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비 메탈(Heavy Metal)의 효시(嚆矢)이자 정본(定本), 그리고ㅡ다분히 '헤겔적'으로 말하자면ㅡ헤비 메탈이라는 '자기의식'의 완성으로서의 절대적 '사제 유다(Judas Priest)'.
1) 많은 망설임 끝에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첫ㅡ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ㅡ내한 공연에 다녀왔다. 올림픽 체조경기장, 2008년 9월 21일 저녁 7시. 많이 망설이게 된 것은 '단지' 치러내야 할 여러 일들이 산적(山積)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나의 유년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이 전설적인 밴드의 내한 공연을 놓친다면 아마도 오랜 시간 후회하고 한참 동안 미련을 쌓아둘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충실하게ㅡ혹은 '불충하게'ㅡ따랐던 것.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ㅡ그러니까 아마도 '사후적으로(nachträglich)' 말하자면ㅡ그 선택은 지극히 옳았다고 할 밖에.
2) 공연장은ㅡ나를 포함해서ㅡ거의 광란의 도가니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 모인 관객들은 모두, 70~80년대부터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을 들어왔기에 그들의 공연에 가장 '목마르고 굶주렸을' 장년층에서부터 상당히 최근에 그들의 음악을 알게 된 젊은 층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이 전설적인 밴드의 실황을 보기 위해 몰려온 '광신도'들이었기 때문이다. 공연장 바깥에서부터 80년대 그룹 사운드 시대를 이끌었던 몇몇 낯익은 음악인들의 '들뜬' 모습도 목격할 수 있었다. 아마 그들 모두에게도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은 일종의 청소년기의 자산이자 추억의 한 자락이었던 것일 터.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후 "Metal Gods"의 첫 리프가 연주되자 공연장은 마치 불에 기름을 끼얹은 형국이 되었다! 말하자면 메탈 신(神)들의 강림(降臨)이 비로소 개시되었다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첫 곡이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도 '지금 내 눈 앞에서 정말로 주다스 프리스트가 실제 연주하고 있는 게 맞나'하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던 나도 "Metal Gods"의 연주가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슬슬 이들의 강림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 자체 역시나 '명불허전'이라는 생각 한 자락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곧 이어 이들의 최고 명곡 중의 하나인 "Breaking the Law"가 연주되기 시작할 때 공연장은 말 그대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모든 소절을 따라 '합창'하는ㅡ'싱얼롱(sing-along)', 요즘은 '떼창[-唱]'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쓰는 경향이 있지만ㅡ'굶주린' 관객들이 쏟아내는 이 엄청난 에너지에 아마 주다스 프리스트 멤버들도 많이 놀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나는 감동 때문에 정말 거의 울 뻔했다). 한 가지 지적할 부분은, "Sinner"의 연주는 개인적으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선곡이었다는 사실인데, 초창기 곡들을 거의 들을 수 없는 그들의 최근 공연 선곡에 비추어 봤을 때 이는 다분히 한국 관객들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나 짐작해본다(더불어 "The Ripper"의 연주도 기대했으나 이는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 2004년 그리스 공연의 한 장면(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이번 내한 공연의 분위기가 이 사진의 기운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상징' 보컬리스트 롭 핼포드(Rob Halford)의 카리스마는 이순(耳順)의 나이에도 여전히 강력했다.
3) 공연 중반, 비교적 최신의 곡들이 연주되었을 때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이 관객들의 미친 듯한 에너지는 드디어 "The Hellion"과 "Electric Eye"의 접속곡이 다시금 포문을 열었을 때 새삼 폭발해버렸다. 본무대의 마지막 곡인 "Painkiller"에 이르자 그 에너지는 거의 최고조에 이르러 관객들은 하나의 거대한 '뇌'이자 '몸'이 된 듯한 인상으로 객석 전체로 넘실거렸다. 일대 장관이었다. 이어 다시 등장한 핼포드는 저 예의 유명한 '오토바이 의식(ritual)'을 선보이며 재차 관객의 마음에 불을 당겼다. 핼포드는 그 중간에 태극기를 들고 나왔는데, 헤비 메탈 음악이 '어쩔 수 없이' 정치적으로 우익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음악임을 상기해볼 때 '국기(國旗)'라는 상징은 평소 같았으면 내 신경을 아주 많이 거스르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내게 이는 오히려 '너무나 늦게 찾아온' 한국의 관객들에 대한 일종의 사과와 감사의 인사처럼 느껴졌다. 핼포드가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했을 때 너무나 '당연히'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Hell Bent for Leather"에서부터 대미를 장식하는 이들의 '영원한' 마지막 곡 "You've Got Another Thing Coming"에 이르기까지, 채 아쉬움을 다 씻지 못한 관객들은 그 모든 곡들을 한 소절 한 소절 따라부르며 '사제들의 제의'에 격렬하게 임하는 모습이었다. 후반부 공연에서 이 모든 명곡들과는 별개로 가장 압권으로 느껴졌던 것은 역시 "The Green Manalishi"의 연주였는데, 주다스 프리스트 전성기 모습의 일단을 살짝 목격할 수 있게 한 실황의 백미였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이다. 'The Priest will be back~!'이라는 핼포드의 한 마디가 가슴에 오래 남는다. 꼭 그 말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한 자락, 곧 그들의 이 공연이 결코 '마지막' 내한 공연이 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 한 자락, 이곳에 소중히 남겨본다.
