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뭉크(Munch)가 그린 니체.

27) 광인(狂人)과 맹인(盲人)의 자서전. 거의 모든 자서전들이 생의 말미에 저술된다는 점은 새삼스럽게도 흥미롭다. 물론 이 '말미'라고 하는 시간적 규정이 단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의 임박을 알리는 표현일 뿐인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자서전을 쓰는 행위는 자서전의 저자가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완결된' 통일적인 시점을 갖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그러나 이러한 '완결성'이 어떤 궁극적인 '완성'이 될 수 없음 또한 물론이다). 그러한 시점이 일종의 '전회' 혹은 '일단락'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자서전은 삶의 기록임과 동시에 죽음을 '회고'해가는 일종의 '묘비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따라서 죽음은 단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로부터 '역으로' 육체적인 죽음을 제외한 생의 결정적인 죽음은 단 한 번뿐이라는 환상과도 같은 언명 또한 가능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서전은 죽음을 '소화'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그것은 죽음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 순간으로 인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저자의 '현재' 위치를 다져간다. 변신의 이야기. 그러므로 자서전은 하나의 '유언장'이며 저자는 그러한 유언의 내용을 스스로 집행하고 증명하는 법적 '대리인'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여기서 '법적(法的)'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내 자신의 신용으로(auf meinen eignen Credit) 살아간다. 어쩌면 내가 산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편견(Vorurtheil)일까?"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57(번역: 람혼).

28) 자신의 존재는 그 존재 스스로에 의해서만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숙명. 자서전은 이러한 '치명적' 조건을 고스란히, 가장 '정직하게' 안고 가는 글쓰기의 형식이다. 왜냐하면 작품에 대한 저자의 '사법적 권능'은 자서전 안에서 가장 극명하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서전의 저자는 가장 강렬한 강도를 띠는 저작권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이러한 글쓰기의 '사법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환경은, 르죈(Lejeune)도 지적하고 있는바, 고유명사의 공간, 곧 서명(signature)의 공간이다. 니체는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람을 보라』의 서문에서 자신의 '신용(Credit)'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니체에게 있어서 이러한 신용이 자기 자신의 것만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이러한 질문이 가능한 것은, 자서전에 있어서 서명의 문제가 단순히 '안전하게 보장되는 사법성'의 표현에만 국한된 문제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광인의 자서전'이라는 문제는 자서전의 '영원한 타자'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 자서전 안에서 일견 견고한 듯이 보이던 저자의 진실성과 서명의 사법성은 광인으로서의 자서전 저자라는 개념에 의해서 동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광인의 자서전'이라는 말 안에서 '광인'이라는 개념과 '자서전'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서로 충돌하는 일종의 형용모순(oxymoron)을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자서전의 효과가 진실성/성실성(sincérité)이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때, 광인의 글쓰기는 그러한 조건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것, 오히려 그러한 전제 조건 자체를 무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자서전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어떤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자서전 저자의 자격 자체가 이미 '법적으로' 인가되며 또한 공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서전 저자의 자격을 규정 짓는 이러한 정상성(normalité)의 기준은 자서전의 은폐된 바깥을 구성한다.

  

▷ Friedrich Nietzsche, Kritische Studienausgabe, Band 6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88[2. Auflage].
▷ 프리드리히 니체, 『 바그너의 경우 外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2.
▷ 프리드리히 니체, 『 도덕의 계보 / 이 사람을 보라 』(김태현 옮김), 청하, 1982.

29) 그럼에도 혹자는 '소박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자서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누구나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갖고 있어야 하며 자서전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삶의 굴곡들과 업적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식의 '소박한'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저 문장 안에서 "누구나"라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나름의 삶의 굴곡들과 나름의 절실한 이야기들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자서전'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저자의 인지도에 의한 자서전의 유명세와 판매량의 문제를 떠나서, 사회적이고도 사법적인 심급에서 가장 먼저 결정된다: 그 기준이란, 저자가 정상적인 정신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가 없는가, 즉 그가 서술하는 이야기들을 그의 삶이 지닌 '진실한' 부분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 그러므로 이는 곧 자서전 저자의 '법적' 자격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광인의 글쓰기 '능력'은 믿을지언정ㅡ왜냐하면, 우리에게 때때로 '광인'은 천재적 예술가의 표상이기도 하므로ㅡ그 글의 '진실성'은 믿지 못한다. 설령 그가 자서전을 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진실성의 심급에서의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허구', 혹은 하나의 '예술 작품'의 위치에 준할 수도 있는 '착란'의 결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따라서 소위 '정상인'은 자서전을 쓰는 데에 있어서 이미 어떠한 사법적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반면, 광인에게는 원천적으로 말해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저자'의 자격이 박탈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자서전 저자의 '사법성'이라는 문제이다. 저자로서의 권리와 그것이 지닌 법적 정당성이 광인의 자서전 안에서는 쉽게 결여될 수밖에 없는 것. 이러한 의미에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자서전' 텍스트는ㅡ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와 함께ㅡ알튀세르(Althusser)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L'avenir dure longtemps)』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 내가 다시 부재와 존재의 문제를 제기하는 논의의 층위는 루소의 '근원적인' 경험과 관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서전 텍스트 안에서 제기되는 '첫 번째 기억'에 관한 문제를 가리키고 있는 것. 자서전이 거의 언제나 저 '유년기의 기억'이라는 문제와 떨어져 생각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기억이라는 것이 '경험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자서전의 '기억'은 나에게 복원과 재구성의 문제, 곧 자서전 안에서의 허구와 거짓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Jacques Derrida, De la grammatologie, Paris: Minuit(coll. "Critique"), 1967.

