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말 그대로, '회고전' 한 자락.

중학교 때 그렸던 몇 장의 그림들, 사실 거의 잊고 있었는데, 실로 오랜만에 베란다 정리를 하다가 발견하고 말았다(아니, '발굴하고 말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밀려온다. 그래서 달콤하면서도 고통스럽다. 예전에는 그림 그리는 걸 참 좋아했는데, 요즘은 너무 오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말하자면, 다시 그리고 싶은 거다.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그림에 대해 품고 있던 그때의 열정들도 다시 되살아나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회한도 밀려오고,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저 그리고 싶은 거다. 

 

   

▷ 람혼, <담배를 쥐고 있는 노인>(1991).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렸던 그림으로 기억하고 있다. 화면 좌측 상단의 커다란 붉은 손톱(?) 같은 것은 붉은 그믐달을 그린 것이다. 기억 속에만 어렴풋이 존재하던 그림인데, 무엇보다 이 그림을 '발굴'할 수 있어서 가장 좋았다고 말해야겠다. 이 그림을 그렸던 당시 김호석 화백님이 이 그림에 대해 한 마디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말씀의 정확한 내용은 지금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중학생이 이런(?) 그림을 그린 걸 신기하게 생각하시면서도 왠지 안쓰럽게(?) 여기신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때의 내 느낌이 정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김호석 화백님은 그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약간은 착잡한 표정을 머금으셨던 것도 같다. 당시 화백님의 작품들은 실사(實寫) 화면을 한가득 채운 슬픈 은유들로 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아픔의 느낌은 내가 당시 김호석 화백님의 작품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계기이자 이유이기도 했다. 이 그림에는 어쩌면 그런 영향들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 람혼, <無題>(1991년경).

 
역시나 중학교 때 그린 그림. 커다란 탱화 한 점을 그려보고자 시작했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남은 작품이다. 실로 오랜만에 '발굴'하고 정말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고운 주황색 종이가 완성되지 못한 그림을 곱게 숨긴 채 그렇게 곱게 접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펼치고 사진을 찍었다, 어둡게, 어두운 마음으로. 

 

 

▷ 람혼, <침 흘리는 여인>(1990년경).

 
이것도 중학교 때의 그림. 데생 시간에 시키는 그림은 안 그리고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스스로 평가해보자면, 전체적으로 피카소(Picasso)의 영향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그림이라고 하겠는데, 왜 의자에는 저렇게 많은 금들이 가 있는지, 왜 저렇게 빈틈없이 균열되어 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 람혼, <야, 우리도 돈 좀 벌자!>(1991년경).

 
위의 <담배를 쥐고 있는 노인> 그림과 비슷한 시기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오른편에 '야, 우리도 돈 좀 벌자!'라는 글이 쓰여 있다. 난 그때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알 수 없다. (또한 '美史'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로 썼던 것일까? 모르겠다. 그 시절의 아호였던가?) 갱지에 붓 가는 대로 마구 휘갈겼던 그림, 그래서 오히려 더 소중하다, 순간을 담고 있어서. 섬섬옥수, 악의와 허약함을 동시에 가득 담고 있는 듯한 손가락들이, 지금에 와서 뒤늦게, 아찔하고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 람혼, <얼굴-연작>중 일부(1992년경).

 
중학교 3학년 때쯤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그때 난 점점 '표현주의적'이 되어 가고 있었나 보다. 이때쯤 '얼굴 연작'을 구상했던 기억이 난다. 다양한 모델들을 바탕으로 변조된, 다소 위악적이고 거친 화면 구성을 통한 몇 백 장의 얼굴들을 그리는 연작을 구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결국 완성은 하지 못했다. 이 연작의 일부들도 모두 미완성으로 남은 것들.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 얼굴들은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 하지만 찾을 수는 없다, 그저 그렇게 있을 뿐. 

 

 

▷ 람혼, <莊子, 應帝王, 第七에 대한 한 해석>(2006).

 
이건 2006년 첫날에 쓰고 그린 것인데, 현재 내 서재의 한쪽 벽에 부착되어 있다. 말하자면 『莊子』의 한 장면에 대한 작은 형상화를 의도했던 것. 그러나 그림은, 글은, 언제나 그 의도를 가볍게, 그러나 또한 무겁게 벗어난다. 이성복 식으로 말하자면, 입이 없는 것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기관 없는 신체들, 그런 것들(사실 이 모든 것들은 말이다, 말일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구멍 뚫리고 찔리고 당하는 것들, 그런 것들(그러나 말은, 여기서, 말의 무게를 벗어난다, 혹은 말이 아닌 것의 무게를, 마치 말처럼, 덧입는다). 돌이켜보면, 이렇듯 20대 때의 그림은 저 10대 때의 그림보다 뭔가 좀 더 '미니멀'해진 그런 느낌이다. 30대의 그림은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그게 궁금하다. 그러니 다시 그릴 수밖에.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모든 그림들을 실로 오랜만에 갑자기 베란다에서 '대량 발굴'하고 나니, 그리고 이렇듯 들쑥날쑥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들로 구성된 때아닌 회고전(?)을 열고 나니, 정말 새롭게 그림을 시작해보고 싶은 욕망이 치솟는다.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 가능하다면, 치열하고 탐욕스럽게, 어쩌면 그저 탐욕스럽게만, 그렇게, 지금은 다만 그러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불가능하겠지만, 이라고 말하지만,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불가능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을 남기며. 노파심에서 다시 말하자면, 이는 '불가능은 없다'는 식의 순진한 희망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어쩌면 오히려 기쁜 절망 같은 것에 가까울 터.

— 襤魂, 合掌/合葬하여 올림.

 

 

 

 

알라딘 서지 검색을 위한 이미지 모음: 

 

 

 



 
 
2011-05-09 10:58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9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9 12:13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9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9 14:56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0 0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1-05-11 21:21   댓글달기 | URL
진정 이것이 중학생의 그림이었단 말입니까? ㅎㅎ

람혼 2011-05-12 22:48   URL
뭐, 부끄럽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멀리 출장을 가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잘 돌아오신 건가요? 남극! ^^

