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창비시선 284
신경림 지음 / 창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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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은 흐른다.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모든 순간을 과거로 만들어버리는 시간 앞에 인간은 무력하다. 어떤 사람도 결국 죽을 것이라는 대전제만이 진실인 것 같다. 소년이었을 때 만났던 시인의 새 시집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1935년생인 신경림 시인의 나이 때문이었다. 이제 70이 넘은 시인의 눈을 빌어 세상을 바라본다. 그가 살아온 생애와 쌓여온 시간들 속에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박완서나 이청준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 든 시인의 눈은 부드러운 통찰과 객관적 거리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열정이나 분노, 흥분과 절망의 극단적 감수성은 좀체 찾아볼 수 없고 달관의 경지에 이른 듯한 깨달음과 통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삶은 이런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하나의 장면이나 태도를 통해 짐작해 볼 뿐이다. 이영희 선생님이 80이 넘어 임헌영과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지적 활동의 종료를 선언했듯 작가들도 그런 때나 나이가 있을 것이다.

  마치 죽음을 예견하듯 신경림의 표제작은 그렇게 이별 노래를 듣는 것 같다. 별과 달과 해 그리고 모래밖에 본 적이 없는 낙타의 모습은 시의 오솔길만을 고집스럽게 걸어온 시인의 모습일 것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한국 현대시의 진경과 감동은 낙타처럼 타박타박 모래 사막을 걸어온 시인의 삶에 대한 당연한 결과물이다.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길음 시장 부근에서 살던 무렵 실제 경험을 노래했던 ‘가난한 사랑 노래’처럼 시인의 마지막까지 ‘가장 가엾은 사람’과 길동무가 되겠다고 한다. 낮은 곳에서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잃지 않았고 현실의 모순과 울분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모습은 여전하다. 삶의 길과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땅이 좋아 전국 요지의 땅을 골라 사들이는 장관 후보자도 있고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사명감이나 책임감이 아니라 그곳에 눈길이 도달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려는 노력은 독자들에게 감동으로 전해졌다.

  조금 다른 모습으로 노래하고 있지만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시인의 관심은 여전히 모순된 현실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빛날 것이다. 이념 대립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하지만 계층과 계급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자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념보다 더욱 무서운 대상이 무엇인지 그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미래를 예견하지 못한다면 더 큰 재앙이 닥칠 것이다.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 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었다 해도


  소멸과 이별에 대한 시인의 목소리가 안타깝다. 눈은 사라진다. 눈과 비는 다르다. 형태와 물적 변화가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눈으로 표현된 ‘나’의 인생은 순환론으로 이해한다. 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별이 되어 또 다시 은가루로 흩날려도 서러워하지 않는 다는 말은 생에 대한 자신감으로 보인다. 잘 살았다는 당당함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존재론적 소멸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서러움이 아니라 하나의 꿈일 뿐이다.

  <낙타>에서 시인은 다양한 내용을 선보인다. 자연에 대한 관찰과 감상, 여행에 대한 기록 등 시선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감각과 상념들이 정갈하게 표현된다. 낮은 목소리로 편안하게 토해내는 시편들이 결코 단순하거나 이완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누구나 쉽게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식상함이라면 굳이 신경림의 시를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들리지 않아 아름답고 보이지 않아 아름답다.
소란스러운 장바닥에서도 아름답고,
한적한 산골 번잡한 도시에서도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그러나
드러나는 순간.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다움을 잃는다.
처음 드러나 흉터는 더 흉해 보이고
비로소 보여 얼룩은 더 추해 보인다.
힘도 잃고 꿈도 잃는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숨어 있을 때만,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 숨어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능력은 아닐까?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재능 또한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거대함에 감탄과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는 동안 시인은 부지런히 숨어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아왔다. 그것이 신경림 시의 특징이다.

  이 시집에서는 ‘나는 왜 시를 쓰는가’라는 시인의 에세이가 해설을 대신하고 있다. 새삼스레 그의 시를 해설하고 비평하는 것보다 그의 육성을 통해 그가 살아온 생과 시의 길을 들여다보는 감동이 더욱 컸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늙은 시인들의 새 시집들을 조심스레 열어간다.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경외의 마음으로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모든 것들에 감사한다. 신경림의 새 시집은 낙타처럼 그렇게 타박타박 우리들 가슴 속으로 걸어들어 온다.


