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수요일, "관장님 잠깐 나와 보세요" 하는 직원의 말에 자료실로 갔더니 60세쯤 되신듯한 소박한 차림의 어르신 한 분이 초조하게 서 계신다. 상황을 들어보니 농민신문사에 생활 수기를 공모하려고 하는데 메일 보내는 법도 모르고, 워드도 못친다며 휘갈겨 쓴 종이 네 장을 들고 무작정 도서관으로 오신거다. 이 날 도서관 근무자는 나와 자료실 근무자 달랑 둘 뿐이었다. 나머지 직원은 코엑스에서 열리는 국제 도서전에 모두 보낸 후였다.

 

자료실에 근무하는 직원은 내년이 퇴임으로 워드가 느리시니 내가 도와드림이 마땅하지만 이것 저것 할일이 많아 선뜻 해드린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죄송한데 오늘 상황이 어렵습니다. 도서관 근무자가 두 명 이거든요. 자제분께 도움을 요청하거나 동네 젊은 분께 부탁하면 어떨까요?" 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책 읽기와 서평쓰기에 관심있는 소수 인원을 대상으로한 '인문학 서평쓰기'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도와드려야 하나? 글자도 못 알아볼 네장이나 되는 분량을 치려면 오전 시간은 소비해야 하고, 인근 도서관 후배들과 점심 약속도 있는데..." 결국 불편한 마음에 도와드리러 갔더니 어르신은 20분이 지났음에도 독수리 타법으로 두 줄 치고 계셨다. "글자 지우는건 어떻게 하죠?"하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신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사무실로 모시고 와 내 옆자리에 앉으시게 했다. "어르신 읽으세요. 제가 워드로 칠게요." 나는 1분에 400타를 치는 워드 1급의 실력으로 타닥타닥 치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 '사랑은 타이핑중'의 주인공 여자처럼. 어르신은 "제 치부를 다 들어내는 내용이라 남에게 보여주기 챙피해요. 그래서 동네 사람이나 아들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하신다.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으로 시집을 왔는데 기대 이상으로 궁핍한 살림에 많은 고생을 하셨다. 하루종일 기타만 치는 남편, 그런 아들을 두둔하는 시엄니의 시집살이를 견딘 이야기를 풀어 놓을때는 설움이 복받치셨는지 목소리가 떨리며 목이 메이신다. 기타만 치는 남편이 미워 집에 있는 여닐곱개의 기타를 모두 마당으로 내 던져 부숴 버리고는 집을 나왔는데 정작 갈 곳이 없어 논두렁 구석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는 대목에서는 어르신의 어깨를 꼭 안아드리며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제는 커다란 복숭아 과수원이 있고 남편은 농사일을 열심히 하며, 교생실습중인 든든한 아들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내가 다 뿌듯했다.

 

메일을 보내고 나니, 이렇게 훌륭한 공무원은 처음 봤다며 어디에 칭찬하면 되냐는 말씀에 뿌듯했다. 상을 타지 못해도 복숭아 한 박스 들고 오신다기에 "에이 한 박스는 되었고, 상 타면 2개만 가져 오시라"는 겸손함도 내비쳤다. 이 지역은 감곡 미백 복숭아가 유명한데 복숭아 자체가 부드러워서 손으로도 껍질을 벗길 수 있고 과즙이 줄줄 흐르는 달디단 품종이다. 안타까운 점은 가격이 꽤 비.싸.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후에 후배 둘과 샤브샤브를 먹으면서 무용담처럼 풀어 놓는데 내가 막 자랑스러워진다. 한 후배가 "관장님은 역시 멋지세요. 관장님이니까 하실수 있는 거예요" 하면서 나를 막 띄워주니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나 아무래도 시골 도서관 체질인가봐! 관장 체질인가? 내일 출근했는데 어르신 오셔서 다른 곳에 공모한다고 새로운 글 또 부탁하시면 어쩌지?

그나저나 시골 도서관 서비스의 끝은 어디일까?

 

2. 

 

요즘 도서관의 dead space에 북카페를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1층 로비에 커다란 공중전화 박스가 놓여있어 거슬렸던 공간에 유아 북카페를 만들었다. 엄마가 아이에게 책 읽어줄 공간으로 저렴한 이케아 제품으로 꾸몄다. 이제 도서관은 조금씩  아기자기한 곳으로 변하고 있다.  