푸른바다 2011-05-14 16:49   URL
첫번째 그림을 보고 든 인상을 말씀드리면, 담배를 피다가 선생님께 들킨 학생의 심리가 표현되있는 것 같네요.^^ 담배피다가 들키는 순간에는 내가 어른이었으면 하는 아쉬움, 벌거벗겨진 당혹스런 느낌, 동정을 바라는 마음이 복합적으로 느껴지겠지요. 어른이었으면 하는 것은 '노인'으로, 벌거벗겨진 당혹스러움은 수세적인 노인의 표정과 자세 그리고 벌거벗은 웃통으로, 동정심은 노인 앞에 놓인 동냥 그릇으로 표현된 것 아닌가요?ㅎㅎ 그리고 이런 복함적인 감정을 '실사'라는 수법을 통해 그림의 사실성을 강조함으로써 숨기는 것이 이 작품의 장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세번째 작품 "침흘리는 여인"의 경우는 침이 다른 신체부위들 즉 머리카락, 귀 등과 같이 신체와 분리되는 양상이 아닌 일체되는 것으로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사물의 존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인습적 태도를 중지하고 그것을 괄호 안에 넣는 "현상학적 판단 중지"를 수행하고자 하는 치열한 의지가 드러나고 있는 것 같군요.^^ 신체는 의자와도 분리되지 않는데 의자에서 보이는 균열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전제하는 소박한 존재론의 취약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침흘리며 의자에서 자는 여인은 우리의 인습적 태도에서는 매우 천박한 것으로 인지될 수 있으나 여인의 표정에 나타나는 행복한 표정은 이것 역시 인습적 편견일 수 있다는 주제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탱화는 이러한 인식론적 단절에서 느껴지는 고독감을 불교의 무차별적이고 정갈한 세계에 대한 지향을 통해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를 그린 것이요, "야 우리도 돈좀 벌자"는 불교의 정갈한 세계를 동경하다가도 이내 냉혹한 현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잠에서 막 깬듯한 표정, 말라빠진 신체 등등을 통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네요.^^ 제 생각에 美史는 아마도 '앗싸'를 나타낸 것으로 추측됩니다.^^ 美-> 아름다움 -> '아'를 취하고 史는 사 ㅎㅎ 앗싸의 가벼움을 한자를 통한 음차로 치환함으로써 승화시키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즉 '앗싸'는 현실의 냉혹함을 자각하는 순간에 대한 감탄사로 보입니다.^^

결국 이 그림들은 람혼님의 중학교 학창시절의 방황을 상징하고 있는 흔적들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의 완성되지 못한 그림은 그 방황을 최종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 같네요.^^

람혼 2011-05-14 13:54   URL
이 놀라운 정신분석적 해석에 읽는 내내 너무 즐겁게, 크게 웃었답니다! ^^
특히 미사에 대한 해석은 정말이지...! 아싸! ^^
저는 '美史'가 혹시 'mass/messe'가 아닐까도 생각했죠.
그런데 요약하고 나니, 너무나 우울하고 문제 많은 중학생이었군요. 크하하! ^^

푸른바다 2011-05-15 12:20   URL
ㅎㅎ 큰 근거 없이 즉흥적으로 해본 해석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겠지요. 저자의 죽음이라는 바르트의 말을 새기며 사는 요즈음입니다. 사실 담배는 구체적으로 피는 담배라기 보다는 이미 그 당시 정신이 어른만큼 성숙해 있었음을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물리적 나이나 외모는 어린이인데 마음은 이미 어른인 복잡한 심경이 그림에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람혼 2011-05-21 16:45   URL
그때도 피웠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

푸른바다 2011-05-23 14:16   URL
안 피우셨었나요?^^

람혼 2011-05-25 15:17   URL
네, '그때'는 안 피웠어요.^^

2011-06-13 12:25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4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1-06-26 14:16   댓글달기 | URL
김호석 화백님의 작품집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와우~ 란 말을 먼저 하고 싶네요. 감정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과연 람혼님만의 세계관이 가득 들어있는 그림이네요. 중학생때 저 멋진 그림을 그리셨다니요. 그림을 들여다보는 관객들에게도 한아름 영감을 안겨주는 그림같애요.
배란다가 정말 '유적지'로군요! 저런 멋진 작품들이 '대량발굴'되는 곳이니까요. ㅎㅎ '회고전' 잘 봤습니닷! 전시회를 하시게 되면 꽃다발이라도 들고 찾아뵙고 싶어집니다. ^^

람혼 2011-07-06 12:33   URL
김호석 화백님의 작품집을 갖고 계시군요.^^ 저도 어릴 때 너무 너무 좋아했던 작가이십니다. 더욱 반갑습니다, 달사르님.^^ 베란다는 유적지라기보다는 거의 폐허죠, 요즘에는 거의 정리를 다 했지만요. 기회가 있을 때 다른 회고전(?)도 한번 다시 열어보겠습니다. 세심하게 관심 가져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프리트 2011-07-06 13:39   댓글달기 | URL
람혼의 과거를 기억하겠습니다.

람혼 2011-07-09 02:03   URL
감사합니다. 저는 그 과거와 현재 사이에 끊임없이 다리를 놓겠습니다.

책사랑 2011-07-14 10:59   댓글달기 | URL
이메일 보내놓았습니다. 선생님!

람혼 2011-07-20 15:14   URL
앗, 어떤 이메일인지요...?

책사랑 2011-07-21 16:13   댓글달기 | URL
스티글러 번역관련...

2011-07-23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16:44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한국연극』 2009년 9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역시나 뒤늦게 옮겨놓는다. 이 글에서 내가 문제 삼고자 했던 것은 역시나 지극히 역설적인ㅡ그러므로 내 경우에 있어서는 대단히 '일반적인'ㅡ주제인데, 이 주제는 이하의 글 안에서 그만큼이나 역설적인 하나의 모토로 요약되고 있다. "정적(靜寂)의 비명, 다성(多聲)의 침묵"이 바로 그것. 말하자면 나의 질문은, 연극음악 안에서, 그리고 연극음악을 통해서, 소리 없는 비명은 어떻게 들리게 되는가, 그리고 웅성거리는 침묵은 또한 어떻게 들리게 되는가, 하는 일견 모순적인 문제들인데, 나는 이러한 지극히 역설적 형식의 질문들이 연극음악을 위한 핵심적인 물음들이 될 수 있으며 또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생각'한다는 데에 아마도 나의 가장 큰 '역설'이 있을 것이다. 연극음악은 '기형적 공감각'의 산출을 목표로 해야 하며, '연극적 실재'를 [찰나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추구하는 연극음악의 '역설적 존재론'임과 동시에 '이상적(理想的/異常的) 방법론'이기도 하다. 고로, 환면(幻面)을 어떻게 내파(內破)할 것인가.

2) 내 글을 읽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기대되는 어떤 역설적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사족(蛇足)이 아니라 일종의 사두(蛇頭)를 붙여보자면, 나는 얼마 전에 김온 작가 덕분에 새러 케인의 「4. 48 정신이상」의 불역본을 구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는, 이하의 글에서 내가 문제 삼고 있는 영어 원문과 독일어 번역에 '임상적 증례'를 하나  더 덧붙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불역본에서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이 옮겨지고 있었다: "la capture/ la brûlure/ la rupture/ d'une âme" 이것이야말로 실로 최고의 번역적 '사치'ㅡ혹은 최고의 번역적 '무위'ㅡ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상황을 보다 적극적으로, 곧 '[연극]음악적'으로 다시 '번역'해보자: 그러므로 문제는 '리듬'인 것이다, '의미'가 아니라. 또한 문제는 '사유의 전이'인 것이다, '주제의 이식'이 아니라.

