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비 메탈(Heavy Metal)의 효시(嚆矢)이자 정본(定本), 그리고ㅡ다분히 '헤겔적'으로 말하자면ㅡ헤비 메탈이라는 '자기의식'의 완성으로서의 절대적 '사제 유다(Judas Priest)'.

1) 많은 망설임 끝에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첫ㅡ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ㅡ내한 공연에 다녀왔다. 올림픽 체조경기장, 2008년 9월 21일 저녁 7시. 많이 망설이게 된 것은 '단지' 치러내야 할 여러 일들이 산적(山積)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나의 유년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이 전설적인 밴드의 내한 공연을 놓친다면 아마도 오랜 시간 후회하고 한참 동안 미련을 쌓아둘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충실하게ㅡ혹은 '불충하게'ㅡ따랐던 것.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ㅡ그러니까 아마도 '사후적으로(nachträglich)' 말하자면ㅡ그 선택은 지극히 옳았다고 할 밖에.

2) 공연장은ㅡ나를 포함해서ㅡ거의 광란의 도가니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 모인 관객들은 모두, 70~80년대부터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을 들어왔기에 그들의 공연에 가장 '목마르고 굶주렸을' 장년층에서부터 상당히 최근에 그들의 음악을 알게 된 젊은 층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이 전설적인 밴드의 실황을 보기 위해 몰려온 '광신도'들이었기 때문이다. 공연장 바깥에서부터 80년대 그룹 사운드 시대를 이끌었던 몇몇 낯익은 음악인들의 '들뜬' 모습도 목격할 수 있었다. 아마 그들 모두에게도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은 일종의 청소년기의 자산이자 추억의 한 자락이었던 것일 터.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후 "Metal Gods"의 첫 리프가 연주되자 공연장은 마치 불에 기름을 끼얹은 형국이 되었다! 말하자면 메탈 신(神)들의 강림(降臨)이 비로소 개시되었다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첫 곡이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도 '지금 내 눈 앞에서 정말로 주다스 프리스트가 실제 연주하고 있는 게 맞나'하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던 나도 "Metal Gods"의 연주가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슬슬 이들의 강림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 자체 역시나 '명불허전'이라는 생각 한 자락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곧 이어 이들의 최고 명곡 중의 하나인 "Breaking the Law"가 연주되기 시작할 때 공연장은 말 그대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모든 소절을 따라 '합창'하는ㅡ'싱얼롱(sing-along)', 요즘은 '떼창[-唱]'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쓰는 경향이 있지만ㅡ'굶주린' 관객들이 쏟아내는 이 엄청난 에너지에 아마 주다스 프리스트 멤버들도 많이 놀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나는 감동 때문에 정말 거의 울 뻔했다). 한 가지 지적할 부분은, "Sinner"의 연주는 개인적으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선곡이었다는 사실인데, 초창기 곡들을 거의 들을 수 없는 그들의 최근 공연 선곡에 비추어 봤을 때 이는 다분히 한국 관객들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나 짐작해본다(더불어 "The Ripper"의 연주도 기대했으나 이는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 2004년 그리스 공연의 한 장면(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이번 내한 공연의 분위기가 이 사진의 기운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상징' 보컬리스트 롭 핼포드(Rob Halford)의 카리스마는 이순(耳順)의 나이에도 여전히 강력했다.

3) 공연 중반, 비교적 최신의 곡들이 연주되었을 때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이 관객들의 미친 듯한 에너지는 드디어 "The Hellion"과 "Electric Eye"의 접속곡이 다시금 포문을 열었을 때 새삼 폭발해버렸다. 본무대의 마지막 곡인 "Painkiller"에 이르자 그 에너지는 거의 최고조에 이르러 관객들은 하나의 거대한 '뇌'이자 '몸'이 된 듯한 인상으로 객석 전체로 넘실거렸다. 일대 장관이었다. 이어 다시 등장한 핼포드는 저 예의 유명한 '오토바이 의식(ritual)'을 선보이며 재차 관객의 마음에 불을 당겼다. 핼포드는 그 중간에 태극기를 들고 나왔는데, 헤비 메탈 음악이 '어쩔 수 없이' 정치적으로 우익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음악임을 상기해볼 때 '국기(國旗)'라는 상징은 평소 같았으면 내 신경을 아주 많이 거스르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내게 이는 오히려 '너무나 늦게 찾아온' 한국의 관객들에 대한 일종의 사과와 감사의 인사처럼 느껴졌다. 핼포드가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했을 때 너무나 '당연히'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Hell Bent for Leather"에서부터 대미를 장식하는 이들의 '영원한' 마지막 곡 "You've Got Another Thing Coming"에 이르기까지, 채 아쉬움을 다 씻지 못한 관객들은 그 모든 곡들을 한 소절 한 소절 따라부르며 '사제들의 제의'에 격렬하게 임하는 모습이었다. 후반부 공연에서 이 모든 명곡들과는 별개로 가장 압권으로 느껴졌던 것은 역시 "The Green Manalishi"의 연주였는데, 주다스 프리스트 전성기 모습의 일단을 살짝 목격할 수 있게 한 실황의 백미였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이다. 'The Priest will be back~!'이라는 핼포드의 한 마디가 가슴에 오래 남는다. 꼭 그 말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한 자락, 곧 그들의 이 공연이 결코 '마지막' 내한 공연이 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 한 자락, 이곳에 소중히 남겨본다.

▷ 2005년 에스파냐 공연의 한 장면. 음향적인 환경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했던 이번 내한 공연에서도 글렌 팁튼(Glenn Tipton)과 K. K. 다우닝(Downing)의 트윈 리드 기타는 역시 여전히 아름다웠다.

4) 내가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을 처음 들었던 것은 11살 때였다. 귀가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처음 들었던 곡은 아마도 어느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Screaming for Vengeance"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밤에 불을 끄고 조용히 라디오를 켠 채 전영혁의 심야 방송을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하루 중 내가 만끽할 수 있는 '최상의' 시간이었다. 나는 곧 이 헤비 메탈의 '신세계'에 급속도로 빠져 들었고, 얼마 후 테니스 라켓으로 흉내만 내는 걸 만족할 수 없게 된 어느 날 클래식 기타를 한 대 장만해 독학을 시작했다. 그때는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국내 라이센스 LP가 대략 4~5천원 정도 하던 '낙원' 같은 시절이었는데(레코드 가게 아줌마에게 말만 잘 하면 3천원 정도에도 살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샀던 주다스 프리스트의 작품은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이었던 <Sad Wings of Destiny>였다. 어린 시절 들었던 이 앨범의 백미 "Victim of Changes"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미 그 시기에 이들의 '전매특허'인 트윈 리드 기타의 아름다운 화음과 이중선율, 그리고 전형적이고 공격적인 헤비 메탈 리프들이 완성되고 있었다. 나는 클래식 기타로 하루는 "로망스"를 치고 하루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리프들을 따라 치는 지극히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무뚝뚝하게만 보이던 아버지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슬그머니 선물해주신 전기 기타ㅡ이는 내 인생의 첫 전기 기타로서 삼익 악기의 'Vester' 모델이었다ㅡ를 내 두 손에 쥐게 된 날, 나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만화 <20세기 소년>이나 <BECK>에 등장하는 소년들의 어떤 특별한 날을 떠올려도 좋으리라). 이에ㅡ비유하자면ㅡ어제의 공연은 '추억'을 다시 반추하고 '전설'을 다시 확인한다는 의미에서 나에게는 너무나 뜻깊은 것이었는데, 주다스 프리스트의 내한 공연을 기념하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그들의 최고 앨범 8장의 목록을 만들어본다:

Sad Wings of Destiny (1976)
"Victim of Changes"와 "The Ripper"를 수록하고 있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출세작'. 내가 이 앨범을 처음 LP로 샀을 때는 '금지곡'이 있던 시절이라 "The Ripper"는 누락되어 있었다(소위 '빽판' 시절의 추억이 슬그머니 밀려오기도 한다). 헤비 메탈의 '전형'을 정립하기 직전, 다소 '풋풋한' 정취를 머금은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Stained Class (1978)
명곡 "Exciter"와 동명 타이틀 곡을 수록하고 있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4집 앨범. 마치 클래식 음악에서 9번 교향곡에 대한 일종의 '징크스'가 존재하듯, 하드 록/헤비 메탈 음악에서는 밴드의 4집 앨범이 최고의 음반이라는 '통설'이 존재해왔다. 이 앨범을 그들의 최고작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ㅡ게다가 이 앨범에 수록된 "Better by You Better than Me"가 어떤 청소년의 자살을 부추겼다는 부모들의 소송으로 인해 주다스 프리스트는 법정에 서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ㅡ바로 다음 앨범 <Hell Bent for Leather>로 가는 가교 역할을 하는 형식을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게 예나 지금이나 이 앨범의 압권은 "Beyond the Realms of Death".

Hell Bent for Leather (1979)
주다스 프리스트의 정체성(identity)을 확립시킨 대표작 중의 하나(번쩍거리는 검은 가죽옷을 입은 헤비 메탈의 이미지는 여기서 완성된다). 헤비 메탈의 송가가 되어버린 동명 타이틀 곡은 물론이고 한국 팬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Before the Dawn", 공연의 백미와 절정으로 연주되곤 하는 "The Green Manalishi" 등의 곡들을 수록하고 있다.

British Steel (1980)
명실 공히 주다스 프리스트의 대표작. "Breaking the Law", "Metal Gods" 등 헤비 메탈 팬이라면 누구나 제목만 들어도 바로 아는 곡들을 수록하고 있는, 주다스 프리스트를 확고히 '메탈의 신'으로 정립시킨 헤비 메탈의 교과서와도 같은 앨범이다.

Screaming for Vengeance (1982)
개인적으로 이 앨범과 그 다음 작품인 아래 <Defenders of the Faith> 앨범은 일종의 '배다른 쌍생아' 같은 연작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주다스 프리스트의 최고작으로 꼽고 있다. 이 두 앨범에서 주다스 프리스트는 그들이 헤비 메탈을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 어느 앨범보다도 먼저 일청(一聽)을 권한다. 동명 타이틀 곡의 유려하고도 직선적인 형식미와 완성도는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앨범의 시작을 여는 접속곡 "The Hellion"과 "Electric Eye", 그리고 "Riding on the Wind"와 "You've Got Another Thing Coming" 등 그들의 '대표곡'이자 '최고작'들을 수록하고 있다.

Defenders of the Faith (1984)
메탈리카(Metallica)와 메가데스(Megadeth) 등으로 '분화'한 소위 스래쉬 메탈(Thrash Metal)의 효시를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개인적으로 평가한다. 가속을 밟은 읊조림과도 같은 샤우트 창법이 인상적인 "Freewheel Burning"도 압권이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은 헤비 메탈의 고전 "The Sentinel"을 비롯하여 명곡 "Love Bites", "Eat Me Alive" 등을 수록하고 있는, 말하자면 '버릴' 곡이 하나도 없는 '꽉 찬' 앨범이다.

Painkiller (1990)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헤비 메탈의 또 다른 고전이 되어버린 동명 타이틀 곡으로 가장 유명한, 명실상부 주다스 프리스트의 90년대를 대표하는 음반이다. 롭 핼포드의 지치지 않는 고음역의 창법, 드러머 스콧 트래비스(Scott Travis)의 가입ㅡ주다스 프리스트의 '약점'으로 자주 언급되곤 하던 드러머의 '부재'는 트래비스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었는데ㅡ으로 더욱 속도감이 붙은 이들의 강력하고 아름다운 헤비 메탈 리프들 속에서, 말 그대로 '어두운 불꽃'이 폭발적으로 작렬한다.

Angel of Retribution (2005)
한 동안 롭 핼포드가 빠진 상태에서도 주다스 프리스트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핼포드가 부재하는 주다스는 진짜 '주다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 앨범은 주다스 탈퇴 이후 90년대 중반 자신의 밴드 FightHalford 등을 통해 메탈 음악의 또 다른 행보를 모색하던 롭 핼포드가 다시금 주다스로 회귀하여 만들어낸 일종의 '부활'과도 같은 작품이다. 오랜만에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명곡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는 앨범인데, 개인적으로는 "Hellrider"를 이 앨범의 최고 명곡으로 꼽고 싶다. 빠른 속도감에 덧붙여, 이들의 '전매특허'라고 말할 수 있는, 글렌 팁튼과 K. K. 다우닝의 트윈 리드 기타가 뿜어내는 아름다운 화음과 격정적인 이중선율을 실로 오랜만에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해낸 곡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 외에도 "Deal with the Devil", "Revolution", "Angel" 등 놓치기 아까운 백미들을 가득 담고 있는 앨범.

이렇게 간략하게나마 돌이켜보니, 이들의 거의 40년 가까운 메탈 음악으로의 '외길' 정진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내가 이 자리를 차용해 더욱 높이 평가하고 싶은 멤버는 베이시스트 이언 힐(Ian Hill)인데, 그는 언제나 주다스 프리스트의 가장 구석 자리에서, 결성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밴드가 잘 될 때나 어려울 때나, 언제나 '신념'을 잃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모든 멤버에게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이언 힐의 그 아름다운 '뚝심'에 새삼 큰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싶은 소중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이다.

5)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그 앞에서 우연히 선배 배우 한 분을 만났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공원 산책에 나온 길이었다.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공연이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했더니, 주다스 프리스트였구나... 나도 고등학교 때 정말 열심히 들었는데..." 음악을 연극만큼이나 사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 선배의 말 한 마디가 나를 슬며시 미소 짓게 했다. 이렇게 다양한 세대가 주다스 프리스트라는 한 밴드의 공연에 모여 제 각각 그 음악과 함께 했던 자신의 추억과 열정을 소진하고 분출하며 다시금 기억하고 또한 소중히 보듬어내고 있었다. 공연 자체보다도, 그러니까 나의 유년기 역시 지배했던 이 '전설'의 밴드가 이땅에서 공연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각각 그리고 또한 모두 함께 만들어내고 있는 저 풍경이 나에게는 더욱 감동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나 늦게 도래한' 이 주다스 프리스트의 내한 공연에 특별히 더 감사하는 이유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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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9-22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끙. 람혼님의 유년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이 그룹이 제게는 왜 낯선 이름인걸까요. 노래제목도, 앨범자켓도 제가 아는 건 하나도 없네요.

아, 물론 람혼님의 서재에 있는 책들도 다 제겐 낯설지만 말입니다. ^^;;

람혼 2008-09-22 22:4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헤비 메탈이 다소 '협소한' 장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다락방님 서재에서 더 좋은 것 많이 '훔쳐보고' 있는 사람인데요.^^

드팀전 2008-09-2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좋으셨겠네요.
맴버가 그대로 인가봅니다. 롭 헬도프, 글렌 팁튼- KK다우닝..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여전히 입에 익군요.
전 주다스 프리스트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저 음반 자켓들은 모두 익숙합니다. 예전에 잡지 중에 <음악세계>라는게 있었는데-간혹 전영혁씨도 글을 썼던- 그 때 주다스프리스트 특집에서 저 음반들 중 7-80년대 것들은 꽤나 자세히 소개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나저나 람혼님도 저랑 비슷한 연배인가 봅니다.ㅋㅋ

람혼 2008-09-22 22:43   좋아요 0 | URL
드러머를 제외하고는 원년 멤버들이 아직도 꾸준히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다스 프리스트의 또 다른 매력인 것 같습니다. 롭 핼포드, 글렌 팁튼, K. K. 다우닝, 이언 힐... 모두 정말 '추억'의 이름들이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한 이름들이죠. 저도 비슷한 음악 잡지들을 보면서 자라나긴 했지만, 제 느낌에는 드팀전님보다 제가 한참 어릴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닐까요? ^^;

드팀전 2008-09-23 09:16   좋아요 0 | URL
^^ 그런가요. 전 30대인데 람혼님은 20대인가?
아니면 비슷한 연배네요.ㅋㅋ

람혼 2008-09-23 13:5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본다면 '비슷한' 연배겠군요.^^

마늘빵 2008-09-22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공연도 공연이겠지만 후기가...

람혼 2008-09-22 22:45   좋아요 0 | URL
후기가... 어떻다는... 말씀인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로쟈 2008-09-22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탈키드의 뜨거운 고백서네요.^^

람혼 2008-09-22 22:46   좋아요 0 | URL
뜨거운 흥분을 일부러 좀 자제해서 쓰려고 애썼는데, 들켜버렸군요.^^

qualia 2008-09-2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 님,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활화산 같은 공연 열기가 그대로 전해지는군요. 저는 람혼 님의 공연 후기만으로도 그 폭발하는 열광의 도가니 속에 잠시 휩쓸린 기분입니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서울 공연 실황이 벌써 유튜브에 몇 개 올라와 찾아 봤는데요. 정말 대단하네요. 우리나라 팬들 말이에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정말 정열적입니다.

저는 외국 헤비 메탈 (혹은 하드 롹) 밴드의 폭발적이면서도 유려한 연주와, 한계를 넘어 포효하는 고음의 보컬을 보고 들을 때마다, 우리나라 밴드들의 저와 같은 환상적인 공연은 언제 볼 수 있을까 하고 한탄하곤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 메탈리카(Metallica), 판테라(Pantera), 스콜피온스(Scorpions) 따위와 같은 순 한국 롹 밴드를 가져보는 것은 아직도 요원한 듯합니다. 드럼이나 기타 연주도, 보컬도 우리의 롹커(록커)들은 아직도 기교와 힘, 그리고 규모(웅장함)에서 모두 현저하게 딸리는 게 사실인 듯합니다. 저는 정말 롹 음악을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열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아쉬워하곤 합니다.

초식동물(아시아의 한국인들)과 육식동물(서양의 백인들)의 원초적인 차이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체질이 육식성인 저 기름덩이 백인들은 그 목청이 매우 질기고 탄력적일 것입니다. 그 타고난 강력한 목청으로 샤우팅이나 그라울링 창법 따위와 같은 보컬 기교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겠죠. 그러나 원래가 초식성인 한국인 롹커가 샤우팅이나 그라울링 창법을 구사하면, 어쩐지 좀 안쓰럽거나, 듣는이가 좀 불편하거나, 귀에 거슬리는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헤비 메탈 밴드다운 한국의 헤비 메탈 밴드를 정녕코 대망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제가 우리 한국 (대중) 음악에 대해 불만인 점 한 가지는, 소위 “뽕짝”류 음악의 타성과 안일함과 비창조성(혹은 무창조성)이 음악 장르 전반에 너무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초중고 시절부터 한국의 이 뽕짝류 음악이 전혀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음악적 취향인지 모르겠으나, 그 창법이나 연주 형태 모두 께느른하고, 젊은 사람들한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악으로 여겨졌습니다(건방지고 무식한 소리인 줄 압니다만). 만약에 우리 고유의 대중 음악을 정립 · 정의한다면, “뽕짝”은 전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정체성이 지극히 불분명한 듯합니다.

제 생각엔 한국 대중 음악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의 하나가 바로 타성에 젖을 대로 젖은 무사안일한 장르(뽕짝도 하나의 장르라고 한다면)인 뽕짝 혹은 “트로트”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한국에서 본격적인 정통 롹이나 헤비 메탈 음악이 거의 출현하지 못하거나, 조금은 미흡한 형태로밖에 (음악계 분들한테는 매우 죄송한 말씀이지만) 출현하지 못하는 하나의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뽕짝류 음악의 영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직간접적으로 매우 크다고 봅니다.

최근 20년 만에 재결성한 한국 롹(메탈) 밴드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 씨도 초창기 때는 트로트(뽕짝류)를 그렇게 싫어했다는군요. 절대 그런 것은 부르지 않으리라 했을 정도로요. 왜 정통 헤비 메탈 롹커라는 그런 자존심이 있잖습니까. (이에 대해 가수 본인이 직접 어떤 티브이 토크쇼인가 가요쇼에 나와서 밝혔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런 유현상 씨도 제9회 뉴델리 아시안 게임(1982년) 수영 3관왕 최윤희 씨와의 결혼을 전후해서 결국은 뽕짝을 부르게 되더군요. 이 사실은, 헤비 메탈 롹커를 자처했던 유현상 씨조차도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을 계기로 결국은 롹 대신 뽕짝 연가를 부름으로써, 뽕짝류의 음악적 정서가 한국인 음악가들의 심성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 봅니다. 저는 백두산 보컬 유현상 씨의 뽕짝 사례가 사랑에선 진보일지라도, 음악적 측면에서 퇴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음악의 장르 각각을 서로 우열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난센스)에 가까울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뽕짝이 전혀 독창적이지 못한 형태로 연주되고 불리는 실태를 볼 때, 그것이 우리 대중 음악 전반의 비창조성, 무상상력, 제자리 걸음 혹은 퇴보에 한 가지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점은 분명한 듯합니다. 바로 이러한 부정적 형태의 뽕짝의 잔재가 한국 롹 음악에도 스며들어가 있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람혼 님, 흥미진진한 주다스 프리스트 공연 후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8. 09. 23. 화. 10:43)

yoonta 2008-09-23 12:39   좋아요 0 | URL
트로트(뽕짝)하시는 분들이 보면 좀 기분나빠할 만한 내용이네요..
그래도 어쩔수없이 공감되는 부분이 있네요..^^
저도 한때 트로트는 음악이 아니고 쓰레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어서요. 지금은 뭐 "저런 음악도 듣고 즐길수도 있군"하는 아량?은 생겼지만요.