 

 

 

3.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보림이는 기말고사 공부를 하고 나는 알라딘에서 놀고 있다. 마치 석봉이는 글 공부를 하고 어미는 떡을 썰고 있는 그 느낌?  

요즘 읽은 책은,

 

저지대 / 줌파 라히니 저.

 

어릴적 늘 함께 했던 두 형제 수바시와 우다얀, 그들의 아내 가우리 이야기. 혁명가의 삶을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우다얀, 동생의 죽음으로 천덕꾸러기가 된 가우리, 가우리와 결혼한 수바시.......그들은 평생을 동생의 그림자에 가리워져 산다. 남편과 딸을 버리고 떠난 가우리를 원망할 수도 없다. 수바시도 가우리도, 딸 벨라도 새로운 사랑을 해야만 한다.

 

 

 

 

 

     

  <고종석의 문장>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에릭 시갈의 <러브 스토리>,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다시 읽고 싶게 한다.

 

"스물다섯 살에 죽은 여자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가 예뻤다고. 그리고 총명했다고. 그녀가 모차르트와 바흐를 사랑했다고. 그리고 비틀즈를 사랑했다고. 그리고 나를 사랑했다고"

 

  나의 글쓰기 지침서로 삼아도 좋을 책이다. 음 좋아!

 

 

 

4.

 

사서임에도 책은 소유하고 싶다. 장바구니에 담은 책^^

 

 

 

 

 

 

 

 

 

 

 

 

 

       

 

 

 

 

 

 

 

 

 

 

 

 

 

 

 

 

 

 

5.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변산 대명리조트에서 열린 어린이청소년도서관 국제 심포지엄에 다녀왔다. 유럽 출장때 룸메이트였던 K도서관 관장과 1년에 한번씩 이 세미나에 참석한다. 영국, 독일, 터키, 미국등 세계 공공도서관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 동향도 알 수 있고, 우리도서관에 접목할 <아름다운 이야기 엄마> 아이템도 얻을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출장을 여행처럼!' 의 바램을 우리는 이루었다.

언뜻 제주도의 주상절리 같기도 한 채석강에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노을공주도 있고, 강남스타일 노천 카페도 있다.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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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6-22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세실님...그 분에겐 워드 쳐드린 것 이상의 의미있는 일을 해드리신게 아닐까 생각되네요.
미니북카페도 멋져요. 공중전화만 있던 곳을 상상해보니 아주 멋진 변신일것 같아요.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가 막 솟아나온답니까...
도트무늬원피스 입으신 모습도 짱!입니다. 저도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막상 사려고 하니 쉽게 골라지지가 않네요.

세실 2014-06-23 14:53   좋아요 0 | URL
그분은 글쓰기를 통해 아픈 상처가 조금은 치유되신듯 합니다. 삶을 반추해보는 느낌도 들었고요.
오늘은 초등 아이들 셋이 와서는 배 고프다고 칭얼(?)거려 율무차 타주고 유아 북카페에서 사진 찍어주었습니다. 매일 오라는 말도 함께. ㅎㅎ
도서관 강사샘들의 브레인 스토밍을 받았지요. 나 혼자 생각보다는 역시 다수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보림이 원피스 같다고도 하던데....ㅎㅎ 전 새틴인가 샤틴인가 하는 상표 옷을 즐겨 입네요.

무스탕 2014-06-22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의 외모의 반짝임은 마음으로부터 나온게 틀림없어요.
보이지 않는 몸 저 깊은곳 어디가가 고우니 그게 몸 밖으로 우러나오지 않을수가 없지요.
이런 멋진 도서관장님은 칭찬 받아 마땅해요!


