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거대 기업 - 우리 시대 기업에 따뜻한 심장 달기
이영면 외 지음, 좋은기업센터 기획 / 양철북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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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엄마의 마음으로 건강을 생각해?

 

모유 대용식인 분유와 이유식, 밀크 초콜릿과 인스턴트 커피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식품들을 가장 처음 만든 회사는 어디일까.

 

바로 세계 최대 식품기업인 스위스의 네슬레다. 네슬레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고객들의 건강을 생각한다’는 슬로건과 함께 식품회사로서의 명성을 수백 년간이나 이어왔다. 네슬레는 환경에 대한 철학, 고객 감동, 사회공헌, 윤리경영 등을 통해 스위스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손색이 없는 탄탄한 지명도를 쌓아왔다. 특히 네슬레는 전 세계 글로벌 기업 가운데 가장 철저하게 ‘세계화’와 ‘현지화’에 성공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매출의 90% 이상을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그러나 네슬레가 탄탄대로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네슬레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아프리카 및 저개발국 유아들의 영양실조 및 사망 사건이 다국적 기업들이 판매하는 유아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여러 증거들이 제시되면서 유아식 위해 논쟁에 휘말렸다.

 

1970년대 아프리카 전역에서 수천 명의 아기들이 죽어 나갔는데 네슬레의 마케팅 때문이었다. 네슬레는 분유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아프리카 엄마들에게 모유 수유는 구시대적이고 불편하다고 선전했지만 비싼 가격에 따른 부작용과 오염된 물 때문에 수천 명의 아이들이 설사로, 이질로, 전염병으로, 영양실조로 죽어 갔다. 네슬레는 초반에는 오염된 물이 문제였을 뿐 자사의 제품 품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조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영국의 시민단체 ‘워 온 원트(War on Want)’의 폭로를 시작으로 10년 동안 이어진 전 세계적인 불매운동을 겪고 나서야 네슬레는 손을 들었다.

 

 

 

 Scene #2  소비자에게 영혼이 있다면, 기업은 심장이 필요하다

 

네슬레의 사례는 그저 외국 나라에 발생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네슬레가 아프리카로 진출하던 시기보다 경제의 글로벌화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우리 기업의 글로벌 활동도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그래서 해외진출 한국기업이 현지 지역사회에서 야기하는 각종 문제들에 대한 국제적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해외에 진출한 한국 굴지의 대기업들이 현지 지역주민들과의 갈등과 인권침해 논란에 휩싸이거나 노동착취, 인종차별, 성차별, 소비자 기만 등으로 잇달아 제소되고 있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국제노동기구(ILO)의 노동규약 등 관련된 국제적 규범에 반하는 행위들이다. 해외진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이행 여부는 해당 기업이 현지에서 지속가능한 경영활동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뿐만 아니라 나라의 국격과도 직결된다.

 

해외에 진출하는 기업만 그러한가. 우리나라 기업도 마찬가지다. 작년에 떠들썩했던 남양유업 사태 외에도 롯데마트, 세븐일레븐 등 여러 기업에서 나타나는 ‘갑의 횡포’ 사례를 접하면서 매일 수많은 제품을 구입하며 살아야 하는 소비자들은 과연 어떤 기업의 제품을 선택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기업의 갑을 관계와 함께 기업 평판이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동안 기업의 목표는 이익 극대화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점차 사회적 책임을 중시해야 한다는 시각이 커지고 있다. 기업은 단기 이익만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하면 안 된다.

 

기업이 잘못을 저지르면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기업의 잘못에는 소비자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그 소비자는 개인이었고, 시민단체였고, 언론이었고, 때론 비정부국제기구(NGO)였다. 이들은 기업의 잘못을 따졌고 기업에게 책임을 물었다. 현대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거대 기업들의 횡포를 막아내고 시민의 권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시민의 참여와 행동이었다.

 

소비자의 시각이 바뀌면서 기업의 목표도 바뀌고 있다. 단순히 영리를 추구하는 것 외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충실해야 기업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기업을 둘러싼 이해 관계자가 많아지면서 다양한 이해 당사자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소비자는 물론 하도급 업자, 회사에서 일하는 근로자 그리고 회사를 둘러싼 많은 사람 입장에서 회사를 경영해야 한다. 회사 입장에서만 경영하게 되면 소비자가 불매운동을 벌일 수 있다.

 

미국의 경영학자 필립 코틀러는 “소비자가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영혼(Human Spirit)’을 가진 시장참여자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고 감동을 주려면 사회공헌에서도 ‘영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소비자에게 영혼이 있다면 이에 맞춰 기업은 사회적 가치를 담은 영혼을 읽어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따뜻한 심장이 필요하다. 기업에 따뜻한 심장을 있다면 기업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과 과오에 무덤덤하고 회피하려는 대응 방식을 탈피할 수 있다.

 

 

 

 Scene #3  기업의 사회적 책임, 선택이 아닌 필수

 

일찍이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인간을 포함하여 현존하는 모든 동물은 강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라 환경변화에 잘 적응해 온 때문이라고 하였다. 세월을 달리하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기업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전 세계 CEO들로부터 귀감이 되고 있는 경영 구루 짐 콜린스의 ‘Good to Great’ (착한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서 보듯이 위대한 기업이 돼야 지속가능 기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좋은 기업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동안 상황이 바뀌어 지속가능 기업이 되자면 위대한 기업을 넘어 착한 기업이 돼야 한다고 한다. 이처럼 기업도 여건변화에 따라 살아남자면 계속 진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착한 기업’이 되는 조건은 어렵지 않다. ‘윤리’와 ‘사회적 책임’. 기업이 이 두 가지 가치를 잊지 않으면 된다.

 

윤리경영은 회사 경영 및 기업 활동 과정에서 기업 윤리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투명하고 공정하며 합리적인 업무 수행을 추구한다. 최근 높아진 사회의식과 동반성장에 대한 관심, 다양한 채널을 통한 재능 기부나 물질적 기부로 인한 기업 이미지 제고 등이 맞물려 윤리경영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앞으로 윤리경영을 못하는 기업들은 시장에서 도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선택이 아니다. 필수 요소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윤을 창출한 이후의 사항이 아니라 이윤창출을 위한 필수요소가 될 것이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단순한 나눔과 자선의 차원을 넘어선 진정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함으로써 소비자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기업 이미지도 향상되어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도 착한 기업이 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최근에 와서는 사회적 불평등 내지 경제민주화의 책임을 상당 부분 기업의 책임으로 돌리는 상황이다. 여기에 기업으로서는 착한 기업 스트레스가 있다. ‘무엇을 할까’에서부터 ‘더 이상 어떻게 하란 말이냐’까지 기업의 갖가지 고민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업의 속내에 진정성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진심을 담아서 지속적으로 하라는 식이다. 한마디로 ‘착해 보이려 하지 말고 착해져라’고 한다.