람혼 2008-09-24 14:41   좋아요 0 | URL
고대하고 고대했던, 굶주리고 굶주렸던 공연이어서 그랬는지, 관객들은ㅡ저를 포함해서ㅡ모두 '한풀이'를 한 판 벌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열기가 사뭇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겠지요... 주다스 오빠들이 깜짝 놀라고 갔을 거예요.^^

'우리나라에는 언제 저런 밴드가...?!'라는 질문의 형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봐야 할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Led Zeppelin, Deep Purple, Black Sabbath, Judas Priest 등 70~80년대 하드 록/헤비 메탈 음악의 수혜를 입어 번성했던 과거 한국의 '그룹 사운드' 문화를 돌이켜볼 때, 그것은ㅡ임화의 저 유명한 표현을 차용해보자면ㅡ'이식된' 음악 문화에 다름 아니었으니까요. 비유하자면, 미국발 금융 위기와 국제 유가 급등에 따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한국 경제와 마찬가지로, 아시다시피 록 음악에 있어서도 언필칭 이른바 '외세적' 요소를 언급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오히려 '현실'이겠죠. 기본적으로 록 음악의 유입과 향유ㅡ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재창조'까지도ㅡ는,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과거에도, 세계 시장 구조가 지닌 어떤 '제국주의적' 근대성 그리고 거기서 파생하는 또 다른 구조인 '남북 문제'에 기반하고 있었던 측면이 다분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모든 '뮤지션'들의 궁극적 목표는 이른바 '미국 무대 진출'이었고, 예를 들어 카네기홀에서 공연이라도 한 번 할라치면 거기에 너무나 쉽게도 '본토 무대 상륙'이라는 상찬을 덧붙이게 되는 것이었죠. 그러므로 음악 산업의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유사-식민지적' 상황에서 단순히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저런 밴드가 출현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은 어쩌면 자칫 저 '본토'와 '식민지' 사이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간과할 수 있는 위험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비슷한 의미에서ㅡ초식과 육식의 비유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ㅡ음악에 관한 인종적 연결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분명 음악에는 특정한 민족성 내지 인종성이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컨트리/하드 록/헤비 메탈 등은 백인 음악, 블루스/재즈/소울/랩 등은 흑인 음악이라는 식으로 말이지요(어쩌면 엔카는 일본 음악, '뽕짝'은 한국 음악... 이런 식도 가능하겠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이른바 '한국적 록 음악' 따위의 수사법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등의 문제와는 별개로, 이른바 국적(nationality)을 표현하는 수식어와 음악 장르를 가리키는 명사 사이의 결합은 그 자체로 어떤 '오해'와 '편견'을 강화시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개인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우리가 쉽게 만들어내고 흔히 사용하고 있는 어떤 분류법의 체계ㅡ예를 들어 여기에는 'J-Rock' 또는 'K-Rock' 같은 규정어도 속할 텐데ㅡ는, 마치 프리미어 리그와 케이 리그의 구분 사이에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역시나 은연중에 음악의 이식적이고 식민지적인 속성을 전제하고 있고 또 전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뽕짝'을 생각해보면, qualia님 말씀대로 '뽕짝'이야말로 가장 '정체성'이 불분명하고 모호한 음악 장르임이 분명하지만, 바로 그런 만큼, 딱 그만큼, 반대로 '국적'에로의 귀속 욕망이 가장 강한 장르이기도 합니다. 저도 '뽕짝'에 대해서 소위 말하는 '신토불이'식 접근법으로 다가가는 것을 매우 경계하는 편입니다. 다만 제가 이 자리를 차용해 잠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저 '개인적인 [음악적] 취향'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는 무엇이었나 하는 물음입니다. '뽕짝'에 대해 '록'이 지니게 되는 어떤 '우월성', 기성 세대의 판에 박히고 진부한 음악적 '몰지각'을 비웃고 비판하는 '록' 음악의 어떤 도덕적 우월성... 저 또한 유년 시절에 이러한 감정들을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이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음악의 '진정성'이라는 담론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진정성'의 담론이 허구라고 논파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진정성'의 문제 설정이 사회 안에서, 장르들 사이에서, 그리고 한 개인의 '내면' 안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재생산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식민지적 근대성, 문화의 이식성, 국적과 음악의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서 다시금 여러 번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qualia님이 말씀하신 '뽕짝' 장르 안에서의 타성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약간 다른 점은, 제가 그 '타성'이라는 것이야말로 바로 '뽕짝' 장르의 핵심을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인데요, 저는 이 '뽕짝'의 타성이 혁파되어야 하거나 쇄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 '뽕짝'의 타성이란 실제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될 수 있을 텐데요, 일단 생각나는 대로 예를 들자면, 가사 등에서 드러나는 연애와 사랑에 대한 '현실타협적'이고 '체제긍정적'인 시각들, 인생에 대한 관조적이고 허무적이며 현실중심적인 자세 등을 가장 먼저 예로 들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런 것들이 '[음악-]정치적으로' 혁신되고 타파되었을 때 남는 것이 여전히 '뽕짝'이고 '트로트'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장 최근에 젊은 층에게까지 트로트 붐을 일으켰다고 평가되는 장윤정의 경우 그의 최고 히트작 "어머나"의 가사에서 드러나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 역시 지극히 진부한 '뽕짝'적 사랑의 담론을 반복하고 있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곡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제가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심수봉의 노래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수봉의 음악이 정말 '그렇고 그런 뽕짝'일 뿐일까 하는 물음에 직면하게 되면 그에 대답하기가 개인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심수봉의 음악은 일견 기존 뽕짝의 문법과 속성을 모두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반면에 그러한 요소들로부터 이탈하는 성격 또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심수봉의 '이탈적' 성격은 단순히 '뽕짝' 자체의 진부한 정치성을 논하는 것만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를 통해 더 나아가 미루어보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대중 음악'의 '정체성'을 논하는 맥락에서 고려될 요소들이 실로 다층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백두산이 최근 재결성한 지는 정말 몰랐네요. 약간 가슴이 설레기도 하는데요, 백두산의 '카리스마 보컬' 유현상이 "여자여~" 하면서 트로트를 들고 나왔던 장면은 어린 저에게는 정말 '충격'이었다는 기억 한 자락이 새삼 떠오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한국인 음악가' 안에 '보편적으로' 흐르고 있는 어떤 '뽕짝'의 정서(mentality)를 증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른바 '성인 음악'으로 분류되는 음악의 산업성과 상업성의 측면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현상은 매우 명민하고 기민한 작곡가입니다. 백두산의 리더로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가수 이지연을 키워내 많은 곡을 써주기도 한 작곡가이자 기획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그 시점에서 트로트를 '선택'한 것은ㅡ물론 최윤희와의 '사랑'도 고려해야겠지만ㅡ배우자와의 '결혼'이라는 지극히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했을 때 국내 음악계에서 음악-산업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단지 유현상의 '변절'ㅡ'정절'과 '변절'이라는 이분법이 가능한 것 역시 바로 저 록 음악의 '진정성'이라는 담론 덕분이죠ㅡ이라기보다는, 그의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 안에서 그 시기에 '적합하게' 선택된 하나의 상업적 전략이자 시장적 선택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듯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음악 장르 사이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뽕짝'과는 무관하게 현재 한국 대중 음악계 안에서 자주 목격되곤 하는 '비창조성', '무상상력', '몰정치성'은 저 역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뽕짝'의 잔재가 한국 록 음악에 스며들어가 있는가 하는 문제, 아니 그보다 앞서 '뽕짝'에 있어 과연 '잔재'라고 하는 가치비판적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제가 앞서 말씀드린 모든 문제들을 함께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겨우 그 답의 언저리에 가 닿을 수 있는 복잡다단한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단순한 '진정성'의 담론이 궁색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겠죠. 또한 단순히 '진정성'의 담론을 비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담론이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작동하게 되는가에 대해 치열히 생각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후기 잘 읽어주셨다니 저로서도 참 기쁩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yoonta 2008-09-23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탈키드인 람혼님이 부른 텔미버전도 인상적이었답니다.^^

주다스프리스트공연은 못갔지만 Renata Suicide의 공연은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

람혼 2008-09-23 13:59   좋아요 0 | URL
Renata Suicide는 당분간 쉬고 있지만 공연을 재개하게 되면 yoonta님께 가장 먼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드팀전 2008-09-23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님의 글은 유현상의 변절기에 분노했던 사람들 중 하나로 '동시대적인 공감'은 갑니다. 그런데 왜 반박을 하고 싶은 걸까요. 흐흐흐
박성봉 교수는 '뽕'끼가 없으면 대중음악이 아니라고 했는데...^^

굳이 '트로트'장르에만 국한 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중음악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트랜드를 모방하면서 자기확장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오래 지속되어 화석화되면 당연히 음악발전에 장애가 되겠지요.그런데 대중들은 또 그런 자기복제에 반발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것에 향수를 느끼면서도 새로운것이 나오면-물론 그것도 언젠가는 같은 운명에 처할- 관심을 돌리지요.
트로트라는 것을 하나의 단일한 것으로 보시는 듯 한데, 이것은 트로트를 너무 단순화하시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트로트 역시 진화합니다. 한편에서는 작은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요. 예를 들어 배호의 트로트와 나훈아의 트로트가 다릅니다. 시대적 정서를 반영하는 차원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음게는 비슷하더라도 다르다는 것이지요. 또한 나훈아의 트로트와 최근에 나오는 장윤정의 트로트가 또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장윤정의 '뉴 트로트'가 인기를 끌자 그것과 유사한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무리를 지어 나오고 있습니다. 현빈이나 한영 등등등.
그런데 이게 '트로트'의 자기복제에만 해당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컴퓨터의 활용이 음악에 도입되면서 '댄스음악'에서 자기복제는 한 곡을 5분 내에 만들수도 있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대중음악 전체에 걸려 있는 문제겠지요. 이것을 '뽕짝'으로 환유한다면 이해는 갑니다만 '뽕짝'에게 너무 가혹한 대접인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년 전에 아일랜드의 유명한 가수 누군가 그런 말을 했는데..U2의 성공이후 아일랜드의 밴드들은 다 U2의 모방이거나 비슷하게 하려고 한다..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정통 락이나 정통 메틀에 대한 갈증은 이해합니다만...도대체 대중음악에서 '정통'이란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뽕'의 문제는 아니라 대중음악의 고유한 속성과 관련된 일은 아닐까요? 한국의 문화적 상황을 보자면... 결국 서구 대중문화를 뒤늦게 쫓아가려는 입장이다 보니 뭘해도 어설플 수 밖에 없구요.쉽게 '매너리즘'에 빠져들기도 하구요...창의성의 결여는 사회적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

람혼 2008-09-23 14:07   좋아요 0 | URL
방금 qualia님의 댓글에 다시 긴 댓글을 달고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사이에 드팀전님도 댓글을...^^; 드팀전님의 기본적인 생각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남진과 나훈아의 트로트도 서로 다른데, 배호와 나훈아의 차이야말로 제 기준에서는 거의 록과 랩의 차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정통'이라는 문제 역시 '진정성'이라는 문제의 또 다른 판본이 아닐까 합니다. 이와는 별개로, 지극히 '은유적'인 의미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모든 매력적인 음악에는 '뽕끼'가 있어야 하고 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ㅎㅎㅎ

PhEAV 2008-09-23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저런 논평에 앞서서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ㅠ,.ㅠ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나니 아무튼 제가 아직 어리긴 어리다는 생각도 -,.-;;)

람혼 2008-09-24 04:16   좋아요 0 | URL
부럽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처음 뵙는 것 같아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특별히 K군님을 어리다고 생각하게 만든 이유가 있는지요...?)

urblue 2008-09-2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많이 망설이다 포기한 쪽입니다. 님의 후기를 읽다보니 후회가 무럭무럭...
당장 유튜브를 찾아봐야겠습니다.
저 British Steel의 자켓을 한동안 제 서재 이미지로 썼습니다만, 들르시는 분들이 무섭다고 하시는 통에 바꾼 일이 있습니다. ^^

람혼 2008-09-24 14:39   좋아요 0 | URL
하하, 무서워 하실 만도 하죠... 저 앨범 표지를 볼 때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작두를 타는 무당의 어떤 서슬 퍼런 '단호함' 같은 것이 떠오릅니다.^^ YouTube뿐만 아니라 Daum이나 Naver에도 영상들이 많이 올라와 있는 것 같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6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트는 끝무렵이 모두 비슷해요.음을 더 이상 다양하게 못만드는 것 같죠? 그래도 남진,나훈아,배호가 노래는 잘하지요? 남진이나 나훈아도 뽕기가 섞여있긴 해도 슬로우 장르도 있는 거 같아요.유현상이 작곡한 이지연 노래는 다 좋더라구요.이지연 누나 정말 이뻤는데...이제 마흔 정도 되었겠네요.

람혼 2008-09-26 20:26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 안녕하세요. 글로는 몇 번 뵈었는데, 이렇게 인사 드리기는 처음이네요, 반갑습니다. 트로트도 기본적으로 5음 음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음악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계가 있겠죠. 7음 음계도 한계가 있어 12음으로 갔고, 12음에도 한계를 느껴 미분음으로 나아가는 판이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남인수처럼 약간 높은 톤의 음색을 좋아하지만 배호, 남진, 나훈아 오빠들 모두 노래는 정말 정말 잘 하시죠.ㅎㅎ 당시 이지연은 자신의 청순한 이미지에 덧붙여 전영록과 유현상 등 정말 실력 있는 싱어송라이터들의 곡 덕분에 대중적인 면에서나 음악적인 면에서나 아주 좋은 가수로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실로 오랜만에 원준희가 컴백했다고 해서 너무 너무 기뻤지요.^^ 그나저나 '노이에자이트'라면, 아마도 저 유명한 신문 'Die neue Zeit'에서 따오신 것이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너무 전문적으로 들어가셔서 음...음계 이런 건 잘 몰라요.람혼 님은 갑자기 임진모 씨로 변한 것 같아요.국내외 대중음악에 모두 통달하신...남인수 씨 목소리는 모창가수들이 많아서 구별하기가 좀 힘들더라구요.배호,남진,나훈아에 대해선 최근 인터넷을 통해 젊었을 때 취입한 노래를 알게 되었어요.목소리가 정말 좋더라구요.그들도 나이들고 나니 확실히 음색이 좀 탁해진 것 같아요.근데 원준희 누나가 재기에 성공할까요?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룩셈부르그-베른슈타인 논쟁,그리고 카우츠키가 주도한 농업논쟁이 기관지인 노이에자이트 지를 통해 벌어져서 그에 관련된 책을 사고 난 다음 이름이 멋지다고 요즘 필명으로 써요.독일어는 단어는 어느 정도 아는데 그 외에 독해 작문 회화는 안됩니다.
저도 람혼 님처럼 멋진 음악 평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람혼 2008-09-27 16:19   좋아요 0 | URL
임진모는 개인적으로 별로 안 좋아하지만, 과분한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어쨌거나 저도 나름 음악비평(?)으로 등단했던 사람이지만(쓰고 보니 '나 이대 나온 여자야'와도 같은 삘이...), 저는 단지 '1급 독자'가 되고 싶은 마음만 앞서는 '3류 난독증(dyslexia) 환자'나 '난청 환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항상 해오고 있습니다. 이 후기도 단순한 감상의 정리에 지나지 않죠.
원준희의 '재기'는 생각도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지만ㅡ이는 원준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음악산업의 '구조적' 문제일 텐데요, 이런 형태의 '컴백'이 '대박' 나기는 아무래도 좀 힘들 것 같습니다ㅡ, 그냥 준희 언니의 컴백 자체가 너무 반가워서 개인적으로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상점 보관함에 이번에 나온 싱글 CD를 그냥 담아두기만 하고 있습니다(구매 버튼을 클릭할 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요...^^).
얼마 전에 노이에자이트님 서재에 가서 글들을 쭉 훑어봤는데요, 해박한 지식과 깔끔한 문체로 무장한 적당한 분량의 글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특히나 '근대' 한국의 문제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그런데 원준희를 '누나'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연소'하신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차용해 감사 인사 한 자락 올립니다. 앞으로도 글 감사히 잘 읽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대 나온 여자야...하는 대사...유행이군요.음...음악비평을 하셨군요.역시...
저는 몸매는 20대구요(배가 안나오고 담배 냄새 안 나요)얼굴은 10대인데 보약먹은 부작용이 난 10대.정신연령은 당연히 10대구요,제 싸이홈피엔 한때 10대들만 왔어요.지금도 홈피방문객은 29살이 제일 고령이죠.제가 누나라고 부르는 여인들은요...이연희,하지원,보아,윤하,윤아,티파니,소희,왁스,박정현,유미...등등...소개팅 분위기네요...하하하...상상만 하세요.

람혼 2008-09-28 00:02   좋아요 0 | URL
'나 이대 나온 여자야'는 사실 이제 좀 유행이 지난 대사죠.^^ 일단 묘사하신 대로 상상해보려고 했는데 자료들의 해석에 뭔가 오작동(?)이 일어나는 듯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그나저나 앞뒤로 배치되어 있는 인물들의 면면을 함께 살펴볼때 저 '티파니'는 제가 아는 'Tiffany'ㅡ한때 Debbie Gibson과 함께 미국 팝음악을 주도했던 무서운 10대의 쌍두마차(?) 중 하나ㅡ는 아닌 것 같군요.^^ 자 그럼 대강 소개는 끝났고... 취미는요?ㅎㅎ(소개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티파니가 아닙니다.80년대의 그 티파니는 이제 마흔 정도 될 것 같구요...제가 말하는 티파니는 소녀시대의 티파니(본명 황영미)를 말하죠.나머지 누나들은 대충 아시겠죠?
취미,고향...신상명세서 조사하는 듯한 소개팅인가요? 분위기 묘하네요. 음...언젠가 제 사진이라도 한 번 올려야겠군요.담배 안하고 규칙적인 생활과 식사를 유지하면 배 안 나오고 허리선이 나온답니다.저처럼요.좋은 버릇이 하나 있는데,버스 탈 때 기사가 인사하면 저도 인사하구요,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직원들에게 존대말을 쓰는 거에요.그리고 고속버스 요금소에서 통행료 받는 사람들이 감사합니다,하면 수고하세요 인사하지요.저는 착하니까요.

람혼 2008-09-28 18:30   좋아요 0 | URL
그 좋은 버릇은 저랑 비슷한데요?ㅎㅎ 착하실 뿐만 아니라 순진하기까지 하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9-3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맑기도 하구요...

람혼 2008-10-01 11:14   좋아요 0 | URL
좋은 가을 날씨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1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좀 덥군요.다시 찬물 목욕했어요.저는 겨울에도 찬물 목욕한답니다.건강을 위해서죠.

람혼 2008-10-02 00:02   좋아요 0 | URL
겨울에도 찬물로 씻으시는 건 저와 비슷하군요. 전 '건강을 위해서'라는 생각은 딱히 없지만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가 잦았는데 누가 찬물목욕하면 좋다고 해서 이를 악물고 첫해를 감행했더니 괜찮더라구요.10년 좀 더 된 것 같아요.

람혼 2008-10-03 12:33   좋아요 0 | URL
이쯤 되면 노인네(?)의 건강 상담 같기도 하지만, 냉수마찰이 생각보다 참 괜찮습니다.^^ 잔병 앓으시면 안 되죠, 지금처럼 항상 건강하시길.

노이에자이트 2008-10-0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인네의 건강상담...하하하...사실은 신체보다 정신이 더 일찍 늙죠.특히 새로운 것을 보고 호기심이 나서 알아보려고 하면 아직 정신이 젊은 것이고 새로운 것.생소한 것을 싫어하고 짜증내면서 대하면 늙은 징조라고 하더라구요.

람혼 2008-10-05 02:0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정신의 '노화'를 언제나 경계하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증상은 우리나라엔 남자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더 심하다고 하네요.하기야 이제 막 제대한 소년 티를 갓 벗은 20대 초반의 사내들이 노화의 징조를 보이는 경우를 꽤 자주 보지요.

람혼 2008-10-05 19:10   좋아요 0 | URL
연령층에 따른 정치적 성향을 국가별로 평가하는 통계에는 별로 신뢰를 두지 않는 편이지만, 저도 상당히 어린 편인데, 가끔씩 제 이후 세대가 지닌 '끔찍한' 보수성을 느낄 때마다 조금은 걱정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걱정하는 마음' 자체가 또 다른 '노화'의 징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요. 다른 사람의 노화든 자신의 노화든, 일단 '노화'를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이 또 다른 '노화'의 조짐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또 다른 '걱정'일까요? ^^ 어쨌든 20대 초반의 남자들이 노화의 징조를 보이는 건 그들 자체가 '겉늙었기' 때문만은 아니겠죠.

노이에자이트 2008-10-0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적인 진보 보수가 아닌,권위주의적인 질서나 인습에 20을 갓넘은 이들이 순응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나이에 따른 위계질서,성차별 등의 문제는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람혼 2008-10-08 23:42   좋아요 0 | URL
말씀 그대로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저로서는, 그러한 자신들의 강요된 '속도감'에 관해 성찰하지도 않고 사유하지도 않은 채 또 다른 습관과 인습에 빠져가는 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ㅡ분노할 사치는 부리지도 못하고 다만ㅡ가슴이 아릴 뿐입니다. 하지만 이는 또한 제가 속한 세대의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전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제 스스로를 돌아보고 신발끈을 다시 조일 뿐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10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습의 힘은 이념의 힘보다 강하니까요.20대가 그 정도니 30-40대가 되면 사실상 노년 세대와 같이 인습의 노예가 되는 이들이 많죠.아무래도 상대에게 말을 내리다 보면 잔소리하고 싶은 욕망을 통제하는 브레이크가 고장나는 것 같아요.상대보다 더 우위에 선 기분도 느끼게 되구요.

람혼 2008-10-13 02:32   좋아요 0 | URL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이념'이 그 자체로 '인습'이 되어버린 형태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목격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경우가 실로 답답하기 그지 없는 부정적인 사례들이겠지만요. 마지막에 말씀하신 그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저 역시 말을 내릴 수 있는 상대(?)에게도 절대 말을 내리지 않는 방식으로 제 나름 경계심을 갖는 편인데요, 함정이 '함정'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아마도 따로 있는 것은 아닐 테지요.^^
 
 전출처 : 마늘빵님의 "김진석 생각(고종석)"

드팀전님 말씀처럼 고종석의 이 글은 김진석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그에 기댄 고종석 자신의 부정적 '자기정립'이라고 보는 편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렇고, 한편 저도 개인적으로 김진석의 행보를 그의 '데뷔' 때부터 정말 오랫동안 지켜보고 분석하고 있는 열혈독자로서, 사실 <기우뚱한 균형>을 읽으며 어쩔 수 없는 '자괴감'도 한 자락 느꼈던 터입니다. 벌써 5년도 더 전에 한 강연에서 김진석 선생은 스스로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에서 <초월에서 포월로> 1, 2권에 이르는 길에 대해 나름대로 '자기평가'를 하면서ㅡ어쩌면 그것은 니체가 나중에 <비극의 탄생> 서두에 붙인 '자기비판의 시도'와도 흡사한 것이었는데ㅡ텍스트의 틈새를 파고들어 '탈'을 내고 '탈'을 쓰는 자신의 '초기' 전략은 어쩌면 궁극적으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파괴력을 전혀 가지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고 반성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나온 책이 바로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였는데, 여기서 김진석의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얼마 전 나온 <기우뚱한 균형>도 그런 '전략적 전회'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변화'의 선이 김진석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계속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체적인 측면에서ㅡ그의 문체는 어쩌면 데리다의 그것처럼 그 자체가 그의 사유를 담아내고 있는 하나의 '장치'이자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ㅡ그는 '대중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글을 쓰는 자의 입장에서 '대중화'와 '세속화'를 추구하는 것이 그리 탓할 만한 일은 아니겠지만, 김진석의 경우 그의 가장 중요하고 매력적인 부분이 사라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저로서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창조적 개념들과 문체의 창안자가 다소 퇴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아쉬울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주제의식이나 개념 틀만을 갖고 본다면, 예를 들어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개념도 이미 그의 '초기' 저작 안에서부터 '포월', '소내' 등과 함께 소개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다만 개인적인 기준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을 지극히 정치적인 맥락에서 '대중화'하고 '세속화'하려고 하다보니, 오히려 그 개념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이론적 참신함과 파급력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책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있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서야 고종석이 저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비로소 '한 마디'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는,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책을 통해서는, 김진석의 저 '기우뚱한 균형' 개념이 단순한 '우충좌돌', 단순한 좌우 사이의 균형ㅡ그것이 비록 여전히 '기우뚱'하다고 하더라도ㅡ, 혹은 지극히 편협하고 순진한 절충주의 같은 것으로 오해되기가 쉽다는 것이고, 바로 이러한 사실은 위 고종석의 비평이 '증명'하고 있는 바라는 생각입니다. 그 점이 참 아쉽게 느껴집니다. 다만 제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고종석도 쓰고 있듯이, 이 책의 미덕ㅡ혹은 김진석 자체의 미덕ㅡ이 언제나 바로 저 "언어의 변증법에 현실을 억지로 꿰맞추지 않는 정직함"에 있다는 사실이겠죠.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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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혁명사 1 』, 거름, 1987.
▷ 『 러시아 혁명사 2 』, 거름, 1987.

