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NOON 세트 - 전10권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외 지음, 황현산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얇은 책에 이만큼 플래그를 붙였다는 건 뭐 거의 밑줄 투성이라는 뜻... (밑줄은 안 그었다) 

재독하며 느낀 바, 울프는 글을 참으로 아름답게 쓰는 사람이다(번역이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성과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과 공간을 만들어 그녀가 보내는 하루를 묘사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무척 소설가답다고나 할까. 

이 가상의 여성은 옥스브리지(가상의 대학)의 잔디에 앉아 있다가 "경악과 분노로 얼룩"(11쪽)진 교구 직원에 의해 쫓겨나고, 도서관에 들어가려 했으나 "숙녀들은 칼리지 연구원과 동행하거나 소개장을 구비해야 도서관에 입장할 수 있다"(13쪽)면서 제지당한다. 대학에서 만족스런 오찬을 마친 그녀는 전쟁 전과 후의 시의 변화를 생각하며 퍼넘(여성들의 입학을 허용한 칼리지로 보임)으로 돌아간다. 퍼넘에서의 만찬은 매우 실망스럽다. 그녀는 메리 시턴과 함께 대우받지 못하는 형편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며,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거슬러 고찰한다.


모든 여성이 오랜 세월 일하고도 2천 파운드를 벌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자, 우린 여성의 지독한 빈곤에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들은 우리에게 부를 남겨 주지 못하고 뭘 했을까요? 

(...) 우선 그들이 돈을 버는 게 불가능했고 둘째로 그게 가능했다고 해도 그들이 번 돈을 소유할 권리를 법이 허용치 않았으니까요. 시턴 부인이 잔돈푼이나마 자기 돈을 갖게 된 것은 48년밖에 안 됩니다. 이전의 장구한 세월 동안 돈은 남편의 소유였을 겁니다.     - 31, 33쪽

이제 그녀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대영박물관으로 간다. 그녀는 여성에 대한 책을 찾아보다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무척 놀란다. "놀랍고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그 성이, 말하자면 여성이 (...) 여성이 아니라는 점 외에는 딱히 아무 자격도 없는 남성들의 관심을 끈다는 사실이었습니다."(38쪽) 책을 한아름 가지고 와 읽고 정리해보던 그녀는 탄식한다. "왜 새뮤얼 버틀러는 <현명한 남자들은 여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할까요? 현명한 남성들은 바로 그것 외에 다른 말은 안 하는 게 분명한데요."(41쪽) 


정말 안타까운 것은, 현명한 남성들은 여성들에 대해 각기 다른 생각을 한다는 점입니다.

(...)

여성들은 교육받을 능력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나폴레옹은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닥터 존슨은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여성들은 영혼을 가졌을까요, 아닐까요? 어떤 야만족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다른 이들은 여성이 반쯤 신성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이유로 숭배합니다. 어떤 현자들은 여성의 뇌가 더 깊이가 없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의식이 더 깊다고 주장합니다. 괴테는 여성들을 존경했고, 무솔리니는 여성들을 경멸했습니다.  

 - 41~43쪽

그녀는 "여성의 정신적, 도덕적, 육체적 열등성을 다룬 걸작을 쓰는"(44쪽) X교수의 분노한 모습을 상상하며, 대체 그 분노는 어디서 오는가 생각한다. 그리고는 "교수가 여성의 열등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주장했을 때, 그는 여성의 열등성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성에 주목했던"(48쪽) 것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여성들은 수백 년간 남성에게 실물의 두 배를 비춰 주는 마법과 기분 좋은 능력을 가진 거울 역할을 해왔"다고.(50쪽) 어디를 가든 "난 여기 모인 사람들의 절반보다 우월하다"(51쪽)며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이제 그녀는 식당에서 식대를 계산하다가 자신이 죽은 숙모로부터 유산을 받아 평생 연간 5백 파운드를 얻게 되었음을 상기하면서, "고정 수입이 가져오는 성격 변화"(53쪽)를 놀라움에 차 바라본다. 5백 파운드라는 안정적인 수입이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55쪽)를 주었다는 것이다. 


3장에서 그녀는 안정적 수입이 주는 성격 변화가 소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밝힌다. 영국의 역사 속에서 실제 존재했던 여성이 겪은 현실과, 시와 희곡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 사이에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다.


그리하여 상당히 특이하고 복합적인 존재가 등장합니다. 상상 속에서 그녀는 가장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완전히 미미합니다. 그녀는 시가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하지만, 역사에는 부재합니다. 소설에서는 그녀가 왕과 정복자의 인생을 지배하지만, 사실은 아무 남자의 노예였고 그의 부모가 그녀의 손가락에 억지로 반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문학에서는 일부 가장 영감을 주는 표현들, 일부 가장 심오한 사유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녀는 거의 읽지도 쓰지도 못했고, 남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 62쪽

그녀는 셰익스피어에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누이, 주디스가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고 제안한다. 주디스는 셰익스피어 만큼 재능이 있었으나 학교에 갈 수 없고 책을 읽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10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약혼해야 했고 아버지에게 대들다가 맞은 후 가출해 런던으로 향한다. 연극을 하고 싶었지만 여성은 배우가 될 수 없었으므로 문전박대 당하고 배우 관리자의 눈에 들어, 임신한 채 어느 겨울 밤 목숨을 끊는다. 