 

그러나 기업이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윤리경영을 적극 실현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역할이다. 기업이 진정으로 착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기업 혼자의 노력으로는 어렵다. 소비자도 함께 착해져야 한다. 이제 품질과 가격만 우수하고 착하지 않은 기업은 소비자가 외면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기업도 이윤 추구에만 몰두하고 착한 기업이 되는 노력을 겉치레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보다 나은 더 좋은 세상은 이처럼 소비자가 착해짐으로써 가능해진다. 그 기업의 제품을 소비자들이 선택함과 동시에 윤리경영을 지원하고 지지해야 한다. 즉 소비자들의 윤리적 소비의 실천이 뒷받침돼야 윤리경영이 실질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착한 소비자가 되는 것은 물론 착한 기업을 만드는 것도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요즘 ‘안녕들 하십니까?’에서 보는 것처럼 이래저래 우리가 할 일이 참 많은 것 같다. 이제 기업에게 착한 심장을 달 것을 주문하지 말고, 그들 스스로 심장을 달 수 있도록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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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01-0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요한 것은 CSR도 좋지만 그 이전에 기업 구성원인 자회사의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대우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선행되지 않고 CSR을 외쳐봐야 사람들이 진심으로 듣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삼성은 이런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cyrus 2014-01-13 22:20   좋아요 0 | URL
글을 쓰다보니까 노동자 대우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지 못했네요.. 그것도 참 중요한 문제죠. 이 책에서도 노동자 부당 대우를 한 기업 사례가 나오거든요. 세인트님 말씀처럼 CSR은 강조하면서도 정작 기업을 움직이는 진짜 구성원인 노동자를 대우하는 것을 무시하는 기업의 행태를 보면 모순적이기도 합니다.
 
식수 혁명 - 안전한 식수를 향한 인간의 권리와 투쟁
제임스 샐즈먼 지음, 김정로 외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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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네, 안녕하지 못합니다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중국 구이린(桂林). 하지만 이 지역 주민의 평균수명은 50세에 불과하다. 중국인 평균수명인 71.8세에 비해 20세 정도 낮은 셈이다. 가장 큰 이유는 석회질에 오염된 물 때문이다. 몸속에 석회 성분이 쌓여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생명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세계적으로 이같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있는 인구는 11억 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몇 년 전에 공개된 UN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먹는 물 수질은 전체 122개국 중 8위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마시는 물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그래, 안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수질 기준을 초과한 수돗물, 지하수 등이 적지 않은 데다 먹는 물에서 발암물질까지 검출되면서 국민의 불신이 여전히 남아 있다.

 

‘2013년 상ㆍ하반기 상수도 미보급 지역 지하수 수질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 실시한 조사에서 지하수 73%이상이 수질기준을 초과한 오염 지하수인 것으로 확인됐다. 관련 예산이 부족해 정밀조사를 추진하지 못한 채 오염된 지하수들이 방치하고 있으며, 해당 주민들은 본인들이 마시는 지하수의 오염 정보를 지자체로부터 통보받지 못한 채 계속해서 지하수를 음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음 소개하는 사례는 좀 더 강도가 센 충격적인 내용이다. 대구시가 지난 8~10월께 실시한 3개월치 수질검사 결과에 따르면 대구 시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동네 우물 13곳 중 8곳에서 발암물질인 ‘1.4-다이옥산’이 지속적으로 검출되었다.

 

이번에 검출된 1.4-다이옥신은 먹는 물 기준치인 0.05㎎/ℓ이하의 수치를 기록해 그나마 다행인 상태이지만, 시의 허술한 우물 관리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말았다. 대구시는 동네우물에서 검출된 유해물질이 어떤 경로로 유입됐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수질관리를 위해 매월 일반세균 등 47가지 항목의 수질검사를 실시했다고 변명했지만, 대부분 우물에서 다이옥신뿐만 아니라 황산이온, 불소 등 몸 안에 장기간 축적 시 각종 부작용을 유발하는 유해성분들이 계속 측정되고 있다. 한 곳당 하루 평균 360여명의 대구 시민이 우물을 통해 식수를 받고 있기 때문에 특히 노인이나 임산부 등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Scene #2  병에 든 생수가 수돗물보다 위생상 좋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우리는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이 아닌 페트병에 담긴 물을 마시고 있다. 식수로 수돗물이 외면당하게 된 이유는 수돗물에 대한 막연한 불신감 때문일 것이다. 수자원공사가 올해 제출한 국감 자료에 따르면 우리 국민 3.7%만 수돗물을 그대로 마신다고 한다. 통계가 보여준 것처럼 수돗물에는 ‘막연한 불신’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우리나라 수돗물 원수 중 70~100%는 하천수와 댐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의존한다. 그래서 각종 산업폐기물 오염과 대형 수질사고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수돗물을 기피하는 또 다른 이유로 '소독약 냄새'가 있다. 냄새가 날 거라는 걱정 때문에 마시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전국 200여 가정의 수도꼭지의 물을 검사해봤더니 수돗물의 수질이 정수기 물이나 먹는 샘물에 비해 별반 차이가 없었다. 비슷한 양의 미네랄 성분을 함유하고 있었고 먹고 마시는 물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해마다 크고 작은 수도 사고를 접하게 되면 평소 수돗물 공급을 원활하게 했더라도 사고가 한 차례 발생하면 신뢰는 대중의 불안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싸여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한 수도 사고에만 집착해 수돗물을 오랫동안 불신한다면 편하고 쉽게 마실 수 있는 물을 가게에 파는 생수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는 경제적 낭비다. 언론에 보도되는 수도 사고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알게 된 수돗물 소독약 냄새 루머를 자주 접하게 되면 하나의 고정 관념이 형성된다. 이러한 생각의 편향 때문에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그 쪽으로 치우치게 돼 버린다. 비행기 추락 사고를 연일 보도된다고 해서 비행기 사고로 사람이 죽을 확률이 자동차 사고 사망률보다 높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의 판단이다.

 

수돗물을 불신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지갑에 돈이 새는 것을 감수해서라도 병에 든 생수가 위생상 좋다고 믿을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마시는 물의 위생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은 수도 사고로 인해 질병으로 사망하는 확률이 병에 든 생수를 마시고 사망하는 확률보다 높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Scene #3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은 인류의 원초적 욕망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이러한 착각을 하도록 부추기는 세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병이 든 물을 파는 생수업체들이다. 생수산업이 단기간에 발전한 데에는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불신을 키운 것은 생수업체였다. 생수업체들은 자사의 제품을 선전할 때 '깨끗함', '안전', '믿음'을 내세웠다. 과거에는 자신들의 경쟁상대라고 할 수 있는 수돗물에 대해서는 '소독약 냄새 나는 비위생적인 물'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공격했다.

 

지금도 대중의 지갑을 열게 만들 정도로 생수업체의 힘은 막강하다. 그래서 다수의 대중은 생수업체가 만든 물을 믿고 마신다. 한 병에 만원이 넘는 최고급 생수가 백화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워터 바'에서 맛 좋은 물을 권하는 '워터 소믈리에'까지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1초마다 1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생수병 마개를 연다고 한다. 대동강 물을 팔아넘긴 봉이 김선달의 이야기가 더 이상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을 만큼 생수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비싸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일명 프리미엄 생수. 하지만 정작 프리미엄 생수에 대해 잘 알고 마시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프리미엄 생수를 찾는 고객은 일반 생수보다 미네랄 성분이 더 풍부하고, 수질관리가 더 철저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식수 혁명』의 저자인 제임스 샐즈먼은 편리함과 맛, 건강 그리고 스타일로 무장한 ‘생수 마케팅’의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고, 생수의 안전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수돗물에 비하면 생수는 규제가 더욱 느슨하고, 감시도 더 적게 이루어진다. 또한 상표에 표시된 내용은 대개 무의미하고, 기재 사항도 적다. 일부 대규모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생수가 수돗물보다 더 많이 오염되어 있고, 때로는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많다. 생수가 수돗물보다 더 안전하다고 가정하면 마음이 편해질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거의 없다. (271쪽)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프리미엄급 생수는 프랑스 산 에비앙이다. 알프스 산맥 에비앙 지역에서 채취한 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생수다. 알프스 산은 평생 한 번 갈까 말까할 정도로 유명한 명소다. 비록 희고 차디찬 알프스에 쌓인 눈을 만져 보지는 못하지만, 그 곳에 있는 눈이 녹여서 생성된 물이 어떤 맛인지 알고 싶어 한다. 수돗물이나 병이 든 생수나 물맛의 차이는 없는데도 말이다. 알프스 산맥에 채취되었다는 제품의 소개 내용과 '에비앙'이라는 브랜드를 보는 순간 병에 들어 있는 물이 알프스 산 생수라고 믿는다.

