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에도 여전히 비의료인 지식인들은 ‘성교육‘에 대해 발언권을 가졌으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의학적 전거를 동원했다. ‘불순혈설‘을 둘러싼 논쟁은 지식인 그룹 내부에서의 담론의 혼재를 잘 보여준다. ‘불순혈설‘은 여성이 한 명 이상의 남성과 성관계를 하면 혈액 중에 이미 성관계를 한 남성의 혈액이 남아 ‘순혈한 혈통‘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이론으로 1920년대 조선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

1934년 《조선일보》 상담코너 "엇지하리까?"란에는 '불순혈설‘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연이 등장한다. 사연의 주인공은 본처와이혼하고 "과부장가"를 든 29세의 남성으로, 그는 재혼한 아내가 이미 한 번 결혼한 경험이 있는 "과부"로 정조를 파괴한 일이 있다는 점 때문에 이것을 항상 "더럽게 생각"해 불만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고통은 최근 《조선일보》 학예면에 실린 ‘불순혈설‘ 관련 기사를 읽은 후로 한층 더 심해졌고, 이에 대응책을 질문하기 위해 편집부로 사연을 보낸 것이었다. 

(...)

이 청년의 질문에 대해 상담자는 준엄한 꾸짖음으로 답했다.
왜 당신도 한 번 장가를 들었던 남자인데 과부된 부인만을 흠으로 잡으십니까? (…) 옛날의 썩은 정조를 버리고 새로운정조론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서양 학자 중에서 남자의 정충이 화학 작용을 일으키고 그 화학 작용이 오래 보전되어 새 남편에게서 낳은 아이들이 전 남편의 모습을 닮는 수도 있다고 떠든 사람이 있습니다. 본지에서는 그말이 하도 재미있으니까 그저 그런 학설도 있다고 소개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학설을 반대하는 학자가 더 많습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도 자세히 모르는 학자님네의 잠꼬대에 속아서 당신의 전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과부장가 드는 사람이 당신 이외에도 좀 많습니까? 왜 당신 혼자만이 불안을 가지고 고통을 느낄 것은 무엇입니까?? - P185~
187


'불순혈설'이라니 ㅋㅋㅋ 넘 어이없고 황당한데, 상담자의 준엄한 꾸짖음이 통쾌했다. 1930년대에도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은 있었던 것이다!! 

이책 재밌는데, 차에 놔두고 하도 찔끔찔끔 읽었더니 아직도 읽는 중이다.. 조만간 마무리를 해야겠다. 




물론 남자들이 하는 짓은 그게 무엇이든 여자들이 하는 짓보다 중요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확실히 남성 동성애자가 레즈비언보다 사회적·법적·경제적으로 보다 공공연하게 처벌받아왔던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남성의 성적인 공격성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남성의 신체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남성 동성애는 이 두 가지 형태의 힘이 강력하게 결합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말하자면 남성 동성애자는 보다 허약하거나 어린 남성에게 이런 힘을 이용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의 위협이 대다수 여성에게는 일상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성애자 남성은 그들의 신체적인 힘과 성적인 힘을 이용해 모든 여성, 그중에서도 특히 어린 여성을 위협한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서는 이성애자 남성들이 그런 위협을 가한다고 해서 그들을 처벌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 P361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치료사가 말하더군요. "자신을 설득해봐요. 다른 사람의 손을 만져봐요. 남자의 손길이 닿는 걸 받아들여봐요. 남자들이 당신을 죽이기라도 하겠어요? 남자들이 당신을 죽이진 않아요!" 그래서 내가 대답했어요.
"난 정말로 남자들이 무서워요. 알잖아요, 난 남자들에게 당했다고요. 내 인생에서 정말 고통스러운 사건이었어요." 심리치료사가 설득했어요. "그래도 남자들이 당신을 죽이진 않아요, 그들이 당신을 죽이진 않는다고요."
 - P377


아니, 이 치료사야. 무슨 근거로 남자들이 당신을 죽이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것이냐. 세상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전 남친/남편, 현 남친/남편, 얼굴만 아는 남자, 그냥 지나가던 남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는지 너는 정말 몰랐느냐.. 

