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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나는 숙제 할 것을 챙겨 그녀 집으로 갔다. 방학 중 나의 일과나 다름 없었다.

여름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엔 더위도 추위도, 견디지 못할 게 없었다. 없던 생기가 그녀로부터 나에게까지 전해져왔다. 기분은 두 배쯤 더 좋아지고 세 배쯤 더 행복했으며 세상의 명도는 상향 조정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그때 이후로 내가 또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그녀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우연히 책상 위에 엽서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 사용되던 보통의 관제 엽서였지만 사인펜으로 색색의 하트가 여러 개 겹쳐 그려져 있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각각의 하트 속에는 작은 글씨로 내용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궁금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엽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받는 사람 칸에는 그녀 이름이 쓰여 있는데 보낸 사람 이름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잠시 멈추는 줄 알았다. 그 엽서는 다름 아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으니까.

나 역시 방학 하고 며칠 안되어 숙제를 하듯이 담임 선생님께 정성스럽게 안부 편지를 보냈고, 한참 후이긴 하지만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을 받긴 받았다.  바로 이것과 같은 관제엽서에.

하지만 이런 하트 그림은 없었다. 내용도 이렇게 빼곡하지 않았다. 편지 보내주어 고맙고, 너도 방학 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나 아니라 그 누구에게 보내도 무난할만한, 고작 대 여섯 줄이 전부인 답장이었다. 그런데 이건 뭔가? 눈으로 내용을 훑어 내리고 있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겨우 시선이 멈춘 곳은 엽서의 마지막 줄. 그런데 그 마지막 줄 내용이란 게.

‘너의 언니가 되어 줄게.’

이게 무슨 말인가.

‘언니? 언니가 되어 준다고?’

나는 그 자리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담임선생님과 계현이는 얼마나 친해져 있던 것인지.

‘선생님이 아니라 언니란 말이지?’

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게 선생님이 아무 학생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내가 받은 엽서, 그리고 그녀가 받은 엽서.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질투, 배신감, 속았다는 생각, 뭐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불길이 온통 나를 태우더니, 어느 새 그 활활 타오르는 것 같던 마음은 눈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계현이가 보면 안되니까.

그날 나는 그녀에게 끝내 엽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본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마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 밤 잠도 잘 이루지 못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그건 자존심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또래 아이답지 않기는 그녀보다 내가 더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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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7-19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제 엽서는 무슨 엽서인가요???

hnine 2012-07-19 22:31   좋아요 0 | URL
어머, 카스피님도 모르시나요? 그림 엽서가 아닌, 우체국에서 발행하는 엽서를 관제엽서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아닌가봐요? ^^

비로그인 2012-07-2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
어느 관계에서든 질투와 욕망.. 사랑에 대한 의지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것이 크건 작건..

ㅎㅎ 읽으며 슬며시 어린 '나' 에게 미소지어주고 등을 투닥토닥 거려주고 싶었어요.. ^^

뒤의 이야기들이 또 궁금해져요..어떻게 이겨낼까요? 그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을 ..

hnine 2012-07-21 08:57   좋아요 0 | URL
질투 욕망 사랑에 대한 의지, 없다면 인간이 아니지요 ^^
역시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힘이 약하다보니 무슨 이야기로 이어가야 할지 머리를 쥐어짜고 있습니다 ㅋㅋ

책읽는나무 2012-07-2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관제엽서 알아요.ㅋㅋ
그시절 몇학년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담임선생님이 관제엽서에 반아이들 모두에게 안부편지를 쓰셨던 기억이 나네요.^^

담임선생님과 계현이의 미스테리 관계가 갑자기 제머릿속에서 마구 얽혀지고 있군요.ㅋㅋ


hnine 2012-07-28 15:56   좋아요 0 | URL
'관제엽서에 좋아하는 곡 서너곡 적으시고, 희망하시는 나라 넉넉하게 여유두고 적으셔서 ...75번이 xxx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하하, 익숙한 멘트 아닌가요? 그래서 더 익숙해진 단어 같아요 관제엽서.
아, 책읽는나무님 선생님께서도 실제로 관제엽서에 답장을 보내셨군요. 아이들이 한두명이 아니니까 각각 긴 편지를 쓰시기 힘드셨을테니까요.

