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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noza, Œuvres IV «Ethica/Éthique», PUF, coll. "Épiméthée", 2020.


Enfin dans mes mains ! J’ai attendu tellement longtemps pour voir la publication de ce livre… Cette édition (dont le texte latin établi par Fokke Akkerman et Piet Steenbakkers, traduit en français par Pierre-François Moreau) de l’«Éthique» de Spinoza est enfin arrivée aujourd’hui !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피에르-프랑수아 모로(Pierre-François Moreau) 번역의 스피노자(Spinoza) 저작집 4권 <윤리학(Ethica/Éthique)>이 드디어 출간되어 오늘 내 손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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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책 <바그너는 위험한가>(김성호 옮김, 북인더갭, 2012)에 대해 제가 쓴 서평이 프레시안에 실렸습니다. 서평의 제목은 "바그너 '효과'에서 바그너 '사건'으로!"입니다. 서평과 책 모두 일독을 권합니다. 특히나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음악에 죽고 못 사는 저 같은 '지독한' 바그네리안들에게는 더더욱 필독을 요망합니다(이 책의 원제는 "Five Lessons on Wagner"/"Cinq leçons sur le 'cas' Wagner"입니다).

바디우의 이 책은 또한 슬라보이 지젝(Slavoj Žižek)의 매력적인 발문/후기(afterword)를 싣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가끔씩 제 스스로를 '반-바그너주의적 바그너주의자(non-Wagnerian Wagnerian)'라는 저만의 조어를 통해 규정하곤 하는데요, 아마도 철학계의 내로라하는 또 다른 두 '반-바그너주의적 바그너주의자'들일 바디우와 지젝이 함께 일종의 대위법처럼 구성하고 있는 철학적 이중주를 감상하는 재미도 이 책의 장점일 겁니다. 단, 이 책은 바그너의 음악이나 서양 오페라/악극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나 경험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란 단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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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효과’에서 바그너 ‘사건’으로!

— 알랭 바디우의 <바그너는 위험한가> 서평

 

 