 

그러나 좀 불순한 생각을 하자면 에비앙 문구가 붙어있는 병에 수돗물을 담아 높은 가격으로 판다면 공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전국 대형마트에 꽤 적지 않은 수량으로 진열되고 있는 그 많은 에비앙 생수에 진짜 알프스산 물을 담은 것인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에비앙을 판매하는 회사가 제아무리 100% 알프스산 물이라도 확신을 줘도 말이다. 똑똑한 소비를 지향하는 소비자라면 에비앙의 판매 전략은 최고급을 선호하는 소비자를 사로잡기 위한 마케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고급스러운 물을 마시고 싶고, 그 물이 위생상 좋다고 신뢰하는 소비자의 심리적 착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스놉 효과(Snob Effect, 속물주의)에 비롯된 소비 행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물이 인류의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물질임을 생각한다면, 생존을 위해서 깨끗하고 건강에 좋은 물을 마시고 싶은 인류의 원초적 욕망이 소비 행태로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세 유럽 각지에서 순례 코스가 인기를 끌 때 사람들이 가장 찾고 싶었던 것이 ‘성스러운 물’이었다. 순례자들 사이에서 '성스러운 물'을 불치병 환자가 한 모금만 마시거나 몸에 바르면 병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순례길 위에서 성직자들은 치유력으로 소문난 샘물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급증하는 순례자들에게 진짜 성수(聖水)를 입증하기 위해 저마다 휴대용 물병을 만들었고, 여기에 다른 샘물과 구별되는 특수 문장을 새겨 넣기도 했다. 이미 중세에 쉽게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최고급을 선호하게끔 만드는 생수판매 마케팅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생수병의 위생을 논하기 전에 꼭 알아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 또 있다. 생수병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의 사례가 있다는 점이다. 1L짜리 페트병을 하나 만드는 데 물 3~4L가 필요한데다 석유도 약 29mm가 들어간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페트병이 쓰레기로 버려진다는 사실이다. 환경친화적인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정말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다면 플라스틱으로 제조된 병에 있는 물을 안 마시는 게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다.

 

 

 

 Scene #4  '블루골드' 시대에 맞춰 등장한 물 민영화 문제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매번 지겹도록 강조하는 사실이지만, 물은 우리 삶에 있어서 정말 소중한 자연의 물질이다. 오늘날 물은 우리 실생활에 다방면으로 사용될 정도로 필수적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물을 소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식생활에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이 중요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물은 너무 쉽게 쓴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오염과 이상 기후로 인해 점점 물이 고갈되어 부족할 수도 있는 위기의 현실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래서 물의 소중함을 알리고 물 부족의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UN은 3월 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지정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물의 중요성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막연하게 물을 아끼자고 전하기보다는 우리 삶에 있어서 땔래야 땔 수 없는 '식수(食水)'를 아낄 것을 강조하는 것이 더 낫다.

 

사실 지금 우리가 수돗물이 더 위생적이냐, 아니면 생수병이 건강하고 안전한 것인지 거기에 얽매여서 따질 처지가 아니다. 이 문제 또한 중요하지만, 물의 안전성을 둘러싼 전지구적 관심과 논쟁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수돗물 vs 생수병' 못지않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 정말 깨끗한 식수를 마실 수 있는 걱정하고 싶다면 좀 머리 아프겠지만 인류의 생존 여부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즉, 식수는 누구의 것이며 얼마나 안전하며 또 어떻게 관리·분배되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국가가 직접 해결해야 할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개인의 삶을 넘어서 인류 전체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 기본적이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전문가들은 20세기가 '블랙골드(석유)'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블루골드(물)'의 시대라고 말하면서 물 산업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물 부족 심화로 해수와 폐수를 담수로 만드는 수처리 사업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는데다가 중동, 아프리카 등 산유국이 막강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깨끗한 물을 찾고 있는 것이 전 세계가 물 산업에 주목하는 이유로 손꼽힌다.

 

물 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상하수도 민영화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식수의 본질’을 논하기 위해서는 권리 대 시장 혹은 공유 대 사유 문제로 확대되는 물 공급 민영화 이슈를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 공급 민영화 찬성론자들은 민간 기업의 참여를 늘려 물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서비스 질과 수도 접근성이 향상된다고 말한다. 반대로 민영화 반대론자들은 물 사용에 부과되는 세금이 높아져서 양질의 상하수도를 사용하지 못하는 가난한 국민이 소외되고, 양극화가 더 심화될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공공부문 민영화와 관련된 논란을 되돌아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일부 국가의 물 민영화 성공 사례도 있다. 깨끗한 양질의 물이 절실히 필요한 개발도상국 입장에서는 물 민영화를 도입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저자는 급수시설의 민영화 도입 이후 물 부족이나 오염된 물을 마셔 병사한 어린이 사망률을 감소시킨 통계자료를 물 민영화 필요성의 근거로 내세운다.

 

그렇다고 이 책의 저자가 단순히 보수적인 자세를 취해 물 민영화를 옹호하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 공급 민영화 문제를 단순히 시장논리가 아닌, 인간 기본권을 우위에 두고 바라볼 것을 주목하고 있다. 민영화 찬반 문제에 있어서도 '물은 인류 전체의 소중한 자연의 물질'라는 기본 전제를 놓치지 않는다. 지불 능력이 없는 가난한 국민도 안전한 식수를 마실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Scene #5  물은 인류 생존에 직결되는 자연권이자 기본권이다

 

전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공공기관에 '민영화'의 그늘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최근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철도 민영화', '의료 민영화'와 더불어 우리나라 역시 '물 민영화' 문제를 절대로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이 있는데 물 민영화 문제만은 여유롭게 즐기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 철도, 의료 민영화 논란에 묻혀서 그렇지 몇 년 전부터 물 민영화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지자체 재정 절감을 목표로 추진된 상수도 민간위탁은 현재 높은 수도요금과 낮은 유수율, 독소 계약 등의 문제를 낳으며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전국의 지자체 상수도 전면 위탁과 수익형 해외사업 등을 추진하며 ‘물 민영화’ 방침을 염두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다른 민영화 문제나 해결되지 못한 여러 가지 장기적인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이에 만약에 정부가 '묻지마 식' 물 민영화를 조용히 추진한다면 언젠가는 지금처럼 정쟁으로 이어질 정도로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갈등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철도, 의료 민영화 그 다음에는 물 민영화. 조만간 '민영화 3종 세트'를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무조건 민영화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물 민영화 도입 여부 문제도 민영화의 장단점에만 초점에 맞춰 해결하려고 한다면 절대로 절충적인 합의를 도출할 수 없다. 저자의 생각처럼 물은 모든 사람의 생존과 직결되는 자연권이자 기본권이라는 사실은 숙지해야 햔다. 모든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지속가능한 삶의 양질을 높이도록 고민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 민영화 도입 여부를 먼저 따져보는 것보다 지금부터라도 물, 아니 자연권이면서도 기본권으로서의 식수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책무가 필요하다. 결국, 깨끗한 물을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이 일상적인 권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의 지구에 살면서도 기본적인 삶의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나라도 있다.

