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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 성소수자 혐오를 넘어 인권의 확장으로
한국성소수자연구회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평점 :
읽기를 마쳤다. 그동안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희미한 관심만 있었을 뿐인데, 현재 한국사회의 성소수자 관련 문제를 총망라한 한권의 책이 있어 반갑다. 2019년 말에 발간된 책이니 그 사이 변화가 있었을텐데, 아직 갈길이 멀지 않았나 싶다. 작년 코로나에 감염되는 바람에 아웃팅 당했던 한 사람의 예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의 인식이 아직도 부정적인 듯 하다. 변희수 하사의 죽음은 또 어떤가. 그래도 용혜원 의원이 군형법의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을 처벌하는 조항의 폐지 법안을 발의 추진한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에서 동성애는 서구에서 '수입된' 퇴폐적인 성적행위로 비난받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퀴어 반대시위는 한국인의 고유한 미풍양속을 지키는 애국적 행위나 미국이나 유럽의 종교적 타락에 맞서는 한국 보수 기독교의 고유한 성전으로 선전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퀴어가 갑자기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에 당황한 일부 시민들은 시기상조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즉 커밍아웃, 성전환, 공인된 동성애적 실천, 동성 간 결혼 등은 개인의 자유주의적 선택권을 옹호하는 민주주의가 발달된 서구사회에서나 가능한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시민이나 국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한 성취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정작 그 민주주의의 상징 안에 당연히 삭제되어야 할 존재로 퀴어를 상상한다. - 김현미, '퀴어운동과 민주주의: 퀴어 죽음정치의 종언', 206쪽
이 책 후반부에 실린 글들 중에는 김현미 교수의 위 글이 인상적이었다. 아래의 글은 읽다가 뜨끔했다. 나 역시 '그들'에 대한 시혜적 입장에 서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나 돌아보게 되었다.
다시 말해 '동성애자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다'고 인식하며, 그 점을 인지하여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이자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들 모두 동성애에 열등한 지위를 부여하고 이성애의 배타적,우월적 지위를 구성하는 공통점이 있다. - 김현미, '퀴어운동과 민주주의: 퀴어 죽음정치의 종언', 208,209쪽
충격적이고 슬펐던 것은 조수미 교수의 퀴어문화축제에 관한 글이었다. 2018년의 인천퀴어문화축제- 고작 3년 전에 이런 엄청난 인권유린이 이루어졌다니. 무서운 일이다.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떤 증오의 원천을 가져 이런 폭력을 자행한단 말인가.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에서 딸이 겪었던 폭력이 떠오른다. 2017년에 출간된 이 소설 속 모습이 현실과 얼마나 비슷한지 소름이 돋는다.
뒤늦게 도착한 축제 참가자들은 광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반동성애시위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소지품이 빼앗기거나 망가지고, 피켓으로 맞고, 옷이 찢어지고, 목이 졸리고, 손톱에 긁히거나 물리는 등 신체적 폭력과 아이와 노인을 앞세운 몸싸움에 휘말렸다. 부모님이 낳은 것을 후회한다거나 태어난 것이 재앙이라는 등의 모욕과 레즈비언인 여성에게 남자 맛을 보여줘서 고쳐주겠다는 위협을 하고, 장애인 참여자들을 에워싸고 휠체어를 넘어뜨리기도 했다. (...) 또한 성소수자들이 아우팅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이들은 참여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촬영을 했다. - 조수미, '"우리가 여기에 있다!" 2018년 인천퀴어문화축제', 273쪽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조수미 교수가 가하는 일침을 들어보자.
만약 성소수자의 노출과 애정표현 같은 모습이 불편하다면, 그래서 표현을 막거나 음지로 돌려보내고 싶다면, 사실은 지금까지의 '편함'이라는 것이 다수의 '편함'을 위해 소수자의 권리나 실존을 희생한 결과가 아니었는지, 그런 사회는 과연 윤리적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 조수미, '퀴어문화축제: 가시성과 자긍심의 축제, 263쪽
우리가 항상 민주주의 민주주의 외치며 자유의 영역으로 인정되어서는 안 될 부분에까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정작 민주주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을 제한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완전히 배치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고 반성해볼 필요가 있겠다.
재생산적 미래주의는 특정 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상상할 때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데 필수적인 환경 등 아이를 중심적인 기호로 등장시킨다. 사회는 출산, 양육, 아동의 삶의 질, 그들이 새롭게 만들어갈 연속의 역사 안에서 미래를 상상한다. 우리의 현재적 욕망을 투사하고 미래와 연결하는 기호로서 아이가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상상은 너무나 정당한 것으로 믿어지기에 깨질 수 없다. 모든 주의(-ism)가 그렇듯 재생산적 미래주의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라앉히고 균열을 막기 위해 관습화된 방식으로 아이라는 상징을 끌어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이는 ‘바로 여기서‘의 행동과 규범 및 정치질서를 규정하는 데 동원된다. 이런 강한 신념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이성애 커플의 사회적 역할과 기여를 최고의 가치로 승인한다. - 김현미, ‘퀴어운동과 민주주의 퀴어 죽음정치의 종언‘,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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