가난한 남성 작가들이 세상의 냉담함에 힘들어했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여자는 냉담 정도가 아니라 적대를 당했"(74쪽)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막힘없이 작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바로 셰익스피어의 마음이었다"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찬사를 보내면서, 이어 4장에서 여성이 쓴 작품들에 불순물이 섞이는 현상을 분석한다.


18세기부터는 여성들이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었고, 18세기 말에는 중산층 여성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울프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드물게 순수한 작품을 썼다고 평가하면서 <제인 에어>와 비교한다. <제인 에어>에는 샬럿 브론테 자신이 불쑥 등장해서 분노를 표출하는 부분이 있어 연속성을 흐트러뜨린다는 것이다. 

"(여성의 작품에 대한)그런 비난에 직면해서,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사물을 주눅 들지 않고 보는 그대로 견지하려면 천재성이, 진면목이 요구되었겠지요. 오직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만 그 일을 해냈습니다." (105쪽)


이제는 "여성은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넘어간다.


예외 없이 이 여성들은 남성들과의 관계에서만 드러납니다. 기이하게도 제인 오스틴의 시대 이전까지 가공의 멋진 여성들은 전부 남성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만, 그리고 남성과의 관계로만 조명됩니다. 이는 여성의 삶에서 얼마나 미미한 부분인가요. 성이 코에 걸쳐 준 흑색이나 장밋빛 안경으로 관찰해 봤자 남성이 뭘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소설에서 여성의 특성은 놀랍도록 극단적인 아름다움과 공포이고, 여성은 천상의 착함과 지옥 같은 악행을 왔다갔다 합니다.   - 116쪽

 (이 대목, '벡델 테스트'가 생각나네.) 


 그녀는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글을 쓰거나 산다면, 남성들 같아 보인다면 천만 번 통탄할 일이 될"(123쪽) 거라고 말하며, "고함치고 경고하고 조언하는 주교, 교무원장, 박사, 교수, 가장, 교사들", "경마장 울타리에 모인 군중처럼 그녀를 닦달"(131쪽)하는 자들을 보지 말고 멈추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마지막으로 강연을 듣는 여성들을 향해 우리 안에 시인 주디스가 살아 있다고, 언제든 기회만 있으면 그 시인은 살아날 것이니 함께 노력하자고 북돋는다.


그녀(주디스)는 <앨리펀트 앤드 캐슬> 맞은편의 승합차 정류장이 있는 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한 줄도 못 쓰고 교차로에 묻힌 이 시인이 아직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는 여러분 안에, 내 안에,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재우느라 오늘밤 여기 오지 못한 많은 여성들 안에 있습니다. 그녀는 살아 있습니다, 위대한 시인은 죽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계속 존재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속에서 실제로 거닐 기회뿐입니다.

 (...) 하지만 우리가 그녀를 위해 노력하면 그녀가 올 거라고, 그러니 가난하고 불확실한 처지더라도 노력하는 게 가치있다고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 158, 159쪽


1928년에 나온 이 책이 계속하여 읽히는 이유- 이토록 아름답게 억압 당하는 여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글이 또 있을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11-10 00:1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우 플래그 대단하네요. 세번째 읽으시니 책을 완전히 잘 분석하신거 같아요~!! 저도 이 책을 읽었을때 어려웠지만 공감이 되더라구요. 저도 곧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 열린책들 버젼 기대되네요~!!

독서괭 2021-11-10 11:39   좋아요 3 | URL
구절구절 공감가는 부분이 많더라구요. 풍자와 유머도 맘에 들고요. 새파랑님도 열린책들 버젼으로 쭉쭉~! 응원합니닷^^

mini74 2021-11-10 00: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플래그들이 아름답습니다 ~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 위로와 격려란 말에 다시 한 번 책을 꼭 읽어야겠다 마음을 다잡으며. ~ 독서괭님 안녕히 주무세요 *^^*

독서괭 2021-11-10 11:40   좋아요 3 | URL
미니님 안녕히 주무셨지요? ㅎㅎ 책 귀퉁이접기를 하다가 플래그로 바꿔봤는데 뭔가 뿌듯하네요. 미니님께도 즐거운 독서가 되길 빕니다~^^

단발머리 2021-11-14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번 읽었던 책인데도 독서괭님 글 읽다보니 또 새롭게 느껴지고…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근데 저는 한 권뿐인데, 어쩌죠? 열린책들판으로 사고 싶은데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11-14 10:24   좋아요 0 | URL
열린책들판으로 사시려면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을 사셔야 한다는 ㅋㅋㅋㅋㅋ 이참에 장만하시는 건 어떨까요? ㅋ 참 여러번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