(2010. 2. 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소리 없는 비명은 어떻게 들리는가
— '기형적 공감각'으로서의 음악과 '연극적 실재'

 

최 정 우 (작곡가/번역가)

 

 

Maurice Blanchot, Le livre à venir,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86[1959¹].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가 말하듯, 창조적인 경험의 일기는 그 은밀한 움직임이 심화될수록 "추상성이라는 비개인성(l'impersonnalité de l'abstraction)"에 접근하는 경향을 보입니다(『도래할 책(Le livre à venir)』). 제가 연극 안에서 음악을 생각하는 방식, 혹은 저 추상성의 음악적 '번역어'로 즐겨 선택하는 구절은 '정적(靜寂)의 비명, 다성(多聲)의 침묵'입니다. 이것은 어떤 일반적 사실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제가 음악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으로 지니고 품게 되는 일종의 다짐이자 고백이기도 합니다. 비명은 소리 지르지 못한 채 속으로 파열하고, 침묵은 여기저기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다른 목소리로 울려옵니다. 하지만 물론 말은 음악이 아니고 음악 또한 말이 될 수 없겠죠. 하지만 음악과 연극은 지극히 '번역적'인 관계 안에 놓여 있습니다. 가장 극명한 예를 하나 들자면, 우리는 새러 케인(Sarah Kane)의 희곡 「4. 48 정신이상(4. 48 Psychosis)」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the capture/the rapture/the rupture/of a soul." 저는 이 구절 앞에서 일종의 '번역 불가능성'을 감지하게 됩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 말들은 '옮겨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여기서 말하는 '번역 불가능성'이란 단순한 번역상의 좌절감이나 당혹스러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근대와 현대, 유럽과 아시아, 혹은 지금의 이곳과 그때의 저곳을 가르는 묘한 '현기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을 되씹고 곱씹고 있는 저의 눈에 이 문장에 대한 독일어 번역("die Verhaftung/die Verzückung/die Zerreißung/einer Seele")은 하나의 사치로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구어(印歐語)와 알타이어 사이의 간극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 구절에 대한 번역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한국어가ㅡ독일어와는 다르게ㅡ그 구절의 선율과 리듬을 '번역'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물론 그 逆도 마찬가지입니다). 

 

       

Sarah Kane, Complete Plays, London: Methuen, 2001.
Sarah Kane, Sämtkiche Stücke, Hamburg: Rowohlt, 2002.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러한 불일치와 어긋남 속에서 연극과 음악 사이의 관계가 지닌 독특한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연극 안에서 음악은 언제나 넓게는 이러한 '번역'과 '번안' 사이를, 좁게는 '독주'와 '반주' 사이를 오고갑니다. 이러한 현기증의 해결은 요원하며, 우리가 흔히 '해방'이라고 부르는 것(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또한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되지 못할 겁니다. 결국 지금 여기의 문제는, 다시 한 번 새러 케인의 구절을 차용하자면, 일종의 "독주 교향곡(solo symphony)"을 만들어내는 일,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단성의 합창'을 배반하고 위반하며 그것을 '다성의 침묵'으로 은밀하게 확장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소리 지르지 않는 비명', '다성의 단선율'이라는 지극히 역설적인 표현은 어쩌면 '불가능한 번역'으로서의 연극음악의 자리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연극음악은 바로 이러한 '불가능'의 조건으로부터 비로소 '가능'해지는 무엇입니다. 연극음악은 무엇보다 연극에 대한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그 어조와 선율과 리듬을 어긋나게 옮겨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하나의 역설적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의 현기증: <4. 48 정신이상>의 한 장면.

 

장 주네(Jean Genet)의 연극 <발코니(Le balcon)>을 떠올려보죠. 그 작품의 장소를 이루는 매음굴, 그 공간의 바깥은 없습니다. 실제의 혁명도, 실제의 여왕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 존재라는 것이 고집스럽게 '실존'만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이 여전히 순진한 솔직함으로밖에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그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실의 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 축조된 이 고급스러운 매음굴 속에서, 오직 그 안에서만 그렇게 존재한다는 뜻일 겁니다. 진짜 없는 가짜, 원본 없는 모사. 세상의 모사화(模寫畵)인 이 매음굴은 자신의 원본을 모르는 공간입니다. 이 공간은 세상의 '거울'이자 욕망의 '텔레비전'으로 기획되었지만, 그 환면(幻面)이 비춰 보여주는 어떤 세상이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온전한 세상, 어쩌면 그 밖에서는 어떤 것도 실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매음굴 안에서 욕망되고 있는 저 모든 이미지들은 언제나 실존의 지위를 초과하고 잠식합니다. 여기서는 오히려 그러한 이미지가 '욕망의 수요'를 조절하고 '실존의 가격'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지표로서 기능하는 것이죠. 영원히 반복해서 들려오는 연극 속의 저 총탄과 폭탄의 소리들은, 그래서 단순한 폭발(explosion)의 소음이 아니라 어떤 내파(implosion)의 징후들이기도 합니다. 

 

 

Jean Genet, Le balcon, Paris: L'Arbalète, 1983.

 

인물들이 매음굴 안에서 펼치는 놀이는 주인과 노예의 은밀한 변증법을 따르고 수행합니다. 이들의 '가학-피학(SM)' 관계가 의미하는 것은 '사드(Sade)'와 '자허-마조흐(Sacher-Masoch)'의 이름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노예(Slave)'와 '주인(Master)'의 이니셜일 겁니다. 그곳에서 사고파는 것은 단순한 성(性)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 진짜 몸이 아닌 기호(sign)로서의 몸이며, 그들은 그 기호와 이미지를 소비하고 유통시키면서 욕망이 언제나 무엇보다 타자(他者)의 욕망임을 증거하고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무대는 욕망의 시장인 매음굴인 동시에 '죽음의 왕궁'이자 '삶의 감옥'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이미지 속에서 죽음의 '절대성'으로 나아갑니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존재, 이는 주네가 이미 『장미의 기적(Miracle de la rose)』(1946)에서 아르카몬에 대한 동경과 그와의 '신성한' 합일을 통해 보았던 악(惡)의 절대성에 대한 또 하나의 변주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향유하는 놀이는 무엇보다도 죽음의 놀이이며, 이 놀이는 때로는 다른 이름을 달고 때로는 다른 역할의 의상을 입고 영원히 반복되는 것입니다. 음악과 연극 역시 이러한 '놀이' 안에 위치합니다. 그 안에서 음악은 연극의 '다른 이름', '다른 의상'이 되고자 합니다. 

 

 

▷ 환면의 환면: <발코니>의 한 장면.

