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
제러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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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라는 작곡가란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만나고 보니 그건 내 협소한 시각이었을 뿐이었다. 익숙한 멜로디 몇 몇 구절과 교과서의 교육만으로 상상해 온 차이콥스키를 그의 일상과 더불어 일대기를 들여다보고 음악의 배경에 대해 이야기 듣고, 그의 많은 곡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그의 이미지는 지금껏 상상해왔던 차이콥스키와는 차이가 있다.
음악가로서의 번민도 많았겠고 그의 주변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에도 그 영향이 많았겠지만 한 사람으로서 태어나고 사랑하고 몸와 마음의 숱한 변화를 겪는 차이콥스키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아마도 음악가의 삶을 안다는 것은 그의 음악을 의도와 탄생의 배경을 더 실제에 가깝게 이해할 수는 있을 듯 하다. 이는 여느 예술가의 작업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술의 생산과 수용이 시간을 넘어서 좀 더 가까운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수용자만의 또 다른 창작으로서의 감상을 유도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이 책을 만나면서 차이콥스키 이외의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창작자의 캐릭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삶을 알고 싶고 그가 주변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지 어떤 삶의 굴곡의 지점에서 당시의 음악이 탄생했는지...
그의 알려진 삶을 총망라하고 편지 등을 통해 다시금 차이콥스키를 재조명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경건한 삶만이 위대하다거나 또 꼭 그러한 생활에서 위대한 예술이 창작된다고는 할 수 없다. 여느 예술가처럼 마음의 번민을 수백번 오르내리며 차이콥스키의 음악도 탄생되었다. 물론 저자의 이야기를 듣자면 음악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았을 때조차 아름다운 노래를 작곡한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재능은 어느정도 타고 난 듯 했다.

그의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인데 차이콥스키의 유명발레곡 이외에도 귀에 익숙한 멜로디들이 있어서 반갑기도 했다. 피아노 연주곡을 주로 듣던 취향에서도 조금은 더 나아가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Op.35 피날레를 듣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보고 생각하는 즐거움에서 나아가 음악에 관한 책들은 듣는 즐거움을 알게 하고(실제로 음악을 부록하지 않더라도) 음악을 듣는 귀를 발전시키는 듯 하다. 이는 청력이라기보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읽는 법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에 리듬과 멜로디를 싣는 차이콥스키의 작곡을 듣고 있자면 사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상의 차이콥스키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훨씬 더 많은 그의 이야기가 물론 있을 것이다. 오네긴을 듣고 들으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차이콥스키의 말과 생각과 행동과 또 다른 차이콥스키가 느껴진다.

부록은 때때로 또 하나의 단행본만큼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바로 이 책이 그렇다. 19세기의 배경, 러시아의 문화적 배경과 책에 나오는 문화예술계의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음악용어설명, 2장의 CD 수록곡 설명은 기본인데 내가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바로 연표이다. 저자는 연표에 차이콥스키의 생애 연표 뿐 아니라 각 시기의 문화예술의 주목할 만한 뉴스, 서양사를 보기 좋게 배열하고 있다. 이는 차이콥스키의 삶과 음악 뿐 아니라 우리가 같은 시기의 다른 문화예술가를 읽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이 책의 부록은 책과 CD로만 그치지 않고 웹사이트의 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도 하는데 차이콥스키의 연표와 음악외에도 동시대의 러시아의 다른 음악가의 대표곡을 감상할 수 있는 페이지도 있어서 차이콥스키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또 그 음악들이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굉장히 아름답고 멋지다. 글린카에서부터 ‘강력한 소수’ 일원들과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슈스키까지 책에 나왔던 인물들을 그들의 음악으로 다시 읽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에 대해서도 공부하면서 조금이나마 글이 아닌 귀로 이해하는 독서의 시간이 된다. 특히 차이콥스키에게 작곡을 가르쳤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곡도 접할 수 있는데 그의 많은 곡들이 궁금해질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작곡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밀리 알렉세예비치 발라세예비치의 피아노곡은 예노 얀도의 연주인데 또 그 연주가 감동적이다. 많은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과 음악가, 그리고 또 다른 연주자들의 발견은 이 책이 차이콥스키에 그치지 않고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음악에 대한 많은 이야기의 서두를 열어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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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지은이) | 문예중앙 | 2011년 7월

