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여행은 사실 여행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짧았다. 비행기타고 몇 시간을 가야하는 거리에 있는데도 나는 마치 옆집 놀러가듯 휙- 베트남을 다녀왔다. 갈 때 비행기가 금요일밤 21:10 비행기였는데, 인천공항에 비행기가 많아 출발이 지연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라운지에서 고기랑 와인이랑 샌드위치랑 잔뜩 먹어서(혼자서 뷔페는 처음이었어요...가 아니구나..호텔뷔페 조식은 혼자 잘도 먹고 다녔었구나 ㅋㅋㅋ) 배가 너무 불러 잠이 솔솔 와서는, 아직 비행기가 뜨기도 전부터 꾸벅꾸벅 졸아버렸어. 얼마나 졸았는가 눈을 떴을 때도 아직 비행기는 출발전이었고, 에라이 자자, 하고는 또 자고..이러다가 비행기가 출발했는데, 아마도 45분 정도 지연된 뒤에 출발한 것 같았다.


지연된 비행기의 문제는 내가 늦게 도착했다는 데 있다는 게 아니라, 내가 공항택시를 예약해놨다는 데 있다. 비행편명과 출발 시간을 알려줬으니, 게다가 그들은 공항 픽업이 전문일테니, 잘 보고 연착된 거 알고 기다리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예정보다 거의 한시간 가까이 연착한 비행기에서 내려 약속된 게이트 앞으로 갔는데, 아아, 새벽 한 시가 다 된 시간... 내 이름을 들고 기다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한 번 그 많은 이름들을 차분히 보면서 내 이름을 찾아보았지만, 없었어..


없어..

내이름..

없어..


나는 크게 당황하지 않고, 그랩으로 차를 불러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다가 공항택시라고 보드 들고 있는 사람에게로 가 나의 예약화면을 보여주며, 내가 이러이러한 데에서 예약했는데 내 싸인보드가 없다, 비행이 딜레이됐다, 혹시 너네 서비스가 여기랑 같은 곳이냐,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러더니 자기 직원중 한 명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너를 데려다줄수 있어, 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혹시 이 택시회사에 통화해줄수 있냐, 했더니 물론이라면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든다. 내가 번호를 불러주려 했더니 그냥 자기 폰에서 막 이름을 찾는거야?


"너 이사람 알아?"

"응!"


오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서인지, 이미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이었어. 자기들끼리 다 알고 지내는구먼. 그러나 새벽이라서인지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의 택시는 나를 기다리지 않았지... 그리고 이 사람은 통화가 되지 않으니 자기 기사를 가리키며 데려다준다고 하는거다. 그렇지만 그 사람도 이름을 들고 있었어. '저 사람 다른 이름 들고 있잖아' 했더니, 그 사인보드를 가져가며 '이건 내가 가져갈게' 하는거다. 그래서 나는 다시 확정 메일을 보여주며 '나 이 가격에 데려다주기로 했는데, 너도 이 가격에 데려다주니?'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다.



피곤했어...



친구는 전날 도착한 호텔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구글지도를 보던 내가 '이제 7분 후에 도착이야' 하고 메세지를 보내니 '나가 있을게' 하고는 나의 택시가 호텔 앞에 서자 택시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그 새벽에.. 그 새벽에 낯선 나라에서 나를 마중나온 나의 친구... ♡



나는 씻어야 했고 친구들은 자야 했다. 친구들에게 먼저 자라고 한 뒤 씻고 잠을 청하고, 이렇게 좀 쫄리는 순간에도 생각보다 덜 쫄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아아, 어쩌면 나는 이제 조금은 담대해졌는가...라고 생각을 했다. 어차피 그랩을 이용해도 된다고 생각했고, 가야할 목적지가 분명했으니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경험은 계속 하면 그대로 쌓이는 것 같아.. 그렇게 나는 어쨌든 옆집 놀러가듯 하노이에 간것이야..



그렇게 토요일은 일어나서 친구들하고 배터지게 조식을 먹고 수다를 떨다가, 알라딘 고양이 박스 받는다고 주문하는 친구 옆에서 깔깔대고 웃다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고, 점심이 생각보다 별로였다며 숙소까지 걸어오면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아아, 나 이제 호안끼엠 호수 근처는 너무나 익숙해, 하고 돌아왔더니 우리 모두 급피곤하여, 저녁 먹으러 가기 전까지 쉬자, 하고 다들 침대에 누웠는데, 다들 잠들어 버렸다..그래서 점심 먹고 오후에 들어와 한 숨 자고 일어나 우리는 저녁 먹으러 나갔다.... (응?)


그렇게 저녁을 먹고 돌아와 숙소에서 2차를 했지.. 이것은 그러니까 나의 하노이 마지막 밤인 것이야...




과일은 호텔제공. 저 몬테스낵은 내가 한국에서 가져간 것인데 달고 맛있어서 꼭 친구에게 먹이고 싶었어.


그러니까 내가 2년전인가, 영월에 여행갔다가 그 날 애인으로부터 차였더랬다. 예상하지 못했었고, 나는 한 순간도 이사람하고 헤어져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 날, 친구가 있는 영월에서 엉엉 소리내어 계속 울었다. 울고 또 울고 계속 울었는데(나는 꼭 두 달을 그렇게 매일 울었다), 그 날 우리는 우리끼리 조촐하게 여행파티를 하려고 했다가, 내가 우는 바람에 차려놓은 술과 안주가 무색해질 판이었어. 나는 식탁 앞으로 가 친구와 함께 앉아 엉엉 울고 있는데, 그 때 친구가 자신이 가져온 과자를 꺼냈다. 오레오 씬이었다. 나는 엉엉 울다가 눈물을 닦다가 와인을 마시다가 친구가 가져온 오레오를 먹었는데, 아 너무 맛있는 거야. 나는 엉엉 울다말고,


아 이거 뭔데 졸라 맛있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러면서, 울다가 맛있는 거 느끼는 나는 뭐지? 이러면서 또 엉엉 울었던 것이야... 그 때 생각이 나서, 이 친구가 그 친구라서, 나도 너에게 맛있는 것 먹여줄게, 하는 마음이 되어가지고, 저 스낵을 미리 주문하여 한국에서부터 가져갔던 것이다.


"그 때, 영월에서 나 남자친구한테 차일 때, 니가 오레오 줬던 거 나 아직도 기억해. 그거 먹으면서 울다가 맛있다고 한것도.."