 

'사 먹어야하는 물'과 '안전하게 먹어야하는 물'. 성분이 같은 물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물을 바라보고 사용하는 방식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전자의 물은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는 추상적이면서도 일반적인 정의에 가깝다고 한다면 후자는 인류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식수의 실질적 정의라고 할 수 있겠다. 안전한 식수를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한 인류의 투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올바르고 정당한 투쟁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수의 중요성을 깨닫는 인식의 변화가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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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이 상 「거울」중에서 -

 

 

 

 

 Scene #1  대자보를 찢을 권리

 

고려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주현우씨가 코레일 노조 파업,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등을 언급하며 “하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다”고 교내에 써 붙인 대자보의 여파가 전국으로 번지고 있다. 대학가에는 주씨 주장에 호응하는 ‘릴레이 대자보’가 나붙고, 일부 중·고등학생들까지 이 같은 분위기에 동참하고 있다.

 

주씨는 앞서 지난 10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후문 게시판에 2장짜리 대자보를 붙였다. 이는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서 급속도로 퍼졌고 대학가는 물론 중·고등학생도 대자보를 써 붙이고 사진을 올릴 정도로 확산했다.

 

반면 보수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에는 고려대, 서강대에 붙은 대자보를 훼손했다는 글이 ‘인증 사진’과 함께 올라와 논란이 일고 있다. 건국대에서도 일베 회원에 의해 훼손된 대자보가 발견됐다. 일베 측은 반박 대자보를 제작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한편 교내에 붙은 대자보를 훼손하는 과정을 동영상을 촬영해 일베 사이트에 올린 사건도 있었다. 다음날인 문제의 학생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H 대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찢은 본인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H대생은 자신의 행위를 “소통의 묵살이 아니라 제 목소리를 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누군가가 대자보를 붙일 권리가 있다면 그것을 찢을 권리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어떤 대자보를 교내에 붙이면 들어있는 메시지가 한성대를 대표하게 된다. 대표성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을 부정하는 것 또한 쉽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런데 H대생은 글 마지막에서는 “제 멋대로 행동을 했고 저로 인해 피해를 보신 분들께 사과드리며 대자보를 쓰신 분께도 사과드린다”고 적었다. 또 “이번 사건은 제 어린나이의 객기로 치부해주시면 감사하겠다”며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Scene #2  일밍아웃인가, 어린 나이의 객기인가? 

 

최근 일베 이용자들 사이에서 ‘일밍아웃’이 유행하고 있다. 과거 일베 활동 사실을 극도로 숨기던 행태를 벗고, 자신이 일베 이용자라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알리는 방식은 은밀하다. 자신의 정체를 대놓고 밝히지는 않지만, 일베를 형상화한 손가락 표식을 통해 ‘인증’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는 과거 일밍아웃을 기피하던 일베 문화와는 대별된다. 이전 일베 이용자들은 스스로를 ‘장애인’, ‘병신’이라 부르며 일베 이용자임을 외부에 드러내는 걸 숨기며 자기비하적 유희를 즐겼다. 하지만 최근 일베가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집단으로 묘사되면서 일부 일베 이용자들 사이에서 일베 이용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안녕들‘ 대자보를 찢은 행위를 자신의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고백한 H대생도 어찌 보면 일밍아웃이라고 볼 수 있다. H대생이 게시판에 남긴 글의 전문을 읽어보면 대자보를 찢는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인터넷 커뮤니티’가 바로 일베인 것이다.

 

하지만 H대생의 일밍아웃은 기존 일베 회원들의 악명 높은 일밍아웃 사례와 비교하면 꽤 순진한(?) 편이다. 일베 회원들이 이 사실을 본다면 그의 이중적인 태도에 ‘민주화’(일베 게시글에 대한 반대 또는 비추천. 진보적인 주장이나 일베에서만 가능하는 폭력적이고 비하에 가까운 농담을 인정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의미함)한 배신자로 규정했을 것이다.

 

H대생은 대자보를 훼손하는 장면이 있는 동영상에서 일베를 상징하는 어떠한 손짓도 하지 않았으며 훼손한 뒤에 찍는 인증샷도 남기지 않았다. 자신이 일베 회원이라는 사실은 학교 게시판에서 너무나 정중하게 고백한다. 보통의 일베 사용자들은 모든 존칭을 생략하고 서로 반말을 한다. H대생이 대자보 훼손 동영상을 일베 사이트에 올렸을 때 반말투로 글을 썼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래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베 회원이라면 학교 게시판에서도 반말로 일밍아웃을 당당하게 선언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H대생이 착한 일베 회원이라고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일베 회원이라면 써야할 표현 방식 대신에 높임말과 완곡어법을 선택한 것뿐이다. 인증샷이나 일베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일베 회원들의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느낌을 덜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과문을 통해 일밍아웃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대자보를 훼손한 행위에 대해서도 기존의 일베 회원과 비슷하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자신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H대생이 일베 회원이라는 인식은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일베 회원들은 반사회적 행동으로 경찰에 입건되거나 법적으로 처벌을 받게 될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들 중에는 가끔 사과문을 작성해서 공개하는 경우도 있다. H대생의 행동이 자신이 스스로 표현한대로 ‘어린 나이의 객기’로 볼 수는 있겠지만 제아무리 일베 회원들이 혐오하는 표준말을 사용해도 일베 회원 특유의 행동과 그들만의 사상적 구조는 완전히 지울 수 없다.

 

 

 

 Scene #3  삐뚤어진 인정 욕구의 산물, 일베

 

일베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돌연변이 괴물”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일베충’은 상식을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빗대 이르는 말이 돼버렸다. 여성, 외국인, 다문화가정, 호남지역에 대한 일부 일베 회원들의 혐오는 도를 넘어섰다.

 

'여성 비하'는 그야말로 일베의 핵심 코드 가운데 하나다. 여성을 성적 도구, 심지어 성폭행 대상으로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게시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대상엔 연예인과 일반 여성들은 물론, 어린이와 종군 위안부까지 포함된다. 여성 혐오에 노소를 가리지 않는 셈이다. 초등학생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한 사진과 함께 '로린이'란 표현으로 물의를 빚은 끝에 임용을 포기한 예비 초등 교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로린이'는 로리타와 어린이의 합성어로, 어린 여자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표현하는 일베 용어다.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인 '김치녀'는 그나마 점잖은 수준이다. 여성을 노골적으로 폄하해 인격체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한정시키는 단어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보슬아치'다. 여성 성기에 빗대 '여자인 게 벼슬인 줄 안다'는 뜻이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볼 수 없는 그들의 태도와 행동에서 박가분은 일베의 사상을 규정한다. 한 마디로 “나는 누군가의 정체성을 혐오할 권리가 있다”로 압축한다. 눈살 찌푸리는 일베 회원의 행동이 혐오스럽다고 비난과 욕설로 퍼부어도 소용없다. 이들에게 씨알도 안 먹힌다. “혹시 나, 너 혐오하냐?” 오히려 상대방을 공격적으로 혐오하는 권리를 하나의 일부심(일베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식할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일베가 성별·지역·정치적 지향 등에 대한 편견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회원들끼리 ‘묘한 해방감’을 공유하면서 정치·문화적 해방구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면서 박가분은 일베에도 나름의 사상적 의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컬트문화로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일베 회원들의 목적은 인터넷에서 타인이 불쾌하도록 도발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이들은 현실에 나오면 우스워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인터넷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 공론장에 대해서는 불신하고 있다. 현실의 맨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감추고 있다. 결국 젊은 세대의 혐오문화가 현실에서 좌절한 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로 나타난 것이다. 삐뚤어진 인정 욕구의 산물이 만들어 낸 거대한 흔적들이 모여서 바로 지금의 ‘일베’를 탄생시켰다.

