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올리는게, 글 속에 묻힐 수 있을 것 같아서...올립니다...^^

 

 

네루다의 바다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민음사>를 읽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문학작품보다는 영화 ‘일 포스티노’로 먼저 다가온 작품이다.

 오래전, 시노래모임 ‘나팔꽃’ 공연 때 도종환 시인이 자신의 시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시와 사람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좋은 작품의 예로서 영화 ‘일 포스티노’를 추천해 주었다. 유명한 시인과 한 우편배달부의 아름다운 우정이야기라고, 시인은 ‘네루다의 바다’ 앞에 서 있는 듯,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으며, 목소리는 투명하게 진동했다. 그런 시인의 모습은 그대로 내게 시가 되어 ‘일포스티노’는 언젠가 한 번은 꼭 보고 싶은 ‘시’를 품은 영화였다. 그런 ‘일 포스티노’를 우연히 서가를 정리하다가 한 권의 책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이름으로, 진한 바다내음을 뿜어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내 가슴은 기쁨으로 출렁거렸다.

 

 이야기의 배경은 칠레의 이슬라 네그라. 시간이 멈춘 듯 나태함과 왁자지껄함이 가득한 바닷가의 작은 섬마을이다. 이런 작은 섬에 위대한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가 휴양차 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리오는 어부를 아버지를 둔, 그러나 어부가 되고 싶지 않은 치기어린 젊은 청년이다. 이런 마리오가 수신인이 단 한 사람뿐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로 취직하게 되면서 ‘시’에 눈뜨게 된다. 단순한 우편배달부와 수취인의 관계에서, 순박한 마리오의 질문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메타포, 그게 뭐죠?”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파블로에게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마리오는 자신을 둘러싼 사물들에 귀 기울이며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노력하게 된다. 아름다운 영혼의 개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마리오에게 시가 선물처럼 찾아오게 된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베아트리체라는 아름다운 처녀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마리오는 날마다 그녀에 대해 시를 쓰고 들려준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마리오의 영혼을 시의 본질속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게 하는 마법의 열쇠로 작용한다. 흐르는 시간속에서 시인의 메타포는 그대로 마리오의 삶속으로 들어가 삶의 본질에 눈뜨고 영혼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가슴으로 ‘메타포’를 인식하게 된 마리오가 자신이 살고 있는 칠레의 현 실상을 파악하게 되고, 민중의 언어로서 ‘시’를 표현해 낼 때의 그 감동이란, 시와 삶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순수한 본질로서 다가와 커다란 감동을 주게 된다.

 

 이 작품을 쓴 안토니오 스카르메타(1940년~ )는 위대한 시인인 네루다가 누구와도 편하게 이야기하는 친근한 성격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을 발표(1985년)하기 전에는 이 작품을 자신이 직접 감독하고 배우로도 출연해 영화로도 만들었다 하니, 작가의 이 작품에 대한 열정을 가히 짐작해 볼 만 하다.

 

 경계가 사라진 바닷가를 앞에 두고 소박한 시어를 건넬것만 같은 파블로의 사진이 담겨있는 책을 덮는 순간, 내 가슴은 갓 잡아올린 한 마리 물고기처럼 생생하게 파닥거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위대한 만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에게 ‘위대한 만남’이란 다름아닌, 자신안의 어두움을 스스로 밝힐 수 있도록 내적인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만남을 말한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우연한 만남’이 ‘위대한 만남’으로 싹트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시노래모임 나팔꽃과의 만남이었다.  아주 오래전, ‘꽃피는 5월’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싸늘했던 어느 날 오후, 친구와 공원을 거닐다가 우연히 시노래모임 ‘나팔꽃’공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추운 날씨에 몇 되지 않은 관객으로서 덜덜 떨면서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시노래속에 담겨있는 근원적인 그리움의 감정들이 내 무의식을 건드렸던 것 같다.  그 때 이후로 ‘시마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으며 주위의 사물에 대해서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나에게도 ‘메타포’가 찾아들었던 것이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물음, ‘나를 나답게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함...’

 마리오처럼 삶이 시가 되진 못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나팔꽃’ 꽃그늘에 머물다 보니 내 마음에도 어느새 나팔꽃을 닮은 작은 시마음이 넝쿨지고 있었다. 가끔식 일상에 지쳐 피곤해 질 때면,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팔꽃’ 향기를 맡으며 힘을 얻는다.

 

 

 나팔꽃 / 김현성

 

아침에 나의 머리맡에
부지런한 나팔꽃 인사하지
나를 위해 그대 빵을 굽고
방안 가득 커피향이 좋아

사는 날 가끔 힘이 들 때
망설이던 눈물 흘려도 되
하늘 향해 뻗는 나팔꽃 봐
마음까지 하늘에 닿겠네

이른 아침 창밖을 봐
높이 나는 새들 얼마나 힘찬지
또 밤새 서 있는 푸른 나무들 좀 봐
이른 아침에

 <김현성 시집 '그대 어서 와 그리움 나누고 싶다'에서>

 

삶의 ‘메타포’에 한번이라도 물음표를 가져 본 사람이라면, ‘시’의 본질에 느낌표를 가져보았던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꼭 읽어보아도 좋을 문학작품이다. 그리고 한 사람과의 만남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말해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 시노래모임 나팔꽃 : 작게, 낮게, 느리게

  '나팔꽃'은 1999년 봄, 시인 김용택 정호승 도종환 안도현 유종화와 음악인 백창우 김원중 배경희 김현성 홍순관 류형선 이지상 안치환 이수진 등이 모여 만든 시노래 모임입니다. 시와 노래의 만남은 디지털 시대를 맞아 변방으로 밀려나던 시가 새롭게 존재 의의를 찾으며 대중을 만나는 작업이며, 신세대 문화의 홍수 속에서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고 있는 노래가 새로운 시정신으로 무장하여 서정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시와 노래는 한 몸, 시는 시집 밖으로 걸어나와 자연과 인간의 친구가 되는 노래가 되어 우리 삶 속에서 새롭게 태어납니다.

(나팔꽃 소개글-홈페이지에서 데려옴)

아쉽지만 현재는 '나팔꽃' 활동이 잠시 멈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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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입니다. 2012-02-05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았습니다. 시와 소설과 영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글쓴이의 마음을 그려주네요. 전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으면 책 속에서 영화 속 장면이 떠올라 싫더라고요. 그래서 책을 읽고 영화를 봐야겠지만, [일 포스티노]는 당장 보고 싶습니다.
책표지만 본 것이 아니라, 글도 오랫동안 쓰셨군요. 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숙제를 해야 하니, 한 가지의 질문과 부탁 하나가 있습니다.
질문은, 영화 속 주인공 단테도 아닌 마리오가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면서 詩에 눈을 떴다고 하는데, 다시 말해서 사랑의 詩語를 통해서 민중의 詩語가 나올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생기고요. 한 가지 부탁은 시를 사랑하신다면, 김현성의 “나팔꽃” 전문을 올려주세요. 아주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시를 사랑한다고 하는 분들이 시인들이 토해놓은 온전한 유기체를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 잘라서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꽃별이 2012-02-05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김현성님의 시 전문으로 올려 놓았습니당...시보다는 시노래로 익숙했던지라, 본의아니게 잔인한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따뜻한 숙제 감사드립니다...^^

시실리 2012-02-05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여기에서는 필자의 현실을 대변하는 메타포), 소설 (독자 즉 필자의 이매지 네이션) 그리고 영화 (꿈의 메타포)가 적절히 어우러진 글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제목과 관련하여 질문이 있습니다. 네루다의 바다는 어떤것이었나요? 그것과 관련하여 필자에게 있어 바다의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bytheway 2012-02-06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이 글을 읽으면서 시나리오를 써본 분이거나,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야기가 중간중간에 바뀌고, 연결되는게 무척 자연스럽고 편안합니다.
시나리오 잘쓰고 잘찍고 잘 편집한 영화에서 이야기거리가 세련되게 변하는 것 같아요.

이 글 초반부를 읽고 다른 볼일을 보다가, 나중에 마저 읽었는데 계속해서 이 글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예전에 봤던 일 포스티노가 자꾸 머리에 떠도네요.

저는 일 포스티노가 정치적인 이유로 네루다가 시골에 귀양온 영화로 기억했는데, 아니군요.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과 진짜 대화를 하지 못하는 네루다가 무척 외로와 보였습니다.
영화후반부에 칠레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니, 영화에 정치적인 이야기가 나오긴 했나 봐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 글은 제가 영화와 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맘에 드는 글이고, 읽으면서도, 그리고 읽고 나서도 즐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2-02-1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별이님 글 잘 읽었습니다.^^ 글도 담백하고, 표현하고 싶은 만큼 적확하게 잘 표현하신 듯 합니다.^^ 특별히 더 덧붙일 말은 없는데요. 두 가지만 간단하게 말씀드릴께요. 표현에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모두 다 '관습적'인 표현들입니다. 조금 더 생경한 표현이 필요하지 않은가 합니다. 두번째는 말 줄임표를 의미없이 사용하고 있는데요. 여운을 주기 위해 말 줄임표를 사용하는 방식은, 너무 안이한 방식입니다. 다른 표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합니다. 이상입니다.^^

리얼리티 2012-02-1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생 때인가, 영화 <일포스티노>를 봤는데 무척 졸린 와중에 남자 주인공(마리오겠네요)이 "아파요.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요."라고 대사할 때만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큰 이야기를 다루는 거였군요. 꽃별이님의 글을 읽고 영화도 다시 보고 싶어졌고, 책도 읽고 싶어졌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명확한 글이라 제 역량으로는 아쉬움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

고리 2012-02-14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와 영화 <일 포스티노>로 시작된 '메타포'가 글쓴이의 삶에서 어떤 계기로 찾아오게 되었는지 전개하는 과정이 매끄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통 '시심'이라고 쓰는데, '시마음'이라고 표현하신 단어도 인상적이었어요. "내 마음에도 어느새 나팔꽃을 닮은 '시마음'이 넝쿨지고 있었다."라는 표현이 참으로 멋집니다. ^^
아쉽다기보다는 해소되지 않는 궁금증이 하나 있어서 덧붙입니다. 글쓴이에게 '메타포'가 찾아든 이후의 생활이랄까 변화는 어떤 것이었나요? 뭉뚱그려서 쓰셨는데 마리오같은 삶은 아니더라도 글쓴이 역시 메타포를 인식하고 본인의 언어로서 세상을 시로써, 혹은 글로 표현하시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게 됩니다.