1) 먼 기억 한 자락. 대학 다닐 때의 일이다. 평소 흠모하며 따르던 선배 하나가 내게 넌지시 물었다(그런 선배는 내게는 정말 드물다): "람혼아, 만약 혁명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 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혁명에 투신할 준비가 돼 있다고 생각하니?" 때는 연세대학교 안에 고립되어 있던 한총련이 '초토화'된 직후였고, 그때 나는 아직 대학에 갓 들어간 신입생의 신분일 뿐이었다. 무던히도 책 속에 파묻혀 살던 시절이었다. 걸신이 들렸다는 표현이 아마 맞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읽던 시절이었으니. 꼭 필요하지 않으면 학교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비 오는 날에는 하루 종일 음악만 들었다). 수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반면 책 속에 나오는 말들은 오히려 생생히 살아 있었다(실로 끔찍한 '쌍생아'와도 같은 이러한 '후일담'의 재판은, 말하자면 반복강박적인 것일까). 시간은 흘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 해가 되었고, 신입생들에게 마르크스의 책을 선물해주는 동기와 선배들을 보면서 나는 참을 수 없는 경멸감을 느끼며 그들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단적인 예로 당시 내가 썼던 글 중에는 '마르크스'와 '맑스'라는 표기법의 차이에 대한, 말하자면 일종의 '기호학적' 고찰이라 이름할 글이 하나 있었는데, 이러한 지극히 '미시적'인 작업 역시 그러한 경멸감의 한 표현일 뿐이었다). 동아리나 학회에서 '자행'되는 학습은 '정치적 마초'들만을 양산하고 있을 뿐이었다(나는 심지어 페미니즘 학회 안에서도 '페미니즘적 마초'들이 양산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선배의 저 질문을 떠올리며, 저들은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겉으로는 '혁명'을 말하면서, 그리고 자신들이 '혁명의 무기'라고 생각하는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선집을 신입생들의 고운 두 손에 쥐어주면서도, 오히려 저들은 전혀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중학교 때부터 틈틈이 <자본>을 읽었고 고등학교 책상 서랍 안에 항상 계간지 <이론>을 넣어두고 쉬는 시간마다 꺼내보았던 나에게, 저들의 마르크스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숭배는 오히려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인민에게 아편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그 아편은 '마르크스'라는 종교라고 해도 상관 없었는지 모른다). 그 스스로가 '시대착오적'인 한 인간에게는, 어떤 교의를 혁명을 위한 '초급 과정'으로 이해하고 전수하고자 하는ㅡ그리고는 모두 다 '뗐다고' 선언하곤 하는ㅡ저들의 '시대착오적' 행동은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Heinrich Böll,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München: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1995(Köln: Kiepenheuer & Witsch, 1974¹). 
▷ 하인리히 뵐,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김연수 옮김), 민음사, 2008.

2) 가까운 기억 한 자락. 벌써 수개월 전이지만, 2008년 5월 8일자 중앙일보를 읽으면서 몇 가지 메모를 해둔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서울시 교육감이었던 공정택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학생 집회 참가 종용하는 세력 많다."(4면) 10면의 작은 상자 기사 하나는 아예 이런 소제목을 달고 있었다: "촛불 집회 고교생 '김정일이 더 위대' 발언도"... 그 중 압권은 35면 한쪽에 위치한, 제갈량의 고사를 인용해 한껏 멋을 부린 한 칼럼이었는데, 그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뿌리깊은 나무처럼 고요해 결국은 좋은 꽃과 열매를 맺으려 힘을 쏟아야 할 우리 청소년이 쉬이 흔들린다.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둘러싼 비판이 수많은 허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이상한 호소력을 발휘해 도심의 촛불 시위대로 나서게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들의 평정심을 흔드는 사람들이 더 문제다. 배우는 젊은이에게 평담함과 고요한 마음을 가르치진 못할망정 편견과 예단을 주입해 부추기고 선동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누구인지, 또 뭘 원하는지 정말 알고 싶다." 결국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의 평정심이 흔들리고 있음을 역으로 고백하고만 결과가 되어버린 이런 칼럼과 이런 기사들을 우리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수도 없이 봐야만 했다. 허울뿐인 변명과 판에 박힌 거짓말들, 그리고 시대착오적인 망령의 부활 역시 수도 없이 목격해야만 했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에 대한 인상이 이러한 세태 위로 겹쳐지면서,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착잡한 기분으로 저 카타리나의 '희비극적' 살인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쓰린 마음이 되었다. 뵐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말하자면ㅡ현실과 허구의 황색 언론들이 지닌 유사성은 물론이거니와 저 카타리나의 '살인' 역시ㅡ, 정말이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weder beabsichtigt noch zufällig, sondern unvermeidlich)."

   

▷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 칼 마르크스 전기. 첫째 권 』(김라합 옮김), 
    소나무, 1989.
▷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 칼 마르크스 전기. 둘째 권 』(김라합 옮김), 
    소나무, 1989.

3) 먼 기억 또 한 자락.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의 일이다. 가장 가깝게 지내는 후배 하나가 내게 넌지시 물었다(이런 후배 역시 내게는 매우 드물다): "람혼, 선배는 자신이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해요?" 이 뜬금없는, [답]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 질문에 대해, 몇 가지 전제조건을 단 후에, 그런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맑스주의자'일 것이다, 라고, 나는 그렇게 답했다. 돌이켜보면, 실로 '선배스러운' 비겁한 대답일 뿐이었다. 스스로를 어떤 '~주의자'라고 선언하는 것은 얼마나 편협하고 옹졸한가, 하지만 또한 동시에 얼마나 아름답고 단순한가. 이 두 극단적인 규정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진자가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서 어지럽게 왕복하고 있었다(지젝은 어느 강연에서 그의 라캉주의가 지닌 어떤 교조적 '편협함'을 지적하는 한 청중을 향해 화를 낼 정도로 흥분하며 당당하게 자신은 '라캉주의자'라고, 그렇다고, 그뿐이라고 일갈한다, 오히려 그는 그 청중에게 반문한다, 왜 '데리다주의자'들에게는 데리다를 비판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 않느냐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읽지도 않고 잘도 떠들어댄다. 어떤 '~주의자'가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 지, 또한 얼마나 아름답도록 단순한 일인 지 모른 채로, 그저 어떤 '~주의'라는 것에 대해 쉽게 말하고 쉽게 단정해버린다, 그것도 편협하고 옹졸한 방식으로 그렇게 해버린다. 방대한 분량의 책에는 으레 몇 군데 있을 수밖에 없는 오식들을 계속 고치면서, 나는 라비노비치(Rabinowitch)의 『혁명의 시간(The Bolsheviks Come to Power)』을 최근 몇 달 동안 틈틈이 되새김질하며 읽었다. 이런 과정에 으레 따라붙게 될 수밖에 없는 연상작용의 결과로, 나는 다시금 서가에서 옛날 책들을 하나씩 꺼내들었다. 줄이 쳐져 있는, 그때는 왜 이곳에 줄을 쳤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런 책의 책장들을 넘겨보면서, 나는 내 자신의 '법 앞에서'ㅡ카프카를 기억하라!ㅡ다시금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람혼, 당신은 '맑스주의자'입니까, 혹여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닙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당신은 무엇보다 어떤 '~주의자'였던 적이 있습니까?"

       

▷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 혁명의 시간 』(류한수 옮김), 교양인, 2008.
▷ 스보로프(Suvorov), 『 레닌주의의 재해석 』(유명훈 옮김), 세계, 1988.

4) 풍경 한 자락. 어제는 일이 있어 실로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다. 10년 넘는 세월을 뵈어온 은사님이 오래 품어두었던 편지칼(paperknife)과 문진(paperweight)을 품에서 꺼내 선물로 주셨다. 그 선물들을 받아드는데, 왠지 코끝이 찡했다. 단순한 감사의 감정과 감동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학교를 나오면서, 여전히 학교 한 구석의 정원을 고집스레 손수 손질하고 계신 은사님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을 오르면서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이 복잡한 감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바로 그 느낌 때문에 오히려 그 감정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저녁이 어슴프레 내리깔리기 시작하는, 이제는 마치 열대우림 같은 곳이 되어버린 학교를 뒤로 하고,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혹은 무언가를 쫓듯이 가쁜 숨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떤 회상과 뒤섞여버린 풍경 한 자락은 건강에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언젠가 내 지음(知音)이 창안했던 저 촌철살인의 명언처럼, 때때로, 머리는 몸에 좋지 않다.

5) 잡설 한 자락.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가장 '극적(劇的/極的)'인ㅡ어쩌면 '선적(禪的)'이라고까지 할 수도 있을ㅡ진리를, 지금의 이 시점에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위험'은 없다고 주장하던 자들에게 닥친 위험을 생각하면서, '위기'는 없다고 외치던 자들에게 닥친 위기를 떠올리면서ㅡ그리고 더불어 어떤 '확률(0.0......01%)'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우기던 자들이 내건 또 다른 도박적 확률(7%)을 생각하면서)ㅡ,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행할 수 있는, 행해야만 하는, 어떤 '혁명'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불가능성(impossibilité)'으로서의 혁명이다. 어쩌면 이런 '혁명'이란, 여전히 말 그대로 편협하고 옹졸한 동시에, 딱 그만큼 아름답고도 단순한 것일 수 있다. 나는 저 작디 작은 칼 한 자루와 가볍기 그지없는 추(錘) 한 덩이로 무엇을 자르고 또 무엇을 붙들어맬 수 있을까, 라는 새삼스러운 질문 한 자락. 하지만 질문[들]은 언제나 생성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누가 굳이 물어봐주지 않아도.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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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9-17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 요즘 제 개인사도 그 모양이어서 마음에 와 닿네요.^^;

람혼 2008-09-17 20:35   좋아요 0 | URL
어쩌시다가 저와 그렇게도 비슷한 모양새의 개인사가...^^; 저도 답답하고 착잡한 마음에 자판을 두드려본 글인데ㅡ어쩌면 이도 '인지상정'인 지라ㅡ글에 앞서 로쟈님 마음이 먼저 제게 와 닿습니다.

드팀전 2008-09-1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 이야기도 그렇구...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네요...
특히 '어떤 주의자'가 되지 못하는 저에게는 말입니다.'어떤 주의자'가 되는 것이 단순하고 아름답지만 결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할 지 황망할 때는 누군가 '당신은 무슨 주의자 같아요.'라고 할 때입니다. 어떤 주의자가 될 만큼 열정적이지도 박식하지도 못한 사람에게 말입니다.ㅋㅋ

저 그림 속 주인공은 승리가 눈 앞에 있군요.

람혼 2008-09-20 02:31   좋아요 0 | URL
어떤 '~주의자'가 될 수 있는 능력과 '~주의자'로 규정 당했을 때 느끼게 되는 '황망함'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 제게도 역시나 해당되고 또한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그림 속 '주인공'의 승리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 지게 생긴 마당에도 여전히 두 눈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는 상대편도 사실 별로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말년의 양식이란 무엇인가:
테오도르 아도르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 주네, 글렌 굴드, 그리고 자크 라캉의 경우

▷ 먼저, 흑백의 사진 한 장: 일반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지식인(intellectual)'의 초상[만]이 지닌 도상학적(iconographic) 요소들이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게 더욱 더 흥미로운 것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이 사진 역시 그러한 도상학적 '함정'들로부터 그리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사실, 이 역시 그 사실 자체로 '매력적'이라는 점, 바로 그것이다(마치 오리엔탈리즘을 '의식적으로' 역이용하는 어느 '동양인'이,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그러한 역이용에 대해 우리가 품을 수 있는 거부반응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하나의 '매력'인 것처럼).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이러한 '매력'ㅡ혹은 어쩌면 '마력'ㅡ이란 기실 '모순적 내포 관계'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는 어떤 관계의 형식으로부터 기인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매력에 대한 '모순적' 느낌이 지닌 내용(contenu)과 형식(forme)은ㅡ그것이 '모순'을 대상으로 하는 '모순'의 감정이라는 바로 그 점에서ㅡ서로 완전히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에드워드 사이드, 『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장호연 옮김), 마티, 2008.
▷ Theodor W. Adorno, Gesammelte Schriften, Band 17: Musikalische Schriften IV,
    Frankfurt am Main: Suhrkamp, 2003.

1) 얼마 전 여름 옷 입듯이 주섬주섬 혹은 여름 땀 훔치듯이 후루룩 읽어내려갔던 책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On Late Style)』였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ㅡ물론 이 책 전체를 떠받치는 일종의 시도동기(Leitmotiv)라고 부를 수 있을 아도르노(Adorno)에 대한 서론을 뺀다면ㅡ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와 글렌 굴드(Glenn Gould)에 관한 장들(고로, 소위 '음악'에 관한 장들), 그리고 장 주네(Jean Genet)를 다룬 다소 '회고록적'인 장이었다. 어쩌면 나에게 이 인물들의 '말년' 또는 '후기'가 가장 흥미로웠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사실 동어반복(!) 수준의 사족(蛇足)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이드의 이 '미완'의 연구서가 가장 흥미로웠던 이유는, '시간'과 관련된 비평적 방법론 중에서 어쩌면 가장 '말단적'이고 가장 '부차적'일지도 모르는 것, 곧 개별적인 인물에 대한 연구에 있어 거의 '수사적'으로 따라붙고 '관습적'으로 다루어지는 '말년' 또는 '후기'라는 시기 구분에 대해ㅡ혹은 그러한 시기를 구획하는 '분류법'에 대해ㅡ일종의 '메타비평'을 가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 작은 책이 지니고 있는 미덕이다. 이 책은 아도르노의 말년을 다루는 책도 아니고 베토벤(Beethoven)의 후기 양식을 연구하는 책은 더 더욱 아니다. 사실 이 책의 '주제의식'은 사이드가 책의 초입에서부터 인용하고 있는 아도르노의 다음과 같은 한 구절 안에 이미 고스란히 녹아 들어가 있다:

객관은 파열된 풍경이고, 주관은 그 속에서 활활 타올라 홀로 생명을 부여받는 빛이다. 그는 이들의 조화로운 종합을 끌어내지 않는다. 분열의 원동력으로서 그는 이들을 시간 속에 풀어헤쳐 둔다. 아마도 영원히 이들을 그 상태로 보존해두기 위함이다. 예술의 역사에서 말년의 작품은 파국이다.
ㅡ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35쪽.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Objectiv ist die brüchige Landschaft, subjektiv das Licht, darin einzig sie erglüht. Er bewirkt nicht deren harmonische Synthese. Er reißt sie, als Macht der Dissoziation, in der Zeit auseinander, um vielleicht fürs Ewige sie zu bewahren. In der Geschichte von Kunst sind Spätwerke die Katastrophen.
Adorno, "Spätstil Beethovens", Musikalische Schriften IV, p.17.

영역은 따로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독일어만으로 번역한다면 나는 아마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
[후기 베토벤은 객관적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깨지기 쉬운 풍경은 객관적이며, 그러한 풍경이 그 안에서 홀로 타오르는 빛은 주관적이다. 그[후기 베토벤]는 이들 사이의 조화로운 종합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는 분열의 힘으로 작용하여 이것들을 시간 속에서 서로 떼어놓는데, 이는 아마도 그것들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술의 역사에서 후기 작품들은 곧 파국이다.

왜 나의 번역은 거의 언제나 이렇듯 번잡스럽고 어수선한가 하는 오래된 의문은 여기서 일단 구석으로 밀어 제쳐두자(가장 먼저, 잡설에 다시 잡설을 더하게 되는, '설상가상'의 위험, 그리고, 자문에 다시 자답을 하게 되는, '중언부언'의 위험이 있으므로). 말년의 양식 또는 후기의 스타일에 천착하는 사이드의 통주저음(basso ostinato)이라 할 것은, 바로 아도르노의 저 문장, 곧 "예술의 역사에서 후기 작품들은 곧 파국"을 의미한다는 말 속에 이미 담겨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이 문장을 주제 악구로 삼아 이를 다양하게 바꿔나가는 일종의 변주곡(variations)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 이렇듯 사이드의 책 속에서 일종의 '음악적' 형식을 발견하는 일은 그 자체로 즐겁다,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이 책 속에는 일견 사소해 보이지만 전체를 통틀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속임수' 하나가 숨어 있는데, 사이드는 미적인 완성과 조화로운 해결로서의 말년에 대비되는,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은 모순"을 드러내는 말년을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양식의 요건으로서 특별하게 흥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두 번째 유형의 말년성이다. 나는 조화롭지 못하고 평온하지 않은 긴장,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비생산적인 생산력을 수반하는 말년의 양식을 탐구하고 싶다.
ㅡ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29-30쪽.

내가 여기서 일종의 '속임수'라고 언급한 것은, 말하자면 사이드 특유의 이론적 '겸손함'을 말하는 것이다. 사이드는 마치 말년성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으며 자신은 그 중에서 특별히 어느 한 부분만을 언급할 계획인 것처럼 쓰고 있지만, 사실 그가 말하고 있는 첫 번째 종류의 말년성, 곧 완성과 조화 또는 해결과 평온의 시기로서의 말년은 그것이 지닌 '조화로운' 특성들 바로 그것 때문에 사이드가 강조하고 있는 '말년성(lateness)'의 요건을 결코 충족시키지 못한다. 즉 그가 문제 삼고 있는 '말년성'의 요건에 부합되는 말년이란 결국 '화해불가능성'으로서의 마지막 시기[들], 완성과는 거리가 먼 '파국'으로서의 후기(後期/後記)[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말하자면, 말년성이 문제가 되는 한에서 그것은 결국 '파국'과 '불연속성', 곧 '불가능성'으로서의 말년성일 수밖에 없다는 것, 고로 사이드는 다른 여러 가능한 말년의 형식과 대비되는 '문제적 말년'들만을 특수하게 문제 삼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말년성 그 자체를 하나의 '문제적' 주제로 보편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데에 있어서 '말년성'의 논의가 이러한 '보편화'의 작업을 필수적으로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덧붙이자면, 이러한 '보편화'의 기제가 갖는 중요성은 일종의 뒤틀린 귀류법을 상정해볼 때, 곧 사이드에게 '그렇다면 요절한 예술가에게도 말년성이란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가상의 문답법을 가정해볼 때, 더욱 확실한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나의 속임수, 하나의 함정은 사실 이렇듯 '소극적 겸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은폐된 적극성'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그러므로 문제는, '완성'의 말년과 '미완'의 말년 사이를 가르는 골, 혹은 '조화'의 후기와 '파국'의 후기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극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불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을 수밖에 없는ㅡ따라서 'unique'라는 형용사가 품은 뜻 그대로의 의미에서ㅡ'말년성'이라는 징후적 현상의 '유일한' 특성들 바로 그것이다.

▷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과 함께 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모습. 이들이 함께 만들어낸 두 개의 오페라 사이에서 발생한 어떤 '이행', 다시 말해 <엘렉트라(Elektra)>로부터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로 옮겨가는 어떤 '퇴행' 혹은 '복귀'가 슈트라우스의 말년성에 대한 하나의 징후가 된다. 

2) 개인적으로 먼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런데 먼저 말해두고 싶은 점은, 슈트라우스에 대한 사이드의 저 논의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살로메(Salome)>와 <엘렉트라>의 작곡자로서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곧 바그너(Wagner)가 평생 동안 추구했던 저 반음계 어법과 악극이라는 예술적 형태의 완성과 발전에 깊이 천착했던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무슨 이유에서 다분히 모차르트(Mozart)적인 18세기 오페라의 양식으로 '복귀'하고 '퇴행'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이미 먼저 품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살로메>와 <엘렉트라>를 들은 후 미처 채 가시지 않은 감동과 격정이 <장미의 기사>와 맞닥뜨렸을 때 겪게 되는 일종의 당혹감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나의 이런 느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껴보지 못한 독자에게는 오히려 사이드의 이 글이 다소 '사치스러운' 음악비평, 어쩌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에 대한 인상은 독자와 청자마다 각자 천차만별이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일반적'인 인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은ㅡ사이드 또한 다른 말로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시피ㅡ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마지막 보루, 혹은 후기 낭만주의 말기의 마지막 완성자 정도일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상적 '편견'은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동시대의 여러 '혁명적' 전환의 시도들과 비교했을 때, 예를 들어 특히나 쇤베르크(Schönberg)의 12음 음악과 비교했을 때 더욱 강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아도르노조차도 자신의 '신음악'의 철학에 대한 논의 안에서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Stravinsky)를 비교하고 있지,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문제 삼고 있지는 않다(오히려 아도르노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비난하는 데에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기까지 한다(아도르노 전집 16권, Musikalische Schriften III 참조)). 그렇다면 이러한 슈트라우스의 '말년성'을 우리는 단지 하나의 단순한 '퇴행' 내지 '안착' 혹은, 가장 좋게 말해서, 거장 작곡가가 지닌 천재성의 유희ㅡ비유하자면, 슈트라우스는 때로는 바그너 스타일로, 또 때로는 모차르트 스타일로도 작곡할 수 있었던 작곡의 '달인'이지 않았나 하는 일종의 '체념'ㅡ로서만 받아들여야 할까. '비평가'로서의 사이드가 후기 슈트라우스 음악의 '메타음악적' 성격 안에서 찾아낸 대답은, 말하자면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는 어떤 결단의 순간이며, 이것이 바로 사이드가 생각하는 슈트라우스적 말년성이 지닌 '파국'의 형식이었다. 이에 관해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개인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수긍하기 어려웠던 단언이지만, 이 비평적 혜안만은 높이 사고 싶어진다):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유명한 작곡가들이 담고자 했던 형이상학적 진술을 가볍게 무시하며, 음악에 아무런 불평도 싣지 않아 귀에 유쾌하게 들리고 그 때문에 놀라움마저 안겨준다. 말년성과 부조화의 감각이 지배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으며, 슈트라우스의 말년의 음악은 그가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하게 적합한 선택이었다.
ㅡ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79쪽.

