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한번 잘못 들면 되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무조건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잘못된 길을 계속 가려고 고집하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럴 때 누군가가 잘못된 길을 가면 올바로 갈 수 있도록 다른 동행자가 꾸짖어야 한다. 잘못된 길을 걸으면 비판과 충고를 해주는 게 진정한 도리다. 하물며 인류 역사상 수없이 뜨고 진 사조나 이념도 맹목적 다수의 흐름에 빠져들면 원치 않는 곳으로 가게 마련이다.

 

 

 

 

 

 

 

 

 

 

 

 

 

 

 

 

    

 

프랑스의 여성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3년 그녀가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정면으로 비판하기 위해 쓴 책 제목이 잘못된 길 : 1990년대 이후의 급진적 여성 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바댕테르는 보부아르의 페미니즘을 계승하여 여성해방운동(MLF)에 뛰어든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성학자다. 그녀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인식하여 남성을 가해자로 매도한다. 이러한 전략은 남녀 간의 갈등·대립을 조장하여 양성평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댕테르는 급진적 여성 운동이 남녀 분리주의의 함정에 빠진 상태이며 심각하리만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여성 계층과 남성 계층이라는 대립된 층으로 일반화되는 데에서 오는 불편함이 있다. 이원적인 카테고리는 위험하다. 하나의 성을 하나로 묶어서 비난하는 것도 성차별주의와 비슷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남성/여성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은, 우리가 제거했다고 주장하는 '성의 위계'를 새로이 등장시킨다. 게다가, 우리의 투쟁 대상인 '권력 계급''윤리적 차원의 위계'까지 적용시킨다. 즉 권력을 갖고 있는 남성은 ''이고, 박해받는 여성은 ''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희생자들에게 '선한 계급'이라는 새로운 신분이 주어짐에 따라, 계급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강화된다. (잘못된 길70~72)

    

 

2005년에 정희진은 잘못된 길서평에서 바댕테르에 크게 실망했다고 썼다. 이어서 바탱테르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아직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길이 아니라 아직 가지 않은 길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바탱테르의 주장은 페미니스트로서의 행보에 어울리지 않는다. 여성 혐오의 심각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부 남성들의 입장과 유사하다. 바탱테르는 여성은 남성의 피해자로 보는 인식을 비판했다. 여성 스스로 희생자로 자처하는 상황에 집착하면 남성의 폭력적 본성을 고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탱테르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 잘못된 길에서 인용한 문장을 읽어보자. 바탱테르는 강간 피해 여성을 조사한 통계자료의 허점을 밝히면서 강간의 의미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적 폭력이 모두 '강간'이 아니다. 으슥한 주차장에서 칼을 들고 위협하는 23세의 남자에 의한 '강간''본의 아니게 당한 애무'는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강간 후의 트로마(글쓴이 주-이 책의 역자는 트라우마트로마라고 썼다)와 본의 아니게 당한 애무 후의 트로마는 엄격히 다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분간하기도 어려운 강간의 통계 수치를 부풀리는가? '폭력적인 남성과 피해를 입은 여성의 이미지'를 필요 이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잘못된 길50)

    

 

정말 위험한 발언이다. 강간 후의 트라우마와 본의 아니게 당한 애무 후의 트라우마는 다르지 않다. 아니,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두 유형 모두 성폭력이며 성범죄다.

 

 

 

 

 

성폭력 방식이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불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한 슴만튀(가슴 만지고 도망치기)’, ‘엉만튀(엉덩이 만지고 도망치기)’ 등 기습 성추행도 있다. 치고 도망치는 식이지만, ‘본의 아니게 당한피해 여성이 받는 정신적 트라우마는 다른 유형의 성폭행에 비해 절대 작지 않다. 이후 피해자들은 밤길을 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공포심에 휩싸여 심리 상담까지 받는 경우가 많다. 강제추행은 친고죄 규정이 폐지돼 피해자의 고소의사 없이도 10년 이하 징역이나 15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는 중범죄.

 

바댕테르의 주장이 상당히 파격적이어도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제기한 뜨거운 감자들을 살펴봐야 한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 주장하는 페미니즘표현의 자유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논쟁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바댕테르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캐서린 매키넌과 여성학자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 규제까지도 비판한다. 두 사람은 포르노는 강간에 이용된다. 강간을 계획하고, 실행하며, 흥분을 일으켜 성범죄를 저지르게 한다고 주장하면서 반() 포르노 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1983년 포르노를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로 규정하는 법 초안을 마련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 주 토요일 한겨레 칼럼에서 정희진은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과소평가된 고전이라고 했다. (관련 칼럼: <잠재적 가해자?> 한겨레, 2016527) 캐서린 매키넌은 성차별의 한 형태로 성희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포르노 규제 조례안을 발의하기 위해서 보수적인 공화당과 손잡기도 했다.