▷ 2005년 에스파냐 공연의 한 장면. 음향적인 환경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했던 이번 내한 공연에서도 글렌 팁튼(Glenn Tipton)과 K. K. 다우닝(Downing)의 트윈 리드 기타는 역시 여전히 아름다웠다.
4) 내가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을 처음 들었던 것은 11살 때였다. 귀가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처음 들었던 곡은 아마도 어느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Screaming for Vengeance"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밤에 불을 끄고 조용히 라디오를 켠 채 전영혁의 심야 방송을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하루 중 내가 만끽할 수 있는 '최상의' 시간이었다. 나는 곧 이 헤비 메탈의 '신세계'에 급속도로 빠져 들었고, 얼마 후 테니스 라켓으로 흉내만 내는 걸 만족할 수 없게 된 어느 날 클래식 기타를 한 대 장만해 독학을 시작했다. 그때는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국내 라이센스 LP가 대략 4~5천원 정도 하던 '낙원' 같은 시절이었는데(레코드 가게 아줌마에게 말만 잘 하면 3천원 정도에도 살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샀던 주다스 프리스트의 작품은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이었던 <Sad Wings of Destiny>였다. 어린 시절 들었던 이 앨범의 백미 "Victim of Changes"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미 그 시기에 이들의 '전매특허'인 트윈 리드 기타의 아름다운 화음과 이중선율, 그리고 전형적이고 공격적인 헤비 메탈 리프들이 완성되고 있었다. 나는 클래식 기타로 하루는 "로망스"를 치고 하루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리프들을 따라 치는 지극히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무뚝뚝하게만 보이던 아버지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슬그머니 선물해주신 전기 기타ㅡ이는 내 인생의 첫 전기 기타로서 삼익 악기의 'Vester' 모델이었다ㅡ를 내 두 손에 쥐게 된 날, 나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만화 <20세기 소년>이나 <BECK>에 등장하는 소년들의 어떤 특별한 날을 떠올려도 좋으리라). 이에ㅡ비유하자면ㅡ어제의 공연은 '추억'을 다시 반추하고 '전설'을 다시 확인한다는 의미에서 나에게는 너무나 뜻깊은 것이었는데, 주다스 프리스트의 내한 공연을 기념하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그들의 최고 앨범 8장의 목록을 만들어본다:
▷ Sad Wings of Destiny (1976)
"Victim of Changes"와 "The Ripper"를 수록하고 있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출세작'. 내가 이 앨범을 처음 LP로 샀을 때는 '금지곡'이 있던 시절이라 "The Ripper"는 누락되어 있었다(소위 '빽판' 시절의 추억이 슬그머니 밀려오기도 한다). 헤비 메탈의 '전형'을 정립하기 직전, 다소 '풋풋한' 정취를 머금은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 Stained Class (1978)
명곡 "Exciter"와 동명 타이틀 곡을 수록하고 있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4집 앨범. 마치 클래식 음악에서 9번 교향곡에 대한 일종의 '징크스'가 존재하듯, 하드 록/헤비 메탈 음악에서는 밴드의 4집 앨범이 최고의 음반이라는 '통설'이 존재해왔다. 이 앨범을 그들의 최고작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ㅡ게다가 이 앨범에 수록된 "Better by You Better than Me"가 어떤 청소년의 자살을 부추겼다는 부모들의 소송으로 인해 주다스 프리스트는 법정에 서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ㅡ바로 다음 앨범 <Hell Bent for Leather>로 가는 가교 역할을 하는 형식을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게 예나 지금이나 이 앨범의 압권은 "Beyond the Realms of Death".
▷ Hell Bent for Leather (1979)
주다스 프리스트의 정체성(identity)을 확립시킨 대표작 중의 하나(번쩍거리는 검은 가죽옷을 입은 헤비 메탈의 이미지는 여기서 완성된다). 헤비 메탈의 송가가 되어버린 동명 타이틀 곡은 물론이고 한국 팬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Before the Dawn", 공연의 백미와 절정으로 연주되곤 하는 "The Green Manalishi" 등의 곡들을 수록하고 있다.
