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이 세상엔 어쩌면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처음 눈치 챈 것은 내가 열 살 되던 해이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내가 다니던 학교, 하필이면 우리 반에, 그때까지 이 세상에 없던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그렇게 나타났다. 그녀가 전학 오던 날 아침, 정년을 앞두고 있어 우리가 할머니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담임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슬쩍 지나치듯이  말씀하셨다.

“오늘 네 라이벌 감 될 만한 아이가 새로 생기겠다.”

라이벌이라는 말도 생소한데 그 '라~' 어쩌구 하는 아이가 새로 생긴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나는 그야말로 요즘 말하는 범생이 샘플 중 하나였다. 우리 반 반장이었으며 시험 보면 늘 일등. 그건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 만큼이나 보통의 일이었다. 아마도 선생님의 그 말씀은 이제 너 긴장해라는 의미였을거다.

‘누가 전학을 오나?’

과연 아침 조회가 끝나고 1교시 시작하기 직전, 선생님은 잠깐 나가시더니 한 여자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셨다. 좀 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라 나는 뚫어져라 그 아이를 쳐다 보았다. 나의 눈길을 제일 먼저 끈 것은 그 아이가 입고 있던 빨간 원색 원피스였다. 흰색 땡땡이 무늬,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 아래로 착 깔리는 주름. 그 때까지 나는 물론이고, 내 또래 누구도 그런 원피스 입은 것을 본적이 없다. 벌써 어딘가 달라 보이는 조숙한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목에 두르고 있던 연두색 스카프에서 더 확실해졌다. 길지 않은 스카프를 옆으로 살짝 둘러 맨 모습, 자연스런 고수머리가 아니라 파마를 했음에 틀림없는 웨이브 진 머릿결, 그녀가 쓰고 있던 짙은 밤색 안경과 또렷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보는 나를 제압시키는데는 5초면 충분했다.

“이름은 박, 계, 현.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전혀 떨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짧고 똑 떨어지는 말투의 자기소개. 쇳가루가 날릴 것 같은 또랑또랑한 목소리. 담임선생님이 너와 라이벌이 될 거라고 한 저 애가 나랑 같은 나이, 초등학교 3학년생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우리 분단 뒷줄 어딘가에 그녀의 자리가 정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있는 나의 가슴이 왜 그리 콩닥콩닥 뛰었을까.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12-07-06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이제 소설습작도 하시는 거죠?
첫 문장부터 사로잡는걸요.^^
저의 초등 3학년을 떠올려 봅니다. 조금은 조숙하고 생각이 많았던 내성적이지만
뜨거운 불을 안고 있었던 여자아이.
전학 온 아이로 긴장을 했던 경험, 제겐 중학교 2학년 때였다지요.
서울에서 전학온 착하고 새하얗고 덧니가 이쁜 얼굴을 더 돋보이게 했던 아이,
그 당시 유일하게 아파트라는 데서 사는 아이였어요.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아이가 신고 다녔던, 발등에 가로로 끈이 있던 검정 에나멜구두가 어찌 부럽던지.
하얀색 커버양말에..^^ 우리도 다들 그런 모양의 검정 구두 신고 다녔는데 그애가 신은 건
디자인이나 광택이 달랐어요. 눈에 쏙 들어왔다지요.^^

hnine 2012-07-06 20:38   좋아요 0 | URL
우히히...나이 먹으면 창피한게 없어진다지요 ㅋㅋ
비슷한 추억이 누구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그때는 아파트도 흔하지 않았고, 검정에나멜 구두도 흔하지 않았지요. 저는 주로 운동화를...
추억에 허구를 보태서 한번 만들어보려고요.

비로그인 2012-07-07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더 써주세요, 더 써주세요!
라이벌 소녀를 더 지켜보고 싶어요 :)

hnine 2012-07-07 17:12   좋아요 0 | URL
사실 이런 이야기는 말없는 수다쟁이님으로부터 더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일단 시작했으니 더 쓰긴 쓸겁니다~ ^^

숲노래 2012-07-07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교사가 '맞수' 아닌 '동무'라고 이야기했다면, 둘은 사이좋은 어깨동무로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두 아이가 아이다운 마음이라 한다면, 교사가 무어라 하건 서로 죽 잘 맞는 멋진 동무로 사귀었겠지요?

hnine 2012-07-07 23:41   좋아요 0 | URL
둘 사이가 어떻게 진행될지 지켜봐주세요~ ^^

하늘바람 2012-07-0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완전 궁금한데요.
범생이 나이님 앞에 나타난 맞수라~
기대됩니다

hnine 2012-07-08 20:44   좋아요 0 | URL
글중의 '나'는 제가 아니랍니다. 이거 수필이 아니고 소설이어요 ㅠㅠ
 

 

 

이 세상에 제일 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대화'가 아닐까 한다.

