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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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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한 장 한 장에 저자의 시적인 에세이가 곁들여진다. 아마도 저자의 에세이가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오감을 표현하는 의성어 의태어들과 아름다운 우리 옛말들이 함께여서 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시를 쓰듯 저자는 그림을 읽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자연과 사람과 현 세계와 다른 세계를 오가며 짤막짤막한 동화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의 이야기가 그림에 대한 심도있는 해석의 성격이 아니라서인지, 아니면 감각적인 우리말들때문인지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옛 그림과 어울려 옛 구전노래처럼 리드미컬하게 들리는 듯 할 것이다. 내게 저자의 우리말들은 매우 이미지적이면서도 노래와 같았다. 그래서 그림 안의 소리와는 또 다른 오감의 그림읽기가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괘꽝스럽다’일지, ‘사랑옵다’와 같은 순 우리말들을 읽는 즐거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현대어에 익숙해지다 못해 자고 나면 늘어나는 신조어들 사이에서 우리의 옛말들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 듣기에도 재미난 옛말들은 우리에게 우리 옛말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느끼게 해줄 뿐 아니라 어린이나 청소년 교육에도 일말의 힌트를 제공할 것이라 생각된다. 한자어를 넘어서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과 신조 줄임말 등을 사용하는 우리에게 감각적인 순 우리말 표현들은 그저 언어가 아닌 그 자체로 오감을 자극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림 읽기로 유명한 저자인 만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거나 혹은 숨은 작가의 이야기까지 들려주고 있긴 하지만 전작과 그의 강연에 비해서라면 이 저서만큼은 읽는 이의 다양한 그림 읽는 감각을 일깨우는 데 자극을 주는 데서 멈추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래서 그림을 읽고 생각하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모처럼의 휴가들을 앞두고 휴식을 함께 할 책을 찾는다면 추천하고픈 책이다. 조영석의 <탁족>과 같은 옛 그림들과 상큼한 우리말이 가득한 동화 같은 에세이들을 읽노라면 휴식의 시간을 더 편안하게 이끌어줄 듯 하다. 요사이 몇몇의 옛그림이 등장하는 책을 만나면서 오래된 그림을 들여다보는 일은 빛바랜 종이처럼 내 시야를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휴가를 기대하고 있어서일까. 책 속의 그림들을 실물로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즐거워진다. 저자가 잘 메모해준 그림 목록의 소장처를 찾아 도시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에서 휴식을 옛그림을 직접 만나보는 기회로 삼아도 좋겠다. 저자가 알려주는 이름 몰랐던 옛 그림의 작가 소개를 읽으며 말이다.  

사진 혹은 영화 속의 이미지들처럼 과거의 시공간, 그 순간의 박제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를 재현하지 않고 해석되거나 온전히 작가의 역량으로 해석되는 그림들 속의 모두는 나이 들어버리거나 이미 박제된 과거일 뿐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아마도 그림 속의 모델이 된 자연과 인물들은 대를 거듭해가며 대체되고 변화한 모습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겠지만 사진처럼 그림 속 인물과 자연은 그때 그대로의 순수성을 가지고 있다. 때로 상상의 세계가 그림 속에 등장하더라도 당시의 세계관의 바탕이 되었을 그 시공간의 모습을 닮아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현재를 사는 우리의 희노애락과 삶과 피안에 대한 상상을 보게 된다. 
 옛 그림 하면 수수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떠올리기 쉽지만 때로 익살스럽고 때로 힘이 넘친다. 18세기 이인상의 그림 <소용돌이 구름>은 마치 현대미술가 김중섭의 ‘소’들처럼 역동적이어서 감정분출의 대리만족이 느껴지기도 한다. 또 내가 옛그림에서 매번 가장 감동하는 것은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묘한 기운을 느껴진다는 것인데 저자 또한 <계산포무도>의 글에서 ‘소리가 들리는 그림’이라고 소개한다. 저자의 표현대로 ‘인간의 속기마저 털고’ 가는 바람, 그 바람의 소리가 들리는 그림은 눈 뿐 만 아니라 귀마저 개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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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만주영화협회와 조선영화
김려실 (지은이) | 한국영상자료원 | 2011-06-28

