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검색창 밑에 뜨는 검색어에 ‘연가시 생김새’라는 문구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척 궁금해서 그 검색어를 클릭해서 확인해봤는데 검색어를 확인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연가시’, ‘기생충’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줄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종편부터 시작해서 인터넷 뉴스까지 대부분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기생충을 ‘연가시’로 소개하고 있다. 오보의 일차적인 원인은 모든 언론매체들이 인용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 글에 있다. 사람의 발에서 나오는 하얀 실처럼 생긴 기생충을 연가시로 착각한 것이다.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채 그걸 그대로 인용해서 소개하니까 한순간에 기생충이 연가시가 된 것이다.

 

문제의 기생충은 연가시의 생태 습성과 유사한 메디나충이다. 주로 깨끗한 식수가 부족한 아프리카에서 주로 발견되는 메디나충은 사람 몸을 숙주로 삼아 1년 정도 지나면 다리나 발 쪽 피부 조직 밑에 모인다. 이 때 메디나충 유충이 밖으로 나오는 시기다. 감염자는 심한 가려움, 매스꺼움, 타는 듯한 통증을 못 이겨서 스스로 물을 찾게 된다. 감염자가 물가에 환부를 집어넣는 순간 메디나충 유충이 물속으로 뛰쳐나가고, 그 물을 식수로 마신 사람은 또 다른 감염자가 된다.

 

 

 

 

 

영화 <연가시> 한 장면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공개된 문제의 사진만 본다면 영화 <연가시>처럼 메디나충이 자연스럽게 몸 밖으로 나오면서 사망하는 감염자의 모습이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물을 마신다고 해서 살아있는 메디나충이 입이나 항문을 통해서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며, 감염자는 끔찍하게 죽지 않는다. 언론매체가 인용하고 있는 사진은 메디나충 감염자들이 치료받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장면이다.

 

메디나충은 몸의 내장 기관뿐만 아니라 살갗 밑에서 살기 때문에 물을 마신다고 해서 유충이나 성충이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물통에 환부를 담가야만 기다란 하얀 실 같은 메디나충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이 메디나충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재까지 몸 속에 있는 메디나충을 박멸하는 치료제는 없다. 성충은 최소 길어야 20cm 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꺼내야 한다. 기생충을 빼내는 과정에 중간에 끊어져버리면 환부에 남아 있는 기생충 일부가 그 안에서 썩기 때문이다. 이러면 최악의 경우에는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

 

 

 

* 참고자료: EBS 다큐프라임 ‘기생寄生 PARASITE' 1부 보이지 않는 손. 올해 여름에 방영되었는데 EBS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링크) http://www.ebs.co.kr/replay/show?prodId=348&lectId=10136540

 

방송 보기 전에 주의할 점. 식사 전후에 보지 마시길. 훌륭한 내용의 다큐이기는 하지만, 메디나충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오는 영상이 상당히 충격적이다. 좋은 다큐로 연일 계속되는 폭음 때문에 계속되는 구역질을 유도할 생각은 전혀 없다. 구역질은 연말 술자리 이후에 해도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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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축복이다. 문명이 언어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고 글쓰기도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어가 유용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늘 불안정하다. 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닌데 상대방은 나쁘게 받아들인다. 관계는 악화한다. 언어로 온전한 생각을 전달하기 어렵다.

 

 

 

 

 

 

 

 

 

 

 

 

 

 

 

 

개인이 사회를 고발하는 의사소통도 그렇다. 의사소통행위는 전달의 본질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이를 '충돌'이라고 말했다. 그는 '충돌'의 이유를 다수의 개인은 서로 다른 인식을 하므로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봤다.

 

지난 10일 한 고려대생이 붙인, '안녕들 하십니까'(줄여서 안녕들) 제목의 대자보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자보는 페이스북을 통해 확산했고 철도파업과 밀양송전탑, 부정선거 의혹 등 최근 이슈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전국 대학은 물론 외국 대학에도 자보에 화답하는 응답자보가 계속 올라왔다.