20) 앞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듯이, 루소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원'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부재, 더 정확하게는 바로 부재하는 어머니의 '존재감'이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루소의 '음성중심주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백록』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지를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순간, 루소는 에크리튀르(écriture)로의 이행을 어떤 특정한 부재를 통해, 그리고 계산된 소멸(effacement calculé)의 한 유형을 통해 음성언어(parole) 속에서 자신에게 실망한 현전의 복원(restauration)으로 기술한다. 따라서 글을 쓴다는 것은 음성언어를 보존하고 회복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음성언어가 자기 자신을 내놓으면서 동시에 또한 스스로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p.204(번역: 람혼).

21) 여기서 루소의 유년 시절에 있었던 독서 체험이 그의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첫 기억'으로 부상한다. 어머니가 남겨 놓은 소설들, 그 안에서 어린 장 자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따라서 르죈의 다음과 같은ㅡ비록 그것이 '음악'과 관련하여 서술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ㅡ말은 이러한 루소의 첫 경험이 어떠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자기의 목소리를 통해서 어떤 목소리에 다시 생을 부여하는 것(redonner vie à une voix à travers la sienne)."(원서 p.111, 국역본 168쪽) 이어 르죈은 또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글쓰기는 말 속에 있는 구멍을 메우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것(toute l'écriture est là pour combler un trou qu'il y a dans la parole)."(원서 p.111, 국역본 169쪽) 이는 루소의 저 '대리보충'에 대한 르죈만의 어법이 아니겠는가.

22) 음성언어는 현전을 약속하지만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근원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포착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음성언어의 성격은 다시금 루소의 탄생 이야기를 환기시킨다. 어머니는 루소의 현존을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그 자신은 곧 사라져버렸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이미지는 '도처에 편재하는 부재'라고 하는 근원적인 존재 방식, 곧 목소리라고 하는 '청각적' 절대성을 지닌 이미지를 머금게 되었으나, 동시에 또한 지속적이고 물질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르죈이 말하듯, "독서의 기원은 출생, 그리고 어머니의 이미지에 연결되며, 글쓰기의 기원은 사춘기에, 그리고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짊어지는 소설적 세계로의 복귀에 연결된다."(원서 p.93, 국역본 140쪽)

23) 그리하여 여기서 내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실체가 없는 근원을 보유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고안된 대리보충(supplément)의 형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차라리 '필요악'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음성언어에 대해서는 문자언어가, 목소리에 대해서는 책이, 그 자체로는 포착되지 않는 부재하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그것의 여러 물질적 변용들이, 그리고 세상의 구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역사들이, 각각 '충실한' 대리보충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 루소에게 있어서 이는 본질적인 현전을 파괴한다는 의미에서 탈피하고 극복해야 할 무엇이지만, 동시에 포착할 수 없는 것의 재전유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는 반대로 복권되어야 할 무엇이기도 하다.

   

Paul Ricœur, Temps et récit. Tome 1: l'intrigue et le récit historique
    Paris: Seuil(coll. "Points essais"), 1991(1983¹).
▷ 폴 리쾨르, 『 시간과 이야기 1: 줄거리와 역사 이야기 』(김한식, 이경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9.

24) 그러나 목소리의 기억은 과연 '근원적'인가. 오히려 그 목소리를 근원적이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 목소리를 '발음'하게 했던 책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이 가장 '데리다적인' 질문은 곧 자서전 텍스트가 독자에게 제기하는 '자기정당화'의 문제로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서전의 '첫 번째 기억'이란 이미 '사후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며, 그것은 항상 '현재의' 저자에 의해서 서술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루소 자신의 '역사'를 이루는 일종의 원형이 제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고백록』의 1권은 폴 리쾨르(Paul Ricœur)가 "시간 경험의 강화(intensification)"로서의 "영원성(éternité)"이라 부르고 있는 것에 해당하는 시간일 터(『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 1권, 문고판, p.22 참조), 그것은 그 이후 그로부터 뻗어나가 여러 번 반복되고 변용될 다양한 기원들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견 직선적이고 비가역적으로 보이는 역사의 순서를 '그런 형태로' 가능하게 해주는 것, 그렇게 해서 '첫 기억'을 살려내며 '있음직한 근원'의 모습을 그리게 해주는 것은 언제나 그러한 태초와 근원에 대한 현재의 대리보충이었던 것.

▷ Jacques Lacan, Encore. Le séminaire, livre XX
    Paris: Seuil(coll. "Le Champ freudien"), 1975.

