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지구는 평평해진다고 한다. 지역적 특성도 희미해지고, 그래서 지리학은 존재의 필요가 없다고 한단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그럴까, 난 지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지리학의 중요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향후 10년 이내로 지리학의 위상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 믿는다. 

한국경제 2009.11.5 

  누가 세계를 평평하다고 하는가.
  부유한 중심부는 ‘가장 평평’하지만 가난한 주변부는 ‘가장 울퉁불퉁’하다.”

 하름 데 블레이 미시건주립대 지리학과 교수는『공간의 힘』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세계화로 여러 지역이 유기?통합적이고 평등해져 간다는 의미에서 ‘세계는 평평(flat)하다’(토머스 L. 프리드먼)고들 하지만, 그래도 ‘세계는 여전히 울퉁불퉁하다’는 것이다.
 전작『분노의 지리학』에서 세계의 문제들을 지리학적 시각으로 분석한 그는 이번 책에서 세계의 중심부와 주변부를 오가며 국가와 개인, 자원과 종교 등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구
 
 21세기에도 여전히 세계는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뉘며 국가도 수도권과 지방으로 나뉘어 있다. 단일 문화권의 경계를 넘는 이주가 활발하다고는 하지만 지구촌의 70억 인구 중 68억 명은 평생 모국에서 살아간다. 그는 “거의 모든 문제가 지리적 장벽에 좌우된다”면서 “세계 인구의 15%가 사는 중심부의 연간 소득이 전 세계의 75%나 되는 현실”을 지적한다. 북미와 유럽, 동아시아 같은 나라들의 부는 갈수록 늘어가는 반면 아프리카 등 빈국들의 부는 줄어들기만 한다.
 실제로 ‘중심국가’들은 외형상 문을 활짝 열어두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현재의 특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중심으로 들어오려는 이주민들을 온갖 방법으로 막는다. 그 ‘가장자리의 끝’에서 세계 인구의 85%가 세계 총 소득의 25%에 매달려 살아간다.

 도시와 시골의 편차도 그렇다. 세계의 절반인 도시 인구는 나머지 절반의 시골 인구가 소비하는 것보다 10배나 더 많이 소비하고 있다. 나라나 개인별로 보면 불균형은 훨씬 더 심각해진다. 미국인들의 평균 자원 소비량은 방글라데시인들의 30배에 달한다. 특정 자원에 한정시켜 봐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루 평균 생수 소비량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네 배 이상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 도시사회의 소비양상이 전 세계에 적용된다면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네 개의 지구가 더 필요하다”고 꼬집는다.

 “지구는 문화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아직 울퉁불퉁한 땅이며, 그 구획은 수많은 이들을 속박하고 있다. 공간의 힘과 인간의 운명은 여러 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세계 중심부의 여러 국가들은 자신들의 풍요로운 영역에 더 가난한 세계인들이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 벽을 세우고 있으며, 이로써 대조를 더욱 극명하게 하고 충돌의 불씨를 제공하는 중심부-주변부 구분을 강화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곳곳은 극심하게 아프다
 
 ‘울퉁불퉁한 세계’의 극단적인 단면은 질병 등 생사와 직결된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말라리아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열대열 말라리아는 열대 아프리카에서 발생한다. 이 말라리아는 중남미나 아시아, 태평양 섬들에서 생기는 말라리아보다 훨씬 위험하다. 그런데 큰 문제는 이들 지역의 말라리아 퇴치 전략마저 실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변부 사람들이 여러 풍토병과 전염병의 이중고를 겪지만 그 지역에서 수련 받은 의료진은 더 높은 임금을 주는 중심부로 건너가고 있다.

 그가 제시한 지도를 보면 1990년대 말 멕시코에서는 말라리아 고위험 지역이 꽤 넓게 펼쳐져 있지만 미국 남부에서는 말라리아가 50여 년째 발병하지 않았다. 모기 때문에 생기는 뎅기열도 주변부인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저위도 지역의 100개 이상 국가의 인구 25억명이 뎅기열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더욱이 해마다 뎅기열에 걸리는 인구 5000만명 중 대다수가 아동이다. 그야말로 ‘극심한 울퉁불퉁 현상’이다.
 
 
종교가 부추기는 분쟁과 고립
 
 공간의 힘은 어떤가. 그는 “공간의 힘은 세계지도 위에서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땅 위에서는 장벽과 바리케이드, 순찰대와 감시관들에 의해 확인된다”고 표현한다. “일부 학자들이 오늘날을 이주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우리 중 절대다수는 태어날 때와 같은 정부와 언어·자연·종교?의료 환경 속에서 삶의 마지막 날을 맞는다. 이주에 대한 제약이 유연해지기보다 더욱 강화돼 세계를 평평하게 하기는커녕 더욱 울퉁불퉁하게 만들고 있다.”

 종교의 근본주의도 지역민들의 운명을 바꿔놓는 요소다. 그에 따르면 지리적 이동이 잦아져 다른 종교인들과 만나기 쉬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만나봐야 충돌만 가속할 뿐이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슬람교와 다른 신앙 간의 충돌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 인도에서 힌두교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평화롭다고 알려진 불교에서조차 정통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지역인의 절대다수가 태어나고, 더 많은 이동인들이 출발하는 영역은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영역이다. 그들이 만날 때쯤이면 그 중 상당수가 자기 종교의 내부충돌, 그리고 종교간 분쟁을 이용하는 근본주의자들의 부추김에 의해서 근본주의화돼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다른 종교가 우세한 지역에 강제와 개종을 통해 자기 신앙을 심으려 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이미 조밀한 문화적 모자이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며 세계를 그들 종교의 경전에 나온 것과 같은 대격변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지리 장벽을 높이는 언어 문화
 
 지리적 장벽은 문화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뜻하고 습기 찬 저위도 지역에는 소집단별로 언어를 갖기 때문에 언어의 종류가 많다. 뉴기니 섬에서 쓰이는 언어는 900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2000개다. 이에 반해 고위도의 유럽 국가 언어는 200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두 세가지가 우세하다.

