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그 책으로 가는 다리가 된다. 그렇다고 그 '어떤 책'이 사소한 것은 아니다. '그 책'은 이제 그 '어떤 책' 없이 떠올릴 수 없게 된다. 

















남의 소설을 읽지 않는  소설가들이 있다. 남의 글을 읽지 않는 작가들처럼 나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잘 쓸 수는 없을지언정 읽지 않는 사람이 자기 아집이나 편견에 갇히지 않기란 쉽지 않다. 어슐러 르 귄의 서평은 그러한 면에서 대단히 놀랍다. 그는 대단한 작가이기에 앞서 성실하고 열정적인 독자다. 그의 서평들은 놀랍다. 전문적인 비평과 독서를 즐기는 평범한 독자 사이의 균형감이 빛난다. 모두가 열광하는 작가나 이야기에 대한 결정적인 취약점에 대해서도 솔직하다. 그런 그가 끝까지 사랑하고 경의를 표하는 작가가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세대의 소설가 중에서 내가 몰랐던 것,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줄 몰랐던 것들을 말해 주는 유일한 소설가다. 내가 아직도 배우게 되는 유일한 소설가다.

-어슐러 K. 르 귄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그 작가는 주제 사라마구다. 르 귄은 그를 극찬한다. 아니, 이 작가를 사랑한다. 그 사랑과 열광이 너무 절절하게 전해져 와서 이 대목을 읽고 사라마구의 그 뭐라도 다시 찾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다. 


















노벨 문학상을 탄 팔십이 훌쩍 넘은 노작가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그럴 듯하게 윤색하는 대다수의 다른 이들이 걷게 되는 그 길과 거꾸로 걸어간다. <작은 기억들>은 포르투칼 소년의 이야기다. 사고를 치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이웃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짐짓 시치미를 떼는 사춘기 소년의 고백들은 절로 킥킥 웃게 하고 때로 아슬아슬해서 식은땀을 흘리게 하고 애잔해서 자주 눈물 짓게 한다. 그러나 전 생애를 회고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 소년기의 이야기가 위대한 노작가를 더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사라마구가 팔순이 될 때까지의 자신의 전 생애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곱절은 더. 이 익살맞고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악동의 모습에서 우리는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치밀하게 직조한 작품을 써 낼 작가의 탄생을 예감하게 된다. 


"너였던 소년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거라."

-[훈계의 책]에서


그가 자랐던 아지냐가 마을의 눈부신 풍광에 대한 찬란한 묘사와 조부모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절창이다. 


아흔 살 인생의 평정심과 한 번도 잃은 적 없는 소녀 시절의 불꽃으로.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단다. 그래서 죽는 것이 너무도 슬프단다.

-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


발랑 까진 소년기의 에피소드를 고백하며 "그랬다. 그때는 참으로 순수한 시절이었다."라고 짐짓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비로소 르 귄이 왜 유독 이 작가를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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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박완서에 빠져 그의 글 전부를 읽겠다고 덤빈 적이 있다. 그는 이야기꾼이다. 별스럽지 않은 소재에서 끌어내는 이야기가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읽는 재미를 톡톡히 준다. 개성 근처의 박적골에서의 유년 시절의 자전적이 이야기, 6.25의 상흔이 개개인의 삶에 미친 여파, 중산층의 삶의 허위 의식, 위악, 속악함에 대한 형상화가 주종을 이룬다. 


소설뿐 아니라 하루키처럼 그의 소설적 재료의 원형들인 것 같은 그의 에세이 또한 참 좋다. 소설보다 오히려 더 절제되어 있고 때로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경우도 많다. 언어를 통과하는 삶의 깨달음과 비의들이 다시금 봐도 하나하나 직접적으로 와닿는다. 어릴 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들도 이제 지금에 와서 읽어보니 세월과 더불어 더없이 공감된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이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글은 때로 인장 같다.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 아니다. 두고두고 남아 내 자신의 정체성의 조각처럼 여겨질 수도 있고 세상에 대한 하나의 시선이자 입장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박완서 정도의 작가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엄정한 잣대의 울림이 큰 이유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의 제목은 여기에서 왔다. 그것은 언뜻 미소해 보여도 엄청난 것이다. 진실은 쉽지 않고 때로 눈앞의 이익해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 망설임 없이 밀고 나가는 힘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나온다. 세태에 휩쓸리고 사리사욕에 흔들리다 보면 진실은 저만치 물러가 버릴 때도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삶을 사는 일과 같다는 작가의 언질처럼 들린다.