세실 2014-06-23 14:53   좋아요 0 | URL
어머 이런 극찬을? 감사합니다^^
요즘 다이어트 열심히 하고 있어용~~~~~
앞으로는 더 열심히 도와드려야 겠어요. 무스탕님의 칭찬에 힘이 팍팍 납니다~

다락방 2014-06-22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를 읽는데 기분이 좋네요, 세실님. 헤헷 :)

세실 2014-06-23 14:54   좋아요 0 | URL
호호호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기분좋게 해드릴걸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세시간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heima 2014-06-22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따뜻해요... 세실님 동네 도서관 이용하시는 분들은 복받으셨어요.. ^^

세실 2014-06-23 14: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좀 더 많은 분들이 도서관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홍보해야 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6-23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다사로운 사람, 이쁜 관장님...
내 바쁘면 남 돌볼 겨를이 없는 게 사람 맘인데
주변을 돌아보는 따뜻한 맘씨에 절로 추천이 꾸욱~~
그 왕언니(60쯤이라길래 노인은 아니고 ㅋ) 꼭 입상하셔서 세실님께 복숭아 두 개 들고 찾아오셨음 좋겠어요.
후기도 부탁합니당^^*

세실 2014-06-23 15:01   좋아요 0 | URL
팜므언니~~~ 우리 5공주 알라딘에 넘 소홀해요^^
전 다시 시작해 보려고 불끈 ㅎㅎ
책임감이 좀 무섭네요. 도서관 이용자를 한명이라도 더 포섭하려는 마음? ㅎ
오늘은 초딩 4학년 아이들 셋이 왔길래 율무차도 타주고 사진도 찍어주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 친절하다고...
추천 빵빵!!
상금이 자그만치 2백만원이예요. 그땐 복숭아 얻어 먹어도 부담없을듯요^^
아 복숭아 먹고 싶어라~~~ ㅎ

야클 2014-06-23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장님 멋있어요! ^^

세실 2014-06-23 15:01   좋아요 0 | URL
야클님도 멋져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잘 지내시지요?

paviana 2014-06-2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장님을 몰라 뵈었네요. 제가 너무 뜸했어요.

세실 2014-06-23 15:01   좋아요 0 | URL
어머나.....군 도서관장 별거 아니어요~~~
잘 지내시죠? 저도 얼른 놀러가야지^^

순오기 2014-06-2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친절을 받은 그분은 평생 못 잊겠네요~ 감동의 아이콘 멋쟁이 관장님!!
작은 공간에 만든 미니카페도 정말 좋은데요~ 관장님의 섬세함과 친절함이 배어나오는 도서관 최고에요!!

세실 2014-06-24 10:12   좋아요 0 | URL
오기언냐 땡큐~~~
그 날은 오전내내 어찌나 바쁘던지....ㅎㅎ 나름 활력소도 되었어요^^
어제는 초등 아이들 율무차 타주면서 미니 카페에서 놀게 했어요. 시골이니까 가능하겠지요.
지역주민들이 그저 많이 오길 바랄뿐^^

서연사랑 2014-06-23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것보다 공부하는 보림이 기다리시면서 글 쓰신다는 부분이 눈에 퐉!
저는 공부하는 서연이 옆에서 엄마 내일 출근해야된다고 빨리 자라고자라고 잔소리+짜증인데요ㅋㅋ

세실 2014-06-24 10:14   좋아요 0 | URL
고3이니 발등에 불 떨어졌지요^^
어제는 중3 아들 공부하는데 잤어요. 공부를 하긴 했는지...ㅎㅎ
어머 서연이 공부 열심히 하는군요. 중 2지요? 모범생일듯요^^

blanca 2014-06-24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의 수필 같아요. 세실님 사진 보고 또 깜놀. 누가 고3의 엄마로 보겠습니까.
그런데 강남스타일 노천까페라는 저 이름 재미나네요 ㅋㅋ

세실 2014-06-25 13: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의 예쁜 표현에 기분 짱입니다^^
노천 카페 채석강에 있는데 나름 명물이네요. 사장님은 전혀 안어울리는 분. ㅎㅎ

수퍼남매맘 2014-06-2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르신 안 도와드렸으면 내내 찝찝했을 거예요.
그게 그렇더라구요.
잘하셨어요. 짝짝짝!!!

세실 2014-06-25 13:19   좋아요 0 | URL
그쵸?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불편하더라구요.
꼬박 2시간 30분은 소모한듯요.
그래도 뭐 기분은 상쾌했습니다.
삶이 파란만장하셔서 꼭 당선되면 좋겠어요.