최정우 | 비평가, 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아마도 나는 독일 작곡가 바그너와 연관된 문제에 관해서라면 결코 ‘객관적’으로 글을 쓸 수 없는 사람들 축에 속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아주 ‘심각한’ 바그너주의자(Wagnerian)였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이다. 왜 나는 이 말을 일종의 고백처럼 발설할 수밖에 없을까. 바그너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이에 대해서는 다소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바그너주의’라는 말은 단순히 음악적인 취향이나 신념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모차르트주의’나 ‘베토벤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비록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바그너주의’만큼의 광범위한 효과를 갖지 못한다). 이 말은 어떤 확정적인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단어로 매우 자주 쓰이기도 하고(바그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파쇼나 나치에 근접해 있다는 어떤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편견들), 또한 때로는 심지어 어떤 윤리적인 선택까지를 포함하는 단어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바그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의 입장에 서 있을 거라는 어떤 ‘몰역사적’이고 ‘초월적’인 예단들). 비록 나는 에드워드 사이드나 가라타니 고진 등이 지나가면서 언급했던 이른바 ‘비(非)-유대인적 유대인(non-Jewish Jew)’이라는 정치적/윤리적 정체성에 빗대어 내 스스로를 ‘비(非)-바그너주의적 바그너주의자(non-Wagnerian Wagnerian)’라는 일견 지극히 모순적으로 보이는 조어로 부르곤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과 변명의 언어적 환경 속에서 포착해야 할 중요한 징후는 따로 있다. 왜 ‘바그너주의자’라는 자기규정에 대해서만큼은, 이처럼 일종의 ‘해명’이, 심지어 일종의 ‘사과’마저 필요한 것일까. 이러한 사과나 해명은 비단 예술적인 입장의 소명이 아니다. ‘바그너’라는 이름이 단지 음악이나 예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나아가 철학과 정치의 문제가 되어왔던 어제와 저간의 사정이 바로 이 하나의 징후적인 물음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과 그것을 둘러싼 대답들의 관점에서, 최근 번역된 알랭 바디우의 책 <바그너는 위험한가>(김성호 옮김, 북인더갭 펴냄)는 바로 저 ‘바그너 문제’가 지니고 있는 지극히 익숙한 선입견들에 관해 가장 적극적인 도발을 감행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가 ‘바그너의 경우’를 이야기하며 바그너에 대해 뚜렷한 대립각을 세운 이래로, 바그너 음악에 대한 입장의 선택은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태도의 선택과 밀접한 관련을 띠어 왔다. 바그너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이른바 ‘바그너 효과’는 음악과 철학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관한 문제, 미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라는 보다 일반적인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매우 광범위한 문제 지형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비근한 예로, 바그너의 반음계 작법과 라이트모티프 등의 음악적 어법들은 조성의 파괴와 연속성의 재해석이라는 현대음악의 길을 열었으며, 그가 주창했던 예술적 이상들과 신화적 관념들은 예술지상주의와 민족주의/국가주의 양쪽에 이념적인 자양분을 제공했다. 게다가 바그너의 이름은 언제나 독일의 신화적이거나 국가적이거나 민족적인 통일성, 혹은 나치 치하 독일제국의 예술적 대표이자 반영으로서 이해되어 왔다(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음악의 연주가 금지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에서부터 아도르노를 거쳐 라쿠라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반(反)-바그너주의 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바그너를 동일성과 통일성과 연속성을 ‘시끄럽게’ 추구한 음악가로, 곧 차이와 파편과 불연속적 다양성 등의 전복적 요소들을 ‘폭력적으로’ 등한시하고 추상해버린 예술가로 비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디우는 <바그너는 위험한가>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강의들을 통해 이러한 바그너에 대한 편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복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철학의 핵심어들 중의 하나인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서 바디우는 반-바그너주의 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다. 바그너는 연속성의 추구 속에서 불연속성을 제거하고 사장시킨 작곡가가 아니라 오히려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맺는 새로운 관계를 담을 수 있는 전혀 다른 체제를 창안해낸 음악가라는 것이다. 무한선율과 반음계, 라이트모티프 등의 음악적 기법들을 통해서 압도적으로 드러나는 바그너 음악의 일견 ‘폭력적’인 연속성이 사실은 불연속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표현하는 전혀 다른 형상화 방식임을 주장함으로써 바디우는 바그너를 변호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국지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의 관계라든가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 또는 이행의 본질이라는 문제는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특히 (말이 난 김에 언급만 하자면) 정치에서 하나의 중요한 문제다. 사실상 불연속성이 더 이상은 혁명의 전통적 형상 안에 정치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체 어떻게 표현되는가? 더 이상 그 어떤 불연속성도 없다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그것은 결국 역사의 종말이라는 관념과 유사한 관념이 될 것이다.) 아니면 불연속성이 연속성의 압도적 현현 뒤에 숨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내 생각에 후자는 전형적인 바그너적 문제다. 사실 바그너는 일반적으로 불연속성을 연속성 안에 묻어버린 사람으로 이해된다(라쿠라바르트의 또 다른 라이트모티프). 반면 나는 바그너가 불연속성을 심오한 방식으로 전치시켜서 그것이 서사극과 음악 간의 결정 불가능성의 새로운 형상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연속성과 불연속성 간의 새로운 모델을 발명했다고 생각한다.”(107~108쪽)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다시 한 번 바그너의 이름은 좁게는 예술의 문제를 가리키는 음악(가)의 이름임과 동시에 넓게는 철학적 이행의 문제를 가리키는 개념과 실천의 이름이기도 하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문제시될 때,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총체성(totality)’과 ‘미학화(aesthetization)’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바디우가 바그너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조금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있는 저 벤야민의 정치적이고 역사철학적인 몸짓을 다시금 호출하고 기억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벤야민처럼 바디우도 여기서 정치나 예술의 ‘미학화’가 아닌 미학의 어떤 ‘정치화’를, 기존의 총체성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어떤 ‘총체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바라보는 바그너는, 미학화된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했던 음악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미학화를 가장 예민하게 경계하면서 미학의 정치화라는 미래 예술의 도래를 예고했던 예술가이다. 지젝이 <바그너는 위험한가>의 발문에서 쓰고 있는 “사건의 여파 속에 살아가기, 결과를 이끌어내기의 열려 있음”(318쪽)이라는 어구 역시 이러한 예술적 ‘구원’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미학화’란 또한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한 사건의 정치화와 가장 대척되는 지점에 서 있는 일종의 ‘마취(anaesthetization)’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디우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는 바그너의 초상은 바로 이러한 ‘미학의 정치화’와 ‘총체성 없는 총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형상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그너는 악극이라는 종합예술의 이상을 통해 순수예술을 가장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표상으로 그려져 왔지만, 사실 ‘바그너 효과’란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러한 순수예술의 경계 자체를 문제시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그너가 생각했던 저 ‘순수예술’이란 오히려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이라는 일견 모순된 형식, “새로운 형태의 위대함”을 가능하게 하는 도래할 미래의 예술적 형식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이에 관해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표명하는 입장은 우리가 순수예술의 부활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이겠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바그너가 호출되어야 한다. 내 가설은 순수예술이 다시 한 번 우리 미래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위대함은 더 이상 우리 과거의 일부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미래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종류의 위대함은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위대함인가?/ 그것은 확실히 순수예술이지만,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 즉 총체성의 미학화로서의 순수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총체성에서 분리되는 한에서의 순수예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명 새로운 유형의 위대함이다. 가령 이것은 영웅화 없는 영웅주의, 또는 전쟁의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온 위대함이나 그 비슷한 것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125~126쪽)

