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니 부모가 부자에 너그럽고 전적으로 '나'를 신뢰한다. 하나뿐인 여동생은 오빠를 더없이 존경하고 사랑한다. 주변의 모든 사람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나를 사랑한다. 우연히 방문한 아름다운 저택의 교양 있고 친절한 주인은 나를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있고 싶을 만큼 있으며 내부의 온갖 예술 작품을 마음껏 감상하라 한다. 마침 그곳을 방문했던 그의 수양딸과 나는 동시에 서로에게 반한다. 마침내 우리 둘은 맺어지며 양가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 받는다.


언뜻 들으면 웹소설 저리가라 할 만한 단편적이고 비현실적인 동화 같은 스토리다.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이 주인공에게 이렇게까지 끝까지 호의적인 경우는 사실 웹소설도 잘 없다. 어떤 갈등도 분란도 상실도 없다. 우연히 만난 여자와의 가약에도 양가가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그런데 기이하게 매력적인 깊이를 자랑한다. 심지어 괴테를 계승한 성장소설이라는 평을 듣는다. 처음에는 저자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삶이 너무 단조롭고 잘 풀려 이야기도 그런가 싶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저자는 자살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성장에 대한 대한 짙은 신뢰가 큰 몫을 한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장미로 뒤덮인 리자흐 남작의 아스퍼호프 대저택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물과 예술에 대한 감식안을 가지게 되고 성장을 이루어 낸다. 리자흐는 젊은 시절 자신이 가정교사로 일했던 집안의 딸인 마틸데와의 실패한 사랑의 추억을 가지고 있으나 노년에 다시 남편을 잃은 그녀와 재회하여 그녀의 아들과 딸을 함께 양육하고 가산을 공동으로 돌본다. 주인공은 리자흐의 상실에 대한 하나의 이상적인 대안적 삶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리자흐처럼 사랑에 실패하지도 그것으로 인한 절망을 경험하지도 않지만 리자흐 남작의 이야기를 통해 그것을 대리로 체험한다. 반드시 이러한 것들이 나에게 이 생에서 일어나야 의미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통과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리자흐 남작이 살지 못했던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름다운 시절의 합일을 이루어 낸다. 


결국 젊은 나는 리자흐 남작의 잃어버린 초여름이 아닌 다시 찾은 "늦여름"을 형상화하는 존재로써 자리한다. 그 모든 순탄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싶었지만 끝내 누릴 수 없었던 삶의 평행우주적 이상화인지도 모른다. '내'가 뇌우를 기다리며 만났던 리자흐 남작이 결국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이 지점이다. 


<늦여름>은 대자연과 온갖 예술 작품에 대한 심미안에서 나온 묘사의 절창이 백미인 작품이다. 인물들이 경험하는 일련의 사건들과 인물 간의 갈등 요소가 아니라 예술과 경이로운 자연의 풍광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전면으로 부각된다. 우리의 삶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배경이고 부수적인 배경이라 여긴 것들이 중심으로 나오는 그 자체를 즐기는 읽기는 어떨까. 이런 삶은 머리로만 상상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기면서도 슈티프터의 <늦여름>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절망에 함몰되기보다는 미약한 희망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존재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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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10-18 1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중에서 제일 좋아합니다. 그래 이 페이퍼가 더욱 반가웠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서사는 별개로 하고, 아달베르트 슈티프터가 자연 - 꽃, 나무, 숲, 암석, 화석 등과 예술품을 바라보는 미학적 시선이 정말 좋았었습니다. 읽는 내내 행복했던 기억이 멈추지 않는군요.
점심 잘 먹고와서 블랑카 님 덕분에 한 번 더 기억 속의 호사를 합니다.

blanca 2021-10-18 13:32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중간에 지루해서 덮고 싶어지는 걸 풀스타프님 페이퍼 읽으며 참고 읽었어요^^;; 그런데 이 책 참 묘해요. 재미는 없는데 맞아요, 그냥 다 잘 풀리니까 읽는 내내 행복해져요. 판타지와는 다른 차원의 힐링이었어요. 고상한 것, 이상주의적인 것, 아름다운 것을 이렇게 마음껏 누리는 세계가 독서 아니면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읽는 시간 참 행복했습니다. 말씀 대로 저도 덕분에 호사를 누렸습니다...너무 우아한 읽기였어요.
 