 

 

 

 

 

 

'안녕들' 자보의 폭발적인 반응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일기 시작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에는 자보를 찢은 사진이 올라왔다. 보수 성향 대학생 단체 자유대학연합은 반박자보 공개모집에 나섰다.

 

‘안녕들’ 현상은 개인주의에 익숙하고 경쟁시스템에 시달린 우리 청춘들에 반성을 촉구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보를 공개하고, 응답·반박자보가 나붙는 단선적인 과정이 건전한 대화와 토론문화를 조성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보는 무전기가 아니다. 무전의 매력은 밀접한 소통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무전기는 답하는 무전이 와야 비로소 소통이 완성되는 쌍방향성을 전제한다. 응답자보 그리고 이에 맞서는 반박자보를 공개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쏟아낸다. 그러나 쌍방향적 대화가 아닌 독백에 가깝다. 의견에 반하는 사람에게 들리지 않고,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들만 듣는 그들만의 독백이 될 수 있다. 벽에 붙여진 수많은 종이 자보들은 대화의 시도마저 어렵게 하는 단절의 벽이 되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절망할 것이다. 안녕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열린 대화의 불가능성에 절망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자세로 자보를 주고받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충돌’이다.

 

 

 

 

 

 

 

 

 

 

 

 

 

 

 

 

 

 

자보가 문제의식을 확인하고, 반대 진영과 맞서는 일방적 전달에 그친다면 그것에 더 이상 주목할 필요는 없다. 대화 없는 독백은 불통을 낳는다. 소통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시도를 해야 한다. 눈과 귀를 막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을 답습할 것인가. 자보를 쓰려고 손에 쥐고 있는 펜을 내려놓자. 자신과 다른 생각에 귀를 기울여야 생각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이제는 생각의 진위를 구별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때다.

 

어디선가 자보를 쓰고 있을 청춘들, 안녕들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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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저는 2013년 12월 12일 오늘, 안녕하지 못합니다.

 

점점 날씨가 추워지며 겨울이 오고 있음을 몸소 느끼고 있습니다.

차가워지는 날씨만큼이나 우리 사회도 점점 얼어붙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부의 철도민영화 반대를 위해 철도노조는 거리로 나가 국민을 대변하여 민영화 반대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쟁의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12일 현재 7600여명의 직원을 직위해제했습니다.

 

도무지 2013년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당함 앞에 우리들은 무관심해야만 했습니다. 침묵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더 이상 이 미친 세상에 침묵하지 않기로 도망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오늘 보다 좀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권력의 역주행 앞에 저항하는 힘을 보태는 현명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비록 오늘은 안녕하지 못하지만 오늘 보다 나은 내일 우리 진짜 안녕하기로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우리 어디에 있더라도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고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을 알리며 이 글을 마칩니다.

 

 

 

 

 

세상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 의해 멸망하는 게 아니고,

아무것도 안하며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 (아인슈타인)

 

 

... 사진을 보면서 어느새 후자가 되어 소심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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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12-14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느덧 소심해졌네요...