최근의 한류처럼 만주영화협회와 당시의 조선영화와의 관계도 엿볼 수 있을 듯 하다. 최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까지, 우리나라의 일제시대의 만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 대한 담론의 실마리가 될 법도 하다. 이 책을 통해 한국영화사의 실종된 한 부분을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이택광 (지은이) | 자음과모음(이룸) | 2011-06-30

2000년대의 문화현상을 통해 사회를 읽고 있는 책으로 예상된다. 죄다 소비적인 문화 속 안에서 나는 문화의 주체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나와 사회와 관계와 사회의 현주소까지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네마 온더로드
유재현 (지은이) | 그린비 | 2011-06-15

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실제의 아시와 역사와 이야기 안의 아시아의 모습은 시각의 차이에 따라 재현도 다를 것이다. 시네마 온더로드에서 아시아의 근현대사 뿐 아니라 비춰지는 아시아, 보여지는 아시아에 대한 사유까지 자극되길 바란다.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안도 다다오 (지은이) | 이기웅 (옮긴이) | 오픈하우스 | 2011-06-12

건축가의 여행은 건축에 그 포커스가 맞춰져 있을 것이다. 특히 안도 다다오의 콘크리트에 대한 사유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건축가의 사유를 건축을 보는 수용자의 입장에서가 아닌 그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로 듣는 매력이 있을 듯 하다.

 

 

 