▷ 2005년 시즌에 로스 앤젤레스 오페라의 레퍼토리로 공연되었던 <장미의 기사>의 몇몇 장면들.

3)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말년성'에 천착하면서 '18세기 양식으로서의 복귀'를 발견하고 기술하는 사이드의 가장 근본적인 기조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한 음악가의 개인사 또는 전체적인 음악사의 서술에 있어서 우리가 지극히 '관습적'이고 '제도적'으로 전제하게 되는 일직선적인 발전 단계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띠고 있다. 따라서 말년성이라는 문제는ㅡ특히나 이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한 서술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점인데ㅡ전기와 중기와 후기 등 시기 구분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이의 예술적 결단과 행동의 양식을 파악하고 서술할 수 있는 하나의 '범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기준에서 볼 때 사이드의 이 책이 갖는 '비평적' 중요성이라 할 것은, 바로 '말년' 또는 '후기'라는 시기 구분의 용어를 단순한 시간적 구획이나 분류로서가 아니라 이렇듯 일종의 기술적/개념적 범주로서 뜻매김한다는 점에 있다. 다시 바꿔서 말하자면, 사이드의 비평 언어 안에서 '말년성'이란 곧 칸트(Kant)적인 의미에서의 'Kategorie'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특히나 <장미의 기사>는 슈트라우스에게 가장 먼저 하나의 '분기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그러나 바로 그 다음 걸음에서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분기점'으로서의 말년성이 시기적/시간적 구속을 넘어서는 어떤 추상성/비시간성의 형식으로 작용하게 됨을 목격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슈트라우스적 말년성이 주는 '은밀한 매력'이라고 할밖에.

       

▷ 주네의 초상: 정체성을 '포획'하고 '분쇄'하기 위한 '가변적' 정체성, 혹은 파국으로서의 연대(連帶). 오른쪽 사진은 주네가 버로스(Burroughs), 긴즈버그(Ginsberg)와 함께 팔짱을 끼고 걷는, 좀체로 보기 드문 또 하나의 1968년 '명장면'을 담고 있다.

4) 주네에 관한 사이드의 논의에서 흥미로운 것은 크게 두 줄기로 요약될 수 있다(그런데 이 두 줄기가 실은 같은 뿌리를 갖는다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그것도 아주 'bittersweet'하기 그지없이). 첫째, 사이드와 주네의 이런저런 만남이 남긴 일화들과 그에 관한 회고적 서술이 주는 어떤 즐거움, 둘째, 정체성의 개념을 파괴하는 행위 안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극명히 드러내고 있는, 주네의 초상이 우리에게 건네는 어떤 괴로움: 사이드는 데리다(Derrida)에 관한 섭섭함을 고백하며 다소 '애교스러운'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사르트르(Sartre)에 대해 강한 정치적 불만들을 토로하기도 하는 등 사상가들 사이의 만남이 발생시키는 이런저런 일화와 이면들의 재미를 전해주고 있는 반면, 때로는 알제리인들 사이에, 때로는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 서 있었던 주네의 초상을 제시하면서 사이드 자신을 주네와 '등치'시키기도 하고 또 그와 모종의 거리를 두기도 하는 등 '경계인'의 고통을 드러내고 있기도 한 것이다. 주네와 사이드 자신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경계[인]적' 특징이란, 곧 그들의 지적 궤적이ㅡ물리적인 의미에서든 정신적인 의미에서든ㅡ일종의 '여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의 여정은ㅡ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물리적 의미에서든 정신적 의미에서든ㅡ자신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를 거의 떠나지 않았던 저 칸트의 '지적' 여정과는 전혀 다른 경로와 밀도를 보여준다(칸트의 이 '떠나지 않음'이 여기서 비난의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라는 점을 끝내 언급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이 고색창연한 나의 노파심이란!). 사이드는 주네의 희곡 『병풍들(Les paravents)』을 통해서 이러한 [주네의] 여정이 지닌 어떤 '목적의식'을 다음과 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섬뜩하고 집요하고 때로는 코믹한 연극적 과정도 보이는 이 희곡의 위대성은 단지 권력과 역사를 가진 프랑스 제국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세심하고 논리적으로 발가벗겼다는 데 있다.
ㅡ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125쪽.

추측을 해보자면, 사이드는 어쩌면 주네의 희곡 『병풍들』 안에서 '정치적 아르토(Artaud)'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아르토 자신의 '여정'도 그 자체로 매우 독특한 경로를 노정(露呈)하고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이들을 대할 때 느끼게 되는, 다소 정서적으로ㅡ그리고 개념적으로ㅡ'이국적인(exotic)'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어떤 감정의 실체 또한, 약간은 이해할 수 있는 기분이 된다. 그런데 이 '이국적'인 질감의 정서, 그래서 '이질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 특수한 '코스모폴리탄'의 정체성은 과연 말 그대로 하나의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이런 질문을 새삼 던지는 이유는, 이 '이국적'인 정체성이란 다소 거칠게 말해 일종의 '非유럽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다만 이것이 나에게 '이국적'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정서가 사실 한 번의 '여과 과정'을 더 거친 복합적인 과정의 산물이므로, 말하자면 이는 '비유럽적 유럽인'의 정체성이 '동아시아'에 속한 한 개인(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게 되는가에 대한, 내 나름의 '정서적' 답변이기 때문이다). 조금 뒤이어서 사이드는 주네에게 있어 정체성이 갖는 의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다소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정체성은 우리가 사회적·역사적·정치적, 혹은 영적 존재로서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어떤 것이다. 문화의 논리와 가족의 논리가 여기에 더해져서 정체성의 위력을 증대시킨다. 주네처럼 비행을 저지르고 격리되고, 또 권위를 위반하는 재능이 있고 이를 즐기는 사람은 그로 인해 자신에게 부과된 정체성의 희생자이므로, 그에게 정체성은 결연하게 반대해야 할 무엇이다. 무엇보다 주네가 선택한 알제리와 팔레스타인 같은 장소를 볼 때, 정체성은 더 강력한 문화, 더 발전한 사회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판결된 사람들을 짓밟고 그 위에 자신을 부과하는 과정이다. 제국주의는 정체성의 수출품이다.
ㅡ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128-129쪽.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저자 혹은 『문화와 제국주의(Culture and Imperialism)』의 저자로서의 면모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이 부분은, 사실 주네의 모습을 사이드 자신의 또 다른 초상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일종의 '회고록적' 또는 '자서전적' 작업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사이드가 이 글에서 '선택'한 주네의 작품이 바로 『사랑의 포로(Un captif amoureux)』라는 사실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데, 사이드의 마지막 책들 중의 하나인 이 '말년의 양식'에 대한 연구서가 주네의 저 회고록적이고 자서전적인 'swan song'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과 맞닥뜨릴 때 갖게 되는 묘한 '기시감(déjà-vu)' 내지 '동시성(synchronisme)'은, 이 글을 읽는 과정 안에 숨겨진 또 하나의 묘미라고 말하고 싶다. 한 명의 '이국인'으로서, 자신보다 하나의 '여과 과정'을 역방향으로 더 거친 또 다른 '이국인' 주네를 바라보는 사이드의 심정은, 아마도 『사랑의 포로』에 대한 독해를 통해, 그리고 그 안에서 바라본 주네의 '말년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그렇게 심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다소 '감상적'인 추측 한 자락, 이렇게 남겨보는 것이다.

       

▷ Jean Genet, Œuvres complètes, tome 5, Paris: Gallimard, 1979. 
▷ Jean Genet, Un captif amoureux, Paris: Gallimard(coll. "Folio"), 1995(1986¹).

5) 여담이지만, 여기서 주네의 희곡 『병풍들』의 주인공 이름이 '사이드(Saïd)'임을 다시금 떠올려보는 것은 또 하나의 작은 묘미가 될 것이다. 사이드가 이 등장인물 '사이드'를 통해 다시금 확인하고 천착하고 있는 '배반'의 주제, 이탈하고 위반하는 것으로서의 부정적/파괴적 '정체성'이라는 주제는, 따라서 이 책의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 중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배반자' 또는 '위반자'로서의 정체성이란 어쩌면 '여행자'와 '관광객'의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여행자'란 단순히 '방관자'일 수만은 없다. 마치 벤야민(Benjamin)의 산보객(flâneur)이 그러한 것처럼, 또는 어쩌면 소설가 구보 선생의 일일이 그러한 것처럼. 사이드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따라서 주네는 정체성을 넘나드는 여행자, 혁명적이고 끊임없이 선동적이기만 하다면 자신과 무관한 대의명분에 기꺼이 몸 바치려고 밖으로 떠나는 관광객이다.
ㅡ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129쪽.

이는 사실 에둘러 도달한 사이드 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인으로서 이집트와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 대학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사이드에게, 주네가 드러내는 '말년성'의 형식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외부성의 거울'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오래된 개인적 의문을 다시금 발음해보는 것일 뿐: 왜 소설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며', 왜 비평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비평가의 대상이 언제나 '자기 자신'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반론은 물론이고, 소설의 영역에서도 문학상이나 특집호에 의례적이고 관습적으로 따라붙는 소위 '자전적' 소설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하는 반문 또한 전혀 별다른 공격이 되지 못한다. 소설가와 비평가라는 '정체성' 개념에 대한 이런 종류의 '보편화'에는 '숙명적'인 어떤 것이 있다. 이러한 '숙명'에 있어서는, 저 두 정체성이 각기 자신만의 것으로 품고 있는 '진실성'의 형식만이 문제가 된다. 소설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형식'이며, 반면 비평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름이 아닌 것에 기대어 자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형식'인 것, 말하자면 이것이 근대문학적 정체성에 대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정리(theorem)이다. 따라서ㅡ사이드의 말대로ㅡ이러한 정체성의 수출품이 무엇보다 "제국주의"이긴 하지만, 그보다 앞서 저 정체성이란 먼저 '근대성이 생산해낸 상품'인 것이다.

       

▷ Jean-Paul Sartre, Saint Genet. Comédien et martyr
    (Œuvres complètes de Jean Genet, tome 1), Paris: Gallimard, 1952.
▷ Jean-Paul Sartre, Saint Genet: Actor and Martyr(trans. by Bernard Frechtman), 
    New York: George Braziller, 1963.

6) 주네의 이름 위에는 언제나ㅡ부정적인 의미에서든 긍정적인 의미에서든ㅡ저 사르트르의 이름이 지닌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는 인상을, 나는 오래 전부터 일종의 '경련'처럼 갖고 있었다(이후 바타이유(Bataille)의 주네 비평을 접하고, 또 『조종(Glas)』에서 데리다가 헤겔(Hegel)을 씨실 삼고 주네를 날실 삼아 짜나간 '직물(texture)'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한 사르트르의 그림자가 어느 정도 희석될 수 있었지만, 어쨌든 개인적으로 이 그림자가 여전히 내게 강력한 '잔상'으로 다가오는 현상은 지금도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인상을 갖게 하는 여러 '정황적'이고 '역사적'인 요인들을 배제한다면, 아마도 그 가장 큰 원인으로는 바로 위의 책, 곧 불어본으로 700쪽에 달하고 영역본으로도 600쪽을 훌쩍 넘겨버리는 사르트르의 『聖 주네』가 지닌 강렬한 존재감을 들 수 있을 것이다(다만 언제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 것은 바로 사르트르의 이 책이 갈리마르 출판사의 주네 전집 1권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배우이자 순교자'로서의 주네에 대한 사르트르의 '넘치는 애정'을 생각하더라도 이는 다소 과도한 처사, 혹은 더 나아가서 주네에 대한 일종의 '문화적 역차별'이라는 생각까지 머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극히 개인적인 맥락에서, 사이드가 인용하고 있는 주네의 몇 마디 말들이 나를 한껏 미소 짓게 했음을 고백한다(같이 읽으며 함께 미소를 머금었으면 하는 마음 한 자락, 그 미소가 비록 '썩소'라 할지라도!):

우리는 사르트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주네는 자신에 대한 방대한 책을 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 약간은 거북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친구가 나를 성인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요." 계속해서 그는 이스라엘 편을 강력하게 드는 사르트르의 입장에 대해 말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가는 파리에 있는 친구들이 자신을 반유대주의자라고 비난할까봐 두려워하는 겁쟁이입니다." 7년 후[사이드와 주네의 이 만남이 있었던 것은 1972년이었다ㅡ람혼] 파리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가 주최한 중동 지역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나는 오랫동안 내가 존경해온 서양의 위대한 지성이 시오니즘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지 깨닫고는 주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인지 사르트르는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떤 고통을 참아야 했는지 세미나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ㅡ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120쪽.

▷ 글렌 굴드, '지식인 비르투오소(virtuoso)'의 초상.

7) 책을 읽는 사람이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꼭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 Vice versa, of course! 하지만 그에 앞서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가 가끔씩 이 두 종류의 인간 사이에 어떤 '장벽'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다는 사실이다. '두 종류의 인간'이라고 아예 분류하고 서로 격리시키기까지 해버렸으므로 이 말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벽'이란, 사람들이 그것을 쉽게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딱 그만큼, 뛰어넘기가 극히 어렵다(나의 이 문장 형식에 주목하기 바란다: 나는 결코 "사람들이 이 장벽을 뛰어넘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벽은 사실 쉽게 뛰어넘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또한 "사람들이 이 장벽을 뛰어넘기가 쉽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장벽은 그리 만만히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도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결코 없다). 나의 어조와 완전히 같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그러한 다소 한탄 섞인 어조로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날 문학계 지성과 일반 지식인들은 음악 예술에 대한 실용적 지식이 거의 없고, 악기를 연주한다거나 음악 기초이론을 배우는 경우가 드물며, 카라얀과 칼라스 같은 몇몇 유명 연주자들의 음반을 구매하는 것을 제외하면 음악 실제에 관한 한 사실상 문맹이다. 서로 다른 연주와 해석 및 양식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모차르트, 베르크, 메시앙 음악에서 화성과 리듬이 어떻게 다른지를 판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ㅡ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169쪽.

이 말에 누군가는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반성에 가까운 안타까움 한 조각을 마음 속에 머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이 문장들이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착잡한 상념들은, 말하자면 '유럽과 비유럽 사이의 경계'라는 지역적 문제에서부터 '계급 갈등과 교육의 평등'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책 읽기의 능력과 악보 읽기의 능력을 서로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ㅡ그러므로 이는 '능력[들]'과 그것[들]의 결합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다소 부박하게 그리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ㅡ'음악적으로' 사고하고 쓰고자 하는 어떤 시도, 곧 '음악을 사유할' 수 있기 위해 행하는 어떤 노력에 다름 아니다(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는 어떤 '결합'과 '복합'의 문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지식인 비르투오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이드의 문제의식이란 나에게 이렇게, 이런 걸음으로, 이런 그림자로 다가오는 어떤 물음 한 자락이다: 지식인 비르투오소란 무엇인가. 나는 예전에 이러한 종류의 '정체성'을 사군자를 그리고 거문고를 뜯는 선비의 자리에 비유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러한 정체성이 주류와 비주류, 본류와 지류, 본업과 취미를 나누는 분류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먹으로 난을 치고 풍류 가락을 읊조리는 것을 단순한 선비의 망중한이나 심심파적으로 치부한다면ㅡ어떤 현상이 역사적으로 '그러했다'라고 말하는 일과 그러한 현상의 비유를 통해 어떤 개념을 재정립하는 일은 서로 별개의 문제임을 따로 밝히고 지나가는 것 또한 나의 저 빌어먹을 노파심의 발로일 텐데ㅡ'지식인 비르투오소'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적용하기란 실로 요원하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실로 오래되고 낡아빠지게 돼버린 단어 하나, 곧 '총체성(Totalität)'이라는 단어의 너덜거리는 한 자락을 얻기 위한 도정에 다름 아니다(하지만 이러한 총체성이 아무리 너덜거리고 낡아빠진 '시대착오성'이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참으로 소중한, '드물고 고귀한' 여정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문제적 말년성을 드러내는 굴드의 '문제적 특성'은 어디에 있는가. 사이드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더 정확하게는, 아무리 해도 다음과 같이 '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비르투오시티를 의식적으로 재설정하고 재정립하여 도달하려 한 결론은 일반적으로 연주자가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여 담론을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의 영역에 속한다.
ㅡ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176쪽.

이 문장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싶은 것은 바로 "일반적으로"라는 부사이다. '일반적으로', 곧 여기서는 '뭉뚱그려' 이야기했을 때 그렇다는 것, 또한 이렇게 '일반적으로' 또는 '뭉뚱그려' 말하지 않고서는 이를 달리 쓸 수 없었다는 것, "일반적으로"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 모호한 '비언어(非言語)'의 지점이다. 곧 굴드가 목표로 했던 지점은 "언어를 사용하여 담론을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일단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언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비슷한 관점에서 사이드가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굴드가 비르투오소로서 거둔 성취의 극적인 면은, 그의 연주가 명백한 수사학적 양식을 통해 전달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음악 연주자들이 시도하지 않고 어쩌면 시도할 수도 없는 특정한 유형의 진술로서도 전달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전문화 시대, 반인본주의적인 원자화 시대에 연속성, 합리적 지성, 미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주장하는 진술이다.
ㅡ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188쪽.

이러한 "특정한 유형의 진술"은 물론 "대부분의 음악 연주자들"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술'과 '서술'을 업으로 하는 자, 곧 책을 읽고 쓰는 자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굴드의 말년이 지닌 '매력'은, 바로 이러한 모호함과 경계성에, 곧 가장 합리적인 지성이 빛을 발하는 미(美)의 가치를 가장 합리적이지 않은 합리성으로, 가장 언어적이지 않은 언어로 '진술'하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굴드의 '말년성'이 지닌 파국의 성격을 나름대로 잘 설명할 수 있는 '진술'이 아닐까 하는 것. 이어서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결국 굴드에게 바흐의 음악은 도처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느 부정과 무질서에 맞서는 데서 본질적인 힘을 과시하는 합리적 체계의 등장을 보여주는 원형 같은 것이다. 이것을 피아노로 실현하려면 연주자는 스스로를 소비하는 대중이 아니라 작곡가와 일치시켜야 한다.
ㅡ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188쪽.

이 문장들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으로 받아들였던 부분은 바로 "이것을 피아노로 실현하려면"이라는 말이었다. 굴드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부정과 무질서에 맞서는 데서 본질적인 힘을 과시하는 합리적 체계의 등장을 보여주는 원형" 같은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저 "원형"이란 그 화려한 수사와 엄청난 무게감에 비할 때 너무나 '단순한' 것이다. 그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오로지 '피아노로써[만] 실현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언어가 아니라 피아노로써 '실연(實演)'하고 또 '실현(實現)'해야만 한다. 내가 굴드의 모호함 또는 경계성, 혹은 굴드의 말년성만이 지닌 파국의 성격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말하자면 '지식인 비르투오소'의 파국적 성격이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스스로를 [...] 작곡가와 일치시켜야 한다"는 지식인 비르투오소의 이 '선택적 책무'가, 연주자가 연주에 임할 때 작곡가의 '의도'나 '정신'과 혼연일체 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따위의 '랑만적인' 지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점을 특히 지적하고 싶다. 굴드가 뛰어난 '비르투오소'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연주의 과정을 통해 작곡의 과정이 새롭게 "창안"되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굴드가 생각했던 [바흐적] '인벤션(invention)'의 진정한 의미였다. 연주 자체가 선사할 수 있는 희열과 더불어 '작용 중인 현재(le présent en acte)', 곧 '작곡 중인 작품'을 가장 '현재적으로' 드러낸다는 것. 그러므로 내가 '지식인 비르투오소'의 정체성을 생각하면서 다시 묻게 되는 저 오래된 질문은 실로 간단하고 단순하다: 책 읽는[쓰는] 자와 음악 듣는[만드는] 자는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헤어지는가.

▷ Véronique Voruz, Bogdan Wolf(eds.), The Later Lacan: an Introduction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7.  

8) 내가 사이드의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새롭게 떠올려보게 된 책은 작년 뉴욕 주립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논문집 『후기 라캉: 입문(The Later Lacan: an Introduction)』이다. '실재계(le réel)'에 대한 강조와 집중으로 거칠게 요약되는 이른바 '후기' 라캉을 사이드가 말한 '말년성'의 형식으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소박한 물음 때문이었다. 특히나 이 책은 '임상' 분야와 관련하여 '후기' 라캉적 요소들이 어떻게ㅡ신경증(neurosis)의 영역뿐만이 아니라ㅡ정신병(psychosis)의 영역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의미에서 따로 일독을 요하는 긴요한 책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말하자면 라캉의 '말년성'이 지닌 파국으로서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넓은 의미에서 사상사 서술의 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사이드에게 보편화된 말년성의 문제가 바로 그렇듯이.

       

▷ Jacques Lacan, Le séminaire livre XXIII. Le sinthome
    Paris: Seuil(coll. "Le Champ freudien"), 2005.
▷ Jacques Lacan, Des noms-du-père
    Paris: Seuil(coll. "Le Champ freudien"), 2005.

