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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 속의 색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미셸 파스투로 지음, 최정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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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시각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색이란 정상적인 시각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색이라는 것이 단지 시각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눈을 감고도 느끼는 색감과 오감을 통해 다르게 느끼는 색감, 기억 속에서 달라지는 혹은 모노톤이 되어버리는, 이 모든 현상에서의 색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기억 속의 색,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는 색의 다양한 이미지를 글로 재현한다. 그 개인적인 경험과 이 노장의 연구가만이 할 수 있는 당시의 색에 대한 사회적인 시점을 짚어낸다. 오래전 저자의 어린시절 이야기들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꽤 버라이어티 했던 세계사 안의 특히 저자가 거주했거나 여행했던 곳에서의 다양할 수 밖에 없었던 색의 의미, 즉 색의 역사 정도가 그의 에세이에 담긴다는 점에서 단연코 색 연구가의 글임도 잊지 않는다.
색의 의미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르니 보편적인 색의 의미에 대한 글 따위는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저자가 색이라는 소재로 책을 쓸 때 개인사를 끌어들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글쓰기 작업이었을 것이다.

또한 저자의 말대로 색에 관한 책에서 색을 가진 이미지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것도 저자의 색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 작업이었다. 저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색이란 개념은 굉장히 추상적이고 시대, 지역 뿐 아니라 각각의 개인 안에서 다르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우리가 똑같이 본다고 절대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은 우리의 기억 자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역사책을 보는 듯도 하고 할아버지 옛 시절 얘기를 듣는 하여 흥미로웠는데 저자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더 실감이 나고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었다. 특히 컬러영화의 등장에 대한 엄격한 자본가들의 경박하다는 평가들이 있었다는 게 흥미롭고 이해가 갔다. 관음증적 매체인 영화가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컬러를 가질 때 관음적 대상으로서는 더 노골적이 된 것일테니 말이다. 보수적인 이들에게는 이는 어떤 광경이건 간에 엿보고 있다는 죄책감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이는 영화사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했다. 무의식적인 도덕적 거부감과 이유없어 보이지만 상스럽게 여긴 이러한 시각매체의 성격을 색의 여부와 결부지어 생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또 우리나라의 어휘가 굉장히 색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고 그 오감으로 함께 표현되는 단어들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생각할지 굉장히 궁금해졌다. 매우 흥미로워하지 않겠는가. 그가 설명하는 프랑스 혹은 유럽에서의 다양한 색에 관한 표현들(영어 보다는 훨씬 많은 듯해보였다)보다 더 풍부할 것이 분명한 한국어의 매력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시각과 촉각, 후각과 미각, 청각... 우리 말은 시적이어서 공감각적 색 표현으로 의사표현이 가능하다. 색을 말로 전달할 때 형용사는 기본이고 여러 조사들을 붙여서 느낀 색을 전달할 수도 있다. 물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색이란 보여줘도 각자가 느끼는 색감이 각각 다를 것이고 또 다르게 기억할 것이기 때문에 색의 정확한 시각적 제시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색상표 또한 그렇고 이는 컴퓨터로 이미지 작업 혹은 같은 색을 공유해야 하는 공동작업에서나 유효한 것이며 결코 같은 느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책을 덮고 나 또한 색에 대한 에세이를 써본다. 내 기억 속의 색과 당시의 사회적인 색은 어떤 차이와 접점이 있었을까. 내 기억 속의 색은 완전한 것인가. 빛바랜 사진과 같은 혹은 흑백사진이 되어 버린 장면들의 본래 색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기억의 간극을 나는 색을 표현하는 단어들로 메꿔간다. 색인지 글자인지 모를 것들로 가득 채워진 하나의 에세이가 머리 속에 쓰여지는 듯 하다. 온도와 기후와 같이 있는 사람 혹은 주변의 사물, 나의 건강과 컨디션... 이 모든 것이 기억 속의 색을 자꾸 변화시킨다. 기억 안에서 색들은 매번 다른 색이 되고 어떤 색에 대한 선호도도 자꾸 뒤바뀐다.