25) 따라서 기억과 관련하여 '근원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대리보충 안에 자리 잡게 된다. 라캉은 한 세미나에서 '주이상스(jouissance)'에 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 바 있다: "내가 '추가적인(supplémentaire)'이라고 말한 것에 여러분은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보완적인(complémentaire)'이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우리는 전체(le tout) 속으로 다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라캉, 세미나 20권, p.68) 근원으로서의 영원성은 초월로 가는 '잘못된' 길 또는 하나의 함정일 수 있다. 근원을 상정하면서 그 '완전한' 것에 대해 어떤 것이 '보완적'이라고 말하는 방식은 닫힌 동일성의 논리, 곧 쉽게 "전체 속으로" 침몰하는 논리일 것이다. 반대로, '근원'은ㅡ만약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ㅡ언제나 그것에 대한 대리보충을 통해서만, 또는 '추가적인' 어떤 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자리와 진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루소는 이미 문자언어를 '대리보충'으로 명명하면서 그것을 '필요악'이라 인정했을 때부터 이미 이러한 '차이'의 놀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터.

26)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유명한ㅡ또한 동시에 '악명 높은'ㅡ하나의 가설, 곧 '텍스트의 외부'가 아닐까. 그러나 외부는, 르죈도 계속해서 말하고 있듯이, 단순히 역사적으로 검증되는 '전기적 유사성'의 문제일 수 없다(원서 pp.35-41, 국역본 53-61쪽 참조). 당연한 말이지만, "동일성은 유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원서 p.35, 국역본 53쪽). 행간과 여백, 이것은 텍스트 자체로부터뿐만 아니라 흔히 '텍스트의 외부'로 불리는 저 역사적 검증의 장으로서의 '유사성'의 공간으로부터조차도 하나의 '바깥'으로 규정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외부'가 자리 잡고 있는 공간일 것이므로. 따라서 이러한 '외부'는, 자서전적 텍스트를 독해하는 데에 있어서 진실성과 속임수라는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험해보고 검토해볼 수 있는 이론적 장소이며, 그러한 실험의 방법론이 기본적으로ㅡ그 입장이 수용이든 대결이든 간에ㅡ정신분석의 주변을 맴돌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또한 무의식의 장소이기도 하다. 더불어 저자와 화자, 화자와 주인공 사이의 '동일성(들)'을 가르는 어떤 틈새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외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국 이 틈새 혹은 구멍은 동일성의 즉물적인 외부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동일성의 한가운데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일 테니. 그 공간, 그 장소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보이는 부분들 속으로 침투를 거듭하는 것이므로. 이것이야말로 무의식에 대한 '가능한' 정의들 중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Jean-Jacques Rousseau, Œuvres complètes, tome I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59.
▷ 장자크 루소, 『 고백 』(김붕구 옮김), 박영률출판사, 2005. 

7) 자서전 텍스트 내에서 '속임수'가 만들어내는 '틈새'를 읽는 한 사례로서 루소(Rousseau)의 『고백록(Les confessions)』 1권의 몇 부분을 중심으로 그의 '정체성'이 어떤 방식으로 성립되고 서술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가장 나의 흥미를 끄는 곳은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나는 이미 정의의 기사(redresseur des torts)가 된 것이다. 정식으로 유랑기사(Paladin)가 되기 위해서는 나에게 단지 귀부인(Dame)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귀부인이 둘이나 있었다."
ㅡ 루소, 『고백록』, 전집 1권, p.26(번역: 람혼).

8) 이 부분은 아마도 표면적인 텍스트 그 자체로는 별 다른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부분을 문제 삼는 이유는 이 문장이 배치된 위치와 전후의 문맥이 내게 매우 미묘한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의 앞에 서술된 부분은 자신의 사촌을 "바보 당나귀 베르나르(Barnâ bredanna)"라고 부르며 놀리는 아이들에 대항해 루소가 싸움을 거는 내용이며, 그 뒷부분은 뷜송(Vulson) 부인 그리고 고통(Goton) 양과 가졌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이다(그러므로 저 '두 귀부인'이란 곧 이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 그나저나 한 여인의 이름이 '고통'이라니!). 그런데 왜 여기서 사촌 베르나르를 악동들의 놀림으로부터 지켜줬던 행동과 귀부인을 흠모하는 수호기사의 이미지가 그토록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 것일까. 왜 루소의 글은 그러한 '수호'의 경험으로부터ㅡ저 돈키호테의 모험을 연상케 하는ㅡ"유랑기사"를 매개로 하여 자연스럽게 이성에 대한 사랑의 기억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일까. 곧, 왜 이 문장들은 바로 '이곳'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것이 나의 물음이다.

9) 그런데 여기서 사촌 베르나르와 맺었던 이러한 '우정'이 어린 루소에게 있어서 일종의 '근원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르죈(Lejeune)이 이미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자서전의 규약』, 원서 pp.94-99, 국역본 142-149쪽), 현실과 제도적 질서의 '침탈'에 의해 초래된 이 우정의 파국은 결국 "철기(âge de fer)"의 정점을 이룬다. 점진적인 하강을 그리던 '타락'의 곡선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더욱 그 속도와 각도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와 함께 루소의 '낙원 시대'도 완전히 끝장나버리고 만 것. 이것이 이토록 결정적인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는 만큼, 어린 루소에게 있어서 베르나르와의 우정은 인간 관계의 어떤 원형을 제시하고 있는 본원적인 상태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베르나르와의 관계가 루소에게 있어서 '모든 관계의 원형'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 하나가 절실해진다. 원형은 그것을 원형이게끔 만들어주는 근원적인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10) 이러한 근원적인 경험이 문제가 된다고 할 때 내가 특히 주목하고 싶은 루소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나의 아버지가 이러한 상실[아내, 즉 루소 어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나는 몰랐다. 그러나 그가 결코 그 상실의 슬픔을 가라앉히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그로부터 그녀를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잊지 못한 채, 내 안에서 그녀를 다시 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껴안을 때마다, 나는 그 한숨과 그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포옹을 통해서 그의 애무에 쓰디쓴 회한이 섞여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애무는 더욱 부드러웠다. 아버지가 나에게 "장 자크, 우리 네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에게 "어, 아버지, 그럼 우린 울 게 될 걸요"라고 말했었다. 이 한 마디 말에 아버지는 벌써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신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그녀를 내게 돌려줘, 그녀 때문에 슬퍼하는 나를 달래줘, 그녀가 내 영혼 속에 남긴 빈 자리를 채워주렴. 네가 단지 내 아들일 뿐이라면 내가 널 이렇게까지 사랑했을까?" 아내를 잃은 지 40년 후에 그는 후처의 팔에 안겨 죽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전처의 이름을 되뇌고, 가슴 속 깊은 곳에는 그녀의 영상을 간직한 채로."
ㅡ 루소, 『고백록』, 전집 1권, p.7(번역: 람혼).