 

 

 

 

 

 

 

 

 

 

 

 

 

 

 

 

 

포르노 규제를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었다. 여성의 신비의 저자 알려진 베티 프리단, 성의 정치학을 쓴 케이트 밀렛 등은 과도한 검열 규제가 표현의 자유와 성적 자유에 제약을 준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도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캐서린 매키넌의 사례를 소개했는데, 자신을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소수파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

 

    

 

 

 

 

 

 

 

 

 

 

 

 

 

 

 

 

알고 보면 페미니즘의 세계는 광대하면서도 복잡하다. 그 속에는 자유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급진주의자 등 각양각색의 사상을 지닌 페미니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다. 생각하는 방식에 차이점이 있어도 그들이 같이 내는 목소리는 똑같다. 남녀 모두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념에 대한 맹목적 믿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념 내 대립이다. 생각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틀렸다고 비난할 수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이 불편하더라도 차이를 포용할 줄 아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페미니즘 논의가 점점 살아나고 있다. 페미니스트가 가야 할 길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뻗어 가고 있다.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면 어느 길을 가고 싶은가? 선택은 자유다. 안심해도 된다. 잘못된 길에 가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관련 자료 (링크)

 

* 정희진의 잘못된 길서평 (한국일보, 2005930)

 

* 정희진 <잠재적 가해자?> (한겨레, 2016527)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5-31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31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ra 2016-05-31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대에 따라서 혹은 학자에 따라 달리 정립되어지면서 학문의 발전이 올텐데 우리나라 페미니즘은 숲이 생기기도 전에 나무들이 베어져버린 느낌이랄까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

cyrus 2016-05-31 17:49   좋아요 0 | URL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이제 페미니즘의 나무가 무럭무럭 많이 자라야하는데, 이 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하는 남성 벌목꾼들이 많아졌습니다.

만두 2016-06-0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cyrus님....👏👏👏 좋은말씀감사합니다

cyrus 2016-06-01 16:42   좋아요 0 | URL
책에 나온 저자들의 주장을 정리한 것뿐입니다. 논란이 되는 주제라서 한쪽 입장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썼습니다. ^^

아이스 2016-06-27 19: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계적인 여성학자인 바댕테르의 주장이 훨씬 더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1990년대 이후의 페미니즘으로 인해 일본이나 한국이나 남자들의 초식화 절식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계속해서 남자들의 성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 결과로 여자들의 성도 억압되겠죠.

서구사회는 자유로운 성을 향유하는데 한국은 도대체 이게 뭡니까?
결국 민족 몰락만 가속화될 뿐이겠죠.


john b calhoun 의 쥐실험 결과를 보면 숫컷들에게 가해지는 과도한 스트레스는 결국 숫컷쥐들의 절식화를 초래하고 결국 쥐사회가 멸망하게 만들었죠.
쥐실험에서 숫컷들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란 숫컷들의 고유영역에 대한 방어로 인해 가해지는 스트레스였죠.

먹이나 다른 조건들은 다 충족시켜 주고 영역만 제한한 실험인데 쥐 세대주기 6세대도 채 못채우고 멸망하게 됩니다.
쥐는 3개월이면 번식가능하고 임신기간이 22일인가 된다네요.

지금 일본이나 한국에서 일어나는 초식남 절식남도 쥐실험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민족의 소멸이라고 하면 되려나요?

남자들에게 계속해서 더더욱 많은 여러 가지 압력을 가하면 됩니다.
그럼 쥐실험의 아름다운자들처럼 남자들이 더더욱 초식남 절식남될 것으로 봅니다.

참고로 쥐들에게 나타난 이상반응을 보면 숫컷들이 자신의 둥지를 버리고 쥐실험장 한가운데서 숫컷들끼리 모여서 먹을 것 먹고 자신의 털 고르고 잡니다.
털은 윤기있고 생기있고 그래서 그 쥐들을 아름다운자들이라고 칭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절식남하고 비슷하지 않나요?


물론 일부 숫컷과 암컷들은 암수구별없이 마구 교미하고 공격적으로 변해서 서로 물어죽이기도 하고 쥐고기를 먹기도 하죠.


참 재미있는 실험이고 인간에게는 어떻게 적용되어질지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남자들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는 사회치고 출산율이 높은 나라가 없더군요.

그러다보면 낮은 출산율을 보충하고자 결국 이민을 받아들이고 출산율이 높은 나라들인 이슬람이나 아프리카출신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 나중엔 여성들의 인권도 다시 추락할 것으로 봅니다.

물론 제가 그 때 까지 살아서 전체 결과를 볼 수는 없겠지만 충분히 예측가능한 일이죠.


