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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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형에게.

  창밖에 어둠이 당도해 버린 일요일 저녁, 직장인에게는 아쉽고 때로는 황망스럽기도 합니다. 죽전에 사시는 어머니 집에서 자고 아파트 뒤편 산에 올랐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산에 올라본지가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릅니다. 다음 주에 미국에 계시는 외삼촌과 외할머니에게 이모들과 다녀오시기로 하고 그 준비과정이나 일정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일요일 오전에 늘 책을 보는 버릇을 들여놓은 터라 귀찮아 가지 않겠다고 했다가 문득 어제 읽던 형의 산문집에서 ‘나는 요즘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느낀다’는 말이 생각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어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단국대 기숙사 뒤편까지 걷고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내려오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게 몸을 주신 어머니는 또 내게 더 무엇을 주지 못해 늘 안타까워하실까. 걷는 걸 싫어하시는 아버지와 달리 산을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후에 형의 책을 마저 읽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아파트 소공원의 나무들은 벌써 가을빛으로 변해버렸고 저녁 어스름의 푸른 시간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공중으로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책을 읽고 산책을 나가면 작가에게 혼자 말을 걸게 됩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리고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삶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 많던 문청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책을 읽기 시작하고 고등학교 문예반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하고 선후배와 몰려다니던 시절은 꿈같이 흘러, 이제는 중년을 바라보는 국어교사로 살아가는 제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순전히 형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처음으로 작가에게 편지를 써 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2007년 2월에 형의 소설 『제비를 기르다』가 나왔을 때 이화여대 후문 쪽 북카페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예스24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주선한 자리였지요. 글 속에서 만난, 사진으로 보던 형의 모습과 실제 모습은 오래 전부터 알던 동네 형처럼 익숙했습니다. 쑥스럽고 겸연쩍어 보였다고 생각한 건 저만의 생각이었을까요.
제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도 저와 가장 비슷한(?) 사람이 형이었기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소설이 아닌 산문집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영화로만 만나던 배우와 며칠 동안 함께 여행을 한 것 같은 착각. 형의 내면의 풍경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유년의 기억들을 공유하며 일상의 갈피들을 펼쳐보는 일은 제게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저는 산문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만의 영역과 생의 감각을 느낀다고 생각하거든요.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 천성 탓도 있겠지만 문학은 문학으로만 만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보자마자,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부끄러운 듯 미소를 띤 형의 사진을 보자마자 책장을 펼쳐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틀 동안 꼬박 형의 소설들에 대해, 습성과 생각들에 대해 감염되어 버렸습니다. 유년기의 트라우마, 타자와의 관계, 여행과 글쓰기 그리고 곁에서 형을 지키는 형수의 따뜻한 말 한마디. 그 모든 것들이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이 사는 건 무언가 그리웁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저녁 형에게 전화를 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을 걸고 싶어졌습니다. 화주 운주사의 와불처럼 바닷가에 누워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가는 이유를 묻고 싶어졌습니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저녁 함께 속초로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소설 속의 그 많은 여인들과 그 많은 빛과 어둠에 대해 끝없이 묻고 싶어졌습니다.

  이제 사십대 후반이 되었다는 형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내 나이도 이제 마흔을 넘겨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디선가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세월을 보내고 형의 소설을 기다리는 일이 행복합니다. 저는 요즘 문학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형의 소설을 꼭 넣어 아이들에게 형의 소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날이 차가워집니다. 이 가을 그리고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또 어디에서 아름다운 소설을 만들고 계신가요. 부디 그 잔잔한 미소와 사람에 대한 예민한 감성으로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과 세상의 견고함을 위한 부끄러움을 보여주세요. 더 나이가 들면 다시 형의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을 돌아보고 어쩔 수 없는 시간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겠습니다. 여전히 문학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형에게 감사드립니다.


2010년 10월 10일 형을 읽는, 독자 류대성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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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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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는 위험하다. 흔희 회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지점이 경계에 해당한다. 경계는 불분명하고 불안하다. 소속감을 느낄 수 없고 그렇다고 경계 밖도 아니다. 이 경계를 바꾸어 생각하면 이쪽과 저쪽 모두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이 가진 뉘앙스와 이미지는 늘 적색 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집단의 정체성에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 모순된 간격을 메우거나 거부한다. 소속을 바꾸거나 집단의 성격을 바꾸거나!

