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좋은 회사에 입사했는데 그 회사의 실체 자체가 거대한 사기에 불과하다면. 게다가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나는 이미 기밀을 유지하기로 맹세를 했고 그 약속을 어길 경우 어마어마한 재정적 손실과 더불어 가족의 안위에 대해서도 협박을 당하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회사를 박차고 나오거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일들을 외부에 드러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신변을 위협하는 온갖 협박과 회유 속에서도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취재한 용감한 저널리스트가 있었기에 이 일은 비로소 세상 바깥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회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증언해 준 수많은 내부 고발자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이 엽기적인 사기극은 현재진행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기업은 평범한 제도,도소매, 서비스 회사가 아니라 의료 기업이라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할 수 있었다. 








스탠퍼드를 중퇴한 젊은 백인 금발 여성이 창업한 최첨단 스타트업 기업 '테라노스'는 자가 기기를 이용하면 간단한 손가락 끝의 채혈을 통해 수백 가지 질병을 조기 진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실리콘 밸리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환상적인 서사 그 자체였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중년 남성 창업자들의 거대 신화를 흔든 엘리자베스 홈즈의 등장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기술업계, 의료계, 정재계가 그 신화를 더 확장하고 심화시키는데 열광적으로 동조했다. 그러나 정작 회사 안에서는 그 신화의 기반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한 직원들의 동요가 있었다. 어설프게 만들어 낸 제품은 기본적인 검사 과정에서도 오작동했고  테라노스는 대신 타사의 제품을 상습적으로 몰래 이용하여 산출된 결과를 버젓이 이용하기도 했다. 이런 사기의 결정체에 루퍼트 머독,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의 거액이 투자됐다. 각자의 분야에서 백전노장인 그들조차 완벽하게 속았다. 


이 사기극과는 별개로 회사 내부에서 일어난 직원들의 착취의 수준 또한 심각했다. 엘리자베스의 숨겨진 연인으로 추정되는 인도인 서니는 직원들을 수시로 감시하고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려 했고 거기에 반항할 경우 모든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비원에 의해 끌려 나가게 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했다. 심지어 화학자 출신의 성실하고 열정적이었던 직원은 테라노스에 일하면서 겪은 일들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아내가 회사에 전한 부고는 함께 일했던 직원들한테 전달조차 되지 않는다. 테라노스는 직원들을 소모품 취급했다. 이의를 제기하거나 진실을 궁금해하는 건 자사에 대한 도발로 간주됐다. 진실에 눈감고 아부하는 직원은 승진시켰다. 


그런 기업이 수조의 가치를 지니고 21세기의 경이로운 성취로 언론에 회자됐다. 엘리자베스는 스티브 잡스처럼 검은 터틀넥을 입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꾸며내어 대중 앞에서 큰 눈을 깜박거리며 인도주의적인 청년 기업가처럼 행세했다. 정작 자신의 직원들의 존엄은 무참히 짓밟았던 그녀가 연기한 인본주의적 기업가의 모습에 모두가 속아 열광했다. 그 거대 집단의 믿음을 흔드는 일은 고독하고 위험한 시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직원 두 명의 활약은 놀라웠다. 특히 국무 장관을 몇 차례나 지낸 조지 슐츠의 손자 타일러 슐츠의 내부 고발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테라노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인 저자 존 캐리루에게 증언함으로써 할아버지와 척을 지고 테라노스의 무시무시한 협박, 감시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끝까지 그들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가 젊었기에 또 부유한 집 출신이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그 일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고 합리화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집안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할아버지는 손자보다 테라노스의 엘리자베스를 더 믿고 싶어했다. 저자인 존 캐리루도 이 젊은이의 윤리의식에 깊이 감명 받았다고 반복해서 얘기하고 있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에리카 청은 테라노스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기꺼이 회사의 잘못된 실험 관행을 당국에 신고했다. 