인생은 뭘까?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났다. 친구들은 여전히 자고 있고, 나는 친구들이 잘까봐 조심조심, 커텐도 치지 않고 조용히 샤워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전날 호텔 앞에 분보남보 집이 있는 걸 봐두었고, 아침은 호텔 조식 대신 분보남보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터다. 그러나 일요일 아침이라서일까, 분보남보 집은 아직 문열기 전이야.. 평일엔 다들 아침 식사 하러 오느라 일찍 여는데, 일요일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하는 수없이 다른 국수집을 가려고 호텔 주변을 한 바퀴 돌았는데, 웬만한 쌀국수집이 아직 문열기 전인 것이다.. 힝 ㅠㅠ


하는수없이 호텔로 돌아가 호텔 조식을 먹었다. 퍼와 볶음밥을 먹으면서 호텔 레스토랑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을 혼자 가만히 보았다.






아침을 먹고 룸으로 돌아와서는 아직 휴가가 남은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나는 이제 돌아가네, 친구들.. 짧은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네.. 친구들과 포옹을 한 후, 예약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티켓을 받고 레스토랑에 들러 반미와 모닝와인을 즐기며 책을 읽고 비행기에 탔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또 출발도 하기 전에 졸음이 쏟아져서..아아...피곤하구나... 했는데,


중간에 눈을 떠 기내식을 먹으면서,


'나는 이짓을 왜하는가' 나에게 물었다.


내가 하노이에서 놀았던 시간이라고는 토요일 하루가 고작이었다. 금요일은 하노이에 가느라 시간을 다 써버리고, 오로지 토요일 하루만 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걸어다녔다. 그리고 일요일은 다시 돌아오는 데 하루를 다 써버렸다. 그렇다면, 그 토요일 하루만을 위해 하노이에 가는 길, 돈 들이고 시간 들이고, 에너지를 들이는 일. 내가 만약 하노이에 가지 않았다면 편안히 내 방 침대에서 늦잠을 잤을텐데, 그런데 왜 굳이 이 피곤한 일을 했는가? 왜 때문인가?


그래서 나는 내게 물었다.


'만약 앞으로 또 이런 기회가 온다면, 누군가 베트남이든 말레이시아든 홍콩이든, 주말을 이용해 잠깐 놀러 오라고 한다면, 그러면 나는 간다고 할것인가'


답은 별 고민없이 나왔다.


"그렇다."


이렇게 피곤하다고 하면서도, 비행기에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택시가 나를 기다리지 않고 분보남보 집이 문을 열지 않았어도, 그래도 누군가가 불러만 준다면, 나는 기꺼이, 단 하루를 위해서 갈것이다. 개피곤하고 짱피곤한데 갈것이다. 왜때문이냐..나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가야만 한다... 가고싶다. 갈것이다..


이번에 친구가 하노이에 간다고 했을 때도 '아 좋겠다'고는 했어도 '나도 가면 안될까'를 묻진 않았다. 친구는 친구의 계획, 친구의 일정대로 여행을 잡고 예약을 했을테니까. 내가 만약 거기다대고 '나도 갈게!'라고 한다면, 친구의 계획이나 예정은 어느 정도 틀어질 것이었고, 나는 그렇게 예상 외의 일을 친구에게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가 '같이 와서 놀자'라고 제안해주는 순간 나는 예약을 했지. 초대한다면, 기꺼이 간다. 나는 부산에 있는 친구에게 갔었고 창원에 있는 친구에게 갔었는데,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여기 저기 참 많이도 싸돌아 다녔는데(이번 주말엔 제주도로 간다), 그런데 이제는 불러준다면 하노이까지 가는 사람이 되었어...


인생..

역마살.... (  ")


계속 묻고 또 물어도 나는 '간다' 였다. '불러줘, 갈게' 이렇게 되어버려..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나는 어떤 인간인가. 나는 뭐지?


어제 남동생네 부부랑 술을 마시다가 남동생네 부부도 베트남 가보고 싶다길래, '갔다가 생각나면 나 불러, 만나러 갈게' 이렇게 되어버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란 녀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오늘 아침엔 계속 무슨 생각을 했냐면, 이걸 살까 말까...하는 것.















이렇게 자주 갔는데도 베트남어를 1도 모르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 거기서 영어로 하우머치 하고 있는 내가, 땡큐 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뭔가 알아야 하지 않냐? 게다가 ga 가 닭고기라는 것 말고도 뭔가 기본적인 단어를 안다면, 돌아다니며 상점의 간판을 보는 일이 조금 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베트남어 사전 사고싶다!! 어뜨카지?


나는 기꺼이 '사자!'로 가고 싶지만, 집에 있는 불어사전, 독어사전, 스페인어사전, 그리스로마신화사전... 에 먼지 쌓이는 거 .. 생각나고, 쓰레기 되어버린 밀린 구몬 생각나서....내가 베트남어 사전을 사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베트남어 사전이 너무 갖고 싶다. 우리가 지성인이라면 사전은 구비해둬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왜 사전 욕심이 있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지적 허.영.심.이 너무 가득한건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베트남어 사전... 사, 말어?


아아, 오늘의 고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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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8-09-1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르세요 절대 후회 없이 잘 사용하게 될거에요 ㅎㅎ

다락방 2018-09-11 11:01   좋아요 0 | URL
아아.. 지름을 말려주셔야죠 ㅠㅠㅠㅠㅠ

무해한모리군 2018-09-1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트남 호텔리어분께서 너무나 완벽한 우리말로 안내해줘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네요. 심지어 제가 한글로 써주니 구글에서 베트남어로 검색해서 확인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호치민선생의 시를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김정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서 말문이 막혔던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09-11 14:45   좋아요 0 | URL
아니 ㅋㅋㅋ 김정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진짜 말문이 막힐 것 같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어렵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괌에 갔을 때 어렵게 셔틀버스를 예약할 수 있냐고 영어로 드문드문 물으니, 들으시는 직원분이 ‘한국분이시죠?‘ 하시고는 ‘저도 한국인이에요‘ 이러시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그 분과만 대화를 나눴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18-09-11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나라를 가기를 즐기게 되면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는 게 좋다, 라는 생각이 최근 들었어요. 그리고 요새 저도 베트남에 가야지, 이런 생각 하던 와중이에요. 저는 쌀국수를 매일 먹으며 살 수 있으니까요 ㅋㅋ 다락방님의 베트남 여행기로 예습을 좀 해야겠습니다. 베트남어 사전 저도 따라 살지도 ^^;;

다락방 2018-09-11 14:46   좋아요 0 | URL
베트남어 사전을 사긴 사야할 것 같아요. 막 회화하고 이러진 않더라도, 길거리의 간판을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대체 뭐하는 곳인지 말예요. 그래서 지금 저 큰 사전을 살까... 링크된 사전들 중 그나마 가볍고 얇은 걸로 사볼까... 갈등중이에요. 이왕 사전 사는 거 큰게 좋지 않나 싶었다가, 진득하게 볼 것도 아닌데 굳이 큰 걸 사야 하나..싶었다가. 아아 혼란스러워요.

별족 2018-09-1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트남어로 감사합니다,가 깜언.이라고.