바다 2012-02-14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노래모임이 어떤 것일까 궁금했는데,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좋았구요.
[오랜 시간동안 ‘나팔꽃’ 꽃그늘에 머물다 보니 내 마음에도 어느새 나팔꽃을 닮은 작은 시마음이 넝쿨지고 있었다. 가끔식 일상에 지쳐 피곤해 질 때면,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팔꽃’ 향기를 맡으며 힘을 얻는다.] 는 문장이 하나의 시적인 표현이어서 글이 멋있게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dongsin 2012-02-15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댓글 달고 싶어서요. 언제부턴가 소설을 보면 왜 그런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 책은 꼭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드는 리뷰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위대한 만남'이라든가 책을 덮는 순간, 갓 잡아올린 한 마리 물고기처럼 가슴이 생생하게 파닥거렸다.든가 하는 표현을 만들게 하는 책을 누군들 궁금해 하지 않겠어요? 적절한 길이의 내용 설명, 소설과 연계된 영화 소개(좋은 작품은 항상 영화로 만들어지기 마련이죠!!), 게다가 자신의 '위대한 만남의 예까지 설명하고 있어 상당히 즐겁게 읽은 글입니다.
다만 문장 문장이 좀 길어서 약간 짤막하게 작성하시고 접속어를 사용하셨다면 더 읽기 수월했을 것 같습니다.(물론 읽기수월한게 최고는 아니지만요^^)

돌이 2012-02-15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몇 단어를 다른 말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가져 보았습니다만, 그게 너무 '상투적'이어서 저는 오히려 꽃별이님의 표현이 마음에 드네요. 소설, 영화, 시, 시마음까지 죽 매끄럽게 연결되는 서술방식이 깔끔해 보입니다. 더 나아가 우연이 인연이 되고, 그 인연이 필연적으로 삶을 각성시킨다는 전개방식도 제게는 위대한 만남으로 다가오네요. [일 포스트]는 봤지만,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읽지 못한 아쉬움을 오늘은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으로 대신해 볼까, 합니다.
 

나가수에서도 1번에 뽑히면 다들 난색을 표하던데...

다음 주 첫 번째로 '아작날' 글 올립니다.

제가 처음 제비를 뽑았는데 제가 제 이름을 뽑았답니다. 오 맛쏘사!(맙소사, 미소지나 버전으로 ^^)

 

수업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리라는 생각을 못한 터라 적잖이 당황했는데 1번이 되다니 거의 실신 지경...

변명을 보태자면 '일용직'인 저는 일이 두서없이 들어오는데 지금 한창 바쁠 때라 원고를 고칠 여력이 없네요.

아,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니...그래서 그냥 올립니다.

아무 생각없이 쓴 글인데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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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특강_과제1_영화감상문

<마이웨이>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영화를 대하는 감독의 시선


영화의 주인은 감독일까, 주인공일까 혹은 시나리오일까? 삼박자가 잘 맞아야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겠지만, <마이웨이>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하 기적)은 단연 강제규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것이다. <마이웨이>는 엄청난 스케일의 전쟁 씬 속에서 감독이 시키는 대로 분주히 움직이는 장동건과 오다기리 조가 보였고 <기적>은 물끄러미 아이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상영 시간 내내 느꼈다. 공교롭게도 오다기리 조는 <기적>에서도 주인공 형제의 아빠다. 내가 유일하게 ‘팬덤’하는 배우이기도 하고.

나는 영화 볼 때 예습하지 않는다. 일부러 눈과 귀를 막고 본 다음, 나중에 관련 자료를 찾는다. 물론 개봉 몇 달 전부터 무차별적으로 홍보하는 영화의 경우 이런저런 정보를 들을 수밖에 없지만 가급적이면 깨끗한 백지상태로 보는 것을 선호한다. 다른 사람의 평도 믿지 않고, 안 보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재미없다’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보게 된 <마이웨이>는 영화 보는 첫 장면부터 빤한 클리셰에서 시작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화를 돋웠고 급기야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내가 이 영화를 왜 보고 있냐하는 허망함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왜 이렇게 영화를 만들었을까?

한 장의 사진과 몇 줄의 소략한 기록을 토대로 제작된 <노르망디의 조선인>(2005)이라는 SBS 다큐멘터리에서 힌트를 얻은 <마이웨이>는 모든 제작자와 감독이 탐 낼 만큼 ‘짜릿한’ 소재다. 그런데 그 ‘짜릿함’을 감독은 “만들면 돈 되겠다”라는 것으로만 받아들인 모양이다. 하지만 흥행을 위해서라도 이런 접근 방식은 너무 안일하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먼 이국땅까지 흘러들어간 식민지 치하의 청년이 겪어야만 했던 기구한 운명이 내 일인 양 안타까웠던 사람들의 마음을 몰랐던 걸까? 영화는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내면의 흐름을 따라 갈 때 설득력을 얻는다. 두 청년의 험난한 여정이 끊임없이 펼쳐지지만 인물들이 겪는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시종일관 전쟁과 스포츠에 난데없는 우정까지 범벅이 된 국적불명의 휴머니티를 보여준다. 쉽게 타츠오를 용서하는 준식은 공감을 얻지 못하는 허구의 캐릭터다. 어려운 얘기를 쉽게 하는 것은 미덕이다. 하지만 불편하지만 할 말은 해야 이야기가 된다. 식민지 시대의 한국과 일본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허구의 적들을 설정하고 이를 물리치는 히어로를 통해 쾌감을 느끼는 미션 임파서블식의 접근은 위험하다. 할 말은 뒤로 미룬 채 좋은 게 좋다, 식으로 끝나는 이 영화가 글쎄, 아시아블록버스터가 될 수 있을까. 아이템이나 멋진 장면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감독은 생각한 것일까. 이 영화의 유일한 미덕은 난데없이 “왜 영화를 만드는가?”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는 어떤 것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본 차가운 현실

<기적>은 <마이웨이>와 대각선에 있는 영화다. 이혼한 부모 때문에 각각 떨어져 사는 형제와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신간센 홍보용 영화로 기획된 것이라고 한다. 홍보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작품을 의뢰한 측에서 감독의 의견을 100% 받아들였다는 것이 그야말로 ‘기적’이다. 왜냐면 이 영화의 속내에는 차가운 슬픔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의 근간은 각자의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기차의 교차점을 향해 가출하는 아이들의 1박2일이다. 아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저마다 소원을 크게 외친다. 아이들은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자신들의 소원을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정작 기차가 교차할 때 외친 소원은 좀 달랐다. 철없어 보이던 동생 류노스케가 정작 외친 것은 “아빠 일이 잘 되게 해주세요”였다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 많이 울었다). 기적은 정말 일어났을까? 죽은 개가 다시 살아나지 않고 부모가 재결합해도 전과 같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이들은 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된다. 그래도 기적을 믿고 싶은 게 아이들이다. 어른도 다르지 않다. 감독의 전작 <아무도 모른다>처럼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아이들(정말 끔찍하다)의 모습이 슬프다. 조부모와 함께 사는 형 코이치는 어쩐지 할아버지와 가장 닮았다.

전쟁과 광기, 생에 대한 지독한 욕망, 우정과 배신 등의 이슈를 앞세운 채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어 완성한 <마이웨이>를 보는 동안 내게는 한 줌의 감정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자기가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는 아시아 최고의 미남 둘만 보였다. 심지어 주인공들의 사형 직전 장면에서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나는 사이코인가?). 서로 마주보면서 “우리 정말 너무 잘생기지 않았니?”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면 <기적>의 첫 장면부터 나는 오금이 저렸다. 작은 마을에 사는 평범한 소년의 아침 풍경. 잠자리에 일어나서 이불을 개키고 밖으로 나가 건너편 산을 본 다음, 오늘은 얼마나 재가 날렸는지 쓱 한번 손으로 훑는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엎드려 걸레질을 한다. 감독이 아이들을 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시선의 균형감이 너무 좋다. 아프지만.

 

영화에서 코이치가 수업시간에 읽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산다>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산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뭇잎새의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올려보는 것/ 재채기하는 것/ 당신의 손을 잡아보는 것.” 