▷ British Steel (1980)
명실 공히 주다스 프리스트의 대표작. "Breaking the Law", "Metal Gods" 등 헤비 메탈 팬이라면 누구나 제목만 들어도 바로 아는 곡들을 수록하고 있는, 주다스 프리스트를 확고히 '메탈의 신'으로 정립시킨 헤비 메탈의 교과서와도 같은 앨범이다.
▷ Screaming for Vengeance (1982)
개인적으로 이 앨범과 그 다음 작품인 아래 <Defenders of the Faith> 앨범은 일종의 '배다른 쌍생아' 같은 연작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주다스 프리스트의 최고작으로 꼽고 있다. 이 두 앨범에서 주다스 프리스트는 그들이 헤비 메탈을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 어느 앨범보다도 먼저 일청(一聽)을 권한다. 동명 타이틀 곡의 유려하고도 직선적인 형식미와 완성도는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앨범의 시작을 여는 접속곡 "The Hellion"과 "Electric Eye", 그리고 "Riding on the Wind"와 "You've Got Another Thing Coming" 등 그들의 '대표곡'이자 '최고작'들을 수록하고 있다.
▷ Defenders of the Faith (1984)
메탈리카(Metallica)와 메가데스(Megadeth) 등으로 '분화'한 소위 스래쉬 메탈(Thrash Metal)의 효시를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개인적으로 평가한다. 가속을 밟은 읊조림과도 같은 샤우트 창법이 인상적인 "Freewheel Burning"도 압권이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은 헤비 메탈의 고전 "The Sentinel"을 비롯하여 명곡 "Love Bites", "Eat Me Alive" 등을 수록하고 있는, 말하자면 '버릴' 곡이 하나도 없는 '꽉 찬' 앨범이다.
▷ Painkiller (1990)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헤비 메탈의 또 다른 고전이 되어버린 동명 타이틀 곡으로 가장 유명한, 명실상부 주다스 프리스트의 90년대를 대표하는 음반이다. 롭 핼포드의 지치지 않는 고음역의 창법, 드러머 스콧 트래비스(Scott Travis)의 가입ㅡ주다스 프리스트의 '약점'으로 자주 언급되곤 하던 드러머의 '부재'는 트래비스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었는데ㅡ으로 더욱 속도감이 붙은 이들의 강력하고 아름다운 헤비 메탈 리프들 속에서, 말 그대로 '어두운 불꽃'이 폭발적으로 작렬한다.
▷ Angel of Retribution (2005)
한 동안 롭 핼포드가 빠진 상태에서도 주다스 프리스트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핼포드가 부재하는 주다스는 진짜 '주다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 앨범은 주다스 탈퇴 이후 90년대 중반 자신의 밴드 Fight와 Halford 등을 통해 메탈 음악의 또 다른 행보를 모색하던 롭 핼포드가 다시금 주다스로 회귀하여 만들어낸 일종의 '부활'과도 같은 작품이다. 오랜만에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명곡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는 앨범인데, 개인적으로는 "Hellrider"를 이 앨범의 최고 명곡으로 꼽고 싶다. 빠른 속도감에 덧붙여, 이들의 '전매특허'라고 말할 수 있는, 글렌 팁튼과 K. K. 다우닝의 트윈 리드 기타가 뿜어내는 아름다운 화음과 격정적인 이중선율을 실로 오랜만에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해낸 곡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 외에도 "Deal with the Devil", "Revolution", "Angel" 등 놓치기 아까운 백미들을 가득 담고 있는 앨범.
이렇게 간략하게나마 돌이켜보니, 이들의 거의 40년 가까운 메탈 음악으로의 '외길' 정진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내가 이 자리를 차용해 더욱 높이 평가하고 싶은 멤버는 베이시스트 이언 힐(Ian Hill)인데, 그는 언제나 주다스 프리스트의 가장 구석 자리에서, 결성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밴드가 잘 될 때나 어려울 때나, 언제나 '신념'을 잃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모든 멤버에게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이언 힐의 그 아름다운 '뚝심'에 새삼 큰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싶은 소중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이다.
5)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그 앞에서 우연히 선배 배우 한 분을 만났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공원 산책에 나온 길이었다.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공연이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했더니, 주다스 프리스트였구나... 나도 고등학교 때 정말 열심히 들었는데..." 음악을 연극만큼이나 사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 선배의 말 한 마디가 나를 슬며시 미소 짓게 했다. 이렇게 다양한 세대가 주다스 프리스트라는 한 밴드의 공연에 모여 제 각각 그 음악과 함께 했던 자신의 추억과 열정을 소진하고 분출하며 다시금 기억하고 또한 소중히 보듬어내고 있었다. 공연 자체보다도, 그러니까 나의 유년기 역시 지배했던 이 '전설'의 밴드가 이땅에서 공연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각각 그리고 또한 모두 함께 만들어내고 있는 저 풍경이 나에게는 더욱 감동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나 늦게 도래한' 이 주다스 프리스트의 내한 공연에 특별히 더 감사하는 이유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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