다락방 2018-09-11 14:46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제가 아무리 쌀국수 먹으러 갔어도 이렇게 자주 가는거면 그래도 좀 기본적인 언어를 해야겠다 싶어요. 깜언 알려주셔서, 깜언!

단발머리 2018-09-11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개여행은 가야 제맛이고, 사전은 사야 제맛입니다.
이상입니다^^

다락방 2018-09-11 14:47   좋아요 0 | URL
사전은 사실...그냥 닥치고 사는 ...것이죠? (제발 아니라고 해줘요, 제발 ㅠㅠ)

카알벨루치 2018-09-1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전보니 갑자기 <문맹>작가 생각나네요 쿨럭 ㅋ망명은 가지 마세욧! ㅋ

다락방 2018-09-11 15:38   좋아요 1 | URL
아.. 저 아직 문맹도 안읽었는데, 문맹도 사야겠네요!!! (의식의 흐름 ㅎㅎ)

카스피 2018-09-1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베트남으로 여행 가셨군요.넘 부럽습니당^^

다락방 2018-09-12 07:40   좋아요 0 | URL
하루만 놀고 돌아왔다고 썼는데요 ㅎㅎ

비연 2018-09-11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 하노이여행이라니 대단하심!^^
베트남어가 생각보다 쉽다 하더라구요... 라지만 언어라는 것이 ㅠㅠㅠㅠ

와인 먹고 싶은데 집에 와인도 없고 와인잔도 없고 와인 오프너도 없고... 슬퍼집니다.

다락방 2018-09-12 07:43   좋아요 1 | URL
으음..베트남어가 생각보다 쉽다고요? 으음..... 그러면......도전해볼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것이야말로 아무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워낙에 공부를 안하는 사람이라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또 사전만 사두고 먼지만 쌓이겠죠. 인생..... orz


비연님.
저는 집에 와인도 있고 와인잔도 있고 와인 오프너도 있고 ㅋㅋ 얼마전에 제부가 와인 냉장고를 선물해줘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인 냉장고도 있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자랑 터짐 ㅋㅋㅋㅋㅋ)

비연 2018-09-12 08:07   좋아요 0 | URL
헉... 부럽습니다... 와인냉장고까지! 전 어제 병맥주 오프너도 없어서 캔맥주 먹었는데 ..... 흑흑 ㅠㅠㅠㅠ

moonnight 2018-09-13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인 마시고 싶어지네요^^ 여전히 여행을 즐기시는 다락방님. 멋져요. 저는 집순이로 나이들고 있네요. 호홋^^

다락방 2018-09-13 15:08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사람마다 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돌아다니는 때. 제게는 그게 지금인것 같고요. 저야말로 집순이 중의 집순이었는데 왜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에 반해 문나잇님은 정말 엄청 돌아다니셨잖아요. 혼자서 영화도 보러 다른 지방으로 가셔서 혼자 숙소에 묵고 그러다 영화 감독도 까페에서 마주치시고 그러셨잖아요. 그런 시기를 보내고 지금은 집에 있을 타이밍 같은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언제까지 이럴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닐 수 있을 때 마음껏 열심히 다녀보고 싶어요. 흐흣.
 
스티키 북마크 - 6 Colors

평점 :
절판


나는 예쁘지만 무용한 것들에 대해서 크게 애정이 없다. 나에게는 언제나 '쓸모'가 중요했다. 포스트잇 플래그는 나에게 그런 '쓸모'로 작용하는데, 물론, 너무나 당연하게도! 쓸모 있으면서 예쁘다면, 그건 좋다!


덧붙여봤자 부질없는 말이지만, 나에게는 사람도 그렇다. 누군가가 인격적으로도 성숙하고 사고가 확장될 가능성이 넓은 사람이라면 나는 애정을 느끼는데, 그 사람이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다면 그건 좋다. 그러나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으나 지극히 편협한 사고만 가지고 있고 배우려는 자세가 없으며 고집만 세고 안티 페미니스트라면, 나에게 그 사람은 하등 쓸모가 없고 관심도 없다. 나에게 외모는 언제나 '그 다음' 문제이다. '그 다음'이라기 보다는 사실, '별 상관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스티키 북마크는 너무 예쁘다! 생각한 것보다 사이즈가 작았지만, 그래서 나쁜 게 아니라 그래서 '어? 생각보다 더 예쁜데?!'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단순한지, 가끔은 예쁜 것만 봐도 기분이 확- 좋아지잖아!! 물론, 나에게는 쓸모가 그보다 앞서는 것이기에, 이 스티키 북마크가 '너무 예뻐서 기분이가 좋다' 했다가, 그 쓸모 때문에 점수를 깎아먹어 버리고 말았다.


쓸모..

쓸모란 무엇인가..

우리는 쓸모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해 봐야 한다..


는건 개소리고요..


그러니까, 이 스티키 북마크는 예쁘다. 나야 어차피 책 읽으면서 밑줄 긋고 싶은 부분에 포스트잇 플래그 붙이는 사람이었으니까, 이것은 나에게 쓸모 면에서도 무용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붙여놓고 나면 예뻐!!



(검은책과 검은 배경이라 뭔가 예쁨이 잘 살아나지 않은 사진이군..유감...)



이렇게 예쁘고 쓸모도 있다면서, 그런데 왜 별이 세개냐! 그러니까 왜 나는 이번 구매를 마지막으로 이것을 다시는 사지 않겠다!! 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이것은, 나로 하여금, 쓸데없는 집착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기존에 내가 늘 써오던 포스트잇 플래그는 색칠된 면이 길어서 더 안쪽으로, 나와있는 부분이 마구 접히지 않게 색깔있는 면을 안쪽으로 쑥- 넣어서 붙이곤 했다. 쉽게 말하면, 딱히 신경써서 붙이기 보다는 '여기가 내 밑줄 그은 곳이오'를 표시하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 스티키 북마크는 색칠된 면이 딱 밖으로 나오기에 적당한 사이즈라서, 선을 맞춰 붙이고 싶어지는 거다!!




이렇게 책의 면이 끝나는 선과 색칠된 북마크의 선을 맞추고 싶어지는 거야. 아니, 그래야할 것만 같은 거야. 그래서 나는 이걸 붙이다가 뭔가 선이 안맞으면 다시 멈춰서는 떼어내고 다시 선을 맞추고 떼어내고 다시 선을 맞추고...

아니, 제기랄, 이거 왜이래 자꾸 삐딱해,

아니 내가 지금 책 읽다 말고 이것이 시방 뭐하는 것이여... 이러면서 빡이치고, 결국,


성질이 나빠지는 거다!!!!!


이 내가,

이 다정한 사람이,

다정하지만 사실 손으로 뭔가 차분히 해내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는 사람인지라,

빡이 쳐!!!!!!!!



그래서 다시는 안사기로 했다. 나에게 집착을 불러 일으키다니..나는 집착하는 사람이 아닌데(응?), 나를 집착하게 만들어서...똑바로 붙이고 싶은 이상한 강박에 시달리게 만들어서.....안사기로 했다 앞으로는.