 

 

 

 Scene #4  촛불 시위자에서 일베 회원으로 변신하기까지

 

일베가 강경 극우의 집합소로 되는 과정을 되돌아보면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베의 시작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베는 ‘디씨인사이드’에서 갈라져 나왔다. 디씨인사이드에 올라온 게시물 중 ‘19금’, ‘하드코어’, ‘지나친 비난 글’ 등 수위가 높아 삭제될 우려가 있는 게시물을 따로 모아 저장하는 사이트에서 비롯했다. 일간베스트저장소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이다.

 

일베가 극우 혹은 강경 우익의 집결지로 자리매김한 것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여론 시장은 오랫동안 진보좌파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졌다. 일부 진보좌파 누리꾼들은 그간 온라인에서 보수 세력을 비방, 희화화하곤 했다. 진보좌파가 사실상 독점하던 온라인 여론 시장에 일베가 등장해 균형을 맞춘 측면도 있는 것이다.

 

특히 정치·윤리적 이상이 분출됐던 대규모의 촛불 시위(2002년, 2008년)가 현실 정치에서 좌절된 후 노무현 정부의 무능함을 비방하는 누리꾼이 등장했다. 이제는 촛불에 의지하는 ‘감성팔이’에 속지 않으며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떤 이상과 이념을 내세우며 행동하는 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온라인 여론 시장의 판도가 달라진 것이다.  “좌좀(진보진영을 좀비로 비하해서 지칭하는 말)의 행태를 고스란히 비방과 희화화로 갚아주고 있다.

 

그래서 박가분은 일베를 ‘촛불시위의 쌍생아’라고 주장한다. 일베는 과거 촛불시위에서 드러난 급진성, 욕망의 정치, 윤리적 이상주의가 변질된 형태로 계승된 것으로 본다.

 

 

 

 Scene #5  ‘안녕들 하십니까’를 보면 ‘일베’가 보인다

 

일베가 보수의 온라인 공간이라고 한다면, 이와 대척점에 있는 진보의 온라인 공간은 ‘오늘의유머’(오유)가 있다. 오유와 일베가 인터넷공간을 넘어 오프라인에서도 각계의 주목을 받으며 진보와 보수 간 치열한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라는 구도로 나뉘면서 성향이 비슷한 사용자들끼리 똘똘 뭉치는 흐름을 보여준다. 공통적으로 오유와 일베는 운영자 개입을 최소화하며 운영되고 있다. 규제가 없는 사이트에서 네티즌들은 자유로이 자신의 생각을 올리고 나눴다. 그들의 구호는 "무한 공유"였다. 때론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게시물도 넘쳐났다. 표현에 대한 규제가 없다 보니 지나친 비난과 욕설이 난무하기도 하다.

 

서로 다르면서도 유사한 일베와 오유를 마르셀 모스의 ‘증여와 답례의 호수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물의 증여와 답례는 단순한 경제적 가치의 교환이 아니라 사회를 유지시키는 의사소통의 방법이다. 관계를 맺고 사는 모든 인간과 집단에는 주면 받아야 하고 받으면 되돌려주어야 하며, 받지 않으면 상대의 의사를 거부하는 것이고, 되돌려주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의미로 잠재적 전쟁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과거 진보 세력 누리꾼이 많았던 다음 아고라나 지금의 오유를 보면 보수 세력을 비하하는 짤방이나 글을 만들어 공유하면(증여) 그것에 대해서 동의하고 공감하는 반응(답례)을 하면 서로에 대한 결속력을 확인하고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일베도 이와 유사한다. 일베 회원들은 진보 세력, 여성, 5.18의 역사적 의미를 비난한다. 이에 대해서 서로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섞는 불손한 태도로 댓글을 달면서 ‘우리 모두 병신’이라는 논리가 전제된다. 자기를 혐오하면서도 타인을 함께 혐오하는 커뮤니케이션 형태는 일종의 동질감과 평등주의를 형성한다. 따라서 서로를 혐오할 수 있다는 것이며 상대방에 대한 적대와 폭력성을 너무나 쉽게 표면 위로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념 성향이 다른 ‘일베 vs 오유’ 또는 최근에 일어난 인기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팬클럽과 일베 간의 대립은 부정적인 호수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커뮤니티의 부정적 호수성은 대자보를 통해 부조리한 사회문제 관심을 촉구하는 ‘안녕들 하십니까’ 현상과 일베 간의 대립에서도 존재한다. ‘안녕들’의 대자보 열풍은 그동안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과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던 대학생들에게 일종의 각성제 역할을 해줬다. 젊은이들이 앞 다퉈 응답자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수록 젊은이들의 공감과 동참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러자 여기에 맞서기 위해서 일베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족족 대자보를 찢는 행위를 하고 있다. 대자보를 훼손한 상태에 일베 손가락 표시가 있는 인증샷을 공유함으로써 폭력적인 행동도 대자보 현상에 반박하는 소통의 행위로 정당화한다.

 

여기에서도 언제 어디서든 누구든지 혐오할 수 있다는 일베의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응답자보를 읽고 그 내용에 공감하는 대학생들은 ‘안녕들’ 집회에 참여한다면, 반대로 반박자보를 붙인다거나 ‘안녕들’ 자보를 훼손하는 인증샷은 일베 회원 그들 나름대로 공감하게 만들어 ‘안녕들’ 운동을 ‘좌좀이 주도하는 선동질’로 인식하게 만든다. ‘안녕들 하십니까’와 ‘일베’. 이들이 서로 지향하는 입장은 정반대지만, 그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증여와 답례의 호수성’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서로 합의적 협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대화와 소통이 불가능한 단절된 상태가 지속된 채 말이다.

