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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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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한 상황에 마주하면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다. 평소에 보여주던 사회적 가면들을 껍데기에 불과하다. 타인에 대한 태도는 물론이고 자신의 정체성마저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을 일상 속에서도 자주 접하게 된다. 그것이 나이든 타인이든 상관없이 그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과 나의 태도 그리고 실제로 벌어지는 행동 사이에서 인간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극한 상황은 물론 전쟁이다. 가장 잔혹한 종인 인류는 전쟁의 역사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처절하고 비참한 시간들을 보내왔고 보내고 있다. 전 인류의 트라우마로 일컬어지는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은 20세기의 잔혹사를 대표한다. 숱한 영화와 책을 통해 만나고 또 만나도 인간에 대한 회의가 없어지지 않는다. 이해되지도 않고 상황을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전달받을 뿐 비판이나 해석이 불가능하다. 일제 군국주의에 의한 생체실험이나 잔인한 고문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나치스에 의한 대량 학살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증언은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일 수 없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질문을 던지게 한다. 프리모 레비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1%. 살아남을 확률만으로도 그를 감탄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는 수용소에서 보낸 생생한 기록이다.

 단순한 호기심과 증언을 넘어선 자리에 이 책이 놓여야 할 것 같다. 레비는 화학자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수용소 경험이 아니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저자의 서술 태도는 독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레비는 객관적이고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 한다. 수용소로 이송될 때인 1945년 12월부터 러시아의 공습으로 수용소를 탈출해서 돌아오기까지인 1947년1월까지의 기록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소설도 수필도 일기도 아니다. 미친 시간에 대한 기록이며 증언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것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 P. 201

 아마도 이런 생각이 아니었다면 레비는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레비가 아닌 누군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수백만 명의 영혼 속에 섞여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살아 돌아온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는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본질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이탈리아 유대인이었던 저자의 특수성과 나치에 의한 수용소라는 공간이 만나 탄생한 이 책은 그 기록의 생생함에 놀라게 된다. 지나간 이야기를 더듬는 회고록의 형식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놓은 메모들의 연결이다. 비루한 생을 이어가는 것보다 희망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슬픔보다 숙연함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군대 신병 훈련소를 가장 근사치로 생각해보겠지만 비교도 할 수 없다. 참담하지만 인류의 역사였고 지나간 과거라고 묻어버리기엔 그 상처가 너무 크다. 스물 넷의 나이에 수용소에 끌려갔던 레비는 198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생의 막장에서 살아 돌아온 그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어지지만 특별한 만남으로 도약하거나 좌절한다. 기억에 남을 만큼 감사와 도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한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일이 식은 죽 먹기처럼 쉽다. 단번에 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보다 더 무서운 일은 그에게 미래를 빼앗는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생의 목표와 희망을 잃어버리는 순간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레비는 살아가면서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썼지만 인간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묻고 싶은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는 여기에 동참하게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여기에서 출발된다.


070127-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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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7-01-2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네요...
1. 극한 상황에 처하면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말에 참 동감입니다. 극한 상황까지 가지 않더라도 조금만 힘든 상황에 처하면 인간의 본성이 조금씩 엿보이는 것 같습니다. 좋을 때야 누구나 좋으니까요.
2. 아우슈비츠 학살에 대해서는 항상 이중적인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희생자가 지금의 학살자로 되어 있는 현실 또한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 같네요.

sceptic 2007-01-29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은 아우슈비츠와 나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상관없다고도 있다고도 할 수 있죠. 무엇인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왜 이런 과정을 겪고 있으며 역사에서 배울 수 없는건지 아이러니죠.
 
팔레스타인의 눈물 - 문학으로 읽는 아시아 문제 팔레스타인
수아드 아마리 외 지음, 자카리아 모하메드 엮음, 오수연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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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와 민족의 구별이 없다면 세계 평화는 가능한가.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한 마디로 재단할 수는 없다. 어느 편을 들어 줄 생각도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미흡하다. 객관적 시선이 불가능한 이 문제에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자신의 잣대로 실리를 계산하기 바쁘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바라볼까?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법한 이야기. 전쟁이 나면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고 아랍인들은 도망가기 위해 짐을 싼다는 이야기를 선생님들로부터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그렇게 가르쳤을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씁쓸하다. 이처럼 왜곡된 시선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바라본다면 그들은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는 셈이다.

 <팔레스타인의 눈물>은 수아드 아미리 등 여러 명의 팔레스타인 작가가 쓴 글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자카리아 무함마드와 오수연이 엮은 책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졌던 전쟁과 참상을 직,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문학이 수단이 될 순 없지만 또 다른 측면의 진실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들이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어쩌면 ‘타인의 고통’일 뿐이고, 지구촌 뉴스일 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남북 분단의 문제와 미국과의 관계를 짚어보는 타산지석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는 편 가르기를 넘어선 문제이다. 이라크와 더불러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면서 인류라는 종족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밸푸어 선언으로 땅없는 민족이었던 유대인의 시오니즘은 희망의 등불을 켠다. 하지만 수천 년간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된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에게는 침략자일 뿐이다.