  문제는 자신의 선택과 노력이 가능한 일인가 그렇지 않은 일인가에 달려 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질적인 집단에 속해 있는 개인을 상상해 보라. 재일동포 서경석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정체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디아스포라 서경석의 글은 어느 한국인 못지  않게 유려하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보면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사유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서경석의 전작을 한 권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경계에서 춤추다』라는 제목이 슬프게 느껴졌을 것이다. ‘춤’은 기쁨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다른 말인 경계인 서경석이 춤을 춘다고 했으니 그 함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반어적인 의미로 들리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역설적으로 서경석은 경계를 즐기며 진짜 ‘자유’의 춤을 추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여류 소설가 타와다 요오꼬와 나눈 편지를 묶은 것이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 등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열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독자들은 두 사람의 은밀한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는 재미를 맛본다. 공개를 전제로 쓰인 편지지만 사색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들이 드러나는 것은 편지라는 형식의 힘이 커 보인다.

  편지는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쓴 글이기 때문에 받는 사람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진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염두에 두기도 하지만 일단 받는 사람의 입장에 맞추게 된다. 서울의 서경석과 베를린의 타와다 요오꼬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동일한 사물과 사건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따로 또 같이 고민하고 소통하는 모습은 인종과 국가의 벽을 넘어 공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밀한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있어 무림 고수들이 내공을 겨루듯 한치의 양보없이 팽팽하게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글쓰기는 형식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롭게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편지 형식은 독자들에게도 편안하고 즐겁게 대화를 엿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베를린에서 타와다 요오꼬는 이방인이고 서울에서 서경식은 경계인이다. 일본인이 베를린에서 사는 것과 한국인이 서울에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일 수 있지만 오히려 서경석에게 서울은 더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가족사를 굳이 알지 못하더라도 서경식에게 ‘고향’은 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된다.

저 자신이, 루쉰처럼 어떤 시점에서 명확히 고향을 잃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재일조선인 2세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어릴 때부터 루쉰의 『고향』에 마음이 끌렸던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먼 거리’를 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P. 204

  서경석은 찬찬히 생각해 보아도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결국 돌아가고 싶은 곳, 돌아가야할 장소 따위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은 있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먼 거리’만 확인하는 과정이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이라고 외치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이다.

  경계에서 보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혹은 독일이든 낯선 땅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돌아가야할 장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경계로부터 자유롭게 춤을 추어 보자. 경계를 넘나들며 신나게 뒤섞고 흔들어보자. 우리는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영원히 혼자일지도 모른다. 서경석과 타와다 요오꼬는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거나 공간만 이동한 경계인은 아닐까? 내 몸이 놓인 자리가 아니라 삶의 자리와 방식이 문제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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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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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은 ‘상상체 공동체’가 아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을 전면 부정하는 조정래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다.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추상적으로 조작된 것이 ‘민족’이라는 주장과 신산스런 근현대사를 버텨낸 어른들의 ‘민족’ 개념은 접점을 찾기 힘들다. 그런 측면에서 민족주의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훗날 조정래 소설의 중요한 분석틀이 될 것이다.

조정래의 작가 생활 40년을 결산하는 자전에세이 『황홀한 글감옥』에서 내가 읽어낸 키워드는 ‘민족’이다. 민족에 대한 개념과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조정래의 소설에서 ‘민족’을 지워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삶과 고통스런 역사를 소설에 담아내고자 노력했던 대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이 주는 감동을 넘어 시대와 현실을 바라보는 눈, 역사인식의 태도, 치열한 삶의 자세, 문학에 대한 경건한 태도가 진하게 배어나는 진지한 목소리 때문이다. 단순히 열렬한 애국심과 한민족에 대한 애정으로만 볼 수 없는 작품들이 그를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민족’을 바라보는 태도와 방향에 따라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독일의 아우슈비츠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레드 콤플렉스이다. 미국의 메카시즘은 시대를 반영한 해프닝 쯤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대한민국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21세기도 여전히 한국 정치와 사회 곳곳을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판단기제로 작용한다. 10여 년간 국가보안법 논란에 휩싸였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2005년이 되어서야 무혐의 처리되었다. 이 사건은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과 대립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넘어 우리 민족의 진정한 화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황홀한 글감옥』은 대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등을 통해 한민족의 근현대사를 소설로 담아낸 작가에게 젊은 대학생들은 궁금한 것이 많다. 작품의 내용은 물론 글을 쓰는 방법과 개인적인 호기심까지 다양한 질문을 쏟아낸다. 작가는 애정 어린 답변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와 우리 ‘민족’에 대한 해석을 제시한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진실’만 말하고자 하는 작가는 필연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으며, 기득권을 향유하는 보수 세력과는 갈등하고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비판정신이며 휴머니즘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 P. 36