"언니,지금 내 몸에 하는 건 십 년 뒤에 반드시 돌아오게 돼 있어."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그녀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오 년 전에 한 이야기다. 난 당시 지독하게 진한 아메리카노를 하루에 서너 잔 우습게 들이붓고 있는 중이었다. 속은 아주 가끔 쓰렸지만 받아주니 나는 개의치 않고 매일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 각성의 느낌이, 하루에 여러 번 아침을 맞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내 몸에 불친절했다. 


그로부터 십 년도 흐르지 않았는데 그녀의 말처럼 나는 역습을 맞고 있다. 이젠 라떼 한 잔도 속이 쓰려 아껴 먹는다. 그렇다고 내 젊은 날들을 몸에 좋은 것만 하며 수도자처럼 살았다면 절제와 관리와 중용의 길을 걸었다면 나는 후회하지 않았을까. 좀 낭비하고 실수하고 무절제하고 그러기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합리화해본다.

















자기 관리가 미덕인 시대, 새벽에 일어나 모닝페이퍼를 쓰고 샐러드를 먹고 홈트를 하는 젊은이들의 브이로그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박상영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매일 진다. 무엇에? 야식에. 배달음식에. 이런 실패와 자기 관리의 좌절의 이야기는 낯설다. 낯선데 너무 공감이 가서 계속 맞아, 맞아 하며 읽게 된다. 우리는 진다. 때로 지며 살아 나간다. 살아왔다. 하루키처럼 매일 달리고 두부만 먹고 해야 할 일만 하며 그렇게 잘 살면 좋겠지만 매일 실망하고 넘어지고 낭비하고 그렇게 여기까지 온다. 그것도 삶이다. 오늘 아침에는 커피를 안 마시기로 했는데 마셔 버리고 쓰는 페이퍼다. 


그의 신간이 나왔다...
















때로 단순하고 덜 복잡하게 무념무상으로 이 복잡한 세상을 헤쳐 나가고 싶다. 그런 면에서 제목과 표지가 좋다. 여전히 밤에는 야식을 먹고 배가 부른 채로 잠드는지 위염과 역류성식도염은  요즘 좀 어떤지 궁금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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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9-30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를 당분간 안 마시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 않을까요?
어제 TV에서 그러는데 공복에 커피를 마셔 보라네요.
장 운동이 활발해져서 배변에 도움이 된다고.
근데 잊기도 했거니와 기억 났어도 자신이 없더군요.
빈속에 커피 마시면 속 쓰려서.
근데 전 찬바람 나면 장이 잘 안 움직여서 연하게 마셔 볼까 생각중이어요.^^

blanca 2021-10-01 10:23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는 카페인 중독이라 그게 정말 너무너무 어려워요.--;;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scott 2021-10-12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를 대체 할 수 있는 음료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렇게 기온차가 큰 계절로 접어 들때는 ㅎ

blanca 2021-10-13 07:56   좋아요 0 | URL
커피 대체 음료는 정말 없어요...그 쓰디쓰면서 달콤하면서 각성을 주는 맛!
 

벨기에의 그림책 장인 키티 크라우더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서 추천한 책은 의외로 한국인 소설가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이다. 그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주변인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고 했다. 키티 크라우더의 부모로서 아이들 양육에 관련한 조언도 참 좋았지만 유럽 그림책 작가가 아시아의 그것도 한국의 소설가의 작품을 주변인에게 추천한다는 이야기가 참 인상적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안 읽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난 그의 원작을 대면할 수 있지 않은가. 


















이승우 작가의 <식물들의 사생활>은 작품성도 작품성이지만 일단 이야기 자체가 단숨에 읽힐 정도로 몰입감이 좋다. 끊임없이 긴장감이 유지되고 그 사이를 촘촘하게 사유 깊은 문장들로 채워간다. 사실 사창가를 배회하는 주인공의 도입부에 좀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화자 기현이 그 사창가에 가게 된 연유를 짚어나가다 보면 작가가 여성을 도구화하기 위해 그 장면을 초반부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게는 군에서 사고로 두 다리를 잃게 된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형 우현이 있었다. '나'는 매사에 나보다 뛰어난 형에게서 열등감을 느꼈고 그의 여자 순미에게 몰래 연정을 느끼게 된다. 형의 삶이 무너진 데에 나는 본의 아니게 역할을 하게 되고 그 죄의식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나는 저도 모르게 형의 삶 속으로 속죄처럼 들어가게 된다. 그의 헤어진 연인을 찾아내고 그의 진짜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형의 것들을 욕망했었고 그것을 가진 형을 때로 질투하다 마침내 다 잃어버린 형 앞에 채무자처럼 서게 된다. 나의 삶은 그것의 상환의 과정이 된다. 