<배드 블러드>의 저자는 후반부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그 전까지 테라노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시종일관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서술됨으로써 독자는 이 기묘한 사기극의 실체가 십 년 넘게 외부로 노출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그 동인을 스스로 찾아나가게 된다. 모두가 바랐던 미래의 최첨단 진단 기술. 자극적이고 화려한 홍보술 이면에는 산업혁명 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등에 걸머진 직원들은 침묵하거나 아프거나 나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고 의심의 단서를 놓지 않았던 몇몇의 사람들, 그들을 지지하고 믿어준 사람들, 의사로서 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의 본질을 기억했던 이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한 아내의 망부가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거대한 허구 속의 실낱 같은 진실을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21세기,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일어난 일은 그래서 명암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인간은 어리석고 때로 악독해지지만 여전히 그 안에 자정의 힘을 품고 있다. 악은 창궐하지만 그 안에서 선은 끝내 죽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을 이용하지만 존엄한 인간을 끝까지 파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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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2-01-26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의적절한 독서를 하셨네요! ^^

blanca 2022-01-26 14:08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2-01-26 1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퍼가 너무 좋아서 이 책 읽고 싶어졌어요. 왜 항상 다른 사람들이 읽는 책은 재미있어 보이고 꼭 읽어야할 것 같고 그럴까요?
이 책도 담아갑니다. (오늘 열 권 주문한 사람이...)

blanca 2022-01-26 14:11   좋아요 0 | URL
열...권이요? ㅋㅋ 그거 도착하면 인증샷 꼭 올려주세요. 대리만족 하게요. 저 이번 달은 이제 못 사요. 이북과 도서관 대여로 해결하자고 결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미 무너졌습니다.

하이드 2022-01-26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믿기지가 않죠? 뭐에(탐욕에) 눈이 씌워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대단합니다. 엘리자베스 동영상 찾아보면 검은 목폴라에 목소리 저음 내는 것 나와요. 정말 이 세대의 전무후무한 스캔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거 제니퍼 로렌스 주연 영화로 나오는데,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blanca 2022-01-26 14:12   좋아요 1 | URL
오, 영화로 나오는군요. 이 책 자체가 영화 같아요. 너무 놀라운 게 이런 사기극이 일이 년 지속되었다 해도 놀랄 텐데 자그마치 십 년 넘게 유지됐다는 것 자체가 엽기적이에요. 게다가 엘리자베스 소송 중에 재벌남 만나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고 해서 또 놀랐어요.

레삭매냐 2022-01-26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김지윤 박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배드 블러드>의
주인공을 다룬 프로그램을 본 기억
이 나네요.

증권거래 주작질 혐의는 유죄지만
혈액 검사로 환자들을 농락한 죄에
대해서는 무죄 판명이 났다는 점이
정말...

노친네들이 돈에 눈이 멀어 희대의
사기꾼을 비호하는 장면은 상상이
가질 않네요.

blanca 2022-01-26 14:15   좋아요 0 | URL
저도 그거 봤어요. 자살한 직원도 있는데...어떻게 그런 판결이...오히려 환자들 혈액 검사로 그런 사기를 친 거에 대해서 더 중벌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테라노스 근무 환경 묘사해 놓은 거 읽으니 정말 부글부글 끓더라고요. 지옥 같았어요. 생계를 위해 참고 다녀야 했던 사람들 생각하면...

persona 2022-01-26 13: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애시당초에 피 한방울로 그런 걸 알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런 기술 있다고 해서 한참 이해를 못했던 기억이 있네요. 일본에서 만능세포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어이없었어요. 둘다 어린 여성이 나와서 세상을 들썩이길래 응원해주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정작 황우석 박사님 이야기는 다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믿었던 거 같아요. ㅎㅎㅎ 에휴. 저는 돈 관련 부분 보다도 더 나쁜 게 직원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과 기술에 희망을 걸었던 환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줬다는 점 같아요. 그런데 요즘도 마이크로칩 음모론 이런 거 들어보면 참 얼마나 사람이 호도되기 쉬운 건가 싶어져요. 아무리 초소형을 개발하려고 해도 더이상 불가능한 사이즈라는 게 있거든요. 피에 포함되는 정보도 한계가 있을테고요.
예전에 읽었던 카길에 대한 책이나 삼성을 생각한다, 버거의 상징도 떠올라요. 진실을 좇는 행위를 막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걸텐데요.
리뷰 진짜 멋져요. 많이 공감되고요. 좋은 책 추천 감사드려요. ㅎㅎㅎ

blanca 2022-01-26 14:20   좋아요 2 | URL
여러가지가 연상됐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속아줬다는 게 의미심장한 것 같아요. 그 와중에도 협박 받으면서도 끝까지 양보하지 않은 내부 고발자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가정해보게 되더라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ersona 2022-01-26 14:31   좋아요 1 | URL
그렇네요. 기꺼이 속아줬던 사람들도 있었겠죠? 되게 절박한 사람들이었을텐데. ㅠㅠ
 