하늘바람 2014-06-2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나 멋진 관장님 역시 근사해요

세실 2014-06-25 13:50   좋아요 0 | URL
호호호 감사합니다^^ 소소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답니다.
그리구 백미터 미인이예요~~~~~ 나이 사십 중후반임을 참고해주세용^^

하늘바람 2014-06-2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넘 이쁘신거 아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4-06-26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안에 갔다 오셨군요.내소사 쪽 경치도 좋은데 가 보셨나요?

세실 2014-06-26 15:57   좋아요 0 | URL
그저 출장답게 대명콘도 옆에 있는 채석강에서만 놀다왔습니다.
내소사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못해 아쉽네요. 나중에 후회했답니다. 지금도....ㅎ

봄뜻 2014-06-29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년차 후배사서 댓글 남기고 갑니다. 참고봉사가 제일 힘들고 어려운것 같아요. 제각각인 이용자분들의 요구가 가끔 숙제처럼 느껴져서 부쩍 힘들었는데, 첫 마음을 돌이키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관장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

세실 2014-07-02 09:46   좋아요 0 | URL
아 반갑습니다. 자주 뵈어요^^
참고봉사가 제일 힘들지만 보람도 크지요.
전 요즘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엔 카운터를 지킨답니다. 지역주민, 아이들과 대화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진정성이 제일 중요한듯요^^

2014-07-02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2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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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은 모욕하고 경멸하는 것, 즉 마음으로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을 의도적으로 또는 무심코 격하시키고 그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 상대방을 비하하고 깔아뭉갬으로써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다. 그러한 대접을 받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감정이 모멸감이다.‘

 

중학교 3학년인 아이는 자존심이 세다. 엄마의 눈빛이나 손짓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즉시 지적한다. ‘엄마, 못 알아 들을 수도 있지. 왜 기분 나쁘게 쳐다봐?’ 내 표정에서 모멸감을 읽은 것이다. 사회생활에서는 나름 밝은 미소로 인정받지만 가족에게는 짜증과 화를 잘 내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된다. 

 

도서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김찬호 저, 문학과지성사)’은 내 가족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심하게 보낸 모멸감을 깨닫고, 내 마음과 행동의 습성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모멸감은 5장으로 나누어 다양한 이론과 사례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각 장의 키워드(수치심, 모욕, 감정, 연민, 에고 등)에 어울리는 현악 사중주의 연주곡은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1장은 수치심, 모욕, 모멸감의 기본적인 속성에 대해 다룬다. ‘자살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그 방향이 타인에게로 향하면 살인이 된다. 둘 다 바탕에는 복수심이 깔려 있다. 모멸감은 복수심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2장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정서를 가리키는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은 우리나라 언어, 신분제는 붕괴되었지만 신분 의식은 지속되는 심리를 다루었다. 자신보다 약해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반말과 폭언을 일삼는 사람의 내면에는 다른 곳에서 똑같은 차별을 당하고 모멸감을 느끼며 살았던 결과라는 점에 수긍이 간다. 3장은 비하, 차별, 조롱, 무시, 침해, 동정, 오해 등의 스펙트럼을 통해 모멸감의 구체적인 의미를 다룬다. 4, 5장은 인간적인 사회,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출하며 사는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건강한 사회에 대해 말한다.‘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는 우리나라의 노숙자를 방문한 자리에서 첫 마디가시를 좋아하시나요? 좋아하는 시가 있으면 알려주시겠어요?”노숙자들은 비록 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겉모습만으로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었던 그들을 인간적으로 존중해준 질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울림이 있는 시간이 되었다.       