 그의 지적대로 근대화 과정의 제국주의와 현대의 문화적 제국주의에 떠밀려 토착 언어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한 나라에서도 표준어 장려 정책으로 지방 사투리가 없어져 간다. 문화를 담는 그릇인 언어가 사라지니 문화의 다양성까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언어 문제의 이면은 더욱 심각하다. 그는 “영어가 정부, 행정기관, 상업, 고등교육의 수단인 세계 공용어로 자리잡으면서 속국의 국민들 중 영어에 능통한 이들은 행정과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면서 이를 “언어적 위계에 새롭고 결정적인 층이 하나 더해진 것”이라고 비판한다. 
 

ps : 저자의 위의 글은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에 딱 들어맞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개화기 영어 천재로 불리운 윤치호의 근대화론이나, 미국 유학후 한국에 돌아온 이승만의 정치 인생, 한국전행 후 '통역정치' 그들이 정치, 행정 분야의 요직에 자리를 잡고 또 그들의 후손들이 그 자리를 이어잡으면서 영어를 잘 해야지만이 출세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는 한국의 구조가 만들어진것이다. 그것들이 현재 '영어 광풍'이라고 하는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 비판만 하면서 영어 필요없다. 필요있는 사람들만 영어 하면되는거 아니냐 하는 식의 현실안위적이 시각 또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 강준만 교수가 칼럼(강준만의 '영어 광풍의 합리성'이란 몇년 전 칼럼(http://blog.aladin.co.kr/mramor/1410200). )에서 썼듯이 '영어광풍'에 대한 합리적이 이해와 대처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는 식민지 정부가 토착민들의 영역에 통제권을 행사할 때 그들이 왕의 대리자 역할을 하며 통치자들을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이제 세금징수원에서부터 학교장에 이르기까지, 대금업자에서 우체국 직원에 이르기까지, 이득은 영어권에 있다.”
 
 
세계를 평평하게 만드는 실천 노력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의 희망은 ‘장벽 낮추기’다. 그 대안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가 ‘중요한 건 효율적인 실천’이라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국들이 빈국에 제공하는 원조는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며, 빈국이 자력 소생할 기회를 걷어차지 않도록 해야 하고, 주변국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후 문제 등에 대한 책임감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당부한다.
 『공간의 힘』은 오바마 대통령이 2008년 대통령 선거와 1월 취임식 사이에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의 하나로 추천됐다. 세계가 결코 평평하지 않다는 것을 지리학과 문화사회학의 렌즈로 촘촘하게 비춰주는 역작이다.
 
 
고두현 (한국경제 기자) 2009.11.5
 
 
하름 데 블레이
미시건 주립대학 지리학과 교수로, 『분노의 지리학(Why Geography Matters)』을 비롯해 3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협회의 평생명예회원이자, 미국 ABC TV 프로그램 ‘굿모닝 아메리카’의 지리학 에디터로서 7년간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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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뉴스에서 서울의 모대학에서 학생들의 평가를 상대평가로 더욱더 강화하겠다는 기사가 나왔다. 예를들어 교직실습같은 몇몇 과목들은 아직도 절대평가를 하는데 이런 과목들까지 모두다 상대평가를 한다는 것이다. 우석훈씨가 뭔가 이런일이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작년말 칼럼에 절대평가 주장을 한 내용의 글이 기억나서 옮겨놓는다. 아마도 교육실습까지 상대평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약 9-8년 전에 했던 그런 낭만적(?)인 교생실습은 영영 불가능해질것이다. 그리고 괜히 치기어린 낭만을 추구했다가는 영영 패배자의 낙인이 찍히겠지... 이런 생각 불편하다. 
 


한겨레신문 2009.11.14 [야!한국사회] 대학, 절대평가로 바꾸자

“요즘 대학생”이라는 용어는 아마 대학교에서 요즘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유행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용어는 탐탁지 않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조직이라는 눈으로 보면, 나는 대기업, 정부기관, 공무원 조직, 그리고 시민단체까지, 아마 한국에서 가장 많은 유형의 조직을 경험해본 사람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총리실에 근무하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고, 대학에 있는 순간이 가장 마음이 불편했다. 그룹사 시절의 현대도 금기가 많고, 관성이 많았고, 눈치 볼 곳이 많았지만, 그래도 대학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밖에서 보는 사람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대학은 지금 지옥이다. 불신, 불안 그리고 증오와 같은 것이 가득 차 있다. 꿈은 물론 ‘꿈’이라는 단어 자체도 잃어버린 듯한 표정 없는 학생들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고,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제시할 수 있는 방안도 없다는 것은, 정말로 처음으로 겪는 무기력증이라고 할 수 있다. 낭만? 지옥에나 가버려.