문학, 아니 소설은 사실(fact)이 아닌 진실(truth)을 말한다고 칠판에 자주 적는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만큼 다양하다. 또한 하나의 객관적 사실에 드러나는 진실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바로 이런 사실과 진실의 거리를 잘 말해준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로 환원한다면 조정래가 소설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진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결국, 소설적 진실은 ‘비판정신이며 휴머니즘’이라는 작가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일단 그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어보자.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본문 195쪽)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소설가는 무엇을 쓸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쓸 것인가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태백산맥』열권과 『아리랑』 열 두권을 각각 1주일 만에 읽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나를 잊고 소설 속을 헤맸다. 그리고 10년쯤 시간이 흐른 후에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22권을 통해 다시 대한민국의 역사 더듬었다. 역사는 사람살이의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왕조중심의 거시사든 생활사나 미시사든 선택과 집중의 문제이며 해석과 관점의 문제일 뿐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답하는 조정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글감옥에서 자유를 찾다.

‘열정은 능력이다’ - P. 96

삶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은 꿈이 없는 사람이다.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삶의 도구는 바로 ‘열정’이다. 소설가 조정래의 가장 큰 미덕은 열정이다. 대하소설 세 편을 완성하는 20년 동안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고 매일 써야하는 원고의 분량을 정해놓고 스스로 정해놓은 ‘글감옥’에 갇힌 작가는 과연 불행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가장 큰 자유였고 행복이었다. 열정을 쏟아부을 대상이 있고 그것을 즐길 줄 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조정래의 분명 가장 큰 축복이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다. ‘현대인들에게 책을 읽힌다는 것은 리모컨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라고 저는 인식했습니다.’(본문 252쪽)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모컨과 싸워 이기는 글쓰기! 얼마나 치열하고 지독한 싸움이어야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그가 그려낸 우리의 근현대사는 결국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그 세월 속에 민중들의 지난한 삶이 존재했고 여전히 굴곡진 생활들이 계속된다. 그러나 이 모든 삶이 우리의 역사이고 선조들의 삶이다. 소설을 통해 그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오욕의 시간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우리의 생활이며 그 삶의 토대를 만든 역사적 진실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 어떤 작가가 될 것인가도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조정래는 글쓰기를 통해 자유를 찾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식인의 참된 삶은 자유로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참된 지식인의 삶은 고달프나 그 의미와 보람은 하늘의 넓이입니다. - P. 379 
 

10011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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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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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만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아니 이해하더라도 접근 불가능한 고유한 세계가 있다. 나는 그것을 ‘동굴’이라고 부른다. 자의식이 강하고 내성적인 사람,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 비현실적 인생관을 지닌 사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은 현실 도피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현실 속 어느 장소이거나 나름의 행동과 습관이거나 특별한 취미이거나 개별적인 방법으로 나타난다. 어떤 형태로든 모든 사람들에게 ‘동굴’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외향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해서 항상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가면과 본질적 자아 사이의 괴리감은 사회생활을 통해 누적되는 피로로 나타난다. 가족 내 역할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한 개인의 삶은 결정된다. 그러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외치게 된다.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나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본질적인 자아를 위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기적인 삶이라고 볼 수 없으면서도 자신의 의도와 취향과 목적이 뚜렷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신념처럼 위험한 것도 없지만 가치관이 뚜렷하고 일반적인 삶의 패턴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그런 사람들은 행복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구별되는 몰입의 즐거움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왜 사는지에 대한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그 기준만큼 방법은 인구 수 만큼 많은 종류가 있을 것이다.