대화로 해결안되는 일은 없다고, 일단 대화부터 하라고, 다른 사람의 일에 조언이랍시고 하지만,

제일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대화를 시도하는 것 부터가 용기는 물론, 사유와 성찰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어렵고도 가치있는 일 아닐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 아닐까.

 

...

 

영국 사람들이 만나면 날씨 얘기만 주고 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날씨 얘기마저도 삼키고 마는 이런 사람은, 그저 꽃이나 보고, 사진이나 찍고.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바람 2012-04-21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화도 가능한 사람이 있어야죠. 진정한 대화는 정말 어려워요
저 처럼 말주변없는 사람 더하고요.

hnine 2012-04-21 08:43   좋아요 0 | URL
예전에 부모님께서 느닷없이 대화를 하자고 할때가 생각나요.
결국 부모님의 의견과 결정을 듣게 하기 위한 또다른 기회였을 뿐, 제가 알고 있는 대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ㅋㅋ 그리고는 한동안 입을 꼭 다물고 있기도 했어요.

숲노래 2012-04-21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를 아끼거나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이야기'를 이루고,
서로를 아끼지 않거나 사랑하지 못할 때에는 '논쟁'이나 '비판'만 한다고 느껴요.

서로 좋은 꽃
좋은 날씨 마주 바라보며
좋은 마음만 되어도
아름다울 텐데요..

..

그나저나 hnine 님 서재지수가 아쉽게 '100005'가 되었네요 ^^;;;
5점만 적었어도 딱 00000이 되었을 텐데~
그래도 끝에 5만 들어가는 숫자도 재미있군요 @.@

hnine 2012-04-22 18:46   좋아요 0 | URL
서로 아끼거나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도 늘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없고 서로 의견을 맞춰야 하는 때가 있기 마련인데...참 어려운 일이어요.
서재지수가 어느새 저렇게 되었네요. '만'이 넘었나 했더니 '십만'이 넘은걸 보고 제가 깜짝 놀랐지 뭡니까 ^^

다락방 2012-04-21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길 지나다가 꽃만 보면 사진 찍고 싶어서 자꾸만 멈춰서게 되요, hnine 님. 핸드폰에 꽃 사진이 하나씩 쌓이고 있어요.

저는 위의 된장님이랑 생각이 좀 다른데요, 논쟁이나 비판이 '아끼지 않거나 사랑하지 못할때'나온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논쟁이나 비판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는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이 있기 때문에 '내 생각이 틀릴수도 있겠구나' 혹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하는걸 비로소 알 수 있는것 같구요. 논쟁이나 비판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엔 '사랑 없이도' 이루어지는 일들이 많으니까요.

저도 조만간 꽃 사진 올려야겠어요. 집 앞에서 예쁜 사진을 찍었거든요.

hnine 2012-04-22 18:50   좋아요 0 | URL
논쟁이나 비판이 있기 때문에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 맞는데, 그 과정은 참 쓰리고 아려요. 몸에 좋은 건 입에 쓰다, 이런 말이 여기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
어제 유홍준 작가님, 나영석 PD님과 함께 하는 창덕궁 답사 가서 창덕궁 후원의 꽃, 많이 보고 왔답니다. 비, 바람 휘몰아치는 속에서 어찌나 춥던지...ㅋㅋ

프레이야 2012-04-21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자목련이닷
파란하늘 배경으로 참 싱그러워요.
나인님, 여긴 오늘 아침부터 봄비가 촉촉히 내려요.
마음에 평안이 깃들길 소원해요^^

hnine 2012-04-22 18:54   좋아요 0 | URL
자목련은 하얀 목련에 비해 꽃송이가 많이 달린 것이 드문 것 같아요. 저희 동네 산책하다가 찍었어요. 홀쭉하게 위로 뻗었더군요.
어제, 전국적으로 비가 왔지요. 우산을 써도 젖는 날씨 속에서, 아이 데리고 서울 다녀왔답니다.
마음의 평화 빌어주셔서 감사해요. 사람 사는 것이 풍요로와 질수록 왜 마음의 평화 갖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은지 모르겠어요.
 