한국도 지금 혼인율이 70%정도 됩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1.7명정도 아이를 낳고요.
0.7*1.7=1.19

지금 출생아수가 43~48만명정도 되는데 앞으로는 결혼적령기 인구가 60만명대라서 몇년안에 출생아수가 35~39만명대로 낮아질 것으로 봅니다.
2000년대 이후의 출생아수가 43~48만명대이기에 2030년~2047년까지의 출생아수는 25~29만명대로 줄어들 것이고요.

지금추세라면 한민족은 아마도 90년기간이면 출생아수가 1/4로 축소될 것으로 봅니다.
1970년대의 출생아수가 90~100만명정도였으니 60년정도의 기간에 1/3~1/4이 되었죠.

뭐 이민자들이 낳는 아이들은 제외하고 한민족이 낳는 아이들만 고려한 것입니다.

이대로 계속 외국인을 받아들인다면 나중에 한민족이 한국내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해서 고통받을 것은 안봐도 알 수 있겠죠.

외국인을 거의 안 받아들이고 있는 일본은 한국과는 확실히 다른 길을 걸을 것으로 봅니다.
서구는 지금정도의 출산율로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고 결국 이민을 계속 늘릴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슬람화되어서 여성인권이 후퇴할 것으로 봅니다.

제가 보고 있는 관점이 맞는지 틀린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으로 봅니다.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에서 케이트 잠브레노의 소설 《그린 걸》이 ‘여성성을 연기하는’ 인물을 ‘혹독하게’ 묘사한 소설이라고 호평했다. 잠브레노의 소설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다. ‘그린 걸(Green girl)’이란 어리고 순수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여자를 가리킨다. 소설에서 그린 걸로 상징하는 젊은 여성 루스는 세상이라는 무대 한가운데 서서 여성성을 연기하는 존재이다. 그린 걸은 대중 앞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전시한다. 그러므로 타인이 원하는 시선에 맞춰서 행동한다. 루스는 사랑받고 싶어서 자기도취와 허영의 가면을 쓴 채 여성성을 연기한다. 그러나 루스는 매일 가면을 쓰고 벗기를 반복하면서 연기하는 삶에 점점 지쳐간다. 그녀는 남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향한 낯선 타인들의 시선을 두려워한다. 록산 게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스는 ‘희망 없는 곤경 속에 처한 그린 걸’이다. 록산 게이는 그린 걸이 처한 상황을 예리하게 묘사한 소설 속 문장을 인용, 소개했다.

 

“기차 안에서도, 패션쇼에서도 그들은 의식한다. 남자들은 언제나 여자들을 쳐다본다. 언제나 그 끈적한 눈길로 여자들을 쳐다보고 있다. 쇼핑은 하지만 물건은 사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생활은 어렵다. 가끔 그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쁜 페미니스트》 191쪽)

 

록산 게이는 잠브레노의 소설을 분석하기 위해서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Performance)’ 개념을 들고 왔다. 1990년에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에서 주장한 젠더 이론의 핵심은 사람의 정체성은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구성, 반복되는 행위이다. 어려운 문장으로 독자를 괴롭히기로 악명 높은 그녀의 주장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민족, 계급, 성별 등의 정체성은 확정된 소속이 아니라 일상의 퍼포먼스와 담론으로 매번 구성된다는 것이다. 곧, 인간의 본질은 없으며 그것은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남성성과 여성성은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사회 권력의 규정 및 반복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적 산물이다.

 

남성과 여성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학습하면서 성장한다. 예를 들어 남성은 어릴 때부터 슬픈 일이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배운다. 장난기가 발동한 어른은 남자가 울면 ‘고추’를 떼어 내야 한다고 겁을 주기도 한다. 이때부터 소년은 눈물 흘리는 건 남자로서 수치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항상 조신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까지 순결을 지켜야 한다. 순결을 잃은 여성은 여성성이 상실된 무례한 여성이 된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는 죽을 때까지 남성성과 여성성을 몸에 배면서 살아간다. 이는 남녀 모두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은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회 집단 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되기도 한다. 불합리한 모순이 있어도 개선될 여지가 없다. 집단 구성원은 따로 노는 ‘아웃사이더’가 되지 않으려고 문화적 규정을 순종한다. 이렇게 남성성과 여성성은 오랫동안 반복되고 대물림되는 ‘고정성(stereotype)’으로 자리 잡는다. 