 

따라서 연극 속에서 일어나는 혁명이란 어떤 직선적인 전복이나 찬탈 또는 일회성의 단절이 아닙니다. 혁명은 오히려 하나의 갱신(更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차이를 지어내며 계속 반복되는 나선형의 순환 구조 속에 삽입된 하나의 후렴구일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절망'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오히려 그 반대이지 않을까요? 혁명의 노래는 매번 다른 이름을 위해 그리고 매번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불릴 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발코니>에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기존 권력의 부패나 혁명의 진정성과 같은 지극히 '상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혁명과 권력이라는 이미지가 갖고 있는 환상성과 허구의 힘, 곧 '실재'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연극 속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구조를 비춰봅니다. 우리는 이미지를 쫓고 뱉고 먹고 싸며 살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잠을 자고 또한 이미지가 깨어나서 걸어 다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연극 속에서 이미지의 삶과 죽음을 봅니다. 환면의 환면, 이것이 바로 '연극적 실재'입니다. 어쩌면 연극음악은 이토록 '시각적'인 은유 속에서 지극히 '청각적'인 무언가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형식일 겁니다. 거울은 다른 거울 속으로 제 자신을 복제하고 연극은 또 하나의 연극을 배 밖으로 잉태합니다. 배보다 더 큰 배꼽, 배 밖으로 비집고 나온 또 하나의 배, 사실 그것은 어떤 유별난 기형이나 변종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미지의 '전형적'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연극과 음악은 이렇듯 배보다 더 큰 배꼽의 형태로, 그런 기형 아닌 기형의 모습으로, 서로를 향해,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무엇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감각의 영역에서 출발하는 음악이 저 블랑쇼의 말처럼 "추상성이라는 비개인성"을 획득하는 길은, 이렇듯 그 자신의 역설을 바로 그 역설 자체로 통과하는, 이미 그 자체가 가장 역설적인 하나의 길밖에는 없을 듯합니다. 소리 지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비명을 들리게 할 것인가, 혹은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소리를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이 지극히 역설적인 질문들은 연극음악이 언제나 근본적으로 묻고 품어야 할 청각적이며 시각적인, 따라서 지극히 공감각적인 물음이 되고 있습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푸른바다 2010-02-22 19:50   댓글달기 | URL
서재 구조를 많이 바꾸셨네요^^ 연극에 대한 글들이 많이 올라 온 것 같은데, 찬찬히 읽어 보려고 합니다. 연극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연극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연극에는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설은 잘 보내셨는지요? 시간이 되신다면 조만간 한번 뵙고 싶네요^^

람혼 2010-02-22 20:19   URL
네, 많은 분들이 이곳 알라딘을 떠나셨거나 떠나고 계신 와중에 생각한 바가 있어 대폭 개편해 보았습니다. 글이 많이 올라온 것은 아닌데요(그런 점에서 저는 '블로거'로서는 거의 0점에 가까운 인간인 듯합니다), 최근에는 연극에 관한 글 두 편과 음악에 관한 글 한 편을 올렸는데, 사실 이 '~에 관한'이라는 한정어는 제 글에는 다소 '과분'하거나 '과소'한 설명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연극에 많은 애정을 갖고 계시다니 저로서는 무척 기쁜데요. 아무쪼록 흥미롭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저 또한 조만간 뵙게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모딜리아니 2010-04-25 20:51   댓글달기 | URL
사라 케인의 광팬입니다.
저도 극작가의 꿈을 안고 사는 이로써
제 우상이지요.
장주네 다음가는...

람혼 2010-04-27 02:59   URL
문제적 작가들만을 사랑하시는군요! ^^
극작가를 꿈꾸신다니 작품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모딜리아니님~!
 

*) 『한국연극』 2009년 8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역시나 뒤늦게 옮겨놓는다. 당시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잠시 인용했던ㅡ그러나 또한 이 글의 중심적 선율 중 하나가 되고 있는ㅡ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연극에 관한 테제들(Thèses sur le théâtre)」은 그의 책 Petit manuel d'inesthétique에 수록되어 있는 글인데, 이 책의 국역본이 바로 얼마 전인 2010년 1월에 바디우 전공자인 장태순 선생의 번역을 통해 간단히 『비미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그러니까 이 국역본은 원서가 나온 지 10년이 조금 넘어 번역된 것인데, 내가 "연극-관념"이라고 옮겼던 "idée-théâtre"를 장태순 선생은 플라톤적 의미에 따라 "연극-이념"으로 옮기고 있다). 일독을 요하는 책이다. 특히나 바디우의 '비미학'을 랑시에르의 '미학/감성학'과 접속시켜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대체적으로 철학자들은 춤의 문제에 대해ㅡ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ㅡ철학적 담론을 제기하기를 꺼려하거나 그러한 담론을 산출하는 데에 무능한 경향이 있는데(아마도 이에 관해서는, 춤의 문제를 철학적 문제로 '강림'하게 했던ㅡ혹은 철학의 문제를 춤의 문제로 '승화'시켰던ㅡ니체(Nietzsche)가 거의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사유의 은유로서의 춤(Le danse comme métaphore de la pensée)」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소중하게 느껴지는 글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일독을 권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하의 글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역시나 연극과 그 음악, 음악과 그 연극에 관해서이다, 모두 알다시피 말이다. 어쨌든 이 글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공연ㅡ그 공연은 사실 내가 쓰고 내가 연출하고 내가 작곡하며 내가 연주하고 연기하는 공연이 될 텐데ㅡ에 관한 '상상'의 일단과 일말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글이다. 그 공연을 언젠가는 꼭 할 수 있을 것이란 희미한 희망을 동력 삼아, 오늘도 펜을 든다.
(2010. 2. 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연주하는 배우, 연기하는 악사
— '사건'과 '관념'으로서의 연극, '잔향'과 '이명'으로서의 음악

 

최 정 우 (작곡가/번역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연극에 관한 테제들」에서 사건(événement)과 관념(idée)의 관점에서 연극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첫째, 연극은 반복되는 상연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대에 오르는 그 순간 하나의 단독적인(singulier) 사건이 됩니다. 바디우는 이러한 연극적 혹은 무대적 사건을 "사유의 사건(événement de pensée)"이라는 말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연극이라는 가장 '물질적'이며 '실제적'인 장르 안에서 일견 가장 낯설게 보이는 '관념'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연극은 무엇보다 하나의 '사유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연극은 그 자체로 배열과 조합의 행위에 기초한 하나의 복합적 작업을 뜻하는 것, 곧 다양한 구성요소들 사이의 특정한 '배치(agencement)'를 뜻하는 것입니다. 연출이라는 작업이 뜻하는 첫 번째 의미는 아마도 이러한 '배치'의 행위가 될 겁니다. 또한 이러한 배치의 작업이 산출하는 것을 바디우는 "연극-관념(idée-théâtre)"이라는 독립적인 조어(造語)로 부르고 있습니다. 연극은 여러 구성요소들의 배치를 통해서 연극에 고유한 특정한 관념을 산출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둘째, 연극은 무엇보다 하나의 관념이지만, 그러한 관념이란 오직 상연이라는 형식 안에서만 출현하는 어떤 것, 무대화라는 과정 없이는 미리 존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연극만이 생산할 수 있는 독특하고도 단독적인 의미에서의 '연극-관념'이란, 오로지 연극적 배치라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능한 사유의 형식들 중에서도 연극이 유독 특별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유가 배우의 몸, 무대, 빛과 소리 등 물질성의 다양한 형식들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이유에서일 겁니다. 