올해 꼭 읽어보고픈 책이다. 사진으로 철학을 하고 철학으로 사진을 읽는 작업을 하고 있을 저자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시각이미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 뿐 아니라 각 사진작가만의 사유조차도 놓치지 않는 글이 담겨 있을 듯 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진과 그 안의 시간과 공간, 프레임을 넘어서는 사진과 철학이야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익숙한 화가의 낯선 그림 읽기
전준엽 저 | 중앙북스(books) | 2011년 07월

유명화가의 숨어 있는 명작 소개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아름답고 이야기가 있는 그림들을 만날 생각에 설레이기도 한다.
클림트나 고흐 등의 유명 화가들의 조금은 다른 화풍의 시기를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모르시 위트릴로와 같은 잘 몰랐던 화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듯 하다.

 

 

 

미술, 과학을 탐하다 - 우리가 궁금해 하는 그림 속 놀라운 과학 이야기   
박우찬 (지은이) | 소울 | 2011년 7월

매체가 하나하나 새롭게 탄생할 때마다 예술 또한 전환기를 맞는다.
그런 면에서 미술과 과학의 발전은 밀접하고 이는 매체와 표현의 다양성 뿐 아니라 예술담론의 변화에도 영향을 상호 유기적으로 교환해왔다고 생각된다.
이 책은 미술이 표현의 변화를 가져온 과학적 고민의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그들 각자의 낙원 - 예술가들이 사랑한 땅, 프로빈스타운 여행기   
마이클 커닝햄 (지은이), 조동섭 (옮긴이) | 마음산책 | 2011년 7월

여행지에서 예술가들과 조우하는 명상과 같은 책이 될 듯 하다.
프로빈스 타운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걸어다니는 독서가 될 것이다.
이제는 이미 예술가의 혼으로 가득한 그 곳에서 이 책을 떠올릴 수 있는 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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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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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비(非)자연적인 것, 형태의 왜곡이 가져오는 그로테스크라는 예술의 성격은 이제는 그 생경함이 주는 공포, 낯섬의 정도로 파악하는 의미로 그 탄생 이래 변화해 왔다. 그로테스크한 예술작품이 먼저 있었고 그 이후 변화해 온 이 용어의 변천을 듣다 보면 그 정도와 의미가 크게 변화된 것 같지는 않다. 아직도 우리는 15세기에 그로테스크 예술작품으로 간주되었던 것을 그로테스크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거나 새롭게 발생하는 현대예술의 다양한 표현방식 안에서 그로테스크라는 의미의 범위는 어떻게 한정지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신화 속에서 흔히 반인 반수의 그로테스크의 전형을 보게 된다. 이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의 저자 볼프강 카이저의 표현과 역자의 번역에 의하면 ‘생경함’을 주는 그로테스크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로테스크의 전형들은 흔히 애니메이션 속에서 동화적으로 미화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아는 배우(사람)의 모습의 변형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는 관객에게 오히려 너무 큰 낯선 효과를 주어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너무나 진짜 같은 그림이 된 배우들의 모습 또한 뭔가 이질적인 피부의 질감 등 생경함을 일으키는 요소를 갖게 되고 이것이 트랜스포머의 옵티머스가 지지를 받고 ‘퍼시잭슨과 번개도둑’의 케이런(피어스 브로스넌 역) 의 반인반마가 코미디로 보여 그 리얼리티를 조롱받는 것의 원인을 증명한다.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생경함, 혹은 완벽한 리얼리티를 구사함에서 대중의 선호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익숙한 것들의 변형과 왜곡이 주는 효과로 문학과 미술에서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었으며 카이저가 제시하는 예시들에서 당시의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개념사적으로 그로테스크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 대한 해석과 연구는 독자의 몫이다.
엄연히 말하면 브레히트의 소격 기법과 다른 것으로, 미학적 측면의 새로운 표현이지만 그로테스크가 가진 저항적 가능성은 존재한다. 몰입을 방해하는 브레히트의 연극이 자꾸 자신의 매체성을 드러낸다면 그로테스크 예술 또한 자연모방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자신의 매체성을 강조하고 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그로테스크가 아방가르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고 그 아방가르 형식이 여성주의 미술 등에서 큰 부분의 형식적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현대 여성주의 미술에서의 화두는 남성적인 미술작업에서 벗어나 여성들만의 이미지 언어를 발전시킨 데 있다. 아방가르드한 표현방식은 관객에게 생경함을 주면서 작가와의 소통을 유발시킨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공포 영화 속의 캐릭터(인체의 변형이 주는 공포), 혹은 풍경(익숙한 도시의 모습이지만 뭔가가 부재하거나 특이한 것의 존재로 변형된 공간)이 주는 익숙한 것의 낯섬이 주는 그로테스크의 일환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즉 (저자가 잘 설명하고 있듯) 고대 동굴의 벽화라는 시각적인 대상에서 시작된 그로테스크라는 어휘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것들에게서 무언가는 부재시킬 때, 시각적인 대상의 등장이 아닌 소멸로도 발생할 수 있는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저자가 렌츠의 작품에서 말했 듯 인형극 그 자체가 그로테스크하지 않지만 인물이 마리오네트가 될 때 그로테스크가 되는 것에서 우리는 현대 그로테스크의 성격을 가장 크게 결정짓는 것이 일단 시각적인 기괴함이라는 데 접근할 수 있다.