나도 당연히 집착하는 게 있다. 내가 이렇게 집착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가, '나에게 이런면이?!' 하고 화들짝 놀라게 만든, 그런 집착이 내게도 있어. 그런데 다른 집착을 늘려갈 수 없다... 북마크 똑바로 붙이기 집착 같은 것은 나에게 없어도 좋을 것... 그러므로 너는 이만 안녕...


너는 나에게 쓸데없는 집착을 불러일으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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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8-09-10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는 문서작업하는 직업이라 색깔배합은 물론 간격까지 집착하면서 붙입니다 ㅋㅋㅋㅋㅋㅋ
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지만 돌아갈 수 있을때 돌아가는게 좋죠 암.

다락방 2018-09-10 09:04   좋아요 0 | URL
아, 조언 감사합니다.
저는 워낙에 몇가지 강박과 집착을 가진 사람이라 더 늘려갈 수가 없어요. 돌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휘모리님. ㅋㅋㅋㅋㅋ
 
유럽 낙태 여행 - Journey for Life
우유니게.이두루.이민경 외 지음 / 봄알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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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반대한다'고 기독교는 말한다. 물론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 있는 모든 신앙인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독교는 동성애를 반대한다. 애초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일을 어떤 이유로든 반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천주교는 낙태를 합법화하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뱃속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임신한 여성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을 않는다.



종교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일까? 


이 책, [유럽 낙태 여행]을 읽으면서 나는 이 세상이 여자를 미워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종교만이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종교가 큰 축이 되어서 어떻게든 여자를 손에 쥐고 흔들려고 하는구나. 이건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이들이 찾아간 모든 곳, 우리가 흔히 선진국으로 알고 있고 여성의 인권이 이곳보다 훨씬 높을거라 짐작한 곳들에서도 그랬다. 종교는 정치랑 손잡고 여자들을 제맘대로 하고 싶어했다. 통제하려고 했다. 


종교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일까?


신은 애초에 무어라 말했을까? 동성애를 쳐죽어야 한다고, 낙태하는 여자는 타락한 여자라고 그렇게 신은 말했을까? 그랬기에 종교를 믿는 자들은 신의 말을 따르는 걸까?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의 연대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매달 있었던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각 지방에서 버스까지 대절해가며 와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자국의 여성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억압받는 다른 나라의 여성들을 위해서도, 페미니스트들은 할 수 있는 힘껏 연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 아일랜드, 폴란드, 루마니아, 네덜란드 까지 날아가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듣는 여자들이 있고, 기꺼이 그들에게 시간을 내주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자들이 있다. 게다가 낙태가 불법인 곳의 여자들을 돕기 위해 낙태가 합법인 곳의 여자들이 손을 내민다. 읽다보면 각국의 절망스런 상황에 우울해지지만, 다 읽고나니 여자들이 이렇게 행동하고 연대하는한 세상은 바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각국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보자고 생각하고 실제 행동에 옮기고, 충실히 기록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내는 일. 보통의 에너지로는 되는 일이 아닐텐데, 좋지 못한 환경들을 마주할지라도 기어코 해내어 독자들앞에 내어준 것이 감사하다. 나는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여행하고 기록하고 출판해준 사람들 덕에, 다른 나라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책에 실린 이 사진이 너무 좋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동하는 중에 기차 안에서 저마다 마구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읽고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 애정을 느낀다. 책 읽는 모습에도 숑- 가버리지만 이렇게 쓰는 모습에도 반해버려..)




기꺼이 일독을 권한다.

더 잘 싸우기 위해서 더 잘 알아야 하니까.




(유럽 낙태 여행은, 하노이에서 읽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읽었지만.)












플로랑스 모에르노는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로, 국가에 기여한 이들에게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지금까지 열여덟 권의 책을 펴낸 왕성한 학자이자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남성들의 모임인 ‘제로마초‘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제로마초는 ‘성매매에 반대하는 남성들‘이라는 선언을 주창하는등 남성 중심주의에 반대하는 남성들로 모인 단체다. 이들을 ‘남성 페미니스트‘가 아닌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남성들‘이라 지칭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이틀 전 마르틴과의 대화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중에 "프랑스에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많은가"를 물었을 때 마르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없어요.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남자는 있지만." (프랑스, p.36-37)

유럽 내부의 연대에 대해서도 물었다. "다른 나라와도 협력을 하신다고 들었는데"라고 운을 떼자 그는 즉각 "페미니스트들과"로 정정했다. 국가적 협력이 아닌, 국경을 넘은 페미니스트들의 연대다. 스페인에서 낙태를 다시 불법화하려는 조짐이 보였을 때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의 열차‘라 이름 붙은 기차를 타고 마드리드로 갔다. 폴란드에서 검은 시위가 있었을 때는 주 프랑스 폴란드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다. 이런 식으로 어떤 나라의 여성 인권이 퇴행의 위협을 받을 때에 다른 국가에서 그 상황을 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건 유효한 전략이라고 그는 말했다. (프랑스, p.47)

낙태를 하는 여성은 갓 스무 살쯤 되어서 아무 남성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하는 이로 그려지곤 하지만, 실제로는 기혼자가 낙태를 더 많이 한다. 이런 현실을 더 많은 이가 직시해야 한다. 한국의 통계도 마찬가지다. 임신 중절 수설을 받는 여성 가운데 기혼 여성의 비율이 언제나 더 높았다. 1971년부터 플라닝 파밀리알에서 일했던 플로랑스가 주로 만났던 이들도 아이를 이미 너무 많이 낳아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다고 찾아오는 부부였다. 이러한 현실을 토대로, 잘못 만들어진 이미지를 부수는 일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여성들의 무분별한 성행위와 그에 따른 낙태‘라는 이미지에는 쾌락적인 성관계에 형벌로서 임신을 뒤따르게 하겠다는 징벌 심리가 분명하게 깃들어 있어요." (프랑스, p.46-47)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새로 맥주를 한 잔 더 시킨 뒤 아들린이 좀 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바의 소음 속에서 우리는 동시에 아들린에게로 귀를 기울였다.
"다들 연애를 어떻게 해요?"
듣자마자 그의 심각한 마음이 너무 이해되어 웃음이 터졌다.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뭐든 설명해주고 이해시키는 게 너무 피곤하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거두절미 공감했다.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접할수록, ‘과연 남성과의 연애, 가능한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마저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음, 저는 거의 포기했어요. 애인이라고 해도 모든 걸 설명해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만 알면 좋을 것 같아요."
깊이 공감되는 데 반해 해줄 수 있는 답은 신통치가 않았다. (프랑스, p.56)