그에게는 그만을 위한 서재가 없었던 시절이 길었던 모양이다. 남편이 생존해 있을 당시 그의 옆에서 피고한 몸으로 하루를 글쓰기로 마감하는 정경이 그려져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번듯한 서재보다 그러한 글쓰기가 더 익숙하고 좋다는 그의 고백이 귀엽다. 


마지막에 대한 바람을 눌러 적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 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런 찬란한 시간이 과연 내 생애에서 허락될까. 

-중략-

가을과 함께 곱게 쇠잔하고 싶다.

-박완서<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그의 소망을 닮고 싶다.  그는 이미 이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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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2-18 0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의 글. 저도 참 좋아하는데 blanca님 페이퍼 보니 이 책도 얼른 읽고 싶네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blanca 2021-02-18 16:36   좋아요 0 | URL
여전히 좋아요... 마음이 참 재독한 글도 있는데도 여전히 새롭고 울림이 있네요.
 

나는 코로나를 낙관하지 않는다. 단기간에 깔끔하게 끝나고 모두 한꺼번에 마스크를 벗어버릴 날이 조만간 올 거라고 개인적으로 믿지 않는다. 국경을 예전처럼 자유롭게 넘나들고 지구촌 일일 생활권이 회복될 거라 쉽게 낙관할 수도 없다. 특히 유럽의 상흔은 더 오래 남을 거라 생각한다. 이민자와 여행자에 대한 관용과 너그러움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방역을 위하여 개인을 통제하는 것이 당연시될 때 그것은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도 직시해야 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는 서로를 믿지 않고는 인간적인 신뢰에 기대지 않고는 도저히 방역을 달성할 수 없다. 


이것은 지구의 인간에 대한 반격이다,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야생동물의 포획과 가금류의 집단 사육이 코로나의 단초를 제공했으리라 보는 시선은 그것의 일부일 것이다. 지구의 온난화가 바이러스의 활성화를 도왔다는 것 또한 전부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우리의 존재 자체로 코로나에 기여했다. 그리고 그것을 막고자 쓰고 버리는 일회용 마스크들, 일회용 식품 용기들은 역설적으로 다시 지구 환경 파괴에 일조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지구의 온도를 올리고 바이러스가 증식하기 쉬운 환경을 만든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우리는 살기 위해 끊을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암담한 역설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대지와 마시고 있는 공기와 물을 더럽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살기 위해 사랑과 접촉과 신뢰를 거부해야 하는 비대면의 관계의 풍토에도 적응해야 한다. 때로는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삶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친구를 만나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일, 부모님과 식사를 하는 일, 연인과 입맞추는 일이 가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찔하다. 나의 모든 일상이 최악의 경우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간접적 가해가 될 수 있다. 




















저자 정혜윤은 피렌체의 보카치오가 흑사병으로 부모와 친구를 잃고 쓴 <데카메론>의 열 가지 주제를 가지고 21세기의 코로나 시대의 사랑의 이야기를 쓴다. 디스토피아를 통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의 감각을 중세에서 근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시대의 인문학자의 농염한 사랑의 테마로 재편한다. 그것은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재해를 조금 더 본질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에서 다시금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욕망하고 생존하느라 짓밟고 간과했던 것들을 비로소 응시할 수 있는 관조의 시간을 선물받는다. 그것은 아프고 사무치는 일이다. 우리가 파괴하고 우리가 떠나보낸 지구의 근원적인 아름다움, 생명들을 다시금 찬찬히 돌아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카뮈의 <페스트>,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오릭스와 크레이크>, 어슐러 K. 르 귄의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등 수많은 텍스트들이 정혜윤의 언어를 통과하여 정리되고 팬데믹의 시대의 각주이자 미주가 된다. 우리가 막상 온몸을 담그고 있어 그 어떤 전체적인 조망도 불가능한 현실이 무언가 조금 더 투명하고 명징하게 떠오르는 느낌이 드는 읽기다. 