9) 간단히 말하자면 문제는 이런 것이다: 라캉의 '후기' 또는 '말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라캉에게서 '말년성'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파국'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일까. 가장 먼저 라캉의 위상학(topologie)을 떠올려보자. 'S(symbolique)'에 찍혔던 강조점이 이제는 'R(réel)'로 옮겨지는 것인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곧 기표와 상징계로부터 향유와 실재계로 좌표축이 이동한 것인가). 혹은 물음을 조금 바꿔보자면, 프로이트의 '말년'은 어떠한가. 예를 들어 그의 지형학(Topik)을 한 번 떠올려보자. '후기' 프로이트의 어떤 '이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곧 전의식(vorbewußt)과 의식(bewußt)과 무의식(unbewußt) 사이를 가르는 분류법으로부터 '그것(Es)'과 '자아(Ich)' 그리고 '초자아(Überich)'라는 새로운 범주들에 대한 집중으로 나아가는 노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곧, '언어적'으로 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형용사 형태의 기술어 범주로부터 명사/대명사 형태의 기술어 범주로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여기서의 문제의식을 이루는 요체는 '지젝(Žižek)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 바꿔 말해 '말년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라캉의 모습이다. 왜 이것은 말년성의 문제로 소급될 수 있는가, 그리고 또 왜 이것은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이라는 테제로 정식화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먼저, 마르크스(Marx)에 대해 엥겔스(Engels)가 그러한 것처럼, 다시 말해 곧 '마르크스주의'의 효시가 마르크스 자신이 아닌 바로 엥겔스일 수 있는 것처럼, 라캉에 대해 지젝 또한 '라캉주의'라는 하나의 사조에 있어서 엥겔스와 비슷한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 한 자락 던져본다. 물론 엥겔스와 지젝의 차이가 분명하고도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텐데, 말하자면 나는 '교조 없는 교조주의'ㅡ어쩌면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혹은 죽은 데리다가 산 지젝을 '호명'하듯 던지는 괴담 또는 농담 한 자락ㅡ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물음을 슬쩍 던져보는 것은, 다시 한 번 말해서,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에 대해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이유에서인데, 노파심에서 저 예의 '설상가상'과 '중언부언'의 첨언을 다시 삽입하자면, 물론 이는 이른바 '순수한' 형태의 라캉ㅡ또는 '라캉주의'ㅡ을 추출하고 분리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10) 무엇보다 라캉주의에 대한 지젝의 영향력이 지닌 중요성은, 라캉의 언어, 정신분석의 언어를 가장 강력한 형태의 '정치적' 언어로 바꾸어놓았다는 점, 곧 라캉의 이론을 하나의 정치[학] 이론으로 거듭나게 했다는 점, 더 나아가 완결된 '구조'를 지닌 하나의 '비평 언어', 곧 하나의 '철학 언어'를 '정립'했다는 점에 있다는 것에는 누구도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단어와 그것의 용법에 민감하고 예민한 이들은 내가 쓴 두세 단어들에서 약간의 껄끄러움을 느낄 법도 한데, 내 생각에 그것은 [완결된] '구조'와 '정립'이라는 단어들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물론 지젝이 라캉의 '이론'을 하나의 '체계'로서 받아들인 것은 아니며 어떤 도표와 범주들로 그것을 환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구조'와 '정립'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유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언어'로 말하자면, 지젝은 끊임없이 라캉을ㅡ그리고 헤겔을ㅡ'환기'시킬 뿐이다. 나는 '정립'의 행위가 이러한 '환기'의 형식이라고, 그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환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내게는 바로 '구조'이다. 그것은 '체계적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읽고 쓰고 해석하는 행위를 통해 '결과적으로'ㅡ말하자면, '사후적으로(nachträglich)'ㅡ그러한 구조의 '정립'에 가닿게 되며, 그러한 한에서 우리는 그 과정과 산출의 형식을 '정립'과 '구조'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말하자면 현대의 이론 영역에서 지젝이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 곧 철학자 아닌 철학자, [정치]이론가 아닌 [정치]이론가, [영화]비평가 아닌 [영화]비평가라는 모호한 '경계[인]적' 지위는 바로 이러한 지젝 식의 '구조'와 '정립'ㅡ곧 '환기'로부터 직간접적으로 도출되는 하나의 '인상'이라는 생각이다(이 점에 있어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에 대해서도 또한 비슷한 '존재 규정'의 근거를 제시해볼 수 있을 텐데, 물론 가라타니의 경우 그가 가장 강력하게 '환기'시켜주는 것은 바로 마르크스, 그리고 근대성(modernity)의 문제이겠지만). 지젝의 초상을 이러한 '정립'과 '구조'의 또 다른 형태, 곧 '환기'로서의 체계라는 새로운 형태에서 바라볼 때, 그가 지속적으로 천착해오고 있는 독일 관념론 체계에 대한 끈질긴 [재]해석의 시도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실제로 내가 앞서 거칠게나마 요약했던 지젝의 특성은 사실 라캉 안에서도 이미 잠재해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글과 세미나 등을 통해서도 명백히 '현시'되어 있기까지 한 것. 지젝에 대한 '존재 규정'은 사실 라캉 그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라캉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이었던 것. 말하자면, 라캉 그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순수한' 라캉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 마치 마르크스가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던 것처럼.

▷ 다음으로, 천연색의 사진 한 장: 지젝은 발을 걷어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시 내리고 있는 것인가. 바꿔 말해, 그는 입고 있는가 벗고 있는가, 혹은 그는 감추고 있는가 드러내고 있는가, 라는 물음. 말하자면,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을 말하면서 지젝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는 점,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ㅡ어쩌면 '유명론자(nominalist)'의 입장에서ㅡ저 어구 안에 이미 '지젝'이라는 이름이 그 자체로서 포함되어 있다는 점, 아니 그보다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지젝'이라는 이름을 발설하지 않고서는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이라고 하는 부정어법 그 자체가 도대체 성립할 수 없다는 점, 그 점들이 나를 홀리고 매혹시킨다. 라캉의 '말년성'이 도달한 곳은, 어쩌면 이러한 지젝의 '청년성'이다.

11) 혹자는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의 영역, 곧 지젝에 과도하게(?) 집중함으로써 우리가 상대적으로 둔감하게 반응하고 놓칠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 '임상'의 영역이 아닌가 하고 되물을 지 모른다. 곧 이는 라캉 이론이 지닌 '비제도적' 힘들과 '가능성'들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정신]의학계 안에서 라캉 이론이 어떻게 적용되고 발전되어 왔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는 일종의 '불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치료'와 '교정'이 문제가 되지 않는 라캉 이론의 근본적 입장을 생각해볼 때, 설사 '임상'에 대한 라캉 자신의 끊임없는 환기와 강조를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그 '임상'이 이른바 의학 제도 내적인ㅡ혹은 의학의 내부적 '이데올로기'로서의ㅡ'치유'의 문제일 수만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반드시 상기하도록 하자. 오히려 라캉 이후 그 이론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은 이론가들의 작업은 이러한 편협한 정의의 '임상'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공통의 문제의식을 갖는다고도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결코 프로이트에게서도 다르지 않다.

               

▷ 브루스 핑크, 『 라캉과 정신의학 』(맹정현 옮김), 민음사, 2002.
▷ 브루스 핑크, 『 에크리 읽기 』(김서영 옮김), 도서출판 b, 2007.
▷ Juan-David Nasio, Les yeux de Laure
    Paris: Flammarion(coll. "Champs"), 1995(1987¹).

12) 라캉의 '말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의 위상학적 요소들 사이에서 일어난 강조점의 변화로만 환원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라캉의 '말년성', 그 파국의 실체는 바로 [정신]의학의 내부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임상'이라는 영역에 대한 부정과 파괴에 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는 라캉 자신이 여러 차례 행한 임상에 대한 강조와는 다른 맥락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게 라캉의 '말년성'이란, 곧 '치료/교정'의 '병리학적' 담론으로부터 '주체/윤리'의 '정치학적' 담론으로의 어떤 결정적 '이행'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이행'이 바로 정신의학에 대해서 언제나 '파국'의 정체성과 효과를 갖게 되는 '말년성'의 실체인 것. 이는 실로 사상사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이라는 정식이 내게 중요하게 되는 것은, 라캉을 읽는 데에 있어 '지젝'이라는 항을 소거해버리기 위함이 아니다(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는 건 오히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이는 곧 지젝 이전에 '이미-언제나' 비평의 언어, 윤리의 언어, 정치의 언어, 철학의 언어가 되고 있는 라캉으로 '돌아가자'는 것, 곧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을 통해 '지젝을 경유해서 온 라캉'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사상사적 '예비학(Propädeutik)'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나의 이러한 '예비학적' 욕망이란 실은 어쩌면 지극히 '후설(Husserl)적'인 일종의 '근본주의(Radikalismus)'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이른바 '라캉으로의 복귀(retour à Lacan)'는 임상이라고 하는 협의의 영역이 지닌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자는 것도 아니고 라캉 이후 후학들의 '인문학적' 세례를 배제한 '순수 라캉'을 새롭게 추출하자는 것도 아니다. 라캉의 '말년성'은 '실재계'라는 영역을 통해 가장 극명히 드러나는 것, 그러므로 그의 '말년'과 그의 '후기' 이론은 어쩌면 그 자체로 하나의 '평행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le réel'이란 무엇인가, 'jouissance'란 무엇인가, 'sinthome'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이러한 라캉의 '말년성'이라는 지평에 섰을 때에만, 그때야 비로소 지젝의 '청년성'이 보이게 된다. 내가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이라는 정식으로 '경유'하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고로, 이제서야ㅡ이 잡설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 겨우 이제서야ㅡ나는 이렇게 '환대'의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고, 또 건네고 싶어지는 것이다: "실재계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 그리고 다시금, 흑백의 사진 한 장: 저 손짓은 단순한 오케이 사인일까, 그도 아니라면 저 손 자체가 돈에 대한 '환유'라도 된단 말인가. 사진의 기표는 내게 '프랑스'와 '붓다'를 동시에 의미하는 '佛'이라는 문자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라캉의 이 사진 한 장은, 내게 그 자체로ㅡ그리고 물론, 문자 그대로ㅡ일종의 '상형문자(hiéroglyphe)'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13) 해롤드 핀터(Harold Pinter)의 1996년 작품 『재는 재로(Ashes to Ashes)』에 등장하는 두 인물 데블린(Devlin)과 레베카(Rebecca)의 대사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데블린: [...] 다시 시작하자.
레베카: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시작했어... 오래 전에. 우리는 시작했지. 다시 시작할 수 없어. 우린 다시 끝낼 수는 있지.
데블린: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끝낸 적이 없잖아.
레베카: 아니, 끝낸 적 있어. 끝내고 또 끝내고 또. 그리고 우리는 또 끝낼 수 있어.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데블린: '끝내다'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 아니야? 끝은 끝낸다는 것을 뜻해. '또' 끝낼 수는 없어. 당신은 한 번 끝낼 수 있을 뿐이야.
레베카: 그렇지 않아. 당신은 한 번 끝낼 수 있어. 그러고 나서 또 끝낼 수 있지.

ㅡ 해롤드 핀터 전집 9권(오경심 옮김), 평민사, 196쪽[번역은 일부 수정].

'한 번 끝낼 수 있고, 그리고 다시 계속해서 끝낼 수 있는 것', 그러나 '다시 시작할 수는 없는 것', 나는 데블린과 레베카의 이 대화가  저 '말년성'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알레고리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 번 돌이켜보자면, 사이드가 농담 삼아 혹은 다소 반어적인 어조로 자신을 "아도르노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추종자"라고 말했던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그 둘은 모두 음악에 '대해'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 쓰고 있는 몇 안 되는 저술가들일 터. 그런데 '음악적으로' 쓰고 '음악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지독히도 진부하게 들리는 '낭만주의적' 물음의 형식 사이로 살짝 엿보이는 어떤 오솔길이, 나에게는 가장 지난하고도 고되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동시에 가장 '매혹적'이고도 가장 '색정적'인 것임에야. 결국 이 모든 것은, 아니 이 '전체-아님(pas-tout)'은, 마치 주네를 에둘러 도달한 사이드 자신의 저 '자서전적' 고백처럼, 에둘러 고백하게 된 나의 '제국주의적' 정체성ㅡ혹은 임화(林和)의 저 유명한 표현을 차용하자면, 나의 '이식된' 정체성ㅡ에 대한 자가진단에 다름 아닌 것이 되고 있는데, '지식인 비르투오소'를 향한 '도착적' 음악 작업, '비평[가] 아닌 비평[가]'을 향한 '혼성적' 글쓰기의 작업 등등, 이 뒤틀린 자서전적 욕망의 '해소법'ㅡ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향유법'ㅡ에 대한 천착이 아마도 나의 '말년성'ㅡ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엄밀하게 형식적인 [의]미에서ㅡ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잡스러운 생각이, 다시금 하나의 고백이 낳은 또 다른 고백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인 것. 이처럼 내게는, 말들이 말들의 꼬리를 집어 삼키고 다시금 내뱉기를 반복하는, 몇 마리인지도 모르는 뱀들이 뒤엉켜 이루고 있는ㅡ혹은 부수고 있는ㅡ'하나의' 정체성이, '문제적 매력'으로서, 곧 '불가능의 말년성'으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그래서 한 번만 더 다시 돌이켜보자면, '매력적인 말년'의 사이드의 모습을 담고 있는, 저 한 장의 흑백 사진처럼, 그렇게.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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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7-21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멋진 '종합선물'을 올려놓으셨네요. 지젝의 새로운 사진까지, 흥미롭습니다.^^

람혼 2008-07-21 23:07   좋아요 0 | URL
흥미롭게 읽어주셨다니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지젝의 저 사진은 참으로 '귀엽기'까지 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yoonta 2008-07-23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년의 양식"이라..이 글을 읽고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헤겔이었습니다. 특히 님이 말씀하신 지젝이 이야기하는 헤겔의 "체계" 혹은 "구조"가 "사후적"인 환기"일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에서 말이지요. 만약 헤겔에게서도 말년의 양식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의 철학의 "체계"를 시간 속에서 스스로 자기전개해 나가는 정신으로 완성시키는 동시에 이와같은 자기완결적인 범논리주의적 체계를 완성시킴으로써 오히려 체계 내부에 균열을 일으키는 절대적 세계정신(der absolute Weltgeist)에서 찾을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실 이 세계정신은 칸트의 '초월'처럼 ("체계"의 완성을 위해 도입되었지만) 체계의 내부로는 결코 환원되지 않는 일종의 '간극' 혹은 '도약'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마치 사이드가 위의 저작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말년의 양식성"으로서 제기하는 일종의 "불연속성"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말이지요. 그리고 이는 님 표현처럼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말년의) 라캉"을 통해 "라캉을 경유하는 (청년의)지젝"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표현도 헤겔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데요.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헤겔 혹은 헤겔의 이러한 "체계"를 통해서 헤겔을 경유하는 지젝 그리고 그가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헤겔의 체계 내부의 간극을 보다 잘 이해할 수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도 "사후적"으로 "환기"시키는 내용의 글이네요.

사이드가 글렌 굴드에게서 감지했다는 그 "지식인 비루투오소"의 기운이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잘봤습니다.^^

람혼 2008-07-23 05:37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yoonta님의 댓글을 너무 잘 읽었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 잡설을 통해 주장하고 싶었던 핵심을 적확하게 짚어주시고, 게다가 헤겔의 '말년성'에까지 논의를 확대시켜주셔서 제 가슴이 다 서늘해질 지경입니다. yoonta님의 글을 읽고 보니 실제로 이 글 뒤에 헤겔의 '말년성'을 논하는 글을 따로 덧붙이고 싶은 마음까지 생기는데요.^^
앞서 글 속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사이드의 이 '말년성/후기성'이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노년'의 양식이 아님을 상기해볼 때(사실 저로서는 '말년성'이라는 말보다는 '후기성'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게 되는데요, 번역자가 역주까지 첨가하면서 "lateness"의 번역어로 '공들여' 선택한 "말년성"은 사실 '파국의 후기'라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단순히 시간적인 '노년'의 느낌을 더 강하게 주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경우에는 그의 '후기성'이라고 할 것이 <정신현상학>에서 '이미' 그리고 '언제나' 도달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yoonta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헤겔의 저 '절대정신'에 이러한 '후기성' 개념을 적용시켜보는 일은 그 자체로 매우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을 흥미로운 논의로 생각됩니다. 다만 칸트의 경우에는ㅡ말씀하신 '간극' 또는 '도약'으로서의 '초월'이 지닌 어떤 '문제적 감각'이 이미 <순수이성 비판>에서 정립되고 또한 노출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그래서 아마도 가라타니 고진이라면 칸트의 '후기성'을 <순수이성 비판>에서부터 찾을 것이라는 느낌은 있지만)ㅡ'칸트적' 후기성이라고 할 것은 '최종적으로는' <판단력 비판>에서 찾는 것이 저 아도르노-사이드의 '후기성' 논의에 보다 더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은 듭니다(이 부분에서 이미 감지하셨겠지만, 칸트의 경우에는 시기적/시간적 '말년성'과 형식적/범주적 '후기성'이 묘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언제나 섬세하고 깊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드팀전 2009-02-26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사이드가 주네의 '사이드'를 통해 자기를 드러낸 것 처럼 굴드를 통해 람혼님은 '음악/책' 사이의 람혼님을 드러내십니다.
예전에 본 글인데...최근 이 책을 즐겁게 읽으면서 다시 살펴봤습니다. 뒤에 나오는 라캉의로의 발전 부분은 읽지 않았습니다.봐도 모를듯 해서. 그런데 솔직히 이 페이퍼를 읽다가 사람들이 이 책에 너무 쫄려버리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건 '대중보시' 차원에서 '합장'가지고 해결 안될 문젠데요.ㅋㅋㅋ 저도 그랬으니까요.(하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페이퍼를 보니 훨씬 낫네요.) 생각해볼만한 미학적 주제들이지만 난해한 개념들이 난무하는 책은 아니잖아요. 미학 에세이 정도..ㅋㅋ 물론 아도르노에 대해서는 좀 알아야하고(아도르노의 그림자가 책 전편에..하기야 '말년의 양식'이란 개념이 아도르노에게서 나왔다니..) , 요한 슈트라우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구분할 예술적 관심은 있어야겟지만요.

제가 사실 쇤베르크를 못넘기도 있습니다. 음악사적 위치와 의미도 알고..음반도 몇 종류들었지만 안넘어가더군요. 현대음악들도 가끔 듣긴 합니다만 그닥 즐기지는 않게되더군요. 사실 즐기라고 만든 음악이 아니다보니.ㅋㅋ 지난 번 뉴욕 사진 중 리게티 사진을 보고 그가 마치 유명한 손가락질 하는 '엉클 샘' 사진 처럼 '나 리게티.네가 듣다 포기한..' 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니까요.
대신에 다른 장르의 화성적 음악들이나 즐기고 있답니다. 람혼님과 뉴욕이나 빈, 뉴올리안즈,아바나 등 음악의 도시들을 여행다니면 즐거울 듯 합니다.

오늘 아침에 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있습니다.ㅋㅋ 아침부터 기타로 연주하는 피아졸라를 듣고 있다는

람혼 2009-02-28 04:00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말씀대로, 사이드의 굴드 비평을 통해서 제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고픈 마음, 제가 제 스스로를 규정하고 실천하는 정체성을 점검해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는데, 그 마음 잘 간파해주셔서, 세심히 글의 결을 따라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읽으셨군요.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미학 에세이' 정도의 가벼운 글이죠, 머리를 싸매고 난해한 개념들과 싸워야 하는 성격의 책도 아니고요... 제 글 안에 "쫄려버리는"ㅡ더 나아가, '질려버리는'ㅡ면이 있다는 것은 저도 느끼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책을 '쉽게 읽어버리는' 행위를 언제나 경계하는 마음이고, 또 저의 이러한 경각심을 되도록 많은 분들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라, 아마도 제가 올리는 합장이 외람되게도 어떤 '보시'의 측면을 갖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경각심의 나눔'이 아닐까 하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곳 알라딘의 '서평 공간'을 체험하면서 새삼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인데ㅡ실제로 저는 알라딘에 둥지를 튼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ㅡ, 개인적으로 저로서는 하나의 문학, 하나의 사상에 대해 너무도 쉽게 '단죄'하듯 결정짓고 결론을 내리는 글들을 보면서, 또한 그것들을 마치 하나의 유행처럼 소개하고 소비하고 망각하는 글들을 보면서, 내심 제 스스로 작은 '경각(警覺)의 불씨' 하나 피워보는 것이 제 소명이라면 소명이겠다, 그런 말도 생각도 안 되는 말과 생각 한 자락 품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소위 '퍼온' 글들을 올리지 않고 오직 제가 제 땀으로 쓴 글들만을 올리겠다는 원칙 같지도 않은 원칙을 고수하는 이유도 이러한 마음의 일환입니다).

드팀전님의 말씀이 저를 설레게 합니다. 말씀대로 정말 함께 뉴욕, 빈, 뉴올리언즈, 아바나 등을 여행하며 음악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 공간 위에서 펼쳐지는 음악에 대한 여행도 흥미롭지만, 시간 위에 펼쳐진 음악들을 찾아가는 여행 또한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밤, 12세기 유럽의 대중음악으로, 1960년대의 재즈로, 그 현기증 나는 시간차 사이에서, 어떤 시간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면 좋을 여행, 함께 하면 외롭지 않을, 그리고 함께 하면 할수록 즐거울, 그런 시간과 공간의 여행입니다. 아침쯤에는 저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드팀전님과 함께 탕고 한 곡 추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얼굴.

