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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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는 위험하다. 흔희 회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지점이 경계에 해당한다. 경계는 불분명하고 불안하다. 소속감을 느낄 수 없고 그렇다고 경계 밖도 아니다. 이 경계를 바꾸어 생각하면 이쪽과 저쪽 모두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이 가진 뉘앙스와 이미지는 늘 적색 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집단의 정체성에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 모순된 간격을 메우거나 거부한다. 소속을 바꾸거나 집단의 성격을 바꾸거나!

  문제는 자신의 선택과 노력이 가능한 일인가 그렇지 않은 일인가에 달려 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질적인 집단에 속해 있는 개인을 상상해 보라. 재일동포 서경석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정체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디아스포라 서경석의 글은 어느 한국인 못지  않게 유려하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보면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사유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서경석의 전작을 한 권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경계에서 춤추다』라는 제목이 슬프게 느껴졌을 것이다. ‘춤’은 기쁨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다른 말인 경계인 서경석이 춤을 춘다고 했으니 그 함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반어적인 의미로 들리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역설적으로 서경석은 경계를 즐기며 진짜 ‘자유’의 춤을 추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여류 소설가 타와다 요오꼬와 나눈 편지를 묶은 것이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 등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열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독자들은 두 사람의 은밀한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는 재미를 맛본다. 공개를 전제로 쓰인 편지지만 사색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들이 드러나는 것은 편지라는 형식의 힘이 커 보인다.

  편지는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쓴 글이기 때문에 받는 사람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진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염두에 두기도 하지만 일단 받는 사람의 입장에 맞추게 된다. 서울의 서경석과 베를린의 타와다 요오꼬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동일한 사물과 사건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따로 또 같이 고민하고 소통하는 모습은 인종과 국가의 벽을 넘어 공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밀한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있어 무림 고수들이 내공을 겨루듯 한치의 양보없이 팽팽하게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글쓰기는 형식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롭게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편지 형식은 독자들에게도 편안하고 즐겁게 대화를 엿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베를린에서 타와다 요오꼬는 이방인이고 서울에서 서경식은 경계인이다. 일본인이 베를린에서 사는 것과 한국인이 서울에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일 수 있지만 오히려 서경석에게 서울은 더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가족사를 굳이 알지 못하더라도 서경식에게 ‘고향’은 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된다.

저 자신이, 루쉰처럼 어떤 시점에서 명확히 고향을 잃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재일조선인 2세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어릴 때부터 루쉰의 『고향』에 마음이 끌렸던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먼 거리’를 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P. 204

  서경석은 찬찬히 생각해 보아도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결국 돌아가고 싶은 곳, 돌아가야할 장소 따위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은 있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먼 거리’만 확인하는 과정이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이라고 외치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이다.

  경계에서 보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혹은 독일이든 낯선 땅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돌아가야할 장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경계로부터 자유롭게 춤을 추어 보자. 경계를 넘나들며 신나게 뒤섞고 흔들어보자. 우리는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영원히 혼자일지도 모른다. 서경석과 타와다 요오꼬는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거나 공간만 이동한 경계인은 아닐까? 내 몸이 놓인 자리가 아니라 삶의 자리와 방식이 문제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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