삶의 질서가 적용되지 않을 수 있는 그로테스크의 성격을 생각할 때 이는 그 표현의 무한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한 그림들처럼 사후의 세계가 그려질 가능성도 (그로테스크를 예술의 한 사조로 간주할 때) 매우 유효한 표현방식일 수 있으며 종교적인 세계와 같이 경험적 세계에서 벗어난 소재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다. 이는 지금의 판타지 문학과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문자매체와 미술매체에서 확인 할 수 있으며 경험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의 왜곡과 변질을 통한 생경하거나 혹은 다르다고 표현할 수 있는 존재와 세계를 그려낼 예술매체로서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비자연적이고 생경한 존재와 세계가 과연 상상 속의 세계만을 그려낸 것이라기 보다는 현실의 나와, 우리와, 여기를 다르게 혹은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데 이렇게 본다면 크로테스크 예술의 풍자성이 매우 설득력 있어진다. 저자의 말대로 허상의 무엇을 그려낸 그로테스크의 세계는 그 허상이 실재일 수 있는 수용자의 태도에서 현실에 대한 자각와 거울역할을 하게 되고 허위의식의 세계 속에 진정한 실재를 그로테스크예술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로테스크와 풍자에 있어서는 저자가 예로 든 독일문학가 모르겐슈테른이 이 둘의 별개성을 강조했듯 역사 안에서 구분지어 사용하려 했지만 현대예술세계에서는 그로테스크는 풍자가 가능하고 풍자가 그로테스크 적인 미학적 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이 둘이 같다고 말할 수는 전혀 없다. 그로테스크는 매우 주관적인 예술적 감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어떤 수용자에게는 그로테스크로 느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보편적인 그로테스크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하도 그 기준과 범위를 설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만큼 예술에서의 표현은 다양하며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이 창작에서부터 수용에까지 각각의 감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을 수용해도 그 개념은 여전히 주관적이다. 창작된 작품에서는 보편적인 그로테스크적인 미학적 측면을 전혀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 창작과정에서의 그로테스크적인 기법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이 창작과정이 관객에게 공유되었을 때 비로소 그로테스크 예술이 된다. 이처럼 다양해진 현대예술의 창작과정과 수용과정의 그로테스크라는 의미는 모호한 채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저자가 연구해 온 것처럼 지금까지의 그로테스크 예술의 발전과 그 역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다양한 예술의 표현이 발생하면서 늘 그로테스크적으로 예술계에서 읽혀졌지만 지금은 보편적인 여러 연극과 미술의 전파는 단지 표현의 차이로 인정되어 왔다. 이렇게 생각하면 새로운 표현의 탄생, 늘 그 지점들이 그로테스크와 예술의 개념 변화를 이끌어 온 포인트가 되었으리라 예상해볼 수 있다.
저자의 이 책은 1957년작으로 당시까지의 독일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가 중심이며 우리가 쉽게 그로테스크와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미술작품의 예 정도이다. 그 이후로도 그로테스크의 개념은 늘 변화해왔으며 명확한 그로테스크의 이미지적인 요소는 저자가 제시한 몇몇의 그림들처럼 전형적인 형태의 왜곡과 비자연적인 것의 배치이다. 현대의 이미지에서 수용자는 판타지라는 장르로 비자연적인 것에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저자가 그로테스크의 가장 독특한 감상으로 말해진 ‘생경함’만의 그로테스크를 더 이상 과거와 같게 감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오히려 ‘비천함’으로 표현되는 ‘좀비’ 식의 호러 표현법 정도가 당시의 그로테스크 예술에 가까우며 왜곡이 아닌 완전히 ‘드러냄’으로 충격을 주거나 창작 기법에서 기존 예술의 아우라를 파괴하려는 벤야민 식의 ‘거리 두기’ 기법들이 현대예술의 그로테스크 성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여성미술에서는 ‘드러냄’의 표현기법들은 전혀 왜곡되지 않았는데도 숨겨진 욕망 혹은 사회적 억압 속에 가려진 몸을 드러냄으로서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는 여성주의적 미술이 주도적이었는데 이는 기존의 풍자시와 연극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현실에 대한 저항적일 수 있는 그로테스크의 면모는 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로테스크는 이미지로 그 범위를 한정짓기 보다는 잠시라도 수용자로 하여금 그로테스크로 감상된 예술에 있어서 그 수용효과, 예술의 저항적 힘으로 그 성격과 개념을 정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저자는 우리가 지금 판타지로 말하는 과거 그로테스크의 면과 문학에서의 풍자적인 그로테스크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말했듯 사상과 문화와 예술적 경험과 표현의 충격의 개인차에 따라 표현과 수용의 다양성이 일어나고 그로테스크의 개념은 이제 개인적인 판단이지 더 이상 시대적 해석으로 일반화, 즉 개념사적인 측면을 논하기는 어려워졌다.
저자에 의하면 과거 그로테스크는 신과 같은 경외감의 존재, 심판과 처벌의 주체인 종교적 존재들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에서 동물과 결합하거나 형태의 왜곡으로 어느 정도의 생경함을 준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종교가 가진 공포의 힘, 공포의 정치에 가까웠으리라 생각하며 적어도 그로테스크적인 미술적 표현에 있어서는 당시 인간의 욕망을 풍자하고 종교적인 공포의 결합이 가져온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연구해온 그로테스크를 넘어서서 현재를 사는 독자인 우리는 좀 더 다양한 것에서 그로테스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전혀 그로테스크라고 여기지 않았던 현실세계라고 믿었던 세계가 오히려 그로테스크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하다, 기괴하다는 표현에 시각과 청각적인 표현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이제는 시각적인 것에서 뿐 아니라 청각적이고 촉각적인 감상을 시도하는 예술이나 일상에서도 그로테스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적 감상은 수용자의 몫이니 보다 다양한 그로테스크에 대한 수용자의 해석들이 논의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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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난다]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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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한 장 한 장에 저자의 시적인 에세이가 곁들여진다. 아마도 저자의 에세이가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오감을 표현하는 의성어 의태어들과 아름다운 우리 옛말들이 함께여서 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시를 쓰듯 저자는 그림을 읽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자연과 사람과 현 세계와 다른 세계를 오가며 짤막짤막한 동화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의 이야기가 그림에 대한 심도있는 해석의 성격이 아니라서인지, 아니면 감각적인 우리말들때문인지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옛 그림과 어울려 옛 구전노래처럼 리드미컬하게 들리는 듯 할 것이다. 내게 저자의 우리말들은 매우 이미지적이면서도 노래와 같았다. 그래서 그림 안의 소리와는 또 다른 오감의 그림읽기가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괘꽝스럽다’일지, ‘사랑옵다’와 같은 순 우리말들을 읽는 즐거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현대어에 익숙해지다 못해 자고 나면 늘어나는 신조어들 사이에서 우리의 옛말들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 듣기에도 재미난 옛말들은 우리에게 우리 옛말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느끼게 해줄 뿐 아니라 어린이나 청소년 교육에도 일말의 힌트를 제공할 것이라 생각된다. 한자어를 넘어서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과 신조 줄임말 등을 사용하는 우리에게 감각적인 순 우리말 표현들은 그저 언어가 아닌 그 자체로 오감을 자극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림 읽기로 유명한 저자인 만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거나 혹은 숨은 작가의 이야기까지 들려주고 있긴 하지만 전작과 그의 강연에 비해서라면 이 저서만큼은 읽는 이의 다양한 그림 읽는 감각을 일깨우는 데 자극을 주는 데서 멈추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래서 그림을 읽고 생각하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모처럼의 휴가들을 앞두고 휴식을 함께 할 책을 찾는다면 추천하고픈 책이다. 조영석의 <탁족>과 같은 옛 그림들과 상큼한 우리말이 가득한 동화 같은 에세이들을 읽노라면 휴식의 시간을 더 편안하게 이끌어줄 듯 하다. 요사이 몇몇의 옛그림이 등장하는 책을 만나면서 오래된 그림을 들여다보는 일은 빛바랜 종이처럼 내 시야를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휴가를 기대하고 있어서일까. 책 속의 그림들을 실물로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즐거워진다. 저자가 잘 메모해준 그림 목록의 소장처를 찾아 도시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에서 휴식을 옛그림을 직접 만나보는 기회로 삼아도 좋겠다. 저자가 알려주는 이름 몰랐던 옛 그림의 작가 소개를 읽으며 말이다.  