 

 

 

 Scene #6  희망 없는 불안은 혐오의 괴물을 낳는다

 

혐오의 가장 중요한 뿌리는 '불안'이다. 현재 일베 회원들을 잠식하고 있는 극단적인 혐오들 역시 결국 궁극적으로는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불안들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 상승에 대한 남성의 불안', '민족 정체성의 불안', '갈수록 힘들어지는 취업에 대한 희망에 대한 불안' 등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그 내용을 모아 보면 결국 이는'세상에 대한 집단적인 불안'과 연결되어 형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각각의 대상에 대한 혐오는 하나의 맥락으로만 뭉뚱그릴 수 없는 각기 다른 불안과 윤리적, 사회적 맥락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혐오의 맥락은 각기 달라도 혐오의 조직화는 ‘일베’라는 이름으로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 경제적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이를 활용하는 조직화된 혐오와 비하는 점점 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점점 일베가 판을 치는 한국 사회는 이제 극단화된 혐오의 시대를 맞이할 것인지 혹은 혐오로 표출된 불안을 다른 곳을 향해 분출시킬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

 

혹자는 요즘 확산되고 있는 '안녕들 하신가요'라는 안부의 인사가 개인들의 불안이나 정치적 호소를 넘어, 차별과 혐오 속에 존재해 왔던 서로를 확인하는 더 세심한 인사로 확대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녕들’ 현상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안녕들’ 현상이 미묘하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촉매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단발적으로 끝날지 알 수 없다. 다만 대자보에 적힌 주장이 논리가 부실한 감성 호소에 불과한 채 긍정적인 호수성이 이어진다면 그들만의 자율적인 공론의 장이 될 수 있다. 현실 사회에서 요구하고 싶어 하는 대학생들의 열망을 대자보로 표출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촛불 시위의 실패가 재현될 수 있다. 촛불시위에서 보여준 변화와 개혁에 대한 희망 섞인 열망이 현실 정치에서 좌절되어 사라지자 불신과 불안만 남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식고,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면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직면하게 된다. ‘안녕들’ 현상이 단발성으로 끝난다면 비극적인 쌍생아가 태어날 것이다. 그 이름이 바로 ‘일베’다.

 

희망 없는 깊은 불안은 혐오의 괴물을 낳는다. 십여 년 전 변화된 세상을 바라는 희망을 양초에 피웠던 그 작은 불씨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거기에 동참했던 일부는 ‘일베’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채 오늘도 불확실한 이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괴상한 몸부림을 친다. 가상의 온라인 공간에서 희망 없는 불안을 숨기려고 나 자신을 ‘병신’ 취급하면서 타인을 혐오한다. 그들을 ‘일베충’이라고 혐오하고 업신여겨도 소용없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비화와 혐오을 먹고 살면서 낯짝 두꺼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의 내성을 지녔으니까.

 

박가분은 희망하는 사회에 대해 소통하는 공간을 많이 만들어가거나 진보좌파가 일상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어야 일베의 사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글쎄, 그의 대안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선 그것마저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는 미완의 ‘이상’으로 남게 될까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한다. 우선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일베의 ‘조직화된 혐오’의 위험성을 방지하는 것이 시급하다. 혐오를 혐오로 맞선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知彼知己 百戰不殆. 그러기 위해서는 일베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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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3-12-22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잘 읽었구요.

cyrus 2013-12-23 21:0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다른 분이 쓴 이 책의 서평도 읽어보고 있는데, 저자의 해석을 비판하는 내용도 있었어요. 오늘 다시 읽어보니 제가 저자의 관점에만 초점을 끼워 맞춰 현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생각해보네요. 그래도 긴 글을 읽어주시고, 제 생각에 공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여울 2013-12-23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약내용 잘 봤습니다. 감사!

cyrus 2013-12-23 21:1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긴 글인데도 읽어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하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일베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좀 더 다양해질거 같습니다. 그럴수록 잘못된 분석과 예측도 난무하겠죠... 제가 어제 글에 쓴 생각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틀렸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볼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
 
[공범들의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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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라

더 이상 분노할 수 없다면

내 영혼 죽어 있는 것 아니냐

완장 찬 졸개들이 설쳐대는

더러운 시대에 저항도 못한 채

뭘 더 바랄게 있어 눈치를 보고

비굴한 웃음 흘리는 것 아니냐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이제 그만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차라리 파락호처럼 떠나버리자

아아 새들도 세상을 뜨는데

좀비들만 지상에 남아 있구나

 

- 정희성 「부끄러워라」-

 

 

 

 

 ♣ 정의 따윈 잊고, 눈 감으며 지내라고?

 

 

 

 

 

 

Look down, look down 눈을 내리깔아라, 눈을 내리깔아라. / Don‘t look ’em in the eye 그들과 눈을 맞추지 마라. (…) Look down, look down 눈을 내리깔아라, 눈을 내리 깔아라. / You‘ll always be a slave 너는 언제나 노예일 뿐이니까.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많은 이들이 손꼽는 명장면 가운데 하나가 거대한 함선을 이끄는 죄수들의 절규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첫 장면이다. 웅장한 멜로디에 비참함과 절망감이 사무치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이 장면을 볼 때면 오늘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정’(不正)과 ‘부패’ 앞에서 ‘정의’를 푹 숙이고 눈을 감는 비겁한 공직자와 대중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법의 상징으로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그리스 신화 속의 ‘정의의 여신’ 디케(Dike)다. 디케 조각상은 대개 한 손에 저울, 다른 손에는 칼이나 법전을 쥐고 있다. 저울은 형평성을, 칼은 엄정함을 나타낸다. 디케는 또 눈을 감거나 안대로 가리고 있는데, 이는 판결에서 주관성을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서울 세종로의 옛 대한변호사협회 자리에는 지금도 한 손에 저울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집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하는 모습의 디케 상이 서 있다. 옛 사법연수원에도 눈을 지그시 감은 디케 상이 있었다. 지금 우리 대법원의 로고 또한 디케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상징은 상징일 뿐, 실제 법집행 과정은 그다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비리와 오류를 덮으려고 자신들이 써야 할 안대로 국민의 눈을 가리려고 한다. 한국의 디케는 눈을 가리지 않았다. 실체적 진실만을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뜻이겠지만 시야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오게 마련이다.

 

 

 

 ♣ 범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무식한 지도층들

 

법(法)은 순리다. 법은 물 수(水) 변에 갈 거(去)로 이뤄진 글자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치를 담고 있어 모두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상식을 벗어나면 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법적으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물고 늘어지는 갈등만 이어지고 있다. 확실한 증거와 증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채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이 무혐의를 받음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한 파렴치한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법에 따라 재판하는 판사들이 법, 곧 순리를 거스르겠다는 의미로 보일 수밖에 없다.

 

검찰은 더하다. 검찰은 ‘정의롭다’는 말을 즐겨 쓴다. 정의는 바른 도리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바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름은 흑백이 아니다. 바를 정(正)은 하나(一)에 이름(止)을 말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누구나 같은 결론에 이름을 뜻한다. 정권을 비판하는 일에는 날선 칼을 들이대고 지난 정권의 인사들만 잡아들이는 일은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 검찰은 서민들의 범죄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만 힘센 이들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국가 발전에 공헌한 점, 공직에서 오랫동안 복무한 점, 기업 운영으로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점 등의 이유로 정치인과 경제인에 대해 솜방망이 구형을 했다. 법은 거미줄과 같아 힘이 없는 이들은 붙잡지만 힘센 자는 찢고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 현실이 그 짝이다. 법이 그물이 되어 힘센 자는 꽁꽁 묶고 작고 힘없는 이들은 성긴 구멍으로 빠져나가도록 할 수는 없을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법은 그물보다는 거미줄에 가깝다. 또 검찰에는 ‘정의롭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보수주의자로서, 고백하고 요구하고 경고합니다"라는 글을 올리고 강단에서 물러난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예전에 진행했던 시사 프로그램 제목대로 ‘정의’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법을 집행하는 소수 지도층에게 날카로운 돌직구를 날린다.

