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기원 - 인간은 왜 스토리텔링에 탐닉하는가
브라이언 보이드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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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기원] 브라이언 보이드, 남경태 역, 휴머니스트, 2013

 

제목에서 혼돈이 생긴다. 제목을 그대로 이해하자면, 이야기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떠올릴 수 있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는 다윈의 책을 염두에 두고 제목을 정했다. 저자는 이 책을 “[종의 기원]의 핵심 내용을 일반화하고 확장”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문학비평에 진화론을 도입함으로써 문학비평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새로운 비평체계로서 진화비평을 도입해야 한다.

진화비평은 문학작품에서 파생되는 “문제와 (그것의) 해법이라는 주제와 (그 해법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문제에 대해 (새롭고도) 매우 복잡한 해법을 만들어내는 진화 체계의 힘 - 발생, 검증, 재발생의 순환 - 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생소한 이론이다 보니, 비평 자료로 사용된 [오디세이아]와 [호턴이 듣고 있어!]의 몇 단락을 제외한다면, 본문의 대부분이 진화론과 진화론을 배경으로 한 여타 학자들의 주장과 저자의 부연 설명이다. 물론 뇌신경과학, 진화심리학과 진화사회학(이런 학문이 있다면)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을 문학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새롭게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낯설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생물 문화적 관점이 없으면 픽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고 얼마나 자연적인지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게 평가할 필요가 있을까? 뇌과학자들의 연구를 따르면, 우리 뇌 속에는 ‘나’라고 불리는 ‘자아’가 단 하나뿐이지 않다. 도대체 어떤 자아가 복잡다단한 진화체계를 이해할까? 또한 어릴 적 읽었던 작품을 나이 들어서 다시 읽어보면 또 다른 감동을 받게 되는 것도 진화로 설명해야 하는가? 最古의 작품 중의 하나인 [오디세이아]는 거의 3천 년 동안 연구되어 왔는데도, 이것이 [오디세이아]라고 단언할 수 있는 뭔가를 본적이 있는가? 진화비평을 못해서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이런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저자는 문학을 다른 말로 픽션을 ‘인지 놀이’라고 규정한다, 이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놀이’를 확장한 개념이다. 진화론과 비트겐슈타인. 저자의 관점은 프래그머티즘적이지만, 프래그머티스티인 로티와는 전혀 상반된 결론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로티의 지도의 받은 이유선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과학적 철학을 표방함으로써 철학이 많은 독자를 상실하고 별다른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면, 철학은 글쓰기의 방식에 대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해결책이란 매우 간단하다. 반대의 길로 가는 것, 즉 문학적인 철학을 하는 것이다.”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201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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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 뜻밖의 철학
그레고리 베스헴 외 지음, 박지니 외 옮김 / 북뱅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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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호빗 뜻밖의 철학] 그레고리 배스햄 外, 북뱅, 2013

 

영화 [뜻밖의 여정]을 염두에 둔 이 책의 원제목은 [호빗과 철학]이다. 톨킨의 소설을 좋아하는 철학자들의 글을 묶어 놓았으니, 제목에 철학이란 말을 붙인 것이 뭐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본격적인 철학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앞부분에 있는 [빌보 베긴스의 영광]편을 보면 플라톤의 전승 속에 있는 “가정생활의 미덕과 그 단순한 기쁨”이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호빗]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을 인용해서 “가정생활의 미덕과 그 단순한 기쁨”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이해는 되지만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진 철학적 함의들이 [호빗]에서 나타나는 철학적 함의와 같은가. [호빗]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을 ‘메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가.

