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하라 팜 파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0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이렌의 노래

더 추워지기 전에 바다로 나와
내 날개 아래 출렁이는
바다 한가운데 낡은 배로 가자
갑판 가득 매달려 시시덕거리던 연인들
물속으로 퐁당
물고기들은 몰려들지, 조금만 먹어볼래?
들리지? 내 목소리, 이리 따라와 넘어와 봐
너와 나 오래 입 맞추게

  별다방이라고 부르는 스타벅스의 심볼이 되어 버린 신화 속의 주인공 세이렌. 우리는 그녀를 이제 도심 한복판 커피 전문점에서 만난다. 여성성의 상징과 원형 그 유혹과 죽음의 그림자를 ‘세이렌’에게서 빌려 온 시인의 상상력은 명랑하다. 김이듬의 시집 <명랑하라 팜 파탈>은 불안한 영혼과 자의식의 충돌들이 넘친다.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시들로 가득하다. 그 불편의 이유가 다양하지만 감성과 이성 어느 부분에서도 공감하거나 쉽게 해석되거나 접근하기 어렵다.

  시는 항상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시의 시대라고 명명되던 80년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물론 그 시대에도 서정윤의 ‘홀로서기’가 촉발한 대중적 감수성과 호기심을 넘어서지 못한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어찌됐든 밤하늘에 별처럼 밝게 빛나거나 오롯이 외로움을 간직한 채 빛나야 할 명징한 언어들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는 시인의 몫이다. 하지만 어느 한 구석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시가 있다. 독자 개인의 평가이겠지만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기만 하는 노래 소리처럼 뱃사람을 유혹했던 세이렌의 노래 소리만큼 김이듬의 시가 독자들이 마음을 훔치지는 못하는 듯하다. 시가 전해주는 울림은 대개 세 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먼저, 언어 자체가 주는 울림들과 언어의 직조 과정에서 빚어지는 관계들 사이의 아름다움이 주는 참신함이다. 내가 오규원을 좋아한 이유가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는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에서 제기된 ‘낯설게하기’는 대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하나로는 꽃이 되지 않는 꽃’이 안개꽃에 대한 이수익의 관찰의 결과라면 전혀 낯설지 않은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움이다. 셋째는 서사성이다. 시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산문적 요소이다. 역설적이지만 산문을 압축하고 운율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 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백석과 이용악은 물론 시의 내용이 주는 감동은 형식적인 측면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요소이다.

  어떤 요소로도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다만 어떤 측면에서든 기대 이하일 때 독자들은 본전 생각을 한다. 내게 김이듬의 시는 그렇게 읽혔다.

  이제 불이 필요하지 않은 시각

나는 겨울 저수지 냉정하고
신중한 빙판 검게 얼어붙은 심연
날카로운 스케이트 날로 나를 지쳐줘
한복판으로 달려와 꽝꽝 두드리다가
끌로 송곳으로 큰 구멍을 뚫어봐
생각보다 수심이 깊지 않을 거야
미끼도 없는 낚시대를 덥석 물고
퍼드덕거리며 솟아오르는 저 물고기 좀 봐
결빙을 풀고 나 너를 안을게


  이렇게 행간을 건너뛰는 의미망에 갇혀 파닥거리는 물고기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감동과 울림이 전해지지 않는다. 나를 위해 시를 써 줄 시인은 없겠지만 공감의 진폭과 울림이 큰 시들을 여전히 기다린다. 작가의 독자의 팽팽한 긴장의 끈은 항상 적당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비록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 시대가 오더라도 말이다.


071225-1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가 결혼도 하시기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늦은 결혼 탓도 있겠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나의 아쉬움은 나이 들면서 커져만 간다. 그 분들에 대한 추억도 없고 기억도 없다. 외할아버지는 자주 뵙지 못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돌아가셨고 결코 살갑지 않았던 외할머니는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외삼촌과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개인적으로 가족의 울타리와 그 안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을 되짚어 보게 하는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는 여성과 가족에 관한 소설이다. 그것도 중년을 넘긴 아낙들의 이야기다. 여성 중심이며 가족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에서 벌어지는 일상사의 보고서에 가까울만큼 친근하고 세심하다. 그 마음의 갈피갈피를 잡아내고 표현해내는 솜씨는 오랜 시간 동안 공력을 쏟아본 소설가의 내공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박완서의 소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위적 허구의 세계를 뛰어 넘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의 세계와 일상사를 샅샅이 훑어내는 입담은 글말보다 구전문학에 가깝다. 구수하고 정겹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옛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막힘없는 솜씨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불편하거나 작위적인 느낌이 없다는 것은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다. 독자의 취향과 소설에 대한 편견으로 읽는 재미와 감각이 조금씩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21세기의 화두를 환경과 여성이라고 했던 이윤기와 최열의 대담이 생각난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의 그림자에 대해. 항상 물과 공기처럼 불편을 최소하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세심하게 살펴주는 그들의 손길의 고마움과 섬세한 마음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딸과 아내,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름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시선은 따스하다.