사진 혹은 영화 속의 이미지들처럼 과거의 시공간, 그 순간의 박제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를 재현하지 않고 해석되거나 온전히 작가의 역량으로 해석되는 그림들 속의 모두는 나이 들어버리거나 이미 박제된 과거일 뿐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아마도 그림 속의 모델이 된 자연과 인물들은 대를 거듭해가며 대체되고 변화한 모습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겠지만 사진처럼 그림 속 인물과 자연은 그때 그대로의 순수성을 가지고 있다. 때로 상상의 세계가 그림 속에 등장하더라도 당시의 세계관의 바탕이 되었을 그 시공간의 모습을 닮아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현재를 사는 우리의 희노애락과 삶과 피안에 대한 상상을 보게 된다. 
 옛 그림 하면 수수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떠올리기 쉽지만 때로 익살스럽고 때로 힘이 넘친다. 18세기 이인상의 그림 <소용돌이 구름>은 마치 현대미술가 김중섭의 ‘소’들처럼 역동적이어서 감정분출의 대리만족이 느껴지기도 한다. 또 내가 옛그림에서 매번 가장 감동하는 것은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묘한 기운을 느껴진다는 것인데 저자 또한 <계산포무도>의 글에서 ‘소리가 들리는 그림’이라고 소개한다. 저자의 표현대로 ‘인간의 속기마저 털고’ 가는 바람, 그 바람의 소리가 들리는 그림은 눈 뿐 만 아니라 귀마저 개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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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만주영화협회와 조선영화
김려실 (지은이) | 한국영상자료원 | 2011-06-28