 

 

▷ 강연 중인 알랭 바디우: 연극은 '배치'이며 또한 '사유의 사건'이다.

 
이러한 물질적 요소들의 배치란 무엇보다 먼저 하나의 '건축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연극의 건축술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이 거의 언제나 그러한 건축의 '해체'라는 사실입니다. 연극이 하나의 구조물을 건축함과 동시에 해체하는 것은 어쩌면 연극이 연극이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숙명이자 마력일 겁니다. 연극은 고착이 아니라 유동이며, 또한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집니다. 오히려 연극은 어쩌면 이러한 시간성, 이러한 덧없음, 이러한 물질적이고 시간적인 유한성 그 자체를 가장 적극적으로 껴안고 보듬으며 나가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음악의 시간성이 연극과 만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음악의 시간은 연극의 시간과 때로는 포개지고 때로는 어긋나기도 하며, 또한 연극과 음악은 서로를 통해 자신이 그 스스로는 갖고 있지 못했던 특정한 '공간'을 얻기도 합니다. 그 시간과 공간은 구축됨과 동시에 해체되는 어떤 것, 쌓임과 동시에 닳아 없어지는 어떤 것입니다. 이러한 해체의 이미지는 연극이 끝나면 철거되고 사라지는 무대의 이미지와 겹쳐집니다. 공연이 끝나면 무대와 배우와 조명과 음악 등의 모든 물질적인 요소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혹은 여러 개의) 관념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러한 '관념'이란, 저 '물질'의 존재가 없었다면 결코 남을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관념, 물질성의 형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산출될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사유입니다. 연극이 우리에게 선사하고 우리 곁에 잔존케 하여 그 영향을 지속시키게 하는 관념이란, 이렇듯 연극의 '물질성' 혹은 '유물론적' 연극성에 기반하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Alain Badiou, Petit manuel d'inesthétique, Paris: Seuil, 1998.
▷ 알랭 바디우, 『 비미학 』(장태순 옮김), 이학사, 2010.

 

음악 또한 이러한 '물질성'을 통해 '관념성'을, 유한한 '시간성'을 통해 무한한 '영원성'을 얻고자 합니다. 무대 곳곳과 그곳을 스쳐간 배우들의 몸에 들러붙어 있던 소리의 흔적들은 어느 순간, 음악이 하나의 '유령'으로서 '본래적'이고 '근본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어떤 확정적 무형성(無形性)으로부터 잡힐 듯 말 듯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확정적인 유형성(有形性)으로, 그리고 시간 속의 존재로부터 다시 시간 밖의 비존재로, 그렇게 이행하고 이탈합니다. 이 과정의 끝에 남겨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잔향'이라는 말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은 또한—전혀 부정적이거나 병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닌—일종의 '이명(耳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잔향'과 '이명'은 또한 무엇보다 하나의 '울림'이며, 이 울림은 또한 '들리지 않는 소리', 이미 지나간 소리들이 남겨놓은 '관념의 음(音)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잔향'은, 이 '울림'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사유', 하나의 '관념'이 됩니다. 곧 음악은 하나의 사유와 관념이 마치 '잔향'처럼 퍼지고 '울림'처럼 남겨지기를 기대하고 또한 의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음악이 자신의 '무형성'으로부터 '유형성'을 긷고 일구는 방식, 자신의 유한적 '시간성'을 통해 오히려 무한적 '영원성'을 약속할 수 있는 방식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성은, 이러한 영원성은, 어떤 실체를 지닌 가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연극은, 가정을 통해 사실을, 허구를 통해 진실을, 무형을 통해 유형을, 순간을 통해 영원을, 그리고 특수를 통해 보편을 약속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그 자신의 약속을 배반함으로써만 오히려 그 약속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역설을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설은, 연극음악이 하나의 독립적인 음악이 아니라 연극적 배치의 한 구성요소로서 드러나고 경험될 때에만 오히려 가장 성공적인 '총체성'을 띤다는 또 다른 역설로, 다시금 반복되고 변주되고 있습니다. 

 

         

▷ 파트리스 파비스: 텍스트성은 무엇보다 하나의 '물질성'으로, 하나의 '음악'으로 온다.
    Patrice Pavis, Le théâtre contemporain, Paris: Nathan, 2002.
 

파트리스 파비스(Patrice Pavis)는 『현대 연극』의 논의를 통해서 드라마 텍스트의 분석을 텍스트성(textualité)에 대한 천착으로, 곧 텍스트의 '물질성'과 '음악성'으로의 침잠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에게 연극 텍스트에 대한 이해란 곧 그 텍스트의 물질성을 이해하는 일, 다시 말해 그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기표들의 '소리'와 '리듬'과 '유희'를 이해하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이죠. 텍스트를 하나의 '음악'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음악의 '선율'과 '템포' 안으로 침잠하는 일, 반복하자면 이것은 곧 연극적 '배치'의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되고 있습니다. 연극적 텍스트를, 그리고 그 텍스트가 지닌 물질성을, 무엇보다도 하나의 '음악'으로 이해하고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연극적' 배치란 또한 일종의 '음악적' 배열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 연기자는 또한 어떻게 한 명의 연주자가 되는가: 2008년 대관령 국제음악제 중 얼 킴(Earl Kim) 작곡의 <린다에게(Dear Linda)>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의 모습.

 
제가 언젠가 꼭 한 번 무대에 올려보기를 꿈꾸는 하나의 '연극'이 있습니다. 배우가 무대에 오릅니다. 단, 그는 '연기'를 하는 연기자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연주'를 하는 연주자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악기를 든 연주자들이 같이 무대에 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연극이 뮤지컬이거나 음악극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악기를 든 연주자들은 '연기'하는 배우를 위한 반주자들이 아닌 것이죠. 여기서 배우는, 오히려 그 자신이 하나의 '악기'가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하나의 '선율'과 '음색'을 이루고, 또한 그의 몸짓은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연극이 끝난 후, 무대에 불이 꺼지면, 그때 비로소 남겨질 하나의 사유, 하나의 관념을 상상해봅니다. 그 사유와 관념은, 딱딱하게만 들리는 그 이름과는 전혀 다르게,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질과 시간이 떠난 후에 남겨진 어떤 비물질성과 비시간성, 그것은 오직 그러한 물질과 시간이라는 유한한 조건들을 거쳤기에 가능해진 하나의 무한입니다. 음악은 하나의 관념이겠지만, 그것은 오직 '물질'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그러한 한에서의 '관념'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물질과 관념의 교차와 공존 속에서, 배우는 한 명의 악사가 되고, 연기는 또 다른 연주가 되며, 연출은 일종의 작곡이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와 음반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 극단 풍경 <마라, 사드>의 공연 포스터: 2009년 10월 8~18일,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