저기 모델로 한 담임선생님은 정말 교대를 갓 졸업하신, 솜털 뽀송뽀송하신 분이셨어요.
 

 

 

 

3학년 2학기가 훌쩍 지나가고 4학년이 되었다. 그 해는 무슨 이유인지 따로 반 편성이 되지 않고 3학년 반 그대로 다음 학년 같은 반으로 올라가게 되어 우리 반 아이들 모두 함께 4학년 같은 반, 같은 담임선생님 밑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3학년 때의 할머니 선생님 대신 4학년 담임선생님은 교대를 갓 졸업하신 여자 선생님이었다. 화장기도 없는 앳된 모습은 선생님이라기보다 언니 같고 누나 같아서 이제부터 시작되는 4학년에는 어떤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을 두배, 세배로 부풀게 하였다. 의례적으로 학년 초에 행해지는 가정환경 조사서가 돌고, 학급 임원 선출이 있고, 나는 또 반장이 되었다. 아마 3학년 때 임원을 해봤던 경험, 그리고 눈에 띄는 개성은 없으나 아이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던 나의 무난한 성격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이 반장인 나보다 그녀에게 더 관심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어떤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기분으로 느껴져 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을 받는 어떤 한 순간의 횟수가 늘어가고,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게까지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나보다 그녀를 더 챙기는 듯 했고 더 아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자매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가끔 수업 끝나고 남으라고 하는 사람은 반장인 내가 아니라 그녀였다. 남아서 무엇을 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본 적은 없다.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그러나 드러나지 않고 있던 열등감이 드디어 표면화 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학급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던 관심 이상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선생님과 각별한 사이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 나는 화가 나기도 했고 동시에 침울해져갔다.

 

여름 방학을 맞았고 나는 그녀와 여전히 가깝게 지냈다. 부모님께서 모두 일하러 나가시는 것은 우리 집과 같았으나 동생들, 할머니, 도우미 아주머니까지 있었던 우리 집과 달리 그녀 집은 우리들 세상이었으니까. 함께 방학 숙제도 하고 책도 읽었다. 나 말고 다른 친구들이 더 있을 때면 그녀는 마당에 나가 수영을 하자고 했다. 마당이 수영장이 되는 것이다. 그녀가 수영장이라고 하면 물 한 방울 없는 마당이 그 순간부터 수영장이 되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서 그런 재주를 배웠단 말인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학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그런 재주를.

그날도 놀다보니 끼니 때가 지난지도 몰랐다.

“우리 짜장면 먹으러 가자.”

놀던 자리에서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나는 계현이를 나는 무슨 소리인가 해서 쳐다보았다. 중국집 놀이를 하자는건가?

놀이가 아니었다. 지갑을 챙기더니 계현이는 나를 데리고 시장 통에 있는 허름한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옆으로 드르륵 미는 문. 유리문엔 빨간 글씨로 짜장면, 짬뽕, 탕수육 이라고, 메뉴가 쓰여 있었다. 이런 중국집에 와보는 것도 처음이고, 어른 없이 이렇게 뭘 먹으러 식당에 와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간짜장을 시켜서 먹었고, 애들끼리 왔다고 이상하게 보지나 않을까 신경이 쓰이는 나와 달리 계현이는 마치 자기 집 방에서 먹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짜장면을 먹었다.

그 다음 들른 곳은 더 어이가 없었다. 그 건물 2층의 다방이었으니까. 요즘 말하는 아저씨 다방 같은 곳인데, 거침없이 들어가 앉더니 생각할 것도 없이 쌍화차를 먹겠다는 것이다. 쥬스나 우유, 코코아도 아니고, 이름도 이상한 쌍화차를, 나도 따라 시켰다. 그 순간엔 그냥 따라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래서 짜장면 먹고 나면 우리 아빠는 꼭 여기 들러서 쌍화차 마셔.”