민경의 친구여서인지 엘리즈에게는 궁금한 것들을 더 편안하게 물을 수 있었다. 아들린과 비슷한 나이대인 엘리즈 역시 길거리 성희롱이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사안이라는 데 동의했다.
"이게 별 거 아니라고들 하지만 한 번 길을 지나가는데 대여섯번씩 똑같은 일을 겪는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지."
그리고 이어진 말도 아들린의 고민과 닿아 있었다.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이 문제가 나한테 얼마나 큰지 설명하는 데 힘이 많이 들어서 피곤해." (프랑스, p.61)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보다 보수적인 스페인을 본받아 낙태를 불법화하자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그리고 낙태가 합법이긴 하지만 낙태 수술을 받을 병원을 찾는게 생각보다 어렵다고 한다. 의사에게 낙태 수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수술 거부를 하지 않더라도 12주를 넘겨 수술을 받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엄연히 불법임에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 비하면 낙태가 여성의 권리로서 보장되어 있는 프랑스에서마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프랑스, p.62)

사과주 한 병을 다 비워갈 즈음, 늘 궁금했던 것을 엘리즈에게도 물었다. "너희는 어떻게 낙태권을 갖게 된 건지 학교에서 배웠어?" 엘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학교에서는 안가르쳤을 걸. 나는 아마 어디서 우연히 들어서 알았던 거 같은데."
주어지지 않은 권리를 거머쥐고자 싸웠던 과거를 배우지 않으면 과거와 현재는 단절된다. 투쟁 이전을 살지 않았던 이들에게 권리는 태초부터 있던 것, 확대되지도 축소되지도 않는 것으로 남는다. 특히나 여성의 권리를 걸고 싸운 투쟁의 역사는 우연한 기회가 아니면 잘 전해지지 않는다. (프랑스, p.65)

그는 31살 때 임신을 했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사비타는 일을 그만두고 인도에 있는 그의 양친을 초대했다. 그러나 임신 17주째인 10월 21일, 심각한 등 통증을 호소하며 골웨이 대학병원을 찾았고 의사로부터 태아가 생존 가능성이 없으며 이미 유산이 진행 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사비타는 병원에 임신 중절 수술을 거듭 요청했으나 태아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어 불법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곳은 가톨릭 국가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10월 24일, 태아의 심장박동이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사비타의 몸에서 죽은 태아를 제거하는 수술이 이루어졌으나, 패혈증에 걸렸다. 유산 중에는 자궁 경부가 열려 여성은 감염에 보다 쉽게 노출되고 유산 기간이 길어질수록 감염 확률은 높아진다. 사비타의 남편에게 의사들은 부인이 젊으니 곧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28일 사망했다. 사비타를 살릴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만 의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비타가 인도나 영국에 있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 여성들은 국가가 여성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똑똑히 확인했고, (아일랜드, p.115)

분노했다.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사비타의 죽음을 추모했고 추모 물결은 정치적 흐름이 되었다. 사비타 사망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만난 ARC와 로자를 포함헤 아일랜드 여성의 재생산권 운동을 하는 페미니즘 단체가 다수 생겨났다. (아일랜드, p.115)

섹스를 해서 즐거움을 누렸다면 아이를 임신해서 그 쾌락에 대한 죄를 치러야 한다는 이 가톨릭 관념에서 탄생한 끔직한 실례가 바로 ‘막달레나의 세탁소(The Magdalene Laundries)‘다. 막달레나 수용소라고도 불리는 이 시설은 "몸을 버린 여자들"에게 지낼 곳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진 가톨릭 시설로, 18세기(1765년)부터 20세기(1996년)까지 존속했다. 이 시기 아일랜드에서 여성들은 섹스를 했거나, 강간당했거나, 아기를 낳았거나, 아니면 그냥 너무 예쁘다거나 하는 이유로 납치당해서 이곳에 수용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더럽혀진 몸과 죄를 씻는다. 섹스를 하지 않았다 해도 "예쁜 사람은 필연적으로 오만해질 것이므로" 막달레나 세탁소에 끌려간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이 세탁소를 거쳐 간 여성의 수는 약 3만 명으로 추산된다. 1993년 이 시설 중 한 곳에서 시신 155구가 암매장된 묘지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막달레나 세탁소의 폐쇄성과 각종 문데에 대한 고발이 이어졌고 2013년에 국가 차원에서 사과문을 발표했다. 막달레나 세탁소를 운영해온 것은 가톨릭 세력이었지만 은밀히 국가의 지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p.121)

"검은 시위를 계기로 겨우 이게 정치적 의제가 됐어요. 지금까지 정치에서 낙태나 여성 인권은 늘 뒷전이죠. 민주화가 완성되면 얘기하자, 경제가 더 좋아지면 얘기하자는 식으로요. 하지만 이제 낙태는 분명히 메이저 이슈예요."
전면 금지 법안 발표와 그 법안이 내포한 끔찍한 통제에 들불처럼 일어났던 여성들은 이제 그저 기다려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 가만히 있으면 자신의 권리는 점점 더 위협당할 뿐임을 경험으로 첨예하게 인지하고 있다. 검은 시위 이전까지 재생산권이나 모성, 양육 등 여성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주제들은 계속 진퇴를 반복할 뿐ㅇ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공공에서 이야기되고 있으며 나아져야 한다는, 낫게 만들어야 한다는 공유된 열망이 있다. (폴란드, p.194-195)

보수집권당의 전면 금지 법안이 발표되자마자 수많은 여성들이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유산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것, 여동생이 범죄를 당해 임신을 했는데 의사들이 그를 돕지 않으리라는 것, 여성들이 건강하지 못한 태아를 가져서 죽을 수도 있을 때 의사는 여성을 돕지 않으리라는 걸 안 거예요. 여성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국가가 여성 시민의 편이 되기는커녕 현실과 괴리된 명분을 위해 그저 통제하고 처벌하리라는 데서 공포를 느낀 거죠."
국가와 사회가 여성이 아니라 태아를 도우리라는 공포. 수많은 폴란드 여성은 낙태 전면 금지 법안에서 그것을 읽어내고, "목숨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 (폴란드, p.196)

"우리는 두렵지 않다, 혼자가 아니다. 그날 우리는 그저 그 공간을 주장했어요. 바르샤바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의 모습. 내게는 그게 강력했습니다."
마디마디 힘주어 말하는 우르술라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가 전해주는 검은 월요일 당일의 바르샤바를 상상하며, 그리고 그의 어조에 우리는 울컥했고 넷 중 세 명이 눈물을 찍어냈다. 국가의 폭력 앞에서 여성들은 들고 일어났고, 서로를 보고 힘을 얻으며 혼자가 아님을 확신했다. 이 경험은 폴란드 여성들 그리고 활동가들에게 선명한 자산으로 남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폴란드, p.199)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에서도, 정치적 보수파와 결탁해 공교육과 공공기관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톨릭 이념은 사회적 인식 전반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 폴란드 사회에서는 낙태를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폭넓게 공유되고 있다. 낙태 전면 금지화 법안 발의 전 가톨릭교회는 자원활동가를 조직해 낙태 반대 캠페인을 했고 그들을 지원했다. 작은 마을에서는 지역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교회가 사람들의 생각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낙태를 하는 여성들조차 낙태는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죄이며 낙태라는 행위가 여성에게 후유증과 트라우마를 안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죄악시는 낙태뿐만 아니라 피임에도 해당된다. 폴란드에서 여성이 피임약을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은 폴란드에 오면서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의문 중 하나였다. 낙태가 불법이고 실제로 낙태 수술을 받기가 그토록 어렵다면, 피임이 매우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교육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폴란드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폴란드, p.202)