 

 

 

 

 

백만 명의 사람들이 백만 가지의 이유로 우울하다.

 

백만 명의 사람들이 백만 가지의 이유로 그 우울을 견디고 산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2012-04-12 0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픔을 기쁨으로
스스로 바꿀 수 있기를 빌어요

hnine 2012-04-12 17:03   좋아요 0 | URL
추천수가 민망할 따름입니다 ㅠㅠ

무스탕 2012-04-12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포함된 숫자에요;;
잘 지내고 계시죠? 오랜만에 글 남겨요 ^^

hnine 2012-04-12 22:12   좋아요 0 | URL
반가와라 무스탕님.
전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조금 전에 무스탕님 서재에 들러보니 아직도 회사에 있으시다고요. 회사가 무스탕님을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군요 ^^
짬내어 들러 안부 남겨주시니 감사합니다.
 

 

 

 

                          마흔 일곱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나은가?

배부른 돼지는 돼지대로,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대로

그들의 생을 그들의 방식대로 살았을 뿐인데

 

 

어제도 하고 그제도 했으니 오늘도 거르지 말고 하자

생각했다가 얼른 그 생각을 거둔다

매일 무엇을 하자는 규칙을 자꾸 만들지 말자

그 규칙 속에 갖히지 말자

그런 규칙이 삶의 질을 더 높인다고 생각하지 말자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안 해도 죄책감 느끼지 않는

그렇게 살자 차라리

 

 

마흔 일곱

나는 여기에

앞으로 나는 또 어디로

그것이 알고 싶어

그것이 사는 이유

일 수 있다고 해두자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2012-03-25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흔여덟은 마흔여덟대로
참 아름다운 나이가 되리라 생각해요.
언제나 좋은 나날인걸요.

hnine 2012-03-25 08:19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나이는 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언제나 좋은 나날일 수 있으면, 그렇게 시간을 가꿔나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세실 2012-03-2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hnine님 마흔 여섯일줄 알았는데요....ㅎ
요즘은 그냥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 흐르둣이 사는 삶^*^

hnine 2012-03-25 18:10   좋아요 0 | URL
마음은 열 여섯이지요~ ㅋㅋ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자, 맞아요. 십년후, 이십년 후가 아니라 바로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짓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을 때이지요 우리 나이쯤 되면요.

stella.K 2012-03-2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새...ㅠ

hnine 2012-03-25 18:11   좋아요 0 | URL
어느 새..라고 하면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흘렀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생각해보면 특별히 시간이 빨리 흘렀다는 생각이 안들어요. 너무 파도를 많이 타서 그런지..^^

하늘바람 2012-03-2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제 나이를 생각해 보게 되네요 에효
어느새
엄청많다고 생각하던 나이대가 되고
정말 그 나이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가꾸어야겠단 생각합니다

hnine 2012-03-25 18:20   좋아요 0 | URL
나보다 젊은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늘 늙었고, 나보다 더 나이든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늘 젊었지요 ^^
숫자상의 나이보다 마음의 나이가 더 중요하다는 상투적인 말에 정말 공감합니다.

프레이야 2012-03-25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훌쩍~~^^

hnine 2012-03-25 18:2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자, 눈물 닦으시고~ ㅋㅋ

달사르 2012-03-25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좋아요 좋아. 그런 자연스러움. 그런 자유스러움.
hnine님 글은 언제라도 단정, 깔끔. 그리고.. 조욘한 일탈. ^^

hnine 2012-03-25 18:25   좋아요 0 | URL
규칙이 필요할 때가 있고 빈틈없는 계획에 의해 움직여야할 때가 분명히 있기는 해요. 그런 시기를 한바탕 지내고 난 느낌이랄까. 이제는 내 마음이 하라는대로, 내 몸이 하라는대로 귀 기울이며 살면,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드는거있죠 ^^
제 마음속도 단정, 깔끔하면 좋으련만 복잡, 어지러움, 그 자체랍니다 ㅋㅋ

비로그인 2012-03-2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좋네요. 매일의 의무가 삶의 질을 높인다고 생각하지 말자! 연륜과 여유와 넉넉한 마음이 느껴지는 시네요. 노래도 오랜만에 참 좋고 ^^

hnine 2012-03-27 17:34   좋아요 0 | URL
너무 빡빡하게 살던 습관, 그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양 생각하던 습관을 이제 놓고 싶어서요.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계속 바뀌어가나봐요. 그러니 5년 후, 10년 후, 제가 있을 자리가 어딜지, 궁금해서라도 살아봐야겠지요 ^^
저 노래, 나온지 꽤 된 노래인데 저는 이제서 좋아하고 있어요.