cyrus 2013-12-17 23:03   좋아요 0 | URL
이제 우리 젊은 세대들이 사회문제를 인식해고 직시했으니 공감만 하지 말고,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분별하려는 자세가 필요한거 같습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사회인이 되어서도 좀 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이사야 벌린은 자신이 쓴 책『고슴도치와 여우』에서 고대 그리스 우화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성향을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두 가지 모델로 나누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쿠스가 남긴 “여우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많이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본다”는 구절을 발전시킨 것이다. 아르킬로쿠스의 말이 어느 쪽에 호의적인 것인지는 쉽게 간파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그의 말은 여우란 녀석이 아무리 많이 안다고 날뛰어 봐야 그 재주란 ‘잔꾀’일 뿐이고 ‘큰 것’을 모르고 있는 한 결국은 고슴도치의 지혜를 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여우는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복잡한 일들을 두루 살핀다. 그들은 어지럽고 산만하게 여러 곳을 기웃거리는 탓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이나 통일된 비전으로 통합하질 못한다. 그에 반해 고슴도치는 복잡한 세상의 개념들을 한데 종합하여 하나의 체계적인 개념이나 원리로 단순화 시킨다. 고슴도치는 모든 과제와 딜레마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개념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벌린의 관심은 고슴도치와 여우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호하고 그것을 지지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고슴도치와 여우로 대표되는 지혜의 대립모델이 정치가와 사상가들, 더 크게는 인간 일반의 지적, 예술적 성향을 구별 지어 서로 다른 성질을 기술하는 비유적 양분구도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벌린에 의하면 고슴도치형이 구심적 사고유형을 지녔다면 여우형은 원심적 사고유형을 지녔다. 그 결과 프로이트, 다윈,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헤겔은 모두 고슴도치형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괴테, 세익스피어 등은 모두 여우형에 속한다.

벌린의 통찰이 아니더라도 우리 인생에서 부분과 전체를 보는 조화로운 눈은 정말 중요하다. 사실 인생이란 경주에서 우리가 정상으로 가는 데 방법적인 차이는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은 차이가 성공과 실패라는 정반대의 결과와 엄청난 보상의 차이를 가지고 온다. 일차적으로 우리가 작은 나무를 보지 못하고 숲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무를 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인생이란 큰 숲을 보는 일이다. 인생이란 숲을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차이란 정말 큰 것이다. 나무를 보는 지혜 못지않게 우리에게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숲을 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숲을 볼 때 인생의 꿈과 비전도 가질 수 있고, 인생을 대하는 자세 또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인생을 영위하는 일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사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정치판에서는 저마다 자신이 이 나라를 구할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출사표를 던진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되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중대한 선택의 기로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도 오직 당의 입지를 위한 밥그릇 정쟁이 이어지고 있다. 1년 전 대선에서 국민과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정치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자신과 정치집단을 위해 이것저것 저울질 하며 상황을 살피는 정치인들만 눈에 보인다. 이념의 잣대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지식한 고슴도치와 사소한 문제에 딴지 걸어 불필요한 정쟁을 야기시킬 뿐 정작 중요한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어리석은 여우 같은 정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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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Bowdlerism, Comstockery

 

 

 

 

 

 

 

1818년 영국 에든버러의 내과의사이면서 복음주의자인 토머스 바우들러는 자신의 '가족에게 큰소리로 읽어줄 수 없는' 모든 구절을 삭제한 『가족 셰익스피어』라는 제목의 개정판을 출판했다. 셰익스피어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해 당시의 '무절제한 기호'에 야합했다는 것이 그렇게 한 이유였다. 『햄릿』에서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아가씨, 당신 허벅지에 누워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을 햄릿이 오필리어의 발치에 눕는 걸로 대체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바우들러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비종교적, 부도덕한 인상을 주는 구절을 삭제한 개정판을 낼 정도로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맞춰 불경스러운 표현을 고치는 데 앞장 섰다. ‘책의 내용 중 상스러운 부분을 무단 삭제 또는 정정’을 뜻하는 ‘바우들러리즘’(Bowdlerism)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오늘날에는 정치적 목적으로 상스러운 부분만이 아니라 그 어떤 부분이든 자신의 뜻에 맞게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것에도 쓰인다.

