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미래 -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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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기대치를 항상 충족시키기란 쉽지 않다. <<이상문학상 작품집>> 같은 경우가 그렇다. 나올 이야기는 다 나오고 들을 이야기는 넘쳐서 그랫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그 흡인력, 뭉클함 같은 것이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가다 오다 단편 한 두편 정도로 알아 왔던 김애란의 대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를 펴든 순간 우리 나라 소설계는 여전히 성장하고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여타 우수상 수상작들도 꼭 상을 받아서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단편만이 가질 수 있는 농축의 미가 돋보였다. 재미있었고 허무하지 않아 좋았다.

 

 

김애란 <침묵의 미래>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루어진 영이다. 나는 거대한 눈이자 입.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 안개처럼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낱낱의 입자로도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중략>-p.13~14

 

소설 같지 않은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자기 정의. 이건 흡사 철학책의 한 장을 할애한 것 같다. 여기에서 화자는 사라져 가는 '말'의 정령이다.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된 특별구역으로  사라져 가는 언어를 구사하는 소수의 화자들이 보존되는 곳. <소수언어박물관>의 정경. 여기에 김애란이 자주 그렸던 활달하고 젊은 88만원 세대의 구체적인 실체는 없다. 이제 김애란은 자신이 어루만지고 구사했던 언어의 본질적 모습에 가 닿는다. 그것은 '말'을 사용하여 인간의 삶을 다루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언어는 삶의 한계이자 철책이면서 해방구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도 아니고 우리의 삶도 아니다. 그저 우리의 오해와 바람과 눈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할런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죽고 우리의 삶은 언어로 축소된다. 언어로 이야기되는 것은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다.

 

그에게 모어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졌다'고 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p.30

 

진지한 이야기가 꼭 지루함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딛고 서는 이 발판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의 경계는 확장된다. 이제 김애란에게 서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에 더이상 필수적인 것이 아니게 된 것 같다. 우리가 하고 싶었지만 듣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그 자체로 화자가 되어 답답함을 풀어준다. 그녀는 분명 아주 잘 크고 있는 것 같다. 작가의 부모님의 소개팅이 이루어졌던 시골의 잡화점 같은 '송방'에서의 이야기는 부록 이상이다. 거기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화투놀이의 일종인 '뽕을 쳤다'고 한다. 소개팅에서 가게 점방 같은 곳에서 놀이를 하고 바로 벌칙으로 엿과 삶은 달걀을 사고 사랑에 빠진 그녀의 부모님의 이야기는 당돌한 이야기꾼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녀의 익살도 재기도 시원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이러한 부모님의 익살과 재기를 잘 담아내어 조금씩 더 무거워지려 한다. 그녀의 수상소감처럼 그녀의 무게가 길 위에 '방향'을 만들 것이다. 독자들은 그녀가 만든 지도의 발자국에 살짝 자신의 발을 넣어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지는 꿈을 꾼다.

 

 

편혜영 <밤의 마침>

 

오퍼상에서 비밀 사서함을 관리하다 자신의 내밀한 과거에 대한 암시를 발견하는 중년의 사내. 누구나 실수는 하고 누구나 환한 대낮에 크게 얘기할 수 없는 은밀한 공모를 간직하고 있다면 이 이야기는 몹시 떨리는 이야기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다. 아내에게 용서를 받을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여자아이'를 추행한 일은 무고로 결론지어지고 그의 아내는 그의 결백함을 깔끔하게 수용해 주지는 않는다. 아내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이야기는 귀가 하나 빠진 퍼즐로 독자를 유인한다. 바로 속으면 안 된다. 절대.

 

 

그는 자신이 선량하고 성실하며 자신의 인생은 물론이고 타인의 인생에 대해서도 명확한 신념과 원칙이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 일로 그런 게 전혀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인간이란 신념이 흔들릴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인데, 자신에게는 애당초 흔들릴 신념조차 없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에게는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만이 있다. 그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순간적인 위기에 대처 능력이 뛰어나나 그게 가진 능력의 전부이다. 그가 자부하던 건전한 양심과 신념, 사회적 위상과 도덕에의 의지, 원칙이나 선의 같은 것들은 그간 주머니에 비축된 먼지의 양보다 적다. 그는 그저 상황과 위기에 걸맞게 신념과 가치라는 걸 조작해온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을 착각했고 과신했다.

-p.198

 

이러한 '그'에 대한 설명은 '그'가 누구일 지라도 얼마간은 아니 상당 부분이 맞다. 인간은 고정불변의 일관성 있고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불확실하고 가변적이고 모호하고 상황에 따라 어떤 모습도 보일 수 있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어떠한 상황에서 예외의 모습을 보였을 때 그는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대쪽같은 신념과 일관성은 생동하는 삶과 합치되기 어려운 과제다. 물론 지향이 될 수는 있겠지만. 편혜영이라는 작가는 그러한 지점을 비범하게 포착했다. 흘러내리는 단발머리 속에서 예쁘게 미소짓는 그녀의 흑백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다.

 

손홍규의 <배우가 된 노인>도 김이설의 <흉몽>도 우리의 삶의 이면, 그 비의에 대한 적나라한 고찰이다. <배우가 된 노인>이 딸을 위하여 연기하는 삶도 모텔을 청소하며 남편의 범죄를 방조하는 그녀의 그 비루한 일상도 결국 생존에 끄달리게 되었을 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그 나락에서의 모습에 대한 성실한 고찰이다.

 

이야기는 죽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에 닿으면 그 골목은 갑자기 그 빈곤한 언어들 앞에서 겸손하게 문을 만든다. 책도 그 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사는 삶도 언제까지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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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수상 받는 사람은 항상 우수상만 받는군요... 편혜영, 손홍규, 윤성희 등이요.
언젠가 그네들도 이상문학상 대상에 이름을 올릴 수 있더라면 좋겠어요.
김애란의 수상에 영 내키지 않았는데, 블랑카님께서 인용해주신 부분과 글을 읽으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어요.

blanca 2013-01-26 15:4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말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저도 사실 김애란 취향은 아닙니다. 몇 몇 단편이 소재나 주제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장편은 못 읽어 봤어요. 하지만 이번 작품은 이 작가가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했어요. 안주하는 작가가 아니라요.

꿈꾸는섬 2013-01-30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애란 팬인데...아직 이상문학상수상집은 못 읽어봤네요.
요새 워낙 책이랑 멀리 지내서, 가깝게 지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blanca 2013-01-30 09:46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그러다가 또 책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