지난 6주 동안 성균관대를 시작으로, 지난주 서울대, 그리고 이번주에 동국대를 끝으로 서울의 큰 대학들을 한 번씩 돌면서 강연회를 했다. 대학의 분위기는 대부분 우울했다. 지금 한국의 대학생들은 앓고 있고, 그들은 모두 동굴에 갇혀 있다. 일부 과에서는 한 학기 등록금이 700만원이 곧 넘어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들이 돌았고, 학생들은 왜 대학에 다니는지, 그리고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그야말로 학문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문사철이라고 불리는, 취직 안 되기로 소문난 과의 대학원 진학률은, 한 명, 두 명,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부르스’가 펼쳐지고 있다. 한마디로, 서울대 법대와 상대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대학, 대부분의 과에서는 소리 없는 눈물과 극도로 높아진 경쟁만이 지배하고 있다.

자, 나에게 딱 하나만 개선할 수 있는 현실적 권한을 준다면, 나는 이 대학 사회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물론 등록금을 없애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이건 학생들이 직접 바꾸기 전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자, 생각을 해보자. 한 가지가 있다. 채점 방식을 지금의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꾸는 것이다. 이건 돈 드는 일은 아니고, 한국에서 가장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는 교수들이 절대평가를 할 수 있는 능력과 소양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절대평가만 도입해도, 학생들끼리 서로 협력해서 공부하고 문제를 풀 수 있는 최소한의 ‘협동’과 ‘연대’가 시작될 것이다. 동료들을 적으로 보고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한 미션 임파서블, 그 불신 지옥은 이 간단한 장치만으로도 해소할 수 있다. 학점 인플레? 그런 거 좀 생기면 어떤가. 대신에 학생들에게 동료와 친구를 돌려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친구는 적이 아니다. 그 간단한 사실을 배우지 못하고 대학을 졸업하는 상황, 미국의 대학 교육처럼 최소한의 시민으로서의 소양도 우리는 지금 가르쳐주지 못하는 셈이다. 경쟁력은 유럽에 뒤지고, 기초 교육은 미국에 뒤지고, 창의성은 사라지고, 저격수 같은 스나이퍼 정신만 길러주는 한국 교육, 지금 대학은 지옥이다. 절대평가가 지금 우리 대학생들에게는 절대로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구조적으로 친구를 적으로 돌리게 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학문도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기업도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 지금 밑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중이다. 창의와 협동 없는 암기기계들과 21세기를 열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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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시즌이 거의 끝났다. 졸업식하면 의례 여러가지 풍경들이 펼쳐진다. 졸업하면 떠오르는 것들 학사모, 부모님과 친구들과의 사진, 졸업식, 상장, 자유 등등. 하지만 최근 졸업식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계란, 밀가루, 교복 찢기 등등. 올해도 어김없이 난 생활지도부 소속이기때문에 졸업식 내내 정문에서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어야했다. 밀가루와 계란을 사들고 오는 아이들의 무기를 일일이 뺏어야(?) 했다. 나름 작년보다 올해 아이들의 밀가루와 계란의 규모가 적다는 것에 위안을 받으면서...

한동안 뜸했다. 너무 조용했다. 그래서 이상했다. 근데 역시. 정문 구석에서 누군가 밀가루를 뿌렸다. 그게 도화선이었다. 여기저기서 밀가루가 보였다. 그래도 다행히 계란의 거의 없었다. 어찌하다 보니 나도 한번 밀가루 폭탄을 맞았다. 제길...ㅋㅋ 이런 상황에서 언론에서는 연일 삐뚤어져 있는 졸업식 풍경에 대한 날선 보도들이 연이어지고 있다. "막나가는 아이들", "알몸 졸업식" 등등. 특히 올해는 몇몇 중학생들의 과도한 폭행과 알몸 사건으로 졸업식에 대한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물론 현장에서 본 나의 생각으로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단순 해방감에서 나오는 치기어린 행동으로 봐줄수 있는 정도라 생각한다. 물론 또한, 몇몇의 경우는 도를 넘을 경우도 있다. 중요한 건 이런 학생들의 행동에 일정부분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는 데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무조건 학생들에게만 원인이 있다는 듯 태도를 보인다.


경향신문 2010.2.16 [뉴스분석]졸업식 폭력 되풀이 무엇이 문제인가

ㆍ삐뚤어진 가해자, 당연시한 피해자, 수수방관 교사들
ㆍ“어른들 먼저 자성할 때” 교과부 주내 대책 논의

‘졸업식 뒤풀이’를 빙자해 도를 넘은 학교폭력이 되풀이되고 있다. 경기 고양의 한 중학교에서는 졸업생들이 선배들의 강압으로 알몸 뒤풀이를 한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교육 전문가들은 선·후배 간의 강압적인 지배문화와 과시욕, 어른들의 방치가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분석했다. 치기어린 일부 학생만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자성과 대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15일 경기 일산경찰서에 따르면 고양 ㅇ중학교 출신 고교생 20명은 지난 11일 오후 2시쯤 졸업식을 마친 이 학교 졸업생 15명을 학교 근처 아파트 뒤로 불러내 밀가루를 뿌리고 옷을 모두 벗도록 해 인간 피라미드를 쌓는 졸업 뒤풀이를 강요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장면을 담은 사진 40여장은 지난 13일 새벽부터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됐다. 파문이 커지자 해당 인터넷사이트는 사진을 모두 삭제했으나 사진 파일은 이미 누리꾼들 사이에 퍼져 파문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경찰은 가해 학생들을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처벌키로 했다. 이날까지 피해 학생 7명을 조사했고 나머지 피해 학생들을 조사한 뒤 가해 학생 모두를 소환키로 했다.