참고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Miracle>이 아니라 <I wish>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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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2-04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아네스님. 설득력있는 주장이 녹아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클리셰'부터 '짜릿한 소재'에 이르기까지, 시네필의 면모가 살아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영화를 보아온 필자의 '영화론' 도 곁눈질할 수 있었고요. 가령,

'영화는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내면의 흐름을 따라 갈 때 설득력을 얻는다.' 같은 구절은 오랫동안 영화를 보아온 관객만이 할 수 있는 평가가 아닐까요? 더구나 상반되는 두 편의 영화를 대조시키면서 영화의 좋은 경지를 서술하는 방식은 대단히 설득력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롭게 글 잘 읽었습니다.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이 글이 너무 짧다는 점입니다. 저는 <마이웨이>를 소개하는 전반부 '한 장의 사진과 몇 줄의 소략한 기록을 토대로 제작된 (...)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데요.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영화는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내면의 흐름을 따라 갈 때 설득력을 얻는다. 2) 불편하지만 할 말은 해야 이야기가 된다.' 다시말해, 이 영화는 스펙터클에 너무 중점을 두다보니 볼거리만 풍성할 뿐 인물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또한 '식민'이라는 민감한 사안을 다루면서도, 그것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싸구려 휴머니즘만 보여준다) 그런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한 문단에서 함께 처리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함께 버무려야 할 공통점이 있었을까요? 구체적 서술이 사라지고 짧게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데 그친 점이 아쉽습니다. 이 점은 <기적>을 서술할때도 살짝 드러나는데요. '작은 마을에 사는 평범한 소년의 아침 풍경. 잠자리에 일어나서 이불을 개키고 밖으로 나가 건너편 산을 본 다음, 오늘은 얼마나 재가 날렸는지 쓱 한번 손으로 훑는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엎드려 걸레질을 한다.'라는 장면을 서술하고는 ' 오금이 저렸다. / 그 시선의 균형감이 너무 좋다. 아프지만. ' 같은 의견을 표현했는데, 왜 그런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읽는 독자까지 '걸레질'에 가슴이 아프기 위해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이 덧붙여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상입니다.^^

이준입니다. 2012-02-0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부분에서 이야기하는 영화 [기적]은 꼭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날 정도로 잘 좋았습니다. 완전히 상반되는 스타일의 영화를 가지고 그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신 점이 돋보입니다.
개인적으로 몇 가지 의견을 피력해봅니다.
전체적으로 글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첫째 문단과 둘째 문단의 순서를 바꾸든지, 아니면 전체적으로 첫째 문단, 둘째 문단, 영화 [기적]을 이야기하고, [마이웨이]로 넘어가든가, 아님 두 번째 문단 그냥 생략해도 전반적인 글의 흐름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팬덤]이나, [클리셰]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팬덤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본인이 그렇다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글의 성격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감상문이라고 한다면, 클리셰 같은 전문 용어는 읽는 이에게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목에서 이야기하는 ‘감독의 시선’이 영화에 작용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 원작이나, 시나리오의 문제는 없었는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시실리 2012-02-05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전혀 다른 느낌의 영화를 <시선>이라는 이라는 주제로 잘 풀어 주셨습니다. 그 시선은 [마이웨이]에서 "안일하다" "인물들이 겪는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공감을 얻지 못하는 캐릭터이다" "할말을 뒤로 미룬 채" 라 나열 되는 단어에서 필자의 시선과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반면 "왜 그런지"에 대한 독자의 시선(물음)에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필자가 영화에 감정 몰입이 되지 못한 것은 결국 감독의 시선이 무대 밖에 있었다는 걸까요? 반면 두번째 [기적]에서는 중간 중간 기억에 남는 대사와 "눈물이 났다" "오금이 저렸다"라는 서술을 통해서 감정 투사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읍니다. 그러한 묘사들 때문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왜 눈물이 났는지" "왜 오금이 저렸는지"라는 의문은 남는 군요.

리얼리티 2012-02-0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다양한 글을 많이 읽고, 많이 쓰시는 분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띄는 흥미로운 표현도 여러 부분 있었습니다. 가령 “서로 마주보면서 ‘우리 정말 너무 잘생기지 않았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저도 이 영화의 단점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알게 합니다.
그런데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독이 아이들을 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시선의 균형감이 너무 좋다”라고 하셨는데, ‘시선의 균형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 또 영화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면 더 풍성한 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꽃별이 2012-02-0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숙제를 해야 할까? 계속 들여다 보다가 언뜻 스치는 생각이, 영화의 주인은 관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도 감동해 주는 관객이 없으면 슬프니까요...'기적'은 한 번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기적을 바라는 아이들의 간절한 상황이 좀 더 세심하게 표현되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책을품은삶 2012-02-06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쉽게 읽힙니다. 읽는 사람을 고려한 글쓰기를 했다는 점이 읽히고요.

다만,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하 <기적>)에 대한 감상은 밀도가 떨어집니다. 영화를 무척 좋게 보고 감동적이었다는 것은 전달이 되나, 그것이 독약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영화에 대한 감정에 매몰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 감동적이고, 좋았는지, 그 지점이 다소 약합니다. 제목으로 제시한 '...감독의 시선'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요.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bytheway 2012-02-06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웨이의 사형직전장면에서 두 꽃미남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재밌네요.

서로 성격이 다른 두 이야기를 대비하면서 이야기하는 건 참 오래된 패턴인데, 자연스럽고 쉽게 쓰셔서 편하게 잘 읽었습니다.

마이웨이와 기적은 장르도, 성격도, 그리고 아마 타겟소비자도 완전히 다른 영화일 테지만,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방법]을 기준으로 완전히 엮이지 않을 것 같은 영화 두편을 엮어서 말하는 게 좋았습니다.
다만 기적에서 아이들이 현실을 인식하는게 구체적으로 어떤지, 영화속 한두장면을 더 넣어서 구체적으로 말한다든지, 글쓰신 분의 관점을 더 집어넣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마이웨이가 형편없다는 건 잘 알겠는데, 기적이 좋은지는 모르겠습니다. 부정명제는 장은 상대적으로 증명하기 쉽고, 긍정명제는 상대적으로 증명하기가 어렵지 싶어요.(저도 모르게 시실리님과 리얼리티 님의 리플을 보고 참조한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네요. 보려고 본건 아닌데, 원글을 다시 훑어보고 내용을 추가하다가 리플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희망둥이 2012-02-0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어지러웠습니다. 저는 이런 글을 소화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두편의 영화를 못 본터라, 줄거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그럴 것입니다. 앞 뒤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제게는 어려운 글입니다.

몇가지 조언을 드립니다.

1. 국적불명의 휴머니티 : 과연 이 말이 맞는 표현인지요? 휴머니티는 인간애로 해석됩니다. 인간애가 국적불명이라?

2. 전쟁과 광기, 생에 대한 지독한 욕망~ 내게는 한 줌의 감정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 심지어 주인공들이~ 웃음이 절로 나왔다(나는 사이코인가) : 강조법을 쓰셨는데 과연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을까 저는 의문입니다. 또한 사형관련 장면에서 웃음이 나왔다는 것 또한 이해가 안됩니다. 물론 개인마다 감정변화가 다를 수 있지요. 그렇더라도 이해가 안가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3. 적절한 단어와 자연스런 문맥이 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보거스 2012-02-07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의식이 얕고 싸구려 휴머니즘만 난무하는 블록버스터 vs 주인공의 감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박한 영화라는 대결구도를 통해 두 영화의 감상을 흥미롭게 풀어내신 글 같습니다. 그렇지만 두 편 모두 보지 않은 사람으로 몇 가지 궁금한 점이 남았습니다. <마이웨이>의 첫 장면은 대체 어떤 건가; 빤한 클리셰가 무엇이었을까? 글을 쓰는 사람이 직접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 상황을 조금 더 풀어써주었더라면 어땠을까요? <기적>의 첫 장면을 자세히 설명했던 것처럼요. <마이웨이>와 <기적>의 첫 장면을 교체해 보여주고 이러이러한 점에서 둘은 달랐다는 식으로 풀어나갔더라면 더 친절한 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리 2012-02-07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다기리 조라는 배우를 좋아해서 이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마이웨이>를 보면서 느낀 허망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신 점이 흥미로웠어요. 글쓴이가 이 영화에 푹 빠져들 수 없었던 지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감독이 짜릿한 아이템과 멋진 장면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바람에 하지 않았지만, 글쓴이가 보기에는 이 영화에서 해야 했던 할 말이 무엇인지 밝혀 주신다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아요. "“왜 영화를 만드는가?”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는 어떤 것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고 흥미로운 말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은 이 글에 나오지 않는 점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기적>에서 아이들이 소원을 말하는 장면과 소년의 아침 풍경을 그린 첫 장면 등등을 종합해서 감독의 균형감 있는 시선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 같은데, 앞선 문단과의 연결고리를 넣어 주시거나 다시 한 번 언급하셔서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균형감 있게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써 주신다면 논점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 같습니다.

돌이 2012-02-07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분량의 원고에 두 편의 영화를 적절하게 평하신 것 같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글을 쓰신 분의 관점이 명확해 읽는 즐거움이 컸습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제가 보지 못했는데, 이 글을 읽고 급하게 챙겨 보고 싶어졌습니다. 아마도 '아네스'님의 글에 진심으로 감동했거나 아니며 최소한 낚인 것 같아요.

이 글을 읽으며 저는 문장이나 맥락에서 큰 단점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다만 시간에 쫓기셨거나 아니면 다른 일로 마음이 급하셨는지, 다급하게 글을 마무리하신 느낌을 조금 받았습니다. 호흡을 조금 더 길게 끌고 가셨거나 퇴고할 여유가 있으셨다면 흠잡을 데 없는 글이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습니다.