느낀다는 것
채운 (지은이) | 정지혜 (그림) | 너머학교 | 2011-06-01
예술과 감정의 간극에서 매개하고 있는 선생님의 이야기라 호기심이 인다. 주입식이 아닌, 모든 걸 예측하고 감정을 한정시키는 감상이 아닌 적극적인 관객을 이끌 가이드가 될 책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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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속의 영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유 속의 영화 - 영화 이론 선집 현대의 지성 136
이윤영 엮음.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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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속의 영화’는 영화이론선집으로, 영화를 읽는 현대비평의 초석이 된 논문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192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선별된 이 아티클들만으로 영화 비평의 흐름을 한눈에 보기란 어렵겠지만 영화로 사유하던 유럽철학의 정점에 있던 주옥같은 아티클을 한권의 번역서로 만나 볼 수 있을 기회란 앞으로도 많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영화이론의 필독서들로 채워져있지만 우리는 이 아티클로 인해 영화 뿐 아니라 세상과 미디어를 읽는 비평의 여러 기준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사회주의적 비판 등의 정치적 비평과 기호학적 비평에 대한 좋은 접근법을 찾는 데 영감을 줄 것이다.
단권만으로 영화비평이론을 섭렵하려 하기 보다는 여러 이론서 혹은 각 아티클의 주인공들인 학자들의 글이 많이 실린 다른 번역서들을 참고하면서 학자의 의견의 앞뒤 맥락과 번역의 오류 등을 짚어가면서 공부해나간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영화이론 공부가 될 것이다. 영화이론 공부가 막연했다면 이 한권에서 학자들의 여러 다른 아티클로 가지를 쳐 나가는 독서를 권유하고 싶다.
영화이론서들의 직독직해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그렇게 했듯 가독성보다는 의미의 오류를 견제하는 것이 조금 느리더라도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저자 또한 가독성보다는 의미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몇몇 번역서의 의역과 번역의 오류를 바로 잡고자 한 시도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에 ‘사유 속의 영화’는 더욱 어려운 독서가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다른 영화이론 번역서, 특히 이 책에 실린 아티클 중 번역된 몇몇의 논문의 기존 번역서들보다는 (앞뒤 문장이 바로 번역되어서인지) 더 현대적인 표현과 현재 철학용어로 표현되어 있어서 직역되어 있으면서도 시기성을 고려한 부분이 엿보인다.(기존의 번역서들이 쉬운 풀이문장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의역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벤야민의 논문에서 가장 잘 알게 되었다.)
영화이론서에서는 기본적인 영화의 용어들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쇼트와 프레임, 미장센, 앵글, 정사-역사, 몽타주, 데쿠빠쥬 등의 용어들이 이미 독자들의 사전지식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사유 속의 영화’와 같은 영화이론서들을 처음 맞딱뜨리는 일반 독자에게는 용어의 정확한 이해때문에라도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지는 기호학 용어와 정신분석학 용어, 정치학 용어 들의 등장은 독서를 더디게 만든다. 이에 더해서 이처럼 초기 영화 연구 논문들은 당시의 영화들을 텍스트로 하고 있어서 현대영화를 많이 접하는 일반 독자에게는 전혀 사례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점도 한 몫 거든다.
그러나 이 독서를 필두로 영화사에 의미있는 초기영화들을 접할 기회를 가지고 그 매력을 당시를 치열하게 논쟁했던 학자들의 논의와 함께 한다면 불가능 한 일도 아니다. 게다가 영화를 읽는 과정은 당시의 영화를 다르게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지금 어느 영화를 보아도 지금의 사회상과 연결된 영화의 플롯들과 각 장면의 의미, 편집의 의도 등을 사유하게 하여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을 키워준다.
에이젠슈테인의 글은 영화이론에 문외한인 이에게도 영화의 제작과정이 이루어내는 사실이 아닌 시공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쇼트와 또 다른 시공간의 쇼트 혹은 부분을 재현한 쇼트 등의 몽타주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영화의 사실성과 환상성에 관한 것이므로 책의 첫장을 여는 에이젠슈테인의 글에서 이러한 쇼트가 만들어낸 영화의 환상성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자신의 눈높이보다 약간 위쪽을 응시하는 쇼트 바로 다음에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는 쇼트가 편집되었다면 관객은 그 누군가가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고 있다고 인지할 것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촬영되었다 하더라도 영화의 쇼트와 편집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진적 현실복제에서 나아가 실제보다 많은 생략 혹은 재구성으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아른하임의 글에서는 영화의 예술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에르빈 파노프스키와 벤야민에 이르기까지 저급문화로 치부되었던 영화를 예술로 볼 것인가에 대해 영화와 현실의 재현적 차이에서 오는 예술성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심리학이라는 말로와 퐁티의 논문도 이 흐름의 연장선에서 읽는 것이 가능하다. 영화제작을 이루는 연기와 촬영에서 생겨난 영화 언어와 문법의 발생(클로즈업을 비롯한)을 살펴보면서 각 저자와 함께 영화가 예술로서의 독특한 양식창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리고 과연 그러한 문법은 분명 심리학적으로 관객에게 어떤 효과로 다가갈 것인지 영화의 시각적 효과(특히 무성영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될 것이다.
앙드레 바쟁에 이르러서 우리는 이미지의 객관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연 그대로를 복제하는, 인간의 개입이 없는 쇼트에서 자연재현이라는 기준을 들이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롱쇼트의 롱테이크인 장면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연출 혹은 후반작업이 없으리라는 신뢰를 할 수 없을테지만 이는 보도영상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연출된 장면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생각할 때 영화의 사실성을 그 본질로 생각해야 할지, 그 본질을 인간의 창조적 개입이 있는 재구성의 예술로 여겨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그 어느 쪽도 옳거나 그를 수 없다. 누군가의 이론들은 비판을 받고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지만 그 어느것도 사장되는 영화이론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대의 우리는 사진의 리얼리즘적 요소를 늘 의심하고 영화 또한 현실 그 자체를 옮기는 쇼트의 존재도 의심한다. 이런 지금에 영화의 사실성과 환상성을 운운하며 어떤 것이 옳은 재현인가를 논의하거나 어떤 것이 사실인지 구분해내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논의는 자칫 의미없어 보일 수 있으나 아직까지 다큐멘터리와 재현, 영화적 재현에 있어서 새로운 영화언어와 작가들만의 문법 창출, 다양한 양식에 대한 논의의 여지는 남는다. 이러한 논의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오래 전 학자들의 영화이야기는 헛되지 않다. 모든 철학과 영화이론에 있어서는 누군가의 비판을 받았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언어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기존의 언어학과 기호학의 잣대를 영화에도 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메츠의 영화기호학은 영화학도들에게는 교과서와도 같을텐데 66년의 이 논문에 이르면 앞의 여러 논문의 이론들을 아우르는 비평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영화편집에서 쇼트와 쇼트의 연결인 페이드와 디졸브의 시각적 효과에서도 생각할 수 있듯, 영화(영상작업)에서의 쇼트의 크기와 앵글과 조명 등의 모든 요소는 이미지의 언어가 된다. 쇼트는 메츠의 말대로 단어 하나가 아닌 ‘발화’이며 아직까지는 시각적 언어에 치중한 해석이지만 이를 읽는 우리는 사운드(대사, 음향, 음악 혹은 무성 등)의 영화언어적 모습에 대해서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산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의 양산물로 영화산업이 전락해가고 제작에서 배급까지 독점적인 영화생산이 이루어짐에 따라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해석이 더 활발해진다. 영화의 주체인 관객이 영화의 정사-역사에 몰입함으로써 관객 자신을 부재시켜버리는 봉합이 이루어지는 영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영화가 영화임을, 그리고 관객 자신의 위치를 자각시키는 영화제작사례를 읽는다. 이는 영화가 무의식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고 영화의 형식의 문제 또한 지적하는 지점이 된다. 영화의 이데올로기 논의는 언뜻 네러티브만을 연상하기 쉽지만 플롯이 나닌 영화생산 자체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한 인물에 대한 호명으로 인한 무의식적 학습 등 영화 내외 적 모든 요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의미한다. 코몰리와 나르보니의 논문에서 제시하는 여러 영화의 범주들로 지금 우리가 보는 영화들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여기에서 강조하는 영화비평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영화의 주체이어야 하며 이러한 기존의 담론을 현대의 영화들로 이해할 필요성 또한 느낄 것이다. 현대영화의 비평을 곁들인 저자의 논의가 있었더라면 일반독자들에게 훨씬 이해가 쉬워졌겠지만 이는 또 하나의 재구성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되니 오역의 가능성이 생긴다. 아마도 저자는 학자들의 글 자체가 문장 자체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기획의도에서 모든 가능성을 배제시키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정신분석학과 시각의 메커니즘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해석이 되기도 한다. 장-루이 보드리의 논의에서 나아가 ‘시각과 현대성’(주은우, 한나래) 등의 시각예술에 대한 책들이 참고가 될 것이다. 카메라의 눈의 권력을 생각해 볼 일이다. 이는 영화 안의 봉합의 의도(의도가 없었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재현하는)를 읽어내는 키워드가 된다.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한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재현하는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영화가 저항의 역할을 해야하는가. 영화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가능성이 있으려면 현실재현에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를 비롯한 여러 학자가 말한다. 그저 보여줘버리는 것, 그 리얼리즘을 가장한 (우리가 아는 스펙터클은 이렇게 왜곡된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 키튼의 슬랩스틱과 마술과 같은 스펙터클에서 과장된 표현주의의 상징적 스펙터클로 그리고 비천함(자크 리베트)과 파괴의 완전히 드러난 스펙터클은 이미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있다) 카메라의 권력적 시선에서 곁눈질로 관객의 적극적인 개입을 이끌어내는 영화를 옹호하는 시선들까지 아직까지 이러한 논의는 다양성이라는 이름아래 지속되어 오고 있다. 물론 영화들의 다양한 생산과 시도만큼이나 독점적 배급을 벗어난 다양한 소비까지를 아직 기대할 수는 없지만 생산의 시도는 고무적이다.
영화평론가만이 영화비평과 제작의 인터랙션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소셜 네트워크시대에 문화소비의 대상이 대중인만큼 모든 관객이 비평의 주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뿐 아니라 모든 재현된 이미지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모든 관객에게 중요하다. 의미의 재생산이 아닌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고 비판적 시선으로 생산과 이미지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본 혹은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읽어내는 작업들이야 말로 저항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인터랙션을 이끌어낼 것이다.