0803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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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行 야간열차 문학과지성 시인선 34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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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아침은 찬란하기만 하다.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눈을 뜨며 살아있음을 감사할 때가 있다. 이른 새벽에 헤어지는 친구의 뒷모습이 쓸쓸해보이기도 하지만 눈을 뜨면 또 하루가 시작된다. 현실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거나 외롭거나 혹은 침묵하거나.

  황인숙의 <리스본行 야간열차>는 다양한 장면을 보여준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장면들, 삶의 구석구석을 헤집는 눈과 날선 감각들, 둥글고 부드러운 시선보다 음울하고 어두운 감각이 신선하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장면과 사물은 색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의 본질은 언제나 대상과 시선 그리고 언어에 놓여있다고 믿는다. 시인의 시선은 남들과 다르지 않다. 다만 같은 대상에서 무엇을 읽어내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 독자들은 그의 시선을 따라갈 뿐이다. 사소함에서 위대함을, 무심한 것에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은 삶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방법은 다양하다. 삶의 형태만큼이나 각양각색의 모습들을 어떤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시인의 개성이고 시의 특징이 된다.  

산오름

친구와 북한산 자락을 오른다
나는 숨이 찰 정도로 빨리 걷고
친구는 느릿느릿,
그의 기척이 이내 아득하다
나는 친구에게 돌아가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기를 몇 번, 기어이 친구가 화를 낸다
산엘 왔으면, 나무도 보고 돌도 보고
풀도 보고 구름도 보면서 걷는 법이지
걸어치우려 드느냐고
아하!
친구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걸으려는데
어느 새 획획 산을 오르게 되는 나다
땀을 뚝뚝 흘리며 바위에 앉아 내려다보면
멀리서 친구가 느릿느릿 올라온다
나무도 데리고 돌도 데리고
풀도 데리고 구름도 데리고.

  여전히 느린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욕심도 없고 큰 소리로 말하지도 않는다. 북한산에서 도봉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산과 하늘을 무심하게 보고 있다. 그는 나무도 돌도 풀도 구름도 데리고 산에 오르리라. 아득한 거리에 있는 사람을 재촉한다고 해서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보폭과 속도가 있다. 앞과 뒤가 아니라 걷는 목적과 태도가 다른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가끔씩 무릎을 치게 되는 것이다.

여름 저녁

조금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을 듯한
먼 하늘에
태양이 벗어놓은 허물
둥실 떠 있다
조금쯤 바람 빠진 듯
맥없이 부푼 주홍빛 풍선
맥놀이 퍼지는 하늘

“그래, 이대로 이렇게 사는 거지, 뭐!”
버럭 중얼거리며
어리둥절하다
뭘?
몰라, 가슴 쓰리다.

  황인숙의 시의 특징을 한 마디로 잡아내기는 어렵다. 아니 어느 누구의 시도 마찬가지다. 군데군데 가슴을 쓰리게 하는 복병이 숨어 있는 삶처럼 그 혹은 그녀가 그러하듯이 이대로 이렇게 사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만족과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이다.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독자의 모습이다. 이대로가 아니라 다른 삶을 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선문답하듯 모른척 외면하기도 한다. 삶을 계속된다. 여름 저녁에도.

카페 마리안느

“누군 저 나이에 안 예뻤나!”
스무 살짜리들을 보며 중년들이 입을 모았다
난,
나는 지금 제일 예쁜 거라고 했다
다들 하하 웃었지만
농담 아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앞날이 훠언한
못생긴 내 청춘이었다.


  내 청춘은 못생겼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청춘은 어떠했을까? 앞날은 훤하지만 눈앞은 캄캄했던 청춘의 뒷골목을 회상한다. 나에게 가장 아름다웠던 나이는? 그것도 지극히 주관적이겠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확인하고 뒤돌아보는 시간을 이렇게 잠깐씩 가질 수 있는 것은 황인숙의 시가 아니라도 독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

  청춘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카페도 있겠고, 이쁘고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절도 있겠지만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는 것은 현재를 비춰보기 위함이다. 과거와 미래의 연속선상에서 현재는 찰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나이 들어감에 따라 세상은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청춘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사라져간다.

  동네 고양이에 대한 시인의 애정과 관찰로 만들어 낸 시편들이 읽을만하다.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고양이는 시인이 되고 시인은 고양이가 된다. 언어는 매개가 되어 진경을 선보이고 독자들은 순간 쏟아지는 졸음에 고개를 떨군다.