 

철학자 김영건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 골똘하게 반성해 본다면, 아마 철학이나 철학적 사유를 요구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메타적이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 정당성, 그것이 갖고 있는 함축들을 메타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철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철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책이나 [호빗] 속에서도 철학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것은 철학적 사유의 단면이지 그것을 본격적인 철학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철학이란 것은, “그것을 진짜 잘하는 것은 철학자의 생각, 즉 철학책을 메타적으로 반성하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

김영건 선생님의 말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철학적 사유이고, ‘생각의 정당성’의 함축들을 ‘메타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면 철학이 될 수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정당성’과 ‘메타적’이란 단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논증해하지만, 이것들의 의미 또한 ‘철학’처럼 모호하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철학책을 메타적으로 반성”할 수 없다면 함부로 ‘철학’ 이란 단어를 써서는 안 되고 그것을 ‘철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철학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고, 논증되지 않는다면 철학도 아니고 철학책이라고도 말 할 수 없다.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어떻게 읽어야 할까.

 

“포장된 개똥철학이 마치 진정한 철학인 것처럼, 혹은 자신의 주관적 감흥이 철학의 핵심인 것처럼, 혹은 어떤 철학적 명언들을 앞 뒤 문맥을 다 잘라먹고 거기에 별로 신빙성이 없는 자기 소감을 덧붙이는 것이 마치 대단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것들을 기초로 해서 더 깊게 혹은 더욱 합리적으로 나아가야 비로소 단단한 철학적 사유가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독자들도 스스로 훈련해서 이런 것들을 판단할 수 있어야만 한다.”

 

“스스로 훈련해서 이런 것들을 판단”할 수 있다면 철학과 문학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플라톤의 대부분의 저작들이 드라마 형식이지만, 최고의 철학책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철학과 문학은 한편으로 묶일 수 있다. 그렇지만 훈련되지 않은 독자가 ‘철학’ 이란 제목만 보고 그것을 ‘철학’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개똥철학이 되고 만다.

 

플라톤 이래로 문학과 철학은 엄연하게 구분되었다. “문학은 환각이라고 그가 누차 말하지 않았던가... 소설가는 현실을 보고 환상을 만든다면 그는 환상을 통해 현실을 이해하려는 것 같다”고 말한 소설가 박완서의 말처럼, 문학은 창조해낸 현실이고, 철학은 현실에 접근하려는 몸부림이다.

 

이 책에는 [호빗]이라는 판타지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접점을 밝혀내려는 철학자들의 철학적 사유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 삶에 대한 정답도 들어있지는 않다. 고대인들은 칼에 피를 묻혀가며 공동으로 향유할 수 있는 영광을 위해서 살았고, 중세인들이 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 근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영광을 위해서 살아왔는가. 톨킨의 책 속에는 고대인들도 살고 있고 중세인들도 근대인들도 살고 있다. 그들은 그 속에서 살아갈 뿐 현실로 뛰쳐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이 책의 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지만, 그 책 속에서도 이 책 속에서도 우리가 처한 차갑고 무거운 현실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는 없다.

 

“하늘에서 한방에 목돈이 떨어지는 것을 기대”해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문학적인 글들을 읽고 그것에 감동하고, 그 감동의 정체를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즉 메타적으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한다는 의미에서 성숙이다.” 이 책을 통해서 스스로 훈련해서 성숙해졌다면, 그렇다면 이 책도 훌륭한 철학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훈련해서 성숙해지지 않는다면 어떤 위대한 철학책 속에서도 우리 삶의 정답은 찾을 수 없다. 단지 “어쩌면 일생에 한 번도 접해 보지 않는 철학책이라도 읽는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의미에서 영광일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명예를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듯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무화가 나무아래에서 신에게 영광을 돌리듯이, 지금 나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201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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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무의식 - 정신분석에서 뇌과학으로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김명남 옮김 / 까치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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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 [새로운 무의식]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김명남 역, 까치, 2013

 

“공연을 가는 이유는 오로지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스마트폰이나 CD로도 좋은 음질의 음악을 편하게 들을 수 있는데도 우리는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공연에 간다. 공연의 핵심이 음악이고 그 핵심이 특정 매체에 무손실로 입력되고 재생되지만 우리는 공연에 간다. 지금보다 더 스마트한 세상이 와도 공연문화가 사라질 것이라고는 상상 할 수 없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석학들의 강의가 인터넷으로 전송되고 집안에서 편안하게 보고 들을 수 있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

왜 가는 것일까? 이것은 공연이나 강의에 직접 참여해보고 다른 매체를 통해서 다시 그 공연이나 강연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를 대면하고 느낀다. 그것을 복제한 매체를 통해서는 느낄 수 없다. 그럼 공연이나 강의를 빛내는 ‘아우라’란 무엇일까?