       

 

모멸감의 상반되는 말은 자존감이다.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생활 습관이 중요하다. 미국에서 살인죄로 수감 중인 재소자들을 심층 인터뷰 했는데, 범죄의 진짜 이유를 설명할 때 그 놈이 나를 깔보았다는 표현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한다. 수치심이나 모멸감을 주는 말 한마디는 때로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자존감을 키위기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수첩에 적어 놓고 하루에 하나씩 실천해 보면 어떨까? 내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서는 나이 어린 사람에게 반말하지 않기, 품위를 잃지 않기, 내 감정의 주인이 되기, 타인에게 진정성 있게 대하기. 감사하며 살기. 그리고 또?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자기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해 무지하다. 또는 '터치 오브 라이트' 영화의 치에처럼 현실의 조건에 발이 묶여 있거나 유시앙의 경우처럼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자기 안에 있는 열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고정관념이나 사회가 부여한 편견에 의해서 일정한 틀 안에 자신을 가둬두기도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그 굴레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다. 내가 보지 못했던 재능을 상대방의 눈으로 발견하게 되고, 삶을 나누는 가운데 새로운 꿈의 씨앗이 뿌려진다.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싹을 틔운다.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p.254

 

 

언제부터인가 힐링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치유는 단순히 상처를 어루만지는 위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새살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내면의 어떤 힘이 약동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소망과 가능성을 응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을 꺼내어 존재의 날개로 펼칠 때 기꺼이 갈채를 보낼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우정과 환대가 곧 힐링이 된다. 살아 있음을 축복하면서 존재를 중심으로 맞아들이는 만남에서 우리의 생애는 고귀해진다.                 

                                                                                                                   p.259

 

 

중심잡힌 사람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모두 균형 있게 품고 있으면서,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표현한다. 억울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노할줄 알고, 장례식장에서 슬픔을 나눌 줄 알며, 그러다가도 경사가 난 집의 잔치에 참석해서는 온 마음으로 축하를 해주고, 음악을 들으면 즐거움에 빠져들 줄 안다. 그런 사람은 건강하다. 어느 한 감정에만 매여 살지 않기에 인생이 풍요롭다.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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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5-15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언니, 글이 너무 좋네요.
그리고 인용하신 부분들도 정말 좋아요. 균형있게...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가끔 저는 저를 비하하는 말도 아닌데, 그것을 비하하는 말로 받아들일 때가 있었어요.
그것은 제가 제 자신을 그만큼 낮추고 형편없이 보았기 때문일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슬프기도 해요.
자신조차 소중하게 가치를 매겨주지 않았던 자신이라니. ^^

세실 2014-05-16 13:52   좋아요 0 | URL
땡큐~~~~~
잘 지내죠? 조금 여유가 생겼나?
감정을 잘 조절하고, 표현하며 사는것 좋징. 요즘 감성을 키우려고 노력중^^ (감성적이긴 하지만......ㅎ)

그렇게 그렇게 상처를 어루만져주면서 성장하는듯^^ 무엇보다 나 자신의 가치를 알고 나를 고귀하게 생각하면 남을 대하는 마음도 여유로워 지는듯요. 마고님은 지금 충분히 가치 있어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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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군대에 있는 조카에게 책을 선물했다. 박웅현의책은 도끼다와 톨스토이의안나 카레니나그리고 밀란 쿤데라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골랐다. 도서 선택은 이모의 개인적인 취향을 담았지만 조카가 삶의 지침서가 되는 좋은 책을 읽고 제대 후 이성과의 만남에 혜안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 작용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책을 거의 읽지 못했던 조카는 이모 덕분에 책을 읽는다며 다음에 보내줄 책을 기대하고 있다

 

조카에게 책을 보내면서 우리 집 책장 안쪽에 꽂혀 있던 빛바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저)’을 다시 읽었다. 대학 때 이 책을 읽기보다는 전시용으로 겨드랑이에 끼고는 자랑스럽게 걸어가고는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그녀는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책은 그녀에게 19세기 멋쟁이들이 들고 다녔던 우아한 지팡이와도 같았다. 책을 통해 그녀는 남과 자기를 구분 지었다.’가난한 과부의 딸이며 시골 레스토랑의 종업원이었던 테레사에게 책은 희망이자 미래를 밝혀줄 한줄기 빛과 같았다.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토마스가 읽고 있던 책안나 카레니나는 테레사가 어제 읽던 책이었고, 도시에서 온 묵묵히 책만 읽던 눈빛과 지적인 모습의 토마스는 테레사를 영혼이 있는 세계로 데려다줄 운명의 남자가 된다.