11) 이 인용문은 아마도 '정신분석적' 해석 방법에의 유혹을 가장 강하게 느끼게 되는 부분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해석의 방향을 따를 때, 우리는 이 일화를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일화는 기본적으로 '거세(Kastration)'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것. 여기서 루소의 탄생이라는 기표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기의를 항상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어린 루소에게서 그가 앗아간 어머니의 존재, 곧 회귀 불가능한 존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루소가 '퇴행'하는 아버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부재하는 어머니에 대해서도 똑 같이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게 되는 됨과 동시에, 또한 루소 안에서 어머니의 현전을 갈구하는 아버지에게서 루소는 아들이기에 앞서 여성이자 아내이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곧, 어린 장 자크는 아버지에 의해 거세되기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

▷ 만 레이(Man Ray), <눈물>.

12) 그러나 여기서 단순히 표면적이고 '생식기적'인 남근의 개념만을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경련을 일으키는 포옹"과 "눈물"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다분히 '여성적인' 기질이 아닌가. 아버지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오히려 여성성으로서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는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위의 인용문에서 "아버지"를 모두 '어머니'로 바꿔 읽어보라. 그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깜짝 놀랄 수도 있을 테니. 한 가지 더, 오히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고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장 자크가 아닌 아버지인 것은 아닌가. 이러한 맥락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 추궁과 그 징벌로써 어린 장 자크에게 거세 의식을 행하는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여기서 아버지야말로 거세되고 처벌 받는 존재로 표상되고 있지 않나.

   

▷ Sigmund Freud, Werke aus den Jahren 1906-1909. Gesammelte Werke, Band 7
    Frankfurt am Main: Fischer, 1993[7. Auflage].
▷ 지그문트 프로이트, 『꼬마 한스와 도라』(김재혁, 권세훈 옮김), 열린책들, 1997.

13)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어린 루소와 그 아버지 사이에서 으레 빚어질 것이라 추측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출구'가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에게서 남근이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어린 한스(Hans)의 사례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아버지-남성'과 '어머니-여성'이라고 하는 생물학적이고 표면적인 구분이 전혀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상기해보자: "왜 [성적인] 속성들이 오직 위협을 통해서만, 게다가 오직 박탈의 측면에서만 수용되어야 하는가."(La signification du phallus, Écrits, p.685) 하나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어린 루소에게 있어서는 거세의 메커니즘을 '학습'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처음부터 부재했었고, 그는 탄생과 동시에 아버지라는 '모델' 없이 '남근' 역할을 학습해야 했던 것(이러한 맥락에서 아버지와 형의 싸움에 끼여들어 형을 두둔하는 루소의 행동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형에게 내려지는 '형벌'을 말리는 루소는 일종의 '승리자'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루소의 행위는, 여성성의 이미지로 화한 아버지의 애정이 남성성(='아버지')으로 화한 형에게가 아니라 바로 루소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확인 사살'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살스러운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터). 그러므로 실제로 어린 장 자크에게 부재했던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존재는 그 자신의 부재를 통해서, 그리고 그가 남긴 '소설책들'을 통해서, 다가갈 수 없는 현존으로 규정되고 있다. 부재가 존재에 대해, 존재보다도 더 큰 영향력과 규정력을 갖는다는, 이제는 일종의 '원칙'이 되어버린 하나의 '역설'.

▷ Jacques Lacan, Écrits, Paris: Seuil(coll. "Le Champ freudien"), 1966.