1) 아는 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ㅡ이 얼마나 과도한 '자기지시적' 문장인가ㅡ나는 한두 달 전 한 명예훼손 사건으로 고소를 당했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책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La haine de la démocratie)』 국역본에 대한 비판(?)을 문제 삼아, 이 책의 번역자는 스스로 고소인이 되었고 나를 비롯한 몇 명을 피고소인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아직 경찰과 검찰에 계류 중인 사안이므로 사건의 정확하고 자세한 개요에 대한 서술은 후일 다른 자리로 미룬다. 다만 내가 '피의자 조사'를 받은 날로부터 며칠 후, 원래는 구입 계획이 전혀 없었던 이 국역본을 한 권 구입했다는 사실만을 밝혀두고자 한다. 곧, 이하의 글은 이 사건의 법적인 측면과는 전혀 관계 없이ㅡ'피의자 조사' 과정에서 내가 펼쳤던 법적인 근거들에 관해서는 차후에 따로 자세히 정리해 이야기해볼 자리가 있을 것이다ㅡ오직 불어본과 국역본에 대한 '정밀 독해'만을 그 주제로 삼는다. 개인적인 일정에 따르자면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된 이후 천천히 저간의 사정과 함께 국역본에 대한 '꼼꼼한' 비판을 써볼 계획이었으나, 가급적 번역자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이 국역본의 번역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가장 시급하고 적절하게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은, 단지 피상적으로 그것이 '오역'임을 주장하는 것보다 그 번역의 내용을 '정밀하게' 독해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이 책의 '해독'ㅡ실로, 이는 암호를 푸는 작업으로서의 '解讀'일뿐만 아니라 독을 제거하는 '解毒' 또한 되고 있는 것인데ㅡ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써야 할 글들과 번역해야 할 책들과 작곡해야 할 음악들이 산재해 있는 상태에서 이런 시도는 시도 그 자체가 일종의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번역이 지닌 문제점들을 보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고자 하는 것. 여기서는 일단 서론의 번역만을 정밀 독해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서론에 대한 독해를 정리한 글만으로도 이미 분량은 장난이 아니게 되었지만). 하지만 사건의 추이와 시간의 허락 여하에 따라 지금까지 정리해 놓은 다른 장들의 번역에 대한 분석도 가능하다면 차후에 올려보도록 하겠다(불어본을 기준으로 볼 때 이 책은 서론 5단락, 1장 33단락, 2장 21단락, 3장 22단락, 4장 22단락으로 이루어진, 그리 많은 분량의 책은 아닌데, 일전에 이미 불어본을 일독해둔 덕분에 비교 독해가 그리 지난한 작업만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이것이 저 국역본의 '센세이셔널리즘적'인 판매 전략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하는 재미도 있었다는, 고백 아닌 고백 한 자락, 지나가는 길에 첨언해둔다). 다만 이러한 글쓰기가 그 작성의 노고에 비할 때 그리 '생산적'이지도 않고 '발전적'이지도 않은 작업에 속한다는 '자조' 섞인 감상을 고려하자면ㅡ이것이 나의 개인적인 '자조'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가 번역 비평의 '무용론(無用論)'을 조장하는('舞踊論'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일부 번역계의 주장으로 환원되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ㅡ, 되도록 이 글의 후속편은 작성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지만 말이다(더불어 이러한 글은 별로 '대중적'인 것도 되지 못하는데, 번역 비평에 많은 관심을 두고 적극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독자들조차 이런 '까칠한' 글을 끝까지 꼼꼼하고 정밀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내지 노파심 또한 개인적으로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다만, 읽어 내려가고 써 내려갈 뿐이다. 나의 이 글 역시 마찬가지로 꼭 그만큼의 '비판적인' 관점에서 꼼꼼히 읽히고 정밀하게 독해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Jacques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Paris: La Fabrique, 2005.

2) 고소인으로서 번역자가 제기한 주장들 중에서 딱 한 가지는 정당하다고 본다. 곧 자신의 번역을 비판하는 이들이 영어 번역본의 문장들을 그 '증거'로서 제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자 자신은 영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이 아니라 불어 원본을 직접 번역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그런데 이 말은, 이하의 분석에서 살펴보겠지만, 말 그대로 정말 '사실'에 기초한 주장인데, 이 말이 '진실'이 되는 이유는 이하에서 함께 확인해보도록 하자). 물론 이 주장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 단, 오로지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그렇다. 불어의 번역에 있어서 그 어떤 언어보다도ㅡ물론 이탈리아어나 에스파냐어만큼은 아니겠으나ㅡ영어라는 번역어가 원문으로서의 불어에 더욱 '근친적'이고 '상동적'이라는 '상식'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단, 번역자가 형식적으로 정당한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나는 그의 주장에 답할 뿐이다, 오로지 불어와 국역의 비교 독해를 통해서. 따라서 이하에서는 오로지 불어 원본만을 참고하여 번역의 정당성 여부를 따져보고자 한다. 단, 내용의 정확한 의미 파악을 위해ㅡ그리고 때로는 불어본과 영역본 사이의 '뉘앙스' 차이를 지적하기 위해, 혹은 심지어 영역본 자체의 '오역' 또한 지적하기 위해ㅡ때때로 영역본의 내용도 함께 비교 분석해보겠다(이와는 별개의 맥락에서 한 마디만 첨언하자면, 이론 저작의 번역에 있어 번역자가 직접적 번역의 대상이 되는 원문 이외에 영역본이나 독역본 등 다른 언어로 된 번역본을 함께 참조하지 않는다는 것은ㅡ특히나 인구어(印歐語)가 문제가 되는 경우에ㅡ거의 '직무유기'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한 나라와 문화의 '국어'가 지닌 의미와 위치와 뉘앙스 전달에 그 '일차적인' 책무가 있는 문학 작품의 번역이 아닌 이상, 의미의 명확한 전달과 번역어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라도 타언어로 된 번역에 대한 참조는 거의 필수적이라는 개인적인 신념 때문이다). 불어 원본을 통한 번역 비판이라는 방법이 일종의 '정공법'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둘째로는 일종의 '우회로'를 따라가는 길, 곧 일종의 '귀류법'을 적용하는 '심정적' 번역 비판의 방향이 있을 수 있겠다(단, '심정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것이 '심리적'인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데, 이는 오히려 번역에 대한 일종의 '정신분석'에 해당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전체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에서ㅡ특히 여기서는 이것이 '중립적'인 관점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할 텐데ㅡ'어떻게 이런 번역이 나올 수 있었을까'라는 물음을 설정한 후 그러한 구체적인 정황을 '이해'하고 '해명'하는 방식으로 비판을 진행하는 것이다. 지극히 '역설적인' 비유를 통해 이를 다시 말해보자면, 이는 곧 내가 '선의의 비판자(devil's advocate)'라는 입장에 서서 번역 비판을 수행하겠다는 뜻이 될 것이다. 크게 이러한 두 가지 비판 방식을 취하게 되는 이하의 분석에서 불어 원문은 La Fabrique 출판사에서 2005년에 간행된 『La haine de la démocratie』를, 영역본은 Steve Corcoran의 번역으로 Verso 출판사에서 2006년에 간행된 『Hatred of Democracy』를, 국역본은 백승대의 번역으로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2007년에 간행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그 저본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노파심'에서 미리 밝혀둔다(따라서 이 '연년생' 책들로부터 인용을 할 경우, 해당하는 책의 서지사항은 생략하고 오직 그 언어와 쪽수만을 부기하겠다). 이하에서는 보다 '정밀한' 독해를 위해 단 한 문장도 건너뜀 없이 모든 문장들을 불어본과 대조하기로 한다.

   

▷ Jacques Rancière, Hatred of Democracy(trans. by Steve Corcoran), 
    London/New York: Verso, 2006.
▷ 자크 랑시에르, 『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백승대 옮김), 인간사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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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첫 번째 단락은 모두 다섯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문장씩 차례로 꼼꼼히 살펴볼 텐데, 먼저 첫 문장의 원문과 국역을 비교해보도록 하자:

"Une jeune femme qui tient la France en haleine par le récit d'une agression imaginaire; des adolescentes qui refusent d'enlever leur voile à l'école; la Sécurité sociale en déficit; Montesquieu, Voltaire et Baudelaire détrônant Racine et Corneille dans les textes présentés au baccalauréat; des salariés qui manifestent pour le maintien de leurs systèmes de retraite; une grande école qui crée une filière de recrutement parallèle; l'essor de la télé-réalité, le mariage homosexuel et la procréation artificielle." (불어본, p.7)

이에 대한 국역본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가상의 침략 이야기를 꾸며내서 프랑스를 조마조마하게 하는 젊은 여인, 학교에서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 적자에 허덕이는 사회보장제도, 바칼로레아 시험에 출제된 문제는 라신과 코르네이유를 폐위시키면서 몽테스키외, 볼테르, 보들레르에게 왕관을 씌운다; 봉급생활자들 현행 연금제도를 유지시키기 위한 시위를 한다; 초등학교는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창조하고 있다; 각본 없는 생존경쟁 방송, 동성결혼, 인공수정은 비약한다." (국역본, 13-14쪽)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번역은 "가상의 침략 이야기"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가상의 침략"이란 부분은 불어의 "agression imaginaire"을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먼저 'agression'을 '침략'으로 옮긴다면 이 문장의 의미는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여기서 이 단어는 개인에 대한 폭행이나 공격을 의미하는 것인데 '침략'이라고 하면 집단 간의 공격을 뜻하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둘째, 이는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 지적된 부분인데,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이라는 구절은 문제가 있다. 먼저 번역자는 로베르(Robert) 불어 사전에 나오는 'voile'에 대한 설명 중 특히 두 번째 항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여성들의 얼굴이나 이마, 머리카락 등을 감추기 위해 사용되는 천 조각"이라는 설명이 그것. 친절하게도 예문까지 싣고 있다. 결국 이 "가면"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히잡인 것이다. 또한 단순히 "청소년들"이라고 옮겨진 "adolescentes"는 불어에서 여성 복수 형태의 명사로 "여학생들"(혹은 "여자 청소년들")로 옮기는 것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문맥에 비추어 볼 때도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학교에서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이라는 번역이 원문과는 다르게 지극히 '비유적으로' 읽힐 수 있는 위험이다. '가면을 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그 의미가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가면' 밑으로 감추고 숨기려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셋째, "바칼로레아 시험에 출제된 문제는 라신과 코르네이유를 폐위시키면서 몽테스키외, 볼테르, 보들레르에게 왕관을 씌운다"라는 번역은 '너무나 충실한' 직역이 거꾸로 '너무나 화려한' 의역이 되어버린 역설적인 경우로서, 오히려 이 경우에는 "바칼로레아 시험 제시문에서 라신과 코르네이유가 지녔던 권위를 찬탈한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와 보들레르"로 '단순 직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넷째, "봉급생활자들 현행 연금제도를 유지시키기 위한 시위를 한다"에서 "봉급생활자들" 다음에 조사 '~은'이 누락된 것은 편집자의 사소한 실수로 넘어가도록 하자. 다섯째, 이 역시 앞서 "가면"의 경우처럼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했던 부분이지만, 그랑제콜은, 결코, 절대로, 초등학교가 아니라는 점만을 밝히고, 이 역시 살포시 '즈려밟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어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창조하고 있다"고 옮긴 부분은 일종의 '창조적' 번역으로 보이는데, 원문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기존의 입시제도와] 병행하는 학생 선발 과정을 창안한 한 그랑제콜"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뒤에서 또 보겠지만, 이 부분을 영역본에서는 "a Grande École creates an alternative entrance scheme"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의미적으로 그렇게 큰 차이는 없지만, 분명 불어 'parallèle'과 영어 'alternative' 사이에는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다는 점만을 첨언하고자 한다(따라서 영어본으로 중역했을 때 이 부분을 "대안적 입시 제도"로 옮기는 것은 의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분명 불어 자체의 뉘앙스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여섯째, "각본 없는 생존경쟁 방송"이란 역자 자신이 주를 통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듯이, 단순히 말해서 '리얼리티 TV 쇼'를 뜻한다. 번역에 "각본 없는"이라는 구절이 꼭 들어갔어야만 했나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무엇보다 리얼리티 TV 쇼가 비단 "생존경쟁"으로만 소급될 수 있는 개념인지도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번역은 "비약한다"라는 구절이 아닐까 한다. 이는 원문의 "essor"를 옮기는 과정에서 '동사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각본 없는 생존경쟁 방송, 동성결혼, 인공수정은 비약한다"고만 하니, 어디로 어떻게 비약한다는 것인지 사뭇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이 부분은 "리얼리티 TV 쇼와 동성 결혼과 인공 수정의 비약적인 증가" 정도로 옮기는 것이 보다 적절해 보인다. 농담 삼아 몇 줄 더 덧붙이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이 열거들의 목록에 "국역본이 오역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쓸데없이 딴죽을 거는 번역 비판자들"이라는 구절을 첨가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야말로 여러 '번역 비판자들'을 "가상의 침략 이야기"로 불편하게 만들었던 번역자가 고소라는 법적 행위를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참고로 같은 문장을 영역본은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A young woman keeps France in suspense with her story of a make-believe attack; a few adolescents refuse to take their headscarves off at school; social security is running a deficit; Montesquieu, Voltaire and Baudelaire dethrone Racine and Corneille as texts presented at the baccalaureate; wage earners hold demonstrations to defend their retirement schemes; a Grande École creates an alternative entrance scheme; reality TV, homosexual marriage and artificial insemination increase in popularity." (영역본, p.1)

이 영어 번역에서 주목할 점은 본래 불어 원문에서 관계사를 포함한 명사구 형태로 되어 있는 열거들을 모두 문장 형태로 다시 바꿔서 옮겨놓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열거의 형식에서는 무엇보다도 '형태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불어 원문과 영어 번역에서는, 서로 그 형태는 다르지만, 각각 그 안에서ㅡ불어 원문에서는 명사구의 형태로, 영어 번역에서는 완전한 문장의 형태로ㅡ모든 열거들이 일관된 통일적 문법 형식을 갖고 나열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역은 어떠한가. "[...] 하는 젊은 여인", "[...] 않으려는 청소년들", "[...] 허덕이는 사회보장제도" 등은 명사구로 되어 있지만, "[...] 왕관을 씌운다", "[...] 시위를 한다", "[...] 창조하고 있다", "[...] 비약한다" 등의 구절에서는 '완벽한' 문장 형태가 출몰한다. 게다가 쉼표와 쌍반점의 사용에 있어서도 전혀 일관성이 없다(명사구 사이에서는 쉼표를, 문장 형식 사이에서는 쌍반점을 쓰는 것도 나름대로 '일관성'이라고 한다면야 할 말은 없다). 열거라는 형식에 있어서 이러한 일관성과 통일성의 결여는 번역문을 읽는 가독성을 현저히 떨어뜨림과 동시에 그 번역의 수준을 의심케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덧붙여 영어 번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첨언할 것은ㅡ앞서 지적했던 '병행'과 '대안' 사이의 '뉘앙스' 차이를 제외하자면ㅡ마지막 부분 "increase in popularity"라는 구절에 대해서인데, 이를 중역하자면 "대중화되어 간다" 정도로 될 수 있겠지만, 보다 정확한 번역은 이미 앞서 밝힌 바대로 "비약적인 증가"일 것이다. 자, 이제 두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자:

"Inutile de chercher ce qui rassemble des événements de nature aussi disparate." (불어본, p.7)

국역본에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고 있다:

"어떤 본질에서 파생된 현상들을 그 본질의 범주 내에 묶어두려는 것은 무모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부적절하다." (국역본, 14쪽)

여기서 "어떤 본질에서 파생된 현상들" 운운하면서 번역된 구절은 아마도 "des événements de nature aussi disparate"를 옮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이토록 잡다한 성격의 사건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간단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그 본질의 범주 내에 묶어두려는"이라는 번역은 앞서 "nature"를 "본질"이라고 옮겼던 '깊고 무거운' 번역에 비례해 탄생하게 된, "rassembler"라는 단어에 대한 번역자 나름의 '친절한' 의역이자 해석에 다름 아닌 것. 하지만 이 '간단한' 문장은 다음과 같이 옮기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이토록 잡다한 성격의 사건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을 찾는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이는, 앞서 열거한 여러 현상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을 찾는다는 것은 쓸데없다는 말일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질"이라는 번역어와 그 본질의 "범주"라는 번역어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찾아보려는 행위야말로 정말 쓸데없는 짓이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쓸데없다(inutile)"고만 하면 될 말을 굳이 "무모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부적절하다"고까지 '확장'해서 옮긴 국역을 그대로 차용하자면, 그 말 그대로가 될 것이다. 세 번째 문장으로 넘어간다:

"Déjà cent philosophes ou sociologues, politistes ou psychanalystes, journalistes ou écrivains nous ont fourni, livre après livre, article après article, émission après émission, la réponse." (불어본, p.7)

이 문장의 국역본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미 수많은 철학자 및 사회학자, 정치학자 및 정신분석가, 기자 및 작가들은 서적, 기사, 방송을 통해서 각자의 논평과 그에 대한 반박을 제시하고 있다." (국역본, 14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 사회학자들, 정치학자들, 정신분석가들, 언론인들, 작가들이 우리에게 책과 기사와 방송을 통해 계속해서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다." 이 부분을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국역본의 번역과 내 번역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쓸데없다"를 "무모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부적절하다"고 옮기는 어떤 번역의 '과잉'을 염두에 두자면, 단순히 "우리에게 답변을 제시했다([...] nous ont fourni [...] la réponse)"라고 옮기면 되는 구절을 "각자의 논평과 그에 대한 반박을 제시하고 있다"로 번역하는 어떤 '과도함'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니,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맡긴다. 다음으로 네 번째 문장을 검토해보자:

"Tous ces symptômes, disent-ils, traduisent une même maladie, tous ces effets ont une seule cause." (불어본, p.7)

국역본은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이 모든 징후들은 동일한 병증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병증으로 인해 나타나는 모든 결과의 단 한 가지 원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역본, 7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 "그들은 이 모든 증상들이 동일한 병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즉 이 모든 결과들은 오직 단 하나의 원인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역자가 '이야기를 하다'라는 동사구를 사용해 번역함으로써 이 문장이 띠고 있는 '간접적 인용'의 의미를 살리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장 자체로만 본다면 이 말이 "그들"ㅡ철학자와 사회학자와 정치학자와 정신분석가와 언론인과 작가들ㅡ의 어법이라는 뉘앙스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바로 "그들"이 "동일한 병증"과 "단 하나의 원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랑시에르 자신이 그렇게 단정적으로 규정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불어 원문의 삽입구 "disent-ils"의 뉘앙스, 이것이 번역 안에서 살아나야 하지 않겠는가. 첫 번째 단락의 마지막 문장인(이제 겨우!) 다섯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Celle-ci s'appelle démocratie, c'est-à-dire le règne des désirs illimités des individus de la société de masse moderne." (불어본, p.7)

"현대 사회의 대중, 사회 속의 개인이 지닌 무한 욕구를 기저로 작동하는 지배체제, 세칭 민주주의가 그 근원인 것이다." (국역본, 14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이 원인은 곧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 다시 말해 현대 대중 사회의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욕망들이 지배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먼저 지적할 것은 앞 문장의 "원인(cause)"과 그것을 이어받고 있는 대명사 "celle-ci"의 경우, 국역본에서 이를 굳이 각각 "원천"과 "근원"으로 다르게 번역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무한 욕구를 기저로 작동하는"이라는 번역 역시 다소 과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 앞서 네 번째 문장에서 지적했던 문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 인용'의 뉘앙스가 전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곧, "근원인 것이다"라고 확정적이며 규정적인 어미를 쓸 것이 아니라 "체제라[고 말하]는 것이다"처럼 이 말이 "그들"의 어법임을 번역 안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둘째, "현대 사회의 대중, 사회 속의 개인"이라는 번역은 두 가지 의미에서 오역이다. 먼저 이 부분에서 "현대 사회의 대중"과 "사회 속의 개인"을 동격으로 번역했다는 것은 곧 불어 원문에서 "de"가 지닌 의미 관계를 잘못 해석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가장 초보적인 실수라고 할 수 있겠다. "individus de la société de masse moderne"은 그 자체로 단순히 "현대 대중 사회의 개인들"이라고 옮기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와 관련하여, 불어 "c'est-à-dire"가 서로 동격으로 연결시켜 주고 있는 것은 "현대 사회의 대중"과 "사회 속의 개인"이 아니라, "민주주의(démocratie)라고 불리는 것"과 욕망이 지배하는 "체제(règne)"인 것이다. 참고로 영역본에서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This cause is called democracy, that is, the reign of the limitless desire of individuals in modern mass society." (영역본, p.1)

영역본에서도 일견 사소해 보이는 문제가 있다. 불어 원문에서 랑시에르가 이탤릭체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을 전혀 강조 없이 그대로 쓰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인데(이 점에 있어서만은 국역본이 원문의 강조를 잘 따르고 있다), 여기서도 "that is"라는 어구가 강조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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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음으로 두 번째 단락을 살펴보겠다. 이 단락은 모두 여덟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하, 경우에 따라서는 편의상 몇 개의 문장들을 한 번에 묶어서 검토해볼 것이다. 먼저 첫 번째 문장:

"Il faut bien voir ce qui fait la singularité de cette dénonciation." (불어본, p.7)

① "우리는 무엇이 이같은 비난의 기괴함을 생성시키는지 제대로 식별해야 한다." (국역본, 15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이러한 비난의 특이함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여기서 명시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singularité"에 대한 번역어인데, 이 문장은 앞에서 서술한 민주주의에 대한 고발과 비난이 갖는 '독특한'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맥락이므로, 이를 단순히 사전적 의미에 대한 도착적인 일대일대응에 가까운 방식으로 "기괴함"이라고만 옮긴 것은 내게 그 자체로 '기괴한' 번역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문장을 한 번에 묶어서 살펴보자:  

"La haine de la démocratie n'est certes pas une nouveauté." "Elle est aussi vieille que la démocratie pour une simple raison: le mot lui-même est l'expression d'une haine." "Il a d'abord été une insulte inventée, dans la Grèce antique, par ceux qui voyaient la ruine de tout ordre légitime dans l'innommable gouvernement de la multitude." (불어본, p.7)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신선한 화두는 아니다." "단순한 존립근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만큼이나 이에 대한 증오 역시 오랜 세월 쌓여왔다. 그렇기에 이 용어는 생성과 동시에 용어 자체에 증오심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초에 이 용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명되었는데, 거기에는 극천박한 대중정부에 의해서 정당한 위계질서가 철저히 붕괴되는 것을 목도한 그리스인의 경멸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국역본, 15쪽)

이 부분 역시 계속해서 문제가 속출하는 번역이다. 일단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증오는 민주주의만큼이나 오래된 것인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의 증오를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대중의 지배라는 천박한 형태를 통해 합법적인 모든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욕설이었던 것이다." 국역본의 두 번째 문장에서 "화두"라는 멋진 표현은 그대로 음미하면서 넘어가도록 하자. 세 번째 문장에서 "단순한 존립근거"라고 옮겨진 것은 아마도 불어 원문의 "simple raison"의 번역으로 보이는데, 이는 말 그대로 "단순한 이유"라는 뜻이다(이러한 '단순한 이유'에도 엄청난 '철학적' 무게를 부여하는 역자의 습관을 우리는 앞서도 "nature"의 번역에서 보았고 앞으로도 종종 목격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민주주의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 그 이유는 단순하다는 것, 그것뿐이다. 왜냐하면 본래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일종의 욕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단순한 이유"를 국역본의 번역을 통해서 과연 알 수 있을까. 이러한 '단순한 이유'에 "존립근거"라는 '무게감' 넘치는 단어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네 번째 문장에서는 역자가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내는 방식 자체에 개인적으로 불만이 있지만, 지금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그러한 '미학적' 고려는 오히려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바로 다섯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겠다:

"Il est resté synonyme d'abomination pour tous ceux qui pensaient que le pouvoir revenait de droit à ceux qui y étaient destinés par leur naissance ou appelés par leurs compétences." (불어본, pp.7-8)