 

사랑의 역사는 그 후에나 시작되었다.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나는 바람에, 그는 다른 여자에게 그랬듯이 그녀를 돌려 보낼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불현듯 그녀가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와 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은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적이 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 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p.324

 

이 책은 제목에서 오는 무게감과 두께로 읽기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토마스와 테레사, 사비나와 프란츠의 사랑이야기가 중심축을 이룬다. 돈후안적인 인물이며 이상주의자였던 토마스는 테레사에게 연민을 품게 되고, 테레사를 위해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트럭 운전사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게 된다. 시골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는 토마스와 테레사는 서로를 의지하며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넘어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토마스의 연인이었던 사비나는 소설에서 자주 거론된보이는 것,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편협한 시선인 키치의 세계를 싫어했지만 어느 순간 테레사와 토마스의 순수한 사랑을 부러워하며 키치의 세계를 인정한다. 사비나의 새로운 연인이었던 프란츠는 소련의 침공으로 혁명, 변화, 투쟁이 한창인 체코의 프라하를 동경하며 안정된 교수직을 버리고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네 사람은 각자 자신이 머물고 있던 삶에서 간절히 원했던 새로운 세상으로, 또는 원하지 않았으나 자연스럽게 또 다른 세상으로 흘러갔다.

 

내용의 큰 흐름은 사랑이야기이지만 소련의 침공을 받고, 레지스탕스들이 지하운동을 하며 투쟁을 하는 프라하의 소용돌이 속 정치, 역사, 니체의 영원회귀사상까지 아우르는 묵직한 주제도 다루고 있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은이 책이 왠지 어렵고 부담스러웠다면 단 한 가지, 토마스와 테레사의 사랑만 기억해도 좋을 책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이야기이니 말입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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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3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7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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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반짝이는 은박의 눈송이가 곱다. 아이가 어릴 때는 한 겨울 나풀나풀 눈이 내릴 때 커다란 눈송이 찾기 게임을 자주 했다. 유난히 큰 눈송이가 보이면엄마 눈송이, 아빠 눈송이하며 눈이 바닥에 떨어질 때 까지 아이와 함께 시선을 고정했다. 일본 소설눈보라(사이토 마리코 저)’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따온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은희경 저)’는 아이와 즐겼던 눈에 얽힌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사서라는 직업적인 책임감으로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간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예약 판매 글을 보면 설레는 마음으로 신청을 하고 책이 도착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 책도 저자의 이름만으로 선뜻 책장을 펼칠 만큼 반갑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자답게 여섯 편의 단편은 각각의 색깔을 지니고 적당한 무게로 매력을 한껏 발산했다.

 

그의 시선은 늘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선 채 맴돌지만, 결국에는 제 자리로 돌아오는 긍정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 머문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일상에서 스치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나만의 특별한 매력을 갖고 있는 단 하나의 눈송이다친구 사이인 안나와 루시아 그리고 요한에 얽힌 이야기인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는 안나가 크리스마스 때 좋아했던 요한을 만났지만 큰 실수를 하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던 옛 추억을 떠올리는 내용이다.‘어쩌면 세계란 처음엔 잘 열리지 않는 방문과 탁자와 침구와 그리고 여행 가방을 기본단위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스페인 도둑의 주인공 완의 글이 와 닿는다.‘프랑스어 초급과정은 신도시로 이주한 여성이 새로운 삶에 적응을 못하고 좌절을 거듭하지만 작은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미국으로 이주한 모자의 험난한 삶과 개러지 세일로 위안을 받는‘T 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은 생생한 외국 정착기에서 슬픔이 느껴진다.

 

책을 읽으면서 미국의 여류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올리브 키터리지가 생각났다. 개인의 일상을 다룬 내용이면서 결말 속 반전의 신선함이 닮았다. 고단한 삶이지만 칙칙하지 않은 점에서도 유사한 구성이다.