그녀는 잃어버린 사랑, 회복기의 사랑에 기댄 낙관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 때 우리가 꿈꾸는 내일은 디스토피아를 통과하고 유토피아로 상승한다. 믿고 싶다. 아이들이 마스크를 벗고 친구와 함께 떡볶기를 먹고 노래를 부르는 게 꿈이라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건 내가 누렸던 어제인데 그 어제를 마치 내일처럼 기약해야 하는 건 참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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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2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3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1-02-13 2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인류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쉽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이 전대미문의 팬데믹은 과연 얼마나 더 인류와 지구 곁에 머물지 궁금합니다.

blanca 2021-02-14 10:49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은 더 잘 체감하실 것 같아요. 인정하고 나면 순간순간 더 마음이 내려앉아요....그냥 인간의 존재 자체가 지구에 해가 되는 느낌...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단발머리 2021-02-15 1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작년 3월, 4월이 제일 힘들었구요. 차라리 지금은 반 정도 포기한 상황인데 조카 아이를 보면 이제 초등 2가 되는 조카를 생각하면 맘이 그렇게 우울해요. 학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옆에 친구랑 이야기 하지 마‘였구요. 짝궁이 뭔지 몰라요. 거리두기 때문에요 ㅠㅠㅠ
저도 이 책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나온 줄은 알고 있었는데 블랑카님이 읽으셨다니 저도 읽어야겠다는 그 어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염 도시>가 기억나네요. 저 그 책도 블랑카님 소개로 읽게 되었더랬죠^^

blanca 2021-02-19 15:40   좋아요 0 | URL
흑, 제 아이가 그 코로나 1학년입니다. 친구들 얼굴도 잘 몰라요. 요새는 아이들 몸을 서로 터치하는 놀이를 하면 애들이 운다면서요. 저도 어느새 마스큼 안 쓰고 걷던 때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요. <감염 도시> 다시 읽어 보고 싶네요.^^
 

윌라 캐더의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19세기 중반 뉴멕시코 교구 사제로 온 장 마리 라투르 신부의 서사적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사제의 이야기지만 종교적 틀 안에서만 한정되지 않고 선교를 펼치는 지역의 멕시코 원주민과 인디언들의 토속 신앙과 관념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흩뿌려져 있다.  사제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태생과 문화, 심지어 신앙을 가지고도 교감하고 사랑할 수 있는 접목의 지대에서 돋보인다. 이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작가의 선구자적 통찰과 포용력이 없이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확장의 영역이다. 뿐만 아니라 윌라 캐더의 전매특허라 할 만한 장대한 풍경의 묘사가 일품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보여주듯 그녀의 묘사적 언어는 날카롭고 찬란하다. 언어가 상기하는 감각적 심상의 폭과 깊이가 경이롭다.


 


자연을 자신의 편의대로 가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각과 그것에 어떤 변형이나 훼손없이 공존을 도모하는 인디언들의 시각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 죽음을 어떤 불가피한 종말이 아니라 하나의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관조하는 사제의 모습은 이 이야기의 백미다. 또한 사제에게서 세속적 욕망을 제거해버리지 않음으로 하나의 온전한 인간상을 창조해 낸 것 또한 미덕이다. 인간적인 욕망, 무언가를 건설하고 남기고 싶은 마음은 낯익은 것이다. 그 낯익음 속에서 지향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공감을 얻는다. 


주교의 인생에 있어 마지막 몇 주일 동안, 그는 죽음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것은 지나간 <과거>였다. 미래는 미래 스스로 저저로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죽어 가는 것에 대해 지적인 호기심이 있었다. 한 인간의 믿음과 가치의 척도에 있어 일어나는 그 변화에 대해...... 점점 더 생각할수록 그에게 인간의 삶은 자아의 경험, 말하자면 자아 그 자체가 아니라 자아가 겪는 경험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그의 종교적인 삶과는 별개라고 생각했다. 

