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회 사람들은 좀더 서사가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플롯이 있었어야지, 액션도 있고 대화도 있고, 음악도.

"나는 그 영상을 아주 솔직하게 찍었어."

조용히 듣던 E가 반대는 하지 않고 다만 약간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어."

그러면서 E가 사람들 몰래 경애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기 때문에 경애는 그 말을 할 때의 E를 더 선명히 기억했다. 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다는 말. (p.67-68)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의 술자리에는 남자1이 끼어있었다. 끼어있다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함께 만났다, 고 하는 것이 맞다. 그 날 우리는 함께 만났다. 그러니까 남자1과 내가 단 둘이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함께 만났고, 그래서 함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친구였고 대부분 공통된 화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맥주를 마셨고 치킨을 먹었다. 그리고 어떤 대화중에 우리는 각자의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그리고 잠깐, 아주 잠깐,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그가 내 손을 꽉 쥐었다. 아니,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의 한 손이 내 한 손을 폭 감쌌다가, 미처 내가 반응을 보일 틈도 없이, 놓았다. 아무도 그 순간을 보지 못했고, 다만 내가 알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내 손을 쥔 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꼭 그 남자의 눈빛을 보고 싶었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애써 피했다.


우리가 손을 잡은 것이 그 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너무 손을 잡고 싶어, 갖은 핑계를 대다가, 내 말을 하도 못알아쳐먹어서, 그냥 손을 잡아 달라고 내가 말을 했었더랬다. '손 잡아줘요' 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쓰다보니까 너무 웃기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리고 내가 너무 좋다. 역시 나는 짱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그 날, 손을 잡고 싶어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는데, 바보같이, 내 마음도 모르고! 이 빵꾸똥꾸 같으니라고!


그 일이 있고나서 처음 만나는 거였나, 그건 잘 모르겠다. 아 숨막혀서 못쓰겠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튼 그 호프집에서 그는 그렇게 내 손을 꽉, 잡았다 놓았고, 정말이지 짧은 순간이었고, 아직도 나는 내 한 손이 그의 한 손에 쏙- 들어가던 느낌을 기억하고, 그 날, 내 표정으로 누군가 눈치채지 않을까 너무 두근거렸고, 그러면서 우리 모두가 헤어지기까지 그런 순간이 한 번쯤 더 올 수 있기를 바랐었다.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그때까지도 건널목에서 꼭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건넜다고 했다. (중략)오크우드 애비뉴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나는 충동적으로 조지 오빠의 손을 잡아 버렸다. 곧바로, 내 손을 꽉 잡는, 손가락들. 태양. 진분홍 무더기를 이루며 창문 위로 드리워진 더욱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넝쿨. 그의 따뜻한 손바닥. 인도에 웅크리고 앉은 오렌지색 줄무늬고양이. 낡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활짝 열리는, 도시.
우리는 인도에 도착했고, 손을 놓았다.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p.88)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을 읽는데, 와- 그 순간이 떠올랐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안에서 하필이면 그 날의 그 호프집이 떠올라, 그의 손 안에 들어갔던 내 손이 기억나, 와 마음이 덜컹, 거렸다. 경애는 E 에게 손 잡힌 것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날의 기억을 그저 떠올렸을 뿐이고, 사람들이 여럿 있던 곳에서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았던 순간에 대해 얘기했을 뿐인데, 나는 다른 사람들 있는 곳에서 내 손을 잡았던 그 일이 떠올랐고, 그 때 내가 덜컹거렸던 그 순간의 감정까지 떠올라버려서, 더이상 독서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아니 경애여.. 왜 그런 일을 떠올렸어요, 왜. 그러니까 나까지 그 순간을 떠올렸잖아요. 기억 속 저 멀리 묻어버렸던 것인데.. 왜 갑자기 떠오르게 만들었어요. 흙흙. 아침부터 심장이 덜컹, 마음이 덜컹 했잖아요. 어휴, 심장이야 ㅠㅠ 어이고 마음이야 ㅠㅠㅠㅠㅠㅠㅠㅠ


마음아, 진정해, 진정해야 해. 지금은 고작 월요일일 뿐이야, 어쩌려고 그래, 어쩌려고. ㅠㅠㅠㅠㅠㅠㅠㅠ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은 고작 70페이지까지 읽었을 뿐인데 참 좋다. 김금희를 처음 만났던 <아주 한낮의 연애>보다 훨씬 좋다. 70페이지까지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아, 여성작가의 글을 읽는 건 이래서 좋다, 이래서 소중하다' 느꼈는지 모른다. 여성 작가들이여, 응원합니다, 더 많이 글을 써주세요! 게다가 아주 한낮의 연애로 나는 김금희를 기억할만한 이름에 올리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경애의 마음으로는 좋으니 뭔가 작가의 발전같아서 그것도 좋고, 한 줄 한 줄 아주 맛있게 읽고 있다. 다만... 이, 어떤, 김금희의 뭐랄까, 버리지 못하는 그 어떤 클리셰.. 라고 해야하나.이걸 뭐라고 해야하나. 경애도 그렇고 다른 인물들도 잘 만들어내다가, 왜, 어째서 '상수'가 여성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게 했는지, 게다가 그것은 왜그다지도 인기가 좋은 걸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이게 꼭 필요했나, 대체 이런 설정을 왜한걸까 싶었다. 내가 이십대 후반이었나, 소설 쓰고 싶다고 이것저것 구상했을 때 했던 것 중에 하나가, 온라인 고민사이트 만들어서 인기 끄는 주인공에 대한 거였는데, 김금희의 소설에 딱, 그런 남자가 나오는 거다. 아주 한낮의 연애에서도 맥도날드 씬에서 흐음, 너무 전형적이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어째서, 왜, 온라인 고민상담으로 인기 많은 등장인물을 만들었을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게 어떤 역할을 더 하게될지, 굳이 이런 설정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오오, 경애의 마음은 다르다, 좋구나, 하면서 읽다가 그 부분에서 삐끗- 했다. 소설을 이렇게나 오래, 이렇게나 많이 읽어온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러니까, 김금희는 욕심을 좀 버려도 되지 않을까,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다.