 

여섯 편의 소설은 독립적인 단편이면서 옴니버스처럼 이어진다.‘눈송이의 주인공 안나는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에 등장하는 소년의 엄마와 오버랩된다. 또한 안나는금성녀의 옆집 하숙생으로 연관 짓게 된다.‘프랑스어 초급과정에 등장하는 여성과 임신한 태아는스페인 도둑의 어머니와 완으로 연결된다. 이런 자유로운 상상은 소설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은희경 소설은 주인공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미화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낯선 삶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작은 희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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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3-29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신거예요? 발빠르게 움직이시는 님!
저는 이 작가의 <새의 선물>과 <마이너리그>를 읽었어요. 그리고 이런저런 작품집에 끼어 있는 단편들을...
잘 쓰는 작가죠.
"미화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기란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아마 소설을 쓰는 사람들만이 잘 알 듯싶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작가는 이것저것 꼼꼼히 따지며 수학적인 글쓰기를 할 거라고 짐작이 되니까요. (저도 잘 모르고 짐작만... ㅋ)

토요일 아침이라 좋습니다. 출근하지 않는 님은 더욱 좋으시겠지요?
달콤한 휴식의 날이 되시길...


세실 2014-03-31 10:17   좋아요 0 | URL
은희경 소설 좋아해요^^ 예약구매 해놓고는 손꼽아 기다렸답니다.
작은 체구, 가느다란 목소리에서 어떻게,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쓰는지.....ㅎ
술술 읽히는 자연스러운 글이 베어나오기 위해서는 수학적 계산 하겠지요^^
제목도, 내용도 참 좋았습니다.

토요일에는 친구들과 스파를 하고 왔습니다.
1년에 두어번 만나는 친구들이지만 대학 시절을 공유했기에 끊임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머리는 시원하고 몸은 따뜻한 노천탕은 '이보다 더 좋을수는 없다' 였습니다^^
편안한 한주 되세요.

 

1.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모임이 참 많다. 사서, 평생교육사, 규환 초딩엄마, 독서클럽, 향우회, 교육청, 대학친구, 초딩친구 모임 등등. 퇴직 후에도 일곱개 정도의 모임을 유지하고 있어야 노후를 즐겁게 보낼수 있다고 하지만 모임이 좀 과하다. 이름만 올려 놓고 나가지 않는 대학 동문 모임까지 합하면 10개도 넘을듯. 그 중에는 가고 싶지 않은 모임도 있어 회비만 내고 핑계를 대며 가뭄에 콩나듯 나가고는 한다. 얼마전 법륜 스님의 글에서 모임중에 누군가를 싫어해서 그 사람을 제외하면 또 다른 싫어하는 사람이 생긴다고 하면서 내 마음을 바꿔야 한다는 바람직한 말씀을 하셨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지만 모임에서 탈퇴하기도 싶지는 않다. 늘 고민만 하고 있다!

 

몇년전부터 마음 맞는 성당 엄마들 넷이서 한달에 한번 만나 맛있는 음식 먹고 맥주도 한잔 하며 최종 목적지는 유럽 여행인 모임을 하고 있다. 다행히 네 명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여분의 곡식(?)이 생기면 골고루 나눠주고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작은 선물을 챙겨주는 정을 베푼다. 한달에 오만원씩의 회비를 내는데 꽤 모았다. 두 명의 아이가 고3이라 올해는 불가능하고 내년쯤에는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여행을 꿈꾸고 있다. 이 중에 나보다 두살 많은 언니가 요즘 '세실아, 좋은 책 추천 해줘!' 하기에 몇권 골라 주었더니 열심히 읽고 있다. 이유는 내년에 50세가 되는데 좀 더 우아한 '내'가 되고 싶단다. 사람들과 대화할때 기본 지식이 없어 막히는 느낌도 들고, 상식도 짧아서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을 쌓고 싶단다. 성당일도 열심히 하고, 골프도 열심히 치며, 한글학교 봉사도 열심히 하는 언니인데 지적 충족까지 챙기는 마음이 참 예쁘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책 읽는 즐거움에 빠져드는 지인들을 보면 내가 막 자랑스러워지면서 흐뭇하다.   

 

나는 우아한 50대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할까?  요즘 '모던 패밀리' 보면서 듣기 하고 있는데, 여행갔을때 영어만 들려도 좋겠다.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 막 읽고 싶다고 할때 추천하면 좋을 책!

 

 

 

 

 

 

 

 

 

 

 

 

 

 

 

 

 

 

 

 

 

 

 

2.