 

그러나 이러한 총체성 없는 총체성, 위대함 없는 위대함이 과연 가능할까. 혹은, 미학화라는 마취의 기제를 벗어나는 비미학적 사건의 도래와 실천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또한 바꿔 말하자면, 바디우가 그의 다른 책 <비미학>의 도입부를 통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과연 “미학적인 사변에 반대하여 비미학은 몇몇 예술 작품들의 독립적인 실존에 의해 생산되는 엄밀한 철학 내적인 효과들을 기술”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바디우는 바그너가 바로 그의 작품 <파르지팔>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곧 바그너의 현재적인 의미란 ‘종교적 초월이 결여되어 있는 의식(儀式)이 현대에도 가능한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바그너 음악 안에서 그의 마지막 악극 작품 <파르지팔>은 그 기독교 신비주의의 종교적 성격 때문에 원래부터도 매우 문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었지만, 이러한 ‘의식’의 물음과 관련하여 특히 <파르지팔>은 매우 징후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나는 <파르지팔>의 주제는 현대적 의식(儀式)이 가능한가에 관한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주제는 의식의 문제이고, 이 문제는 <파르지팔>에 본질적이다. 그것은 종교의 문제와 구별된다. 왜 그런가? 의식은 한 집단, 또는 심지어 공동체의 자기 재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월은 그 의식의 본질적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파르지팔>이 제기하는 문제는 초월 없는 의식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09~210쪽)

 