문제가 된 졸업 뒤풀이 행사는 충동적이고 ‘지배-복종’의 권력관계가 깔려 있는 청소년 문화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사건들은 공통적으로 선배 고교생이 중학교 후배들을 상대로 벌인 일이다. 울산에서는 지난 12일 여고생 등 8명이 중학교 후배 20명에게 이른바 ‘졸업빵’을 거절한다는 이유로 60여만원을 빼앗으려다 경찰에 붙잡혔고, 5일엔 서울 금천구 ㅁ중학교에서는 이 학교 출신 여고생들이 졸업식을 마친 여자 후배들의 교복을 찢고 케첩을 뿌리며 폭행하는 동영상이 유포됐다. 금천경찰서 관계자는 “피해자 쪽에서도 ‘전통·장난일 뿐’이라며 가해자들의 처벌을 원치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면서 “선배들의 비뚤어진 과시욕과 그걸 당연시하는 후배들의 생각에 놀랐다”고 말했다.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분석도 있다. 이계삼 경남 밀성고 교사는 “1990년대 중·후반 태생인 중학생들은 유년기에 외환위기 구제금융과 가정 해체를 겪고 구조조정과 비정규직이란 단어를 들으며 성장한 첫 세대”라며 “인터넷과 TV에 매몰된 아이들에게 남은 욕구와 충동이 비뚤어진 졸업 문화로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련의 충격적인 졸업 뒤풀이는 문제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장난기마저 섞였던 예전의 교복 훼손 전통이 어른들의 방치로 더욱 비뚤어지고 폭력화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은숙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회장은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되는 동안 교사와 학부모들의 수수방관이 뒤풀이 문화를 더욱 폭력적이고 반인권적으로 흐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면서 “학생들 스스로 졸업의 의미를 깨닫고 문제를 인식하게 하는 학교·사회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와 관련된 아주 상반된 내용의 글이 있다. 무엇이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두 글을 본다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할까 하는 인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더욱 재미있을 듯 하다.


엽기적 졸업추태 더 엄하게 단속했으면, 엽기적 졸업추태를 구경하고 방치한 경찰
기사입력: 2010/02/15 [14:16] 최종편집: ⓒ 올인코리아
서희식 서울자유교원조합 위원장

미친거라 봅니다. 저런 것들도 다 처벌할 수 있는 강력하고 확실하고 정밀한 법이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 보는 공공장소에서 교복을 벗는 것도 아닌 칼로 찢고 집단구타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성희롱 성폭행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고, 피해자 학생들은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계란 또는 밀가루를 투척하며 졸업식을 하던 그 때도 너무 하지 않느냐 했지만, 이렇게 까지 나올 줄이야...

‘졸업식추태’ or '졸업식 뒤풀이‘ or '졸업식 꼴불견’ 등의 이름으로 구글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나오는 사진들을 보라. 추태를 당하는 후배 곁에는 머지 않은 곳에 “비닐 우비를 입고-장갑을 끼고-가위를 들고-칼을 들고” 진두지휘를 한다. 이것이 일진이다. 일진의 그룹들이 행하는 집단폭력에 한번 당해본 사람은 절대로 도망도 못 간다. 경찰에 신고는 어림도 없다. 몇시간을 얻어 맞고 정신적 공황상태까지 가서도 보복이 두려워 선처를 호소하며 전학을 가도, 인터넷 사이트로 전학간 학교에 소문을 내어 폭력의 악순환은 마찬가지인 상황인데, 어떻게 신고를 생각하고 고발하여 법정에서 얼굴을 마주대하며 증언을 하겠는가? 더군다나, 경찰도 구경하며 새끼조폭을 키우는 상황인데... 하루 동안 발가벗기고 찟기고 끌려다니다 챙피스런 몰골까지 보여주며 당한 챙피를 무마시킨다는 명목의 ‘술과 담배, 그리고 음주가무’ 장소로까지 강제로 불려나온 꼴사납던 후배들에게 성인식이라는 미명 하에 온갖 '성추행과 성희롱‘이 이어지다, 심하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이것이 일진 주도 졸업식추태의 실체이다.

이들을 파출소에 신고하여 연행해간 적도 있다. 한마디로 수사는 없고, 이름도 적어 놓거나 하는 일도 없이 방면, 귀가조치이다. 피해자의 고발이 없다는 것이다. 등하교길과 주변 차량에 밀가루와 계란이 깨져 엉망인 사진을 보여주어도, 학생들의 추태 사진을 보여주어도, 슬며시 웃기만 한다. 사전 질서유지에 대한 공문도 소용없었다.

이제는 처음으로 사회문제가 된 듯이 떠들고 있다. 작은 지역 범죄조직으로의 입단식이라는 역할을 하는 실체를 깨닫기 바라며,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지나간 졸업식 추태에 대해서도 수사하여 공소시효 전이면, 처벌하기 바란다. 사회봉사라도 시켜야 한다. 그리고, 주동자급 일진세력들은 강력 처벌하여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첨부된 사이트에 들어가 사진을 보라 계란 한 개 던진 것이 아니다. 번질거리는 벽과 벌거벗은 몸 아래 깨진 것만 몇백 개인 듯하잖는가? 또, 도망도 못 가는 공포분위기, 그 자체가 범죄행위임을 경찰은 왜 인정하지 않는가? 막연히 눈 앞에서 해산만하고 귀가조치하였다고 말하면, 끝인가? 경찰은 강압과 폭력을 직접 증명하고, 고발하여야만 수사하는 로봇인가? 치기어린 학생들의 폭력, 또는 일진들의 폭력이라며 온정주의로만 대하지 말라. 가해자들은 동네깡패 수준을 넘어서는 새끼조폭들로 성장하고 있는 범법자들이다.