 

우리나라 지도층들은 너무 무식해요. 그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지와 신뢰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지배 체제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러니까 당장 눈앞의 불이익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죠. 장자연 사건, 김승연 회장 사건, 전경환 사건, 제가 지적하는 문제들이 그런 사건이거든요. 다 보고 있고, 다 알고 있고, 오로지 모르고 있는 것은 수사하는 경찰, 검찰, 범원뿐인 것 같아요. (중략) 조금만 똑똑했더라면 바로 그 앞에서 자신의 병든 팔을 자르는 심정으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자신들의 한 부류이자 동료일 수도 있는 해당되는 범법 행위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거죠. (중략) 그렇게 우리 제도와 시스템을 믿어달라는 것이 보수의 모습인 건데요. 우리나라는 그게 아니고, 거꾸로예요. (15~16쪽)

 

결국 범죄에 대한 국가의 인식 부재는 우리 사회 전체에 통용되어야 할 ‘정의’과 ‘도덕’의 의미가 무색해지게 만들며 우리의 상식에 벗어난 거대 국가 범죄를 끊임없이 잉태한다는 것이다.

 

 

 

 ♣ 범죄자, 괴물이 아닌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병

 

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는 한국적 범죄의 특성과 연쇄살인의 사회적 배경부터 시작해 불법 도박과 스포츠 승부 조작, 공소시효, 오원춘 사건, 국가 범죄에 가담한 경찰 등 범죄와 관련된 수많은 소재를 제시한다. 현직 경찰관으로도 일했던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이자, 연쇄살인 등 다양한 범죄를 분석해온 표창원 전 교수를 통해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다음 돌직구 질문의 표적지는 독자에게 향한다. 이웃집에서 벌어진 단순 강도에서부터 거대한 국가기관의 부정까지, 범죄를 애써 외면하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혹시 당신도 공범이 아니냐고. 

 

그는 범죄자가 늘 우리 주변에 있다고 말한다. 나와 상관없는 '괴물'이 아니라는 의미다. 표 전 교수는 프로파일러로 활동했을 때 연쇄살인범, 영아살해범 등 다양한 범죄자를 만났다. 그들은 대부분 기가 꺾인 상태였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애정을 못 받아본 사람들이라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마음을 열었다. 

 

표 전 교수는 연쇄살인의 사회적 징후가 뚜렷하면 지진ㆍ태풍 대비에 맞먹는 사회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연쇄살인은 태풍 한번 부는 것 이상의 사망자가 나온다. 2000년대 들어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별도의 괴물이라기보다 사회병리 현상이 돌출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빈부격차, 낮은 취업률, 학교 폭력 등이 그 징후다. 태풍에 대비하는 것처럼 대응할 필요가 있다. 성장보다는 복지와 분배에 집중하고,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이상 성격자를 찾아 치료하는 등의 예방책이 있다.

 

 

 

 ♣ 범죄 앞에서 부인하는 대중의 침묵

 

‘과연 당신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있습니까?’ 표 전 교수가 독자들에게 향하는 묵직한 돌직구 같은 질문에 용기 있게 받아 칠 수 있는 독자가 있을까?

 

한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 사회가 공정한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3.8%가 ‘공정하지 않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 청소년 대상 조사에서는 44%가 ‘10억원을 준다면 징역 1년 정도 살짓을 저지를 수 있다’라고도 응답했다. 모두가 퍽퍽하고 삭막한 불신과 의심, 경계, 피해 의식의 악순환 속에 빠져 있는 듯하다. 이런 사회적 불합리와 부조리들이 사람들에게 잠재된 분노를 만들고 다시 이것이 왜곡된 방향으로 무서운 범죄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가령 당신은 직장에서 당신의 인사고과 책임자가 한 직원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걸 언뜻 들었다. 또는 마을에서 나치 부대원들이 민간인을 총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이렇다. ‘눈감아 버린다/못본 체한다/보고 싶은 것만 본다/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모르는 게 약이다/그건 나와 무관해/침묵의 음모/괜한 평지풍파 일으키지 마라/전체 사회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어/차라리 몰랐다면/외면해 버렸지/심지어 자신도 인정하지 않았어.’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스탠리 코언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경험의 밑바탕에는 '부인'(不認)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부인을 심리적 방어기제로 개념화했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편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아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뿐만 아니라 이를 보거나 인지한 관찰자, 심지어는 피해자조차도 때로는 사실 정보를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거나 제쳐두거나 재해석하게 된다.

 

인권을 해치는 범죄와 이에 따른 인간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재생산하는 데에는 가해자와 관찰자(방관자)의 완고한 ‘부인’에 가까운 침묵이 자리 잡고 있다. 가해 권력의 인권침해 부인은 이를 방관하는 일반대중의 태도와 무관할 수 없으며, 일반대중의 부인은 가해 권력의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눈감는 상태, 곧 ‘부인’과 ‘침묵’은 또 다른 국가 범죄에 냉소하고, 제2의 신창원, 오원춘을 등장하게 만든다.

 

 

 

 ♣ 사람은 되지 못해도 부정과 불의에 둔감한 좀비가 될지 말자

 

우리 사회를 위한 표 전 교수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의를 제대로 세우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단다. 이건 초등학생 때도 배웠는데도 이상하게 우리는 실전에서는 써먹지를 못한다. 오히려 나쁜 짓은 자기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한다.

 

표 전 교수는 또 보수와 진보의 좌우 갈등도 폭력을 키우는 요인으로 본다. 극단적인 대립이 폭력을 낳는다는 의견이다. 진보와 보수가 조금씩 자기 견해를 양보하고 범죄에 대한 균형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해소된다면 국가 공권력· 강자 등의 도덕 윤리 회복이 원활해진다. 권력과 정부가 솔선수범하고 엄정한 법규를 세워야 폭력에 대한 근본적 치료가 가능해질 수 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나오는 부정과 불의에 우리는 둔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덮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고 싶어 하며,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외치는 나라다. 불의에 침묵하고 부인하는 국가의 전형이다. 영국의 보수주의 대표 정치이론가이자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선한 자의 침묵은 악의 승리를 도와준다. 침묵은 곧 동조고 방관이며 우리 사회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조그마한 관심과 배려에 대해 침묵과 외면으로 두 눈을 내리 깔고, 한 발 물러 서있을 때가 많다. 사람은 되지 못해도 부정과 불의에 둔감한 좀비가 될지 말자. 우리 사회에 대해 주변에 대해 관심과 행동보다 침묵과 방관으로 악의 승리를 도와주고 있는 공범 역할을 하고 있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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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식탁 - 우리는 식탁 앞에서 하루 세 번 배신당한다
마이클 모스 지음, 최가영 옮김 / 명진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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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콜릿의 노예가 된 아이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작가 로알드 달은 어린아이처럼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개만 먹으면 코스요리를 맛볼 수 있는 풍선껌이나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 민트로 이루어진 풀밭은 군것질거리에 애틋해하는 철없는 사람만이 생각해낼 수 있다. 아마도 로알드 달은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초콜릿과 캔디가 넘쳐나고, 공장의 주인이 창조자처럼 군림하며, 심술궂은 아이들을 마음대로 혼내줄 수 있는.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웡카 초콜릿'. 도대체 그 많은 초콜릿을 누가 어떻게 만드는지 20년 동안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초콜릿의 마술사 윌리 웡카는 그 비밀 공장을 견학하고, 평생 먹을 초콜릿을 얻을 수 있는 황금티켓 5장을 전 세계에 배포한다. 5명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하기 위해. 착하고 속 깊은 찰리를 빼고 황금티켓을 거머쥔 아이들은 저마다 욕심을 부리다 중도에서 무시무시한 벌을 받고 탈락한다.