 

 

 

 

 

 

 

 

 

 

 

 

 

 

 

 

 

고정성은 문제가 많다. 고정성에 갇힌 사람은 어떤 현상이나 존재를 획일적인 방식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사회 집단 구성원 모두 고정성에 순종하도록 은근히 강요한다. 여기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강제로 밀어 불이듯이 가르친다. 이러한 훈육 방식은 자녀의 인간성과 자존심을 억압할 우려가 있다.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는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한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우리가 남자들에게 저지르는 몹쓸 짓 중에서도 가장 몹쓸 짓은, 남자는 모름지기 강인해야 한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의 자아를 아주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고 느낄수록 사실 그 자아는 더 취약해집니다. 또한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도 대단히 몹쓸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남자의 그 취약한 자아에 요령껏 맞춰주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31쪽)

 

지금도 ‘몹쓸 짓’을 배웠던 마음의 기억을 잊지 못해서 고생하는 남자와 여자가 많다. 여성성을 연기하느라 애쓰는 여성을 ‘그린 걸’이라 하면, 잘못된 남성성을 고집하는 남성은 ‘그레이 맨’(gray man)이다. ‘gray’는 회색만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평범한 중년 남자, 보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레이 맨은 집에 들어가면 왕이 되고 싶어 한다. 그는 오래전에 죽고 사라진 가부장제의 환상에 푹 빠져 있다. 그레이 맨도 그린 걸처럼 남성성을 연기하려고 애쓴다. 자존심이 강하고, 여자들 앞에 기죽지 않는 당당한 가장으로 말이다. 아내가 남편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딜 감히, 아내가 하늘 같은 남편한테 대드느냐!” 그레이 맨은 아내에게 지고 싶지 않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남자다움의 중요성을 배웠고, 어머니를 꼼짝 못 하게 만든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보면서 자랐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의견이 어긋나는 상황을 마치 이기고 지는 전쟁처럼 생각하는 태도는 유아적 사고방식이다. 그레이 맨은 연기하는 척하는 남성성이 잘못된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마저 스스로 인정하면 그동안 쌓인 위상이 급격히 추락하기 때문이다.
 
‘gray’가 형용사로 사용하면 ‘외로운’, ‘어두운’이라는 뜻이 된다.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그레이 맨의 말년은 외롭다. 집안의 외로운 왕이다. 하지만 아내와 자식은 왕의 기분을 맞춰주는 신하가 아니다. 가족들은 고집불통 왕을 싫어한다. 하나 둘씩 왕의 곁을 떠난다. 왕의 연기는 끝났다. 허전함이 그레이 맨의 가슴을 짓누른다. 헛된 연기를 일찍 그만두었으면, 이런 자업자득의 불행한 비극은 찾아오지 않았다. 남을 의식하면서 퍼포먼스로 자신을 드높이려는 그린 걸, 그레이 맨의 삶의 방식은 ‘몹쓸 짓’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의딸 2016-05-25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트 잠브레노의 <그린걸>이 몹시 당기네요.

cyrus 2016-05-25 14:57   좋아요 0 | URL
<나쁜 페미니스트>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그린 걸>이 버지니아 울프, 진 리스의 소설분위기와 비슷하다고 소개했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5-25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러 가지 책을 많이 읽지만 님의 독서지평은 깊이나 양이나 정말 대단하신 듯.ㅎㅎ

cyrus 2016-05-25 14:59   좋아요 0 | URL
아직 안 읽어본 책이 많습니다. 특히 주디스 버틀러의 책은 안 읽어봤습니다. 문장이 난해해서 읽기 어렵다고 합니다. ^^
 
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소개 시작을 하기에 앞서 반성부터 먼저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썩은 채 뿌리 깊게 박혔던 여성 혐오, 여성 차별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점, 반성한다. 소설가 록산 게이는 자신의 책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오랫동안 여성을 함부로 다룬 현실’에 눈물이 난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 사회가 여성을 무시하는 나쁜 남자들(본문에는 ‘당신’으로 되어 있다)을 망쳐 놓았다고 했다. 내 주변에 여성을 가볍게 대하는 남자들을 많이 봤다. 여성을 소재로 성적으로 농담하고, 여성과 잠자리를 한 경험을 서슴없이 얘기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말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억지로 귀 기울어 들어야 했다. 나는 그들을 망쳐 놓았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죽지 않고 영생하는 암세포가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는 암세포인 ‘헬라세포(Hela Cell)’이다. 자궁경부암으로 세상을 떠난 헨리에타 랙스의 이름에서 두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이 암세포는 60년 동안 비교적 안정된 핵형을 유지한 채 지금도 배양액 속에서 분열하고 있다. 여성 차별/혐오 문제는 끊임없이 분열되는 헬라 세포와 같다. 점점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일상 속에서 번식하고 있다. 여성 차별/혐오가 세포처럼 분열되어 일상 깊숙이 침투하는데, 그 전파 속도가 무척 빠르다.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인터넷, SNS 등을 통해 전파되어 우리 가정에 침투한다. 그렇게 우리는 여성 차별/혐오가 숨겨진 텍스트 및 영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강간에 대한 인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록산 게이는 미국 사회가 ‘강간과 관련된 것들을 지나치게 수용하는 문화’라고 꼬집었다. 즉 미국인들은 ‘강간 문화(rape culture)’ 속에 살아가고 있다. 강간 문화의 시대에는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에 줄거리와 상관없는 성폭력 장면이 등장하는가 하면, 강간이 연상되는 내용의 유머를 편집 없이 브라운관에 전파된다. 미국의 ‘강간 문화’가 우리 사회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크나큰 착각이다.