경찰에 요구한다.
첫째, 알몸추태는 고발이 없어도 ‘성폭행-강간범’ 등과 같은 형사범으로 즉각 수사하라.
둘째, 교복을 칼로 찟고 속살을 드러내는 행위도 ‘성희롱과 성추행’과 준하여 처벌하라.
셋째, 밀가루투척도 적극 만류하고, 조직적 가담자는 경범죄처벌 및 사회봉사 시키라
넷째, ‘바다 or 하천에 빠뜨리기-음주흡연폭행-도심추태’ 등, 엽기적행위도 금지시키라
다섯째, 노래방의 ‘청소년 흡연-음주’단속을 철저히 하고, 청소년문화를 지원하라.

교육청과 학교에 요구한다.
첫째, 졸업 후 입학까지의 문제행동 사실이 확인되면 입학한 학교에서 지도하라.
둘째, 가해학생들의 학생신분에 어긋나는 행동에 대하여는 소속학교에서 지도하라.
셋째, 다양하고 학생들이 동참할 수 있는 건전한 졸업식문화를 교육하고 지도하라.
넷째,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문제학생 자료는 지역별로 공유하고 공동 대응하라.
다섯째, 졸업식추태는 버릇없고 교사를 무시하는 학생을 양성한다. 대책을 마련하라.
여섯째, 교사가 수업뿐 아니라 진로지도(=인생)에서도 존경받도록 심화 연수시키라.


졸업식 추태가 범죄자를 키우는 줄 경찰들은 모르는가?

“밀가루-캐찹-간장-물엿-계란-페인트-칼-가위-비닐우비-막대기(or 종이 막대기)”는 주로 2학년이 마련한다. 돈을 걷던지, 1학년에게 상납 받는다. 가해자는 주로 전년도 졸업한 학생들로 고등학생들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웃학교의 동급생도 있다. 졸업생들은 아예 치마 속에 긴 속바지나 추리닝을 입고 오는 등 사전에 대비하기도 하나, 졸업한 일진 등이 주축인 가해자는 뻔뻔스런 범죄자이다. 교사의 만류에도 꿈적 않는다. 필자가 생활지도부장을 할 때 등교하는 학생들의 소지품을 검사하여 밀가루와 계란 등을 한 자루 압수하여도 소용없었다. 경찰에 공문을 보내며 연락해도 순찰차로 한번 지나치며 구경할 뿐 강력한 제지는 안했다. 학부모님 옷과 주차한 차가 밀가루와 계란 세례를 받아 신고해도 단순한 치기어린 행동으로 온정주의 차원의 해산만 할뿐, 파출소로 데려가도 소용없었다. 청소년 시절의 하루만의 일탈로 볼 뿐, 경찰도 방관자 였다.

문제는 이들이 도망가면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부모와 함께 멀쩡하게 졸업식을 치르고는 집으로 못가고 조폭수준의 선배에 의해 약속된 장소로 가 기꺼이 수모를 당한다. 어짜피 전학갈 것 아니면 같은 동네, 같은 학원의 일진들이라 도망갈 공간이 없으니 부모님 앞에서까지 추태를 보이고 화장실 등에 숨어있다 친구들이 주는 옷을 입고 집에 갔다가는 다시 노래방등으로 끌려 다닌다.

이러한 뒷풀이에서 임신하는 경우도 있으며, 재학생과 졸업생의 동네 일진세력들이 모두 모여 부리는 작은 범죄행위인 추태에 경찰까지 구경만하며 범법자의 길로 어린 학생들을 인도하는 의식의 방관자가 된다. 이러한 집단의식에 참여하지 못한 학생들은 폭력적이며 범죄단체화 되어가는 동네깡패들에게 대항도 못한다. 그리고, ‘졸업식 추태’의 주모자들은 어제든 후배들을 불러모으고 다양한 학교폭력의 잠재적 지원세력이 된다. 이러한 졸업식 추태를 대하는 경찰의 태도는 범죄세력을 비호하고 양육하려는 태도로 뻔뻔한 직무유기라 생각한다. 옷을 찢어 속살을 드러내고 브래지어나 팬티까지 가위로 잘라 외설스런 몰골을 천조각이나 손으로 가린채 도망도 못가고 길가에 서서 야꾸자 입회식을 본딴 신종 일진회 입단식으로 보면 된다.

제주도에서는 집단으로 바다에 뛰어들도록 하고, 청주와 부산에서는 팬티바람으로 거리를 활보하도록 하고, 중앙선에 난장판인 채로 서서 노래부르고 팔굽혀펴기를 하며 교칙적용이 안되는 졸업 후 입학까지의 기간에 통제할 규율을 잃은 채 범죄집단 가입 신고식을 한 폭주-탈선기관차인 것이다. “너무 심하다” 지적하면 어른들에게 눈 부릅뜨고 대드는 작은 범죄집단인 것이다. 범죄집단 신고식을 막 치르는 후배들은 장난감이자 놀이갯감으로 잠시 후 노래방으로 옮겨 음주가무에 공개적으로 성추행할 대상일 뿐이다. 이런, 졸업식 추태를 방관하는 것은 작은 범죄를 키워서 잡겠다는 것인지? 치안수요가 너무 많아 ‘일 바쁘다’며 무시하는 것인지? 경찰청은 직무유기를 멈추고, 학생들의 일탈에 엄정히 대처하기 바란다.


ps : 나 또한 학생들의 이런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졸업식 문화(?)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위 글을 쓴 사람처럼 교사가 경찰이어서는 안되며, 왜곡된 졸업식 문화는 몇몇 문제학생들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란 점이 중요하다 생각된다. 솔직히 예전 졸업식 추태까지 조사해서 "공소시효 전이면 처벌하길" 바란다는 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ㅠ.ㅠ