  시인, 문화평론가, 방송인 등 다양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김갑수는 클래식 애호가이자 매니아로 정평이 나 있다. <지구 위의 작업실>은 책 전체가 자기 소개서다. 신변잡기를 궤변으로 엮어 미용실 아줌마들의 뒷담화처럼, 사우나실 아저씨들의 수다처럼 격이 없고 친근하다. 형식도 내용도 자유롭고 거침이 없다. 시원시원한 문장과 편안하고 자유로운 문장은 책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그것도 취향의 문제라면 나는 김갑수의 문장을 매우 유쾌하게 읽었다.

  자기만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니 그것이 곧 자신의 삶이고 행복이며 실존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것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친한 사람이 없다면 행복은 불가능한가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친하다는 것은 자기 확장 의지를 뜻한다. 그러나 가망 없는 시도가 아닐까. 타인에게서 나의 일부를 발견하고자 하는 행위는 횡포다. 순수의 이름으로 사람과 사람이 적나라하게 닿는 일은 일종의 작은 폭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지금 나는 인간 혐오, 관계 혐오, 대인 기피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규정하자면 타인 의존을 통한 자기 방기가 끔찍하다는 말이다. - P. 88

  세상에는 수많은 대책 없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대책이란 자본과 경쟁에서 비껴 서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행복의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아파트 평수와 종합주가 지수와 적금 액수와 수능 점수와 연봉의 공통점은 수치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과연 행복한 삶은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일까. 방송과 강연과 인세로 평범한 사람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어 스스로 ‘불쌍’과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는 저자의 고백과 무관하게 그의 작업실은 낭만이며 행복이고 자아 확장의 공간이다.

만일 낭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섬세함에서 온다. 그것은 괴로움에 짓눌려 끙끙거리며 자라나고 좁다란 밀실에서 아른아른 피어난다. 낭만이라는 것이 만일 있다면, 낭만은 바라보는 자의 몫이지 낭만가객 자신의 몫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낭만을 가장 혐오하는 것이 타고난 낭만주의자들이다. - P. 116

  마포 37평 지하실에는 빛과 소리가 완벽된 김갑수의 작업실이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음악을 듣고 커피를 끓이고 책을 읽는 작업을 한다. 한 마디로 ‘논다’. 아무나 이런 놀이 공간을 가질 수 없다는 자괴감 보다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다. 작은 작업실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물질적인 공간과 돈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에 몰입할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본 사람이라면 LP 3만장, CD 4천장이 들어 찬 작업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오디오 작업의 세계는 나열된 어휘조차 이해 불가능이다. 커피에 대한 공력은 그의 작업실이 무엇을 말하는지 말해준다. 아나키스트 김갑수를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작업실이 부러운 사람이라면 그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아직도 근육과 정신이 근절거리는 혈기방장 젊은 나이였다면 나는 아나키스트가 됐을 것이다. 프루동이나 바쿠닌처럼 무시무시한 강골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국가는 폭력이다”라고 외친, 그래서 세금이며 노역이며 국가가 요구하는 것은 모조리 거부하자고 주장한 톨스토이식 온건 아나키즘쯤에 닿았을 것 같다. 아니, 아니다. 무슨 ‘이즘’ 따위로 거창하게 나가지 말고 단순소박으로 이 ‘나라 지겨움’의 속마음을 헤아려보자. - P. 127

  어린 시절 끔찍한 폭력과 친구의 화실을 전전하던 지독한 가난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잠시 언급하는 대목에서 잠시 목이 메인다. 짧은 문장이지만 스스로를 진단하는 이야기가 그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음악을 듣는 ‘일’이 그의 삶이라면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오디오 작업을 하는 행위는 음악을 위한 준비운동일까? 누구에게나 작업실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공간을 만들어 살고 있는 김갑수의 인문학적 교양, 몰입의 즐거움에 공감을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나도 김갑수를 부러워만 하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 미쳐야 미친다. 다만, 간절하게, 두려움없이 미쳐가고 싶다.

나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권유하고 싶다. 미쳐달라고. 텅 빈 우물 속에서 제발 조금씩은 미쳐버려달라고. 다만 간절하게, 두려움없이. - P. 279

090705-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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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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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이 없다는 인간은 살 수 없다. 시간 앞에 드러나지 않는 진실이 없는 것처럼. 오늘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평생을 혼자 살아야 했던 사람이 어디 한 둘 일까마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40일간 뇌사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던 동생이 깨어났을 때 담당 의사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사고 당일부터 며칠 동안 앉은 자리에서 물 한 모금 목에 넘기시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고 눕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지켜야하는 일이 더 큰 고통이었다. 일생을 살면서 기적이라는 말을 실감한 것은 40일만에 동생의 부활이었다. 이제는 잊었다고 믿고 싶다.