 

 

 

 

 

 

 

 

 

 

 

 

 

 

 

 

바우들러가 활동했던 영국 반대편 나라인 미국에서도 부도덕한 내용이나 장면을 검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앤서니 컴스톡이다. 1870년대 반(反)음란 활동에 앞장섰고, 뉴욕퇴폐추방협회 회원들 중 가장 유명했던  뉴욕의 유곽들을 공격할 정도로 컴스톡의 활약은 악명 높았다. 그의 활약 덕분에 1873년 연방 음란 규제법 또는 속칭 ‘컴스톡 법’(Comstock law)이 통과되었다. 그 법의 통과 이후 컴스톡은 체신부 하청 업체 사장으로 변신하여 음란 우편물을 적발하는 일을 맡았다. 그 일을 하는 보상은 벌금에서 일정액을 받는 방식이었으므로, 적발을 많이 할수록 많은 돈을 벌게끔 되어 있었다. 물론 그는 종교적 열정을 갖고 열심히 달려들어 많은 적발을 했다.

 

컴스톡은 사회의 도덕성을 위협할 수 있는 책들을 금지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놀랍게도 그가 금지 조치를 내렸던 작품이나 공연은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비도덕적’인 내용만 보이는 즉시, 음란물로 규정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워런 부인의 직업』에서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는 여주인공의 모습과 그녀의 어머니가 매춘업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출판과 공연 금지를 주장했다. 그가 생각하는 ‘비도덕적인 대상’은 섹스, 마약, 술 그리고 여성해방운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활동이 신에게 부여받은 임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 덕분에 컴스톡은 악명 높은 활동을 한 공로(?)로 그의 이름은 컴스톡 법뿐만 아니라 지나친 검열 활동을 비아냥거리는 단어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검열"이라는 뜻으로 ‘컴스토커리’(Comstockery)라는 단어가 영어사전에 등록되었다.

 

 

 

 

Scene #2  예술이 ‘외설’로 바꾸는 건 간단하다

 

 

 

 

 

 

 

 

 

 

 

 

 

 

 

 

 

 

 

문학작품에서 성(性) 표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예술적 자유와 사회적 수용을 둘러싼 끊이지 않는 논쟁은 수없이 되풀이 돼왔다. 한때 외설 시비에 휘말렸던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남회귀선』 등은 그 후 외설이 아닌 고전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국문학 외설 시비 1호로 꼽히는 염재만의 소설 『반노』역시 긴 법정 시비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아낸 경우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문화의 변천에 따라,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예술과 외설의 기준은 판이하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독자에게 성적 충동을 유발하는 포르노그래피와 성(性)을 아름답게 그린 에로티시즘, 이 양자의 차이가 한 작품을 예술과 외설로 구분 짓는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두 성질을 단정적으로 구분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특정 개인의 사고나 철학이 절대적 잣대가 될 수 없다고 보기에 더욱 그러하다.

 

 

 

 

 

 

 

 

 

 

마르키 드 사드의『소돔 120일』판매금지 처분 논란은 예술 작품에 대해 국가 기관이 검열하는 행위가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다. 예술과 외설을 나누는 ‘음란성’은 그 자체로 모호할 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의 통제 수단으로 치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간행물윤리위원회(간윤)가 이 책을 유해간행물로 지정하고 배포중지 및 수거 조처를 내린 이유는 ‘음란’하기 때문이다. 간윤은 “근친상간과 가학·피학적 성행위 등 표현수위가 지나치고 반인륜적 내용이 상당히 전개됐다는 판단에서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출판사측의 반박 입장 표명 이후 재심의 끝에 겨우 청소년 유해매체물(책 표지에 ‘19세 미만 구독불가’ 문구를 표시함)로 유통될 수 있었다.