"무서운" 건 아이들이 아니다. 어른들은 무섭다
만감: 일기장 2010/02/14 01:38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5746

요즘 한국 포털 사이트의 뉴스나 "주류" 신문 뉴스, 방송을 볼 때마다 "무서운 중딩"이니 "무서운 초딩"이니 이런 단어들은 거의 난무합니다. 뭐가 무서운 지 자세히 보면 대체로 후배에 대한 선배들의 폭력, 상납 요구, 그리고 "팬티 바람 질주"와 같은 "이색 졸업식" 등등의 이야기들은 나옵니다. 물론 - 기자들이 그걸 과연 어느 정도 아는지 모르지만 - 선생들의 고압적인 태도나 군에서의 위계질서적 관계, 가정 안에서의 "피라미드" 관계를 본딴 학생들 사이에서의 폭력적인 "우리끼리 질서 만들기"는 독재시대 때는 더 심했으면 더 심했던 것이죠. 굳이 그렇게 말하자면, 선생들의 구타가 더욱더 태심했던 일제 시대때부터 이와 같은 학생들 사이의 사건들이 꽤나 일어나고 있었어요.

1920년대의 <동아일보>를 읽어보면, "운동회에 같이 안나갔다고 급우를 마구 때렸다"는 소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회의 폭력성을 맨먼저 배우는 게 아이들이 아닙니까? 기자들이 보통 잘 언급하려 하지 않는 또 하나의 측면은, 아직도 미시적 (가족적) 차원에서 유교적 분위기가 약간 남은데다 사회로부터의 "낙오"가 두려운 한국 사회에서 학생들에 의한 교사폭행 사건 등이 구미권에 비해서 대단히 드물다는 점이기도 합니다. "왕따" 피해율 (약 20-25%)은 대체로 영국이나 노르웨이와 같은 수준이고요. 이런 부분들을 다 빼놓고 "무서운 초딩/중딩"을 맹비난하니 꼭 "법질서"에 대한 한국 정권의 반복적인 주문을 뒷받침해주려는 의도가 아닌가, 라는 의심은 아주 쉽게 생깁니다. "법질서"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주입시키려면 "당신의 아이가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학부모에게 하는 만큼 더 좋은 수법도 없지요, 뭐. 관변 언론의 일종의 "대민 협박", "겁주기"라고나 할까요?

물론 제가 학생들의 폭력을 정당화할 하등의 의도는 없습니다. 일제 때부터 있어왔다 해도, 독재 정권 때에 고질화됐다 해도, 일부 선생들의 매질이나 고압성을 그대로 모방한다 해도, 어쨌든 폭력은 폭력입니다. 피해자를 생각해서라도 폭력을 절대로 허용할 수는 없죠. 그런데 피해자도 생각해야 하지만, 가해자 역시 학생이고 우리 "배려"의 대상이 돼야 하는데, 이들이 하필이면 왜 가해자가 되는지 우리 자신들에게 한 번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제 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면, 일단 한국과 같은 고질화된 선배들의 폭력이나 상납 요구 등은 당연히 없었어요. 선생들이 체벌을 사용하지 않았고 이념적으로나마 "다 같이 좋은 동무가 돼야 한다, 보다 어리거나 약한 이를 동지적으로 돌봐주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이상이 존재했기에 그래도 한국이나 일본같이 선배, 급우들의 괴롭힘에 못이겨 자살하는 현상까지는 목격되지 않았어요. 물론 "튀는" (남보다 월등히 더 똑똑하거나 반대로 더 지능이 떨어져 보이거나, 혹은 행동거취가 "이상해" 보이거나) 아이에 대한 급우들의 배제를 가끔 볼 수 있었지만, 선생들이나 소년공산당 등이 나름의 조절 노력을 해서 행정적 처벌 없이 상황을 정상화시키는 경우도 있었어요. 즉, 사회 자체가 더 평등하고 덜 폭력적일 때에 "무서운 아이"들이 생길 확률은 절로 떨어지는 법이죠.

물론 꼭 바람직한 급우 관계만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지요. 국가 폭력의 작용은, 학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들은 종종 있었어요. 스탈린의 폭정으로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한 고려인들의 자녀들은 가끔가다 현지 학교에서 "눈이 찢어진 놈"과 같은 종족적 모욕을 들을 때도 있었어요. "국가"에 의해서 집단 처벌을 받은 사람이니 그렇게 대해도 무방하단 심산이었겠지만, 제 스승님이신 임수 선생님은 고등 학교 때에는 아예 권투선수가 되어서 가장 못된 모욕자들을 응징하신 적도 있었어요. 그리고 1980년대 같으면, 몰락해가는 소련 사회의 각종의 "문제"들은 학교 현장에서 그대로 반영되기도 했어요. 대표적으로 술꾼 아버지가 가정 내에서 폭력을 자주 행사했을 때에는 그 아들이 학교 성적이 나빠지고, 상한 자존심을 "주먹질"해서 "주먹왕"의 명예를 얻음으로써 회복시키는 경우들을 볼 수 있었어요. 마찬가지로, 아버지 없고 어머니가 일하느라 아이를 많이 돌봐주지 못하는 가정들의 아이들은 애정 결핍 때문인지 다소 폭력적이었어요. 전체적으로는 학력이 높은 가정의 자녀들은 거의 폭력성을 보이지 않았지만, 학력이 비교적으로 낮아 "콤플렉스"에 시달릴 만한 부분이 있었던 부모들의 아이들은 그 상처들을 "주먹"으로 달래는 건 흔히 보였어요.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미래 준비를 한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니네처럼 부모들이 유식하고 성적이 좋아 대학에 들어갈 아이들이 군대에 안가도 되지만, 우리는 졸업하고 1년 지나면 바로 입대니까 주먹을 단련하지 아니면 안된다, 그게 부대에서의 생존법이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군대의 폭력성을 중, 고등생들이 미리 인식해서 "주먹남"으로서의 풍모를 갖추느라 바빴지요. 저 같으면, 그 당시에 그 이들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했지만, 지금 같으면 그 당시의 제 자신의 시선은 부끄럽기만 하죠. 제 (고학력 중산층)으로서의 계급적 배경이 그대로 반영된 시선이었기에.