  이제는 머나먼 미국 땅, 장영희 교수가 박사과정을 밟았던 대학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는 동생을 잊고 산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책날개에 적힌 장영희의 양력을 읽다가 문득 동생이 떠올랐다. 희망은 때때로 인간에게 고문이 되기도 하지만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사람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마지막 빛이다. 덤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생을 바라보는 마음의 갈피는 복잡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다녀온다는 인사를 잘 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이 안녕이다. 매순간 생의 마지막처럼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가졌던 절망과 간절함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은 그렇게 늘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불행을 던져 놓는다. 운명에 순응하며 인생이 결정되어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난 늘 운명 앞에 겸손해졌다.

  유방암을 극복하고 척수암을 이겨내며 강인한 삶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장영희 선생님의 죽음은 평범하다. 다만 그녀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던 희망의 메시지를 기억할 뿐이다. 삶은 기적이며 찬란한 눈부심이고 평범한 일상의 지속이 가장 큰 행복임을 깨닫는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장영희 글들은 소박하고 담백한 숭늉같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자극적이고 강렬한 기억을 남길만한 소스도 메뉴도 없다. 밋밋하고 평범한 시골 밥상같지만 포만감을 느끼며 아주 잘 먹었다는 생각을 들게한다. 그런 음식은 다시 찾게 마련이다.

  그녀의 마지막 책이 되어버린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김종삼의 시에서 빌려온 제목이다.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김종삼의 시세계와 닮아있는 장영희의 산문들은 정갈하고 깔끔하다. 그녀 삶의 이력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같아 읽는 내내 마음이 신산스러웠다.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좋은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며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기에 충분했겠지만 나는 어쩐지 ‘짠한’ 마음이 들었다. 개인적인 감정이니 탓할 사람은 없겠지만 긴 한숨과 안타까움이 깊었다.

  영문학 박사 장왕록의 딸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장애를 극복하며 미국 유학까지 마치고 대학교수로 살아갈 터전이 마련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부모를 만나 태어나느냐하는 것은 복권과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경쟁과 자본의 힘이 막강한 나라에서 출발선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 사회적 계급이 고착화되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강화되고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장영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복잡해진다. 장애인의 삶과 문인으로서 삶을 함께 걸었던 그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나, 비가 되고 싶어’라는 프롤로그에서부터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는 에필로그까지 정일 화백의 그림과 어우러져 책 전체가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내용도 그림도 가장 선하고 평화롭고 부드러운 것들로 가득하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깨달음과 겸손이 곳곳에 묻어있고 배려와 따스함은 덤으로 놓여있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 이야기도 아니고 어렵고 딱딱한 이론도 없다. 저자의 삶에서 배어나온 자잘한 일상들과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들이 녹아있어 더 애틋하고 편안하게 읽힌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일상이나 단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게는가. 저자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숨기지 않는다. 신체의 장애가 있어 겪는 불편함이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로서 겪어야하는 아쉬움들이 일상의 에피소드로 그려진다. 과장하는 몸짓도 애써 치장하는 언사도 없다. 담담하게 느낀 그대로 편안하고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이야기같다.

두 개의 독에 쥐 한 마리씩을 넣고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밀봉한 후 한족 독에만 바늘구멍을 뚫는다. 똑같은 조건 하에서, 완전히 깜깜한 독 안의 쥐는 1주일 만에 죽지만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독의 쥐는 2주일을 더 산다. 그 한 줄기 빛이 독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되고, 희망의 힘이 생명까지 연장시킨 것이다. - P. 232 ‘에필로그’중에서

  이미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한 저자의 이야기가 가슴 뭉클하게 들리는 것은 삶과 죽음의 일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낸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말이다. 먼저 갈다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모아 놓는다면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담담하고 평화로운 일상들,과 상식이고 합리적인 행동들, 타인을 배려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마음들이 모여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과 내일의 희망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한다. 세계를 비극적으로 인식해도 늘 나는 행복하다고 자위하며 내일 죽을 것처럼 살 수 있는 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살아온 것도 살아갈 것도 어쩌면 모두 기적인지 모른다.


09062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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