i) 연극 <마라, 사드>가 엊그제 10월 8일 처음 무대에 올랐다. 공연은 10월 18일까지,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쉬는 날 없이 계속된다. 이 연극 역시 내가 음악을 작곡한 작품인데, 악단이 실황 연주를 통해 직접 연극 안에 참여하는, 국내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형태의 작품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밴드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의 全 멤버가 2006년에 공연했던 새러 케인(Sarah Kane)의 연극 <새벽 4시 48분>(원제: <Psychosis 4. 48>) 이후로, 밴드가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연극 공연은 내게도 실로 오랜만이다. 이번에 나는 직접 연주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조민기, 허철주, 김윤호라는 어리지만 걸출한 세 명의 연주자들을 만난 것은 이번 공연이 내게 선사해 준 소중한 인연들 중 하나이다. 이들 연주자들이 없었다면 내 음악은 지금의 이 형태로 '실현(實現)/실연(實演)'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이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덕분에 내 음악이 더욱 풍성해졌다. 이 연주자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도 관극의 재미를 더욱 톡톡히 배가시킬 수 있는 '관전 포인트'임을 지나가는 길에 꼭 언급해둬야 할 터, 또한 올해 중순에 있었던 박근형 연출의 <마라, 사드>를 보았던 관객이라면 이 두 연극의 연출과 음악을 서로 비교하고 대조해보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경험일 것이라는 점을 첨언해둔다. 

 

▷ 사드와 마라: 배우 남명렬 선생(左)과 홍원기 선생(右)[사진: 정형우].

ii) 개인적으로 연극 음악 작업을 지금까지 대략 7년 동안 해오면서 언제나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멋진 배우들과의 소중한 만남이다. 이번 연극을 통해 얻게 된 소중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배우 남명렬 선생과 홍원기 선생과의 만남을 말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이번 공연을 통해 나는 남명렬 선생의 '사드'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는데', 연극에 임하는 그의 자세와 예술에 대한 태도를 통해 많은 것들을 듣고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하여 이 자리를 빌려 또한 남명렬 선생과 홍원기 선생, 두 배우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밝혀둔다.

iii) 덧붙여 한 마디 첨언해둔다. 이 연극의 드라마투르그(혹은 드라마터그)는 팸플릿에 수록한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연출가 박정희는 프로덕션을 정식으로 구성하기 이전에, 더욱 분명히 말하자면,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필자를 드라마터그로 섭외하였다. 덕분에 필자는 공연의 시의성과 의미를 탐구하고, 연출 개념을 결정하는 중요한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어 '드라마투르그'와 영어 '드라마터그'의 차이점을 각주를 통해 세밀히 밝히면서까지 자신의 위치와 입장에 대한 장문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이 '드라마터그'의 '실제' 작업 안에서, 이른바 그가 쓰고 있는 문자 그대로 "연출 개념을 결정하는 중요한 작업"이라는 실체가 정작 목격되지 않고 실종되어 있다면?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개념 설정이 동요하고, 작품의 '시의성'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의미에 대한 신중한 고려가 부재하며, '연극'이 어떤 정치성 위에 있으며 또한 어떤 정치성을 담보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결여되어 있는 채로, 무언가에 대해 '아니다'라는 정해진 답변만을 남발하고 권위만을 세우는 '나이브한' 태도는, 그 자체로 비겁하고 치졸하다. 곁가지를 치자면, '드라마투르그'는 한국의 연극 판에서 너무도 자주 '드라마트루그'라고 잘못 표기되곤 하는데, 이러한 오기(誤記/傲氣)에는 '트루(true)'에 대한 어떤 종류의 뒤틀린 '강박관념'이 결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해보게 되는 것이다. 진정성이란 단순히 확고한 '이론'에서만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그러므로 이론 자체가 '확고하지' 못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더 더욱 자명하지 않은가). 연극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무대 위의 결과'만이 아니라, 오히려 '배우와 배우의 관계', '배우와 연출의 관계'이듯이,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기반이 되었을 때에만 궁극적으로 '연극과 관객의 관계'가 설정되고 결정되듯이. 

iv) 이 연극은 말 그대로 배우와 연주자들의 힘이 전적으로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작품을 함께 하고 있는 모든 배우들과 연주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다른 작품보다 배로 힘든 연습의 과정이었을 텐데, 여러 가지 어려움들 속에서도 좋은 작품을 이루어준 이들에게, 그 감사의 인사를 소중히 담아 전하는 마음으로, 이하에서는 연극 팸플릿에 수록한 작곡의 글을 옮겨놓는다. 더불어, 당연하게도, 관극(觀劇)과 일람(一覽)을 권하는 바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마라, 사드>의 극작가, 페터 바이스(Peter Weiss)의 모습.

 
혼돈 혹은 축제: 말하기와 노래하기 사이에서
 

최 정 우 (작곡/음악감독)

1) '사드'와 '연극'의 만남? 『소돔 120일』, 『쥐스틴 혹은 미덕의 불행』, 『규방철학』 등 사드(Sade)의 외설스럽고 잔혹한 소설들에 익숙한 분들에게는(혹은 떠도는 풍설로만 사드의 '악명'에만 익숙한 분들에게는),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어쩌면 지극히 생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는 사드가 말년에 샤랑통(Charenton) 병원에 수용되어 환자들에게 연극을 지도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또한 사드가 『옥스티에른』, 『에르네스틴』 등 스무 편에 달하는 연극 작품들을 남기고 있는 '희곡 작가'이기도 하다는 사실 역시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포베르(Pauvert) 출판사의 전집판을 기준으로 할 때도 그 분량은 책 세 권에 달합니다). 

 

▷ 하나의 '익숙한' 시선: 다비드(David) 作, <마라(Marat)의 죽음>.

2) 바이스(Weiss)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작가는 사드가 마라에 대한 희곡을 쓰고 그것을 환자들과 함께 연극으로 무대에 올린다는 역사적 상상, 역사적 가정을 합니다. 이러한 상상과 가정 안에서 서로 대면하고 논쟁하는 마라와 사드,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인간군상이 직조하는 하나의 '총체성'은 극중극의 형태로 우리에게 '혁명'의 자리와 '정치'의 자리를 새삼 되묻습니다.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3: théâtre I, Paris: Pauvert, 1991.