냠냠이 2012-02-08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앞에서도 얘기하셨던 것 같은데요, 영화평을 주로 써 보신듯한, 세련된(?!) 힘의 포스가 문장 곳곳에서 느껴졌습니다. 문장의 내용을 떠나 글쓴이만의 시크한 감각이 문장의 외형을 개성있게 만져 주는 것 같습니다. ^^
글을 쓸 때, 누가 읽어도 막힘 없이 술술 이해되는 내용 설명과 글쓴이만의 개성있는 문체를 얼마나 균형있게 잘 잡아내느냐에 따라 정말 좋은 글이 될 수도 있고, 공감이 어려운 글쓴이만의 독백에 가까운 글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은데요, 전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인지 알겠으나 다소 주관적인 힘이 앞부분부터 강하게 나와 균형이 맞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주장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 다소 부족해서 그렇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
 

다행히 글쓰기 워크숍 비평 본선(?)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

그래도 올리라고 하셨으니 올립니다만,

부담없이 가볍게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분석하고 비평하는 마음은 부디 접어주시공~ㅎㅎ

관능적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에 대한 어설픈 감상문입니다.

눈이 펄펄 마음과 교접하던 그날 쓴 것이라, 글속에 눈 이야기가 살짝 나옵니다.

글 맨 아래 있는 음악(베사메무쵸)을 BG로 깔아 놓고 읽으시면, 그나마 좀 낫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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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나잇 스탠드'보다 짜릿한 '47년의 기다림'

(by 준수)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난다.’
사랑의 ‘신화’를 완성하기 위한 전제. 내겐 <첨밀밀>이 그것을 알려줬다. 처음으로가슴 짠하게 알려준 명제. 만남과 헤어짐, 그 엇갈림과 반복. 한숨을 쉬었다 뱉었다, 내 마음은 그들의 발끝에만 매달렸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그렇게 흔들리는 내 마음에 <첨밀밀>은 속살거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돈 돼야지. 유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운명이잖아. 운명. 사랑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다.


나는 얼마 전, 또 하나의 운명을 접했다. 더 운명 같은 건, ‘쿠바’였다. 아직 발 딛지 못한 미지의 땅이지만, 언젠가 꼭 디뎌할 그곳. 혁명이 있었고, 커피가 있으며, 무엇보다 섹시함이 상존하는 곳. 누군가 그랬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이 쿠바라고. 그는 일체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양, 단호하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내겐 로망이었던 쿠바는, 이젠 지상의 천국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치코와 리타>, 그런 쿠바에서 시작한다.

 
1948년의 쿠바 아바나. 피아니스트 치코. 보컬리스트 리타. 그들이 만난 밤, 음악이 꿀처럼 흐르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끌림’이었으리라. 끌림은 곧, 나에게 맞는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 사랑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리듬은 음악과 함께였다. 아마도 그때, 운명은 그들에게 속삭였으리라. 치코에겐 리타의 목소리가, 리타에겐 치코의 연주가 그랬을 것이다. 리타의 ‘베사메무쵸’에 혹했던 치코는, 그녀를 위해 ‘리타(릴리)’를 작곡하고, 리타는 그런 치코에 반한다.

그러나 그것. 운명이라는 속삭임. 늘 정교하고 오차가 없는 것, 아니다. 운명도 수명이 있다. 차가운 유혹으로 끝나버릴 운명이 있는 한편, 그리움을 평생을 품을 운명도 있다. 운명이라는 속삭임, 마음은 쉽게 속는다. 그만큼 강한 끌림이 있을까. 영원하고픈 숙제, 사랑. 사랑의 시작도 언제나 운명에서 비롯되니까. “당신을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기다린 느낌”이라며 리타에게 처음 건넸던 말, 오글거렸지만 진심 같았다. 그때 카바레(살롱) 분위기가 그랬다.

어쨌거나 치코와 리타의 (음악적) 조건(?)은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씨줄과 날줄의 조화. 음악이 매개로 작용하는 순간, 사랑은 더 큰 열정을 동반한다.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었지만, 그들은 처음 만난 그날, 서로를 탐닉한다.

 

 

애니메이션이라지만, 리타의 몸은 팽팽한 활시위마냥 관능적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관능미를 느끼다니, 처음 한 경험이다. 치코가 앞뒤 재지 않고 빠질만하다는 생각. 두 사람, 몸을 섞는다. 선율과 리듬의 합치처럼 두 사람은 합한다. 맥락 없이 그들을 봤다면, ‘원 나잇 스탠드’라고 애써 무시할 것처럼.

원 나잇 스탠드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사랑은 시작됐다. 허나, 사랑이 순탄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는 법인가보다. <첨밀밀>에서 이미 확인한 바, <치코와 리타>도 엇갈림을 동반한다. 관능의 볼레로처럼 터질 것 같은 그들의 관계에도 질투와 오해가 틈입한다. 사랑의 가장 큰 적이 질투와 오해라고 했던가. 수시로, 그들은 시험에 든다. 세상의 모든 운명적인 사랑이 그러하듯.

전반부, 나는 치코의 우유부단함이 싫었다. 그는 뭔가 망설이고 주저한다. 첫 밤부터 그랬다. "당신이 걷는 땅에 키스라고 하고 싶"었던 남자의 태도치고는 뭔가 부족했다. 그러니, 까칠하지만 거침 없는 리타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는 치코를 믿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대범하고 마음이 넓은 양, 우리는 착각한다. 살아보니 마냥 그렇진 않더라. 질투와 오해가 여성만의 것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착각이다. 리타는 그런 여자다. 한 남자를 품기에 더 없이 넓은 여자.


주변 환경 또한 그들의 사랑을 질투한다. 아바나,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공간이 뉴욕으로 바뀐다. 그들의 사랑도 바뀔 것임을 예고한다. 헤어짐이 당연하면서도 나는 안타까웠다. 결말을 알면서도 발을 굴러야 하는 상황 같은 것이니까.


뉴욕은 아바나와 다르다. 체제가 다르고, 관계가 다르며, 사람이 다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사랑. 모든 것을 얻어도,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리라. 스타가 된 리타가 그랬다. 자신을 찾아 뉴욕에 온 치코에게 더 이상 아바나의 순진한 여자가 아니라고 쏘아붙이지만, 사랑은 운명을 거역하지 않았다. 맨해튼의 키스. 질투와 오해는 키스 한 번으로도 충분히 가실 수 있는 것임을.

 


부러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임을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 뉴욕, 그들의 사랑은 더욱 힘에 겹다. 사랑을 온전하게 그들만의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자본이 개입하니까. 그래서 그들의 사랑, 거듭 어긋났지만, 영원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과거에 있다”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나는 운명의 향기.

나는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리타가 마침내 자신을 돌고 돌아 찾아온 치코에게 건넨 이 말. “47년 동안 기다렸어요. 당신이 이 문을 두드려주기를.” 그녀의 목소리는 과거의 것이 아니었지만, 사랑의 향기는 여전했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었던 세월.


문을 열어주는 것은 결국 운명이다. 사랑이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야 만다는 <첨밀밀>의 향기는 쿠바에서도 여전했다. 한창훈은 《향연》에서 그랬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기다림, 그것은 때론 사랑의 다른 말이다.


<치코와 리타>.


모든 것이 음악과 함께한다. 리타의 노래와 춤, 치코의 연주, 그들의 사랑과 인생, 몸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음악을 통해 채운다. 마음이 교감한다. 그들의 사랑과 음악에 당신의 몸과 마음이 들썩이지 않는다면, 병원이 필요하다. 마음이 앓고 있다는 증거니까.

 


오늘, 눈이 펄펄 내린다. 눈이 쌓인다. 그들의 사랑이 눈과 함께 아른거린다. 오늘의 노래는, 베사메무쵸. 아, 관능적이다. 이 음악, 만지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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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입니다. 2012-02-05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철학자가 그러더군요. 정말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면, 그녀를 보내주어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햇살이 잘 드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실 동안만 만나라.
그렇게 평생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런 대사를 하죠.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요.”

참....
감상에 젖어서 합평이 불가능하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는 없군요.

알라딘, 많은 청소년들이 들어오는데.
"사랑과 영혼"의 명장면을 떠올리게하는 피아노 치는 장면은 바로 내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시실리 2012-02-05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 잘 보았습니다. 글이 아주 간결하고 깔끔하여 읽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정말 글이란 이렇게 순하게 써야 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나는 치코의 우유부단함이 싫었다" "까칠하지만 거침 없는 리타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들의 사랑과 음악에 당신의 몸과 마음이 들썩이지 않는다면, 병원이 필요하다. 마음이 앓고 있다는 증거니까."
현실에서도 이렇게 좋고 싫음이 확실한지 궁금할 정도로 이유가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네요. 음악까지 잘 듣고 갑니다.

꽃별이 2012-02-05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이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이상원 2012-02-14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준 님의 걱정에도 내리지 않으신 덕분에 저도 피아노 치는 장면 구경 잘 했습니다.^^
본 적 없는 애니메이션입니다만 말씀대로 관능적인 분위기는 물씬하군요.

'원 나잇 스탠드'가 제목에 등장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내용을 읽었을 때 글쓴이께서는 둘의 첫날을 원나잇스탠드로 보지 않으신다고 이해해서요. 혹자는 원나잇스탠드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잡으신 제목일까요?

몹시 리타 편이십니다. '리타는 한 남자를 품기에 더없이 넓은 여자다'라는 문장만 봐도 그런데요, 리타는 여러 남자를 사귀어야 속이 시원한 유형이라는 뜻일까요?

제가 워낙 썰렁하게 살아서 그런지 운명 같은 사랑이라는 소재가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이 글에 따르면 마음이 앓고 있는 모양입니다.^^ 혹은 이미 그건 차곡차곡 개켜서 기억의 서랍 속에 잘 집어넣어둔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지도...
 