-윌라 캐더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p.323


인간의 삶은 자아의 경험"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지나가는 모든 일들을 통과하며 견딜 수 있다. 그 일들에 잠식되거나 무릎이 꺾이거나 하는 대신 그 모든 일들을 경험하고 그것이 과거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그것들을 회고하게 될 것이다. 그때의 선택과 행위를 섣불리 심판하는 대신 그 불가피함 속에 오롯이 견뎌낸 자신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종국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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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2-07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일들에 잠식되거나 무릎이 꺾이거나 하는 대신 그 모든 일들을 경험하고 그것이 과거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이 책도 궁금하네요. 레삭매냐님께서 극찬하셨을 때부터 궁금했는데, 블랑카님께서 읽으신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읽으니까 더 읽고 싶어지네요 ^^

blanca 2021-02-08 09:59   좋아요 1 | URL
윌라 캐더는 사랑입니다...

단발머리 2021-02-07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디언 마을의 사제 이야기라는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백미라고 하셨던 부분, ‘죽음을 하나의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관조하는 사제의 모습‘에 대한 부분이 무척 궁금합니다.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1-02-07 18:33   좋아요 2 | URL
<나의 안토니아>,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통장 잔고가 남아 있는 한 그냥 구입, 소장하셔야 할 책입지요.
더 말을 보태는 건 구차한 일일 정도로요. ㅋㅋㅋㅋ 이러다가 후회하셔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

단발머리 2021-02-07 18:42   좋아요 0 | URL
저는 책 한 권에 혹했는데 이리 한권 더 던져주고 가시렵니끼?!? @@

다락방 2021-02-07 18:47   좋아요 2 | URL
저 < 나의 안토니아> 소장한지 십년 넘었어요. 네, 아직 안읽었고요.. 🙄

단발머리 2021-02-07 18:49   좋아요 1 | URL
일단 구입, 소장각이라 하시니 읽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가 봐요🙄

Falstaff 2021-02-07 19:10   좋아요 1 | URL
아이고, 뭔 말을 못해요. ㅋㅋㅋㅋ
이 책하고 안토니아는 쉬운 얘기로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란 말씀입죠.
후회하시면 제가 책값 물어드리겠습니다. 저, 절대로 열린책들하고 자매결연 맺지 않았습니다. ㅋㅋㅋㅋ

아냐, 아냐.... 안토니아만 걸기로 하겠습니다! 자고로 남아 일언은 풍선껌이니, 제 맘입니다. 하하하.....

단발머리 2021-02-07 19:28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나의 안토니아> 재미없으면 폴스태프님이 책값 물어주신대요. 저 살까요?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2-07 19:27   좋아요 0 | URL
일단 사시는 게 옳은 결정 같아요. 그 다음은.... 모르겠어요. 일단 사세요!! ㅋㅋ

blanca 2021-02-08 10:01   좋아요 1 | URL
ㅋㅋㅋ Falstaff님 당연히 여성분이라 생각했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 다 해주셨군요. 저는 <우리 중 하나> 너무 읽고 싶은데... 번역 얘기 때문에 망설여져요. 원서로 읽자니 너무 피곤하고요..

다락방 2021-02-08 10:34   좋아요 0 | URL
저는 우리 중 하나 도 사뒀어요. 저를 어쩌면 좋을지...😔

잠자냥 2021-02-08 16:25   좋아요 0 | URL
푸하하. 폴스타프 님 여성설! ㅎㅎㅎㅎㅎㅎ

Falstaff 2021-02-08 17:25   좋아요 2 | URL
ㅋㅋㅋ 저도 여성설이 재미있어서 답글을 달려고 했는데 <나는 고백한다>가 느므느므 재미있어서 도무지 짬을 못 내겠더라고요.
이제 3권까지 다 읽었습니다. 말 그대로 강추!!!!
오늘은 도미회에 쐬주, 낼은 조상님 성묘, 모레나 독후감 쓸 예정입니다. 크하, 개봉박두!
 

소용이 전부처럼 실질처럼 호도되는 사회에서 가장 소용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누군가는 책을 읽는 일을 그렇게 이야기한다. 


어떤 우울과 생의 급박한 일들이 한꺼번에 닥칠 때 역설적으로 더 그런 일을 생각하게 된다. 걱정을 하고 거기에 침잠하고 모든 소용과 실질로 달려가는 일 대신 물러나고 읽고 쓰는 일, 고리타분한 것들,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에 푹 빠져버리고 싶다. 사는 건 이런 게 아니라고 믿어보고 싶어지니까 그렇다.