깊은 졸음

뒤로도 양옆으로도
벽을 훑내리는 비바람 소리
방충망에 걸러져
방 안 깊숙이 들이치는 빗가루들
등덜미에 잔소름으로 맺힌다
산란한 빗소리
속수무책.

  산란한 빗소리에 대상과 목적 없이 속수무책이라는 사자성어로 끝내버린 ‘깊은 졸음’은 정말 속수무책이다. 그 빗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 빗소리를 들으며 외로운 섬처럼 떠 있거나 흔들리는 사람들의 가슴은 속수무책이다.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맡기거나 상황을 즐기는 것 뿐이다. 졸음처럼 쏟아지는 빗소리를 가만히 들어볼 밖에.


080219-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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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2-1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보관함에 담아둔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못 봤습니다.
덕분에 얼른 사 읽어야겠다 생각하고 가네요.

sceptic 2008-02-19 21:16   좋아요 0 | URL
천천히, 즐겁게 음미하세요...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나딘 고디머 엮음, 이소영.정혜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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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와 역사를 달리하는 소설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인류 보편적 가치나 공통 관심사를 찾아내는 일은 어려우면서 쉬운 일이다. 문학이 인간의 정서와 삶의 모습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소설가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생활인이라는 전제가 가능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글로 써야하는 것이 소설가의 의무이자 한계이다.

  남아공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나딘 고디머는 AIDS라는 질병을 매개로 전세계 소설가들의 단편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AIDS 질병 퇴치를 위한 기금 마련이다. 소설책의 판매 수익금은 전액 AIDS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쓰인다. 다섯 명의 노벨 문학상을 포함해서 스물 한 명의 소설가는 이에 동참했고 자신의 작품 중 책의 제목처럼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아서 밀러, 가브리엘 마르케스, 살만 루슈디, 주제 사라마구, 귄터 그라스, 존 업다이크, 미셀 투르니에, 수전 손택, 오에 겐자부로 등 살아있는 세계 문학의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기획물의 경우 잡탕찌개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 우려가 있다. 예를 들어 시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모아 책을 낸다. 그런 책은 나도 몇 권 쯤 낼 수 있지만 시를 고르는 안목과 개인적인 감상과 해설이 기존 작가의 권위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크게 의미가 없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책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다만 책이 가지는 선한 의도와 모여 있는 소설가들이 주는 무게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었다. 하나 하나의 단편들은 잘 차려진 뷔페처럼 특별한 맛을 보여준다. 너무 짧아 맛을 보기도 전에 다른 요리로 넘어가는 아쉬움이 있지만 각각의 단품들이 품어내는 향기와 빛깔은 먹을만 하다. 그러고 나면 전체적인 조화의 문제가 남는다. 제목처럼 어떤 특별한 이야기나 한 생을 통틀어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이야기들로만 여겨질 수 없는 이야기도 많다. 제각각 독특한 소재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쉽게 하나의 주제나 특징으로 묶여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 같다.

  4천만 명에 이르는 AIDS 환자 중 3분의 2 가량이 아프리카에 몰려있다. 생활환경과 문화 수준의 발달 정도는 자본과 직결된다. 이제 자본은 건강이며 지식이고 희망이며 꿈이 되어 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책 한 권을 사서 몇 푼의 돈이 그들의 치료 비용으로 사용되는지 보다 항상 그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며 작은 실천에 옮기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스물 한 명의 작가들도 모두 한 마음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자식 같은 단편 하나씩을 내놓은 마음들이 소중해 보인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납의 시대’, 귄터 그라스의 ‘증인들’, 치누아 아체베의 ‘설탕쟁이’, 나딘 고디머의 ‘최고의 사파리’는 사회성 짙은 작품들로 시대의 아픔이나 역사적 체험들을 통해 지나간 시간들 혹은 현재의 고통들을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스럽게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어떤 시대, 어떤 환경이든 작가는 늘 문제적 상황들에 대한 고민과 동시대인들의 아픔에 대해 관찰하고 그것을 잘 표현해 낼 줄 아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는 평범한 생각을 해 본다.