이야기는 어머니의 좌절된 사랑과 중첩된다. 언뜻 장애인이 된 아들을 사창가에 업고 가는 그 처절한 비애의 정조로서만 자리할 것 같았던 기현의 어머니는 비극적인 사랑과 남천이라는 성소의 중심에 서 있게 된다. 여기에서는 신체의 훼손으로 욕망 자체에서 탈출하여 나무가 되고 싶어하는 형의 마음과 좌절된 사랑의 염원과 경배를 담은 욕망의 현현으로서의 남천의 야자나무와 이 모든 것들을 초탈하여 자신의 친아들이 아닌 형을 기꺼이 사랑으로 받아준 아버지의 물푸레 나무가 있다. 이 식물들의 사생활은 무력하거나 무생물적이거나 배경에 그치는 것들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좌절들을 승화시키고 포용시키는 해원의 장이자 화해의 지대를 품은 너른 수목의 품에 관한 이야기다. 이승우의 결말은 그래서 허무하거나 형식적이지 않다. 


햇살은 바다 위에 떨어져서 눈물이 된다. 보석처럼 빛나는 눈물. 그러나 나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마지막 문장. 극적인 화해도 재회도 없지만 가족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서 끝을 맺는 작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들 앞으로 여전히 험로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현실과 분투하며 살아나가는 삶의 공통의 장을 공유하는 그 식탁에서 생은 스러지지 않는다. 작가의 그런 긍정의 여지가 자칫 어둡게 침잠하기 쉬운 이야기를 끌어올린다. 키티 크라우더가 주변인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국경과 언어를 넘어 시간성과 생의 온갖 질곡과 충돌하여 좌절되는 인간의 욕망과 사랑을 다른 차원에서 승화시킨 이야기가 보편의 공감을 자아낸 듯하다. 절망하기는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밀고 나간 작가의 저력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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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교보문고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나는 거기에 서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다. 물론 중역본이었고(당시는 그랬다), 축약본이었다. 무척 지루했고 음울했지만 나는 "읽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허영으로 서서 온전치 않은 <죄와 벌>을 말 그대로 활자만 읽었다. 이후로 나는 내가 <죄와 벌>을 읽었다고 착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학생 청년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창녀와 유형을 가는 이야기로 그렇게 기억하면서...





다시 <죄와 벌>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팟캐스트를 듣고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죄와 벌>을 평생에 걸쳐 여러 번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이렇게 활자가 폄하되는 시대에 1800년대의 러시아어로 쓰인 분량도 적지 않은 책이 여전히 읽힌다는 건 분명 그걸 읽음으로써 얻는 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죄와 벌>의 완역본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다시 읽은, 아니 처음부터 제대로 읽은 <죄와 벌>은 놀라웠다. 놀라운 현재적 가치를 지닌 그야말로 위대한 작품이었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고답적이지 않았고 몰입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년 라스콜니코프가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는 점. 가난한 법대생이 아니라 정말 처절할 정도로 극한 빈곤에 시달려 대학 생활도 지속할 수 없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는 점.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바로 뛰어들어 도와주고야 말았던 내적 선함을 간직했던 청년이었다는 점. 끝까지 자백과 은폐 사이에서 갈등했다는 점. 그러한 점들이 새롭게 읽혔다. 그리고 친구 라주미힌. 라스콜니코프 곁을 끝까지 지키고 그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책임지는 그의 우정이 감동적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점은 그가 창조하는 캐릭터가 가지는 설득력이다. 많은 작가들이 죽어 있는 전형적인 인물을 자신의 각본대로 움직이기 위해 활용한다. 잠깐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스토리 자체에 몰입하거나 재미를 느꼈다는 착각을 할 수는 있지만 진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을 창조해내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이 하나의 성취로 가는 경계가 나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모두 살아서 지면을 뚫고 나온다. 특히 라스콜니코프의 여동생 두네치카에게 흑심을 품고 덤볐다 자살을 택하게 되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죽음 전 행적은 인상적이다. 여자를 탐하고 아내를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받는 그가 죽기 전 택한 일은 놀랍게도 자선이었다. 부모를 잃고 의지가지 없어진 소냐의 동생들이 살아나갈 방도를 세심하게 마련해 준다. 유들유들하게 라스콜니코프를 압박해 오는 판사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또한 의외의 면을 보여준다. 그는 언뜻 라스콜니코프의 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에게 삶 그 자체의 가치를 깨닫도록 주도면밀하게 이 청년에게 접근해서 감형을 유도해 낸다. 이 둘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내면을 지니고 궁극의 영향을 주인공에게 끼치게 된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그 사실을 고백할 수 없지만 결국 지금 이 세계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껴안고 어머니 앞에 선 아들의 장면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저릿했다. 



