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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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만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아니 이해하더라도 접근 불가능한 고유한 세계가 있다. 나는 그것을 ‘동굴’이라고 부른다. 자의식이 강하고 내성적인 사람,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 비현실적 인생관을 지닌 사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은 현실 도피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현실 속 어느 장소이거나 나름의 행동과 습관이거나 특별한 취미이거나 개별적인 방법으로 나타난다. 어떤 형태로든 모든 사람들에게 ‘동굴’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외향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해서 항상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가면과 본질적 자아 사이의 괴리감은 사회생활을 통해 누적되는 피로로 나타난다. 가족 내 역할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한 개인의 삶은 결정된다. 그러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외치게 된다.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나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본질적인 자아를 위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기적인 삶이라고 볼 수 없으면서도 자신의 의도와 취향과 목적이 뚜렷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신념처럼 위험한 것도 없지만 가치관이 뚜렷하고 일반적인 삶의 패턴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그런 사람들은 행복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구별되는 몰입의 즐거움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왜 사는지에 대한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그 기준만큼 방법은 인구 수 만큼 많은 종류가 있을 것이다.

  시인, 문화평론가, 방송인 등 다양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김갑수는 클래식 애호가이자 매니아로 정평이 나 있다. <지구 위의 작업실>은 책 전체가 자기 소개서다. 신변잡기를 궤변으로 엮어 미용실 아줌마들의 뒷담화처럼, 사우나실 아저씨들의 수다처럼 격이 없고 친근하다. 형식도 내용도 자유롭고 거침이 없다. 시원시원한 문장과 편안하고 자유로운 문장은 책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그것도 취향의 문제라면 나는 김갑수의 문장을 매우 유쾌하게 읽었다.

  자기만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니 그것이 곧 자신의 삶이고 행복이며 실존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것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친한 사람이 없다면 행복은 불가능한가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친하다는 것은 자기 확장 의지를 뜻한다. 그러나 가망 없는 시도가 아닐까. 타인에게서 나의 일부를 발견하고자 하는 행위는 횡포다. 순수의 이름으로 사람과 사람이 적나라하게 닿는 일은 일종의 작은 폭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지금 나는 인간 혐오, 관계 혐오, 대인 기피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규정하자면 타인 의존을 통한 자기 방기가 끔찍하다는 말이다. - P. 88

  세상에는 수많은 대책 없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대책이란 자본과 경쟁에서 비껴 서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행복의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아파트 평수와 종합주가 지수와 적금 액수와 수능 점수와 연봉의 공통점은 수치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과연 행복한 삶은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일까. 방송과 강연과 인세로 평범한 사람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어 스스로 ‘불쌍’과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는 저자의 고백과 무관하게 그의 작업실은 낭만이며 행복이고 자아 확장의 공간이다.

만일 낭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섬세함에서 온다. 그것은 괴로움에 짓눌려 끙끙거리며 자라나고 좁다란 밀실에서 아른아른 피어난다. 낭만이라는 것이 만일 있다면, 낭만은 바라보는 자의 몫이지 낭만가객 자신의 몫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낭만을 가장 혐오하는 것이 타고난 낭만주의자들이다. - P. 116

  마포 37평 지하실에는 빛과 소리가 완벽된 김갑수의 작업실이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음악을 듣고 커피를 끓이고 책을 읽는 작업을 한다. 한 마디로 ‘논다’. 아무나 이런 놀이 공간을 가질 수 없다는 자괴감 보다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다. 작은 작업실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물질적인 공간과 돈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에 몰입할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본 사람이라면 LP 3만장, CD 4천장이 들어 찬 작업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오디오 작업의 세계는 나열된 어휘조차 이해 불가능이다. 커피에 대한 공력은 그의 작업실이 무엇을 말하는지 말해준다. 아나키스트 김갑수를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작업실이 부러운 사람이라면 그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아직도 근육과 정신이 근절거리는 혈기방장 젊은 나이였다면 나는 아나키스트가 됐을 것이다. 프루동이나 바쿠닌처럼 무시무시한 강골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국가는 폭력이다”라고 외친, 그래서 세금이며 노역이며 국가가 요구하는 것은 모조리 거부하자고 주장한 톨스토이식 온건 아나키즘쯤에 닿았을 것 같다. 아니, 아니다. 무슨 ‘이즘’ 따위로 거창하게 나가지 말고 단순소박으로 이 ‘나라 지겨움’의 속마음을 헤아려보자. - P. 127

  어린 시절 끔찍한 폭력과 친구의 화실을 전전하던 지독한 가난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잠시 언급하는 대목에서 잠시 목이 메인다. 짧은 문장이지만 스스로를 진단하는 이야기가 그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음악을 듣는 ‘일’이 그의 삶이라면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오디오 작업을 하는 행위는 음악을 위한 준비운동일까? 누구에게나 작업실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공간을 만들어 살고 있는 김갑수의 인문학적 교양, 몰입의 즐거움에 공감을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나도 김갑수를 부러워만 하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 미쳐야 미친다. 다만, 간절하게, 두려움없이 미쳐가고 싶다.

나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권유하고 싶다. 미쳐달라고. 텅 빈 우물 속에서 제발 조금씩은 미쳐버려달라고. 다만 간절하게, 두려움없이. - P. 279

090705-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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