남고가 내려다 보이는 집에서 산 적이 있다. 쉬는 시간, 점심 시간만 되면 시계처럼 남학생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정말 그날은 무슨 일이 난 줄 알았다. 거의 포효 수준.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바깥을 내다보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자애들은 운동장에 드러눕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고 무슨 대단한 축제라도 벌어진 양 비명을 지르고 엎어지고 웃고...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절로 웃음이 났다. 아직 이 아이들은 어른이 아니구나.


그런데 어제의 눈은 다르게 다가왔다.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럽다, 미끄러운 길에서 넘어지면 골절이다, 라는 이 재미없는 명제에 집착해서 조심조심 땅을 딛고 가느라 긴장으로 온몸이 경직됐다. 오랜만에 내린 함박눈의 낭만은 전혀 생각도 못하고 춥고 힘들다,는 생각만 가지고 더듬더듬 길 위를 다니는 내 모습이 참. 나도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싶었다. 눈이 오면 신나서 막 환호성을 지르던 시간은 벌써 저만치 물러가고. 
















소설가 이상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정지돈 작가의 책에 자주 등장하는 친구인데 호기심에 검색해 보니 2011년 <중추완월>이라는 작품으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고 나와 있었다. 당시로서는 전형적이라 받아들여지지 않는 소설의 방식으로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대단한 작품이었다,라는 게 중론이다.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다고만 생각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지금까지 읽은 그 어느 단편과도 달랐고 압도적으로 좋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잉여와 부족함을 모두 발라 본질만 남긴 것처럼 명료하다. 장소도 시간도 특정되지 않은 곳에서 살인과 시체의 처분이 일어난다. 과거의 기억과 심지어 자신의 정체성마저 박탈 당한 주인공이 '손'과 나누는 교감은 경악스럽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다. 읽기 편한 이야기는 아닌데 그 불편함이 단순히 자극적인 말초적 감각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여운이 길다.


"어차피 우리는 갈 곳이 없잖아."라는 주인공의 독백, 대화에 절로 숨이 멈춰졌다. 중추절, 갈 곳도 불러주는 곳도 없는 그 틈새에서 타인의 손과 나누는 유대라니...

















카렐 차페크의 인생은 길지 않았다. 그는 노년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죽었다. 그의 앎은 그래서 중년에서 머물렀을까? 아니면 그 너머로 더 빨리 단시간에 뻗었을까. 후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막연하게 자주 생각했던 한 인간의 다양한 정체성에 대하여 다각도로 다면적으로 접근한 이야기. 평범하고 성실한 한 인간의 내면에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의 군상들이 모여 있는지 형상화한 대목들. 애거서 크리스티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오늘의 의인이 내일의 좀도둑이 될 수도 있는 게 인간이라고.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과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이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쉽게 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인생은 결코 정합적이고 일관된 스토리라인으로 구성할 수 있는 손쉬운 글감이 될 수 없다. 그 모순과 어그러짐 자체가 생명의 역동성이다. 
















철학자 존 캐그가 윌리엄 제임스의 "실존적 생명 구조법"을 알려주고자 한 책이다.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로서의 제임스의 이야기들은 제임스의 삶과 저자 캐그의 삶과 독자의 삶을 한데 모아 비로소 이해된다.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집은 대리석으로 지은 숭배의 장소가 아니라 거주하면서 세계와 만나는 장소다.

-존 캐드 <아픈 영혼을 위한 철학>


나의 경험의 틀 안에서 실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 실재는 주관적이고 가변적이나 무용한 것이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내가 어제 경험하며 정립한 나만의 그것은 오늘 기꺼이 다른 경험에 의해 수정될 수 있다. 그 가변적인 지점을 인정할 때 삶은 무의미에서 벗어난다. 내가 진리라 믿었던 것들이 붕괴된다고 해서 바로 무의미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제임스도 캐그도 예기치 않았던 삶의 난관을 통과하며 그들 자신의 절대적이었던 가치들을 수정하고 보완하며 나아갔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신선하다. 나날이 개선된다. 그 믿음이야말로 윌리엄 제임스가 시종일관 잃지 않았던 인생에 대한 낙관이다. 