 

오늘, 내일 하기로 했던 도서관 정기 감사가 3월 10일로 연기되어 기분이 다운되었다. 다음주부터 프로그램 개강하면 바빠지고, 감사장을 꾸미려면 부득이 휴강해야 하는 절차들이 내키지 않는다. 감사 담당자에게 전화로 싫은 소리를 했는데 '오죽하면 저희도 바꾸겠어요' 하는 말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우리는 갑이 아닌 을의 관계니까.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했는데 책상 위에 은희경 신간이 놓여 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열었는데 이런 '860'번이다. 100번, 200번.....1,000번, 3,000번 이런식으로 선물을 주던데....안.타.깝.다! 나에게 정녕 횡재수는 없는건가? 그래 노력만이 살길이다. 눈 꽃송이가 은박으로 되어 있는 표지가 참 예쁘다. 손만 없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제목과 표지가 잘 어우러진다.

여섯개의 단편이 희미한 연결고리가 되어 하나로 이어진다. '올리브 키터리지' 처럼 보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같이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다.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하나씩 눈송이를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 하고 그애도 말한다. 그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후 어느 쪽인가 말했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해도 절대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께 야단맞을 때까지 열중했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

                                                                                                                - 사이토 마리코,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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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theme 2014-02-27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60번이 아니라 978번이라도 좋은 책이라면 기분 좋을 듯 합니다.^^

세실 2014-02-28 09:38   좋아요 0 | URL
호호호 그런가요? 어머 978번이면 22명 구입할 때까지 기다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더 클텐데요?
제가 좀 선물에 약합니다^^

꿈꾸는섬 2014-02-28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50대를 위한 준비, 생각도 못한 시간이에요. 50대, 아직도 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점점 가까워오고 있다는 생각에, 나도 이제부터는 우아한 50대를 위해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ㅎㅎ

세실 2014-02-28 13:09   좋아요 0 | URL
지금도 충분히 우아하시죠~~~ 독서력이 기본이 되니까요^^
전 영어, 일본어를 좀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앞으로 여행 다닐일이 많을텐데....입은 뻥긋 해줘야....ㅎㅎ

꿈꾸는섬 2014-02-28 16:24   좋아요 0 | URL
영어와 일본어, 정말 잘하면 좋겠단 생각이 드네요.^^

세실 2014-03-03 12:09   좋아요 0 | URL
그쵸? 전 요즘 미드를 보기는 하는데 자막에 집중하게 됩니다. 영어, 일본어.....공공의 적입니다^^

페크pek0501 2014-03-0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50대를, 저는 이미 살고 있잖아요. 우아하지 않아서 그렇죠.
아, 초반이에요. 이걸 강조해야 돼요. 아직 중반은 되지 않았다는 것... 킥킥...
열심히 사시는 세실 님이 좋아 보이는 주말입니다. ^^
출근하지 않는 날을 즐기시길... ^^

세실 2014-03-03 12:17   좋아요 0 | URL
호호호 충분히 우아하시고, 40대 같으실듯^^ 페크님을 아직 뵙지는 못했지만 왠지 팜므님과 비슷한 스타일이실듯! 동안, 동안!!
제가 사회성이 발달된 유형이라 어울리는걸 좋아합니다.
새로운 한주 즐겁게 보내시길요^^

Elena 2014-04-30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희 엄마가 요즘 우울해하시고 약간 무기력하시고 일도 힘들어하시고 그러신거 같은데
엄마에게 새로운 힘과 엄마를 좀 가꾸고 개발할수있게끔 일깨월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추천도서 있을까요??

세실 2014-04-30 13:46   좋아요 0 | URL
50대 이신가요? 요즘 세월호 영향도 있어서 더 그러실듯요.
가볍게 읽을 책 몇 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나는 죽을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 이근후 저.
- 80세의 전직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인생을 보람있고 재미있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무언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실 거예요.

2.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 김미경 저.
- 4-50대 여성들에게 꿈을 가지라는 내용인데, 님의 엄마도 무언가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실듯요^^

3. 천개의 공감 / 김형경 저.
-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례를 들며, 치유의 방법도 제시해 준답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더 힘이 나겠지요.

따뜻한 따님(?) 덕분에 엄마가 힘을 내실듯요^^

Elena 2014-04-30 14:2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서점 가서 읽어보고 엄마한테 선물해야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