3) 작곡의 측면에서는 이 '음악극'이 결코 '뮤지컬'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배우들은 노래할 때 노래만 하고 말할 때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들은 노래하듯 말하며 또한 말하듯이 노래합니다. 이러한 '말하기-노래하기'의 형식이 오페라의 레치타티보(recitativo)와 다른 점은 사실 이 작품이 '연극'이며 또한 '연극'일 수밖에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대하면서 작곡자로서 품었던 기본적인 생각은,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극중극의 형태를 포착하기 위한 음악적 언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정상성의 표면 아래에 숨어 있는 비정상성의 카오스적 에너지를 포착하기 위한 음악적 언어는 결코 말과 노래의 엄밀한 구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이는 또한 '연극 안에서 노래는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말과 노래 사이의 모호한 구분은 어쩌면 제가 음악적으로 이 작품의 내재적 혼돈과 대면하고 대화하는 하나의 '상동적' 전략일 것입니다.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4: théâtre II, Paris: Pauvert, 1991.
 
4) 이 작품의 작곡은 기본적으로 사이키델릭 록의 어법에 기초하여 진행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음악적 장르가 아니라 극 안에서 그 장르가 형성할 수 있는 '연극적 효과'일 것입니다. 음악을 통해 이 작품이 지닌 지독한 '혼돈'의 성격과 동시에 또한 흥겨운 '축제'의 측면도 포착할 수 있었다면 제 의도의 반은 성공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극중에서 사드는 루이 15세 시해미수범 다미엥(Damiens)에 관해 말하는데(이 이야기는 사실 푸코(Foucault)가 『감시와 처벌』의 초입에서 신체형의 '화려함'에 관련해 들고 있는 인상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 처형의 잔혹함은 처형을 하나의 '스펙타클'로 지켜보는 군중의 들뜬 열기와 겹쳐져 역설적으로 하나의 '희생제의', 하나의 '축제'가 되기도 합니다. 혁명이 불러일으킨 수천수만 명의 죽음과 '화려한' 신체형 속에서 드러나는 한 개인의 '아름다운' 죽음 사이의 간극, 아마도 마라와 사드 사이에는 저 죽음의 숫자와 형태 사이에 놓인 간극이, 그러나 또한 단지 숫자와 형태라는 기술적 술어로만 치환되고 소급될 수 없는 그런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연극이 그런 '심연'을 환기시킬 수 있기를, 또한 동시에 그런 '축제'의 자리에 값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5: théâtre III, Paris: Pauvert, 1991.

5) 연극은 '연출의 연극'이며 특히 제게는 '음악의 연극'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연극은 '배우의 연극'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여기서 새삼 환기하고 싶습니다. 이 사실이 '기본적'인 이유는, 배우가 연극의 필수적 요소라는 기초적이고 소극적인 규정 때문이 아니라, 연극의 시작도 끝도 모두 배우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배우에 의해서 구현된다는 가장 적극적이며 숭고하기까지 한 사실 때문입니다. 제가 특히나 이 연극의 배우들에게 개인적으로 큰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제게 새삼 환기시켜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리의 정치'는 어쩌면 가장 낡은 형태의 정치일지 모르지만 동시에 또한 현재 이 자리에서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정치가 아닐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혁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이 연극이 묻는 궁극적 질문은 바로 이것일지 모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또 다른 '생경한' 시선: 보드리(Baudry)가 그린 마라와 코르데(Corday)의 모습.

*) 덧붙여: 마라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단연코 다비드의 그림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그런데 보드리의 그림은 그 장면의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보드리는 마치 카메라를 회전시키듯 다비드의 그림이 '확고하게' 지니고 있던 시선과 관점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마라의 '욕조'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보드리의 그림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살해된 마라보다는 마라의 암살자, 곧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의 모습이다. 그녀 자신과 어떤 이들에게 코르데는 그 자체로 '유디트'의 현현이었을 것이다. 연극은 때때로 이러한 '관점의 [동시적] 이동'과 '시차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그래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극의 정치성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나이브한' 정치적 충정과 울분 혹은 무력감이나 좌절감을 통해서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질문은 연출이ㅡ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ㅡ가장 치열하게 던져야 할 물음이며, 이 질문을 소홀히 하는 것은 연출에게 거의 '직무유기'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연극은 이 질문에 연극 그 자신으로써 답해야 하는가? 반드시 '대답할' 필요는 없다('장르' 자체와 그 장르가 빚어낸 어떤 '결과물'이 언제나 하나의 '대답'일 수는 없다). 모든 철학과 예술이 그러하듯, 연극에서도 또한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에. '질문을 잘 던지는 것' 혹은 '질문 하나를 모든 관객이 소중하고도 고통스럽게 품게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연극적 실천'의 끝과 시작이 아니겠는가?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2009-10-14 09:57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4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erial88 2009-11-23 19:59   댓글달기 | URL
우와아~ 한수 배우고 갑니다! 님의 글솜씨에 감격해서 실례지만 안면도 없는 제가 한 자 남기고 간다는~:D
역시 순수 문학분야 출신분들은 못 이기겠네요. (__)// 전공이신지 취미신지는 모르겠지만요. 제 졸렬한 글솜씨에 님께 머리가 숙여집니다...;

람혼 2009-11-24 17:00   URL
지나친 겸양에 오히려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처음 댓글을 남겨주시는 것 같은데요, 무척 반갑습니다.
'출신'으로 따지자면 저는 '순수문학' 분야 출신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글을 잘 읽어주셨다니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모딜리아니 2010-04-25 21:03   댓글달기 | URL
피터브룩이 했던 마라 사드를 봤었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람혼 2010-04-27 03:07   URL
저는 Peter Brook의 <마라/사드> 전체를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YouTube에서 몇몇 부분들을 확인했을 뿐이죠. 부럽습니다.^^
희곡의 영역본은 읽어보았는데, 당시 공연 때 Brook이 썼던 음악의 악보들도 몇 장 함께 수록되어 있더군요.^^
 



▷ 『춤과 사람들』, 2009년 9월.