 

빛으로 상징되는 ‘아우라’는 미국의 철학자 퍼스가 말한 “의식의 다른 지면에 있는 내면의 빛으로”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퍼스는 인간에게 ‘내면의 빛’이 없다면 “인류는 생존투쟁에서 무능력하여 오래 전에 절멸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퍼스의 친구이며 심리학자이고 철학자이기도 한 윌리엄 제임스는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한다. 여기에서의 무의식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는 비록 흠이 있지만, 무의식을 강조했던 그의 관점”은 타당하고 주장한다. “Id, Ego와 같은 모호한 개념들은 (사회 신경 과학에서 말하는) 뇌의 구조, 연결성, 기능적 지도 등에 그 길을 내주었다. 우리의 대부분의 사회적 인식도 - 시각, 청각, 기억처럼- 우리의 자각, 의도, 의식적 노력과는 무관한 경로에 따라서 전개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말하는 무의식은 “정신분석 요법이 추천하는 자성적 기법(self-refrlection)을 통해서 결코 들어나지” 않으며 새로운 과학적 기법 (예를 들면 fMRI 등) 을 통해서 발견되고, 부모에 대한 “부적절한 성적 욕망이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새로운 “무의식은 진화의 산물로서 인간 종의 생존”에 중요한 것이라고 전제하는 저자는 과학적 기법으로 통해서 발견된 사실들, 배촉전도체가 무의식적 편향을 유발한다는 과학적 사실들을 열거하면서 현대 뇌과학자들의 주장과 Kant의 인식론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Kant의 이론은 우리의 마음이 객관적 사건을 충실히 기록하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그림을 적극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이다. Kant는 인식이 실재 존재하는 것 만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했다. 인식은 마음의 일반적인 속성들에 의해 어느 정도 창조 - 또한 제한 - 된다.”

Kant의 인식론이 직면한 생활세계에서 근대 과학을 구출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면, 오늘날의 뇌 과학자들은, 적어도 이 책의 저자를 비롯한 일련의 미국 과학자들은, 프래그머티즘이라고 이름 붙여진 퍼시의 사상을 기저에 두고 “철학적 발상이나 이론을 절대적 이론이 아니라 도구로 보아야 한다고 믿으며 그 타당성도 삶에서의 현실적 결과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프로이트적 무의식을 거부하고 현대 과학을 재정립하려고 한다.

 

‘새로운 무의식’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체계에서 무의식은 근본층위이며 진화의 역사에서 일치감치 발달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무의식은 “모든 척추동물의 뇌에 표준적으로 갖추어진 하부구조이지만, 의식은 선택상황에 가깝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은 의식적 기호적 사고력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이도 살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산다. 반면 무의식이 없다면 어떤 동물도 살아 갈 수 없다.” 이러한 무의식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의식으로 받아들인 단편적인 정보를 포함한 대부분의 정보들을 저장하는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무의식이 식욕이나 성욕 배설욕 같은 동물적 본능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고 할 때, 우리의 통제가능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지만, 우리의 뇌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근본층위인 무의식으로) 인식의 빈틈을 채운다.” 우리는 이러한 매카니즘을 ‘맥락의 부호화’라고도 하고 ‘뇌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지만, ‘새로운 무의식’이라는 존재를 가진 나는 뇌가 만들어낸, 무수한 인식의 빈틈을 채운 어떤 것을 잡고 ‘나’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무의식이라는 근본층위가 만들어낸 ‘나’와 그 상부구조인 의식하는 ‘나’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도 인정해야한다.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가? 끊임없이 진화와 퇴보를 거듭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인식의 빈틈을 메우고 있는 무의식의 층위에서 내가 ‘나’라고 확증할 수 있는 고정불변의 어떤 것을 도출할 수 있는가.