 1948년 전쟁보다 1967년 전쟁으로 동예루살렘과 서안, 가자 지구를 점령한 이후의 비극은 특히 심각하며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명백한 침략행위로 규정되어 불법 점령한 지역을 반환하고 이스라엘 국민들의 정착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여전히 팔레스타인에 장벽을 설치했고 불법 점령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 지역을 점령할 당시 국외에 있다가 수십 년간 가족과 생이별하거나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비참한 이야기들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탱크가 시내에 진입해서 폐허가 되고 생필품을 구하지 못해 집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사 속의 한국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해결되고 있지 않은 문제이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주장해온 이야기에 익숙한 우리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은 우리 편이고 그 반대편은 적으로 간주하는 단순하고 위험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국가의 정체성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미국과의 관계를 거론하는 정치인들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나라 밖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우리의 문제로 귀결되며 미국의 패권적 이기주의는 위험 수준에 도달해 있다.

 굳이 한미FTA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에 개입하고 있는 미국과 그들의 시선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의 시선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바라볼 수만은 없다. 그것은 편견이며 왜곡된 진실이다. 소설을 통해서 혹은 산문들을 통해서 직접 만나게 되는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는 또 다른 시야를 열어준다.

 2003년 이라크에 취재작가로 파견된 소설가 오수연과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가 만나 이 책을 기획했고 그 결과물은 한국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실감나는 목소리를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진지하고 커다란 감동으로 전해준다. ‘분쟁’ 지역이 아니라 ‘점령’ 지역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책이라기 보다 삐뚤어진 우리들의 시선을 교정할 수 있는 책으로 손색이 없다.

 다양한 시선과 폭넓은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면 이 책은 반드시 읽혀야 한다. 일방적인 주장만을 듣거나 분명한 의도와 시각으로 편집되어 전해지는 이야기들의 위험성을 간파해야 한다.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일 수 없고 진실은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07012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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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07-01-22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수연 작가 강연회에 참석한 적 있는데, 소설 얘긴 안 하고 줄곧 '팔레스타인의 눈물'에 대해서 얘기하더군요. 체험담이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번역까지 한 것 보니 숙연해지더라구요.

sceptic 2007-01-2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곳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느낌이어서 좋은 책으로 추천할만 합니다.
 
천 개의 공감 -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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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서로에게 무한한 행복을 주거나 극단적인 불행을 선물한다. 서로가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은 이해되지 않으며 이해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는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찢어지고 갈라진 관계를 끊어버릴 수 없을 때 불행은 시작된다. 특히 헤어진다고 해결되지 않는 가족 관계가 가장 심각하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 관계는 물론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관계의 출발이다.

<천 개의 공감>은 김형경의 ‘심리 치유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타인에게 말걸기를 통해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말을 걸어도 좋겠다. 다만 말을 걸 수 있는 적당한 대상과 방법이 있다면 말이다. 한겨레 지면에 연재되던 코너를 한 권의 책으로 묶은 이 책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짤막한 사연과 자기 상황에 대한 문제를 보내면 김형경이 상담과 조언을 해주는 형식의 글들을 모았다.

자기알기, 가족관계, 성과사랑, 관계맺기 등 4개로 나누어진 이 책은 아무 때나 어디를 펼쳐 읽어도 상관없다. 짧은 글들 속에 압축된 상황들은 대개의 경우 일반적인 80% 범위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극도의 자기 부정이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상처입는 사람들,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거나 대책이 없는 사람들의 괴로움은 생각보다 심각해 보인다. 김형경은 거의 모든 경우에 예외없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사용하거나 시도하고 있다. 객관적인 분석이라는게 불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저자 나름의 잣대와 뚜렷한 방법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으로 스스로의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대응책을 제시하는 내용은 개별적인 상황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공감이 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일상에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의 경우 생각보다 해답은 간단하다. 내면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면 갈등과 고민이 적어질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 대한 판단도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대책은 자기 안에 있으며 문제는 스스로 풀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어떤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당연히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단계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 사람들은 오히려 해법이 간단하다. 거울 마주보기를 통해 스스로를 인정하는 기본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족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에 관한 문제는 쉽지 않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예상치 못한 상황과 감정들과 부딪히게 된다. 사회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장 고통스러울 수 있는 부분이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우리는 가장 큰 행복과 생의 충만감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신을 비추어 봅기도 하며 인생을 가꾸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 맺기에 실패할 경우 타인에 대한 혐오감을 넘어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특정인에 대한 관계가 전체로 확대되기도 하고 자신의 작은 문제가 타인들과의 관계 맺기에 지속적으로 간여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고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 영역에 대한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해 우리는 늘 고민하고 생각한다. 지혜롭게 그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들의 생은 당연히 행복해 보이지만 그 방법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먼저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며 타인들과의 관계를 바꿔야하기 때문이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이해와 용기이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으면 타인을 알 수 없고 안다고 해도 용기가 없다면 실천할 수 없다. 저자가 요구하는 해결책들은 스스로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부족한 상담자들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가. 가장 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 용기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김형경의 잣대는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에 있고 id, ego, super-ego 사이의 관계를 풀어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리비도와 집단무의식, 어린 시절의 억압과 어머니와 애정관계가 실마리가 된다. 그러나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특히 ‘가족관계’나 ‘성과사랑’에 관련된 문제들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상황일 경우가 많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비법은 없겠지만 개인적 성향과 상황들이 모두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반적인 처방이나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만능 열쇠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를 진단하는 역할을 넘어설 수 없는 우가 많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거의 대부분 여성의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남성 상담자의 경우 상담자 자체의 문제를 부각시키거나 지적하는 반면 여성의 경우에는 상대에게 원인을 찾거나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여성은 가족 관계에서나 사회적 관계에서 약자인 경우가 많다. 감정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개별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부작용도 생길 수 있어 아쉽다.