그렇다면 바디우가 일견 매우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새삼 바그너의 경우를 들고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바그너는 위험한가>는 결코 바그너의 음악세계를 ‘미학적’으로 해설하거나 평가하는 책이 아니다. 바그너를 뒤집어보면서 바디우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사실 그의 정치철학적인 본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바디우는 바그너의 ‘경우’ 혹은 바그너라는 ‘효과’를 넘어서 바그너라는 ‘사건’, 곧 ‘바그너’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사건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또한 그 불가능성이 지닌 어떤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폭발력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내가 확고하게 믿는바, 의식은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오늘날 필요하고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사태는 종종 그러하다. 진정한 문제는 그와 같이 필요하고도 불가능하다. 가능성은 더 이상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다. 사건이란 그런 것이다. 오늘날의 사건은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파르지팔>은 나름대로 예언적이다—의식을 가능하게 만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 <파르지팔>에서 발생하는 일은 그것이다.”(225~226쪽)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 바그너의 이름을 둘러싼 저 모든 예술적 기호(記號/嗜好)들에 대한 고백과 변명과 해명과 사과의 말들이 어째서 하나의 징후로서 드러나는지를 다시금 되물어야 할 것이다. 바디우의 이 모든 언설들을 단지 바그너주의자이자 바그너애호가로서 그가 어렵게 시도하며 또한 시도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변명들로 봐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역시나 그만큼이나 지독한 바그너주의자이자 바그너애호가인 내가 여기서 또한 그 모든 변명들을 변호하는 또 다른 변명들을 쓰고 있지 않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반복하여 말하자면, 바그너의 이름은 바로 이러한 자기지시적인 물음들을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예술의 이름이자 정치의 이름이다. 바그너의 이름은 단지 협소한 예술 장르로 이해되는 음악의 이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이름은 단지 어떤 예술적 사례라는 ‘경우’의 이름도 아니고 그러한 예술이 어떤 사회적 파급력과 영향력을 가지는가 하는 ‘효과’의 이름도 아니며, 바디우에 따르자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을 가리키며 예고하는 이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도르노는 메시아에 대한 ‘헛된 기다림’을 긍정하며 그러한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메시아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아마도 이러한 관점에서 아도르노는, 어쩌면 그의 본령과는 전혀 다르게, 벤야민이 그의 생애 끝까지 결코 완전히 해소하거나 해결할 수 없었던 저 메시아적 시간의 문제를 너무나 안전하고 안일하게 ‘미학화’했던 철학자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아도르노는 바그너의 음악이 어쨌든 궁극적 해결의 지점을 상정하며 지향하고 있는 어떤 ‘조작된 기다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도르노에게 ‘거짓 기다림’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너무나 새삼스럽게 묻자면, 메시아는 어떻게 오는가. 그리고 가장 ‘비(非)-유대인적’이며 또한 심지어 가장 ‘비유대적(非紐帶的)’으로 보이는 바그너가 바로 이러한 메시아적 시간에 관한 질문에 그의 음악 전체로 응답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쩌겠는가(그러므로 또한 지젝이 발문에서 ‘구원’이라는 결말의 문제와 관련하여 ‘바그너와 함께 그리스도를’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떤 매력적인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바디우는 말하고 있다. 바그너는, 여전히, 하나의 사건이며, 또한 그 이름은 그렇게 사건으로 도래할 때에만, 그렇게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불가능한’ 하나의 사건으로 ‘가능’해질 때에만, 비로소 다시금 가장 문제적인 이름일 수 있다고. 따라서 바그너 ‘효과’에서 바그너 ‘사건’으로 이행하면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단순한 미학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정치적 실천의 문제가 되고 있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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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601111425

 

지난 6월쯤에 <프레시안>에 썼던 서평이 하나 있었는데, 링크 해둔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네요. 피터 버크(Peter Burke)의 <문화 혼종성(Cutural Hybridity)> 한국어 번역본에 대해 제가 썼던 서평입니다. 서평과 책 모두 일독을 권합니다.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따위의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와 싸우기 위해서라도, '잡종(hybrid)' 개념의 이론적 전유와 실천적 발명은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잡종'이 사라진 '잡종의 시대'

- 피터 버크, <문화 혼종성> 서평

 

 

소위 혼종(hybrid)과 혼합(fusion)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세계라는 시공간이 그러한 혼종과 혼합의 어떤 절정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러한 이름들로 '우리'의 시대가 규정되고 소비되며 유통된 지 이미 오래라는 의미에서, 혹은 조금 더 세밀하고 적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시공간이 그러한 규정적 개념어들이 지닌 '다양성'을 통해 오히려 반대로 매우 '단일하게' 규정되어 오고 있는 지가 벌써 오래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어쩌면 오직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의 시대와 세계는 말 그대로 혼종과 혼합의 시공간이다.

 