과연 그녀 말대로 그곳에 여러 번 와보았는지, 계산할 때보니 다방 주인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도대체가 이 세상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 같았다.

결정적인 사건은 겨우 엽서 한 장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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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13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엽서 한 장, 기대되어요.

hnine 2012-07-14 08:18   좋아요 0 | URL
네, '나'는 받지 못하고 박계현만 받은, 담임선생님으로부터의 엽서랍니다 ^^

책읽는나무 2012-07-14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잖습니까! 나인님!
드라마도 한 번에 쭈욱 몰아서 보면 드라마 정말 재밌더라구요.헌데 글도 한 번에 상,하권을 쭉 몰아서 읽어야 푹 빠질 수 있어 좋아요.
음~ 나인님의 시나리오도 쭈욱 1회부터 한꺼번에 읽으니 좀이 쑤시네요.ㅠ
다음편 빨리 읽고 싶어서 말입니다.

읽으면서 저 또한 어릴적 친구를 떠올렸습니다.제친구는 2학년때 전학을 왔어요.
그친구는 부산에서 전학을 왔어요.
제가 살고 있는 곳은 더 좁고 작은 동네여서 부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서울과 같은 느낌의 대도시나 마찬가지였죠.^^
내친구도 부자였고(아버지가 공장 사장님이셨으니까요.) 예뻤고,재주도 많았고,항상 자신감에 넘쳤고,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고(특히 중학교 올라가선 목을 매는 남자들도 많았어요.)
가장 부러웠던 것은 부모님 두 분이 배우뺨칠만큼 미남,미녀이신데다 서울사람이어서 말투도 나긋나긋하면서 참 교양있으신 분이셨다는 것이 가장 부러웠어요.ㅋㅋ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버스에서 내려 친구집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정말 잘생기신 친구 아버지를 만났는데 친구는 얼른 달려가 아빠와 함께 입을 맞추던 모습이 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암튼..그친구와 단짝인 제가 참 많이 자랑스럽기도 했었지만 줄곧 열등감도 느끼게 해준 친구였다죠?^^ 그친구가 내내 떠올랐네요.그친구는 중학교때 타도시로 전학을 다시 갔는데 그동안 성장하면서 몇 번씩 만날때면 항상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있더라구요.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다는둥,파티를 나가야 한다는둥,살사댄스를 배우고 있다는둥...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친구라는 괴리감은 어릴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더군요.
지금은 그친구는 미국가서 전문직 일을 하고 있다네요.아직 결혼도 안하고 말입니다.ㅎㅎ
혹시나 도움이 되실까 싶어 주절주절 제친구 얘기를 읊어봅니다.^^::

암튼..그친구가 갑자기 떠올라 더욱더 몰입되는 소설이네요.
정말 엽서에는 뭐라고 씌어 있었을까요?

hnine 2012-07-14 15:05   좋아요 0 | URL
책읽는 나무님, 첫회부터 읽어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데, 이렇게 기억 한자락까지 풀어 보여주시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 기억 속에는 여럿이 공유하는 부분이 있는가봐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는 작품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의 하나도, 모두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어떤 부분을 움직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요.
저는 이 이야기의 시작만 제 경험일뿐, 허구가 더 많아요. 어떤 결말이 될지 기다려주세요 ^^
 