  이에 반해 아서 밀러의 ‘블도그’, 하니프 쿠레이시의 ‘마침내 만나다’는 현대인들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문제들을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에 반해 재밌고 흥미있는 소재로 이 책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다른 작가의 작품들도 신선하고 독특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기억나는 몇 편의 작품들이다. 개인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사회문화적 환경이 다른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하나씩 음미하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소설은 현실의 고발이거나 생활 속에 숨겨진 삶의 은유이거나 역사적 반성이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일 수 있다. 소설의 기능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울고 웃고 눈물을 흘리거나 꿈을 꾼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잡다한 단편들의 묶음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며 읽어 볼 일이다. 오에 겐자부로를 제외하고는 동남아시아와 아랍권의 작가들이 빠져 있어 아쉽기는 하지만 지역적 균형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다함께 꿈꾸고 힘을 모으려는 의도와 나딘 고디머의 수고와 여러 작가들의 단편이 빛을 발하기만 한다면 문학 외적 요소나 의미를 차지하고서라도 우리는 재미있는 단편집과 만날 수 있게 된다.


080208-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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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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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기쁨보다 슬픔일 것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아픔과 고통, 후회와 절망으로 버무려져 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시나 소설로 기록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작가는 많지 않다. 쉽게 말해 사랑할 때 보다 이별 후에 우리는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고 내면의 풍경을 돌아보게 된다는 말이다.

  천운영의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지나치게 속물적인 제목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출발 자체가 고급문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유행가 가사같은 제목으로 일단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대중적이라고 해서 모두 비속하거나 예술적이라고 해서 전부 난해하고 어려운 것은 아니다. 모든 작가들의 영원한 숙제인 예술성과 대중성의 절묘한 조화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경지임에 틀림없다. 천운영의 소설집은 제목으로 판단컨대 충분히 대중적이다.

  이렇게 속단하고 책을 구입한다면 후회하기 십상이다. 그의 전작들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지만 처음 대하는 사람들이라면 애절한 연애소설 쯤으로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의도야 어찌됐든 천운영의 소설은 이전에 그녀가 보여주었던 이야기들에서 한 발 내딛고 있지만 커다란 범주에서 보면 그녀만의 색깔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있다. <바늘>과 <명랑>을 통해 내가 만났던 그녀의 모습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고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

  여러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충분한 주목을 받을 만큼 그녀의 소설들은 매혹적이었으며 특별했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글에 묻어나는 도발적인 시선 때문이었고 길들여지지 않은 외로움과 자유로운 상상 때문이었다. 여성성을 폭력적으로 드러냈던 단편들과 집요하고 치밀한 관찰의 결과물들을 세세한 묘사를 통해 보여줬던 단편들이 사실적이면서 독자들에게 불편한 진실들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실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일 수도 있고 감추어진 진실과 드러나지 않는 시선에 대한 거울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 작가이다. 천운영은 삶이 드러내는 우울과 고통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 끔찍하거나 잔인하기 때문에 눈감아 버리고 싶은 현실이 아니라 쉽게 감지되지 않는 영역들과 굳이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천착하는 태도는 그녀를 다른 작가들과 구별짓게 한다.

  단편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2007년 이상 문학상 수상 후보작으로 먼저 만났다. 노파의 누드를 찍는 소년을 본 작중 화자의 느낌은 지독한 편견과 독선에 대한 허망한 패배처럼 보인다. 카메라의 피사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의 시선은 프레임 안에 고정될 수밖에 없다. 장록 속에서 죽어가는 아이의 숨소리가 귀에 들릴 듯한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영과 육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부조리가 빚어내는 아픈 상처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누구나 장롱 속에 감추어 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눈물을 유발하는 요인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사용법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알리의 줄넘기’는 혼혈 2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1인칭 화자인 여자 아이 알리는 유머를 잃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한다. ‘내가 데려다 줄게’는 태생적 소수자인 알리와 다르게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사람이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자살을 결심한 사내를 통해 우울한 삶의 단면을 드러낸다. ‘노래하는 꽃마차’와 ‘후에’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부재를 통해 결핍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쓴 것’과 ‘백조의 호수’는 오히려 완벽해 보이는 인물의 이면을 들춰낸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거칠게 보이지만 그녀의 솜씨는 고통의 흔적이며 상처가 만들어낸 선명한 생채기의 모습이다.