'우리'의 시공간은 혼종과 혼합이라는 어떤 '객관적'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시공간이 아니라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개념들로 인해 매우 '상상적으로' 작동되고 조작되는 시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혼종과 혼합의 상상적 시공간 한복판에서, 아니 그러한 한복판이 도래한 듯 보인지도 이미 한참 된 어떤 한복판에서, 한 책의 번역은 좀 새삼스럽게 느껴지거나 심지어 뒤늦은 감마저 있다(이러한 '지연'의 감각은 이 책의 출판 연도인 2009년과 한국어 번역본의 출판 연도인 2012년 사이의 물리적인 시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피터 버크(Peter Burke)의 책 <문화 혼종성>(강상우 옮김, 이음 펴냄)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우리'가 (혹은 바로 그 '우리'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어떤 집단적 정체성이) 속해 있는 남한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다문화(多文化)'라는 또 다른 폭력적 용어가 소위 '한국적 관용(tolérance)'을 의미하는 지극히 어용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면서부터, '우리'에게도 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서 "우리에게도"라는 저 가장 익숙한 듯 보이는 어구의 맥락 자체가 문화적으로 그리고 혼종적으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며 따라서 가장 문제적이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여전히 가장 낯선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따라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문화 혼종성에 대한 전형적이고 중립적인 (혹은 그렇게 전형적이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교과서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일차적인 미덕은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매우 영미적인) 교과서적 서술에 있으므로.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문화 혼종성이 현재 어떤 첨예한 위기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개념과 현상이 어떤 민감한 기로에 서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정보'를 과연 다른 책들로부터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각 장의 제목을 이루고 있는 저 "각양각색의"라는 혼종적인 꾸밈말에 걸맞게 실로 각양각색의 사례와 예시들을 통해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포괄적 지도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들은 차후 더 진행될 수 있는 비판적 독해의 단서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서구인은 음악의 영역, 특히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중앙아프리카의 피그미족과 같은 다른 문화로부터 음악을 차용한 뒤에, 결과물의 저작권은 자신이 갖고 본토 음악가들과 저작료를 공유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제3세계 음악을 유럽이나 북미에서 '가공'되는 일종의 원자재처럼 취급해왔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난 500여 년간 서구 학자들은 자주 세계 다른 지역들의 식물이나 치료법 등에 대한 토착적 지식들을 이용해왔지만, 그 원천에 대해 항상 인정하지는 않았다." (19쪽)

 

또한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 이른바 문화적 '덧쓰기(palimpsest)'에 대한 풍부한 사례들과 그에 대한 분류에 바쳐지고 있다는 점 역시 높게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문화적 혼종성이란 쓰고 지우며 그 지움의 흔적을 지닌 채 다시금 덧입히는 일을 반복하는 것일 터이므로. 그러나 이 책의 전반적인 서술의 특징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다양한 예시들을 따라 그 개념을 매우 정확하게 규정해보려는 욕망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으며, 어쩌면 바로 이러한 특성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양날의 검일 것이다. 따라서 문화 혼종성에 대한 어떤 날 선 문제의식과 날카롭게 벼려진 비판 의식을 얻고 또 되묻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아마도 거의 쓸모가 없거나 아주 기본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책 말미에 수록된 이택광의 해제를 오히려 피터 버크의 본문보다 더 주의 깊게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택광의 해제 역시 다소 교과서적으로 작성된 감이 없지 않지만(그리고 예상외의 그 논문 식 어투가 계속해서 독해를 방해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이택광은 피터 버크가 그 자신의 주제인 '문화적 혼종성'에 대해 할 이야기를 다 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매우 우회적인 방식으로 암시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은밀하면서도 확실한 불만으로부터 자신의 해제를 위한 시동을 걸고 있다.

 