그때 나는 그녀의 무엇이 부러웠을까.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부러웠을까? 지금도 나는 정확히 그 기분을 내 언어의 범위에서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아이한테는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느낌?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 그러면서 불안 한 자락이 나를 휩싸오는 것을 느꼈던 것은,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이 최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기 때문 일거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일도 없었다. 밖에 나가 노는 것보다는 집에서 혼자 책을 읽는 쪽을 알아서 택하는 아이였으니 늘 칭찬과 기대를 받았다. 그런 칭찬과 기대는 어느 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보다는 무엇을 해야 하나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열 살 갓 넘은 나는 이미 열 살 갓 넘은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가 전학 오고 나서 첫 학기는 그래도 내가 일등의 자리를 유지했지만 그녀와 별로 큰 점수 차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신경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의 주위엔 늘 친구들이 따랐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힘들이지 않고도 옆에 있는 사람을 재미있게 했다. 일부러 웃기는 말이나 행동을 지어내서가 아니라 그녀는 그녀 자신을 결코 심심하게 두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 10분동안  필통 속의 연필이라도 꺼내어 사람을 대신해 놀고는 했다. 연필 사람을 손에 쥔 그녀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즉흥적인 대사가 흘러나왔고 그럴 때 그녀는 무대 위 연극 배우 같았다. 자신의 놀이에 몰입해있는 그녀의 모습은, 경이로왔다.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마포지방법원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박계현 검사님과 통화하고 싶은데 구내전화 몇 번으로 걸어야 하나요?”

일단 대표 전화 번호로 건 후 교환원에게 물어보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곧 통화 연결음 신호가 들려 왔다.

“박계현 검사님 사무실 김OO입니다.”

웬 남자의 음성이다.

“아, 여보세요? 박계현 검사님, 자리에 계신가요?”

막상 전화를 걸고 나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있었다. 누구시냐, 무슨 일로 그러시냐는 의례적인 물음에 대충 얼버무리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고, 기다리고 있는 동안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이러다가 내가 제발 그냥 끊어버리게 되지만 않기를 바라고 있을 때 수화기 저편에서 웬 씩씩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박계현입니다.”

낯선 음성이었다. 하긴 20년도 더 전의 목소리가 그대로이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

“저, 안녕하세요? 저는 김나영이라고 하는데요. 친구를 찾고 있어요. 혹시 3,4학년을 서울 OO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았나요? 제가 아는 친구가 맞나 해서 그러는데요.”

“서울 OO 초등학교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나왔습니다만.”

아, 그러고 보니 말투에서 부산 억양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아니구나. 내가 찾는 그 박계현이 아니었어.’

실망했던가? 아니면 안도의 한숨이었던가. 나는 실례했다는 말로 황급히 전화를 끊고 긴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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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11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으로서 반가움이 ㅎㅎ
그런데 찾던 박계현이 아니군요. 점점 재미있어져요.

hnine 2012-07-11 21:07   좋아요 0 | URL
에궁,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프레이야님, 부산 토박이시군요 ^^
지금 생각으로는 박계현을 찾아내는 것으로 마칠까 생각 중이랍니다.

프레이야 2012-07-12 19:35   좋아요 0 | URL
토박이는 아니고 출생지는 서울이에요.
5살적 아빠의 사업 실패로 엄마의 친정 가까이로 이사를 왔다고 해요.
7살에 입학한 초등학교부터 주~욱~ 부산에서 다녔지요. 세상은 넓은데 왜 이리 좁은 구석에서만 살고 있는지 몰라... 흑흑 ㅠ
타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어요.ㅎㅎ

hnine 2012-07-12 22:16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시군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대도시로만 다니셨어요 ^^
7살에 입학하셨다니 저보다 학교는 선배시겠어요.
(저도 사실 7살에 입학했다가 엄마께서 보시기에 안되겠다 싶으셨는지 그만두게 하시고 1년 후 8살에 제대로 입학시키셨대요 ㅋㅋ)
타도시 어디에서 살고 싶으신지...저는 어줍잖게 타도시 몇군데를 다녀봐서 그런지 제가 나고 자란 곳이 제일 편하더라고요.

순오기 2012-07-1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초등친구 박계현이 아니었군요. 휴~~~
1.2.3.4회 좌르륵 읽으며 덩달아 마음이 들썩여지네요.^^

hnine 2012-07-12 09:46   좋아요 0 | URL
좌르륵,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예, 주인공 아이가 머리 속으로 그리던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았어요 ^^

2012-07-12 0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2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07-13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시간을 좀 넉넉히 가지고 1편부터 읽어보려 ..오늘밤에 다 읽었습니다.
아.. 읽으면서 저의 초등학교 시절이 문득..
네 .. 정말 그런 친구들이 있었어요.. 나와는 정말 다른 세상..
전학을 왔는데 어떻게 한달 만에 보는 시험에서 전교 1등을.. ㅠㅠ
게다가 제가 가장 모자라는 체육과 미술 ..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까지 겸비한 ..