14) 루소의 탄생부터 부재하게 된 어머니의 존재와 관련하여 내게는 라캉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왜 두 성(性) 모두에게 있어 어머니는 보다 근원적으로 남근(phallus)의 소유자, 즉 남근적 어머니로 간주되는가."(Écrits, p.686) 곧 바로 다시 라캉의 입을 차용해 대답하자: "왜냐하면 남근은 기표이기 때문이다."(Écrits, p.690) 즉, 새삼스럽게 한 번 더 확인하게 되는 사실이지만, 남근은 단순한 신체적 성차(性差)에 의해 그 유무가 판별될 수 있는 기관이 아니라 다분히 '상징[계]적인' 성격을 띠는 하나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15)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근에의 욕망, 곧 '타자의' 욕망이 어린 루소에게 어떻게 전이되고 그 자신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의 욕망은 "어머니가 남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중요한 것으로 기능한다(Écrits, p.693). 그러나 루소에게는 어머니에게 남근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한스의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아니 오히려 바로 그의 탄생 '때문에' 부재했으므로.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거세'되고 그 때문에 자기 처벌을 행하는 아버지에 의해서 루소에게 간접적으로 학습될 수밖에 없었다. 루소에게 있어서는 기표로서의 남근, 즉 상상계를 뛰어넘어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한 전범이 '원천적으로' 부재했던 것. 루소에게 부재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남근의 전범으로서 작용하는 하나의 '남성성'인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존재한다: 존재하는 아버지는 여성성으로 현전하고, 부재하는 어머니는 루소에게 근원적으로 결여되었던ㅡ그래서 루소가 경험할 수 없었던ㅡ남성성으로 현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소가 결투를 슬기롭게 회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 또한 다른 시각에서 해석해볼 수 있을 텐데, 결국 그것은 아버지의 '여성성'을 숨기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르죈이 말하듯, "루소에게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는, 성숙(maturation)의 단계와는 거리가 먼, 미성숙(immaturité) 상태에의 고착을 의미하"는 것이며(원서 p.103, 국역본 155쪽), 이에 이 일화를 일종의 '텍스트적 틈새'로 독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루소는 그 스스로가 '전범'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자서전이라는 장르의 성립에 있어서 이렇듯 자기 자신을 일종의 '타자화'하는 시선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의 판화.

16) 바로 이 지점에서 루소가 '부재하는 남성성'을 체득하기 위한 과정에서 '선택'한 대상이 베르나르라는 사실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아버지-대체물'로서의 베르나르와의 관계는 루소에게 있어서 상징계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 여기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베르나르가 보호받아야 할 여성성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은 특히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바로 여기서 나는 루소 스스로 구성해낸 최초의 남성성이 수호기사의 이미지로 드러나게 되었던 사정, 곧 베르나르를 감싸고 보호하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귀부인을 수호하는 유랑기사의 이미지로 전환되게 되었던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17) 이러한 루소의 정체성 성립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라캉의 말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의 동성애는 욕망을 이루는 남근의 결핍을 따라 그 측면 위에서 구성된다."(Écrits, p.695) '모델'로서의 남근의 결핍, 루소에게 있어서 이러한 결핍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도처에 편재하며 그 어떤 것으로도 변용될 수 있는 근원적인 '어머니-남근'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아마도 이것은 하나의 존재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존재 방식, 곧 이상적인 '자웅동체'의 모습일 것이다. 내가 '루소는 어떻게 동성애자가 되었나'라고 하는, 일종의 '허구적' 질문으로 운을 뗀 것은, 바로 이러한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 Marquis de Sade,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1
    Paris: Pauvert, 1990. 
▷ 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 Journal inédit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94(1970¹).

18) 이 시점에서 갑자기 내게 떠오른 것은 사드(Sade)의 일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Vous voulez donc absolument que je vive?(폴리오 판 p.66, 포베르 전집판 p.122) 아마도 이 말은 결국 샤랑통(Charenton)에 갇혀 있던 사드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니었을까? 사드는,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내게 '도착된 여성성'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이다. 루소와 사드, 도착적인 두 개의 초상화.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1: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에 2008-03-02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습니다. 람혼님, 감사합니다.

람혼 2008-03-03 13:37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하죠, 누에님.^^
 

*) 대략 8년 전, 20대 초반을 갓 넘긴 시점에서 썼던 오래 된 글을 서랍에서 꺼내 다시 이곳에 옮겨 적는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새삼 크게 세 가지 분야의 독서에, 곧 전기(傳記), 자서전(自敍傳), 대담(對談) 문학 등 소위 '주변적'이라 분류될 수 있는 글쓰기 장르에 대한 독서에 다시금 집중하고 있는데, 어쩌면 나의 이 모든 글들은 내 미완의ㅡ그러나 동시에 언제나 '미완'의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ㅡ자서전을 구성하는 잡설들일 것이라는 하나의 '뼈 아픈' 가설에 생각이 미치게[及/狂] 된다. 예전에 자서전 문학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일거에 정리해두었던 묵직한 글 뭉치, 그 갈겨쓴 육필(肉筆) 위로, 지금과는 다른 내 육체의 낯선 한 부분이, 뽀얀 먼지와 함께 퇴적되어 있음을 본다. 미래를 '회고'하면서, 그 기록을 남겨둔다.

