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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 ㅣ 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평점 :
첫 장면, 아기를 안은 채 소녀를 데리고 가는 고된 행군. 강렬한 이미지와 압축적인 표현들.
이 얇은 책이 실린 두 편의 단편 중 첫 번째인 '숄'을 읽으며 계속 떠오른 건 <빌러비드> 였다. 그 때문에 자꾸만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로사가 흑인 이미지로 연상되었고... 아니야! 그거 아니야. 유대인, 유대인.. 하며 애써 이미지를 수정했지만, 결국 이 소설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빌러비드>에서 세서가 겪었던 가혹한 여정과 딸의 죽음은 <숄>에서 로사가 겪은 일과 유사하다. 비극적이고, 잔혹하다.
이어지는 두 번째 단편은 몇십 년 후, 홀로코스트가 끝나고 미국으로 망명한 로사와 스텔라(로사의 조카, 행군을 함께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로사는 늙었고 플로리다의 무더위에 튀겨져 껍데기만 남은 듯한 상태로 일상을 이어간다. 뉴욕에 사는 스텔라가 보내주는 돈으로 월세와 생활비를 내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그녀. 그녀가 뉴욕을 떠난 이유는 운영하던 골동품 가게를 스스로 때려 부쉈기 때문이다. 때려 부순 이유는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가? 바로..
로사는 딸 마그다를 둘러쌌던 숄, 마그다의 목숨을 연명시켜 준 마법같은 숄을 등기로 보내 달라고, 스텔라에게 부탁한다. 숄이 있으면 마그다는 살아난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아기, 결코 독일 병사에게 강간당했을 때 생겼을 리 없는 아기, 결코 수용소에서 죽었을 리 없는 아기... 로사는 마그다에게 편지를 쓴다. 뉴욕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눈부신 딸에게.
펜을 잡는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작고 뾰족한 막대기에 지나지 않은 그것이 상형문자의 웅덩이를 흘린다. 기적처럼 폴란드어를 말하는 펜. 혀에 채워졌던 자물쇠가 제거되었다. 그럴 때가 아니면 혀는 이와 입천장에 사슬로 묶여 있다. 살아 있는 언어에 푹 빠진다는 것.
갑자기 이 청결함이, 이 능력이 샘솟는다, 하나의 역사를 만들고, 말하고, 설명하는 이 힘이 솟아오른다. 되찾고 유예하는 힘!
거짓말하는 힘.
마그다의 숄이 든 상자는 아직도 탁자 위에 있었다. - 70,71쪽
그런 로사 앞에 우연히 나타난 퍼스키라는 남자는 바르샤바 출신의 부유한 노인이다. 같은 바르샤바 출신이라며 반가워하는 그에게 로사는 "당신이 겪은 바르샤바는 내가 겪은 바르샤바와 다르다"며 선을 긋는다. 그는 일찌기 미국에 와 홀로코스트를 경험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홀로코스트를 직접 경험한 유대인과 지켜본 유대인이 같을 수 있겠는가?
로사는 그녀의 삶을 도둑들에게 빼앗겼고, 생각 속에서 - 숄과 마그다 - 살아갈 뿐이다. 그 안에는 누구도 침투할 수 없다.
"아니, 아니에요. 사람은 가끔 혼자 있을 필요가 있죠."
"너무 많이 혼자 있다는 건, 너무 생각이 많다는 거요." 퍼스키가 말했다.
"삶이 없는 사람은," 로사가 대답했다. "자기가 살 수 있는 데서 사는 거죠. 가진 게 생각뿐이라면, 생각 속에서 사는 거고요." 로사가 대꾸했다.
"댁의 삶이 없다고?"
"도둑들이 빼앗아갔어요." - 45쪽
'숄'이 홀로코스트의 잔혹함을 '홀로코스트', '나치' 등의 직접적 언급 없이 이미지적으로 강렬히 재현하였다면, '로사'는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 사이의 분열을 보여준다. '그때 그곳에 있었던 이'(로사,마그다)와 없었던 이(퍼스키), 이제는 다 잊고 미래를 바라보고 싶어하는 이(마그다)와 과거를 끊임없이 되살려 곱씹어야만 하는 이(로사), 이들은 더 이상 같은 폴란드인, 같은 유대인이라는 말로 한데 묶일 수 없다.
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철망을 설치해 외부인 출입을 금지하는 호텔에 분노하고, 호텔 지배인이 '그때 그곳에 없었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화를 쏟아내는 로사. 그녀는 언제까지 그 지옥에 갇혀 있어야 할까? 숄이 자아내는 마그다의 환상은 마치 약물이 주는 환각처럼 그녀에게 현실을 잊게 해주지만, 로사를 '인간'이 아닌 '생존자'라 칭하면서 인터뷰를 요청하는 대학교수의 편지는 그녀를 지옥으로 떨어뜨린다.
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반복된 패턴에서 로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약간의 희망을 보여주며 작가는 끝을 낸다.
강렬하기는 '숄'이었지만, 서로 다른 입장의 세 유대인을 보여준 '로사'는 더 흥미로웠다. 앞으로 숄을 볼 때면 이 작품 떠오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