 

2010년에 방송된 KBS 2TV <추노> 3회는 지나친 음담패설이나 성추행 같은 장면을 남발한 최악의 에피소드다. 특히 남자들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 언년이(이다해 분)에게 겁탈을 시도하는 장면은 필요 이상의 자극적인 설정이다. 이때 언년이의 모습은 한복 상의가 벗겨져 어깨 속살을 드러낸 상태였다. 지금도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문제의 장면을 캡처한 사진이 나온다. 3회가 방영된 이후 ‘이다해 노출’이 큰 화제가 되었는데, 놀랍게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드라마에 경고 제재를 주지 않았다.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아이들, 젊은 사람들이 쓰는 속어 중에 ‘개관광’이라는 말이 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압도적으로 크게 패하는 선수나 팀, 혹은 일 대 일 대 형식의 컴퓨터 게임(스타크래프트)에 처참하게 패배한 게이머를 조롱하는 의미에서 ‘개관광당했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개관광’이 좋은 의미를 가진 속어가 아니다. 이 속어의 유래에 대한 설이 분분하지만, ‘강간’이 ‘관광’으로 변형되어 전해진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강간’의 어감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어감이 비슷한 ‘관광’으로 바꾼 것이다. 외국에서도 한 팀이 일방적으로 우승한 싸움을 ‘Reaped(강간당하다, 약탈당하다)’라고 부른다. 아이들은 속어 ‘관광’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저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 속어를 사용한다. 나도 철없던 학창 시절에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강간을 가볍게 여기는 속어를 사용하는 짓은 발화자 자신의 천박한 수준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다.

 

록산 게이는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했다. 여기서 말하는 ‘나쁜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고, 히스테리 환자 같은 왜곡된 편견으로 매겨진 페미니스트를 의미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을 모순덩어리 페미니스트라고 고백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누구나 약점 하나씩 가지고 있다. 편견에 휩싸이기 쉽다. 이로 인해 어떤 현상을 잘못 분석하고 판단한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UN 여성 친선대사 자격으로 연설한 동영상이 전 세계로 알려진 후로 ‘페미니스트의 아이콘’이 된 엠마 왓슨. 최근 그녀가 파나마 페이퍼스 명단에 연루된 사실이 알려졌다. 왓슨 측은 탈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해외 네티즌들은 크게 실망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여성혐오론자들이 악마의 날개를 쭉 편다. 그들은 왓슨을 대중의 광장 한가운데에 몰아세워 페미니스트의 도덕적 결함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페미니스트를 향한 반감 정서를 키우기 시작한다.

 

 

최근 페미니즘이 이런 이유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유명인들이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하면 그들을 페미니스트 왕좌에 올려놓고 떠받들고 칭송하다가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바로 무대에서 끌어내리며 페미니스트 리더들이 우리를 실망시켰으므로 페미니즘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결론 내린다. (서문 13쪽)

 

 

미국이든 한국이든 어딜 가도 페미니즘은 늘 오해를 받고, 핍박받느라 고생한다. 페미니스트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페미니즘을 ‘유명인이 인기를 많이 받기 위해 아는 척 떠드는 철학’으로 여긴다. 유명인의 페미니즘 발언에 공감하는 여성들의 반응이 한심하다고 조롱한다. 여성 혐오 표현을 일삼는 일베 회원은 그녀들을 ‘김치녀’라고 폄하한다. 페미니스트를 떠나서 여성의 존재 자체를 비하하는 극단적인 사회 속에 여성 유명인들마저 떳떳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밝히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전문가나 공인이 앞장서서 대중에게 전파하는 철학이 아니다. 페미니스트의 잘못된 행동의 원인을 무조건 페미니즘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악의적인 비난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 평등하게 살아가는 법을 모색하는 상생의 길이다. 여성 차별/혐오가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 유명인들의 입만 지켜볼 수 없다. 우리는 록산 게이처럼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을 완벽히 알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여성에게 불합리한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한 의견을 말할 자격이 있다. 소신 있게 페미니즘에 관한 자기 생각을 피력했는데, 상대방에게 지적받는 경우가 있다. 틀려도 오해받아도 좋다. 잘못된 점은 인정하고, 새로 배워나가면 된다.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늘 동일한 선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페미니스트들만 모여 있는 건 아니다. 록산 게이가 경계한 근본주의적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 담론을 방해하기도 한다. 모두 다 생각의 차이가 있으며 편견에 사로잡힌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남성중심적 사고가 얼룩무늬 흔적처럼 뚜렷하게 남아 있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여서 머릿속을 말끔하게 씻으려고 해도 쉽지만 않다. 가끔 얼룩무늬 흔적의 후유증 때문에 곤혹스러운 발언이 갑자기 뛰어나올까 봐 두렵다. 생각이 단단히 여물지 못해도 ‘오랫동안 여성을 함부로 다룬 현실’이 부끄럽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될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5-24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24 20:4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시대인데, 여전히 가부장제 사회에서 볼법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가부장제 영향 속에서 자란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식은 아버지의 행동을 관찰하게 됩니다. 아이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죠. 안 가르쳐줘도 아버지의 가부장제 행동을 자식이 따라하게 됩니다. 아내를 무시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유치원 자식들은 어머니를 무시합니다.