2/8 2교시 여섯 번째(마지막)로 이야기 나눌 글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무척 쫄(졸)아 있습니다.

 

 

철학의 시대, 철학이 필요한 시대

(강신주, 《철학의 시대》, 사계절, 2011)

 

 

대학 시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논어》를 읽은 적이 있다. 강산이 한 번 바뀐 지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구절은 《논어》를 읽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첫 번째 문장뿐이다. 오랜 시간 고생하며 원문을 강독하고 남은 것이 중학교 때에도 배우는 저 문장 하나와 여성을 비천하게 본 공자에 대한 화뿐이니, 지금 와 생각해보면 참으로 의미 없는 독서였다. 그 의미 없는 독서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제자백가를 가장 깊이 접한 순간이었다. 그 후, 대학 교양 시간에 맹자, 장자, 묵자 등과 아주 짧게 스쳤을 뿐, 진지하게 텍스트로 그들과 마주한 적이 없었다. 철학의 시대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와 너무 멀었다.

내가 본 지금은, 자신만의 정치 철학을 내세우기보다는 잘 먹고 잘살게 해주겠다는 말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가 나라의 지도자가 되고,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TV 프로그램이 인기 있으며, 성인 남성은 자동차에, 성인 여성은 명품 가방에, 미성년자는 노스페이스 점퍼에 열광하는 시대다. 철학이 사라진 시대, 사유하지 않는 시대, 그래서 철학이 필요한 시대에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역시 좀 더 잘살아보자는 헛발질뿐이었다.

헛발질로 온몸에 피멍이 든 채 살아가던 내게 철학계의 아이유, 강신주와의 만남은 반갑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스타로서의 상품성과 가수로서의 가창력, 연주 실력 등을 두루 갖춘 아이유처럼 강신주의 철학책은 상품성과 내용의 깊이를 두루 겸비하고 내 앞에 나타났다. 상품성은 이미 출간된 책의 판매 수가 방증하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문장이 어렵지 않고, 어떤 어려운 철학 사상이라도 철저하게 한 인간의 현재의 삶에 대입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면서도 통속적이지 않고, 사상가마다의 주요 논지를 정확히 짚어주어 결코 가볍지만도 않다. 동서양 사상가의 철학을 해체하고, 대중이 각자의 삶에 대입해볼 수 있는 글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은 결코 얄팍한 내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강신주 팬임을 자처하는 나는 삼촌 팬이 아이유의 새로운 뮤직비디오를 보는 마음으로 강신주의 새 책 《철학의 시대》를 펼쳐 보았다.

책을 처음 펼칠 때는 대학 시절 나름 《논어》도 읽어봤을 만큼, 그리고 그 후 한 번도 안 쳐다봤을 만큼, 제자백가 사상에 대해 아는 듯하지만 실상 하나도 모르는 내가 대뜸 읽어도 되는 책일지 망설였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그 망설임은 왜 나는 강신주를 더 믿지 못했느냐는 팬심으로 흡수돼버렸다. 머릿속에 흐릿하고 너저분하게 잔존하던 제자백가 사상이 이합집산하더니 끝내는 큰 줄기로 모여 체계화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또 그뿐이었으면 서운했을 뻔도 했는데, 기존에 내가 어렴풋이 알던 제자백가는 어렴풋하게 안 것이 아니라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철학의 시대》는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책이다. 본격적으로 제자백가의 사상을 다루기 전에 다양한 사상가들이 사랑과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그들만의 방법, 도(道)를 천차만별로 부르짖었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되짚는 내용이다. 사상이 나온 배경과 문맥을 먼저 읽고 제자백가의 사상을 찬찬히 살펴보자는 당연한 논리의 발로인 셈이다. 춘추전국 시대에 국가주의에서 아나키즘까지 다양한 사상이 나온 배경은 뭐였을까?

저자는 답을 혼란한 시대에서 찾는다. 여러 명의 군주가 끊임없이 폭력으로 맞서던 시기, 삶의 상처가 깊어 그 상처의 치유를 위해 다양한 사상이 등장한 것이다. 또한 패권을 다투는 여러 군주로 권력이 나누어져 있어, 하나로 취합되는 권력이 없었기에 군주들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기 위해 사상가들에게 언로를 열어놓았다.

맹자가 살았던 시기에 제나라의 직하학사라는 곳에서는 다양한 사상이 열띤 토론으로 꽃피었다. 거기에는 양주 같은 아나키스트도 있었고, 예수와 비견되는 사상을 지닌 묵자도 있었다.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북한 언론 매체인 우리민족끼리의 트위터를 리트윗하거나, 북한과 관련한 트윗을 써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를 위반한 혐의로 박정근 씨가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이렇게 촘촘히 제한받는데, 우리에게 보수의 아이콘으로 상징되는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2500년 전 중국에서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눈여겨봐야 할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당시 사상계에서 유학은 ‘죽은 개’ 취급을 받았다는 점이다. 공자의 사상은 훗날 순자를 만나 다시 빛을 보지만, 공자는 생전에 관료로 나아가지 못한다. 시대가 원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사상이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것은 도태되었다. 때마다 시대의 요구에 맞는 사상이 달랐고, 군주에게 채택되는 사상가도 달랐다.

공자가 강조한 예(禮)는 법치를 전면으로 거부하는 사상이었기에 민중을 법으로 직접 다스려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던 군주들에게 채택될 수 없는 사상이었다. 귀족층의 지분 늘리기에 적합한 사상이 당시에는 채택되지 못하다가 훗날 현실로부터 극적인 초연함을 유지하는 철학 학파로 변신하여 필요한 세력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조선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조선의 양반들에게 안빈낙도 등 선비의 고결함을 강조하면서도 신분에 따른 예가 법보다 우선한다는 예치가 얼마나 매력적인 사상이었겠는가.

이 책에서 저자가 방점을 찍는 또 다른 것은 우리에게 조금 덜 알려진 역사서, 《회남자》의 의의다. 《회남자》는 《한서》와 《사기》와는 다르게 한제국의 중앙집권적 정치 이념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지방분권적 정치 이념 위에 만들어졌다. 《한서》와 《사기》가 황제 권력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반면, 《회남자》는 지방 제후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세력 위에 만들어진 만큼 이 책들은 한나라 이전의 사상을 정리하는 기준이 다르다. 유가와 도가 중 어떤 사상을 더 위에 두느냐도 다를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사상을 다루는 방식도 다르다. 《한서》와 《사기》가 유가, 도가, 묵가 등의 학파 개념으로 사상사를 정리한 반면, 《회남자》는 학파 구분을 하지 않고 사상가들을 각각 강태공, 공자, 묵자, 상양 등의 고유명사로 풀고 있다. 저자는 《한서》와 《사기》 그리고 《회남자》를 비교하며 자의적인 분류 방식의 허점과 위험을 지적한다. 자의적으로 여러 사상을 분류하여 한 가지 틀 속에 가둠으로써 오독의 소지를 낳기 때문이다. 이는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가 왜 유가, 도가, 묵가 등의 학파로 묶여 출간되지 않고, 사상가 한 명 한 명의 고유명사를 제목으로 달고 출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셈이다.

기득권층의 레드 콤플렉스 사고가 여전히 사상의 자유를 가두는 우리나라의 지금을 보면, 기원전 춘추전국 시대는 자유로운 사상이 꽃피웠고, 나라를 아예 새롭게 세울 수 있던 시기였기에 오히려 지금보다 개혁적이었다. 다양한 사상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서로 논쟁하며 성장하였다. 그 사유와 논쟁의 역사를 보며 자유롭게 사유하는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억압받고 무질서했던 시기에 진흙탕의 연꽃으로 핀 제자백가처럼 시대의 억압과 가능성을 파악하며 사유를 발전시켜나가야겠다. 또한 기존의 사상을 보고 사유하면서 타인이 분류해놓은 잣대 때문에 오인할 수 있다는 사실도 경계해야겠다. 매일 칼을 휘두르고 목을 베는 전쟁이 일어나 권력이 뒤바뀌는 시대는 아니지만, 쇠가 아닌 칼은 지금도 있고, 죽음이 아닌 참형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다. 철학이 필요한 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역시 좀 더 잘살아보자는 헛발질이 아니라, 사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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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2-0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현실님. 고심하며 꼼꼼하게 작성하신 서평 무척 잘 읽었습니다.^^ 서평을 자주 작성하시는 블로거로 활동하시는게 아닌가, 쓰는 글마다 많은 추천이나 공감을 받는 블로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번 쓰고 읽고 고치는 것이 습관화 된 분이라는 생각도 했고요. 문단마다 정확히 주제를 정해 마무리하는 솜씨나, 다른 소주제를 다루는 문단을 연결시키면서도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전개가 무척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머릿속에 흐릿하고 너저분하게 잔존하던 제자백가 사상이 이합집산하더니 끝내는 큰 줄기로 모여 체계화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같은 사고의 흐름을 묘사하는 문장에서는 서평가의 '내공(?)'도 느껴볼 수 있었고요. 재미있고 유익했던 서평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철학의 시대>에 별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현실님을 글을 읽고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입니다. 이 서평에서 필자가 가장 감동을 받은 부분은, '1) 머릿속에 흐릿하고 너저분하게 잔존하던 제자백가 사상이 이합집산하더니 끝내는 큰 줄기로 모여 체계화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또 그뿐이었으면 서운했을 뻔도 했는데), 2) 기존에 내가 어렴풋이 알던 제자백가는 어렴풋하게 안 것이 아니라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인 듯 합니다. 따라서 이후에는 1)의 내용이 나오거나 2)의 내용이 나올 것이라고 자연스레 예상하게 되는데요. 문제는 그 다음 어디에서도 1)과 2)의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연관지어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이 서평의 몸체를 이루는 '사상출현의 배경, 사상의 자유, 유학의 평가와 조선의 흡수양태, 역사서 기술의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이 소주제 모두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함께 나열되며 전체 내용을 이루어야 할 어떤 공통된 의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필자의 기억에 남았던 인상적인 부분을 두서없이 나열한 것이지 일관된 연관성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책에 대한 인상이 산만하며, 어떻게 '철학이 필요한 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역시 좀 더 잘살아보자는 헛발질이 아니라, 사유하는 것이다.'라는 무시무시한(?) 결론이 나오게 되었는지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각 소주제에 좀 더 긴 설명을 추가하거나, 소개하고자 하는 책의 핵심을 한 두가지로 한정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상입니다.^^

