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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인류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사실 달랐을 수 있다. 과거가 되어버린 역사란 실제로 보고 들은 것이 아니어서 왜곡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니 설사 실제로 보고 들었다 할지라도 개인에 따라 다르게 느끼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의 신빙성에 대해서란 회의적이다. 만약 하나의 사실로 이루어진 하나의 역사만 있었더라면 역사를 연구하는 직업이란 필요성이 의심스러워진다. 사실의 축이 있는데 굳이 또 다른 고증 자료를 찾고 해석할 역사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그 연구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거를 재구성하고 고증하려는 노력은 당시대에 따라 재해석하는 사실 자체가 현재를 반영하는 역사가 되기도 하고 새롭게 조명되는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려는 노력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미술사 또한 다름 아니다. 제목이 서양미술사가 아니라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라는 점에 주목하자. 지금까지의 서양미술사를 완전히 뒤집는 것은 아니지만 현 시점의 미학적 관점과 한 미학가의 시점이 얹혀 진중권의 서양미술사가 탄생했다. 시대에 따라 역사가 재조명되듯 미술사 또한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감한다. 저자의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앨프레드 바의 현대예술 다이어그램에 다르지 않은 현대의 예술비평에 대한 저항적 재해석이다. 미술사 중 단기간에 쏟아진 새로운 예술혁명이 많았던 20세기 초반은 가장 흥미로운 시도들이 많았던 때이기도 해서 저자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이 더욱 재미있게만 느껴진다.
제들마이어의 현대예술의 뿌리인 순수, 근원, 광기, 기술적 구축의 충동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저자의 서양미술사는 원근법을 벗어나 오로지 형과 색의 순수함을 지향해서 그 정점까지 찍은 말레비치에서 다른 장르와의 공유점을 가져야 했던 기술적 구축의 의지에서 나온 구축주의와 데스테일, 바우하우스 등의 실용적 예술운동, 무의식의 자동기술에서 철저히 의식적으로 구축된 달리의 초현실주의 등, 정점에서 다시 모순으로 빠지는 끊임없이 솟아난 현대미술 예술선언과 작품을 제시하고 있다.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달리의 초현실주의 모순점이 보이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 저항하면서 부르주아의 소비와 동전의 양면처럼 접합되어 있는 미술운동이 사실 그 혁명이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공공미술가로서 지배사회에 편입되어야 할 것이라는 웃지못할 모순에 대해서 언젠가 들었던 저자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예술혁명은 키치를 지향해야 하는가. 파쇼와 자본주의 미술계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아방가르드 혁명은 진정 성공할 수 없는가. 이는 예술이 트리비얼화 되는 것, 예술가 스스로 트리비얼화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고 사실 미술가들의 고급안목으로 스스로 키치 생산가가 되기란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저항과 파기를 반복하다보면 그 반복마저도 클리쉐가 된다. 자기 거부가 가져온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모더니즘 시대의 수많은 미술혁명선언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끊임없는 그들의 시도에 대해 예술가라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지식인이든 교육의 목표뿐 아니라 시대에 바른 의견을 반영하고자 노력(실천)하는 자만이 지식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지식인의 역할이란 바로 그 지점에 있다고 생각해볼 때 그들의 선언은 예술계의 변화를 추구한 실천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 시대에 각각의 시점에서는 아방가르드 하지 않은 유파는 없었으며 당시는 늘 새로움을 추구해왔다. 순수한 미술을 꿈꾸거나 반예술을 꿈꾸어 실용과 결합하거나 미술의 고급성을 버리거나 의식적인 것을 버리거나 그들의 시도가 예술의 개념을 변화, 변형 시켜왔던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변형은 예술의 개념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대안예술로서의 키치의 의미에 매우 부합해보이지만 넓은 의미의 키치라면 그 또한 동의할 수 있다. 예술개념의 확장은 결과적으로 고급문화로서의 미술의 소비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며 이는 소장의 소비가 아니라 단지 이미지의 소비를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술과 대중과의 간격을 축소시킴으로써 예술 자체의 입지 또한 결과적으로는 넓혔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야수주의의 용어, 피카소와 브라크의 콜라주의 입체성등에 대한 새로운 이슈들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칸딘스키의 형태의 의미에 대해 읽으려 애썼었는데 그가 지향한 색채의 성향에 듣고보니 좀더 풍부하게 그의 그림을 읽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형태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그의 초현실주의적 표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모든 미술사조가 확연히 구분되기보다는 상당한 접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래서일까. 네 현대예술의 충동으로 구분된 아방가르드 예술은 오히려 시대구분된 미술사보다 보다 명확하게 파악되는 희한한 경험이었다.
미래주의에서는 사진과 필름의 미래주의성이 자꾸 떠올랐으며(이는 저자가 이 부분을 재미있게 설명해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부가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미술을 중심으로 한 책의 취지상 선을 넘지 않으려는 분명한 저자의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표현은 미래주의적이지만 기법은 전혀 미래주의적이지 못했던 그들의 한계에 대해서도 저자와 함께 거북해했다. 서양미술사을 일대기적으로 정리하기를 시도하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그와 함께 비판적으로 미술사 안의 각각의 작품을 들여야볼 수 있는 시선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와 함께 독서하기를 권하고 싶다.
예술은 예술가를 둘러싼 사건, 사회적,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그 사조 출현, 작품생산 등의 동기가 다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나, 저자는 미학적 시점을 집중적으로 들이댐으로써 잘못 접근해왔던 작가의 작품까지를 생각하게 한다. 간혹 한 작가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 추구하는 바에 따라 각기 다른 사조의 경향을 보였거나 모순적 작품을 양상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떤 서양미술사가 정답일리는 없다. 우리가 역사를 절대적으로 고증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순간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떠오른다. 저자의 시점이 또 정답이 아닌 것처럼 독자, 혹은 감상자 각각의 해석이 그들의 예술혁명성과의 접점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혁명성에서 예술이 장식용이 아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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