  작가의 개인적 이력이나 늦은 등단에 대한 관심들이 작품 세계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설집을 내는 모습은 분명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며 소설가로서 영광스런 일이다. 꾸준한 독자와 작품 세계에 대한 자신감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박완서의 소설은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과 빈틈없는 관찰로 빚어내는 천의무봉처럼 물흐르듯 자연스런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긴장과 건너기 힘든 깊은 골짜기들을 상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또 그것을 억지스런 설정이나 상황이 아니라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서술하듯이 막힘이 없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치 그런 느낌으로 읽히는 단편들이다.

  철저하게 1인칭 여성 화자의 입장에서 남편과 아들과 며느리와 손주들과 주변의 친구들을 대상으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대단히 사적인 영역에 머문다. 사회적 환경과 인물들로 대표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화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특수한 관계로 보기에는 어딘지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박완서 소설이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닐까 싶다.

  이제 어쩌면 그녀의 소설집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랍 문화권에서 판매 금지 처분을 받은 마르케스의 <슬픈 창녀들의 추억>처럼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을 관조하는, 하지만 자유로운 작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안목과 사고의 폭이 지니는 한계는 어느 작가에게나 작용한다. 박완서도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한계는 있다. 하지만 나처럼 그의 소설을 어머니를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다. 친구와 마을 문고 책장 한쪽 벽면 먼저 읽기 내기를 했다는 어머니의 추억도 박완서의 그것들과 유사한 점이 많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 남자네 집’과 같은 추억은 없었을까. 촛불 밝힌 식탁의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셨을 텐데.  상황과 입장은 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에서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체험을 객관화시키고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9편의 단편은 실버 세대의 문학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한 작품들이다. 후반생에 대한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상들과 고민들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 어차피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단면들은 시대와 나이를 불문하고 그 순간에는 가장 격렬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도 없는 노년의 내 모습과 고민들은 어떤 것들일 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순간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인생사에 대한 깊은 성찰도 반성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저 나와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나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만이 오롯이 남겨지는 것은 멀리 혹은 가까이, 넓게 혹은 좁게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이 책을 들고 가야겠다. 어머니께.


071207-1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근원수필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
김용준 지음 / 범우사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마지막으로 책을 선물 받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선물에 익숙치 않은 탓도 있겠지만 나와 책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오랜만에 책 한 권을 받아 들고 감회가 새로웠다.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근원近園은 김용준의 호를 말한다. 선부(善夫), 검려(黔驢), 우산(牛山), 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등 자신의 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책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참으로 담박하고 진솔하며 고졸한 맛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시는 지용 소설은 태준이라 했다지만 김용준의 글은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간결하고 격조 높은 문장의 힘이 느껴진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고 낭랑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개성이 가장 강하게 그리고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 수필이다.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이며 자유스러운 만큼 부담스럽고 치우치기 쉬운 형태의 글을 ‘수필’이라 칭한다면 근원수필은 그 본령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수필을 읽지 않는 이유는 대개의 경우 자신의 사념과 소소한 일상사에 대한 단상이거나 감상적인 멋 부리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남의 글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공감하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용준의 글은 60여 년 전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된다.
분량에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결한 맛을 잃지 않으며 차고 넘치지도 않고 부족해서 미흡하지도 않다. 딱 적당하게 그 만큼만 말하는 절제의 미덕과 중국의 고전 등 해박한 지식,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따뜻한 감수성은 글을 읽는 맛의 절정을 느끼게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간다는 일의 행복과 사람과 사물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의 행복을 고스란히 간직한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올해 놓칠 뻔 했던 귀중한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몰라서 읽지 못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새삼 깨달았고 책의 숲을 거닐며 얻게 되는 즐거움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되었다.

  2004년에 수능을 치렀던 수험생들은 언어영역에서 만났던 지문으로 기억할 것이다. 김용준의 ‘게’가 출제되었기 때문이다. 2000년에 출제되었던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가 보다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월북했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용준은 1904년에 태어나 1950년 6.25가 발발해 9월에 월북해서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내고 1967년에 세상을 등졌다. 서울대 미대가 만들어질 때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의 영향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 안타까운 또 하나의 예술가였다. 백석, 정지용, 이용악, 김기림과 같은 시인들과 이태준, 홍명희, 이기영, 박태원 등의 소설가를 만나게 된 것은 1988년 이후의 일이다. 해금 작가에 대한 관심과 조명은 이제 불과 20년이 지났을 뿐이다. 아픈 역사와 과거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작가로 나는 김용준을 기억할 것이다.