1) 자서전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물음은 내게 일종의 '사상사적' 물음의 형식으로 다가온다. 자서전이란, 이데올로기가 가장 개인적이고 심층적으로 작동하는 내밀성의 공간, 그 '존재'의 장소를 이탈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부재'의 장소를 구성해주는 글쓰기의 형식이므로. 자서전 연구의 바이블이라 부를 만한 『자서전의 규약(Le pacte autobiographique)』에서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은 이렇게 쓰고 있다: "자서전은 무엇보다도 [저자와 등장인물 사이에] 부과된 동일성(identité assumée)을 언표 행위(énonciation)의 층위에서 전제해야 하며, [이와 비교했을 때] 언표된 내용(énoncé)의 층위에서 산출된 유사성(ressemblance)은 완전히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원서 p.25, 국역본 35쪽, 번역은 일부 수정함, 강조는 원문). 그렇다면 일인칭으로 씌어진 소설의 경우는 어떠한가. 질문의 형식을 보다 정확히 하자면, '나(je)'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는 화자가 자신의 이름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 일인칭 소설의 경우는 어떠할까(일인칭은 언제나 삼인칭의 고유명사로 소급되고 환원되며 또한 대체될 수 있다고 하는 르죈의 논의를 따르자면(원서 pp.21-22, 국역본 29-30쪽 참조), 사실 이 경우 문제가 삼인칭 시점의 소설이 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이 텍스트 안에서 자신을 부르는 고유명사를 한 번도 드러내지 않고 단순히 '나'라고 지칭하는 경우, 이것은 오히려 저자와 주인공의 동일성이 언표 행위의 층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형태는 아닐까. 이 경우에 있어서 저자와 주인공이 반드시 같을 수는 없으며 그것이 바로 허구의 형식이 갖는 일종의 당연한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 만큼, 또한 여기서 저자와 주인공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가장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인식'의 형태는 아닐까. 이 가장 '기본적인' 층위에서의 문제는 사실 르죈이 자서전적 글쓰기의 여러 가능한 조합 형태를 제시하면서 "불명확한(indéterminé)" 것으로 분류하고 있는 "규약 부재(pacte=0)"의 상태, 즉 "2b"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원서 pp.28-29, 국역본 41-42쪽 참조). 개인적으로 볼 때, 르죈의 책을 구성해주고 있는 보이지 않는 핵은 바로 이 '규약 부재' 상태로서의 '제로 지점'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다(르죈이 제시하고 있는 분류의 도표(원서 p.28, 국역본 41쪽)에서 바로 이러한 '제로 지점'이 한가운데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이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이 역시 개인적인 인상이지만, 르죈은 자서전 장르의 '어느 정도 정돈된' 정의를 위해서 이 부분을 교묘히 뛰어넘었다는 '혐의'를 완전히 씻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결국 그는 이러한 종류의 텍스트가 속한 장르와 그 독해 방식에 대한 결정이 전적으로 독자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다소 '상대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

 

▷ Philippe Lejeune, Le pacte autobiographique, Paris: Seuil(coll. "Poétique"), 1975.
▷ Philippe Lejeune, Signes de vie. Le pacte autobiographique 2, Paris: Seuil, 2005.
▷ 필립 르죈, 『 자서전의 규약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

2) 그러나 이러한 텍스트에 있어서 독자가 그것에 관한 태도를 결정하게 되는 과정에 작용하는 요소는 과연 아무것도 없는가. 그것은 과연 그 자체로 '자유로운' 선택일 뿐일까. 이러한 질문을 통해 겨냥하는 것은, 자서전에 있어서 "아래 서명한 나(je soussigné)"(원서 p.19, 국역본 25쪽), 곧 서명의 문제가 중요한 만큼이나 텍스트의 성격과 장르에 대한 저자의 '선언'이라는 문제 또한 중요한 것으로 부각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저자가 자신의 텍스트를 '자서전'이라고 선언할 것인가 아니면 '소설'이라고 선언할 것인가의 문제가 바로 그것. 즉 이는, 저자 스스로가 독자에게 자신이 쓴 텍스트를 어떤 이름으로, 어떤 분류 기준 하에 공표하고 제시하는가에 관련된 텍스트 '외부적인' 문제인 것이다. 르죈도 물론 이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원서 pp.44-45, 국역본 66-67쪽). 이것은 곧 책의 출간 행위와 그 형식이 자서전 텍스트의 독서에 미치는 영향 관계에 대한 고찰이다. 그러나 르죈에게 있어서는 고유명사의 문제가 자서전 독서에 있어 보다 핵심적인 쟁점 사항이 되고 있다. 이러한 '선언' 또는 '공표'의 문제는 자서전의 독서 방식에 있어서 서명의 문제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제도적인 심급에 위치하게 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러므로 또한 자서전 장르는 텍스트 '외부'의 문제를 가장 도드라지게 노출하고 있는 문학 장르에 다름 아닌 것.

3) 그렇다면 만약 저자가 소설을 쓰면서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단지 '나의 인생 이야기' 같은 제목을 그 '소설'에 붙인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물론 르죈은 이러한 가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르죈의 분류법에 따르자면, 이 경우는 자연스럽게 2b의 항, 즉 저자에 의해서 독서의 방식이 방기되어 그 방식을 선택하는 일이 전적으로 독자에게 부여된 상황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성/성실성(sincérité)의 문제가 자서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진실성/성실성은 최종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장르의 '선언' 또는 텍스트 성격의 '공표'라는 문제와 항상 결부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 '자서전 문학' 연구의 대가,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

