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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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형에게.

  창밖에 어둠이 당도해 버린 일요일 저녁, 직장인에게는 아쉽고 때로는 황망스럽기도 합니다. 죽전에 사시는 어머니 집에서 자고 아파트 뒤편 산에 올랐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산에 올라본지가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릅니다. 다음 주에 미국에 계시는 외삼촌과 외할머니에게 이모들과 다녀오시기로 하고 그 준비과정이나 일정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일요일 오전에 늘 책을 보는 버릇을 들여놓은 터라 귀찮아 가지 않겠다고 했다가 문득 어제 읽던 형의 산문집에서 ‘나는 요즘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느낀다’는 말이 생각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어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단국대 기숙사 뒤편까지 걷고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내려오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게 몸을 주신 어머니는 또 내게 더 무엇을 주지 못해 늘 안타까워하실까. 걷는 걸 싫어하시는 아버지와 달리 산을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후에 형의 책을 마저 읽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아파트 소공원의 나무들은 벌써 가을빛으로 변해버렸고 저녁 어스름의 푸른 시간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공중으로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책을 읽고 산책을 나가면 작가에게 혼자 말을 걸게 됩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리고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삶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 많던 문청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책을 읽기 시작하고 고등학교 문예반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하고 선후배와 몰려다니던 시절은 꿈같이 흘러, 이제는 중년을 바라보는 국어교사로 살아가는 제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순전히 형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처음으로 작가에게 편지를 써 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2007년 2월에 형의 소설 『제비를 기르다』가 나왔을 때 이화여대 후문 쪽 북카페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예스24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주선한 자리였지요. 글 속에서 만난, 사진으로 보던 형의 모습과 실제 모습은 오래 전부터 알던 동네 형처럼 익숙했습니다. 쑥스럽고 겸연쩍어 보였다고 생각한 건 저만의 생각이었을까요.
제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도 저와 가장 비슷한(?) 사람이 형이었기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소설이 아닌 산문집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영화로만 만나던 배우와 며칠 동안 함께 여행을 한 것 같은 착각. 형의 내면의 풍경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유년의 기억들을 공유하며 일상의 갈피들을 펼쳐보는 일은 제게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저는 산문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만의 영역과 생의 감각을 느낀다고 생각하거든요.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 천성 탓도 있겠지만 문학은 문학으로만 만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보자마자,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부끄러운 듯 미소를 띤 형의 사진을 보자마자 책장을 펼쳐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틀 동안 꼬박 형의 소설들에 대해, 습성과 생각들에 대해 감염되어 버렸습니다. 유년기의 트라우마, 타자와의 관계, 여행과 글쓰기 그리고 곁에서 형을 지키는 형수의 따뜻한 말 한마디. 그 모든 것들이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이 사는 건 무언가 그리웁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저녁 형에게 전화를 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을 걸고 싶어졌습니다. 화주 운주사의 와불처럼 바닷가에 누워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가는 이유를 묻고 싶어졌습니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저녁 함께 속초로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소설 속의 그 많은 여인들과 그 많은 빛과 어둠에 대해 끝없이 묻고 싶어졌습니다.

  이제 사십대 후반이 되었다는 형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내 나이도 이제 마흔을 넘겨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디선가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세월을 보내고 형의 소설을 기다리는 일이 행복합니다. 저는 요즘 문학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형의 소설을 꼭 넣어 아이들에게 형의 소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날이 차가워집니다. 이 가을 그리고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또 어디에서 아름다운 소설을 만들고 계신가요. 부디 그 잔잔한 미소와 사람에 대한 예민한 감성으로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과 세상의 견고함을 위한 부끄러움을 보여주세요. 더 나이가 들면 다시 형의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을 돌아보고 어쩔 수 없는 시간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겠습니다. 여전히 문학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형에게 감사드립니다.


2010년 10월 10일 형을 읽는, 독자 류대성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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