*) 『춤과 사람들』 2009년 9월호에 실린 내 인터뷰 기사를 옮겨온다. 최자윤 기자가 상당히 공을 들여 기사를 써주셔서, 일천하고 부족한 사람으로서 송구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햇수로 따지자면 올해로 연극과 무용 등 무대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해 온 지도 벌써 7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어렵고 힘든 작업도 있었고, 행복하고 신나는 작업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간 작곡했던 스무 작품이 넘는 무대음악들 모두가 내게는 참 소중한 기억이자 자산으로 남아 있다. 이 기사를 읽으며 새삼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면서, 느슨해진 발걸음에 다시금 신발끈을 동여매게 된다. 10월에도 내가 음악을 작곡한 두 연극이 극장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전 새롭게 개관한 명동예술극장에서 10월 11일까지 유진 오닐(Eugene O'Neill) 작, 임영웅 연출의 <밤으로의 긴 여로>(손숙, 김명수, 김석훈 등 출연)가 '절찬 상연' 중이고, 또한 10월 8일부터는 페터 바이스(Peter Weiss) 원작의 '문제작' <마라, 사드>가 박정희의 연출로 아르코 예술극장(舊 문예회관) 소극장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홍원기, 남명렬 등 출연). 두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대비되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한 작품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내러티브에 충실한 '정극'의 형식이라면, 다른 한 작품은 일종의 파격과 비약을 겸비한 '음악극'의 형식이다. 또한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는 음악이 녹음의 형식으로 '재생'되지만, <마라, 사드>에서는 악단이 음악을 실황으로 매일 '조금씩 다르게' 연주한다. 작곡의 측면에서 봤을 때도 두 작품은 서로 그 음악적 스타일이 정반대다(<밤으로의 긴 여로>의 음악이 다분히 클래식적인 요소에 기반하여 작곡한 것이라면, <마라, 사드>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사이키델릭 록에 기반하여 작곡한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음악 '안'에서조차 "모호한 경계" 위에서 일종의 '줄타기'를 즐기고 있는 것인데, 이 인터뷰 기사의 말미에 등장하고 있는 또 다른 한 단어를 차용하자면, 그것이 누군가에게 "기대감"을 줄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은 또 없을 것 같다. 가을 하늘, 공활(空豁)하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작곡가 최정우
"연주자도 몸으로 리듬을 표현해요" 

 

1998년 스페인 음악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호주, 브라질, 인도, 그리스 및 동유럽, 아프리카, 아랍 지역 등 여러 문화권의 음악을 주제로 한국의 주요 안무가 및 작품을 소개해 우리 춤과의 융합을 시도해 온 <세계음악과 만나는 우리 춤>이 올해로 12회째를 맞이했다. 12년을 거쳐 올해 다다른 카리브해 음악과의 만남 중 지난 7월 22일 <아바나行 간이열차: 여섯을 위한 삼중주(Train for Havana: Trio for Six)> 이윤정 작품에서 음악 연주와 직접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한 예사롭지 않은 밴드에 주목하게 된다. 무용수와 함께 등장해 움직임에 익숙하지 않은 세 명의 뮤지션들이 날것 그대로의 신선함을 보여주며 관객과 소통을 시도, 그들이 무용수가 아닌 음악가이기에 궁금함은 더욱 커졌다.

1970년대 다방을 연상시키는 눅눅한 나무 테이블과 거리낌 없는 분위기의 카페 공간에서 밴드의 리더인 그(최정우)와 편안함으로 마주하였다.

무용과 그와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술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객석을 조용히 메워왔던 그에게 무용이라는 장르는 연극처럼 언어적 텍스트(text)에 기반이 되어 있지 않기에 그것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좀 더 넓고 자유로운 음악적 영역을 표현할 수 있어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 후 정영두, 장은정, 이용인 등의 무용가들과 함께 음악작곡가로서 대면해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 여러 무용가와 작업을 함께 하면서 그는 '음악'을 소품과 같은 백그라운드가 아닌 공연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라이브 연주 자체가 주는 생동감과 연주자 각각의 움직임들 또한 하나의 퍼포먼스로서 작품에 스며든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그가 무용작품을 위해 작업한 음악들을 녹음이 아닌 대부분 현장에서 직접 라이브로 연주를 하며 무용수와 관객과 호흡하곤 했다.  

 

 

 

작품 <아바나行 간이열차: 여섯을 위한 삼중주>에서 음악과 퍼포밍

"리듬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연주자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용]음악이란 늘 무용수의 몸짓에 맞춰 '연주'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연주하는 동안 둘이 각자 다른 듀엣을 하고 이중주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동안에는 나도 무용수와 같은 작품을 함께 하는 퍼포머라고 생각하죠. 그런 점에서 무용 공연에서 음악작업은 어떠한 장르보다 매력적이고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작품과 음악의 상관관계에 대한 관념이 얼마 전 그를 무대에서 악기뿐 아니라 몸으로 작품에 녹여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퍼포머로서 이전에 무대에 서 본 적은 없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고, 안무가/무용수(이윤정)와 친분관계가 있어 음악도 연습도 편안하고 재미를 느끼며 할 수 있었다고 하는 작곡가.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 그의 표면적 활동 명칭은 홍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레나타 수이사이드 밴드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이다.

수이사이드?... 자살?... 레나타 자살? 자살을 동경하는 음악단체인가? 무서운 상상의 나래를 부풀이고 있는 기자를 이내 가라앉히는 말. '단지 어감이 갖는 이미지가 좋아서 선택했지 어떠한 영문에 의미를 부여하고 만들지는 않았다' 한다. 음악적 특성이 강한 밴드음악을 하고 있지만 평소에는 하나의 장르를 편식하지 않고 여러 장르의 음악을 잡식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무대음악은 늘 예측불허예요. 작품과 상황의 분위기에 맞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풍성히 알아야 그려낼 수 있기에 평소에 여러 장르의 음악을 가리지 않고 많이 접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기타와 가야금 등 여러 가지 악기가 내는 소리와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악기들을 다뤄 왔었던 그는 '예술과 철학을 접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서울대 미학과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론뿐 아니라 실천의 경험을 통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의 평론가와 예술가라는 모호한 경계에 그를 서게 했다.  

 

 

 

월간 <한국연극>에 평론 기고하는 음악가

현재 그는 철학, 문학 평론 글을 월간 『한국연극』에 매달 연재하고 있으며, 그의 블로그에는 문학, 음악, 미술, 연극, 무용, 영화 등 모든 장르에 대한 관람과 그 느낌에 대한 잔상과 후기들을 빠트리지 않고 꼼꼼히 기록해 두고 있다. 지금까지의 글로 토해낸 자신의 비평 작업을 모두 묶어서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는 리뷰에 그치는 평이 아닌 해당 작품이나 공연을 접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글을 통해 공감하고 편하게 읽어 내려 갈 수 있는 책을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건이 허락될 때 밴드의 앨범작업과 동시에 지금까지 애정을 가지고 만들었던 무대음악들을 모두 모아 영화의 사운드트랙처럼 음반으로 제작하는 것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시일이 걸리겠지만 차후에는 어느 장르에 국한되어 있는 단체가 아닌 무대작품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람들로 여러 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의 작은 예술단체를 만들어 윌리엄 포사이드와 같이 소재와 영역의 폭을 확대, 실험성이 강한 작품을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도전하게 될 수많은 예술적 시도가 자신의 바람을 이루어 줌과 동시에 예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자(글), 미술작품, 음악, 영화, 퍼포먼스. 그가 흡수한 모든 장르의 예술적 분야가 하나로 뭉뚱그려져 빚어지는 예술적 영역에 과히 '기대감'이란 설레임의 나무를 심어본다. '기대감'이란 관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카타르시스적인 선물이 아닐까...

ㅡ 최자윤 기자, 『춤과 사람들』 2009년 9월호, 56-57쪽. 

 



 
 
2009-10-01 23:29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2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