이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 제목만으로 저자와 번역자에게 큰 빚을 졌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 말이 너무 좋아 계속 곱씹으며 이미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좋아해 버렸다. 그리고 읽고나서는 더 좋아졌다. 사실  서문부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정경을 그리면 그냥 지게 된다. 이런 삶도 있다.


영하45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속 노역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초상화 밑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에 대한 강의를 열중해 듣던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나는 감동에 젖어 프루스트를 생각하곤 했다. 코르크 벽 탓에 난방이 조금 과하게 된 방에서 죽은 그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종일 일하고 돌아온 폴란드 포로들이 게르망트 공작 부인 이야기나 베르고트의 죽음, 또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그대로 전해주고자 했던 그 소중하고 아름다운 내면 묘사를 그토록 집중해 듣고 있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놀라고 감격할까, 하고 말이다. 더욱이 그가 죽은 지 20년이나 됐을 때였는데 말이다.

-유제프 차프스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그렇다. 저자 유제프 차프스키는 소비에트 연방 그랴조베츠 포로소용소에 함께 수용되어 있던 포로들을 위해 그곳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참조할 그 어떤 책도 심지어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단 한 권도 그는 소지하고 있지 않아서 모든 것을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대목을 거의 정확하게 기억해서 인용했다. 죽음이 지척에 있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신뢰할 수 없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포로들은 절망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는 대신 가장 안 어울릴 것 같았던 지적 환희를 위해 그 빵 한 조각 나오지 않는 배움의 시간을 기꺼이 공유한다. 포로들이 각자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에 종사했던 직업에서 가져온 머리 속 지식으로 각 분야에서 스승이 되었고 열성적으로 제자가 되어 이 은밀하고 위험한 수용소 대학은 문을 열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유제프 차프스키의 프루스트에 대한 강의록이다. 


우리는 지적 노동을 해서라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우리를 잠식하는 쇠약과 불안을 극복하고 뇌에 녹이 스는 것을 막아야 했다.

-유제프 차프스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이러한 배경을 차치하고라도 이 프루스트 강의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프루스트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다 갖춘 경이로운 통찰을 준다. 프루스트의 그 처절할 정도의 정밀한 거리두기식 관찰기가 가지는 궁극의 의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빠지면 정작 잘 안 보이는 맹점이다. 이것을 한 발짝 떨어져서 거시적으로 통시적으로 종합하고 분석해 주는 강의가 더없이 필요한 이유다. 나는 마치 그 수용소에서 그들과 함께 바닥에 앉아 차프스키의 열성적인 강의를 듣는 착각이 들었다. 그에 따르면  프루스트는 무엇보다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 인간을 관류하는 시간, 그 흐름 자체를 구현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분권은 그에게 반하는 하나의 타협이었다. 시간이 파괴하는 모든 것, 변질시키는 모든 것, 그럼에도 궁극에 그를 사로잡은 그 단 하나의 의미를 그는 자신의 생과 뒤섞인 작품 그 자체로 구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단 한 권'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가 원했던 형태가 아닌 것이다. 행갈이도 여백도 장도 부도 없기를 그가 소망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어느 죽어 있는 하나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평행우주 같은 우리의 또 다른 삶 그 자체가 되기를, 그 흐름 자체를 형상화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얘기였다. 기억과 회상,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섞여드는 그의 서술은 그러니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의 기법이 아니라 치밀한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들 그 자체, 느끼는 생각하는 그 행위 자체를 언어로 포획하는 일이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그것의 구현을 위해 자신의 삶 자체를 제물로 바쳤다.


프루스트 강의는 그들이 인간 이하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안전망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감상하고 때로 그것을 위해 삶도 바칠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을 경청하며 때로는 살아남고 때로는 견디고 때로는 그대로 죽어 버렸을 그들의 그 빛나던 시간을 잠시나마 엿본 것만으로 나는 많은 위안을 얻었다. 차프스키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프랑스 예술에 바치는, 내 소박한 감사의 공물"에 나도 나름의 소박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지향해야 하는 하나의 별을 그가 가리켜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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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4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4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