몇 년 전에 색에 대한 책을 찾다가 독일에서 설문조사를 통해 연구한 색의 느낌, 색에 대한 감정과 이성에 대한 영향력, 그리고 당시의 그 사회의 선호되는 색에 대한 통계를 볼 수 있는 책을 보게 되었다. 우리가 색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정도이다. 좋아하는 색, 긍정적인 색, 어떤 감정과 연관되어 있는 색이라고는 지정할 수 있지만 그 이유는 밝힐 수 없다. 무의식적으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 이 개인적인 경험이란 또 결코 개인의 것만은 아니어서 보편적인 색의 선호 또한 가능해진다. 사회적으로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강요되는 색이 분명 존재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호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상업적인 상품과 광고 노출의 정도만으로도 이러한 색의 선호도는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저자의 에세이는 색채연구가로서의 색의 이데올로기성을 에세이라는 형식을 통한 것만으로 증명하는 작업이다. 바로 이 부분이 가장 매력적인 책이다. 아마도 색 이라는 분야에서 오랜 시간 연구한 거장만이 할 수 있었던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글의 흥미로움을 떠나서 색의 이데올로기성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시각적 이미지로는 불가능한 일일테니 말이다. 

이런 색에 대한 에세이 방식과는 다른 저자의 저서일,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 와 블루와 블랙에 대한 색의 역사라는 책이 무척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 색의 역사에 관한 책보다는 이 ‘우리 기억 속의 색’이 한평생 색채 연구에 시간을 쓴 노장 연구가의 색에 대한 철학을 보여주는 책일 것이라는 데는 확신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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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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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TV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종의 뒤로 책거리 병풍이 서 있다. 우리 민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평면적인 책거리 병풍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예전이라면 타 사극과 조금 다른 미술팀의 세팅정도로 생각했겠지만 이 책을 한창 읽던 중에 발견한 드라마 속의 책거리는 민심을 읽고자 하고 강연을 하고, 공부와 연구를 멈추지 않던 세종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데 아주 적절한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정조가 책거리를 만들었고 어좌 뒤에 십장생도가 아닌 책거리 병풍을 두었다는 기록에 따라 세종 때에도 책거리 병풍이 어좌 뒤를 장식했을 가능성 또한 높다. 하지만 드라마 내에서 태종을 비롯한 다른 이의 배경에서 책거리를 발견할 수는 없었으니 이는 책거리 병풍을 통해 캐릭터를 표현하려던 것이 분명해진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미국, 유럽, 일본 등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민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저 미술교육의 부재로 인한 자유로운 배치와 어린아이와 같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세계 미술사에서 다르게 표현을 꾀하고 그 새로움을 인정받았던 입체파등의 하나의 사조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한국미술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 책은 한 민화연구가에 의해 민화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 단초가 된다. 한국미술사에서의 민화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음이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우리 그림에서 민화가 빠지지 않고 아름다움과 새로움, 민초의 저항의 이미지로 다양한 해석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아카데믹한 고급미술에서 벗어나 있는 파격적인 구성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우리는 서양미술사의 여러 사조들이 기존의 표현기법을 비판하고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미술사에서의 민화의 출현에 대해서는 저항과 새로운 사조의 등장으로서보다는 그리는 주체의 신분적 차이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우리 민화는 하나의 저항적 사조로서 그 입지를 굳히지 못했을까. 물론 1차적으로는 그리는 주체의 신분의 차이로 인한 역사적 기록의 차이때문일 것이고 이에 파생되는 2차적 이유로 신분에 따라 폄하된 나머지 보존되지 않았다는 점, 그의 가치를 미리 알아본 일본과 열강의 수집 등에 의한 낮은 보유력에 그 3차적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민화의 가치는 추상과 환상의 세계를 그린 우리 그림이라는 것인데 우리의 옛그림, 민화가 한국미술사에서 초현실주의적 특징을 가진 미술로 인정되고 알려지기를 바라는 저자의 애정이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세계에 우리 민화를 알리는 작업을 해온 실천가이기도 하다.

