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봉건 국가들과 봉건 영주국, 자치 도시, 새로운 왕조에서 모습을 갖추어 가던 무장 세력들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한 필요성은 기마 전투를 유일한 업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의 이유로 삼는 전문적인 전사 계층을 출현하게 만들었다... 문헌 자료에서 확인된 이들을 정의하기 위한 이름은 원래 의미(군인)에 비해 많은 제약을 지닌 전통적인 '밀레스 miles' 였지만, 독일과 잉글랜드에서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인 리터 Ritter와 나이트 knight는 과거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무장 노예와 동일시 한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p196)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중세2, 1000 ~ 1200) 中


 서양 중세(中世) 시대를 특징짓는 계급은  단연 '기사(knight)'다. 그리고, 이들 기사를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이 무훈시(武勳詩, Chanson de geste)이며, 그 중에서도 <롤랑전(롤랑의 노래) La chanson de Roland>은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피레네 남부 지방에서 사를마뉴 대제(Charlemagne, AD 742 ~ AD 814)의 원정군 일부가 이슬람 군에 의해 습격된 작은 사건을 미화(美化)한 이 작품은 후대 무훈시의 기본적인 틀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무훈시는 주로 봉건계급 남성들이 가장 관심을 두었던 전투와 봉건정치를 주된 주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무훈시의 최고 걸작인 <롤랑의 노래>는 우선 사를마뉴의 궁정에서 롤랑과 가늘롱(Ganelon)이 벌이는 정치투쟁으로 시작된다. 다음에는 대전투가 있고, 이 전투에서 롤랑과 그의 동료들은 무수한 사라센인을 죽인다. 기독교인사이의 봉건적 전쟁을 사라센인에 맞선 전쟁으로 바꾸어 놓은 무훈시도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모든 무훈시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p457) <서양 중세사> 中


 전쟁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작품 전체에 넘치는데 이러한 전투 장면의 서술은 호메로스(Homeros, BC 8세기 ?)의 <일리아스 Ilias>를 연상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전쟁의 원인이 아닐까. <롤랑전>의 전쟁은 종교(宗敎)전쟁이고, <일리아스> 전쟁은 한 여인의 납치에서 비롯된 전쟁이라는 차이를 제외하고 두 작품은 여러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롤랑의 노래 (출처 : https://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europe/chanson-de-roland.htm)

 

 (93) 롤랑은 말에 박차를 가하여 전속력으로 내닫는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하여 아엘롯에게 일격을 가한다. 아엘롯의 방패가 먼저 깨지고, 다음에 갑옷이 찢어진다. 그의 가슴팍이 열리고 뼈다귀들이 부러지더니 척추가 쪼개진다. 롤랑이 그의 몸통 깊숙이 창날을 처박아 거칠게 뒤흔드니, 영혼이 육신을 떠나고, 몸뚱이가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동시에 목이 부러진다.(p79)  <롤랑전> 中


  (제22권 322 ~ 327) 그런데 그의 살갗의 다른 부분은 그가 강력한 파트로클로스를 죽였을 때 빼앗은 아름다운 청동 무구들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쇄골이 어깨에서 나와 목을 감싸고 있는 부분, 즉 목구멍만은 드러나 있었으니 그곳은 치명적인 급소다. 바로 그곳으로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덤벼들어 창을 밀어 넣자 그의 부드러운 목을 창끝이 곧장 뚫고 나갔다.(p604) <일리아스> 中


 <롤랑전>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된 것은 롤랑의 독단(獨斷) 때문이다. 먼저 출발한 샤를마뉴에게 뿔피리를 불어 구원을 청하라는 동료 올리비에의 요청을 롤랑은 다음의 말로 거절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과 동료들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85) "이교도들 때문에 내가 뿔피리를 불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나타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오! 나의 혈족들이 그러한 이유로 지탄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싸움이 격렬해져 내가 수천 번 거듭하여 적을 치리니, 뒤랑달의 날이 선혈로 젖어 있음을 보시게 될 것이오.'(p73) <롤랑전> 中


 <일리아스> 역시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킬레우스의 죽음에 이르는 결정적 계기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때문이었고, 이러한 결과는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아킬레우스의 전선 이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16권 56 ~ 63) 아카이오이족의 아들들(아가멤논)이 내게 명예의 선물로 골라준 소녀(브리세이스)를, 그것도 내가 훌륭한 성벽의 도시를 함락했을 때 내 창으로 얻은 것을, 아트레우스의 아들 통치자 아가멤논이 내 손에서 도로 빼앗았다네... 함성과 전쟁이 내 함선들에 이르기 전에는 나는 결코 분노를 거두지 않기로 결심했다네. (p604) <일리아스> 中