아무튼, 아침부터 덜컹거렸다. 크-

그 때, 좋았었지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어.....



잘 지내나요?





경애는 언제나 어찌 되었건 살자고 말하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렇게 말해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 P24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 P27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산주와 경애는 뻔뻔하게 로맨스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났다 헤어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것마저 관계의 숙명처럼 느껴지던 시절은 오히려 로맨스의 과정이었고 한쪽이 결혼을 한 상황은 확실히 그것의 정리에 가까운 일이었다. 식장에 가서 무슨 오기인지 50만원을 축의금으로 내고 계단식 연단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평소에 신지도 않던 펌프스 때문에 발가락의 찌릿찌릿한 통증을 참아가며 식당에 가 잔치국수를 먹는 일. 관계의 변화는 그렇게 등 떠밀리듯 왔다. 우리 헤어져, 하는 선언이나 다 관둬, 하며 뒤도는 동작이 아니라 식권을 받아 식당으로 가 남들이 다 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그 절차를 기꺼이 밟으며 그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오는 것이었다. - P60

경애는 그 말들을 자신에 대한 애정으로 받아들였고, 미유가 모든 인맥을 동원해 소개팅 자리를 만들면 선선히 나가서 앉아 있었다. 미유 말대로 대부분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이 남자들은 어디서 뭘 하며 괜찮게 있다가 자기 앞에 나타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안녕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행운이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야 했고 자라야 했고 먹어야 했고 사고를 피해야 했고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불운을. 불운이라고 말하면 대체 피할 수 있는 건가 싶은데, 적어도 살아 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경애는 알았다. - P62

경애는 철봉에 기대서 어떤 기대호 희망도 없지만 여전히 뛰는 사람들의 표정과 흩날리는 머리카락 같은 것을 지켜보았다. 그대 문자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산주였다. 오늘은 뭐 하니, 하는 문자를 들여다보다가 아무것도 안해, 라고 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자 날이 이렇게 좋은데 왜 아무것도 안하니, 라고 다시 문자메시지가 왔다. 경애는 그냥, 이라고 문자를 쓰면서 혹시 만나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기다렸다. 그 육칠초간은 너무 길었고 오늘의 어느 순간보다도 경애를 마음 졸이게 했는데, 그래 좋은 하루 보내, 하는 답장이 도착했다. - P92

그런 여름날 속에서 경애를 집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맥주와 옥수수뿐이었다. 어느날 시장에 갔다가 옥수수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경애는 이삼일에 한번씩 나가서 옥수수를 사왔다. 옥수수의 힘센 잎들, 동물의 것처럼 부드러운 수염, 그리고 아주 꽉 차오른 알갱이들을 보고 있으면 창으로 문득 들어오는 밤바람을 느끼듯 어떤 환기가 들면서 산다, 라는 말이 생각나곤 했다. 경애가 이 방에서 하릴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저 밖에는 ‘산다‘라는 것이 있어서 수많은 것들이 생장하고 싸우며 견디고 있다는 것. 다행히 그런 것들이 여전히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여름의 낮을 보내다 슬리퍼를 끌고 시장으로 나가면 그 살고 있는 것들을 두 손 무겁게 사들고 어쨌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경애도 아무튼 살고 있다는 것. - P97

그뒤로 경애는 산주와 자주 만났다. 살아 있지만 더이상 가까이 있을 수 없기에 죽은 사람처럼 여겨졌던 누군가가 다시 일상으로 들어온다는 건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다시 산주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는 자신이 두려워지면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에도 괴물 같은 데가 있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애정의 허기를 채우려는 욕심을 버리지는 못했다. 경애는 산주의 일상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면서 오늘은 산주가 점심에 무엇을 먹었고 누구를 만났으며 어떤 물건을 사고 몇시에 잠이 들었는지에 관해 아는 것이 당연한 상태를 맞았다. 마치 둘이 여전히 연인이었을 때처럼 전화를 받자마자 ㅇ보세요, 라든가, 선배 혹은 경애야, 하고 부르지도 않고 응, 가는 길이야, 왜, 밥 먹었어? 하면서 곧장 일상적인 대화로 들어가는 것이, 헤어질 때는 내일도 또 볼 테니까 아쉬움이나 대단한 안녕 없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 P110

그렇지 않아도 늘 뭔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았으니까 상수에게는 그리 힘든 기다림도 아니었다. 경애는 세상을 떠난 사람도 아니고 19세기 브론테 자매의 소설 속 인물도 아니며 브로마이드 속에만 존재하는 히로인들도 아니었다. 경애는 지금이라도 눈을 감으면 아주 복합적인 실감으로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경애와 상수에게는 추억이 있고 대화가, 어긋났던 감정들의 순간과 실패의 경험과 자주 있었던 낙담과 서로를 서툴게 위로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적어도 상수에게는 너무나 뚜렸했으므로 상수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여전히 "언니들의 마음을 보듬는 진짜 언니가 될래요" 하는 낯간지러운 제목 아래 기사가 실리면 순식간에 달리는 ‘그럴 바에는 x 없애라‘ ‘변태일 듯‘ 같은 댓글 속에서도 늘 기다리는 마음을 유지했다. - P349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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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9-04-14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콩닥콩닥

다락방 2019-04-14 10:11   좋아요 1 | URL
저도 읽으면서 콩닥콩닥 했어요. 히히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