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수필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
김용준 지음 / 범우사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마지막으로 책을 선물 받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선물에 익숙치 않은 탓도 있겠지만 나와 책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오랜만에 책 한 권을 받아 들고 감회가 새로웠다.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근원近園은 김용준의 호를 말한다. 선부(善夫), 검려(黔驢), 우산(牛山), 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등 자신의 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책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참으로 담박하고 진솔하며 고졸한 맛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시는 지용 소설은 태준이라 했다지만 김용준의 글은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간결하고 격조 높은 문장의 힘이 느껴진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고 낭랑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개성이 가장 강하게 그리고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 수필이다.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이며 자유스러운 만큼 부담스럽고 치우치기 쉬운 형태의 글을 ‘수필’이라 칭한다면 근원수필은 그 본령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수필을 읽지 않는 이유는 대개의 경우 자신의 사념과 소소한 일상사에 대한 단상이거나 감상적인 멋 부리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남의 글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공감하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용준의 글은 60여 년 전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된다.
분량에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결한 맛을 잃지 않으며 차고 넘치지도 않고 부족해서 미흡하지도 않다. 딱 적당하게 그 만큼만 말하는 절제의 미덕과 중국의 고전 등 해박한 지식,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따뜻한 감수성은 글을 읽는 맛의 절정을 느끼게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간다는 일의 행복과 사람과 사물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의 행복을 고스란히 간직한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올해 놓칠 뻔 했던 귀중한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몰라서 읽지 못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새삼 깨달았고 책의 숲을 거닐며 얻게 되는 즐거움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되었다.

  2004년에 수능을 치렀던 수험생들은 언어영역에서 만났던 지문으로 기억할 것이다. 김용준의 ‘게’가 출제되었기 때문이다. 2000년에 출제되었던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가 보다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월북했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용준은 1904년에 태어나 1950년 6.25가 발발해 9월에 월북해서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내고 1967년에 세상을 등졌다. 서울대 미대가 만들어질 때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의 영향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 안타까운 또 하나의 예술가였다. 백석, 정지용, 이용악, 김기림과 같은 시인들과 이태준, 홍명희, 이기영, 박태원 등의 소설가를 만나게 된 것은 1988년 이후의 일이다. 해금 작가에 대한 관심과 조명은 이제 불과 20년이 지났을 뿐이다. 아픈 역사와 과거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작가로 나는 김용준을 기억할 것이다.

  상황 속의 존재인 인간은 글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한다. 생활 속에서 글쓰기가 보편화된 21세기에 과연 글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전범이 될 만한 모델이 필요하다.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좋은 책으로 추천할 수 있겠다.

  오늘 윤대녕의 칼럼을 읽다가 토머스 울프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에서 인용한 “더 큰 사랑을 찾기 위하여 지금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어버릴 것. 더 큰 땅을 찾기 위하여 지금 그대가 딛고 있는 땅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구절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만한 문장을 발견했다. 잃어야 얻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으며 얼마나 겸손하게 사람과 사물을 대하고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스스로에 대한 각성과 반성, 보다 깊은 사유와 성찰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항상 낮은 자세로 배우고 익히며 무엇보다도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뜨거운 열정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함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살아냈다.


071128-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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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11-2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필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 반갑게 보관함에 담습니다. ^-^

sceptic 2007-11-29 23:28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추천해도 욕먹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글이야 개인적인 취향도 많이 작용하지만 저는 아주 즐겁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