같은하늘 2012-03-28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저녁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며 흰머리를 고르던 제 모습이 생각나서...
어느새~~~

hnine 2012-03-30 08:17   좋아요 0 | URL
제 친구들 중에도 흰머리가 꽤 많이 눈에 띈다는 친구들이 있더군요.
겉으로 나타나는 것도 그렇지만 나이들면서 생각과 관점이 달라진다는 것이 전 더 신기하더라고요. 바뀌지 않을 것 같던 것들이 바뀌어가는 것을 보면요.

lazydevil 2012-04-0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반가운 노래. 기타 코드 찾아봐야겠네요...

hnine 2012-04-06 06:2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들으니 더 가슴 속으로 조용히 파고들더라고요.
기타로 치며 부르면 더 가슴이 찡 할것 같네요.
 

 

엄마는 새벽마다 두어 시간씩 기도를 하시고, 불경을 읽으시고, 사경을 한다고 하셨다.
동생은 일어나자마자 새벽기도를 하며 마음을 바로잡는다고 했다.

나는
사과를 한알 천천히 먹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뚝배기를 꺼내어 멸치와 다시마를 우린다.

두부, 콩나물, 없는 재료 아쉬워 할 것 없이

호박, 양파, 당근, 있는 재료 모아 비슷한 크기로 썰어

뚝배기에 넣고 된장 풀어 끓인다.

표고 버섯을 썰어 양파와 함께 볶는다.

달걀을 세개 풀어 계란 말이도.

남편의 도시락 반찬통에 담고,

남은 것은 따로 그릇에 담아 놓는다.

이제 밥을 안쳐야지.

불을 켜려다가

냉장고에 몇개 남아 있는 밤이 생각났다.

세개를 꺼내어 칼로 껍질을 벗겨서 넣고 밥을 한다.

 

아무 생각도 따로 하지 않는다.

눈 앞에 보이는 것, 내가 손으로 하고 있는 일 밖에는.

내가 제일 단순해지는 시간.

이것도 내가 아침마다 하는 그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엄마와 동생의 아침 기도를 대신할 수 있을까?


이제 식구들을 깨우기 까지 한 시간 남짓
아침 일기도 쓰고

책도 읽고
그럴듯한 하루 계획도 세워보지만
나를 더 가다듬는건
일기, 책, 계획 세우는 이 시간보다
그 전의 국 끓이고, 반찬 하고, 밥을 짓는
그 시간 같은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댓글(2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2012-01-04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하는 아름다움은
어디에 견줄 수 없어요.


..


밥을 앉혀 => 밥을 안쳐

^^;;;;;;;

hnine 2012-01-04 09:00   좋아요 0 | URL
고치러갑니다, 후다닥 =3=3=3 ^^

하늘바람 2012-01-04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가다듬고 무언가를 하는 것. 정성을 다하고, 새벽의 고요를 받아들이며 내것으로 하는 것. 그건 기도를 하는 것과밥을 하는 것 다르지 않는 것같아요.

hnine 2012-01-05 07:57   좋아요 0 | URL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낼 땐는 그 새벽의 고요마저 외롭고 겨웠어요. 상황이 이렇게 사람 마음을 바꿔놓았네요.
언젠가 저도 진짜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때까지는 저렇게 저만의 의식을...^^
오늘은 요며칠 아이의 요청에 따라 밥대신 허니브레드라는 것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순오기 2012-01-04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는 아침에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는 일상을 가져본 게 언제였던가...
반성을 부르는 눈 쌓인 아침이네요.

hnine 2012-01-05 07:58   좋아요 0 | URL
반성이라니요. 누구나 하는 일을 제가 너무 의미를 붙혔나 싶은걸요.
여기도 어제 눈이 많이 왔어요. 지금 창 밖으로 보는 언덕에 여전히 눈이 하얗게 쌓였네요. 갑자기 닥터 지바고의 장면들이 생각납니다.

