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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때 보았네
이윤기 지음 / 비채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의 시 ‘그 꽃’ 전문이다. 시는 누구에게든 강렬하고 매혹적인 인상을 남긴다. 개인적인 친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윤기는 고은의 시 한 구절을 그의 책 제목으로 삼았다. 나이와 세월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짧은 시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생을 살만큼 살아본 경지가 아니면 쉽게 뱉어낼 수 없는 언어이다. 많은 함의를 지닌 시는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울림을 주고 변주된다. 승리와 패배, 젊음과 늙음, 기쁨과 슬픔 등 상승 곡선과 하강 곡선의 끊임없는 교차가 이루어지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는 어느 한 시기에서든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산문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산문집은 누구가 쓸 수 있고 쓰는 사람마다 다양하며 특별한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수필이라고 하는 가장 어려운 장르의 글을 가장 편안하게 묶어내는 방식이 바로 산문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잡다한 이야기와 번다한 말들로 개인의 감정을 포장하거나 거추장스런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포장지로 손쉽게 이용되는 산문집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남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 때도 있고 주관적 관점과 감상이 한 권 넘치게 흐르는 것도 반갑지 않다.
다만 특정한 분야에서 혹은 색다른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줄 자신이 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혹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가 그러하다. 개인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산문집은 보다 보편적인 정서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들이나 공통 관심사를 가진 분야의 이야기들이라면 다른 어떤 책보다 재밌을 수 있다. 이윤기의 산문집 <내려올 때 보았네>는 고은의 시 구절을 제목으로 달았지만 탈속의 경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묶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리스 로마신화>나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역가로 먼저 떠오르는 이윤기는 소설가이면서 신화학자이기도 하다. 조희봉의 <전작주의자의 꿈>을 보면 이윤기에 대한 저자의 각별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소설과 산문은 물론 무려 200여권이 넘는 번역서를 모두 구해서 읽는 전작주의를 실현하려는 책벌레 조희봉의 특별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적인 부분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그가 번역서나 소설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산문집에서는 한 사람의 진솔한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솔직하지 못한 글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의 사건이나 평범한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저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확인한다. 이윤기도 마찬가지다. 생활인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여행을 통해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새로움이라는 측면보다 인간 이윤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한 분야를 올곧은 태도로 평생 투자한 사람의 여유와 신념을 엿볼 수 있는 이윤기는 뚜렷한 사회적 신념이나 문학에 대한 분명한 색깔을 드러내는 작가라고 볼 수 없다. 다만 책에서 언급한대로 명창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온전히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열정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작가이다. 글과 책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사람을 사귀었고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저자를 이렇게 표현한다면 일면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람을 어떻게 한 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와 생각이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공감대이며 소통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자세이다. 이윤기는 적어도 마음이 열린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것에 대한 소회나 일본에 대한 태도에서 개인적으로 못마땅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직한 태도는 눈여겨 배울 만한 부분이다. 동시대의 작가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각자가 모두 자신의 노래를 분명하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부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의 문을 열게 된다. 백인백색이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신념과 목적을 가지고 부른다면 일단 희망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만의 노래가 소음과 공해가 되지 않도록 나와 너의 관계를 즐겁게 하고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합창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나는 지금 올라가고 있는지 내려가고 있는지 조차 분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바람의 숨결과 나무의 손길, 꽃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나이 들어감의 증거가 아니라 또 다른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증거라고 믿는다.
08020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