최근의 한류처럼 만주영화협회와 당시의 조선영화와의 관계도 엿볼 수 있을 듯 하다. 최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까지, 우리나라의 일제시대의 만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 대한 담론의 실마리가 될 법도 하다. 이 책을 통해 한국영화사의 실종된 한 부분을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이택광 (지은이) | 자음과모음(이룸) | 2011-06-30

2000년대의 문화현상을 통해 사회를 읽고 있는 책으로 예상된다. 죄다 소비적인 문화 속 안에서 나는 문화의 주체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나와 사회와 관계와 사회의 현주소까지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네마 온더로드
유재현 (지은이) | 그린비 | 2011-06-15

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실제의 아시와 역사와 이야기 안의 아시아의 모습은 시각의 차이에 따라 재현도 다를 것이다. 시네마 온더로드에서 아시아의 근현대사 뿐 아니라 비춰지는 아시아, 보여지는 아시아에 대한 사유까지 자극되길 바란다.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안도 다다오 (지은이) | 이기웅 (옮긴이) | 오픈하우스 | 2011-06-12

건축가의 여행은 건축에 그 포커스가 맞춰져 있을 것이다. 특히 안도 다다오의 콘크리트에 대한 사유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건축가의 사유를 건축을 보는 수용자의 입장에서가 아닌 그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로 듣는 매력이 있을 듯 하다.

 

 

 

느낀다는 것
채운 (지은이) | 정지혜 (그림) | 너머학교 | 2011-06-01
예술과 감정의 간극에서 매개하고 있는 선생님의 이야기라 호기심이 인다. 주입식이 아닌, 모든 걸 예측하고 감정을 한정시키는 감상이 아닌 적극적인 관객을 이끌 가이드가 될 책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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