폴란드의 가톨릭적 교육과 이념은 피임 또한 낙태와 같은 의미에서 죄라고 치부한다. 피임약을 구하는 과정은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다. 피임약 처방을 해주는 의사를 찾아야 하고, 처방을 받으러 간다 해도 피임약을 원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비난하거나 무례한 언사를 하는등 수모를 겪는 일이 흔하다. 한 번의 처방으로 약을 계속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약값 자체도 비싸다. 이런 식으로 폴란드 사회는 여성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주면서 피임과 낙태, 즉 여성 당사자의 재생산권 행사를 막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신앙 있는 이들은 실제로 피임을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말을 들으며 한숨이 나왔다. 여성에게 죄책감과 두려움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몸과 인생에 대한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 검은 시위를 전후로 변화하고 있는 대중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런 매커니즘은 이 나라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듯했다. (폴란드, p.202-203)

놀랍지 않게도, 사후피임약도 마찬가지다. EU에서 사후피임약 구입에 처방전이 필요한 나라는 폴란드와 헝가리 뿐이다. 그런데 폴란드에서도 2년 전까지는 처방전 없이 사후피임약을 구할 수 있었다. 사후피임약을 처방 없이 구할 수 있도록 명시한 EU의 권고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역행한 셈이다. "왜?"라는 우리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에는 소름이 끼치는 동시에 실소가 났다.
"그들이 말하기로는, 만약 여성이 ‘응급피임약을 사탕처럼 먹으면 어떡하냐‘는 거예요. 사후피임약을 사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 어느 여자가 한 알에 100즈워티(Zt)나 하는 사탕을 먹겠어요. 그런데 정말로 저렇게 말하면서 처방전을 도입했죠. 그들은 여성이 자기가 원하는 사탕을 먹을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아요. 원하는 사탕을 양껏 먹을 수 있는건 남자뿐이죠. 여자는 안 돼요."
한편 폴란드에서 비아그라를 사는 데는 처방전이 필요 없다. 비아그라는 몸에 유해하고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고, 때문에 미국이나 독일에서도 처방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폴란드는 남성들이 좋아하는 이 사탕을 제한 없이 허용하고 있다. (폴란드, p.203-204)

낙태를 금지하면서 피임도 금지하는 나라. 계속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끝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이것이 폴란드의 현재였다. 그리고 그 기반엔 가톨릭 이념이 있다. 생명은 신이 주는 것이므로 인간은 성행위 이후 즉 재생산을 스스로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낙태와 피임을 둘 다 죄악시하는 폴란드의 현실이 이 이념에 충실한 결과라고 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정자와 난자부터가 이미 생명의 씨앗이라고 하지만 남성의 자위는 처벌되거나 비난받지 않는다.
"모든 건 여성을 통제해요. 남성이 아니라요. 가부장제와 가톨릭은 여성에게 그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으려 해요." (폴란드, p.204-205)

우르슬라는 우리의 책에 행운을 빌어주며, 임신 중단은 당연히 얻어내야 할 권리임을 다시금 강조했다. 임신은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 일이 생겼을 때 여성은 자신의 삶을 위해 당연히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여성 개인은 자신이 임신할 일이 없다 생각한다 해도 마찬가지죠. 예를 들어, 나는 레즈비언이지만, 낙태권은 가져야 해요." (폴란드, p.209)

꽤 신중하게 이어진 그의 답을 간추려보자면, 폴란드 남성들은 임신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더라도 피임을 하는 것을 "꺼린다".
여성이 "알아서 어떻게든 임신을 피하기를" 바란다. 거기까지 듣고 우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자 카타지나는 우리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한 눈짓을 하며 덧붙였다.
"가톨릭 기반 교육은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남성의 정액은 축복(blessing)이며 여성의 건강에 좋다‘고." (폴란드, p.214)

유명한 여자들이 낙태가 불법인 와중에 ‘나도 낙태했다‘고 주장하고, 그 이후헤 보비니 사건이 있었죠. 열일곱 살 아이가 강간을 당해서 임신을 해 낙태를 하려고 한 건데 낙태 시술을 한 사람과 조력한 사람들, 그러니까 아이와 아이 엄마를 포함해서 다섯 명 정도가 죄다 법정에 선 거예요. 이 사건으로 여론이 모였죠. 그러자 이번에는 300명 넘는 의사들이 서명을 했어요. 낙태 시술을 한 걸로 처벌이 되니까, 의사들이 다들 ‘나도 낙태 시술 했다‘고요. 사실 한 적 없는 사람들도 성명에 많이 참여했는데, 너무 많은 수가 이렇게 나오니까 법을 적용할 수가 없었어요." (시칠리아 그리고 다시, 프랑스, p.228-229)

"그리고 베유법이 통과됐죠. 베유는 남자로 가득한 국회에서 연설을 했는데, 직후에 욕을 무지하게 먹었어요. 웬걸, 나치라고 욕을 먹었다니까요."
베유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다. 당시 베유는 의원 490명 중 481명이 남성인 국회에서 낙태를 합법호해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 연설 직후 그에게 욕이 쏟아졌으나, 막상 법을 통과시키는 데는 우파 의원들도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불법 낙태를 하면서 여성들은 과한 출혈,감염, 질병을 감수해야 했고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렀다. 낙태를 한 뒤 다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쨌든 여성들은 낙태를 한다는 걸 사람들은 알았던 거예요."
그렇게, 프랑스 사회는 여성이 낙태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일종의 ‘합의‘에 도달했다. (시칠리아 그리고 다시, 프랑스, p.230-231)

임신 중단권은 여성이 시민권 문제이면서 원해서 태어난 아이에게 행복한 삶을 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폴란드의 우르술라가 말했듯 이는 존엄하고 고통 없는 삶의 문제다. 가톨릭의 모순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정말 배아를 생명으로 보고 소중히 여긴다면 배아의 수정에 참여한 남성에게는 왜 죄를 묻지 않는가? 남성은 왜 피임을 기피하는가? 남성을 위한 피임약은 왜 진작 상용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왜 모든 단죄와 처벌이 여성을 향하는가. 자신의 몸에 대해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라면 여성의 모든 선택에 대한 자유는 늘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맺는 글,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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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주로 출퇴근길에 읽는 나로서는 가지고 다니는 것도 너무 무겁고 들고 읽기도 진짜 무거워 ㅠㅠ 오늘 아침에도 가방안에 이 책 넣고 무겁게 이동하면서 '아아, 내가 무거운 걸 가지고 다니는 건 내 팔자인걸까..'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아직 100쪽도 못읽은 현재, '아이 참..정말로.... 에이모 토울스는 너무 좋구나 ㅠㅠ' 하고 있다.