따라서 이 해제를 단순한 '해설'로 읽지 않고 오히려 문화적 혼종성을 일견 매우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듯 보이는 피터 버크의 기만적인 방식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서 읽어낼 때 우리는 이 해제의 의미와 위치와 맥락을 더욱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왜 (피터 버크의)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서술이 언제나 어떤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점을 더욱 예리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읽는 전략과 목표는, 단순히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정보의 습득에 멈춰서는 안 되며, 피터 버크 그 스스로가 오히려 저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이고 안일하게 접근하고 있는 저 서술 방식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해체라는 더욱 적극적인 독해 행위에까지 다다라야 한다. 아마도 이러한 독해의 방식이 이 책을 가장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어쩌면 가장 '다문화적으로' 읽는 전략이 될 것이다(그러므로 독서란 무엇보다 하나의 전략인 것).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철 지난 유행의 이론 혹은 일의적이고 동일적인 세계화의 숨겨진 전략이자 이데올로기였음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그리고 그러한 순간이 지난 지는, 지났다고 생각된 지는, 실로 오래되었는데), 오히려 우리는 저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직 죽지 않은) 유령을, 그 유령의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을 다시 부르고 다시 소환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냉전 시대 이후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지닌 가장 정치적이자 이론적인 알리바이였다고 한다면, 문화적 혼종성이란 세계화와 전지구화가 지닌 가장 국가적이자 국지적인 알리바이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주에 반대하는 유목이란, 다시 말해 정착과 영토화를 거스르는 노마드(nomad)의 개념이란, 현재 그 정치적 파괴력을 잃고 얼마나 '낭만화'되고 '안전화'되었는가. 말하자면, 그와 마찬가지의 일이 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실로 똑같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hybrid'라는 개념은 '혼종성'이라는 지극히 점잖은 용어로 옮겨지는 동일성의 다른 가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래' 뜻에 걸맞게(그러나 또한 'hybrid'에 있어 '본래'라는 기원과 시작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잡종'이라는 보다 잡스러운 의미로, 종잡을 수 없는 파괴적인 날것의 의미로 되새겨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아마도 이 책이 지닌 한계와 문제점을 통해서, 이 책이 지닌 서술 방식에 대한 비판 의식을 통해서,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말미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의 크레올화"(169쪽)이라는 개념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것은 실로 양가적인 개념이어서, 때로는 수구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통합적 질서 구축을 위해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로 가장 파편적이면서도 당파적이고 급진적인 논의들을 위한 이론적 근거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들'이 아닌) '우리'는 작가의 (영문판) 서문으로 새삼 다시 돌아가 작가 그 자신의 변명 혹은 자기변호를 재차 되새겨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종의 고백임과 동시에 하나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되는 주제이기도 한 문화적 전지구화(cultural globalization)는 작가인 나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혹은 일종의 복수를 했다고) 할 수 있다." (11쪽)

 

문화적 전지구화가 작가 자신에 미친 '영향'이 정말 '복수'였는가 하는 문제(혹은 그것이 외부의 '복수'라는 이름을 가장한 지극히 내밀한 어떤 '욕망'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영향' 혹은 '복수'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은 쓰일(作/用)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민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일종의 폭력적 단순화 작업, 잡종의 문화 현상에 대한 일종의 이론적 동일화 작용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해 이 책의 존재 자체가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한 가능성의 주제가 근거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 불가능성의 지점을 매우 징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책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의 주제인 문화 혼종성이 지닌 어떤 불가능성의 조건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미덕, 혹은 '우리'에게 이 책의 '번역'이 주는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바로 이것일 터, 아마도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 대답하고 되물어야 하는 시작점이 바로 여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결코 기원이나 원천이 아닌 끊임없이 갱신되고 또 갱신되어야 할 어떤 문제적인 시발점일 것이며, 이 책은 '우리'에게 바로 그 '우리'라는 개념의 의미를 되물으며 이렇듯 끊임없이 문제적인 방식으로 다가올 때에만 어떤 의미를 산출하게 될 것이다. 유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대에 유목의 정치적 가능성을 새삼스럽게 다시 되물어야 하듯, '우리'는 아마도 이 책을 통해 잡종이 불가능한 시대의 잡종이 지닌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정우 | 비평가, 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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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평가처럼 '절충주의와 예술적 아취는 병립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재즈가 본질적으로 절충적인 음악 형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재즈는 출발부터 '사생아'였으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다른 예술 형식과 마찬가지로, 재즈를 순수와 절충 형식으로 구분해볼 때 오늘날 순수해 보이는 것은 아주 오래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얼마나 절충적이며 얼마나 복합적인 것이었는지를 우리가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 요아힘 에른스트 베렌트(Joachim Ernst Berendt), <재즈북(Das Jazzbuch)>(한종현 옮김, 자음과모음, 2012), 8쪽.

 

 

<재즈북>.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2004년에 초판이, 2006년에 재판이 나왔던 책인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구한 판본은 올해 8월 초에 출간된 3판. 서문을 읽다가 위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마지막 문장의 한국어가 약간 어색하긴 하다). 비단 재즈뿐이랴. 예술도, 철학도, 그 자신의 절충적이며 복합적인 기원의 '기원성'을 너무나 자주 망각한다. 아니, 보다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 '기원'이란, 그렇게 '순수한' 것으로 상정되고 상상되며 (바로 그러한 상상적 상정을 통해) 회고되기에 비로소, 그렇게 상정되고 상상되며 회고될 때에야 비로소, 그렇게 '기원'으로 기능하고 작동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조금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리고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적확함이 지닌 역설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말하자면, '기원'의 가능조건이란 오히려 바로 이러한 '망각'에 다름 아니다.