프래그머티즘적 관점에서 본다면, ‘새로운 무의식’은 도구일 뿐이고, 그 존재의 타당성도 현실적 결과에 따라서 판단되는 가변적인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놓여있고 동일한 공간에 숨을 쉬고 있지만, 그 공간은 어제의 공간이고 내일의 공간일 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대상에 진리값을 부여하며 존재여부를 가늠해보지만, 가변적인 현실의 흐름 속에 놓인 ‘나’라는 존재는 ‘새로운 무의식’이라는 가변적인 도구를 통해서는 어떤 대상에도 어떤 진리값도 부여할 없다. Kant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발견한 ‘나’가 아닌 외부에 진리값을 요청했지만, ‘새로운 무의식’을 받아들여야하는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확정할 수도 없고, ‘나’라는 존재를 매개로 외부에 진리값을 요청할 수도 없다. 설령 神이 인간을 불쌍하게 여겨 이간ㅇ게 진리값을 준다고 해도 어떤 ‘나’가 그것을 적용할 것인가. 神이나 진리의 존재가 확증된다고 해도, 나가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공연이나 강연회에 참석을 한다. 그 공연이나 강연회의 핵심 주제 즉 음악이나 정보는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무의식에만 저장되는 그런 일들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만 존재한다. 연주자들의 신들린 몸짓,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빛, 관객들의 나지막한 탄성, 학생들의 절망적인 탄식. ‘새로운 무의식’의 작동으로 만들어진, 그 시간과 공간에서 창조되고 다시 우리의 ‘새로운 무의식’에 내재되는 이러한 의식적 무의식적 경험의 총체는 벤야민이 인식 대상에게 부여한 ‘아우라’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공연과 강연회를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무의식의 기반 위에선 아우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 속에 있는 다중적 자아의 착각일 수도 있고 새로운 무의식의 편향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존재한다.

헤겔의 절대적 정신은 부정할지라도, Kant가 그랬던 것처럼 외부에 진리값을 요청할수 있는 ‘나’가 포함된 ‘아우라’는 존재한다. 우리가 공연이나 강연회를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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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팅 게임 - 백만장자의 상속자 16명이 펼치는 지적인 추리 게임!, 1979년 뉴베리 상 수상작
엘렌 라스킨 지음, 이광찬 옮김 / 황금부엉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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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 [웨스팅 게임] 앨렌 라스킨, 황금부엉이, 2008년 초판, 2013년 개정판 1쇄.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者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만족’이란 단어를 끄집어내지 못한다. 대신 직면한 현실에서 불안을 끄집어내고, 불안은 공포나 권태로 사람들을 몰고 간다.

 

게임을 시작하는 새뮤엘 W 웨스팅도 마찬가지다.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그도 현실에서 불안을 끄집어낸다. 그의 불안은 뭘까? 웨스팅 게임의 목표는 표면적으로 막대한 유산을 받을 상속자를 찾는 것이지만,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본다면, 게임은 백만장자가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은 장난에 불과하다.

 

16명의 유산 상속인들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얻게 된 멋진 집과 게임 참가비로 받은 현금.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니 이런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이라도 해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만족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16명들의 유산 상속인들은 만족할 줄 모른다. 그들의 눈은 거대한 유산에 가려져 버리고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며 웨스팅 게임에 빠져든다. 내 몫을 타인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공포가 그들을 게임 속으로 몰고 간다.

 

[웨스팅 게임]은 옮긴이의 말처럼 “혼자 푸는 퍼즐, 게임북을 한데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옮긴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실증 내지 않고 재미있게 구성”된 책이라고 말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우리에게 사건의 실마리로 등장하는 영어로 된 퍼즐은 어려운 수학문제보다 더 고통스럽게 읽힌다. 그렇지만 권태로운 일요일 오후를 망칠 정도는 아니다.