** 한가지 여쭤보고 싶은데요. '상품성은 이미 출간된 책의 판매 수가 방증하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문장이 어렵지 않고, 어떤 어려운 철학 사상이라도 철저하게 한 인간의 현재의 삶에 대입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면서도 통속적이지 않고, 사상가마다의 주요 논지를 정확히 짚어주어 결코 가볍지만도 않다. 동서양 사상가의 철학을 해체하고, 대중이 각자의 삶에 대입해볼 수 있는 글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은 결코 얄팍한 내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라는 구절은 강신주 선생의 이전 저작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어떤 책을 염두에 두고 쓰신 글인지요? <철학이 필요한 시간>>?, <철학VS철학>? 호기심에 간단히 질문 덧붙입니다.^^

시실리 2012-02-04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전개가 자연스러우며 꼼꼼하여 소개하신 책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키는 좋은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저에게 있어 읽는데 좀 버거웠던 부분은, "책을 처음 펼칠 때는 대학 시절 나름 《논어》도 읽어봤을 만큼, 그리고 그 후 한 번도 안 쳐다봤을 만큼, 제자백가 사상에 대해 아는 듯하지만 실상 하나도 모르는 내가 대뜸 읽어도 되는 책일지 망설였다" 입니다. 어려운 문장은 아닌데도 '무슨 말이지?'하며 재차 읽게 만드는 부분이었읍니다. 이런것은 저도 종종 겪는 일입니다.

꽃별이 2012-02-04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은 제게 언제나 어려운 부분인데, 잘 읽었습니다. 저 먼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의 논점들이 지금 21세기에도 여전히 이야기되고 필요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면, 세상은 진화한다고 하는데, '사람은 왜 항상 그 자리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사회(사람 사이)갈등구조는 항상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거, '사람의 본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 같습니다. 개인간의 철학적인 사유를 통해 서로 의견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이준입니다. 2012-02-05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쫄 필요가 없네요. 합평하는 사람이 쪼는데요.

저도 이 책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것이 서평의 효과겠죠. 안 읽으면 안 되게 만드셨으니, 성공하셨습니다.

그러나 숙제는 하겠습니다. 책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과제물에 대한 의견입니다.
첫째 문단, 논어가 공부가 의미가 없었다고 선언하고, 뒤 문장에서, 바로 부정을 하시는군요. 논리적 오류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강조로 볼 수도 있겠지만, 독자는 서평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쉽게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문단,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백가 시대에는 이런저런 문제가 없었습니까?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방법 또한 뒷부분에서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이 없습니다.
셋째 문단, 앞 문단에서 처참한 현실을 나열해 놓았는데, 그것을 해결할 사람이 이이유 같은 스타입니까? 강 박사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더라도, 아이유를 비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누구나 강 박사보다 한 수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을 인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노벨 문학상을 탈 정도로 상품성도 인정받았고, 사회 운동도 활발했으며, 강 박사처럼 공학 분야도 좀 알고, 가장 적절할 것 같은데요.
중간 부분, 이 부분 대체로 강 박사 책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보이니, 논의를 보류하겠습니다.
마지막 문단, “사유와 논쟁의 역사를 보며 자유롭게 사유하는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이 문장은 공감합니다. 문제는 나머지 문장들입니다. 레드 콤플렉스 사고가 우리의 사유를 가두고, 제자백가 시대가 더 자유롭고 개혁적이었다. 그러나 뒤 문장을 보면, 제자백가시대가 좋았는지 싫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굳이 따진다면 근시안적 귀납적 오류로 보입니다.

제자백가 시대나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 당대 대부분의 사람은 위대한 성인들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어느 쪽방이나 강의실에서 위대한 성인이 현실을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요?

철학이라는 것은 특정 사태가 벌어지고 난 후, 그것에 대한 내면적 근거와 본질 및 전체적인 의미연관을 통찰하여 보다 근원적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태가 먼저 발생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들은 나중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제자백가 사상을 우리 현실에 바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급진적으로 말한다면 [철학이 필요한 시대]는, 현실님 말처럼, (돈 독毒이 올라서) 잘 살아보겠다는 헛발질을 버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를 깊이 사유해야하는 시대입니다. 지금 당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할 뿐이죠.

아네스 2012-02-05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에 책을 많이 읽고, 어떤 형식으로든 글을 쓰는 분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서평이라고 보기엔 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개인적 경험이 너무 많고, 감상문이라고 하기엔 조목조목 짚어가는 것이 전문가 냄새가 납니다 ^^ 서평과 감상문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는데, 저도 평소에 굉장히 고민스러운 부분입니다.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반철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도 그러했지만 이 책을 보면서 나도,우리 시대도 사유가 필요하다"이지요? 아쉬운 것은 왜 철학이 필요한 지, 사유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또 하나 제자백가의 시대처럼 억압이 다양한 사유를 가능케 한다면, 지금 우리시대야말로 다양한 사유와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글쓴이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아이돌과 저자를 같은 수위에서 비교하는 것은 적절한 것 같지 않습니다. 아이돌이야말로 자기 생각없이 기획사의 마케팅에 따라 움직이는 가장 반철학적인 사례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bytheway 2012-02-06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이라는 주제라니! 읽기도 전부터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의외로 쉽게 잘 써주셔서 재밌게 읽을수 있었습니다.

의외로 철학계의 아이유라는 표현이 어색합니다. 첫시간에 읽은 칼럼에서 아이돌이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언급한건 자연스럽게 읽혔는데, 왜 이 글에서 아이유언급은 어색할까 생각해 보니까, 원글님은 상대적으로 저와 같은 또래니까 저 자연스럽게 '아이유'같은 단어를 쓸거라고 기대한 것 같습니다. 60먹은 사람이 아이유에 관해서 말하면 무척 신선하지만, 젊은 사람이 아이유를 언급하면 [왠만큼 세련되게 언급하지 않는 이상은] 촌스럽게 보이는 것 같아요. 모델은 당연히 44사이즈이길 기대하는 것처럼요.(물론 모델이 꼭 44사이즈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을테고, 젊다고 연예가십에 밝아야 할 필요도 없지만, 그냥 그렇게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수 없네요.저도 제가 논리적으로 틀린건 알고 있습니다만......)

후반부의 [여러 명의 군주가 끊임없이 폭력으로 맞서던 시기, 삶의 상처가 깊어 그 상처의 치유를 위해 다양한 사상이 등장한 것이다. 또한 패권을 다투는 여러 군주로 권력이 나누어져 있어, 하나로 취합되는 권력이 없었기에 군주들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기 위해 사상가들에게 언로를 열어놓았다.]-> 이 부분은 논리적으로 너무 엉성합니다. 그냥 저자의 넘겨짚음 정도로 보여요. 철학에 대한 해석을 자신있게 제시할 정도의 작가라면 훨씬 더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써야 하지 않았나 싶어요. 원글님이 저자의 저 의견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하시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여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안의 내용은 그냥 여러가지 가능성중의 하나일 뿐인데 당연한 사실인 것처럼 써서 글 전체에 대한 신뢰도가 저 부분에서 상당히 낮아졌습니다.

책을품은삶 2012-02-07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호흡이 대체로 깁니다. 그래서 읽는데 약간 힘이 듭니다. 수식하는 말이 많아서 그리 된 것 같습니다. 또 너무 많은 말을 하시고 싶어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양한 사상을 내세운 철학가들의 시대와 박정근씨의 구속을 결부시키면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언급한 것은 범주의 오류로 보입니다. 말씀하신 바대로, 춘추전국시대에는 "하나로 취합되는 권력이 없"었고, 지금은 권력(자)이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레드 컴플렉스와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적 다양성을 빗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어긋난 지점 같고요. 책을 설명하기 위해 다소 억지로 지금의 상황을 끌어들였다는 느낌입니다.

따라서 "왜 철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글쓴이의 사유가 약합니다. 좀 더 명확한 근거와 범주를 갖고 철학의 필요성과 사유의 절박함을 말씀하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보거스 2012-02-0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위에서 밤9시의커피 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호흡이 짧은 글이 좋은 글이다, 라는 말이 있지만 전 약간 길어도 현실 님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지금 정도의 문장길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 문장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경계해야겠지만요.

2.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TV 프로그램이 인기 있으며, 성인 남성은 자동차에, 성인 여성은 명품 가방에, 미성년자는 노스페이스 점퍼에 열광하는 시대"에 대한 현실 님의 사유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TV프로그램에 열광할까요? 그렇다면 '(저를 포함한) 그들'은 왜 아무 생각 없이 그런 행동을 할까요?
'혼란의 시대'였던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가 등장할 정도로 '철학하는 시대'였는데
오늘날 한국처럼 '혼란의 시대'에는 왜 사람들이 '철학하지 않는' 걸까요? 덜 혼란스러워서인가요?