아무 2016-05-24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관광이라는 말은 이따금씩 접했었는데, 이게 그런 의미였군요. 하...
오래 살아보진 않았습니다만, 남중과 남고, 군대를 거치면서 `여성을 함부로 다루는 현실`을 자주 접하긴 했죠. 그래서 소위 남초 사회/집단 안에서 남성적이라고 이야기되는 성격적 특성들에 거부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고, 여전히 저에게 그 느낌은 유효합니다. 사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여전히 페미니즘이 가야할 길은 멀고, 남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과거의 잘못된 제도나 교육이 체화되었는지 돌아보는 일일 텐데, 그런 사람을 보기도 쉽지 않고, 혐오에 대해 제대로 논의가 이루어지는 걸 보기도 쉽지 않죠. 볼 때마다 참 답답합니다..

cyrus 2016-05-25 15:08   좋아요 2 | URL
군대가 제일 심하죠. 군인들이 모이면 꼭 빠지지 않는 이야기 소재가 여자고, 여자와 잠자리한 경험담입니다. 선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면 재미없는 호구로 취급하고 은근히 무시합니다. 저는 사창가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첫 경험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 선임이 저를 갈군 적이 있습니다. 제가 빨리 입대했으면, 재미없다는 이유로 선임에게 두드려 맞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군인들도 페미니즘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흥행의 천재 바넘 - 대중은 속기 위해 태어났다 인물탐구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 유행가 가사가 구구절절 심금을 울린다. 노래가 어쩌면 그리도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든지, 가사가 꼭 나의 이야기 같다. 마치 나를 모델로 하여 노래를 만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건 착각이다. 가사를 쓴 사람이 내 이야기를 알 리가 없다. 그런데도 노래 가사가 자신의 이야기인 양 느껴지는 것은 노래를 듣는 사람의 불안한 심리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들어맞을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정보만 들으면 그게 ‘꼭 내 이야기 같다’라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 한다. 19세기 말 곡예단에서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 등을 알아내는 일을 하던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에서 유래했다. 바넘 효과는 유행가를 자신의 이야기인 양 착각하는 현상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사람들이 답답할 때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그의 신통력에 탄복하는 것도 바넘 효과가 작용한 것이다.

 

 

 

바넘의 흥행은 매사가 이런 식이었지만, 대중은 바넘에 의해 속아 넘어가는 것마저 즐겼다. 중요한 건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으며, 바넘의 성공 비결은 바로 그런 일을 잘하는 탁월한 홍보술이었다. (24쪽)

 

 

 

사실 바넘은 천재였다. 그는 스토리텔링의 원조였고, 입소문 마케팅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바넘은 대중이 논란을 사랑한다는 걸 간파해 이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는 방식으로 흥행사로서 입지를 구축했다. 반면 그를 나쁘게 말하면 머리 좋은 사기꾼이었고, ‘야바위(ballyhoo)의 왕자’였다. 그는 항상 ‘여러분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을 보여드립니다’ 등의 말을 거침없이 해대며 대중의 입소문을 이끌어냈다. 그는 자신의 선전술과 관련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기만당하기 좋아한다”

 