 

영어 퍼즐은 한국어로 모두 바꾼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웨스팅 게임] 대신에 [김회장의 유산]으로 제목을 바꾸고 배경을 미국에서 한국으로 바꾸고 그러면 더 재미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이 책이 1979년 뉴베리 상 수상작이라는 것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201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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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나의 힘 - 카프카의 위험한 고백 86
프란츠 카프카 지음, 가시라기 히로키 엮음, 박승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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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절망은 나의 힘] 프란츠 카프카, 가시라기 히로키 엮음, 한스미디어, 2012

 

“나는 매일 아침 절망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나보다 의지가 강한 인간이라면 기꺼이 자살했겠지요.”

 

이것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의 독백이 아니다. 이 글은 ‘노동자 상해 보험 협회’에서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근무했던 카프카가 약혼자 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둘러본다면, 카프카의 이 배부른 푸념은 용납 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정확하게 몇 년도에 쓴 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죽지 직전에 쓴 글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 카프카를 이렇게 절망으로 몰아갔을까?

 

“그는 조형물의 조각을 끝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끊임없이 같은 곳에 끌을 대고 치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집중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리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그는’ 카프카 자신이다. ‘조각’은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에 일 것이다. 아무리 써도 자신을 만족스러운 글을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그의 절망을 그는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물론 이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지만, 소설에 대한 절망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고민과 병약한 몽뚱아리에 대한 절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카프카만 이런 절망을 느끼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현실은 차갑고 미래는 불안하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일은 내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미래를 생각하고 걸려 넘어지는 일이라면 가능합니다.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은 넘어진 채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카프카는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은 넘어진 채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한다. 병약한 몽뚱아리와 폭압적인 아버지와 사랑하는 연인을 버려두고 넘어진 채, 오르지 글쓰기에만 몰두했다. 카프카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작품을 쓰며 쓸쓸하게 요절할 운명을 받아들였다.

 

“인생에 필요한 능력을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인간적인 약점뿐“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밤을 새며 글을 썼다. 그렇지만 글쓰기도 하나의 재주고 재능이다.

 

“이승의 짧은 밤들 때문에 영원한 밤에 대해 불안을 품게 될 것 같습니다.”

 

카프카는 영원한 밤을 밀어내고 밤새 글을 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이 밀어나는 아침을 맞이한다. 그들에게 아침은 절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들에게 영원한 잠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은 없다. 영하로 떨어지는 쪽방 한 귀퉁이 누더기 같은 이불 속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은 희망이 빛이 아니라 시퍼렇게 날 선 비수다. 그것을 피해 영원한 잠을 청한다.


카프카가 위대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카프카는 자살에 대해 ‘지겨워서 견디기 어려워진 오래된 독방에서 언젠가는 다시 지겨워질 새로운 독방으로 옮겨주기를 간청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이 책의 작가는 말한다. 벗어나지 못하는 독방, 그것은 고독의 다른 이름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고독이라면 차가운 현실을 녹여내는 것이 낳지 않을까. 이곳은 끝이 존재하지 않는가.

 

에필로그에 이런 말이 있다.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질 때,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을 때, 도저히 긍정적인 기분이 들지 않을 때,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때, 부디 이 책을 펼쳐보게 되기를 바란다.”

 

잠시 크게 한 번 쉬고, 카프카처럼 고독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꽤 멀리까지 걸었습니다.

다섯 시간 정도, 혼자서.

그래도 고독이 모자라내요.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골짜기이지만

그래도 외로움이 모자랍니다.“

 

우리는 가끔 ‘카프카적’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언어로 구체화 시킬 수 없는 것이다. 카프카 책을 오랫동안 읽지 못했던 독자라면 [변신]이라도 한 번 읽어보고,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2013.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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