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기쁨보다 슬픔일 것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아픔과 고통, 후회와 절망으로 버무려져 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시나 소설로 기록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작가는 많지 않다. 쉽게 말해 사랑할 때 보다 이별 후에 우리는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고 내면의 풍경을 돌아보게 된다는 말이다.
천운영의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지나치게 속물적인 제목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출발 자체가 고급문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유행가 가사같은 제목으로 일단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대중적이라고 해서 모두 비속하거나 예술적이라고 해서 전부 난해하고 어려운 것은 아니다. 모든 작가들의 영원한 숙제인 예술성과 대중성의 절묘한 조화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경지임에 틀림없다. 천운영의 소설집은 제목으로 판단컨대 충분히 대중적이다.
이렇게 속단하고 책을 구입한다면 후회하기 십상이다. 그의 전작들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지만 처음 대하는 사람들이라면 애절한 연애소설 쯤으로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의도야 어찌됐든 천운영의 소설은 이전에 그녀가 보여주었던 이야기들에서 한 발 내딛고 있지만 커다란 범주에서 보면 그녀만의 색깔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있다. <바늘>과 <명랑>을 통해 내가 만났던 그녀의 모습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고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
여러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충분한 주목을 받을 만큼 그녀의 소설들은 매혹적이었으며 특별했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글에 묻어나는 도발적인 시선 때문이었고 길들여지지 않은 외로움과 자유로운 상상 때문이었다. 여성성을 폭력적으로 드러냈던 단편들과 집요하고 치밀한 관찰의 결과물들을 세세한 묘사를 통해 보여줬던 단편들이 사실적이면서 독자들에게 불편한 진실들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실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일 수도 있고 감추어진 진실과 드러나지 않는 시선에 대한 거울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 작가이다. 천운영은 삶이 드러내는 우울과 고통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 끔찍하거나 잔인하기 때문에 눈감아 버리고 싶은 현실이 아니라 쉽게 감지되지 않는 영역들과 굳이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천착하는 태도는 그녀를 다른 작가들과 구별짓게 한다.
단편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2007년 이상 문학상 수상 후보작으로 먼저 만났다. 노파의 누드를 찍는 소년을 본 작중 화자의 느낌은 지독한 편견과 독선에 대한 허망한 패배처럼 보인다. 카메라의 피사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의 시선은 프레임 안에 고정될 수밖에 없다. 장록 속에서 죽어가는 아이의 숨소리가 귀에 들릴 듯한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영과 육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부조리가 빚어내는 아픈 상처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누구나 장롱 속에 감추어 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눈물을 유발하는 요인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사용법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알리의 줄넘기’는 혼혈 2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1인칭 화자인 여자 아이 알리는 유머를 잃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한다. ‘내가 데려다 줄게’는 태생적 소수자인 알리와 다르게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사람이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자살을 결심한 사내를 통해 우울한 삶의 단면을 드러낸다. ‘노래하는 꽃마차’와 ‘후에’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부재를 통해 결핍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쓴 것’과 ‘백조의 호수’는 오히려 완벽해 보이는 인물의 이면을 들춰낸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거칠게 보이지만 그녀의 솜씨는 고통의 흔적이며 상처가 만들어낸 선명한 생채기의 모습이다.
또 하나의 세계를 넘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도 있고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을 더욱 구체화할 수도 있겠지만 천운영은 이제 한 걸음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감추어진 욕망과 그것이 욕망인 줄도 모른 채 억압된 것들에 대한 고단한 열망들을 보여줬다면 이제 그것들을 안아줄 수 있는 여유과 작은 희망의 씨앗들을 심어야 하지 않을까? 버려진 것들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와 아픔을 보여줬으니 이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혹은 그 이전의 모습들이 간직한 꿈과 만나고 싶다.
‘바늘’에 찔릴 것 같은 예리함과 섬세함으로 무장한 그녀의 문장들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새로움과 특별함에 대한 강박증을 벗고 독자들도 그녀의 색다른 모습들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과 밝음의 세계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천운영의 소설은 별미와 같다. 그 독특함을 기대하는 독자이거나 또 다른 모습을 기대하는 독자이거나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대조적인 관점으로 읽혀지겠다.
080203-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