"아, 어쩜 이렇게 더러워졌니."

"어제 비를 맞았어요, 어머니......"


이 짧은 대화만으로 모든 것을 모자는 소통한 것처럼 보인다. 둘이 미처 주고받지 못한 말들 사이로 엄청난 고통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어머니는 전도유망했지만 가난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들에게 이루지 못할 희망을 끝내 환각처럼 간직한다. 살인자로 유형을 떠난 아들. 


결국 자백하고 소냐와 함께 유형을 떠난 라스콜니코프의 엔딩. 마침표는 사랑의 발아다. 나는 이런 결말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음울하고 절망적인 비관적인 결말을 예정하고 글을 쓰는 사람인 줄 오해했다. 이런 아름다운 아쉬운 결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살인자의 이야기를 삶으로 사랑에 대한 기대로 끝낼 수 있는 작가가 이 지구상에 이 작가 말고 또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끝까지 참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지도 않으면서 읽는 이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도.


하지만 여기에서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한 인간이 점차 새로워지는 이야기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점차 옮겨가고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을 알아가며 점차 다시 태어나는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선과 악의 경계, 죄와 벌의 간극, 생과 죽음의 거리, 이 모든 걸 기꺼이 해체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의 지형도를 펼쳐낼 수 있는 그러한 책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은 읽는 일이 가지는 가치를 재발견하게 한다. 나는 오늘 비로소 제대로 <죄와 벌>을 처음으로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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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9-15 19: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두 올해안 죄와 벌은 꼭 다시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도끼쌤 탄생 200주년이라 해서 나름 추모하려구요!ㅎ 30대에 읽은 어설픈 감정만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을 이해할수 있는 좋은 키워드를 많이 던져 주셨네요! 감사드리구요, 즐건 독서하시구요!ㅎ

blanca 2021-09-16 10:26   좋아요 0 | URL
막시무스님, 왜 사람들이 도끼, 도끼 하는지 벌써 태어난 지 200년이 된 작가의 책을 여전히 이야기하고 읽는지 저는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이 사람은 뭔가 경계를 넘어서 훨훨 날아간 사람인 것 같아요. 책의 문장들이 살아 있어요.

다락방 2021-09-15 19: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죄와 벌 다시 읽겠습니다. 저는 열린책들 읽었었는데 아 열린책들로 다시 읽을까요(가지고 있습니다) 블랑카 님처럼 문동으로 읽을까요. 아 너무 빨리 읽고 싶어요!!

막시무스 2021-09-15 19:51   좋아요 2 | URL
책을 읽겠다는 강한 의지는 구매로서 완성된다는 신념을 가진 1인으로서 문동판 구매를 적극 권장드립니다!ㅎ

다락방 2021-09-15 20:05   좋아요 2 | URL
아아.. 왜 이러시는 겁니까……. 흑흑 ㅜㅜ 그게 낫겠죠? 🙄

blanca 2021-09-16 10:27   좋아요 1 | URL
ㅋㅋㅋ 다락방님, 우리의 재독은 소비를 합리화한다. 저는 요새 이렇게 새로 나온 버전으로 다시 고전을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답니다. 새 종이의 감촉을 느껴 보시죠. 가독성이 정말 좋더라고요.