 

<재즈북>의 차례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읽고 싶은 부분들만 조금씩 읽었는데, 재즈 초심자에게는 두고두고 확인해가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일 테고, 재즈 애호가에게는 재즈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점검해보면서 정리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일 거라 생각된다. "Quintet du Hot Club de France"를 "퀸텟 '두' 핫 클럽 드 프랑스"(547쪽)로 표기하고 있는 게 아주 작은 흠이라면 흠이겠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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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2-08-2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음과 모음'에서 다시 나왔군요. 과거의 판형은 아닌 듯 하군요.ㅎㅎ 너무 크거나 또는 너무 길거나. 지난해 봄에 나온 <문화/과학> '21세기 주체형성론'을 살펴보고 있는데, 람혼님의 글이 있어서 반가왔습니다. '한밤의 미학이 한낮의 정치...'

람혼 2012-08-28 11:26   좋아요 0 | URL
네, 과거 판형보다 조금 작게, 조금더 도톰하게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책은 참 예쁩니다.^^ 그나저나 그 글을 읽으셨군요? 작년에 썼던 글이었는데, 저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2012-08-28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8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 Maurice Blanchot, Chroniques littéraires du Journal des débats
    Paris: Gallimard(coll. "Les Cahiers de la NRF"), 2007.

▷ Maurice Blanchot, Henri Michaux ou le refus de l'enfermement
    Tours: Farrago, 1999.

5) 2007년에 출간되었던 또 다른 반가운 책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비평집으로서, 1941년 4월에서 1944년 8월 사이 『Journal des débats』지에 실렸던 블랑쇼의 글들을 모두 수록하고 있는 책이다. 블랑쇼뿐만 아니라 베르나르-마리 콜테스(Bernard-Marie Koltès)에 대한 전문가로도 유명한 크리스토프 비당(Christophe Bident)이 편집을 맡은 판본이며 'Les Cahiers de la NRF' 총서의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1997년에는 이 총서의 일환으로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서간 선집이 출간되기도 했었다).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 중에서도 내가 가장 먼저 찾아본 글은 역시나(!) 조르주 뒤메질(Georges Dumézil)에 관한 글이었는데, 무엇보다도 뒤메질의 '동시대인'에 속하는 블랑쇼의 '육성' 그대로 뒤메질에 대한 평가를 읽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블랑쇼의 비평들 중에서 앙리 미쇼(Henri Michaux)의 시에 관한 두 개의 글은 이미 1999년에 또 다른 두 글을 포함해 미쇼의 데생 네 작품ㅡ미쇼는 미술의 영역에서도 일가(一家)가 있었으니!ㅡ과 함께 파라고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 바 있다.

여담이지만,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야망이 없는 듯 보여서 보기 좋다'라는 기분 좋은 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왜 기분 좋았던가 생각해보니, 돌이켜보면 20대 때에는 무언가 가슴에 품은 불덩이를 일부러 숨기고 다니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ㅡ우리 모두 알다시피ㅡ숨겨도 숨겨도 자꾸만 삐져나오는 불씨가 있기 마련이어서, 가끔씩 주변의 물건과 사람들을 '태우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 '숨김'의 방식이 '지능적이고 습관적으로' 내재화된 것일까, 아니면 그 불씨의 '화기(火氣)'가 안착의 형태로 '안전하게' 내재화된 것일까. 이 개인적인 질문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얼마 전 보고 있던 책 위로 불이 채 다 꺼지지 않은 담뱃재가 떨어져 책장 두 장에 구멍을 내었다. 그 재[灰]를 보면서 생각했다, 가장 뜨거운 것은 어쩌면 담배를 타들어가게 하는 불이 아니라 그 불이 남긴 재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그렇게 타들어가는 책장을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손가락으로 그 불씨를 꾹 눌러껐다. 밤의 공간을 밝히는 붉은 전등의 불빛만이 오롯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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