작가의 전작 《우아한 연인》에서는 여자주인공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 <월든>이라는 말에, 남자주인공이 그 책을 읽어보게 된다. 그리고 그 책을 좋아하게 되어서 늘상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는거다. 남자는 금융맨이었는데, 이후의 삶 자체가 달라지게 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나도 그 책을 좋아하게 되는 그런 거, 진짜 너무 좋은 에피소드 아닌가. 내가 우아한 연인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에피소드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다니, 에이모 토울스의 다음작품을 당연히 읽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읽었는데 초반부터 아아, 작가님, 또 너무 좋은 이야기를 하고 계셔. 책에 대해서. 에이모 토울스가 책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건지 책 이야기 껴넣는 거 진짜 너무 좋구요. 그것도 주인공들이 책 읽는 거라서 진짜 너무나 좋다. 물론 지금 이 책의 주인공인 백작은 사실 이 책 읽기를 즐겨하고 있진 않지만, 어쨌든..



로스토프 백작은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 나가면 총살을 당하는 벌을 받는다. 그러니 호텔 내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것. 이런 벌을 받기 전에는 호텔 스위트 룸에 묵었었는데, 이 벌이 내려지고 나서 그가 묵어야 할 방은 창고로 쓰여지던 낡은 방이다. 그러니 가지고 있던 짐을 확 줄여야했고, 책을 한 권 남기고 다 직원들이 물건 보관하는 창고에 넣어두게 되는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발자크, 디킨스, 톨스토이의 숭고한 작품들이 있는 개인 서재는 파리에 남아 있었다. 사환들이 다락바응로 옮긴 책들은 실은 아버지의 책들이었고, 주로 합리주의 철학과 현대 농업 과학을 다룬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책이 무거웠고, 읽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위압감을 주었다. (p.41)



아, 서른셋의 로스토프 백작은, 너무 좋아, 발자크, 디킨스,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문학인이었던 것이야. 아아, 소설을 좋아하다니, 당신은 멋진 사람! 당신은 분명 다정하겠군요. 너무 좋으네. 그러나 그의 책들을 파리..에 있고 지금 그가 모스크바에서 가지고 있는 책들은 자신의 취향이 '아닌' 책들인 것이었다. 어쨌든 장소도 좁고 그래서 한 권만 남기고 일단 다 창고에 처박아 두게 되는데, 그 한 권이 무엇이냐 하면, 10년전부터 읽어야지 생각했지만 아직까지도 읽지 못한, '몽테뉴'의 《수상록》되시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이해되지 않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 다음 책상에 앉아 방에 남겨놓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으며 아버지가 몹시 좋아했던 이 책을 읽겠노라고 백작이 자신과 처음 약속한 것이 분명 10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달력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번 달엔 미셸 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는 데 전념할 거야!' 라고 선언했을 때마다 인생의 어떤 악마적인 면이 문간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뜻밖의 곳에서 어떤 연애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러면 도의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가 거래하는 은행가가 전화를 하기도 했다. 혹은 서커스단이 마을에 오기도 했다.

어찌 됐든 인생은 유혹할 것이다. (p.42)



아니 그러니까 ㅋㅋㅋㅋ 당연히 인생은 유혹할 것이고, 연애를 하면 연애에 푹 빠지는 것도 맞는데, 만약 발자크와 디킨스와 톨스토이의 작품이었다면, 연애나 은행의 전화 핑계를 대면서 읽기를 10년간 미뤘을까? 아닐 것이다. 몽테뉴여서 그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자꾸 미룬 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나 지금은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호텔에 갇혔으므로), 바로 이 때 읽자!하고 그는 수상록 읽기를 시도하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도무지 잘 읽히지가 않는 것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그냥 내가 피곤해서, 내가 집중이 안돼서, 뭐 기타등등의 이유로 책을 읽는데, 아, 내가 어디까지 읽었더라? 하고 여기였나 읽어보면 너무 새롭고, 그래서 앞으로 돌아가고 돌아가고... 우리의 백작님께서 수상록을 만나고 그렇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힘든 싸움을 시작했어..




트베르스카야 거리(그리고 한껏 맵시를 부린 젊은 숙녀들과 무지칠 기회)에 대한 생각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목욕을 하고, 옷을 입고, 커피와 과일(오늘은 무화과였다)을 먹고 나니 10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백작은 몽테뉴의 걸작을 의욕적으로 집어 들었으나, 열다섯 줄쯤 읽고 나서는 매번 그의 눈길이 시계를 향해 슬금슬금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백작은 전날 책상에서 처음으로 그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약간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 권의 책으로서는 사전이나 성경-그런 책들은 필요한 내용을 참고하거나 아니면 마음 먹고 정독하는 용도의 책이지 '읽는' 책이 아니다-에 버금가는 밀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차-절개, 절제, 고독, 잠과 같은 주제를 다룬 107편의 에세이 목록-를 살펴본 백작은, 그 책은 아믕에 겨울밤이 스며들었을 때 쓰인 책일 거라는 애초의 의심이 확인되었다고 생각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책은, 새들은 이미 남쪽으로 날아갔고 장작은 벽난로 옆에 쌓여 있고 들판은 눈으로 하얀, 그런 때를 위한 책이었다. 즉, 밖으로 나가서 뭔가 할 엄두가 나지 않고 친구들고 고생스럽게 자기를 찾아올 생각이 없는, 그런 시간을 위한 책이었다. (p.54-55)



그러니까 나는 유독 힘든 요가 프로그램 시간에 자꾸 시계를 보곤 했다. 어느날 선생님은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 말씀하셨더랬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백작님, 시계는 몇 번이나 보셨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0시 20분 56초, 시계가 알려주었다.

10시 20분 57초.

58초.

59초.

시계는 호메로스가 자신의 강약약적 운율을 알려주고 베드로가 죄인의 죄를 알려주듯이 초를 완벽하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어디를 읽고 있었더라?

아, 그래. 세 번째 에세이.

백작은 시계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하려고 의자를 약간 왼쪽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읽던 부분을 찾았다. 15페이지 다섯 번째 단락이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단락의 글로 되돌아갔을 때 문맥이 전혀 와닿지 않고 생소했다. 바로 앞 단락을 읽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는 뒤로 세 페이지를 온전히 돌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읽어나갈 수 있을 만큼 분명히 기억나는 구절을 발견했다.