새파랑 2021-09-15 2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글 보니까 죄와벌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 이 책 너무 좋더라구요. 좋은 책은 다시 읽을수록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blanca 2021-09-16 10:28   좋아요 1 | URL
고전이 왜 고전인지 알겠더라고요. 진짜 마지막 장 읽는데 더워 죽겠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고요. 작가는 그냥 태어나는 것 같아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접신들린 작가 같아요. 인물들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냥 도스토옙스키한테 쏟아져 들어온 느낌....

라로 2021-09-15 2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을 읽으니 다시 제대로 읽고 싶어져요!!! 저도 열린책으로 읽었는데 문동으로 다시 읽어볼까요? 그런데 전자책이 없네,, 철푸덕

blanca 2021-09-16 10:30   좋아요 0 | URL
이미 읽으셨군요! 저는 한 권짜리(말도 안 되는 축약본이죠) 완전 오독한 상태에서 제대로 처음 읽으니 정말 너무 너무 좋더라고요. 너무 짧아서 화가 날 정도였어요. 고전은 언제나 다시 읽어도 새로운 감상이...아, 그런데 왜 전자책이 없을까요? 조금 기다리시면 나오지 않을까요? 보니까 세문은 거의 전자책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이십 대와 사십 대가 친구가 될 일은 없다. 친구가 되는 선결 조건은 전제는 일단 연령대가 같아야 한다. 세상을 보는 시선, 세상에 대해 가지는 불만, 기쁨을 느끼는 지대가 겹쳐야 비로소 대화는 시작된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한다고 나는 여긴다.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가 아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에게 하는 조언이나 의견은 잔소리가 된다. 발끈한다. 요즘 애들은 저러니까 안 돼, 저 아줌마는 꼰대스러워. 모든 이해와 곡해는 세대차로 환원된다.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경계한다.


아주 예쁜 이탈리아 친구는 나보다도 훨씬 나이가 어렸는데 나를 자신의 친구라고 불렀다. 아이가 동갑이라 친해진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끝까지 모른 채 헤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우리가 나이 차가 많이 난다는 이유로 애초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여겼다면 우리가 나눴던 그 수많은 교감의 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우정을 그리워한다. 그러한 우정은 나이가 절대적인 경계라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런 교감은 간접적으로 읽기를 통해서 가능할까.
















젊은 작가 서이제의 문장은 특이하다. 확실한 단언형이 아니라 의심과 머뭇거림, 전복과 도치의 그것들로 해체된다. 그런데 어렵지 않다. 난해하지 않다. 그 흐름은 무언가 어떤 리듬감이 있어 이탈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 그리고 심지어 지금 느끼는 것들이 혼재되어 공감을 자아낸다. 나는 서이제 작가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이제 작가는 내가 이십 대에 느꼈지만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추스르지 못한 감정들을 언어로 소환한다. 지금도 여전히 내게 있는 것들을 환기한다. 


길을 걷고 있을 때는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었을 때, 앱으로 지도를 보면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고 있다면, 나는 이런 말도 할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또는 반쯤 왔다고 힘내라고. 또는 한참 멀었다고. 지도를 보면 지금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현 위치와 내가 가야 할 길, 그러나 삶에는 지도 같은 게 없어서,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살아야 했다. 

-서이제 <(그) 곳에서>


우리가 소환하는 청춘에 대한 미화된 이상화된 그리움과 지금 청춘이 그들의 젊음에 대하여 느끼는 현실적 결핍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도 와닿았다. 경제적 성장기에 향유한 우리들의 청춘과 잔치가 끝난 뒤의 그 허탈한 공간에서 방황하며 자신이 살 곳을 찾아 헤매어야 하는 오늘날의 청춘과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에 가슴이 저릿했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더 이야기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젊음은 무조건 좋은 것이다,라고 지금 한창 힘든 젊음에게 얘기하는 것은 결국 의사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돈이 되지 않는 무용한 것들을 꿈꾸는 이야기. 그래서 야단맞다 넘어지는 이야기. 그러한 이야기들에 마음이 가라앉을 찰나에 서이제 작가의 문장들은 부력을 부린다. 진지한데 한없이 무겁지만은 않은 이야기들로 읽는 이들도 덩달아 떠오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만드는 작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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