 

 

 

 

 

 

 

첫 번째 탈락자는 게걸스럽게 초콜릿을 탐하던 먹보 아우구스투스. 그는 초콜릿으로 따끈하게 녹여 만든 강물을 통째로 들이마실 정도로 언제나 초콜릿을 입에 달고 산다. 권장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그는 초콜릿을 즐기는 대신 초콜릿의 노예가 되는 비참한 꼴을 당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말할 것도 없이 ‘초콜릿’이다. 이 초콜릿에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매력적인 함의가 있다. 우선 초콜릿의 맛을 생각해 보라. 물론 달지만, 어딘지 쌉쌀한 뒷맛도 난다. 이 영화 속 초콜릿은, 단맛과 쓴맛처럼 두 개의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다.

 

먼저 단맛에 해당하는 긍정적인 의미는 ‘동심’과 ‘꿈’이다. 웡카는 초콜릿을 통해 동심과 꿈을 키워 왔다. 반대로 쓴맛에 해당하는 부정적인 의미는 ‘탐욕’이다. 온통 초콜릿으로 이뤄진 꿈의 장소 초콜릿 공장. 그러나 남보다 더 많이 먹으려 하거나(아우구스투스), 남을 무조건 이기려 하거나(바이올렛), 원하는 건 뭐든 소유하려 하거나(버루카), 잘난 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마이크) 마음을 가진 아이들은 벌을 받는다.

 

결국 이야기는 초콜릿이라는 귀중한 자원을 인간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교훈을 들려준다. 동심을 품은 사람에게 초콜릿은 그 자체로 ‘달콤한 행복’이지만,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 초콜릿은 ‘자멸의 지름길’일 뿐이다.

 

 

 

 ♣ ‘맛의 삼각형’(Taste triangle), 단맛·소금·지방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로알드 달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처럼 초콜릿의 맛에 중독된 아이들은 갈수록 늘어난다. 아이들의 욕심을 절제하는 윌리 윙카처럼 착한 초콜릿 공장주는 그저 이야기 속의 가공인물일 뿐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단맛의 노예가 되고 있다. 단 음식의 지나친 섭취가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단맛에 탐닉하게 되는 걸까?

 

스트레스를 받으면 유독 단 음식을 찾는 사람이 있다. 단맛이 일종의 쾌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맛에 익숙해지면 더 강한 단맛을 찾게 된다. 예전에 비해 설탕 섭취량이 크게 증가한 원인은 가공과정 중 설탕이 첨가된 식품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탄산음료가 설탕의 가장 큰 공급원이 되고 있고 에너지음료도 설탕의 함량이 높은 편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단맛에 중독되어 있다. 초코 쿠키의 대명사로 꼽히는 ‘오레오’ 쿠키가 코카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점은 우리는 단맛이 나는 초콜릿뿐만 아니라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가공식품의 조작된 맛에도 중독되어 있다. 누구나 가공식품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지만, 쉽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데다 맛도 좋기 때문에 즐겨 찾는다. 그동안 우리는 맛 좋고 간편한 가공식품을 먹을 수 있어서 뱃속 시계의 작동을 멈출 수 있었지만, 혀는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가공식품의 맛에 길들이고 말았다.

 

가공식품 기업들은 윌리 윙카의 초콜릿 공장이 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소금, 설탕, 지방의 물리적 형태와 구조에 손을 댔고, 우리의 뇌와 혀는 그들이 만든 단맛, 짠맛, 기름진 지방의 유혹에 벗어날 수 없었다. 소금은 가공방식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을 정도로 흔한 조미료인데다가 처음 한 입 베어 문 순간 혀끝을 짜릿하게 만든다. 지방은 칼로리가 가장 높으며, 많이 먹어도 몸에 특별한 증상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음식을 손에서 놓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유도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세 가지의 권력 유착 관계를 ‘철의 삼각형’(Iron triangle)이 있다면, 식품 기업들 사이에서는 모든 소비자들의 맛에 영향을 미치는 ‘맛의 삼각형’(Taste triangle)이 있다. 다르지만 서로 비슷한 이 세 가지 맛을 통해 가공식품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리게 만들어 맛보도록 견고한 카르텔을 작동했다. 우리 소비자들은 이런 가공식품 기업의 교묘한 속임수와 거짓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식품기업들은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써가며 건강식품, 기능식품, 유기농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를 속여 왔다. 미량의 건강 성분을 넣은 뒤 설탕 덩어리와 다름없는 제품을 건강식품으로 팔거나, 효능이 입증되지 않은 기능 식품을 비싸게 판매해 폭리를 취한다. 켈로그, 네슬레 등은 어린이 간식이나 어린이 식사용 제품을 내놓고 있지만 실체는 설탕범벅 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비자가 꼭 알아야 할 정보는 감추고, 허위·과대광고가 많은 것도 이들 업체의 특징이다.

 

예컨대 켈로그는 어린이에게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학교에 재정을 지원하는 일종의 마케팅 행사를 한 적이 있었다. 행사를 통해 켈로그 '착한 기업' 이미지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설탕범벅 시리얼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어린이들이 즐겨 먹는 아침 식사’라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설탕 과다 섭취의 문제점을 알며 자녀들에게 설탕을 많이 먹는 걸 원치 않는 부모님들은 켈로그의 마케팅을 선호했다. 겉으로는 영양 교육에 발 벗고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자사 제품을 쏟아내 어린이 소비자의 입맛을 길들이려는 의도인 셈이다. 대다수 소비자들은 이미지 마케팅을 활용한 식품기업들의 눈속임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 분별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는 더욱 큰 피해로 다가올 수 있다.

 

 

 

 ♣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맛의 싸움

 

집에서 먹는 밥이 최고다?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 통념을 신봉하지 마라. 가공식품이 식재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상 우리 몸은 유해 물질로 그득할 뿐이다. 실로 슈퍼마켓 진열대마다 가공식품이 넘쳐난다. 무심코 카트에 담는 이것들에는 몸에 필요한 칼슘, 무기질, 비타민 등 필수영양소 대신 소금, 설탕, 지방 등이 가득하다. 그러니 아무리 아이와 가족 건강을 위해 가공식품으로 만든 음식이 놓인 식탁을 엎는 들 소용없는 일이다.

 

지금도 가공식품 기업 산하 연구소에서는 맛의 중독성을 높이기 위해 흰 가운 입은 연구자들이 실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식품에 대한 소비자의 반발에 소금, 설탕, 지방 중 어느 하나에 비난 여론이 집중될 때마다 문제가 된 성분을 빼고 다른 성분을 그만큼 더 넣는다. 좋은 성분 하나만 강조함으로써 소비자가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게 하는 전술이다. 이들은 시정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소비자 보호단체의 공세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 소비자에게 식품을 많이 팔리고 이익을 얻기 위한 기업과 건강에 좋은 영양분이 가득한 맛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소비자들 간의 갈등은 오랫동안 이어지겠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맛의 싸움일 뿐이다.

 

러시아의 시인 뿌쉬낀은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고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찾아 온다고 썼다. 허나 그동안 먹어왔던 가공식품이 우리의 맛을 속일지라도 노여움과 분노의 감정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가공식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게 된 이상, ‘맛의 삼각형’에 중독된 입맛을 고치는 일만 남았다. 설탕, 소금, 지방을 많이 찾는 식탁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 ‘윌리 윙카’가 되어야 한다. 미각을 죄어왔던 ‘맛의 삼각형’을 파괴해야 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가공식품 광고의 허상을 파악하고, 불편하더라도 가공식품 위주의 식습관을 줄여야 할 것이다. 식탐의 나날 참고 견디면, 건강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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