4) 그러므로 이러한 논의가 '역설적으로' 가리키는 지점은, 자서전의 문제가 비단 진실성/성실성뿐만 아니라 속임수의 '효과'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러나 르죈은 이 문제를 단순히 문학적 '사기'와 '위조'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간단히 넘기고 있다). 왜냐하면, 르죈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서전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허구(fiction)의 질서가 아니라 거짓(mensonge)의 질서"(원서 p.30, 국역본 43쪽, 강조는 원문)이기 때문이다. 허구의 질서 안에서 진실과 속임수의 구분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짓의 질서, 더 정확하게는 참과 거짓의 질서가 작동하는 장 안에서만 그 구분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자서전의 문제는 현실성(réalité)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성의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여기서 내가 특별히 방점을 찍고 싶은 부분은ㅡ르죈의 방점과는 반대로ㅡ바로 '허구의 질서가 아니라'는 표현인데, 이것은 곧, 어떤 텍스트에 자서전이라는 형태적 규정을 부여하는 행위가 다른 장르와의 관계 비교라는 작업을 떠나서는 결코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개인적인 생각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자서전이라는 '자기 규정'은, 결코 '독자적으로는' 생각될 수 없는, 곧 텍스트에 대한 '내재적' 분석의 방법으로써만은 해결될 수 없는, 일종의 '제도적'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서전의 문제는 그 자체로서보다는 오히려 소설이나 여타 장르와의 비교 하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믿게 만들기'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5) 자서전 안에서는 결국 속임수의 층위가 문제시된다. 자서전을 자서전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이론적으로 가능한 여러 기법들은 르죈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논외의 대상이다. 문제는 속임수라고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를 벗어난 곳에서 행해질 때, 곧 저자 자신도 '모르는' 속임수가 바로 그 저자 '자신에 의해서' 행해질 때인 것. 즉 의도적으로 짜여진 '믿게 만들기'의 구조와 기법을 그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작은 구멍 또는 틈새가 자서전 독해에서는 중요한 지점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속임수의 문제는, 그것이 '의식적인' 지점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무의식'의 문제이기도 한 것.

   

▷ Michel Leiris, L'âge d'homme, Paris: Gallimard(coll. "Folio"), 1973(1939¹).
▷ Michel Leiris, La règle du jeu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2003.

6) 덧붙여 둘 것은 『자서전의 규약』 국역본의 문제이다. 대부분 [역자가 생각하기에] '자연스러운' 의역의 방식을 취하고 있어 원문과 다소 뉘앙스 차이가 나는 부분들을 상당수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의 자서전에 대한 연구 부분을 번역에서 누락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역자는 레리스가 "한국 독자들에게 비교적 생소"하다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역자 후기, 423쪽), 역자 '자신이' 잘 모르는 부분만을 누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레리스의 저작들이 어서 국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댓글(4)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2-29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2-29 14:04   좋아요 0 | URL
너무 감사한 댓글입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겐 큰 영광이죠.^^

2008-03-01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3-01 11:33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 극장 문 앞에서 작곡가로 소개 받고 사카테 요지(坂手洋二)와 첫인사를 나누었다. 2회 공연이 있는 2008년 2월 20일 수요일의 저녁 공연, <블라인드 터치>가 상연되고 있는 산울림 소극장의 객석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공연 내내 그 관객들이 뿜어내는 고요하면서도 뜨거운 열기가 극장 안을 훈훈하게 메우고 또한 데웠다. 연극이 끝나고 바로 시작된 사카테와의 대화, 관객들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묻는 보편적인 질문에서부터 연극 속의 구체적인 대사들에 대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관극의 열기를 그대로 대화로 이어갔다. 오랜만에 목격하는, 여유로우면서도 밀도 있는 광경이었다.

▷ 사카테 요지(坂手洋二), 도쿄(東京)에서의 한 인터뷰.

2) 사실 내가 사카테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따라서 당연하게도, 던지지 못했던 것인데, 무엇보다도 관객과 작가와의 저 만남이 지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는' 일이 싫었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작가의 말'을 옮기면서도 확인했던 바 있듯이(http://blog.aladin.co.kr/sinthome/1914196), 사카테 요지는 일본 사회에 대한 철저한 '자기 비판'으로 무장하고 있는 작가이다. 반면 동시에 사카테는 자신의 작품이 일본 내에서의 공연보다 오히려 외국 공연을 통해서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 이 두 입장은 내게는 일종의 '발전적 모순'이다. 그렇다면 사카테 자신이 말하는 이 연극의 의미, 곧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혹은 어려움'이라는 일종의 보편적인 주제는, 예를 들어 전공투, 천황제, 전향 등 지극히 일본적인 문맥에서 이루어진 여러 운동들과 제도들과 정세들의 세부적인 사항에 무지한 대부분의 한국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곧, 공통의 구체적인 특수성 혹은 역사성을 결여하고 있는ㅡ그리고 사실 어쩌면 이렇듯 결여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ㅡ'외국' 관객에게 보여지고 느껴지는 저 주제의 '보편성'이란, 이러한 특수성과 역사성을 결여하고서도, 과연 여전히 '연극적 보편성'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이미 말한 것처럼, 벌써부터 그 대답이 정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정답'이 미리 정해진 물음이라고 할까(각자 자신이 외국 관객 앞에 선 작가라고 상정하고 대답해보라, 모두 '정답'을 도출할 수 있을 테니까). 아니, 무엇보다도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어쩌면, 이러한 질문이 과연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기는 한 걸까, 그렇게 묻는 질문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 이른바 '전공투(全共鬪)' 세대, <블라인드 터치>의 주인공들은 '사실' 이 세대에 속한 인물들이다.