바넘의 선전술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그의 속임수를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바넘은 영국 식민지 시절을 겪고 조지 워싱턴 전 대통령의 간호 노예로 일했던 조이스 헤스라는 여성을 언론에 소개했다. 그녀의 나이는 놀랍게도 161세였다. 그러나 얼마 후 조이스 헤스는 161세가 아닌 80세로 밝혀졌다. 이에 바넘은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됐다. 그렇지만 이미 그는 큰돈을 모은 상태였다. 이번에 바넘은 인어 미라를 전시해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원숭이와 연어 뼈를 이어 붙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거짓으로 판명됐다. 또 그는 한 농장에서 발견됐다는 3m 크기의 거인 화석을 전시하기도 했으나 이 역시 사기였다. 미국인들은 바넘에게 속을 줄 알면서도 속았다. 그렇게 매번 속아 넘어가는 상황을 즐겼다. 바넘이 81세로 사망하자 미국과 유럽 각지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바넘은 “대중은 스스로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믿는다.”라는 대중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특히 바넘 효과는 정치인들이 많이 이용한다. 경제공화당 허경영 총재는 다소 황당해 보이는 공약들을 내세워 비주류 후보로는 이례적으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허경영 신드롬은 사기꾼의 쇼와 똑같다. 정치적 의미나 의사 표현이 아닌 재미를 좇는 사람들의 관심일 뿐이다. 마술사의 마술이 눈속임인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빠져드는 것과 똑같다. 정치에 대한 부동층과 무관심층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이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려는 측면이 있었다. 결국,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심할수록 사회 전체가 ‘엔터테인먼트 민주주의’에 휘둘린다. 정치가 엔터테인먼트로 탈바꿈하는 동안 정치 쇄신과 풀뿌리민주주의는 철 지난 유행어가 되고 말았다. 미국은 더 심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수준 낮은 망언과 속임수를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 사회가 엔터테인먼트 민주주의를 극복하기는 현실상 어렵다. 언론은 엔터테인먼트 민주주의를 탄생하게 만든 공범자에 가깝다. 언론도 논란을 좋아한다. 인터넷상에서 논란을 부추기는 세력에게 언론이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에 대중은 구경꾼이 된다. 어쩌면 엔터테인먼트 민주주의는 현대 사회의 불가피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닐 포스트먼은 자신의 책 《죽도록 즐기기》에서 텔레비전이 등장한 이후 정치와 사회 같은 진지한 영역마저 ‘쇼’가 되어가는 현상을 경계했다. 정치인들에게도 공약을 내세울 때 쇼맨십이 요구되고, 스펙터클한 사건이 중요한 사건보다 더 많은 카메라의 관심을 받는 시대다. 야망을 품고, 유명해지고 싶은 사람이 정치인으로 변신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시대는 없다. 우리는 그들의 환상적인 정치 쇼에 매번 속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we always ha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해 1월 초에 무서운 공익광고를 소개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글의 제목은 ‘아이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다. 공익광고는 주로 네거티브한 접근 방법을 쓴다. 공포감을 조성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8, 90년대 공익광고협의회(Kobaco) 공익광고가 대부분 위협적이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지나치면 불쾌감을 유발한다. 특히 광고 영상이 계속 생각나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어린아이들도 있다. 글쓴이도 어렸을 때 그랬다. 혼자 집에서 TV를 보다가 공익광고가 나오면 다른 방으로 재빨리 도망가기도 했다. 이쯤 되면 공익광고를 ‘공포광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공익광고는 2003년에 제작되었다. 무분별한 카드 사용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남자는 카드로 과소비하다가 마지막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늪에 빠져 죽는다. 이 광고가 전국적으로 전파되자 신용불량자의 최후 장면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카드를 안 쓰는 사람들도 남자가 늪에 빨려 들어가 죽어가는 장면이 너무 무섭다는 반응을 보였다.

 

 

 

 

 

2011년 대한간학회에서 제작한 B형간염 광고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두 눈은 샛노랗고, 배는 복수가 차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간염 환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어떻게 보면 잘 만들어진 광고로 볼 수 있지만, 간염 환자들은 오히려 공익광고가 극단적인 공포심만 불러일으켰다고 비난했다. 이 같은 논란이 계속되자 대한간학회는 다른 화면의 광고로 교체했다.

 

공익광고가 공포광고로 오해받고 비난받는 상황은 외국에도 종종 일어난다. 외국은 오래전부터 네거티브식 공익광고의 효과를 알고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만든 광고도 프로파간다(선전)가 될 수 있다.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 세계의 정부는 공중보건 관리에 대대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질병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공익광고를 만들면서 시민들의 건강을 증진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국가는 건강한 신체를 가진 국민을 원한다. 정치인들의 발상은 이렇다. 건강한 청년이 군대에 징집되면 전투력이 향상되고, 건강한 여성은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노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국민이 많아지면, 국가가 충당해야 할 의료 및 복지비용이 줄어든다. 국가는 국민에게 건강관리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심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경고성 메시지가 있는 공익광고를 만들었다. 프로파간다의 위력을 알게 되면 공익광고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공익광고가 순전히 국민에게 정책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1987년 영국 정부는 에이즈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대규모 캠페인을 벌였다. 데이비드 웰치의 《프로파간다 파워》에 영국 정부의 에이즈 예방 광고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그 인용문(172, 174쪽)과 관련 영상을 소개해본다. 우리나라 공익광고 제작 방식과 그와 관련된 논란까지 비슷하다. 광고 영상은 글쓴이가 유튜브에서 찾은 것이다. 광고 속에 흐르는 배경음악과 효과음이 음산하다.