하여간, 제가 직접 본 아이들끼리의 폭력은 사회의 각종 폭력성 (가정내 폭력, 군내 폭력 등)과 불평등 (학력, 성적에 따르는 각종 차별들)으로 인한 것이었지, 아이들이 "나빠서" 한 것은 절대 아니었어요. 무서운 건 아이가 아니고 "사회주의" 간판임에도 끝내 만족할 만한 비폭력성과 평등의 수준을 달성하지 못한 쇠락기의 소련 사회이었어요. 혁명 이후로 체벌을 폐지한 나라임에도, 고학력 학부모와 저학력 학부모의 임금차가 커봐야 60-70% 정도 밖에 보통 되지 않았던 (극소수 중간, 고위간부를 제외하고서) 나라임에도 학교에서 '주먹남'들이 등장했다면, 체벌이 존속되고 있는데다 같은 동네에서의 여러 가정들의 소득 격차가 5배일 수도 10배일 수도 있다는 대한민국은 과연 어떻겠습니까? "격차 사회"라는 부분도 그렇지만, 우리의 상업적 "문화"의 기절할만한 저수준과 폭력성도 한 몫을 할 것입니다. 온 나라가 안방에서 서로 박살내려는 두 "짐승남"의 "초콜릿 복근"에 매료되고, 표도르니 뭐니 이미 인간의 모습을 거의 잃은 "인간 병기"가 상대방을 박살낸 게 "뉴스"가 되는 수준의 사회에서는 어린 마음에 "주먹남"에 대한 흠모가 어찌 안생기겠어요? 아무리 열심히 매달려봐야 강남족이라는 현대판 성골, 진골의 대열에 이미 합류할 수 없는 신판 "신분 대물림" 사회에서는 이게 인생의 돌파구로 보일 수도 있단 말에요. 더군다나 "근육질남"이 군복까지 입으면 그 "주먹질"은 국가의 신성한 승인까지 받는 게 아닙니까? 특전사의 무시무시한 특공무술을 자랑스럽게 한국방송공사의 뉴스에서 보여주는 게 대한민국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수준의 사회에서는 아이들을 탓할 리도 없죠.

1969년, 한 영화에서 혁명 즉후 내전 시대의 청소년 공산주의 의용대 대원이 백군 군인을 사살한 장면이 클로즈업돼 지나치게 강조됐다고 유명한 영화감독이자 가수 알렉산드르 갈리치가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항의서한을 송부했습니다. "이렇게 폭력을 미화하는 것은 사회주의 이상에 배치되고 청소년 교육에 도움되지 않는다"는 이유이었습니다. 살인 장명 정도면 안방 극장의 "기본"이 된 지 오래된 이 위대한 문화수출국 대한민국에서 그런 걸 생각해보면, 거의 고대사나 중세사처럼 머나먼 과거를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ps : 아마도 두번째 글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럼 어쩌라는 거야"라는 식의 반문을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글에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이 꼭 제시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럴 수도 없고... 중요한 건 어떤 문제를 모든 '인식점'이라 생각된다. 첫번째 글은 포인트는 졸업식에서 추태를 부리는 학생들은 모조리 형사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며, 두번재 글의 포인트는 사회적 배려의 대상자인 약자인 학생이 왜 가해자, 피해자가 될까? 왜 이런 폭력성을 가졌을까?라는 의문일 것이다. 이 '인식점'의 차이는 결국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향성과 해결책에서도 여실히 그 차이점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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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2.12 세상읽기