그러니 내리는 눈은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꼭 눈싸움을 하거나 거기 위에서 구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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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2-10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blanca 2022-02-11 08:47   좋아요 0 | URL
헉, 감사합니다.
 

어제 꿈 속에서 내가 마스크를 안 쓴 걸 알고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는데...세상에! 광장을 채운 모두가 마스크를 안 쓴 광경이 총천연색(태몽도 아닌데!)으로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꿈속에서도 너무 좋아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보았던 기억이...


2021년도의 마지막 읽고 있는 책.

















아직 초반부 읽는 중인데 나는 왜 저자가 영국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을까. 사회적, 경제적 계급에 따른 교육 환경의 격차가 유독 큰 나라로 기억하고 있어서였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탈출하고 싶었던 원가정을 다시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 복기하는 여정이 많은 것들을 환기한다. 단순히 개인적 회고에 머무르지 않는 그 지점이 빛난다. 객관화된 주관적 글쓰기의 진가가 발휘되는 책이다.

















20대 기자들이 바라본 소년범들의 세계. 언론에서 소비하는 소년 범죄의 잔혹함은 그들을 사회에서 영영 추방하거나 성인 범죄자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방조하게 되는 길로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문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 촉법소년의 폐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나쁜 어른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제대로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들이 그 엄청난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 추방되기를 은밀히 바라는 마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특히 성적 자기 결정권을 학습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채 자라나는 소녀들의 이 아직 덜 자란 아이들의 범죄의 세계의 가장 밑바닥 생태계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가슴 아팠다. 어른들의 가장 고질적인 악을 그들에게서 모방하여 다시 재생산하는 아이들의 취약한 세계. 심지어 그런 아이들의 취약성을 악용하는 간악한 어른들. 


세밑에 읽게 된 책들이 어둡다. 그 어두움을 어떻게 뚫고 나아가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알라딘 식구들 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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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이 가는 시점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기고 싶은 올해의 책들을 추려본다. 좋았던 책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다시 읽게 될 것 같은 책을 중심으로.


▶인문/과학




방대한 분량, 사 세기에 걸친 과학자와 시인, 소설가의 이야기는 언뜻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엮어낸 거대한 모자이크를 들여다보면 그 촘촘함과 조화로움이 가지는 아름다움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요하네스 케플러의 꿈에서 출발하여 마거릿 풀러의 묘비 앞에서 맺는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개개의 삶이 가지는 그 찰나성과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이 끝내 좌절당하고 사랑이 떠나갈 때의 그 가차없음에 대한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 남아 죽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하여 우주적 관점에서 조망한 것이다. 크고 빛나는 이야기들.











흔히 베스트셀러는 그 깊이와 완성도에 대해 의심당하는 경향이 있다. 다 좋다고 하면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것 같은 느낌. 말초적이고 단편적이고 무언가에 영합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좋은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을 사변적이고 추상적으로 이야기해야 그 본질에 더 충실한 것이라는 시선은 하나의 편견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이야기. 얄팍하지 않으면서 흥미롭고 진지하면서 금세 실제 사례로 가닿는 그의 능수능란한 글솜씨에 절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책이다. 재미있고 뭉클하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소설




어렵다. 어려운데 매력적이다. 작가가 이 책 한 권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쏟아부었는지 그 공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책이다. 과연 우리가 죽음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죽기 직전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 삶이라는 게, 사는 일이라는 게 생명을 전제로 하는 한 죽음을 제대로 완벽하게 연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그 근사치에 처절하게 가닿으려는 노력 그 자체를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사는 일과 죽는 일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더 깊어지고 넓어지지 않을까. 한 구도자의 구도 과정을 목격하는 것 같은 느낌의 읽기였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 것인가 싶을 정도로 나의 이해는 피상적이었다. 나머지는 사는 일과 읽고 생각하는 일들로 채워질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 묘한 사투리의 리듬감, 삶의 고단한 그 여정의 간이역에서 채워지는 구수한 입담들이 주는 즐거움도 읽는 재미를 준다. 










