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가 결혼도 하시기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늦은 결혼 탓도 있겠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나의 아쉬움은 나이 들면서 커져만 간다. 그 분들에 대한 추억도 없고 기억도 없다. 외할아버지는 자주 뵙지 못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돌아가셨고 결코 살갑지 않았던 외할머니는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외삼촌과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개인적으로 가족의 울타리와 그 안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을 되짚어 보게 하는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는 여성과 가족에 관한 소설이다. 그것도 중년을 넘긴 아낙들의 이야기다. 여성 중심이며 가족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에서 벌어지는 일상사의 보고서에 가까울만큼 친근하고 세심하다. 그 마음의 갈피갈피를 잡아내고 표현해내는 솜씨는 오랜 시간 동안 공력을 쏟아본 소설가의 내공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박완서의 소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위적 허구의 세계를 뛰어 넘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의 세계와 일상사를 샅샅이 훑어내는 입담은 글말보다 구전문학에 가깝다. 구수하고 정겹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옛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막힘없는 솜씨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불편하거나 작위적인 느낌이 없다는 것은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다. 독자의 취향과 소설에 대한 편견으로 읽는 재미와 감각이 조금씩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21세기의 화두를 환경과 여성이라고 했던 이윤기와 최열의 대담이 생각난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의 그림자에 대해. 항상 물과 공기처럼 불편을 최소하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세심하게 살펴주는 그들의 손길의 고마움과 섬세한 마음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딸과 아내,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름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시선은 따스하다. 작가의 개인적 이력이나 늦은 등단에 대한 관심들이 작품 세계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설집을 내는 모습은 분명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며 소설가로서 영광스런 일이다. 꾸준한 독자와 작품 세계에 대한 자신감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박완서의 소설은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과 빈틈없는 관찰로 빚어내는 천의무봉처럼 물흐르듯 자연스런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긴장과 건너기 힘든 깊은 골짜기들을 상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또 그것을 억지스런 설정이나 상황이 아니라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서술하듯이 막힘이 없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치 그런 느낌으로 읽히는 단편들이다. 철저하게 1인칭 여성 화자의 입장에서 남편과 아들과 며느리와 손주들과 주변의 친구들을 대상으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대단히 사적인 영역에 머문다. 사회적 환경과 인물들로 대표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화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특수한 관계로 보기에는 어딘지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박완서 소설이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닐까 싶다. 이제 어쩌면 그녀의 소설집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랍 문화권에서 판매 금지 처분을 받은 마르케스의 <슬픈 창녀들의 추억>처럼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을 관조하는, 하지만 자유로운 작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안목과 사고의 폭이 지니는 한계는 어느 작가에게나 작용한다. 박완서도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한계는 있다. 하지만 나처럼 그의 소설을 어머니를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다. 친구와 마을 문고 책장 한쪽 벽면 먼저 읽기 내기를 했다는 어머니의 추억도 박완서의 그것들과 유사한 점이 많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 남자네 집’과 같은 추억은 없었을까. 촛불 밝힌 식탁의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셨을 텐데. 상황과 입장은 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에서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체험을 객관화시키고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9편의 단편은 실버 세대의 문학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한 작품들이다. 후반생에 대한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상들과 고민들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 어차피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단면들은 시대와 나이를 불문하고 그 순간에는 가장 격렬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도 없는 노년의 내 모습과 고민들은 어떤 것들일 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순간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인생사에 대한 깊은 성찰도 반성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저 나와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나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만이 오롯이 남겨지는 것은 멀리 혹은 가까이, 넓게 혹은 좁게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이 책을 들고 가야겠다. 어머니께. 071207-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