  상황 속의 존재인 인간은 글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한다. 생활 속에서 글쓰기가 보편화된 21세기에 과연 글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전범이 될 만한 모델이 필요하다.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좋은 책으로 추천할 수 있겠다.

  오늘 윤대녕의 칼럼을 읽다가 토머스 울프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에서 인용한 “더 큰 사랑을 찾기 위하여 지금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어버릴 것. 더 큰 땅을 찾기 위하여 지금 그대가 딛고 있는 땅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구절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만한 문장을 발견했다. 잃어야 얻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으며 얼마나 겸손하게 사람과 사물을 대하고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스스로에 대한 각성과 반성, 보다 깊은 사유와 성찰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항상 낮은 자세로 배우고 익히며 무엇보다도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뜨거운 열정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함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살아냈다.


071128-13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07-11-2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필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 반갑게 보관함에 담습니다. ^-^

sceptic 2007-11-29 23:28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추천해도 욕먹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글이야 개인적인 취향도 많이 작용하지만 저는 아주 즐겁게 읽었습니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335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겨울비에 젖은 낙엽만큼 처연해 보이는 것도 드물다. 심장을 태울 듯 타올랐던 붉은 단풍과 강렬한 노오란 단풍잎이 11월 겨울비에 젖어가는 저녁 어스름의 불빛들은 불행을 위장한다. 화려했던 시간들은 뒤에 두고 떠나는 아쉬움을 그나마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어둠이다. 낙화가 그러하듯이 첫사랑도 그러하다.

낙화, 첫사랑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삼십대 후반에 이른 시인의 목소리는 생의 한가운데 서 있는 위태로움과 희미한 깨달음들이 듬성듬성 뒤섞여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일반적인 시의 문법에서 조금 비켜 서 있다. 언어의 내밀한 조직들, 소리의 울림들이 잔잔하다. 어렵지 않은 단어들과 쉽게 닿는 문장들이 머리보다 먼저 가슴에 도달한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엘리어트의 말에 충실하다.

  여전히 시의 존재와 기능은 위태롭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는 낡은 유물처럼 식상해져 버렸다. 언어의 기능이 살아 있는 한 시를 읽는 사람과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은 존재한다. 이분법적 구분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시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이 마음들에 여유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부대끼고 속삭이기도 하다가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통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만큼 크지 않지만 작지 않은 진동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상황과 느낌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자신만의 몫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활이든 꿈이든, 현실이든 이상이든 관계없이. 어느 구석진 계절의 끝자락을 여미는 사람들의 가슴에 오롯이 전해질 수 있는 슬픔이 있다면 그녀의 시는 조용히 다가설 수 있겠다. 내 몸속에 잠든 이가 누구이든지 간에.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앞의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을 다른 방식으로 나누어 본다. 시를 읽는 사람과 시집을 읽는 사람. 그것은 왜 다른가? 한 편의 고운 시는 유행가 가사처럼 가슴에 스몄다가 모래위에 내린 비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가슴에 낙인을 찍어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한 권의 시집은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소리 없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참을성 있게 집중해야 한다. 낮은 목소리로 평화로운 오후의 햇살을 느끼게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에서 울부짖는 처절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다. 김선우의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는 그렇게 읽혔다. 큰 호흡과 느낌으로 한 권의 시집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표제작을 만난다. 대표 선수를 만나 한 판 겨뤄보려는 심사가 아니라 제목으로 선택된 시의 갈피들을 조금 더 샅샅이 훑어보게 된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꽃나무

꽃이 지고
누운 꽃은 말이 없고

딱 한 마리 멧새가
몸을 튕겨가는 딱 그만한 천지

하늘 겹겹 분분하다
낮눈처럼 그렇게

꽃이 눕고
누운 꽃이

일생에 단 한 번
자기의 밑을 올려다본다


  무엇을 노래하든 그것을 읽어내는 독자는 다른 음성으로 듣는다. 시의 운명은 그러하다. 내 곁에 누가 머물러 있는지 돌아보다가 두고 온 사람의 뒷모습만 안타깝게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처럼 이미 작가에게서 떠나온 시들은 수런거리며 독자에게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읽는 것은 시가 아니라 어쩌면 내 삶과 내 마음의 갈피들인지도 모르겠다. 창 밖에 천둥이 치고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을 보여주어도 나는 어둠 속에 내리는 겨울비의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거미