 

 

 

 

예술 작품을 음란성의 잣대로 바라볼 때 빠질 수 있는 함정 중 하나가 ‘상대성’이다. 일례가 최초의 누드화인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에 대한 평가다. 명화로 꼽히지만 한때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음란물’로 인식됐다. 당시 이 그림을 성냥갑에 넣어 판매했던 제조사는 음화 제조판매 혐의로 벌금 5만 원을 물어야 했다. 사드의 소설 역시 일본에서는 1948년 같은 이유로 재판에 부쳐졌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이 선정한 인문사상 추천 100선에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문제는 국가기관이 이 모호한 잣대로 예술 작품을 검열하는 시도가 사회 통제의 기제라는 점이다. 특히 사회 전반의 보수화 경향이 강해질 때 검열은 심해진다. 우리 사회가 성 문제에 대해 정상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면 굉장히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Scene #3  바우들러리즘, 컴스토커리 그 다음은 간유니즘

 

예술 작품과 외설물은 어떻게든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순수 예술을 가장한 외설물들이 너무도 범람하고 있다. 이를테면 독자의 성적 호기심이나 본능적 충동만을 자극하는 질 낮은 문학 상품 중에는 성을 팔고 사는 매춘 작품(?) 같은 것들도 섞여 있다. 독자 가운데는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도 얼마든지 있다. 이들에게 여과 없이 파고들어가 이들의 정서를 마구 해치는 무책임한 작가들에게는 일단의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하지만 문학작품을 천편일률적인 사법적 잣대로만 재단하는 난센스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융통성 없는 사회적 통념과 편견에 의해 유럽에서는 스페인 국립 만화대상 등 굴지의 만화 관련 시상식에 상을 받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청소년 유해 판정 결정 논란을 겪어야 했다. 출판사의 항의로 다시 한 달 만에 재심의 결과 청소년유해간행물 결정이 취소가 되었다.

 

만화 속에 폭력적인 장면은 차치하더라도, 선정적인 장면이 조금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작품의 초반부, 그리고 중후반부 즈음에 몇 컷 정도가 나올 뿐이다. 간윤은 이 장면들에 ‘음란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청소년 유해간행물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일 뿐, 얼마 안 나오는 장면을 문제 삼은 이유로 예술성 높은 만화작품이 한순간에 '음란물'외 될 뻔했다.

 

문학작품, 특히 소설 작품에서의 성적 묘사는 생명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행위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 보기 때문이다. 예술이나 문학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알려는 작업이라면 사랑이 충만한 성을 묘사했다면 예술이고, 사랑이 없는 성애를 통해 자극만을 충동질한다면 외설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음란물을 규정하는 간윤의 태도를 곱게만 볼 수 없는 것은 이처럼 야한 장면 몇 개로 유해성을 판단하는 자의적 기준 때문이다. 이야기 전체 맥락을 보지 않고, 부분만 문제 삼아 판단한다면 과연 공정하게 규정했다고 볼 수 있을까? ‘도덕’의 기준을 내세워 문제 되는 부분을 근거로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간윤의 사례는 이번만은 처음이 아니다. ‘간유니즘(Ganyunism, 간윤+ism)’이라는 이름으로 검열 사례를 뜻하는 단어가 사전에 등록되어도 어색하지 않다.

 

우리가 디지털 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국가 검열이 예전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가에서 유통을 금지시킨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검열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도 바우들러와 컴스톡의 영혼이 우리 사회에 배회하고 있다. 정상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 한 권에 ‘음란물, 판매금지’ 딱지를 붙이는 순간,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작년에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해서 인기를 얻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롤리타』는 세상,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쓰레기통으로 넣어야 하며 섹스 장면이 몇 개 나온 만화 『설국열차』에도 ‘19세 미만 구독 불가’ 판정을 내려야 한다.

 

간윤이여, 제발 제대로 된 검열을 하고 싶다면 책을 읽어라. 국민들 책 안 읽는다는 이유로 독서를 장려하는 문광부 장단에 맞추는 역할은 어울리지 않는다. 간윤의 역할은 독자가 읽기에 유익한 책을 선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중하게 읽어보고 결정하란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고 천천히 유해물이 맞는지, 아닌지 결정해도 나쁘지 않다. 제발 내년에는 책 안 읽은 무식한 티 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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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3-12-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번 공감합니다.^^.

cyrus 2013-12-12 12: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논거가 빈약한데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볼 수 있을 생각인데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