 

 

 

             

 

 

1987년에 영국 정부는 “에이즈 : 무지함 때문에 죽지 마세요(Don’t Die of Ignorance!)”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 캠페인을 벌였다. 국민들이 행동에 나서도록 충격을 주기 위한 이 캠페인을 주도한 것은, 보건부의 의뢰로 중앙정보국이 제작한 살벌한 텔레비전 광고였다. 이 광고에는 불길한 느낌의 하늘을 배경으로 화산이 폭발한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굴러 떨어지는 바위 사이로 글자가 새겨지고 있는 묘비가 보인다. 배우 존 허트가 굵직한 목소리로 경고한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닥친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치명적인 질병이며, 알려진 치료법도 없습니다.” 그런 다음 시청자들은 검은 화강암에 새겨지는 글자를 본다. “에이즈”

 

이어서 다음과 같은 구호로 마무리된다.

 

“무지함 때문에 죽지 마세요!”

 

 

 

 

 

이 광고는(그리고 빙하를 등장시킨 똑같이 충격적인 광고도) 명확한 경고와 직설적인 메시지로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광고가 텔레비전으로 방송되기에 지극히 부적절하며 아이들을 겁먹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일부 비평가들은 그 메시지가 너무 절망적이어서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꺼버리거나 듣지 않게 만들기 때문에 이 같은 접근 방법은 비생산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계 최초로 정부가 후원한 범국민적 에이즈 각성 운동인 이 캠페인은 나중에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묘사됐다.

 

 

사람들이 공익광고가 ‘무섭다, 불쾌하다, 다른 광고로 대체하라!’라고 욕을 하면 정부는 ‘네, 잘 알겠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답변을 그렇게 해도 정부의 속마음은 이렇다. ‘공익광고, 호러틱, 성공적’ 정부는 논란을 잠식시키려고 대체 광고를 만든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게 바로 정부가 원하는 상황이다. 공익광고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으면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어떤 사람들은 직설적인 공익광고를 보고 나서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자신도 모르게 전투력과 노동력의 조건에 부합한 건강한 신체의 국민이 된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에게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인력이 되어줄 우수한 게르만족이 되어달라고 목청껏 소리쳤다. 이제는 그렇게 목 아플 정도로 소리치지 않아도 된다. 히틀러식(나치 선전 제작의 전문가를 생각해서 괴벨스식이라고 해야 하나?) 프로파간다 시대가 완전히 한물간 지금은 공익광고 프로파간다가 대세다. 국가는 공손하면서도, 가끔은 무서운 분위기를 조장하여 건강관리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전달한다. 프로파간다의 힘을 모르는 국민은 국가가 원하는 전투력과 노동력이 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종 2016-05-06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두암 하나 주세요.˝ 도 광고 장면이 인상적이었거든요. 역시 네거티브한 접근 방법이 더 강렬한가 봅니다. 그러고 보면 광고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심리학도 잘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그리고 이건 잠시 엉뚱한 멘트인데요, 에이즈 비석 새기는 거 설명하신 부분에서, ˝검은 화강암˝ 이 좀 걸립니다. 비석에 화강암이 주로 사용되는 것은 맞지만, 화강암은 밝은 색 암석이라ㅋㅋ^^;

cyrus 2016-05-06 14:16   좋아요 0 | URL
그 광고도 말이 많았었죠. 논란 때문인지 2000년대 들어서 공익광고가 과거보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제작되었어요. 그래도 오랫동안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게 네거티브 광고예요. 앞으로도 이런 광고가 계속 나올 겁니다.

화강암의 색깔이 어떤 건지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봤어요. 붉은색부터 회색까지 색깔이 다양하다고 합니다. 검은색은 인공적으로 색깔을 입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

나비종 2016-05-06 14:39   좋아요 0 | URL
검은 돌도 많은데 굳이 인공의 색깔을?ㅎㅎ 아니면 산출이 흔하진 않지만 반려암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양에서는 블랙화강암으로 묘비에 쓰인다고도 하니. .
뭐 이런 돌 어떠하리 저런 돌 어떠하리. .지만, 그냥 궁금했습니다^^;

cyrus 2016-05-06 14:41   좋아요 0 | URL
화강암이 다른 암석에 비해 튼튼하고, 오래 가는 내구성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화강암을 건축물 재료로 많이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

alummii 2016-05-06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공포스런 공익광고가 확실히 효과는 있는거 같아요 ^^;;적어도 내 건강을 위해서는 나쁘지 않은? 좋게 경고하면 말 안듣는 저같은 사람에겐 더더욱요 ㅋㅋ

cyrus 2016-05-06 14:17   좋아요 0 | URL
ㅎㅎㅎ 맞아요. 평범한 광고였으면 그냥 눈으로 보고 넘겼을거예요. 인상적인 광고가 가장 오랫동안 기억되고,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회자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