3. 기존의 사상을 보고 사유하면서 타인이 분류해놓은 잣대 때문에 오인할 수 있다는 사실도 경계해야겠다
-> '무엇을' 오인할 수 있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4. 사유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반복해 쓰셨는데 구체적인 사유의 사례가 드러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생각합니다. 강신주 선생님의 소개로 <회남자>의 의의도 알고, 제자백가가 등장한 배경도 알았는데, 그래서 현실 세계를 어떻게 사유하고 계신지는 알 수 없는 글인 듯합니다.

5. 제자백가 사상이 이합집산하더니 끝내는 큰 줄기로 모여 체계화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고 하셨는데 정말.. 강신주 선생님 책만 읽으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강신주 선생님께서 정리하신 내용을 이해한다고 그게 과연 내 지식이 되는 건가요?

질문이 좀 공격적이었나요;
사실 이 거친 질문들은 제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 왜 사람들은 명품에 열광할까,
나는 그 가치를 온전히 배제하고 명품 따위는 아무 의미 없다고 고고하게 살아갈 수 있나
명품 가방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이런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은 내가 '사유하지 않아서'인가?

- 타인의 지식을 읽기만 한다고 그게 과연 내 지식이 될 수 있나? 머리로 '아는 것'이 과연 내 것인가?
내가 가진 얇은 줄기를 튼튼하게 해주고 이파리를 무성하게 기르려면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등등이요. 생각할수록 어렵고, 공부를 해야겠는데 게으름이 가장 큰 적이네요.
일단 뭐라도 시작해봐야 하는데, 늘 말뿐이라 제 스스로가 걱정입니다. 하악.

고리 2012-02-08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이 사라진 시대, 사유하지 않는 시대를 자조적으로 비판하며 <철학의 시대>를 읽게 된 심경을 먼저 밝히신 점이 이 글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쓴이의 감정에 공감하고, 자기성찰의 겸허한 말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효과가 있어요. 이대로 가만 있지 말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게 하고요. 그런 고로 <철학의 시대>의 책장을 열 마음을 자아내기에 알맞은 글이라고 봅니다.

돌이 2012-02-08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인문학 글쓰기에서 처음 만나는 서평이라 좋고, 서평이 거의 '책' 수준이라 더 좋고, 또 이 서평을 읽고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을 얼른 구입해서 읽어야겠다는 욕망이 꿈틀거려서 무엇보다 좋습니다.

문장이 길지만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얘기하려는 내용도 손에 잡히듯 명료하네요. 많이 읽고, 많이 쓰신 분의 내공이 느껴져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열공해야겠습니다. 열공!! 제가 감히 뭐라 지적하기에 이 글은 너무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제자백가가 활동했던 당대를 우리 사회와 직접적으로 대비시키며 현재를 비판하는 부분은 논리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것 같습니다. 뭐랄까, 논리적 비약도 있는 것 같고, 사실을 좀 더 날카롭게 분석할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저는 춘추전국시대에 자유로운 언론과 사상이 꽃을 피웠다거나 조선시대에 예치가 매력적인 사상이었다는 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패권을 잡기 위해 지배이데올로기에 목말랐던 군주들과 이들에게 '채용'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사상가들에게서 진정 자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인지, 또 오로지 주자학 하나로 사문난적의 칼을 휘둘렀던 조선시대에도 안빈낙도나 예치의 향기는 그저 명분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심을 거두기 어렵습니다.
철학이 필요한 시대라는 말에는 찬동하지만, 춘추전국시대가 철학의 시대였거나 그런 비슷한 시대였다는 건 글쎄요...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12시 넘기기 전에 올리려 했는데, 늦었습니다.

최근에 본 영화 <자전거 탄 소년>에 대한, 감상에세이입니다. 영화 보실 분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스포일러 가득한 글이라서요.-ㅅ-; 하지만 이 글 보시고 영화를 보시더라도 재밌게(?) 보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럼 당근과 채찍을 부탁드립니다~! ^^ 

 

<자전거 탄 소년>은 아빠를 잃은 소년 시릴과 소년이 뻗은 손을 붙잡아 준 위탁모 사만다, 아들을 버리고 홀가분하게 새 생활을 하려는 아빠의 이야기다. 시릴은 ‘아빠를 만나고 싶어!’라는 바람을 이루기 위해 돌진한다. 하지만 아빠는 이미 시릴과 자신 사이에 선을 긋고 아들을 조용히 포기시키려고 할 뿐이다. 사만다는 시릴을 우연히 만나고, 위탁모라는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세 사람이 각각 취하는 행동이 내게는 놀랍게 느껴졌다.

시릴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지금은 없는 국번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걸어 주십시오.’라는 음성이 흘러나오는 수화기를 한없이 붙들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옆에서 보육원 선생님은 시릴이 아빠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빨리 인정하게 하고자 실랑이를 벌인다. 이 상황에서 얻은 정보만으로 난 시릴을 가엾게 여기게 됐다. 뒤이어 말리는 선생님과 형을 뿌리치고 아빠를 향해 달아나려는 시릴에게 가슴 아픈 사정이 있으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까. 아빠의 핸드폰 번호, ‘사정이 나아지면 데리러 갈게.’라는 막연한 약속 하나만 믿고 보육원에 온 시릴에게,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전화번호, 빈 집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아빠의 말을 믿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이 느껴진다.

아빠는 실직과 빈곤한 경제 상황 때문에 애를 보육원에 데려다 놓았다. 그저 제 앞가림하기에 바쁜 듯하다. 말하기 곤란해서 내색은 안 했지만, 이참에 아이 양육을 포기할 셈도 있는 것 같다. 속 편하게 양육 책임을 떨쳐 낸 시릴의 아빠가 놀라웠다.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집과 오토바이, 시릴의 자전거를 처분하고, 다른 도시로 이주해 새 보스 겸 애인의 집에 들어가고 일자리를 얻어 아무렇지 않게 새 생활을 시작해 버렸다. 오매불망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아들은 마음에서 깨끗이 지워 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영화에서 묘사가 안 되었기 때문에 시릴의 아빠를 더욱 나쁜 놈으로 해석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양육을 포기하는 부모를 실제로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빠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지만, 한편으로는 사회 안전망 덕분에 자신이 양육을 포기해도 시릴은 괜찮을 거라는 믿을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이래서 유럽은 사회보장제도 때문에 놀고먹는 룸펜이 많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힘을 얻는 건가 싶어 불만스러웠다. 아빠는 시릴이 지폐 뭉치를 가져와서 내밀었을 때, “걸리더라도 아빠한테 줬다는 말은 절대 안 할게!”라고 덧붙이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누굴 감옥에 보내려고!”라며 내쫓았다. 아빠가 시릴을 냉대한 것도 불쾌했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기까지 잠시 주저한 시간에서 더더욱 씁쓸함이 느껴졌다. 사실은 궁하니까 돈을 받고 싶었는데 돈을 받으면 다시 시릴과 새로운 관계가 쌓이기 때문에 완전히 연을 끊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만다. 사만다는 시릴 아빠가 살던 아파트 1층의 병원에서 시릴과 처음 만났다. 사만다는 시릴의 아빠가 팔아 버린 자전거를 되사서 시릴에게 선물했다. 시릴은 사만다의 호의를 놓치지 않고 주말에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데, 사만다는 선뜻 위탁모 역할을 맡는다. 사만다가 처음에 시릴을 도왔을 때, 그다음 역할까지 예상했을지는 모르겠다. 호의를 표현하는 동안 마음이 점점 커지고 더 큰 품으로 시릴을 품을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이어 나가려면 처음에는 한쪽에서 넘치는 감정이 가 닿아야 시작된다. 그다음에 상대방이 그 감정에 답하면, 감정의 흐름이 생기면서 마음이 오고가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만다가 내민 손을 시릴이 잡고, 다시 시릴이 내민 손을 사만다가 붙잡으면서 관계가 이어진 셈이다.

이 영화에는 인상적인 인물이 네 사람 더 있다. 보육원 선생님과 시릴을 꼬드긴 웨스, 시릴에게 맞았으나 복수하는 부자(父子)이다.

영화 전반에서 보육원 선생님은 시릴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보육원 선생님에게 소년은 맡아야 할 아이이고, 해야 할 일뿐이었다. 나름대로 끈기를 가지고 아이를 대하기는 해도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달래 줄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시릴이 보육원을 뛰쳐나가 아빠랑 살던 집에 가는 ‘외출’을 감행했을 때, 시릴을 발견한 선생님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사람도 어지간히 생활에 지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했다.