새벽잠 들려는데 이마가 간질거려
사박사박 소금밭 디디듯 익숙한 느낌
더듬어보니, 그다

무거운 나를 이고 살아주는
천장의 어디쯤에
보이지 않는 실끈의 뿌리를 심은 걸까

나의 어디쯤에 발 딛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발은 魂처럼 가볍고
가벼움이 나를 흔들어
아득한 태풍이 시작되곤 하였다

내 이마를 건너가는 가여운 사랑아
오늘 밤 기꺼이 너에게 묶인다


  시인은 생활인이고 문명인이며 언어의 노예이다. 모든 존재 이유인 말들을 거미줄처럼 뱉어내야 하는 천형. 안타까움보다 더 깊은 마음으로 가끔씩만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진다. 말해버리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너에게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나 괜찮습니다’라고.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어 창 밖 어둠 속에 눈길을 건넨다.

‘너 괜찮은 거니?’라고.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중에서



071123-1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원인에 따라 결과가 명확하다면 나는 인생을 좀 더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말이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원인이 있을까? 그걸 알면 문제가 해결되거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까? 행복은 앎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오늘도 끊임없는 의문부로로 가득한 인생을 기웃거린다.

  소설이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장르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더 어렵다. 소설 뒤에 ‘나부랭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한다. 소설 나부랭이나 읽을 시간이 있으면 다른 걸 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읽고 나서 인생이 바뀌거나 먹먹한 감동에 목이 메이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은 호기심에 대한 욕망을 주체하기 힘든 사람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이 궁금하거든 뒷담화에 골몰하지 말고 소설을 읽으면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 중 하나일 수도 있고, 하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인물들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 소설이다. 살아 숨쉬는 활자들 속을 헤집다 보면 현실은 환상이 되고 현실은 하나의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아름다움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언어 자체가 드러내는 명징한 광휘. 이것은 보통 시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즐거움이다. 말들이 수런거리고 그 말들이 만들어내는 풍성함과 흥성스러움은 말들의 잔치이다. 소설이 전하는 즐거움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 따라 말들을 풀어놓고 조이고 다듬는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소설가 한강의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는 독자들에게 아름다움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구차한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음식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거식증은 그냥 생기는 병이 아닐 것이다.

  영혜는 꿈을 꾼다. 모든 것은 꿈 때문이다. 지나치게 평범해서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을 조심하라. 꿈에 드러난 메시지는 환상이며 비현실적이지만 무의식에 내재된 또 다른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 문명을 가꾸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감추어진 야성과 본능적인 충동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통로가 차단된 채 길들여지고 현실에 매몰되어가는 우리들에게 영혜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어떤 것에든 열정을 쏟고 싶지만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풍경들이 고기에 대한 거부로 표현된다. 채식만을 고집하겠다는 이데올로기나 신념이 아니라 단순히 고기와 냄새에 대한 혐오감이 생기면서 그녀는 달라진다. 잠이 줄어들고, 고기를 못 먹는 차원을 넘어 음식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거식증은 삶을 포기하겠다는 그녀의 선언처럼 들린다. 자살로 귀결되는 생의 허무주의가 아니라, 생명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진다. 정신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통해 삶을 반성한다는 것이 기괴할 수도 있겠으나 생각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몽고반점’은 2005년에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연작은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으로 이어지는 연작의 하나였다. 세 편의 소설이 정교하게 얽혀있다. 동일한 등장인물이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혜와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 그리고 인혜의 목소리를 통해 서로 다른 소통 방식을 선택한다. 물론 이 소통은 인물들 간의 소통이기도 하지만 작가와 독자와의 소통이기도 하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고 차라리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강의 다른 소설들을 읽지 않아 그녀의 소설에 대해 속단하긴 어렵다. 쓴 것보다 써야할 것이 많은 작가라고 믿고 싶다. 후기에 썼듯이 볼펜으로 자판을 눌러가며 한 자씩 꼽씹었을 작가의 수고는 화려한 문장이 아니라 담백하고 속 깊은 영혼의 한 자락을 짚어내고 있다.

  오래된 친구와 기분 좋은 술 한 잔, 그리고 긴 수다 - 참치 살점을 들다가 문득, 영혜가 생각났었다. 그리고 또 잊어버리겠지만 그녀가 거부한 것이 고기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볼 때마다 문득 그녀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채식주의는 생명에 대한 외경과 거리가 멀다. 채식도 생명이니까.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에 굳이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채식주의자>는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심연으로부터 전해지는 고주파의 신호음과 유사한 느낌이다. 교신할 수 없다면 쉽게 다음을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도 어쩌면 끊임없이 누군가와의 교신을 시도하며 보이지 않는 신호를 보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혹은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간에 말이다.


071122-1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