  또 하나의 세계를 넘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도 있고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을 더욱 구체화할 수도 있겠지만 천운영은 이제 한 걸음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감추어진 욕망과 그것이 욕망인 줄도 모른 채 억압된 것들에 대한 고단한 열망들을 보여줬다면 이제 그것들을 안아줄 수 있는 여유과 작은 희망의 씨앗들을 심어야 하지 않을까? 버려진 것들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와 아픔을 보여줬으니 이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혹은 그 이전의 모습들이 간직한 꿈과 만나고 싶다.

  ‘바늘’에 찔릴 것 같은 예리함과 섬세함으로 무장한 그녀의 문장들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새로움과 특별함에 대한 강박증을 벗고 독자들도 그녀의 색다른 모습들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과 밝음의 세계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천운영의 소설은 별미와 같다. 그 독특함을 기대하는 독자이거나 또 다른 모습을 기대하는 독자이거나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대조적인 관점으로 읽혀지겠다.


08020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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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때 보았네
이윤기 지음 / 비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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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의 시 ‘그 꽃’ 전문이다. 시는 누구에게든 강렬하고 매혹적인 인상을 남긴다. 개인적인 친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윤기는 고은의 시 한 구절을 그의 책 제목으로 삼았다. 나이와 세월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짧은 시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생을 살만큼 살아본 경지가 아니면 쉽게 뱉어낼 수 없는 언어이다. 많은 함의를 지닌 시는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울림을 주고 변주된다. 승리와 패배, 젊음과 늙음, 기쁨과 슬픔 등 상승 곡선과 하강 곡선의 끊임없는 교차가 이루어지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는 어느 한 시기에서든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산문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산문집은 누구가 쓸 수 있고 쓰는 사람마다 다양하며 특별한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수필이라고 하는 가장 어려운 장르의 글을 가장 편안하게 묶어내는 방식이 바로 산문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잡다한 이야기와 번다한 말들로 개인의 감정을 포장하거나 거추장스런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포장지로 손쉽게 이용되는 산문집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남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 때도 있고 주관적 관점과 감상이 한 권 넘치게 흐르는 것도 반갑지 않다.

  다만 특정한 분야에서 혹은 색다른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줄 자신이 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혹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가 그러하다. 개인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산문집은 보다 보편적인 정서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들이나 공통 관심사를 가진 분야의 이야기들이라면 다른 어떤 책보다 재밌을 수 있다. 이윤기의 산문집 <내려올 때 보았네>는 고은의 시 구절을 제목으로 달았지만 탈속의 경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묶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리스 로마신화>나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역가로 먼저 떠오르는 이윤기는 소설가이면서 신화학자이기도 하다. 조희봉의 <전작주의자의 꿈>을 보면 이윤기에 대한 저자의 각별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소설과 산문은 물론 무려 200여권이 넘는 번역서를 모두 구해서 읽는 전작주의를 실현하려는 책벌레 조희봉의 특별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적인 부분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그가 번역서나 소설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산문집에서는 한 사람의 진솔한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솔직하지 못한 글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의 사건이나 평범한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저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확인한다. 이윤기도 마찬가지다. 생활인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여행을 통해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새로움이라는 측면보다 인간 이윤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한 분야를 올곧은 태도로 평생 투자한 사람의 여유와 신념을 엿볼 수 있는 이윤기는 뚜렷한 사회적 신념이나 문학에 대한 분명한 색깔을 드러내는 작가라고 볼 수 없다. 다만 책에서 언급한대로 명창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온전히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열정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작가이다. 글과 책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사람을 사귀었고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저자를 이렇게 표현한다면 일면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람을 어떻게 한 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와 생각이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공감대이며 소통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자세이다. 이윤기는 적어도 마음이 열린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것에 대한 소회나 일본에 대한 태도에서 개인적으로 못마땅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직한 태도는 눈여겨 배울 만한 부분이다. 동시대의 작가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각자가 모두 자신의 노래를 분명하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부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의 문을 열게 된다. 백인백색이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신념과 목적을 가지고 부른다면 일단 희망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만의 노래가 소음과 공해가 되지 않도록 나와 너의 관계를 즐겁게 하고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합창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나는 지금 올라가고 있는지 내려가고 있는지 조차 분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바람의 숨결과 나무의 손길, 꽃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나이 들어감의 증거가 아니라 또 다른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증거라고 믿는다.


080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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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2-01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가지고 있어요. 이윤기 할아버지 넘 좋아요.^^

sceptic 2008-02-02 12:17   좋아요 0 | URL
^^ 네...훌륭한 번역가로 기억에 남는 소설가로 남으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