<여성과 광기>, 인터뷰 읽는 재미가 있다. 인용한 부분은 '레즈비언'을 다룬 장. 




그런데 엉뚱하게도 나는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성적 비하와 조롱을 보면서 ‘수지 김 사건‘이 떠올랐다. 노동자든, 살인의 피해자든 여성이면 그가 노동자이거나 살인의 피해자라는 것은 어느새 무시되고, 여성이라는 이유 그 자체로 쉽게 모욕당하고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다. 1977년대의 여성 노동자들은 많은 경우 집안의 살림 밑천 노릇을 하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 상경한 공장 노동자가 많았다. 입 하나 줄이는 것은 덤이었다. 공장노동자로 일하다, 돈을 더 벌기 위하여 유흥업소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집안에 돈이 필요할 때는 ‘살림 밑천'이나 '효녀’라는 고상한 표현으로, 국가경제를 살리는 데 노동력이 필요할 때에는 산업 역군으로 표현되었지만, 결국은 ‘공순이(못 배우고, 험한 일 하는 얕잡아 봐도 되는 여자)‘였고, 행실을 바로 하지 못한 술집 여자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어린 여공들이 폐병에 걸려가며 만들어내던 물건들을 팔아, 기지촌 여성들이 ‘양공주‘ ‘양색시’ 소리 들어가며 벌어들인 달러를 밑천 삼아 이룩한 번영인데, 그것을 누리면서 돌려주는 것은 조롱과 멸시였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왜 싸우고 있는지, 왜 죽었는지 진실은 어느새 중요하지 않게 된다. 여자라는 그 이유 하나로. - P236, 237


남편에게 살해당한 여자. 그러고도 간첩의 누명을 써야만 했던 여자, 수지 김. 

이 책을 쓴 김수정 변호사는 마지막 꼭지에서 한국도로공사의 톨게이트 요금 수납 노동자들의 투쟁과 수지 김 사건을 연결하면서, "헌신을 했든, 투쟁을 했든,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든 '여성'이라는 자체, 그것이 문제다."(243쪽)라고 지적한다. 

"여성을 위한 변론은 끝나지 않았다."는 짧은 후기가 더욱 감동적인 울림을 준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2-01-19 13: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신체적으로 죽이지 않으면 된다니ㅋㅋㅋ읽었던 내용이지만 새삼 놀랍습니다. 이런 의식이 은근히 통용되어 왔던것으로 보여요. 우리나라에서도요. 성범죄나 가정내 폭행에 대해서 말이죠. 심리적 상처와 죽음에 관해서 그만큼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겠죠.ㅠ

독서괭 2022-01-25 13:22   좋아요 1 | URL
아, 전 이거 읽고 ˝진짜로 죽이는데?˝라고만 발끈했는데, 신체적으로 죽이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죽이는 것에 대해서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점이 더 문제로군요! 미미님 댓글 보고 큰 깨달음!

새파랑 2022-01-19 13: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 상담코너 사연은 너무 어이없네요 ㅋ 저런걸 진지하게 믿다니 ~~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부당대우를 받는게 언젠가는 없어지길 바래봅니다~!!

독서괭 2022-01-25 13:23   좋아요 2 | URL
어이없기도 하고 좀 재밌기도 합니다. 무지와 편견이 만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이 이 책에 많이 나와요. 언젠가는 없어지겠죠?^^

기억의집 2022-01-19 1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저 치료사 도대체 자격증은 어떻게 받은 건가요? 화 나네요. 죽이는 거죠. 영혼을 다 죽였는데.. 개소리 하고 앉아있네요!!

독서괭 2022-01-25 13:25   좋아요 1 | URL
기억님도 영혼을 죽이는 걸 문제삼지 않는 것이 문제임을 캐치하셨군요! ㅎㅎ 레즈비언이 될 바에는 ˝죽이지는 않는˝남자랑 고통받으며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나 봐요.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부정적인식이 그렇게나 컸던 것 같습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