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원인에 따라 결과가 명확하다면 나는 인생을 좀 더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말이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원인이 있을까? 그걸 알면 문제가 해결되거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까? 행복은 앎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오늘도 끊임없는 의문부로로 가득한 인생을 기웃거린다.

  소설이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장르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더 어렵다. 소설 뒤에 ‘나부랭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한다. 소설 나부랭이나 읽을 시간이 있으면 다른 걸 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읽고 나서 인생이 바뀌거나 먹먹한 감동에 목이 메이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은 호기심에 대한 욕망을 주체하기 힘든 사람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이 궁금하거든 뒷담화에 골몰하지 말고 소설을 읽으면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 중 하나일 수도 있고, 하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인물들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 소설이다. 살아 숨쉬는 활자들 속을 헤집다 보면 현실은 환상이 되고 현실은 하나의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아름다움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언어 자체가 드러내는 명징한 광휘. 이것은 보통 시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즐거움이다. 말들이 수런거리고 그 말들이 만들어내는 풍성함과 흥성스러움은 말들의 잔치이다. 소설이 전하는 즐거움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 따라 말들을 풀어놓고 조이고 다듬는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소설가 한강의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는 독자들에게 아름다움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구차한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음식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거식증은 그냥 생기는 병이 아닐 것이다.

  영혜는 꿈을 꾼다. 모든 것은 꿈 때문이다. 지나치게 평범해서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을 조심하라. 꿈에 드러난 메시지는 환상이며 비현실적이지만 무의식에 내재된 또 다른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 문명을 가꾸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감추어진 야성과 본능적인 충동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통로가 차단된 채 길들여지고 현실에 매몰되어가는 우리들에게 영혜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어떤 것에든 열정을 쏟고 싶지만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풍경들이 고기에 대한 거부로 표현된다. 채식만을 고집하겠다는 이데올로기나 신념이 아니라 단순히 고기와 냄새에 대한 혐오감이 생기면서 그녀는 달라진다. 잠이 줄어들고, 고기를 못 먹는 차원을 넘어 음식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거식증은 삶을 포기하겠다는 그녀의 선언처럼 들린다. 자살로 귀결되는 생의 허무주의가 아니라, 생명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진다. 정신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통해 삶을 반성한다는 것이 기괴할 수도 있겠으나 생각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몽고반점’은 2005년에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연작은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으로 이어지는 연작의 하나였다. 세 편의 소설이 정교하게 얽혀있다. 동일한 등장인물이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혜와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 그리고 인혜의 목소리를 통해 서로 다른 소통 방식을 선택한다. 물론 이 소통은 인물들 간의 소통이기도 하지만 작가와 독자와의 소통이기도 하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고 차라리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강의 다른 소설들을 읽지 않아 그녀의 소설에 대해 속단하긴 어렵다. 쓴 것보다 써야할 것이 많은 작가라고 믿고 싶다. 후기에 썼듯이 볼펜으로 자판을 눌러가며 한 자씩 꼽씹었을 작가의 수고는 화려한 문장이 아니라 담백하고 속 깊은 영혼의 한 자락을 짚어내고 있다.

  오래된 친구와 기분 좋은 술 한 잔, 그리고 긴 수다 - 참치 살점을 들다가 문득, 영혜가 생각났었다. 그리고 또 잊어버리겠지만 그녀가 거부한 것이 고기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볼 때마다 문득 그녀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채식주의는 생명에 대한 외경과 거리가 멀다. 채식도 생명이니까.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에 굳이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채식주의자>는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심연으로부터 전해지는 고주파의 신호음과 유사한 느낌이다. 교신할 수 없다면 쉽게 다음을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도 어쩌면 끊임없이 누군가와의 교신을 시도하며 보이지 않는 신호를 보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혹은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간에 말이다.


07112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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