3) 이러한 질문으로써 내가 겨냥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보편성에 대한 일종의 '신화'에 다름 아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외국인'으로서의 한국 관객에게는 하나의 보편적 '연극 예술'로 다가갈 수 있을 <블라인드 터치>는, 어쩌면 일본 국내에서는 '예술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적 사건'일 수 있다(정치적 사건은, 때론 주목을 받기도, 때론 무시되기도 한다). 번역극을 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내 개인적인 딜레마 내지는 아포리아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번역극이 자신의 본래 '국적' 안에서 지니고 있는 '정치성'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의 '예술성'으로서만 느끼고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 바로 그것. 우리는 '당연히' 하나의 연극 속에서 보편성을 바라고 기대하며 보편성을 구하려고 시도하며 또한 보편성을 필요로 하고 요청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하나의 연극이 지닌 '국적' 또는 그러한 '국적'에서 오는 역사성이 이해되지 못하고 추상되어버린 보편성이란, 일종의 '감정이입의 번안' 내지는 단순한 '구조의 대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얄궂은 것은, '소통'이란 여기에서도 또한 존재한다는 것,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말해서, 어쩌면 가장 넓은 의미에서 [외국어의] '소통'이란 바로 이러한 간극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보편성의 획득이란 어쩌면 구체성과 특수성을 추상하고 사장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이 지극히 '외국적'이고 '이국적'인 어떤 상황에 대한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는 것. 노파심에서 부연 설명을 하자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구체성과 특수성을 추상한 결과가 바로 보편성이라고 말하는 저 지극히 '보편적인'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보편성이란 개념 자체가 '외부'의 존재를 상정할 때에만, 곧 '이국'과 '외국'이라는 타자, 그리고 그러한 '외국[어]들 사이의 소통과 간극'이라고 하는 실로 '번역적인' 상황을 전제할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일본 내에서보다 외국에서 나의 연극이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카테의 말은, 사실 바로 저 일본 사회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과 '구체성'을 외국인인 한국 관객이 더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의 한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찬사임과 동시에 하나의 저주이다. 왜 찬사인가? 그것은 표면적으로 한국 관객의 '예술적 이해력'에 대한 상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 왜 저주인가? 그것은 '정치적 몰이해'를 '예술적 감동'으로 손쉽게 치환할 수도 있는 은폐된 무지를 상찬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이해하고 내재화하려는 나의 이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실천은, 아니 오히려 언제나 바로 이 '실천' 앞에서 머뭇거리게 되는 나의 이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현기증'은, 내게 이렇듯 언제나 저 착종된 '역사성'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조금 더 넓은 범위에서, 우리가 우리의 '근대'를 생각할 때, 그리고 그 '근대'를 생각하며ㅡ나로서는, 언제나ㅡ일본과 한국을 서로 연결시키게 될 때, 내가 느끼게 되는 이러한 '위화감'이 나만의 것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실로 간절하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역설적으로 이러한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나의 저 질문과 의문과 잡설들은, 오히려 '관객과의 대화'라는 형식에는 여전히 부적절한, 어쩌면 '산통을 깨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을 것. 소위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런 잡설들을 계속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닌가?

▷ <블라인드 터치> 한국 공연의 한 장면, 배우 윤소정(右)과 이남희.

4) 2월 22일 금요일 저녁 공연 이후, 사카테는 한 번 더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갖는다. 나는 거의 언제나 이러한 대화와 만남의 순간이, 단순한 '이벤트'로서만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이 두 번째 대화에는 개인적으로 다른 공연이 있어 참석하지 못할 테지만,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이전에, 어제는 특히 두 배우에게 많은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는 심정을 고백하고 싶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연극이 '배우의 연극'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물론 연극은 또한 '연출의 연극'이기도 하고, 특히 내게는 '음악의 연극'이기도 하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yoonta 2008-02-21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편성은 외부성을 바탕으로 성립할수도 있다는 이야기 공감이 가네요. 다만 보편성이란 구체성과 특수성을 추상했을때에만 성립하기도 하지만 보편성 속에서 발견되는 특이성/단독성singularity란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변종적 특이성들을 많이 생산하게하는 작품들을 이야말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와같은 타자간의 번역적 소통 상황들이 람혼님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나 봅니다. 비록 님은 괴로우시겠지만 저처럼 무덤덤한 사람들에게는 람혼님처럼 현기증일으키는 예민한 해설가분들이 필요하답니다.^^

그나저나 이 연극 한번 보고싶어지네요. 람혼님 음악도 감상하러 갈 겸 말이죠..

람혼 2008-02-22 15:22   좋아요 0 | URL
yoonta님이 '적확하게' 지적해주신 대로, 제 질문의 출발점 역시 저 보편성의 '단독성' 문제에 놓여 있다는 생각입니다. 저 '현기증'에는 약도 없는 것일 텐데, 아마도 '독으로 약을 삼아야 하는' 전형적인 상황 또는 증상이 아닐까 혼자 몰래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관극하신다면 큰 기쁨이자 영광이죠.^^

khagne_editeur 2008-02-2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흘러들어 왔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게 즐겨찾기를 해놓고 보고 있습니다.
자주 들리지는 않아도, 올때마다 힘이 되는 글이 많아서 즐겁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람혼 2008-02-22 15:25   좋아요 0 | URL
문득 개인적으로 그 '어떻게 흘러들어 왔는지도 모르는' 많은 우연의 만남들이 여러 소중한 인연들을 낳아왔다는 기억에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힘이 되는 글이라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