밀가루를 뿌리고, 날계란을 던지고, 교복을 찢는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됐다. 보기 안타까웠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들은 졸업식 날 저렇게라도 해방감을 만끽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간 받아온 억압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네들끼리의 결속도, 그 무리 속에서의 자기 존재감도 그렇게 드러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속옷 바람으로 거리를 누비며 뜀박질을 하고, 그 속옷까지 찢어발기는 거의 광기에 가까운 난동이 벌어진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주체들이 대개 중학생이라는 사실이다. 그저 한때의 유행으로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렇게 될 것 같지가 않다. 이것은 졸업식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고, 초등학교에서도 저런 ‘싹수’가 보이는 아이들이 적지 않게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학교 현장에서는 이 ‘무서운 중딩’들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널리 퍼져 있다. 나 또한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목격한 일도 있다. 어느날 ‘생일빵’이랍시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버스정류장 표지판에다 한 여학생을 청테이프로 칭칭 동여 묶어 놓고 도망가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을 불러 야단을 친 적이 있다. 겨우 중학교 1~2학년이 될까말까한 아이들이었다. 젊은 여교사건 나이든 남교사건 가리지 않고 대거리를 하거나 욕설을 퍼붓고, 수업시간에 이 반 저 반 맘대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수업이 안 돼서 너무나 고통스럽고, 학교 가기가 두려워진다는 중학교 선생님들도 적지 않게 만났다. 어떻게 이야기를 걸어야 할지, 대화를 풀어나가야 할지 도무지 막막한 아이들의 세계가 지금 학교 현장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다. 지금 이 아이들은 대체로 1990년대 중·후반에 태어났고, 그 얼마 뒤에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87년 6월항쟁보다 97년 아이엠에프 사태가 우리 사회에 더욱 깊고 진한 선을 그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들이 이때부터 생겨났고, 생계비용에 대비한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할 수 없이 맞벌이를 해야 했고, 많은 부모들이 이혼과 별거로 아이들을 홀로 키우거나 시골의 조부모님 댁에 맡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아이들이 유소년기의 대부분을 학원과 인터넷, 텔레비전으로 보내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뛰어놀 수 없었고, ‘살아있는 세계’와 교섭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움터오르는 그 ‘정직한 에로스’는 억압되었고, 자폐적이고 파괴적인 놀음의 과정 속에서 ‘욕구와 충동의 덩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자라난 첫 세대가 지금 중학교를 졸업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부모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지난 10여년 사이에 먹고사는 일이 너무나 가파른 곡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먹고살려고 몸부림치느라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없었다. 뒤처지면 곧장 먹잇감이 되는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그나마 뒤처지지 않게 하려고 부모는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했고, 그 학원에 다닐 비용을 대기 위해 더 많이 일해야 했고, 그래서 더더욱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없었다. 이 악순환의 시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졸업식 날, 팬티를 입고 거리를 질주하는 이 아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 사회를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이들은 지금 지난 10여년간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에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할 때다.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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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칼럼 2010.2.1 

며칠 전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을 방문해 국립역사박물관에 들렀다. 거기에서 감동을 느낀 것은 굳이 그 유물의 작품성 때문은 아니었다. 단순비교가 가능한 부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교를 하자면 아랍 상인을 통해 먼 북유럽 오지까지 유입된 인도계 불상을 최상의 보배로 여겨 추장의 묘에 부장품으로 곁들인 바이킹의 거친 솜씨에 비해서야 신라 금관이나 백제 향로는 당대로서는 선진문물의 표징처럼 보인다. 감동을 준 것은 다름이 아닌 이 박물관의 유물 배치법과 해설법이었다.
바이킹 유물 위주의 제1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천년 전에 이 땅에서 ‘스웨덴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큼직한 해설서부터 보였다. 그 뒤에는 수많은 지역 문화권들과 이민자들이 어떻게 해서 오랜 과정을 거쳐 오늘날 스웨덴 국민을 형성했는가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극우파들이 어떻게 “영원불변의 민족” 신화를 악용해왔는지, 어떻게 바이킹 약탈자들을 영웅화시켜 스웨덴인에게 근거없는 “자긍심”을 고취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상세히 나와 있었다.

“민족” 신화에 대한 관람자의 비판의식을 높이는 동시에 이 박물관은 계급이라는 현실에 그들의 눈을 돌린다. 1600∼1700년 전 초기 철기시대의 북유럽 귀족이 애용했던 로마제국 유리잔 등을 전시하면서 “오늘날 부유층이 고급 해외 사치품에 대한 똑같은 애착을 갖는 것이 아닌가”와 같은 내용의 해설서를 통해서다.

한마디로 이 박물관은 “민족”의 신화부터 계급의 현실까지 이 사회의 모든 것을 비판적 해부, 즉 회의의 대상으로 삼을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곳이다. 과연 대한민국에 이처럼 모든 것을 회의할 줄 아는 인간, 즉 모든 구속에서 벗어날 준비가 돼 있는 인간을 양성할 만한 제도적 장치들은 존재하는가?

비록 요즘 중국·일본 유물도 같은 공간에서 전시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고조선 때부터 존재해온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과시하는 역할을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서울의 국립역사박물관을 탓하기 어려운 이유는, 사회의 중심적인 제도·기관들이 “회의 정신” 기르기에 전혀 기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무게중심은 국가와 자본에 있는데, 특히 그들의 대외적 움직임을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언론들을 과연 자주 볼 수 있는가? 예컨대 중동에의 원전 수출을 둘러싼 최근의 언론 보도 태도를 관찰해보기를. 실제로는 우라늄 채굴과 운반, 그리고 핵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방사능 누출의 위험성, 그리고 원전의 안전성 등에 대한 공방은 몇십년 동안 이어져 왔으며, 머나먼 옛소련의 체르노빌뿐만 아니라 가까운 일본 도카이촌 핵연료 처리시설에서도 10여년 전에 임계 사고가 나 2명의 아까운 생명을 잃은 바 있다.

그러나 문제덩어리인 핵을 비판적으로 해부해보는 목소리는, “수출 전선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는 난리법석 속에서 크게 들렸는가? 그 생명인 비판정신을 포기한 지 오래된 언론부터 회의할 줄 아는 시민이 아닌 국가와 자본의 무조건적 응원자를 키우고 있으니 박물관만을 떼어놓고 책임을 논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인간이라는 사회적 동물은 계급사회의 테두리 안에서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지만, 그 상대적 자유의 가능성이라도 그나마 제공해주는 것은 바로 사회·정치·문화의 허실을 가릴 만한 회의 정신이다. 회의는 자유로의 길의 출발점이고, 그 길에 오른 사람만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성에 충만한 사회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 아니겠는가?
 

ps : 선진국의 기준이란 1인당 국민소득 몇만불, 세계경제 규모 몇 위 같은 경제적인, 물질적인 것들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런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 분위기와 정신을 키워야 할 듯 싶다. 난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국민이 일년에 평균적으로 책을 6권 정도만 읽는다면 선진국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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