전문 상담가나 의사가 상담자나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의 포괄적인 문제를 다룬 책으로서 ‘천 개의 공감’이 이루어지지는 않는 책이다.


070108-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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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7-01-08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님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었었는데, 작가분이 심리학 전공이신가요? 아무튼 좀 특별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어요. 근데 천개의 공감은 소설이 아니라 신문에서 상담사례를 모은것이었군요.

sceptic 2007-01-09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 김형경은 국문학 전공잡니다. 신문과 한겨레 상담 코너의 칼럼들을 모아놓았습니다. 꼭 여성들만의 입장을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주로 여성들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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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 제목이 주는 이미지가 강렬해서 잊혀지지 않는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 속성 중 하나인 불안에 대해 쉽게 정의내리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만큼 단편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극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만큼 감성과 이성 모두를 자극하는 것도 없을듯 싶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그가 펴낸 저작들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명저로 기억될만하다. 단지 시류에 영합하거나 얄팍한 상술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종류의 책들과는 조금 다르다. 철학에서 대중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때로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내용의 깊이와 사색의 넓이를 확보하면서 그것을 쉽게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역할도 어렵지 않게 성공하고 있다. 진정한 에세이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는 칭찬을 덧붙일 수 있는 수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책들은 원제를 먼저 살펴야 한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의 원제는 였고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의 원제는 이었다. 번역서의 제목이 판매부수를 결정한다는 통설처럼 이 책들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의 경우 제목이 바뀌어 재출판 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경우에 해당한다. <불안>의 원제는 이다. 원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에 대해 한정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책장을 열어야 한다.

  먼저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전체 구성을 단순화한 것이 눈에 띤다. 크게 ‘불안’에 대한 ‘원인’과 ‘해법’으로 구별해 놓고 있다. 불안의 원인에 대해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 나누어 진단하고 있다. 그 해법으로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를 제시한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 P. 38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 P. 81

  사회적 ․ 경제적 지위에서 느끼는 불안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특히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 이후 인간이 느끼는 가장 극심한 불안과 공포는 물질적 궁핍에 대한 것이다. ‘돈’, 혹은 ‘부’에 대한 정의와 개념은 조금씩 다르게 논의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은 극히 드물다. 종교적 삶을 택했거나 아주 특별한 인생을 살지 않는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게 동일한 이데올로기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동인을 유발한다.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라는 보통의 말은 그래서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이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모두 다르겠지만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끔찍하다. 욕망도 규격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또 하나의 불안(?) 때문이다.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 P. 124

  그렇다.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 그러나 그 하녀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욕망을 없애는 방법과 하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 둘 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대한 자본에 대한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한다는 것은 표현 자체가 모순이다. 욕망의 절제라니? 그것도 자본에 대한 욕망을 적정 수준에서 절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기 변명과 위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병든 영혼에 대한 처방전은 아니다. 그저 그 원인들을 진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안’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도감은 무척 크게 느껴진다. 안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대상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의 ‘해법’에 대해서는 공감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우?철학과 예술이 주는 위안 그것이다. 사유하는 방식과 삶에 대한 태도에 따라 불안은 물론 극복되거나 치유될 수도 있다. 정치와 기독교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치와 기독교가 가중시킨 ‘불안’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사회적 불안에 누구보다도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개인의 삶에 대적 영향을 끼친 분야를 불안의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시한 ‘보헤미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방법론으로 제시했으나 실패담 위주이고 일반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현실과의 접목 문제나 구체적 접근 방법이 없다.

  보통은 이 책에서 수많은 고전과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종합하며 그것들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다. 불안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견해가 공존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도 종합적인 통합의 능력으로 이해하고 싶다. 철학자가 수학자는 아니다. 더구나 인간의 심리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어디 있을까.

  몇가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일상’이라는 측면에서 꾸준히 지속되어온 그의 연구와 일련의 저작들 속에서 빛을 발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하고 분석해서 다양한 층위들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작가가 필요한 것은 모두의 바램일 것이다. 불안에 대한 작가의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P. 268


200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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