민화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저자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이에 더해 우리 민화가 굉장히 현대미술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 재해석되고 알려지는 것이 굉장히 한국미술의 국제적 입지에도 고무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꽃들은 단순화되어 세련되게 디자인된 무늬를 보는 듯 하고, 책거리에 나열된 문방사우들은 잡지나 카다로그의 상품들처럼 각각의 의미를 가진 채 한 장의 종이(면) 위에 놓여진다.
이는 무엇보다 현재 우리 민화라는 옛그림이 현대의 미술과 디자인에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는 영역으로서의 가능성이 가장 큰 매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문자도와 같이 민초들의 드러난 주술적 의미 뿐 아니라 토속신앙과 당대의 전통의식들을 엿볼 수 있는 상징적 소재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역사 사료적 가치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만의 아들기원의 소재 ‘고추’가 등장하는 책거리에서부터 용과 호랑이의 가신역할 등은 민화가 양반문화와는 다르게 일반 가정에서 종교적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점도 토속신앙사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림의 소재별로 민화를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고 내게는 세종이 아닌 뒤에 세워진 병풍에 눈을 돌리게 했던 책거리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책거리의 독특한 구성과 구도는 시각과 자연을 벗어난 형식적 자유 그 자체이다. 이는 미술사 내에서도 그 새로운 움직임의 가치를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그 새로운 움직임 내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민화작업 등이 있긴 했지만 한국미술사에서의 민화의 특성 등을 짚어내는 작업 또한 활발해져야 할 것이다. 민화연구에 대해 너무도 문외한인지라 저자의 이러한 연구가 내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가 주로 해외에서 우리 민화를 소개하고 인정받은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는 점을 생각할 때 국내에서의 민화의 가치가 오히려 더 폄하되어 온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유홍준의 책 ‘한국미술사 강의’에서 고구려 6세기 정도의 그림에서도 굉장히 해학적이고 단순화된 그림들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치 이 책에 소개된 까치호랑이만큼 친근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등이 그것이다. 용의 형태 뿐 아니라 십장생도나 봉황 등의 환상 속의 모습은 현대 환타지의 근원이자 환타지 그 자체의 성격상 시기성이 없어서 지금의 상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까치 호랑이의 여러 민화의 형태들은 점점 단순화되고 개성 또한 다양해져서 마치 현대 여러 유명 만화가들의 각각의 까치 호랑이를 보는 듯 하다. 이러한 직접적인 환타지 표현이 아니더라도 무엇을 보고 관찰한 그림이 아니라 모두 상상해서 각각을 그려낸다는 점에서도 당시의 고급미술과 다른 점일 수 있을 것이다. 산수화, 정물화, 곤충과 동물들은 본 것에 기인한 작품이 전해내려오는 것이 많지만 시각에 의지하지 않은, 시각에서 벗어난 표현을 한다는 데 이 민화의 매력 포인트가 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그리지만 현실의 세계가 아닌 (저자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상상의 세계, 관념의 세계가 맞다. 이는 또 다른 문자이며, 의미이며 이야기가 된다. 사람과 상황이 등장하지 않아도 무한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의미표현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서 굉장히 자유로운 표현, 분출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운좋게도 최근에 찾은 갤러리의 아트샵에서 민화를 모토로 한 현대작가의 작품이 디자인화된 예쁜 상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민화가 분명 재해석되고 재탄생되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한국미술 내에서는 고급미술에 비해 기억되지 못했던 민화의 아름다움이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내게도 하위문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민화는, 더 많은 민화의 역사와 민중의 삶 내에서의 민화를 더 알고 싶게 만든다. 하위문화의 힘과 동서양 모두의 미술사 내에서 새로운 하위문화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는 키치에 대한 선입견과 키치가 가진 힘에 대해 자각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내가 보았던 예쁜 디자인 용품처럼 국내에서의 민화의 재탄생과 그 역사에 대한 연구와 알리는 작업이 보다 확대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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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왕자의 새벽작전 
심은록 (지은이) | ACC(Asia Coach Center) | 2011-09-15 
 

장 미셀 오토니엘전이 국내에서 진행중이다.
그의 아름답고 메세지에 공감하고 있다면 이 책의 등장이 굉장히 반가울 수 밖에...
그의 사진작업 및 유리의 세계에 초대받을 준비를 하고...
전시와 나비왕자의 새벽작전 안으로 들어가보는 것은 어떨까...
이상한 나라의 토끼처럼 판타스틱하지만은 않은 그의 세계에 대한
더 폭넓은 이해의 계기가 될 독서가 될 것이라 기대해본다.