"또한 이 용어는 사람의 권능에 비례해서 호칭되고 출신가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던 사람들의 권한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만이 진정한 권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동의어로 남아 있다." (국역본, 15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부터 제시해본다: "권력이란 그러한 권력을 가질 운명을 태생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나 그러한 권력에 걸맞은 능력으로 인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이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혐오와 동의어로 남아 있었다." 이와 비교하여 국역본의 번역을 살펴보자. 국역본의 번역 중에서 "권한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만이 진정한 권력"이라는 구절은 원문 중 어떤 부분으로부터 '추출'된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는데, 굳이 애써 역자의 입장에서 추측해보자면, 역자가 동사 'revenir'에 연결되는 전치사를 'à'가 아니라 'de'로 잘못 파악하여 그것을 '탈피하다'로 해석한 것이라고밖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어 원문에서 "de droit"는 하나의 부사구로 파악하여 '당연히' 또는 '권리상' 등의 의미로 해석해야 하며, 동사 'revenir'는 전치사 'à'와 연결하여 '주어지다' 또는 '속하다', '귀속되다' 정도의 의미로 새겨야 한다. 이러한 문법적 측면을 파악하지 못한 역자가 그 당연한 귀결로서 전치사 "pour"의 의미를 '~에게'가 아니라 '~에 대한'이라는 뜻으로 오해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저 '어원론적'인 증오를 엉뚱하게도 "권한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만이 진정한 권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강조는 람혼)라고 옮기는 웃지 못할 희극이 발생한 것이다. 나 같은 '비전문 번역가'도 간단히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을 '전문 번역가'가 오역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실로 하나의 얄궂은 모순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이를 번역한 영역본의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It remained synonymous with abomination for everyone who thought that power fell by rights to those whose birth had predestined them to it or whose capabilities called them to it." (영역본, p.2)

영역본에서도 'revenir à'를 'fall to'로, 또한 'de droit'를 'by rights'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여섯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보자:

"Il l'est encore aujourd'hui pour ceux qui font de la loi divine révélée le seul fondement légitime de l'organisation des communautés humaines." (불어본, p.8)

"그런데도 이 용어는 인간 공동체 편재의 유일한 합리적 근거로서 인정받는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국역본, 15쪽)

나의 번역: "신성한 계시적 법만이 인간 공동체를 조직하는 유일한 합법적 토대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혐오와 동의어이다." 이에 대한 국역본의 번역은ㅡ지금까지 살펴본 대부분의 번역과 마찬가지로ㅡ상당히 부정확하다. 먼저 "조직(organisation)"을 "편재(遍在)"라는 단어로 옮긴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번역한 합당한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다(다만,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어이 없지만' 가능한 경우는, 이 번역어가 "편재"가 아닌 "편제(編制)"일 경우인데, '遍在'라고 당당히 한자까지 병기해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는 단순한 '실수'라기보다는 오히려 번역자나 편집자의 어떤 '오해'에서 빚어진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니? "율법"은 "loi"의 번역어라고 생각한다 해도, 여기서 '공부하다'라는 의미가 어떻게 도출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역자가 단순히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라고만 번역한 부분은 불어 원문에서 "il l'est encore aujourd'hui"라는 구절로, 여기서 생략된 부분을 '복원'해보자면, 'il est [resté] synonyme d'abomination encore aujourd'hui' 가 될 텐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혐오와 동의어이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영역본(p.2)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생략 용법을 쓰고 있음은 물론이다. 다음으로 일곱 번째 문장과 여덟 번째 문장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⑦ "La violence de cette haine est certes d'actualié.""Ce n'est pourtant pas elle qui fait l'objet de ce livre, pour une simple raison: je n'ai rien en commun avec ceux qui la profèrent, donc rien à discuter avec eux." (불어본, p.8)

"그런데 이 체제 증오에 대한 반발성 맹위는 분명히 현안문제가 되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이 맹위를 본서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필자는 이 맹위를 비방하는 사람들과 공감대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들과 논쟁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국역본, 15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물론 이러한 증오가 지닌 폭력성은 현재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성이 이 책의 대상은 아닌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그러한 폭력성에 대해 크게 떠벌리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으며, 따라서 그들과 함께 토론할 것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la violence de cette haine"의 번역인데, 국역본에서는 이를 "이 체제 증오에 대한 반발성 맹위"라고 옮기고 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일단 "반발성 맹위"를 "violence"에 대한 번역어로 본다면, 이것은 "체제 증오"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는 뜻이 될 텐데, 여기서는 오히려 "이러한 증오가 지닌 폭력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잠시 해당 부분을 영역본에서 참조해보자면(p.2) 이를 "the violence of this hatred"로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당연한 말이겠지만, 특히나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더욱 영어가 불어 번역에 참 '적합한' 언어라는 점을 새삼 '가슴 아프게' 깨닫게 되는데, 'de'를 단순히 'of'로 바꾸기만 하면 되니 오죽 편하겠는가, 이런). 또한 영역본에서는 불어의 "avec ceux qui la profèrent"를 "with those that spread it"라고 옮기고 있는데, 나는 이를 불어에 기준하여 "그러한 폭력성에 대해 크게 떠벌리는 사람들과"로 번역하였다는 점을 첨언해둔다. 또 하나 지적하자면, 여기서 국역본의 역자는 "simple raison"을 "이유는 단순하다"라는 구절로 잘 번역하고 있는데, 왜 앞의 문장에서는 "존립근거"라는 엄청난 말을 썼던 것일까. 이 부분과 그 부분을 다른 뜻으로 생각했다는 말인가.

 

▷ 아메리카 합중국 헌법의 저 '악필'이 나를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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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음으로 세 번째 단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단락은 모두 열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첫 번째 문장부터 검토해보자:

"À côté de cette haine de la démocratie, l'histoire a connu les formes de sa critique." (불어본, p.8)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즉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 형국을 경험해 왔다." (국역본, 15-16쪽)

나의 번역: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증오와 더불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여러 비판의 형식들 또한 경험했다." 여기서 국역본의 번역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전혀 동격이 될 수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민주체체에 관한 비판"을 서로 동격으로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앞서 서술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나란히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형식들에 대해서도 또한 말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 차이점은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을 살펴보자:

"La critique fait droit à une existence, mais c'est pour lui assigner ses limites.""La critique de la démocratie a connu deux grandes formes historiques." (불어본, p.8)

"민주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는 존재했었지만 그 한도는 있게 마련이었다.""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 체제의 두 가지 주요 양상을 혹평한 것이다." (국역본, 16쪽)

이 역시 치명적인 실수를 안고 있는 번역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일단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을 제시해본다: "이러한 비판은 [민주주의라는] 존재에는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그것은 그 존재의 한계를 정하기 위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의 형태가 있어 왔다." 이와 국역본의 번역을 비교해보라. 먼저 "민주체체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는 존재했었지만 그 한도는 있게 마련이었다"라는 번역을 보면 역자가 '역사적' 민주주의의 '역사성'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이데올로기 안에 속한 채로 이 문장을 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문을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 행위 자체에 어떤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민주주의라는 존재 그 자체의 정당성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민주주의라는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오직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한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만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역본의 번역은 완전한 오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문장도 오역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민주주의 체제가 지닌 두 가지 양상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봤을 때 그러한 비판의 형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존재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조금 길지만, 네 번째 문장과 다섯 번째 문장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Il y a eu l'art des législateurs aristocrates et savants qui ont voulu composer avec la démocratie considérée comme fait incontournable.""La rédaction de la constitution des États-Unis est l'exemple classique de ce travail de composition des forces et d'équilibre des mécanismes institutionnels destiné à tirer du fait démocratique le meilleur qu'on en pouvait tirer, tout en le contenant strictement pour préserver deux biens considérés comme synonymes: le gouvernement des meilleurs et la défense de l'ordre propriétaire." (불어본, p.8)

"거부할 수 없는 실세로 인정받고 있던 민주주의와 타협하길 원하던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의 계략이 그 한 양상이다.""또 다른 양상은 미국 헌법제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민주주의라는 실제로부터 짜낼 수 있는 최선의 개념 추출을 지향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의 전형으로서, 추출된 개념 모두 두 가지 축을 보존하기 위해서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 미국 헌법의 토대를 이루었는데, 양대 축이란 최선정부와 소유자 위계질서의 수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역본, 16쪽)

이쯤 되면 이것이 정말 '번역'인지 '반역'인지 헷갈리는 지점까지 오게 된다.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을 제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귀족과 학자들로 이루어진 입법자들의 비판 방식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민주주의를 불가피한 현실로 여기고 이와 타협하고자 했다. 미국 헌법의 작성은 민주주의라는 현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선을 끌어내고자 힘들을 구성하고 제도적 기구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이러한 시도의 고전적 사례일 텐데, 이는 동의어로 간주되는 두 개의 선(善), 곧 최선의 정부와 소유 질서의 수호라는 두 개의 선을 보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엄격히 한정하는 것이었다." 이와 비교해볼 때 국역본의 번역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내용적인 측면에 있다. 앞의 문장들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이어지는 이 문장들 역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인데, 네 번째 문장과 다섯 번째 문장이 대표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지닌 두 "양상"이 결코 아니다. 단지 이 네 번째 문장과 다섯 번째 문장은 앞서 수정한 번역에서 이야기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두 가지 역사적 형식 중 하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두 번째 비판의 형식은 이에 뒤이어 마르크스와 함께 등장하게 되는데, 곧 함께 살펴보자). 국역본의 번역 중 다섯 번째 문장에서 "추출된 개념 모두 두 가지 축을 보존하기 위해서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러한 표현이 원문의 어느 부분에서 "추출"되었는지를 가늠하기란 "엄정한 심사"를 거친다 해도 지극히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네 번째 문장의 영어 번역만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There was the art of aristocratic legislators and experts who strove to make a compromise with democracy, viewed as a fact that could not be ignored." (영역본, p.2)

영역본에서 이 문장만을 인용한 이유는 불어의 "législateurs aristocrates et savants"와 그 영어 번역인 "aristocratic legislators and experts"를 비교하기 위해서인데,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나의 번역("귀족과 학자들로 이루어진 입법자들")도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부분을 영역본을 통해 중역해 본다면, "귀족으로 이루어진 입법자들과 전문가들" 정도로 옮길 수 있을 텐데, 불어를 통한 번역과 영어를 통한 번역이 서로 차이가 날 수 있는 이유는 불어 원문의 "savants"을 독립된 복수 명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앞의 "législateurs"를 꾸미는 형용사의 복수 형태로 볼 것인가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의 경우를 선택하여 "귀족으로 이루어진 입법자들과 학자들"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일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국역본의 번역 또한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이라고 옮김으로써 이러한 '해석'을 따르고 있음은 물론이다. 다음으로, 다소 긴 문장들이지만, 여섯 번째 문장부터 열 번째 문장까지의 번역을 한 번에 살펴보도록 하자:

"Le succès de cette critique en acte a tout naturellement nourri le succès de son contraire.""Le jeune Marx n'a eu aucun mal à dévoiler le règne de la propriété au fondement de la constitution républicaine.""Les législateurs républicains n'en avaient fait nul mystère.""Mais il a su fixer un standard de pensée qui n'est pas encore exténué: les lois et les institutions de la démocratie formelle sont les apparences sous lesquelles et les instruments par lesquels s'exerce le pouvoir de la classe bourgeoise.""La lutte contre ces apparences devint alors la voie vers une démocratie "réelle", une démocratie où la liberté et l'égalité ne seraient plus représentées dans les institutions de la loi et de l'État mais incarnées dans les formes mêmes de la vie matérielle et de l'expérience sensible." (불어본, pp.8-9)

"이같은 구도 속에서 행해진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은 성공을 거두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민주주의 세력의 성공 자양분이 되어왔던 것이다.""젊은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체제의 기본 원리인 소유권 지배구조를 파헤치는 작업에 거리낌이 없었다.""게다가 공화국 의원들 누구도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다.""여하튼 마르크스는 지금도 소진되지 않고 있는 표준 이념을 확립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형식에 얽매인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행사 매개체에 불과하며, 이런 영향력 하에서 법과 제도는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파악했었다.""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국가 및 법에 근거한 체제를 대표하지 못했을 때 겉치레에 대한 투쟁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방안이 되었지만,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에 의해서 민주주의는 정형화되었다." (국역본, 16-17쪽)

이 부분의 번역을 한 번에 살펴보는 이유는, 첫째, 이 문장들이 앞서 살펴본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두 형식 중 두 번째 비판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며, 둘째,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이 문장들을 맥락과 연결을 파악해 함께 독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도 국역본은 몇 가지 치명적 오역을 행하고 있는데, 일단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을 제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실제적 비판이 거둔 성공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른 비판의 성공 또한 북돋웠다. 청년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헌법을 토대로 하는 소유의 지배 체제를 별 어려움 없이 폭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화주의 입법자들 또한 이러한 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여전히 고갈되지 않는 사유의 한 전범을 확립할 수 있었는데, 형식적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이 작동하는 허울뿐인 도구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허울뿐인 제도에 대한 투쟁은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이 되었는데, 여기서 민주주의란, 자유와 평등이 더 이상 법과 국가라는 제도들 안에서 대표[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식 자체 안에서 구현되는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번역은 국역본의 번역과 비교했을 때 몇 가지 결정적 차이점을 드러낸다. 첫째, 여섯 번째 문장에서 국역본이 너무나도 쉽게 "반민주주의 세력"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son contraire"는 꼭 그렇게까지 번역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미국의 헌법이라는 사례가 민주주의 비판의 한 형식이라면, 마르크스의 '민주주의 비판'은 그와는 다른 '두 번째' 형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쪽의] 비판" 또는 "반대 쪽의 비판"이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굳이 "반민주주의 세력"이라고 다소 '강한' 어조로 옮기고 있는 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역자의 개인적 '편견'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그런데 만약 이것이 정말 역자가 지닌 '선입견'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랑시에르의 책을 번역하는 '전문 번역가'가 품을 법한 견해라고 하기엔 너무도 '나이브'한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역시나 여섯 번째 문장에서 국역본이 "이 같은 구도 속에서 행해진 민주체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다소 풀어서 의역한 구절의 원문은 "critique en acte"인데 이는 간단히 말해 '작동/진행 중인 비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나는 이를 단순히 "실제적 비판"으로만 옮겼지만, 보다 더 좋은 번역어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는 '뉘앙스'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일곱 번째 문장에서 "파헤치는 작업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옮긴 국역본의 문장은 "별 어려움 없이 폭로할 수 있었다" 정도의 마무리로 바뀌는 것이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국역본의 번역대로 이러한 마르크스의 비판 형식은 미국 헌법의 비판이라는 전자의 형식으로부터 '자양분을 얻고[nourrir]' 있기 때문이다. 넷째, 여덟 번째 문장에서 "게다가 공화국 의원들 누구도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다"고 '수동적으로' 옮겨진 문장은 "공화주의 입법자들 또한 이러한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는 좀 더 '능동적인' 문장으로 대체될 필요가 있겠는데, 이 부분이 의미하는 바가 그들이 '은폐하고 싶었으나 은폐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전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아홉 번째 문장의 번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 것은, "매개체"라는 단어가, 특히나 그 번역이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저작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더욱 더, 쉽게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번역어라는 점이다. 하물며 "매개체"로 '직접' 번역될 수 있는 단어를 원문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음에야. 여섯째, 이것이 이 부분의 번역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일 텐데, 열 번째 문장의 번역은 완전히 뜯어고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나의 번역으로 돌아가보자면, 이는 "이러한 허울뿐인 제도에 대한 투쟁은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이 되었는데, 여기서 민주주의란, 자유와 평등이 더 이상 법과 국가라는 제도들 안에서 대표[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식 자체 안에서 구현되는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국역본의 번역대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국가 및 법에 근거한 체제를 대표하지 못했을 때", 바로 그때, 투쟁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하는 길로 바뀌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역본의 역자가 "~하지 못했을 때"라고 마치 부정적인 조건처럼 옮긴 이 부분은, 사실 원문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내용 중 하나인 것이다. 곧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란, 첫째, "자유와 평등이 더 이상 법과 국가라는 제도 안에서 대표[표상]"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둘째, 또한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식 자체 안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역본에 나오는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에 의해서 민주주의는 정형화되었다"는 문장은 원문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말이 되고 있다. 결국 역자는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고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 '조건'을 오히려 민주주의가 지닌 '부정적' 결함으로 거꾸로 해석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어찌 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영역본이 이 마지막 열 번째 문장 중 "dans les institutions de la loi et de l'État"를 [단지] "in the institutions of law and State"로[만]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불어에서는 "법"과 "국가"가 "제도들"을 수식하고 있는 구조가 명확하지만 영어 번역으로만 봤을 때 이는 다소 불명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영어 번역 그 자체에서는 별 문제가 안 되지만 이를 중역해서 한국어로 옮길 경우에는 사소한 것이긴 하나 자칫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곧 이 부분은 "법과 국가라는 제도들 안에서"로 번역되어야지 "법 제도와 국가 안에서"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 어머니가 중학생인 내게 선물해 주셨던 저 책은, '청년 마르크스' 하면 떠오르는 기억들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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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어서 서론의 네 번째 단락을 검토해보도록 하자. 네 번째 단락은 모두 열 개의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첫 번째 문장:

"La nouvelle haine de la démocratie qui fait l'objet de ce livre ne relève proprement d'aucun de ces modèles, même si ells combine des éléments empruntés aux uns et aux autres." (불어본, p.9)

"이 책의 화두 민주주의에 대한 미숙한 증오는 민주체제의 어떤 모델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기술하진 않을 것이다. 비록 각각의 증오들이 어색하게 결부되어 있을지라도." (국역본, 17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이 책의 대상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비록 그것이 앞의 두 모델들[미국 헌법의 사례와 마르크스의 사례]로부터 차용한 요소들을 서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두 모델 중 그 어디에도 정확히 귀속되지는 않는다." 이와 비교했을 때 국역본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첫째 질문, 'nouveau/nouvelle'이라는 형용사를 "미숙한"이라고 옮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미숙한' 것이 아니라 정작 '미숙한'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둘째 질문, "관대하게 기술하진 않을 것이다"라는 또 하나의 '창조적'인 번역의 원문은 어디에 있는가. 셋째 질문, "어색하게 결부되어"라는 번역의 원문을 애써 찾아보자면 그것은 아마도 "empruntés"가 될 듯 한데, 이것이 "차용한"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정말 역자는 몰랐던 것일까(그러므로 또한 이 역시도 "증오들이 어색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작 '어색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머뭇거릴 것 없이, 바로 다음 문장들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Ses porte-parole habitent tous dans des pays qui déclarent être non seulement des États démocratiques, mais des démocraties tout court.""Aucun d'eux ne réclame une démocratie plus réelle.""Tous nous disent au contraire qu'elle ne l'est déjà que trop." (불어본, p.9)

"민주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민주체제가 급조된 국가들을 포함해서 이들 국가에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대변자(혹은 대변기관) 모두 민주주의를 공언한다.""그런데 그들 중 누구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강변하지는 않는다.""그럼에도 우리 모두 민주주의가 이미 넘쳐난다고 말한다." (국역본, 17쪽)

상당히 짧은 문장들이지만, 이들 역시나 오역을 품고 있었으니.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이 새로운 증오의 대변인들은 모두, 민주주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간략히 말해 [그 스스로] 민주주의 자체라고 공언하는 나라들에서 살고 있다. 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보다 진정한 민주주의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 모두는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이미 너무나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를 국역본과 비교해볼 때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불어 "des démocraties tout court"에 대한 번역일 텐데, 국역본은 이를 "민주체제가 급조된 국가들"이라고 옮기고 있다. 하지만 불어 "tout court"는 '간략히', '간단히' 또는 '갑자기' 등의 뜻을 갖는 부사구이다. 따라서 이는 "간략히 말해 [그 스스로] 민주주의 자체라고 공언하는 나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둘째, 동사 'réclamer'를 굳이 '강변하다'로 번역해야 했을까 하는 물음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셋째, 이 문제는 문법에 있어서 가장 초보적인 실수를 노출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텐데, "tous nous disent"를 "우리 모두 [...] 말한다"로 번역하고 있는 국역본의 번역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국역본의 번역처럼 옮겨지려면 불어 원문은 "tous nous disons"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곧 "disent"가 동사 'dire'의 3인칭 복수 현재 형태이므로, 주어는 "우리(nous) 모두"가 아니라 "그들 모두(tous)"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nous" 또한 여격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충분하며 넘쳐나기까지 한다고 '우리 모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어서 다섯 번째 문장을 살펴보자:

"Mais aucun ne se plaint des institutions qui prétendent incarner le pouvoir du peuple ni ne propose aucune mesure pour restreindre ce pouvoir." (불어본, p.9)

"그래서 그 누구도 대중권력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 체제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며, 이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어떠한 방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국역본, 17쪽)

이 부분에 관해서는 크게 할 말은 없다(이런 문장은 서론을 통틀어 거의 처음이 아닐까). 다만, 나의 번역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인민의 권력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제도들에 대해 불평을 하지도 않고 그러한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제안하지 않는다." 다음 문장들로 넘어간다:

"La mécanique des institutions qui passionna les contemporains de Montesquieu, de Madison ou de Tocqueville ne les intéresse pas.""C'est du peuple et de ses mœurs qu'ils se plaignent, non des institutions de son pouvoir.""La démocratie pour eux n'est pas une forme de gouvernement corrompue, c'est une crise de la civilisation qui affecte la société et l'État à travers elle." (불어본, p.9)

"몽테스키외, 메디슨, 토크빌과 그 동시대인을 열광시켰던 제도적 장치가 현대인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세인들이 불평하는 것은 사람들의 품행과 그 사람들일 뿐, 이 체제의 권력구조를 불평하는 것은 아니다.""또한 민주주의에 기반한 부패정부의 존립양상이 문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사회와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 문명의 위기가 세인에게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국역본, 17-18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 "이들은 몽테스키외, 매디슨, 토크빌의 동시대인들을 열광시켰던 제도적 장치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이 불평하는 것은 인민과 그들의 습성이지 인민 권력의 제도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타락한 정부의 형태가 아니라 바로 그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와 국가가 겪게 되는 문명의 위기인 것이다." 이와 비교해 국역본의 번역에서 지적할 것은 마지막 여덟 번째 문장이다. "민주주의에 기반한 부패정부의 존립양상"이라는 이 '창조적'인 번역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원문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저 "존립양상"이라는 번역어는 앞서 살펴보았던 "존립근거"라는 번역어만큼이나 깊고 무거워 보인다). 또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사회와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문명의 위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여기서는 "민주주의" 그 자체가 '저들'에게 "문명의 위기"를 의미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점이며 번역에서도 역시 그 점이 부각되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 여덟 번째 문장을 영역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For them democracy is not a corrupt form of government; it is a crisis of civilization afflicting society and through it the State." (영역본, p.3) 

이 영어 번역에서 지적할 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 불어 동사 'affecter'의 번역어로 'afflict'를 사용한 것은 너무 '협소한'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점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둘째로, "through it"을 마치 "국가(State)"에만 걸리고 "사회(society)"에는 걸리지 않는 것처럼 번역함으로써 의미에 다소 차이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 또한 첨언하고자 한다. 이어서 다음 문장들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D'où des chassés-croisés qui peuvent à première vue sembler étonnants." ⑩ "Les mêmes critiques qui dénoncent sans relâche cette Amérique démocratique d'où nous viendrait tout le mal du respect des différences, du droit des minorités et de l'affirmative action sapant notre universalisme républicain sont les premiers à applaudir quand la même Amérique entreprend de répandre sa démocratie à travers le monde par la force des armes." (불어본, p.9)

"전술한 혼란스러움은 일견 놀라워 보일 수도 있다.""우리의 공화주의적 보편성을 갉아먹는 확신에 찬 행위, 소수의 권한, 각각의 입장 차이에 대한 존중을 우리 스스로 철저히 부정하기 때문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비평가들조차도 미국이 무력을 이용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는 시도를 할 때 가장 먼저 갈채를 보내는 것이다." (국역본, 18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따라서 오락가락하는 그들의 모습은 일견 놀랄 만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차이의 존중, 소수자의 권리, 차별 철폐 조치(affirmative action) 등 우리[프랑스]의 공화주의적 보편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악(惡)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이유로 저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동일한 비판자들이, 똑 같은 나라 미국이 무력을 통해 전 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자 시도할 때에는 가장 먼저 박수를 보낸다." 먼저 단어에 대한 지적을 하자. 원문에서 랑시에르가 "affirmative action"을 이탤릭체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단어가 '영어'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역자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역자는 굵은 글씨로 강조하여 이를 "확신에 찬 행위"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미국에서 흑인이나 여성 또는 소수 민족의 교육과 취업을 목표로 하는 '차별 철폐 조치'를 뜻하는 말이다. 둘째로, 아홉 번째 문장에서 역자는 "chassés-croisés"를 "전술한 혼란스러움"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앞서 서술된 어떤 '혼란스러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이들의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어서 셋째로, 열 번째 문장의 번역에서 "우리 스스로 철저히 부정하기 때문에"라는 구절은 '의미적인' 설득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우리의 공화주의적 보편성을 갉아먹는 [...]" 악을 "우리 스스로 철저히 부정하기 때문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비판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우리[프랑스]의 공화주의적 보편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악을" 우리 곁에 도래하게 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비난한다는 해석이 더 적절하고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미국식 민주주의를 비난하던 동일한 사람들이 미국이 군사력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킨다는 '이율배반적' 행동을 감행할 때에는 오히려 그를 향해 박수를 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역자는 여기서 이 문장의 주어 부분인 "les mêmes critiques"를 마치 양보 구문처럼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번역이라고 하겠다.