도움이 될 만한 더하는 독서 :
영화서술학(앙드레 고드로, 프랑수아 조스트)
영화분석의 패러다임(자끄 오몽, 미셸 마리)
현대영화이론의 이해(로버트 랩슬리, 마이클 웨스틀레이크)
영화-존재의 이해를 위하여(김성태)
시각과 현대성(주은우)
공포의 권력(줄리아 크리스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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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 - 우리 건축의 구조와 과학을 읽다
김도경 지음 / 현암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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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여는 글이 겸손하다고 생각했다. 책을 덮은 지금은 이 책의 저자가 너무도 겸손했구나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한국건축양식에 대해 초석에서부터 창호까지 꼼꼼히 제시하고 다양한 사례를 보여준다. 우리는 한국건축양식 하면 한옥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한국의 석축과 목축 할 것 없이 석탑, 목탑, 정자, 성, 성문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건축의 다양성을 보게 되었다. 한국건축의 역사라고까지는 할수 없겠지만 우리 건축의 토대를 이룬 사상과 지배계층과의 차별성 등의 다양한 건축양식의 발생을 설명하고자 선사시대의 건축양식을 짧게 설명하고 있기도 하고 우리 건축의 발전과 고대도형학 연구의 관계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건축의 넓은 범위를 공부하면서 건축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하나하나 공부하는 계기도 되었다. 건축일을 하지 않는 이상 불필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먼 미래라도 자신의 집 짓기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옥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는 더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에서는 비교대조를 위해 외국(중국와 일본)의 사례가 등장하기도 하고 한국건축에 사용되지 않았더라도 다른 건축양식이 있다면 설명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해를 도울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건축양식에도 관심을 가질 기회를 주는 듯 하다. 베트남 어디에선가 들렀던 옛 부족들의 건축양식 박물관이 떠오른다. 다양한 민족의 옛 집과 생활도구들이 모인 공원식의 박물관에서 각 부족의 자연과 종교와 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우리의 건축을 보면서도 우리의 자연과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순서가 집의 각각의 부분을 논하는 것 같지만 읽다보니 집을 보는 큰 그림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이다. 멀리에서 집을 내려다 보았다가 건물의 외부를 감상하고 창호문을 열고 집의 천장까지를 올려다본다.