 

 

 

 

 

 이 책을 파괴하라
munge(박상희), 케리 스미스 (지은이) | 아트북스 | 2011년 9월


 너무도 즐겁고 유쾌한 발상이다. 책을 아끼는 대신 책을 파괴하면서 각자의 창의성을 자극할 책이다. 내가 실제로 이 책이 명령하는 파괴를 실천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파괴가 숨어있는 창의성을 자극할 것이라는 데는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멀티미디어 시대 대중예술과 예술무정부주의
박성봉 지음 / 일빛 / 2011년 9월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예술에 대한 반증을 볼 수 있을 책이다. 저항적 예술이어서가 아니라 대중예술이라는 폄하되고 있는 예술의 탈권력, 탈이데올로기성을 살펴보는 것은 그들에게 숨어있는 저항의 힘을 발견할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흑인 잔혹사
김진묵 지음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11년 9월

최근 미국영어의 여러 표현들을 접하며 노예시대의 언어에 대한 어원을 접하게 되었다. 흑인, 특히 미국의 현재 흑인이 있기까지, 노예, 납치, 폭력, 유럽의 배경에서부터 현재까지의 흑인사를 보는 데 도움이 될 책이다. 더불어 흑인 뿐 아니라 모든 사회의 인권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될 책인 듯 하다. 흑인잔혹사라는 제목으로 현재 우리의 인종주의는 어떠한지 돌아볼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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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0-1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크 완료했습니다! 첫 미션 수행 고생 많으셨습니다~