 

▷ 민주주의는 지금, 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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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지막으로 서론의 다섯 번째 단락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단락 모두 열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첫 번째 문장부터 다섯 번째 문장까지를 검토해보도록 하자:

"Le double discours sur la démocratie n'est certes pas neuf." ② "Nous avons été habitués à entendre que la démocratie était le pire des gouvernements à l'exception de tous les autres.""Mais le nouveau sentiment antidémocratique donne de la formule une version plus troublante.""Le gouvernement démocratique, nous dit-il, est mauvais quand il se laisse corrompre par la société démocratique qui veut que tous soient égaux et toutes les différences respectées." ⑤ "Il est bon, en revanche, quand il rappelle les individus avachis de la société démocratique à l'énergie de la guerre défendant les valeurs de la civilisation qui sont celles de la lutte des civilisations." (불어본, pp.9-10)

"민주체제에 대한 이중적 견지가 새로운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우리는 여타의 정치체제 중 최악의 정체가 민주주의라고 인식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새로운 반민주주의적 의식은 보다 충격적인 해석 틀을 제공한다.""민주주의 정부가 모든 입장 차이를 존중하라는, 그리고 모두가 평등해지길 바라는 대중사회 때문에 민주정체가 부패해지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면 민주주의 체제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⑤ "반대로, 민주주의 정부가 이 문명의 가치는 문명 간 투쟁 가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수호할 수 있도록 대중사회의 무기력한 개인들에게 전투적 정신을 고취시킨다면 민주주의 체제는 합당한 것이다." (국역본, 18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담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다른 모든 통치 체제를 제외하고서 최악의 통치 체제라는 말을 듣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새로운 반민주주의적 정서는 보다 당혹스러운 형태의 정식을 제공한다. 그러한 정서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가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모든 차이들이 존중되기를 바라는 민주주의 사회 때문에 그 스스로 타락하게 된다면, 그러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는 나쁘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가 민주주의 사회 때문에 무기력해진 개인들에게 문명의 가치들, 곧 문명 간의 투쟁이 지닌 가치들을 수호하는 전쟁의 에너지를 고취시켜줄 수 있다면, 그러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는 좋다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의 실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국역본의 번역이 이러한 실체에 대한 입문을 성공적으로 소화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몇 가지 점을 살펴보자. 먼저 "여타의 정치체제 중 최악의 정체가 민주주의"라는 국역본의 번역은 "민주주의가 다른 모든 통치 체제를 제외하고서 최악의 통치 체제"라는 번역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는, 주지하다시피,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한 저 유명한 말, 곧 "민주주의는 때때로 시도되어 왔던 다른 모든 형태의 정부들을 제외하고서 가장 나쁜 형태의 정부이다(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for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라는 말을 거의 문자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말에 대한 역자 주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김에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 국역본의 역주는 인문학 서적의 역주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완전히 망각한 일종의 '잡학 사전'이 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는데, 이와는 또 다른 맥락에서 국역본 77쪽의 주석("아르케"에 대한 역자 주에는 "철학용어로 원리"라는 '간략한' 설명이 붙어 있는데)과 93쪽의 주석(저자 주에 대한 번역에서 역자는 랑시에르의 주저 『불화. 정치와 철학』의 제목을 "정치와 철학의 부조화"라고 옮기고 있는데) 또한 언급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다음으로 "mauvais"를 "앞뒤가 맞지 않는"으로 '의역'하고 "bon"을 "합당한"으로 '의역'하여 문장 전체의 맥락에 혼란을 가져오는 부분도 바로 고쳐져야 할 것이다. "문명 간 투쟁 가치에 불과하다는"이라는 부분에서 "불과하다는"이라는 '쓸데없는' 번역어를 집어넣어 문장 자체의 뉘앙스를 뒤바꿔버리는 '기괴한' 번역 또한 '지양'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다음으로 여섯 번째 문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La nouvelle haine de la démocratie peut alors se résumer en une thèse simple: il n'y a qu'une seule bonne démocratie, celle qui réprime la catastrophe de la civilisation démocratique." (불어본, p.10)

⑥ "이렇게 해서 민주주의에 대한 미숙한 증오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명제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합당한 민주주의만이 존재하며, 이 합당한 체제가 민주주의 문명의 지각변동을 억제한다.>" (국역본, 18-19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하나의 단순한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좋은 민주주의란 오직 단 하나밖에는 없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의 혼돈을 억제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국역본의 번역에서는 "il n'y a que~"의 문형과 "une seule~"의 의미를 잘 구현하지 못하고 있음이 목격된다. "오직 합당한 민주주의만이 존재하며"라는 번역으로는 "좋은 민주주의란 오직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라는 것이다"라는 이 문장의 구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 문명의 지각변동"이라는 번역 또한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는 표현이다. 이하,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문장부터 열 번째 문장까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Les pages qui suivent chercheront à analyser la formation et à dégager les enjeux de cette thèse.""Il ne s'agit pas seulement de décrire une forme de l'idéologie contemporaine.""Celle-ci nous renseigne aussi sur l'état de notre monde et sur ce qu'on y entend par politique.""Elle peut ainsi nous aider à comprendre positivement le scandale porté par le mot de démocratie et à retrouver le tranchant de son idée." (불어본, p.10)

"본서의 지면은 이 명제의 형성과정을 분석하고 그 관계망의 도출을 추구하는 데 할애될 것이다." "현대의 관념체계(이데올로기)를 묘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현대의 관념체계가 존재하는 양상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지식을 줄 뿐만 아니라, 정치를 통해서도 이 관념체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확실히 당대를 관통하는 관념체계는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초래한 추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민주주의 이념 속에 감춰진 칼날을 간파하는 안목을 키워줄 수 있을 것이다." (국역본, 19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하의 본문에서는 이러한 명제의 형성 과정을 분석하고 그것이 지닌 쟁점들을 끌어내보고자 한다. 문제는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지닌 형식을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형식은 우리 세계의 상태에 관해, 그리고 정치를 통해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하는 바에 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말이 불러일으킨 스캔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민주주의라는 관념이 지닌 단호함을 되찾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국역본에서 "관계망"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불어는 "enjeu"인데, 이는 주지하다시피 현대 프랑스 사상가들이 공히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서 '쟁점'이나 '논점' 정도로 옮겨지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다음으로, 아홉 번째 문장의 말미에서 "정치를 통해서도 이 관념 체계에 대한"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sur ce qu'on y entend par politique"인데, 이는 "정치를 통해 우리가 그 세계[의 상태]를 이해하는 바에 관해"로 보다 더 적확히 '직역'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민주주의, 그것은 '최악'의 정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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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상에서 함께 살펴보았지만, 서론만을 검토해봤을 때도 이 국역본의 번역에서는 거의 모든 문장마다 오역이나 부정확한 번역이 속출하고 있는 셈이다. 그 번역의 전반적인 느낌이랄까, 서론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차례로 검토해보면서 받은 개인적인 인상은, 역자가 단어들의 일차적이고 표면적인 의미에만 얽매여서 그로 인해 기계적인 번역에 빠지게 된 경우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엇보다 슬프고 쓸쓸하고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게 되는 비교 독해의 과정이었다고 할까. 번역본을 포함하여 하나의 책이 독자에게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으려면, 저자/역자와 독자가 모두 함께 그 책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책이라는 존재에 대해 나만이 품고 있는 지극히 '도착적'이고 '이상적'인 몽상일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좋아했을, 그리고 현재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을, 존 레논(John Lennon)의 노래 <Imagine> 가사의 한 구절처럼 "나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But I'm not the only one)". 이에, 생각해보면, 번역의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독자들을 단지 법적으로 고소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과 논쟁과 토론과 대화를 하면서 함께 문제점들을 풀어가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저자/역자가 독자들과 함께 하나의 '온전한' 책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러한 몽상에 최대한 가깝게 근접해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도 합리적인' 행동방식이 아닐까. 거의 모든 번역서의 역자 후기에서 역자들이 "독자 제현의 질정을 바라마지 않는다" 또는 "번역에서 발견되는 오류가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이다"라고 밝히는 것은 단순한 상투어(cliché)가 아니다. 번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오류는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겠지만, 그러나 읽어도 또 읽어도 개인적으로 언제나 강렬한 '간절함'을 느끼게 되는 이 상투어가 내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그 오류를 고쳐 나가는 일은 결국 역자와 독자가 함께 할 수 있고 또 함께 해야 하는 몫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랑시에르의 책들이 하나둘씩 국역되고 있는 추세인데, 개인적으로 아무쪼록 좋은 번역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이지만, 혹시 번역상의 문제점들이 발견되는 경우에라도 그것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역자와 독자가 함께 좋은 책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또한 간절히 기대해보는 것이다. 역자와 독자들은, 그 자신이 책을 읽고 또 쓰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명예'란 것이 과연 무엇이며, 또 그 '명예'란 것이 어떻게 함으로써 지켜질 수 있는가에 대해 숙고해야 할 것이다. 명예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망각한 이에게, 자칫 그 '명예'란 쉽게 '멍에'가 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이상의 비판적 논의들을 통해 수정하여 제시하였던 번역을 아래에 다시 정리하여 옮겨본다. 관심 있는 이들에게 미약하나마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상상으로 꾸며내 프랑스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어느 젊은 여자, 학교에서 히잡을 벗기를 거부하는 여학생들, 재정적자에 빠진 사회보장제도, 바칼로레아 시험 제시문에서 라신과 코르네이유가 지녔던 권위를 찬탈한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와 보들레르, 자신들의 연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시위에 참가하는 봉급생활자[임금노동자], [기존의 입시제도와] 병행하는 학생 선발 과정을 창안한 한 그랑제콜, 리얼리티 TV 쇼와 동성 결혼과 인공 수정의 비약적인 증가. 이토록 잡다한 성격의 사건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을 찾는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 사회학자들, 정치학자들, 정신분석가들, 언론인들, 작가들이 우리에게 책과 기사와 방송을 통해 계속해서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다. 그들은 이 모든 증상들이 동일한 병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즉 이 모든 결과들은 오직 단 하나의 원인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원인은 곧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 다시 말해 현대 대중 사회의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욕망들이 지배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난의 특이함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증오는 민주주의만큼이나 오래된 것인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의 증오를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대중의 지배라는 천박한 형태를 통해 합법적인 모든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욕설이었던 것이다. 권력이란 그러한 권력을 가질 운명을 태생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나 그러한 권력에 걸맞은 능력으로 인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이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혐오와 동의어로 남아 있었다. 신성한 계시적 법만이 인간 공동체를 조직하는 유일한 합법적 토대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혐오와 동의어이다. 물론 이러한 증오가 지닌 폭력성은 현재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성이 이 책의 대상은 아닌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그러한 폭력성에 대해 크게 떠벌리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으며, 따라서 그들과 함께 토론할 것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증오와 더불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여러 비판의 형식들 또한 경험했다. 이러한 비판은 [민주주의라는] 존재에는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그것은 그 존재의 한계를 정하기 위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의 형태가 있어 왔다. 먼저 귀족과 학자들로 이루어진 입법자들의 비판 방식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민주주의를 불가피한 현실로 여기고 이와 타협하고자 했다. 미국 헌법의 작성은 민주주의라는 현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선을 끌어내고자 힘들을 구성하고 제도적 기구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이러한 시도의 고전적 사례일 텐데, 이는 동의어로 간주되는 두 개의 선(), 곧 최선의 정부와 소유 질서의 수호라는 두 개의 선을 보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엄격히 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실제적 비판이 거둔 성공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른 비판의 성공 또한 북돋웠다. 청년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헌법을 토대로 하는 소유의 지배 체제를 별 어려움 없이 폭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화주의 입법자들 또한 이러한 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여전히 고갈되지 않는 사유의 한 전범을 확립할 수 있었는데, 형식적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이 작동하는 허울뿐인 도구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허울뿐인 제도에 대한 투쟁은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이 되었는데, 여기서 민주주의란, 자유와 평등이 더 이상 법과 국가라는 제도들 안에서 대표[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식 자체 안에서 구현되는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대상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비록 그것이 앞의 두 모델들[미국 헌법의 사례와 마르크스의 사례]로부터 차용한 요소들을 서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두 모델 중 그 어디에도 정확히 귀속되지는 않는다. 이 새로운 증오의 대변인들은 모두, 민주주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간략히 말해 [그 스스로] 민주주의 자체라고 공언하는 나라들에서 살고 있다. 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보다 진정한 민주주의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 모두는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이미 너무나 충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인민의 권력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제도들에 대해 불평을 하지도 않고 그러한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제안하지 않는다. 이들은 몽테스키외, 매디슨, 토크빌의 동시대인들을 열광시켰던 제도적 장치에는 관심이 없다이들이 불평하는 것은 인민과 그들의 습성이지 인민 권력의 제도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타락한 정부의 형태가 아니라 바로 그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와 국가가 겪게 되는 문명의 위기인 것이다. 따라서 오락가락하는 그들의 모습은 일견 놀랄 만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차이의 존중, 소수자의 권리, 차별 철폐 조치 등 우리[프랑스]의 공화주의적 보편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악()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이유로 저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동일한 비판자들이, 똑 같은 나라 미국이 무력을 통해 전 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자 시도할 때에는 가장 먼저 박수를 보낸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담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다른 모든 통치 체제를 제외하고서 최악의 통치 체제라는 말을 듣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새로운 반민주주의적 정서는 보다 당혹스러운 형태의 정식을 제공한다. 그러한 정서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가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모든 차이들이 존중되기를 바라는 민주주의 사회 때문에 그 스스로 타락하게 된다면, 그러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는 나쁘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가 민주주의 사회 때문에 무기력해진 개인들에게 문명의 가치들, 곧 문명 간의 투쟁이 지닌 가치들을 수호하는 전쟁의 에너지를 고취시켜줄 수 있다면, 그러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는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하나의 단순한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좋은 민주주의란 오직 단 하나밖에는 없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의 혼돈을 억제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이하의 본문에서는 이러한 명제의 형성 과정을 분석하고 그것이 지닌 쟁점들을 끌어내보고자 한다. 문제는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지닌 형식을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형식은 우리 세계의 상태에 관해, 그리고 정치를 통해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하는 바에 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말이 불러일으킨 스캔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민주주의라는 관념이 지닌 단호함을 되찾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번역: 람혼)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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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번역의 문제점
    from 하늘 받든 곳 2008-04-16 00:35 
    람혼님, 애쓰셨네요. 이 번역본은, 실제로 읽어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더군요. 람혼님의 마지막 코멘트가 가슴에 와닿는군요.
 
 
로쟈 2008-04-1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네요.^^; 아직 검찰에서 최종 통지를 못 받으셨나요?(저는 종료됐습니다.) 실상 번역서라고도 하기 어려운 '난감한' 책을 하나 내놓고 무엇으로 명예를 추스리려고 했던 것인지 참 알기 어렵네요. 이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한 가지 사례라고 해야 할지...

람혼 2008-04-14 15:33   좋아요 0 | URL
잘 마무리되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이번에 번역을 꼼꼼히 살펴보면서도 새삼 '새롭게' 든 생각이지만, 번역이란 참으로 섣불리 해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의 '이름'을 거는 각오로 임해야 하는, 그런 살벌하도록 치열한 작업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렘과 동시에 살짝 소름까지 돋았습니다.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 번역본에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이 됩니다...

드팀전 2008-04-13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길어서 다 보지는 못했고,제일 앞쪽에 영어판과 비교해 놓은 것까지만 봤습니다.그리고 건너뛰어서 람혼님의 마지막 번역문만...^^

그 분 참 생뚱맞네요.불어는 아예 모르니까 모르겠구 영어판정도의 친절함(?)도 없군요.갑자기 동네 문방구에서 파는 파워레인저 '가면'이 생각났습니다. 번잡스러우셨겠습니다...정말 사람 피곤하게 하는 것들은 거대한 사건보다는 그런 번잡스러움일지도 모르니까요.

서문에서 보이는 주제의식은 제 관심을 끌어모으는데..저 책을 읽고 싶지는 않아지네요.이러면 로쟈님 서재에서 본 글처럼 "봐라.너희들이 번역비판이 '인문학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다.책 안 산다고 하잖니.."라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ㅋㅋ
저의 자문자답은 이거였어요 ."워워...다른 인문학 서적 두권 사서 인문학을 망가뜨리지는 않을께요.그러니 걱정마세요..ㅎㅎ ."

람혼 2008-04-14 15:37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말씀대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자잘한 번잡스러움이 아닌가 합니다.^^ 그나저나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장ㅡ사실 이 주장은 여기서는 '인문학의 경제적 위기'라는 말일 테지만!ㅡ을 실로 '인문학적으로' 돌파하는 드팀전님의 자문자답에 한 표를 던집니다.^^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은 사람들이 책을 안 사는 일을 걱정할 게 아니라 '왜 책을 안 살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먼저 스스로 답해야겠지요.

yoonta 2008-04-13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의 문체에 적응해서인지 이상하게도 술술 읽힌다는..^^
번역본비판은 절반쯤 보다가 맨 밑의 람혼님번역으로 넘어갔습니다만 저 문제의 번역본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는 번역이네요. 번역자스스로도 번역하면서 과연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하면서 번역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이런 말 했다고 저도 고소당할까봐 두렵군요.-_-)

그건 그렇고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려 한 책의 내용이 참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 혹은 증오가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성격들을 살펴보면서 진정한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것인데 그것이 람혼님이 번역한 서문에서도 간략하게 나온 것 처럼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식자체 안에서 구현되는 체제"라는 것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인 것 같군요.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 랑시에르의 고민의 지점을 대입시켜보면 이명박정부출범을 가능하게 한 대중의 욕망들에 대해서 단지 혐오하고 증오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이며 또 이러한 민주주의(아니 더 정확하게는 변덕스러운 대중들의 욕망)에 대한 증오로부터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의란 무엇인가를 반추해 보자는 내용의 책인 것 같네요. 가능하다면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람혼님의 번역도 보고 싶지만 지나친 욕심이겠죠?^^

영역본이나 구해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람혼 2008-04-14 15:47   좋아요 0 | URL
너무 이런 문체에 적응하시면 일상생활이 좀 어려우실 텐데요...^^; 사실 저도 번역본을 검토해보면서 가장 먼저 품게 되었던 걱정스러운 반문이 '역자는 이 책을 이렇게 이해했다는 말이 아닌가'였습니다(그리고 yoonta님과 마찬가지의 '노파심'에서, 이는 정말 '순수한 걱정과 우려'였다는 점을 첨언하고 넘어갑니다!). 나머지 부분의 번역도 '정서'해보고 싶지만, 그것은 새 번역본이 나오게 될 때ㅡ만약 나오게 된다면ㅡ그 역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 듯 합니다.^^

paviana 2008-04-1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balmas님 서재에서 넘어왔습니다.로쟈님 서재에서도 가끔 뵈었지만 놀러오기는 처음이었는데 오기를 너무 잘했네요.
지금은 좀 바빠서 정독하기 힘들지만, 출력해서 잘 읽어보겠어요.^^
감사합니다.

람혼 2008-04-17 03:31   좋아요 0 | URL
paviana님, 반갑습니다. 잘 읽어주신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종종 뵙죠~ ^^

누에 2008-05-07 0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히 읽으려고 기회를 찾고 있는데 그만한 긴 호흡의 여유가 통 찾아오지 않네요. 람혼님의 글을 읽으면 부족한 제모습이 부끄러워지며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다짐하게 된답니다. 푸훕~

람혼 2008-05-09 03:08   좋아요 0 | URL
제가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말씀이군요. 저야말로 더욱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겠습니다.^^ 누에님이 꼼꼼히 읽어주실 기회가 있으면 좋겠고, 또 누에님의 고견을 들을 기회 역시 제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