우리가 모호하게 과학적이라더라고 알고 있던 한국전통건축이 어떻게 과학적인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어려운 건축 비례는 차치하고서라도 하지와 동지의 남중고도의 각도를 고려해 겨울에는 해가 실내 끝까지 들게 하고 여름에는 차단하며, 수납공간이 되면서도 빗물의 들이침을 방지하는 처마에 감탄하게 될 것이고 사람의 앉았을 때 팔걸이를 할 만한 적합한 높이에 난간과 머름의 높이를 두는 것에서도 그 운치과 함께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의 집들도 모두 이렇게 과학적이고 인간중심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한국건축, 특히 이런 한옥의 모습에서는 그 편리함보다는 마음의 높이와 크기가 더 중요시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방의 독립성을 위해 만들어진 아파트들의 좁은 복도는 나의 신체의 크기에는 딱 들어맞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의 편안함을 주는 너비들은 아니다. 도시를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각자에게 주어지는 공간이 협소해지는 까닭에 현대 아파트의 인체공학적 설계란 딱 우리의 몸집과 키만큼인지라 그 마음의 여유까지 딱 그만큼으로 차단시키고 만다. 지금의 아파트에는 생활할 공간만 있고 사유할 공간은 없는 듯 하다. 사유란 것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집이라는 공간에서 자연을 경외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일 사유할 여지 마저 차단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우리가 한옥을 그리워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책에 실린 한국 건축물 지도를 따라 여행길에 올라도 좋을 일이다. 10분이면 둘러보았을 사찰이 종일 들여다 보아도 새롭게 보일 듯 하다. 책을 보면서도 ‘아. 할머니 댁의 그 마루는 쪽마루고 그쪽은 툇마루였구나...토방이 이 ’기단‘이라는 건가보다......기단은 이래서 필요한거구나......아, 이거 기억나는데 이걸 들어열개하고 하는구나.....’하면서 기억 속의 한국 건축을 되짚어 보게 되니 말이다. 석탑 하나, 기둥 하나, 서까래 모양이며, 초반석과 초석의 모양까지 이곳저곳을 보게 될테니 대한민국 땅이 갑자기 넓게 느껴지기 까지 한다. 특히 들어열개(여러짝의 문을 포개서 위로 들어올려 고정할 수 있는 문)을 어렸을 적에도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들어열개는 저자의 말대로 ‘공간이 쉽게 분할되고,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가변성’을 갖게 한다는 점이 과학적이고도 열린 집이라는 느낌을 준다. 보호하는 집의 역할에서 차단하지 않는 공간을 연출한다는 점이 그냥 창문을 여는 개념과는 다른 열린 느낌을 주어서 매력적이다.