그 친구는 지금 무얼할까.. 어느 곳에서.. 하는 생각을 읽는내내 저도 해보았습니다.

박계현 검사가 그 친구가 아니면 .. 그 친구는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지...
그걸 떠나 앞으로의 이야기들이 저도 무척 궁금해집니다.. ^^
음.. 슬쩍 그 박계현 친구보다 소설속의 나의 이야기들.. 도 더욱 듣고 싶어집니다.. ^^

hnine 2012-07-13 09:39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런 친구를 마음 속에 담고 있는 분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단순한 경험담이 아니라 '이야기'가 되게 하려면 좀 더 극적이고 재미있는 요소를 넣어야 할텐데...머리가 잘 안돌아가네요 ^^

비로그인 2012-07-14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주인공 소녀가 저랑 무지 닮았어요. 지금도 엄청나게 아쉬워하고 있는 또 다른 삶, 생동감이 넘치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누군가의 영혼. 계현이라는 친구가 제게 그때의 시간을 다시 겪어보게 만드네요. 지금도 그렇고 어떻게 사는게 정말 이 삶을 생생하게 사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도 누구 말 어긴 적도 없고, 해야하는 일 게을리 한 적도 없는데, 그런데도 늘 나보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주변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뭘까요?

hnine 2012-07-15 07:10   좋아요 0 | URL
수다쟁이님, 늘 나보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은 제 경우엔 마흔 정도 넘어서 안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행복을 누려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는 그 행복해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걱정이 있고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계현이라는 친구도 아마 그랬을거고요.
 

 

 

그날 신문에서 그 기사를 보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그날까지 넘겨야 하는 번역물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고 컴퓨터에 앉아 있던 나는, 아파트 현관 문 밖에 툭 신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새벽 5시가 되었음을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다리뿐 아니라 온 몸에서 쥐가 나는 것 같았다. 발 디딜 때마다 찌릿찌릿하는 것을 느끼며 신문을 집어 들고 와 마루의 어항 불빛 아래에서 신문을 펼쳐 놓고 무심히 지면을 넘기고 있었다. 기사를 눈으로 훑고 지나가다가 이번에 새로 탄생한 부부 법조인을 소개하는 제목을 보았는데 언뜻 ‘마포 지검의 박계현 검사와’ 라는 글자가 눈에 스치고 지나갔다. 기사 옆의 사진은 흑백인데다가 단체 사진이어서 얼굴을 확실하게 확인하긴 어려웠지만 나는 그 사진에서, 그리고 그 기사에서 한동안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박계현. 검사가 되었구나. 그래, 그럴 만 해. 뭔가 한 자리 할 거라 생각했어.’

그녀의 신분과 소재지를 알게 되자 전혀 생각지도 않던 마음의 움직임이 느닷없이 일어났다. 그녀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어떻게 그녀는 내가 취약했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날 수 있었는지. 아니, 그녀에게 뛰어나지 않은 것은 없었다. 특히 그녀의 미술 실력은 그 당시 이미 초등학생의 수준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나는 방과 후 일주일에 두 번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고 그녀는 화실엘 다니고 있었다.

“화실엔 일주일에 몇 번 가?”

나와 달리 매일 화실에 가는 것 같기에 물어보았다.

“매일”

“매일? 매일 가는 화실 많지 않은데. 나는 피아노 월요일이랑 목요일에만 가거든.”

“우리 화실도 원래 그럴 거야 아마. 일주일에 두 번인가, 한 번인가. 그런데 나는 매일 가고 싶어서 매일 가.”

내가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한다는 그 자신감 역시 나에게는 없는 것 중 하나였다.

