끄집어냄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해결하고, 감정이 정리되지 않을까? 작가의 장인이 당시 일본군의 민간인 폭격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 오랫동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큰 돌덩이를 내려놓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 민족은 언제쯤 이 돌덩이를 내려놓을까? 일본의 성노예문제가 나와 상관없는 역사책 속의 이야기로만 이해되는가? 아니다. 바로 우리 가족의 역사, 우리 할머니들의 아픈 이야기이다. 작가의 장인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듯, 우리 할머니들의 짐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일을 위해 작가의 말처럼 우리 역시 자꾸 아픈 역사를 끄집어내야 하지 않을까? 비로 그 일이 누군가를 부끄럽게 하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할지라도, 끄집어냄으로 상처를 진정으로 치유해 나가는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길 소망한다.

 

[ 북멘토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

[ 한우리 북카페 서평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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