 결국, <롤랑전>,<일리아스>에서는 명예욕으로 인한 무리한 행동이 주인공들을 파멸로 이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역사가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AD 1889 ~ 1975)는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 속에서  난폭한 행위(휘브리스 hybris)를 문명(文明)의 몰락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면 '휘브리스'의 결과는 많은 경우 개인과 문명의 파멸로 이어짐을 확인하게 된다.

 

 (제16장) 군사적 기량과 무용은 예리한 칼과 같은 것이므로 그것을 잘못 쓰는 자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수가 많다. 군사적 분야는 '코로스(koros, 포만) - 휘브리스(hubris, 난폭한 행위) - 아테(ate, 재난)'라는 치명적 연쇄를 연구하는 데 더없이 좋은 예를 제공한다.(p83)... '코로스-휘브리스-아테'의 비극이 취하게 디는 더 일반적인 형태 가운데 하나는 '승리의 도취'라고 할 수 있다. 막대한 포획물을 차지하려는 싸움은 무력을 통한 전쟁으로 또는 정신적인 힘의 충돌로 전개될 수 있다.(p84) <역사의 연구 4> 中 


 그리스의 비극에서 개인의 휘브리스 결과는 개인의 파멸로 끝나게 됨을 우리는 <오이디푸스 왕> 또는 <안티고네>등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지위가 왕이더라도 고대 사회에서 개인의 휘브리스는 국가나 사회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반면, 개인에서 봉건사회으로 옮겨간 사회구조 속에서 휘브리스는 그 사회에 큰 타격을 주게 됨을 <롤랑의 노래>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휘브리스의 결과가 개인에서 사회로 확대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식의 틀이 확장되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롤랑전>은 역사적으로도 민족국가 형성에 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롤랑의 노래> 덕분에 프랑크 민족은 서구의 미래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들은 무슬림 적 그리스도를 찾아내 파괴하고, 칼과 십자가로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할 책임을 맡은 선민이 되었다. 이 서사시의 많은 부분이 꾸며낸 역사이지만 민속 신화의 드높은 이상을 잘 간직하고 있다.(p386) <신의 용광로 God's Crucible, Islam and the Making of Europe, 570 ~ 1215> 中


 <롤랑전>은 중세 유럽의 작은 사건을 배경으로 한 서사시다. <일리아스>가 고대 터키 지역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전쟁을 장대하게 묘사한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사실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작품이 주는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중세인(中世人)을 이해하는 좋은 참고 자료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롤랑전>에는 이교도와 다른 민족에 대한 잔인한 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중세 유럽인들의 인식이 담겨 있다. 현대 유럽인들의 인식의 기저에는 그들의 선조들의 인식이 깔려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구문명이 세계문명을 이끌고 있는 지금 <롤랑전>이 우리의 삶과 완전히 떨어진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세 사회 발전과 중세 유럽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프랑크 문헌들은 왕의 회군이 침착하고 질서정연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샤를마뉴는 스페인에서 서둘러 회군하여 그 군대를 위기 지역으로 급파했다. 색슨족의 반란은 카롤링거 체제를 절단 낼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론세스바예스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는 색슨족의 대량학살과 짝을 이루면서 색슨 킬링필드를 정당화 했다.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에 살고 있는 숲의 부족에게 부과한 역사적이고도 야만적인 혹독한 평화조약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롤랑의 전설적 순교가 상징하는 이타적인 기독교 기사도 정신에 의해 고상한 작업으로 미화되었다.(p385) <신의 용광로 >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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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5-12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러 책을 착착 엮어서 페이퍼를 쓰시는 겨울호랑이님의 서재에는 과연 책이 몇 권이나 있을지 가끔 궁금해집니다...... 한, 육백만 권??

겨울호랑이 2018-05-13 00:15   좋아요 1 | URL
^^:) 안 세어 봤지만 대략 2천권 정도 되는 것 같네요... e-book을 잘 활용하면 좋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책들이 공간을 제법 많이 차지합니다...

2018-05-12 19: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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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2 2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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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1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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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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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1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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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1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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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14: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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