그녀 화실에 한번 따라 간 적이 있었다. 같이 숙제를 마치고 뭘 할까 하다가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는지 그녀는 갑자기 화실엘 가자고 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화실은 보통의 가정집 같이 생긴 곳 2층에 있었다. 밖으로 통해 있는 계단을 올라가니 옥상이 나왔고 작은 간판이 붙어 있는 화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수업이 없는 날인지, 아직 문 열 시간이 아니었는지, 화실에 다니고 있는 계현이가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좀 어이가 없었다. 당연히 다시 돌아 나올 줄 알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그녀는 발길을 돌리는 대신 화실이 있는 옥상 마당에 가지고 간 화구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보통 우리가 쓰는 것보다 두 배는 돼 보이는 커다란 스케치북과 물감, 팔레뜨, 붓통을 늘어놓고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림은 꼭 화실 안에서만 그리란 법 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초록색, 파란색, 붉은색, 서너 가지 물감들을 풀어놓고 물을 섞으니 모두 맑음이라는 새로운 색으로 변신한 것 같았다. 그 색들이 그녀의 붓을 따라 종이 위를 채워 나가는 동안 나는 잠자코 서서 그녀의 그림을, 그림 그리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한없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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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9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사가 되었군요. 앞으로의 행로가 점점 궁금해져요.^^

hnine 2012-07-10 05:51   좋아요 0 | URL
검사가 되었을까요? ㅋㅋ 지켜봐주세요~

하늘바람 2012-07-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검사가 된 친구라
오호 정말 점점 궁금한데요 그림까지 잘그렸던 친구.

hnine 2012-07-10 05:52   좋아요 0 | URL
저는 늘 그림 잘 그리는 사람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아무때나 저렇게 그림 잘 그리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불쑥불쑥 떠오른답니다.

비로그인 2012-07-0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는 나에게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처럼 그려지네요. 왠지 그런 그녀가 한순간 왈칵, 하고 마음의 상처를 풀어낼 것만 같아요. (멋대로 추측 ㅎㅎ) 아무튼, 소싯적 제가 부러워했을 누군가를 자꾸만 떠올리게 만드네요. 아주 어렸던 저는 그런 아이와 친구를 하는 것조차 맘상해하는 예민한 아이였던 것 같아요 ( '')~

hnine 2012-07-10 05:52   좋아요 0 | URL
아, 부러워하는 아이와는 친구를 하는 것 조차 맘 상해하는 예민한 아이...또 하나의 새로운 캐릭터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무스탕 2012-07-09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그녀가 부러워지고 있어요.
모두가 맑음이라는 색을 만들어 내는 재주라니요!!!

hnine 2012-07-10 05:55   좋아요 0 | URL
저 대목은 저 학교 다닐 때 반에 그림을 무척 잘 그리던 친구를 연상하며 썼는데, 정말 그 애는 물감을 풀어서 물과 섞어만 놓아도 벌써 다른 아이들과 그 색깔이 달라보이는 것 같았어요. 물처럼 맑아보이는...

마녀고양이 2012-07-09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인언니, 소설 연재 시작하셨군요.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어요.... ^^

hnine 2012-07-10 05:56   좋아요 0 | URL
깜짝 놀래켜드렸군요 제가 ㅋㅋ
알라딘 서재 생활 오래 하다보니 이제 제가 겁나는게 없나봅니다.
 

 

 

그녀 집은 우리 집에서 가까워서 등하굣길에 자주 마주쳤다. 그러다가 같이 숙제할래? 그럴까? 이렇게 되어 학교 끝나고 숙제도 같이 하고,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우리 집 보다는 그녀 집으로 갈 때가 많았는데 우리 집엔 할머니도 계시고 동생들까지 북적거린 반면 그녀 집은 항상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주인집이 아닌 셋방이었던 그 녀의 집. 엄마 아빠 모두 일하러 가시고 형제자매도 없으니 학교 끝난 후 오후 시간을 그녀는 친구를 불러 함께 놀거나 그렇지 않은 날은 화실에 다녔다.