지루하고 어렵고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효하고 시의성 있는 질문을 품고 있는 문제작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과 인생, 무엇보다 인간의 그 불완전함을 한계치까지 밀고 나가 탐구하고 이해하려 했던 작가다. 그의 펜끝에서는 삶의 속살과 인간의 심연이 기어이 드러나고야 만다. 그 끝에 절망으로 침잠하지 않을 수 있는 작가는 그가 유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만든 캐릭터들은 분명 실존한다. 우리의 뒤에 우리의 옆에 바로 우리의 속에. 위대한 이야기다.









남성 작가가 여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흔히 대상화되기 쉽다. 표피적이고 단편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한계를 깨고  그 여성의 내면에 들어가 그녀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작가가 윌리엄 트레버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에는 필연적으로 작가의 세계관이 윤리관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익명으로 죽어간 소녀들을 흔들어 깨우고 그녀들의 이름을 찾아준 이 대작가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에세이




체코의 국민작가인 차페크의 열두 달 정원에 관련한 글이 맞다. 맞는데 신변잡기 에세이가 아니다. 묵직하고 감동적이고 심오하다. 그런데 동시에 귀엽고 사랑스럽고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정원과 사랑에 빠진 중년 남자가 그 정원의 땅 위에 우스꽝스럽게 엎드린 모습이 그 작가의 형의 삽화로 직접 재현된다.


세계적인 작가의 정원 가꾸기 분투기는 이 작가의 책을 더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최고의 홍보문이다. 










▶기타



전설적인 시나리오 작법서. 영화 제작자나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의 교본처럼 칭송되는 책이지만 그런 것과 전혀 무관한 그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책이다. 인간의 본성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그 어떤 철학자나 소설가보다 흥미롭고 깊이있게 얘기되는 책이다. 심지어 인간 관계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심리학이나 처세술이 아니라 이 책에서 의외의 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원형을 이야기하며 인간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밖에.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서 그들의 그림책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부모로서 아이를 키우는 자세에 대한 금과옥조 같은 조언들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을 오늘날의 작가로 성장시킨 유년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가장 가치를 두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2022년에는 더 행복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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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1-12-28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ore and more 행복해지시길~

blanca 2021-12-29 07:40   좋아요 0 | URL
덕담 감사합니다. 기억의집님도 점점 더 행복해지기를...

stella.K 2021-12-28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년엔 더 행복해질 거예요.^^

blanca 2021-12-29 07:40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도 같이 행복해져요. 감사해요.

psyche 2021-12-29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옛날옛날에 읽은 죄와 벌을 빼고 읽은 책이 하나도 없네요. ㅜㅜ blanca님 더 행복한 2022년 되시길!

blanca 2021-12-29 16:28   좋아요 0 | URL
프쉬케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건강하시고요!
 

코로나 시대에 생명의 무게를 생각해본다. 특히 요양원과 중환자실에서 코로나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그들의 존재를. 어떤 것이든 드러내어 놓고 말하기 힘든 기준 아래 익명화되는 그 존재의 존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그것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언제까지나 남의 일이 될 수 없는 그 나약함. 


"하지만 인간의 목숨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 해도,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인간의 목숨보다 더 값진 것처럼 행동하죠."

-생텍쥐페리 <야간비행>


















가여운 이들.흔들리는 가여운 불꽃들. 더듬거리며 말하는 별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점은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안 보뱅의 아버지는 마지막 1년을 알츠하이머로 요양원에서 보낸다. 보뱅이 요양원의 노인들을 보고 쓴 글은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편협함을 일깨운다. 자본주의의 눈먼 경쟁에서 밀려나 타인을 짓밟고 올라설 필요가 없는 그들의 존재가 가지는 가치에 대하여 보뱅은 얘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있음이 가지는 그 계량화될 수 없는 의미에 대하여. 


코로나 시대에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을 이미 이야기한 작가들의 글에서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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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5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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ଫ/⌒づ🎁

blanca 2021-12-25 11:05   좋아요 1 | URL
오, 귀여운 토끼가. 스캇님도 메리크리스마스!

그레이스 2021-12-25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간비행!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다시 읽고픈 소설이예요.~♡

blanca 2021-12-26 09:59   좋아요 0 | URL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라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이제서야 읽다니 하며 놀랐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