fox_konii 2011-10-27 02:18   좋아요 0 | URL
이렇게 꼼꼼하게 체크해주시고... 댓글까지...^^ 감사합니다. 흥미롭고 즐겁고 행복한 신간평가단 기수가 되길 기대하고 있답니다....^^ ps. 신간평가단 관리자님... 감기 조심하세요~ 저는 무지무지 감기로 고생중이랍니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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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사실 달랐을 수 있다. 과거가 되어버린 역사란 실제로 보고 들은 것이 아니어서 왜곡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니 설사 실제로 보고 들었다 할지라도 개인에 따라 다르게 느끼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의 신빙성에 대해서란 회의적이다. 만약 하나의 사실로 이루어진 하나의 역사만 있었더라면 역사를 연구하는 직업이란 필요성이 의심스러워진다. 사실의 축이 있는데 굳이 또 다른 고증 자료를 찾고 해석할 역사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그 연구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거를 재구성하고 고증하려는 노력은 당시대에 따라 재해석하는 사실 자체가 현재를 반영하는 역사가 되기도 하고 새롭게 조명되는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려는 노력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미술사 또한 다름 아니다. 제목이 서양미술사가 아니라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라는 점에 주목하자. 지금까지의 서양미술사를 완전히 뒤집는 것은 아니지만 현 시점의 미학적 관점과 한 미학가의 시점이 얹혀 진중권의 서양미술사가 탄생했다. 시대에 따라 역사가 재조명되듯 미술사 또한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감한다. 저자의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앨프레드 바의 현대예술 다이어그램에 다르지 않은 현대의 예술비평에 대한 저항적 재해석이다. 미술사 중 단기간에 쏟아진 새로운 예술혁명이 많았던 20세기 초반은 가장 흥미로운 시도들이 많았던 때이기도 해서 저자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이 더욱 재미있게만 느껴진다.
제들마이어의 현대예술의 뿌리인 순수, 근원, 광기, 기술적 구축의 충동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저자의 서양미술사는 원근법을 벗어나 오로지 형과 색의 순수함을 지향해서 그 정점까지 찍은 말레비치에서 다른 장르와의 공유점을 가져야 했던 기술적 구축의 의지에서 나온 구축주의와 데스테일, 바우하우스 등의 실용적 예술운동, 무의식의 자동기술에서 철저히 의식적으로 구축된 달리의 초현실주의 등, 정점에서 다시 모순으로 빠지는 끊임없이 솟아난 현대미술 예술선언과 작품을 제시하고 있다.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달리의 초현실주의 모순점이 보이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 저항하면서 부르주아의 소비와 동전의 양면처럼 접합되어 있는 미술운동이 사실 그 혁명이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공공미술가로서 지배사회에 편입되어야 할 것이라는 웃지못할 모순에 대해서 언젠가 들었던 저자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예술혁명은 키치를 지향해야 하는가. 파쇼와 자본주의 미술계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아방가르드 혁명은 진정 성공할 수 없는가. 이는 예술이 트리비얼화 되는 것, 예술가 스스로 트리비얼화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고 사실 미술가들의 고급안목으로 스스로 키치 생산가가 되기란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저항과 파기를 반복하다보면 그 반복마저도 클리쉐가 된다. 자기 거부가 가져온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모더니즘 시대의 수많은 미술혁명선언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끊임없는 그들의 시도에 대해 예술가라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지식인이든 교육의 목표뿐 아니라 시대에 바른 의견을 반영하고자 노력(실천)하는 자만이 지식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지식인의 역할이란 바로 그 지점에 있다고 생각해볼 때 그들의 선언은 예술계의 변화를 추구한 실천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 시대에 각각의 시점에서는 아방가르드 하지 않은 유파는 없었으며 당시는 늘 새로움을 추구해왔다. 순수한 미술을 꿈꾸거나 반예술을 꿈꾸어 실용과 결합하거나 미술의 고급성을 버리거나 의식적인 것을 버리거나 그들의 시도가 예술의 개념을 변화, 변형 시켜왔던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변형은 예술의 개념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대안예술로서의 키치의 의미에 매우 부합해보이지만 넓은 의미의 키치라면 그 또한 동의할 수 있다. 예술개념의 확장은 결과적으로 고급문화로서의 미술의 소비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며 이는 소장의 소비가 아니라 단지 이미지의 소비를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술과 대중과의 간격을 축소시킴으로써 예술 자체의 입지 또한 결과적으로는 넓혔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야수주의의 용어, 피카소와 브라크의 콜라주의 입체성등에 대한 새로운 이슈들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칸딘스키의 형태의 의미에 대해 읽으려 애썼었는데 그가 지향한 색채의 성향에 듣고보니 좀더 풍부하게 그의 그림을 읽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형태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그의 초현실주의적 표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모든 미술사조가 확연히 구분되기보다는 상당한 접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래서일까. 네 현대예술의 충동으로 구분된 아방가르드 예술은 오히려 시대구분된 미술사보다 보다 명확하게 파악되는 희한한 경험이었다.