웨스라고 머리를 기름지게 빗어 넘긴 껄렁한 남자애가 나오는데, 똘마니를 시켜서 시릴의 자전거를 훔쳐서 약을 올린다. 끈덕지게 따라붙어 자기 자전거를 지켜 낸 시릴이 마음에 들었는지 웨스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계신 자기 집으로 시릴을 데려갔다. 전용 냉장고에서 환타를 꺼내 주었을 때, 집에 초대한 녀석은 네가 처음이라고 했을 때, 게임기 리모컨을 건네주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놈이 특별한 목적이 있어 시릴을 끌어들인 것이란 것을. 너무 뻔한 상황이라는 생각에 아니길 바랐던 마음이 의심을 눌러버렸었다. 시릴의 깡다구가 마음에 들었던 웨스는 친절하게 굴어서 시릴의 마음을 산 다음, 자신의 전직 보스를 상대로 아리랑치기를 할 똘마니로 삼을 계획이었던 거다. 둘이서 숲에서 범행 현장 상황을 가정하고 연습하는 장면을 보는데, 이번에는 시릴에게 화가 났다. 사람을 해치고 재물을 빼앗는 일을 하자는데, 순순히 따라 준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고작 웨스가 보여 준 얕은 신뢰를 기쁘게 받아들일 정도로 정에 굶주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일까. 사만다가 그렇게 웨스랑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시릴은 무시했다. 일을 그르치자 자신을 버리는 웨스를 겪고 나서야 시릴은 웨스란 인물의 됨됨이를 깨닫는다. 불이 뜨거운 줄 알아야 피할 수 있다고, 꼬마들에게 불 가까이 손을 가져가서 뜨거운 열기를 느껴 보게 가르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시릴에게 공격받은 아저씨와 아들이 있다. 사만다가 치료비와 위자료를 내고 아저씨는 시릴을 용서하기로 합의했지만 아저씨의 아들은 시릴을 용서하지 않았다. 게다가 우연히 시릴을 만나게 되자 소년은 시릴을 폭행한다. 나무 위로 도망간 시릴에게 마구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이건 뭐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당해 보라는 식이다. 그러더니 시릴이 나무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자 그제야 불안해한다. 애가 깨어나면 구급차를 부르고, 일어나지 않으면 그냥 조용히 가겠다는 아저씨의 태도 또한 놀라웠다. 어이없는 기분이 가라앉자 이 사람들을 비난하는 마음이 일었으며, 동시에 비단 이 사람들만 이런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솟았다.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처음엔 좋았는데 안 좋게 끝나는 사이도 있고, 내내 악연인 사이도 있다. 사만다가 아빠에게 솔직히 얘기해 주라고 했기 때문에 시릴은 더 이상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아빠의 진심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시릴이 사만다를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만다는 이미 시릴의 인생에 깊이 개입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 아마도 사만다는 시릴이 헛된 희망을 품고 살다가 훗날 진실을 알고 크게 실망할 것을 걱정했을 거다. 사만다는 시릴이 현실을 인정하고 다시 새로운 희망을 찾기까지 곁에서 돕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와 아무 상관없는 내가 사만다에게 시릴을 부탁하고 싶은 이유도 내가 이미 이들에게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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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2012-02-0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리를 따라가며 주요인물들 각각에 대해 느꼈던 감정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만다에대한 부분은 시릴과 사만다의 관계설명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순순히(?) 아이를 맡게 된 부분에 대한 필자의 느낌이나 시릴이 나쁜 친구와 어울리다 범행을 저지른 일을 해결하는 사만다에 대한 생각이 부족한 느낌입니다. 마지막으로 영화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 감독이 보여준 마지막 결말에 대한 필자의 평이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상황이 이해할 만한 이야기 였던가요? 아니면 안타가운 것인가요?

꽃별이 2012-02-04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읽으면서 영화에 대한 개요는 잡히는데, 별구름님만의 느낌은 잘 와닿지 않았으며, 좀 더 별구름님의생각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글쓰기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2-02-0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별구름님의 영화리뷰 잘 읽었습니다.^^ 철저하게 인물을 중심으로 영화를 감상하고 대화하듯이 행동에 대해 되묻고 의미를 찾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아빠는 시릴이 지폐 뭉치를 가져와서 내밀었을 때, “걸리더라도 아빠한테 줬다는 말은 절대 안 할게!”라고 덧붙이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누굴 감옥에 보내려고!”라며 내쫓았다. 아빠가 시릴을 냉대한 것도 불쾌했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기까지 잠시 주저한 시간에서 더더욱 씁쓸함이 느껴졌다. 사실은 궁하니까 돈을 받고 싶었는데 돈을 받으면 다시 시릴과 새로운 관계가 쌓이기 때문에 완전히 연을 끊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같이 주인공들의 행위를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글쓰기는 우리 삶에 조금 더 다가서려는 필자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요? 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편협한 생각에, 글쓰기는 대상과 나와의 거리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컨데 대상과 나는 어느정도 어느정도 거리감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대상은 대상대로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내 의견은 의견대로 본문속에 녹아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한 나머지 영화의 전체적 톤, 흐름과 줄거리, 주제의식 같은 것이 모조리 소거된 느낌입니다. 별구름님의 이 리뷰는 인물들의 '놀라운 행위'와 그 행위에 대한 '필자의 주석'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물들의 '놀라운 행위'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너무도 빨리 표출하고 싶은 조급함이 아니었을까요? 아쉬움이 남는 글입니다. 이상입니다.^^


이준입니다. 2012-02-0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 수준이 아니라, 그냥 영화 한 편을 다 본 느낌입니다. 제 기억이 맞았다면, 말씀하시는 것처럼 글도 매끄럽게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숙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과제는 감상문이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감상문은 영화와 글쓴이의 교차점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중간에 나오는 부연설명만으로는 글쓴이의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수정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해왔다. 다음에 영화의 특정 부분을 잡아내고, 영화와 내 생각은 이런 식으로 차이가 난다. 이런 식으로 정리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아네스 2012-02-05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한편을 촘촘히 설명하는 글쓴이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통념적이지 않은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고 주인공 소년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는 글쓴이의 바른 심성을 보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인물들의 행동을 이해하고자 하는 글쓴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표피만 건드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인 가치, 즉 아버지는 반드시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 댓가가 없는 선의는 의심스럽다 등으로 이 영화를 이해하려고 하면 참 재미없을 것 같은데...작품의 중요한 소재인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도 좀 의아스럽네요.

리얼리티 2012-02-0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요일에 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월요일 저녁까지 댓글을 달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아프게(?) 글을 읽었습니다. 영화 주인공의 각각의 입장에서 스토리를 촘촘하게 얽어가는 글이네요. 아쉬운 점은 글에 시릴, 사만다, 시릴의 아빠, 그리고 기타 4인이 등장하는데, 별구름님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bytheway 2012-02-06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사만다는 이미 시릴의 인생에 깊이 개입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 ]
-> 이 부분이 제일 맘에 들어요.
다른 부분은 영화의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위주인데, 저 부분은 글쓴이의 입장이 명화하게 들어가 있어서 맘에 듭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무엇을 하고 하지 않는지, 조금 더 길게 쓰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물론 이 글은 각자의 캐릭터의 입장에 따라서 이런저런 행동을 한다고 말하지만, [입장에 따라서]보다 [이런 저런 행동을 한다]가 더 강조된 글이라서 조금 심심해요.

보거스 2012-02-0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려고 애쓰신 흔적이 보이는 글이네요.
글을 보고나서의 받은 첫인상은, 저와는 영화 보는 방식이 다르신 분인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나면 전 줄거리를 거의 떠올리지 못하는데요.
전체적인 줄거리보다는 그 영화에서 인상적인 대사 한 줄이나 한 장면이 더 오래 기억나더라고요.
그래서 저한테 영화를 고르라고 하면 그 영화가 어떤 감수성을 줄지가 더 중요하죠.

이 영화 포스터를 보고 이 영화를 볼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 소년과 여자가 강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요.
그런데 이 글만 읽으면 감수성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요.
줄거리만 나열되어 있어서 이 영화속 풍경이 어땠는지 아이의 감정이 어땠을지는 좀 덜 느껴져 아쉬웠습니다.

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만 마음에 들었던 문장은요,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이어 나가려면 처음에는 한쪽에서 넘치는 감정이 가 닿아야 시작된다.
그 다음에 상대방이 그 감정에 답하면, 감정의 흐름이 생기면서 마음이 오고가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데요. 시릴과 사만다의 관계를 잘 꿰뚫어보신 것 같네요.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려면 넘치는 감정을 주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 건가, 하고 생각도 해보게 되었고요. 글 잘 읽었습니다.

희망둥이 2012-02-07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감상문을 너무 줄거리 위주로 썼다는 느낌입니다. 우선 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동기가 나왔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줄거리는 짧게 줄이고, 떠오르는 명장면이나 님께서 특히 인상깊었던 장면에 대한 개인적 생각이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 좋겠어요. 또 이 영화는 님의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세세하게 표현되면 좋겠습니다.

저도 이렇게 영화줄거리를 자세히 기억하기 어려운데, 기억력이 좋은 것은 대단한 장점입니다.

책을품은삶 2012-02-0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 가득하다고 선전포고(?)해 주셨는데, 써주신 글은 감상문이 아닌 줄거리의 나열입니다. 글을 본 저의 첫 느낌은, 글쓰기를 처음 배우는 학생의 것 같았습니다. 줄거리와 인물에 대한 글쓰기로 일관하면서 거기에 감상자의 단편적인 느낌만을 끼워넣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담아 기록하는 차원(가령 일기)이라면 문제 없겠으나,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위한 글로서는 미진합니다. 그래서 아쉽습니다.

돌이 2012-02-07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는 댓글을 빨리 써야겠습니다. 이놈의 게으름 때문에 고민이 깊어지네요. 앞의 분들이 거의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다고 논평을 하셨는데요, 저라고 뭐 다를 게 있겠습니까? 그래도 숙제는 해야 하니...한 줄 영화평처럼...."모든 걸 말하려다 보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애매한. 제 별점은요..."

냠냠이 2012-02-08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자전거 탄 소년> 보고 싶네요. ㅎㅎ ^^ 수고 하셨습니다.
이 글은 글쓴이만의 고유한 감상이 잘 부각되어 있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인물간의 관계를 설명할 때는 구조적으로 좀더 정리된 채로 전달을 하면 더 좋은 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