"당신과 함께한다는 건 이런 겁니까?" 백작이 몽테뉴에게 따져 물었다. "한 걸음 나아갔다 두 걸음 뒷걸음질해야 하는 거예요?" (p.56-57)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여러분 너무 좋지 않아요?

완전 백작이 되었다. 나는 백작이 되어 몽테뉴에게 따지고 들었다.



"당신과 함께한다는 건 이런 겁니까?"

"한 걸음 나아갔다 두 걸금 뒷걸음질해야 하는 거예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넘나 좋아 넘나 좋다.



우아한 연인 읽었을 때는 월든을 너무 읽고 싶어서 월든 사두었는데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 그런데 이 책 읽다보니 수상록 넘나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직 사지도 않았는데. 나 역시 몽테뉴에게 따져가며 수상록 읽기에 도전해야 하는 것일까.



아직 100쪽도 읽지 않아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하다. 물론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고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지겠지만, 끝내 백작이 수상록 읽기에 성공하는지, 혹여 성공했다면 어떤 감상을 들려줄지 넘나 궁금한 것. 아니면 포기하고 다른 책을 집어들게 될지, 그렇다면 그 책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질지도 너무 궁금하고. 너무 좋네.



그리고 좀 많이 읽은 날, 그는 점심에 와인을 주문한다.



"샤토 드 보들레르 한 병이 낫겠군요." 백작이 점잖게 고쳐 말했다.

"그럼요." 비숍이 성직자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보들레르 한 병은 혼자 먹는 점심에는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도 지칠 줄 모르는 미셸 드 몽테뉴를 읽으며 시간을 보낸 터라 백작은 자신의 사기를 북돋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p.68)



나도 줌파 라히리 책 읽다가 너무 지쳐서 던킨 도넛츠에 들어가 도넛을 주문해 먹었던 때가 있었다. 책 읽는 사람들 누구나 다 독서로 인해 스스로에게 기운낼만한 음식을 선물한 적이 있지 않을까. 몽테뉴 읽었더니 점심에 사치스런 와인 한 병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백작이라니. 와- 진짜 완전 내타입이다. 백작과 내가 친구여야 했는데!



"몽테뉴 읽었더니 힘드네. 점심에 사치스런 와인 병으로 마셔야겠어."

"아이고..그래그래. 같이 가서 짠해줄게. 나도 가니까 두당 한 병씩 와인 두 병 주문하자."

"응 고마워.

"근데 와인 한 병만으로는 기운 내기 힘들어. 위로는 되겠지만. 스테이크 큰 걸로 시켜. 시금치도 사이드로 시키고. 사이드는 시금치가 좋지 않니?"

"응 시금치 너무 좋지!"

"오늘 아침에 몽테뉴 읽느라 기운 빠졌으니까 점심에 와인 비우고 스테이크 먹고 배 두드리면서 오후에 낮잠 자자."

"응."

"오늘은 그냥 우리를 풀어놓자."

"응."



이렇게 되면 너무 좋으니까 나랑 친구하면 너무 좋을것 같지 않아용??


그러다가 다음날에는 내가 그러는거지.


"야, 너 따라 몽테뉴 읽었더니 나도 와인 필요해."

"아, 알지알지. 그래그래 마시자 마시자."

"우리 어제도 마셨잖아.."

"응. 근데 어제는 나 때문에 마신 거고 오늘은 너 때문에 마셔야지."

"응. 그것이 참된 우정이지.."


이러면서 우리는 또 마시고 먹고 배두드리고 자고...


몽테뉴를 완독하기 위해 우리의 우정은 30년이상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야....



독서

우정

와인

고기

럽...




에이미 토울스 좋네요. 후훗. 책 이야기 이렇게 적어주는 건 너무 좋아. 우아한 연인에서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책 따라 읽어보는 것도 너무 좋고, 이렇게 취향에 안맞는 책 도전하면서 사기 북돋기 위해 와인 병째 시키는 거 사랑합니다.



럽..

















아, 근데 여러분. 우아한 연인 들어가면 추천글에 이유경 나오는 거 알아요? 그 이유경이 바로 이 이유경이다..



여러분이 알고 지내는 이유경이 바로 이 이유경이야.. 유명인..... =3=3=3=3=3=3=3=3=3=3=3=3=3=3=3=3=3=3=3=3=3=3=3=3

세인트 피터스버그 타임즈, 해럴드, 뉴욕 타임스 북 리뷰 랑 나란히 있는 이유경...




이만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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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09-06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좋죠?^^ 전 아직 <우아한 연인> 안 읽었는데... 당장 구입해야겠어요. 추천인을 보니 바로..ㅎㅎ

다락방 2018-09-06 15:4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아한 연인 정말 좋았어요! 제가 좋아라 하는 책인데 회사 동료 빌려줬더니 퇴사해버렸다능... 지금 다시 사고 싶어 봤더니 절판이라고 되어있네요? ㅜㅜ

syo 2018-09-06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새로운 남자가 하나 더 나타났어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은 바람둥이 다락바람님.

다락방 2018-09-06 15:47   좋아요 0 | URL
아니야 아니야 아직 그정도는 아니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8-09-06 18:24   좋아요 0 | URL
이유경 바로 옆에 저 아래 화살표를 누르면, 이유경의 프로필이 나오고.
이유경의 마니아가 뜹니다.
내 뒤에 로쟈님... 그래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내 앞에... 아니!!! syo님!! 쇼님! 쑈님!!!

syo 2018-09-06 18:26   좋아요 0 | URL
단발님 소식이 꽤 늦으셨네요. syo의 이유경 마니아 1위 등극은 벌써 꽤 된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이유경 작가님조차 인지하고 계신 부분이구요.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다락방 2018-09-06 18:34   좋아요 0 | URL
네, 이유경 마니아는 1위가 이유경이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답니다?

단발머리 2018-09-06 18:41   좋아요 0 | URL
이유경의 마니아 이유경을 간신히 넘어섰다 했더니, 이게 웬일이예요?
긴 말 필요없어요!
syo님, 비켜요! 얼른!

syo 2018-09-06 18:54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하 그렇게 쉽게 비켜설 순 없지!! 😎

다락방 2018-09-06 20:21   좋아요 0 | URL
이 사람들.. 있어봐요 ㅋㅋㅋ 이유경 마니아 1위는 이유경이 하는 것이 온당하다! 곧 닿겠어!! 😡

비연 2018-09-07 19:36   좋아요 0 | URL
syo님, 단발님, 그리고 다락방님 대화 내용에 빵터진... ㅎㅎㅎㅎㅎ

루쉰P 2018-09-08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함없이 항상 여기에 계시는군요 ㅎ

다락방 2018-09-17 17:59   좋아요 0 | URL
네, 저야 뭐 늘 그렇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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