미래주의에서는 사진과 필름의 미래주의성이 자꾸 떠올랐으며(이는 저자가 이 부분을 재미있게 설명해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부가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미술을 중심으로 한 책의 취지상 선을 넘지 않으려는 분명한 저자의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표현은 미래주의적이지만 기법은 전혀 미래주의적이지 못했던 그들의 한계에 대해서도 저자와 함께 거북해했다. 서양미술사을 일대기적으로 정리하기를 시도하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그와 함께 비판적으로 미술사 안의 각각의 작품을 들여야볼 수 있는 시선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와 함께 독서하기를 권하고 싶다.
예술은 예술가를 둘러싼 사건, 사회적,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그 사조 출현, 작품생산 등의 동기가 다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나, 저자는 미학적 시점을 집중적으로 들이댐으로써 잘못 접근해왔던 작가의 작품까지를 생각하게 한다. 간혹 한 작가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 추구하는 바에 따라 각기 다른 사조의 경향을 보였거나 모순적 작품을 양상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떤 서양미술사가 정답일리는 없다. 우리가 역사를 절대적으로 고증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순간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떠오른다. 저자의 시점이 또 정답이 아닌 것처럼 독자, 혹은 감상자 각각의 해석이 그들의 예술혁명성과의 접점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혁명성에서 예술이 장식용이 아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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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철학의 풍경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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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진을 찍는 이에게는 그리고 사진을 읽는 이에게도, 각 사진은 제각각의 의미가 있다. 프로 사진가에게도, 아마추어들에게도 그 직업적 의미와, 성취감, 미적 생산에 대한 욕구 등으로 인한 '사진함'이 있을 것이고 아마도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나와 같은 다수의 미디어 생산/소비자에게도 자신의 '사진함'의 의도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감상자에게 또한 누군가에게는 가슴 저릿한 감동을 줄 수도 있고 일상적이거나 정보를 제공받거나 하는 등의 의미 또한 있을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가장 근원적이면서 궁극적인 사진의 의미는 기술의 차이에서 오는 노련함의 정도가 아닌 '사진함'과 사진이 (감상자를 포함하여)그 '누군가의 의미'라는 데 있다.
저자의 사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수많은 철학적 사유들의 이갸기가 접점을 이루면서 우리는 렌즈를 통해 선택되는 이미지들과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때론 영감을 받게 된다. 저자의 <사진철학의 풍경들>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이의 선택된 이미지에 대한 의미에 대한 사유이다. 그러한 사진에 대한 사유는 박제된 이미지가 기억을 통해 시공간을 부활시키고, 실재와 상상이 결합해 자신만의 빛과 어둠의 조형을 이루고, 시선에 대한 사유를 통해 아픈 성장통을 겪다보면 결국 자신만의 의미창출과 끊임없이 세상을 보는 가장 근원적인 예술로서의 시선을 남게 한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는 한 프레임을 선택하는 사진을 하는 이에게 피사체 선택과 그 의미에 대한 딜레마 혹은 매너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지점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은 저자가 시도하는 철학을 통한 ‘사진함’의 정리이기 이전에 또, 저자 자신의 사진집이기도 하다. 종종 다른 작가의 사진이 실리기도 하지만 텍스트의 사례로 생각해볼 수 있는 저자의 컷들이 실려있다. 이 중 나는 ‘하야리아 부대’(2011)이 인상적이었는데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려 받는 듯하면서도 그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맥없음이 손의 제스처와 타이틀이 만나(저자는 사진의 타이틀을 결정짓는 데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충분히 전달된다. 그 많은 역사와 시간을 누군가의 손짓 하나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사진의 미니멀이 주는 큰 파장력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저자가 인터뷰내용을 실은 보드리야르의 사진은 (책에 실리진 않았지만) 현재의 우리에게 현실 모든 것의 오브제화라는 영감을 주고 있기도 하다. 모든 것이 오브제이자 피사체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 어떤 시점에서 재현해낼지, 그래서 어떤 공감을 불러일으킬지가 바로 사진찍는 이들 각각의 선택이자 차이가 된다.