최근 TV에서 한옥건축 전수교육을 받는 이의 인터뷰를 잠깐 본 기억이 있다. 화천한옥학교의 교육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교육자의 길을 걷다가 돌연 한옥건축가로 꿈을 가지게 된 경우였다. 그 교육생들의 삶이 왠지 수도승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무를 만지고 사람을 위한 집을 짓는 일은 무언가 마음을 비운 이타심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노라니 더욱 그런 마음이 강해진다. 목재의 아귀를 맞추는 그들에게서 더욱 장인의 멋이 난다. 장인들의 교육이 가업 세습 위주에서 전문교육의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는 모습 또한 아름다운 한국전통건축교육이 희망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렸을 적 살았던, 작지만 한옥이었던 그 집이 생각난다
. 요사이 유명 고급 아파트 CF에서 집에 가는 것이 행복한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아파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뉘앙스를 주는 것에 웃음이 난적이 있다. 내겐 그 한옥이 그렇다. 작은 툇마루의 오후 햇살이 늘 그립다. 그 툇마루에서 책 베고 다른 세계로 빠지고 싶은 건지 그 툇마루에 눕는 것이 내가 꿈꾸는 다른 세계인지나 생각하면서 글 읽고 땅 일구고픈 꿈을 꾸게 하는 집이다. 비오는 날이면 처마를 거쳐 토방 너머로 떨어지는 낙수를 세며 컴퓨터와 휴대폰에서 해방감을 만끽하고픈 꿈을 꾸게 하는 집이다.
전주 한옥마을에서의 하룻밤도 더 새록새록 떠오른다. 두껍지만 가볍고 차가운 옥양목의 감촉이 좋은 목화솜 이불을 덮은 채 아침 햇살 들어오는 창호문을 여는 기분을 다시 느끼고파 진다.

일반 독자의 한국건축에 대한 경험은 이런 나의 감성적 시선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일반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건축을 공부하는 건축학도 수준의 심도 있는 한국건축학에 가깝지만 한국가옥을 아끼는 일반 독자에게도 한국 전통 건축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단련시켜줄 것이 분명하다. 그 아름다움을 다시금 느낄 뿐 아니라 소중한 자산이며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더 잘 살 수 있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우리는 상당시간을 콘크리트 건물의 유리창 안에 들어가 사는 삶을 꿈꾸지만 정말 인간을 위한 집을 우리가 버리고 상자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저자가 들려주는 한국건축은 나무와 흙과 종이와 쇠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의 건축은 편리함보다는 편안함과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사상 아래 빚어지는 듯 하다. 아마 한옥장인들이 더욱 수도승같은 장인처럼 보이는 이유도 이런 느낌 때문인 듯 하다. 산의 모양에 거스르지 않는 자연의 일부가 되는 초가지붕의 형태처럼 우리가 사는 집도,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잊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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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 - 영화와 광고로 본 문화의 두 얼굴
김선희 (지은이), 송진욱 (그림) | 풀빛 | 2011년 5월

영화, 광고, 드라마... 수많은 미디어 매체들에게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광 미디어 소비자가 되어간다. 잠시 멈춰서서 미디어 소비자로서의 자신을 밖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책으로 기대된다. 수많은 광고가 미디어 안에서 바로 우리의 지갑과 연결되고 우리의 마음과 정신, 사상에 영향을 끼친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이 모든 화학작용을 명쾌하게 밝혀줄 책이 되길 바란다.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은이), 이지혜 (옮긴이)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먼저 미술 뿐 아니라 문학에 있어서 그로테스크까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라 여겨진다. 연극과 소설, 시 안의 그로테스크를 살펴보고 현대의 미학적 관점에서의 그로테스크의 위치는 어떠할까. 그로테스크에 대한 연구의 흐름 또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강유정 (지은이) | 민음사 | 2011년 5월

문학평론가이자 영화평론가인 저자라니 이력이 이채롭다. 그 이채로움만큼 새로운 영화평을 만나길 기대한다. 좋아하는 영화들 투성이인 이 책에서 다른 관객을 만나는 기분으로 대하고픈 마음이 든다. 그 다른 관객인 저자와 이야기나눌 준비를 하고... 이터널 선샤인으로... 피아니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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