대문 앞에서 벨을 누르면 누가 나와 대문을 열어주는 대신, 직접 열쇠로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기분은 새로웠다. 마치 우리들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자유의 맛이랄까. 우리는 숙제를 후다닥 마치고 참으로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고 놀았다. 그 나이 때 여자 아이들처럼 인형을 가지고 놀긴 했으나 그녀가 제안하는 방법은 그때까지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던 방법이 아니었다. 즉, 이 옷 입혔다 저 옷 입혔다,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꾸며주면서 누구 인형이 더 예쁜가, 공주 목소리 흉내 내어 몇 마디 주고받는, 그런 놀이가 아니라 인형은 우리가 만든 세상의 한 구성원일 뿐이었다. 그 방에 있던 모든 물건이 우리의 놀이, 우리가 만드는 마을에 포함되었다. 책상은 회사 건물이 되었고, 옷장 속은 숲 속이 되었다. TV위에 놓여있던 곰 인형은 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되어 인형들이 타고 다녔다. 이불장에서 이불을 꺼내면 그 위에 올라 앉아 구름 위를 타고 나는 양탄자가 되었으며, 천장 형광등은 갑자기 나타난 외계물체가 되기도 했다. 불을 켰다 껐다 하며 외계인들의 신호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엔 그녀가 있었다. 무얼 해도 새로웠고 빠져들게 만드는 그녀를 나는 흉내도 낼 수 없었다. 어둑어둑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면서 더 놀고 싶어 서운했다. 그녀와 함께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급기야 나는 아침에 학교 갈 때 집에서 일부러 좀 일찍 나왔고, 그녀 집에 들러 그녀가 아침 먹고, 옷 입고,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기다렸다. 그녀 집의 아침 풍경은 우리 집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녀는 엄마보다는 아빠와 더 친한 듯 보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아빠랑 꼭 몇 분이라도 수학 문제를 함께 푼다고 했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아빠가 가방도 함께 챙겨 주고 준비물도 챙겨 주어 학교를 보내는 것을, 새벽 일찍 나가시고 밤늦게 들어오시는, 얼굴 보기도 힘든 나의 아빠, 그리고 엄한 우리 집 분위기를 떠올리며 그저 멍한 눈으로 그 애의 아침 동선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서글픔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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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7-08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보니 저도 어린시절 기억이 저도 제 친구가 집앞에 와서 기다렸지요
가방챙겨주는 아빠라 정말 근사한 아빠였군요 하지만 그런아빠 정말 드물잖아요
둘 사이가 어떻게 진행될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hnine 2012-07-08 20:45   좋아요 0 | URL
괜히 시작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시작했으니 계속 가볼께요 ^^

하늘바람 2012-07-09 06:39   좋아요 0 | URL
ㅎㅎㅎ
괜히시작은요
넘 재미있는데요

hnine 2012-07-09 08:0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울적한 기분을 달래보려고 시작했어요...^^

비로그인 2012-07-08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으, 끝까지 작가님과 함께 하는 독자가 되겠습니다, hnine님!
제가 꿈꾸던 친구와의 만남을 그린 것 같아서 아주 많이 설레네요.

hnine 2012-07-09 05:45   좋아요 0 | URL
예, 말없는 수다쟁이님, 그래주세요 ^^

프레이야 2012-07-09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서히 새로운 세상으로 끌고 가는 친구네요.^^

hnine 2012-07-10 05:47   좋아요 0 | URL
그래야되겠지요? ^^
쓰고서 다시 읽어볼 때 마다 고치고 싶은 데가 생기네요 ㅠㅠ

무스탕 2012-07-0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 주시면 바로바로 읽진 못해도 몰아서라도 다 읽겠어요.
근데, 참 신기한게, 그렇게 어려서가 어쩜 이렇게 기억이 잘 나세요? +_+

hnine 2012-07-10 05:50   좋아요 0 | URL
아이쿠, 무스탕님, 고맙습니다. 너무 길게 가지 않고, 짧게 끝내려고 하는데 모르겠네요.
그리고 글중 주인공을 '나'라고 1인칭 주인공으로 썼더니 다들 저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아시나봐요, 전 주인공 아이처럼 당연히 일등만 하고 어쩌구...그렇지 않았는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