차이를 통해 개성과 자신만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러한 사유와 여러 시도에서만 창출된다. 시간이 흐른 지금 보면 영화의 필름과 차이가 없어 보이는 듀안 마이클의 시퀀스 포토그래피 또한 당시에는 ‘사진적 행위를 언어적 행위로 치환하’는 지금의 여러 유수와 같인 포토그래퍼들의 내러티브 있는 작업들을 이끌어냈다. 그렇다면 한 장의 사진이라는 의미를 넘어선 시리즈 작들의 의미작용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볼만 하다. 소피 칼과 같은 이들의 작업에서 우리가 받는 감동은 기록의 산실같아 보이지만 감상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상을 하게 한다는 데 그 출발점이 있다. 사진이지만 순간을 넘어선, 누구에게나 다르게 해석이 가능한 내러티브, 주어진 스토리텔링을 넘어서는 작가와 감상자의 인터랙티브의 확장에 바로 그 의미가 있다. 나는 영화의 필름과 같이 연속적이거나 누구에게나 같은 정보를 주는 사진보다는 점프컷이 된 시리즈의 시퀀스 포토그래피가 훨씬 더 흥미롭다. 그 내러티브는 현실을 넘어서 환타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SF 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스릴러가 되면서 사진이라는 장르를 넘어선 문학과 영화에 다름아닌 몇장의 컷이 된다. 이것은 우리의 기억과 접속하면서 무한한 해석을 이끌어내는 데 각각의 해석까지를 예술작품의 마지선으로 본다면 하나의 작품은 무한히 많은 작품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저자의 말대로 연출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이 있는 사진의 경우에 쉽게 감동하게 된다. 사진에 함축된 시공간과 감상자에게 내재된 의미가 상호작용하는 순간이다. 현대사진작가의 작품들은 오브제를 직접 설치 및 제작한 후 철저한 의도에 의한 사진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연에 기인한 작품들이 큰 감동을 주기는 하지만 현대사진은 사진의 우연성을 뛰어넘어 의도와 사회적의미를 강렬하게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을 두는 작품이 많다. 그들의 작품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세팅된 피사체와 후반디지털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만들어진 사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 부분은 마이클 케나의 사진과 작가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마이클 케나의 작업은 오랜 시간 노출작업을 통한 사진작업이 많은데 변화무쌍한 환경에서의 그 사진이 꼭 케나의 의도대로 나오는 경우는 없다. 그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의도한 그대로를 얻을 수 없는 것이 사진이라는 측면이 내게 굉장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 우연성이란 자연과 함께 했을 때 더 큰 시너지를 발휘하는 듯 하다. 휴머니티가 범접할 수 없는 자연만의 순간, 말그대로 사진이 찰나의 예술이 되는 순간은 이러한 사진이 탄생했을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담고 우리에게 그만으로도 감동을 주는 사진들은 오랜 세월 그 자연이 간직한 신비로움 때문일 것이며 그 오랜시간과 변화하는 공간이 (마치 인간의 주름처럼) 한 컷에 담겨 있음에 그 감동이 배가 되는 것일게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진을 순간을 담는다고 절대 말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피사체 혹은 배경의 무엇인들, 그리고 그 빛과 어둠의 순간인들, 시간을 머금지 않은 컷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사진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책과 더불어 읽는다면 더 좋은 독서가 될 듯하다. 또, 사진을 대하는 철학계의 반응에 대한 심도있는 독서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러한 심도 있는 독서로 가는 가이드가 될 것이다. 가령 수전손택의 사진의 폭력성이라는 의미에 대한 고찰이 있기까지 어떤 사진들이 평단에 오르내렸으며 우리는 어떤 사진을 읽을 때 이러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가에 대한 고민을 위해서이다.
나는 모든 예술은 의미의 투쟁에서 새로움을 창출시킨다고 믿는다. 지금의 현대사진의 표현법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실험과 의미분쟁이 있어왔다. ‘사진철학의 풍경들’은 그런 의미에서는 온건한 가이드이다. 사진을 하는 이들에게 어떤 사진이 이러한 철학적 논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이는 사진을 읽는 이들에게도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진의 사회적 실천의 의미에 대해 좀더 부가적인 설명과 사회적 의미에 대해 언급되길 바랬으나 피사체 혹은 대상, 주제 등의 표현적 의미에 대해 더욱 저자가 공감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리처드 볼턴의 ‘의미의 경쟁’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사진적 진실의 정치학을 넘어서서 사진의 정치학사를 들여다보는 것이 사진과 이미지를 소비하는 독자들에게는 더 필요한 지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사진을 하는 이를 더 염두해 두고 씌여진 책으로 느껴진다. 사진을 읽기만 하는 감상자보다는 직접 표현하는 이에게 좀 더 공감과 도움을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이미지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 철학과 사진과의 접점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공부가 다양한 주제와 방법의 사진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랬던 듯 하다. 사진한장을 찍기까지, 그리고 그 사진을 읽으면서 수없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는 예술로 인식하게 하는 저자의 사유의 과정이 긴 여행과도 같다.   

이 책은 사진이라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철학의 여러 흐름을 이해하는 데도 또 다른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미지와 철학의 접점에 대한 고민을 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내게는 저자가 제시한 레지스 드브레, 폴 리쾨르, 수잔 손택, 존 버거의 부가적인 독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미지에서 사진이라는 구체적인 텍스트로 나아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저자의 사진에 대한 의견에 많이 공감하고 있다면 로버트 헨리의 ‘예술의 정신’을 추천하고 싶다. 또한 저자의 블로그를 (http://blog.naver.com/sabids?Redirect=Log&logNo=150095384058)통해 저자의 현재 사진작업을 엿볼 수 있었고 끊임없이 렌즈 안과 밖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는 저자의 노고를 알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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