gimssim 2012-01-0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도보다 더 중요하고 경건하게 하루를 시작하시는군요.
엄마와 동생도 먹어야 하니까요.
고즈넉한 아침시간을 즐기시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hnine 2012-01-05 09:08   좋아요 0 | URL
어떤 날은 하기 싫은 날도 있어요. 더 급한 일을 하느라 빼먹는 날도 있고요.
그래서 저렇게 순탄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날이 더 고맙기도 하고, 그렇네요.
중전님 서재 올리신 글 '그래도 쓴답니다' 읽고 왔어요. 다시 읽어보러 또 갈 거예요 ^^

꿈꾸는섬 2012-01-04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오랜만이에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인님의 아침밥 짓는 풍경이 너무 따스해요. 재료 따지지 않고 끓여낸 된장국도 달걀말이도 정갈한 아침의 기도처럼 느껴져요. 가족들 일어나기 한 시간 전 아침밥을 짓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요. 저의 아침도 그려보고 있어요.^^

hnine 2012-01-05 09:11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 오래 동안 안보이셔서 궁금했지만 바쁜 일이 있으시구나, 급한 불 끄시고 다시 오시겠지...하고 있었답니다. 이제 다시 안오시려나? 하는 마음이 드는 분도 계신 반면에 다시 오실 거라는 믿음이 가는 분이 있답니다.
제가 아마 일찍부터 출근준비를 하는 입장이라면 저런 시간도 내기 힘들겠지요. 제가 누리는 작은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꿈꾸는 섬님의 아침 이야기도 언젠가 들려주세요.

무스탕 2012-01-04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의 동선을 뒤따라 저도 같이 움직이니 너무 단조롭지도 번잡하지도 않은 편안한 아침이네요.
전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도 차리기 전에 푸다닥 있는 반찬에 밥 차려서 애들 먹여 내보내기도 바쁜데 말이에요;;
아, 전 정말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어요. 나이 40이 훌쩍 넘어도 이러니 이거 평생 갈듯 싶어요 ㅠㅠ

hnine 2012-01-05 09:14   좋아요 0 | URL
아침 시간 만큼 온전한 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저는 아침 시간을 사수(!)하기 위해 저녁에도 일찍 자요. 어떤 때는 다린이보다도 먼저 잠들어요 ㅋㅋ
더구나 무스탕님은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 날도 많잖아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보다 저녁 늦게 까지 깨어있는 타입의 사람이 원래 있대요. 사람의 유형일 뿐이지요. 절대 제가 부지런하거나 그런거 아니라는 것~ ^^

혜덕화 2012-01-0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아는 것.
저는 그것이 기도이고 명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올 한 해도 나인님의 그 순간들이
미소가 가득한 날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hnine 2012-01-05 09:17   좋아요 0 | URL
혜덕화님, 인도 여행기 잘 읽어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가보고 싶은 나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잘 하고 가야 할 것 같아 엄두가 안나기도 한 나라입니다. 소설가 강석경이 인도에 다녀오고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요.
지금 이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觀'하는 것. 제가 아주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미소 가득. 오늘은 이 네 글자를 주제로 해볼까요. ^^

2012-01-04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5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4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5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1-05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배고파요.......... ======333

hnine 2012-01-05 09:22   좋아요 0 | URL
지금 드시면 안돼~ 요 ^^
몇 시간만 참으셨다가 이른 아침을 드시옵소서.
배고프면 잠도 안오는데 어찌 버티셨을까...궁금합니다.

하늘바람 2012-01-05 0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도 마음이 차분해지네요
언제 차라도 함께 마시고 싶어요

hnine 2012-01-05 09:23   좋아요 0 | URL
꼭 그러고 싶은 분, 하늘바람님~ ^^

로드무비 2012-01-05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고와 다시마와 멸치와 무 넣고 끓인 육수만 있으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식생활이 쉽고 간단해져요.
작년엔 불 앞에서 육수 끓여낸 시간이 책 읽는 시간보다 많았던 듯.^^

hnine 2012-01-05 23:12   좋아요 0 | URL
아, 표고와 무도 넣고 끓이시는군요. 저는 지금까지 멸치와 다시마만 넣고 끓였어요.
ㅋㅋ 저도 가끔 돌아가는 세탁기 앞에서 멍하니 구경하고 있거나 육수 끓이는 동안 그 앞에서 또 무념무상의 상태로 지키고 서 있을 때 있어요. 저만 그런줄 알았는데 ㅋㅋ

2012-01-06 0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6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