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시간에 이미 말씀드렸듯, 제 천성은 비록 게으르나 약조한 일은 어찌하든 지키려는 성정을 지닌 탓에 오늘 밤을 넘기지 않고 이렇게나마 글을 올립니다. 사실 더 붙잡고 있어봐야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은 연유도 있겠지만요. (어째 사극~~)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마지막 발표를 맡은 배경완입니다. 멋진 피날레를 장식해야 할 터인데, 걱정이 앞서네요.
아참!! 이상원 선생님, 빨리 알라딘 회원 가입하시고, 발표문 순서랑 간략한 소감이라도 올리시죠^^
내 맘대로 뽑은 2011년 최고의 영화, 최악의 영화 - [그을린 사랑]과 [마이 웨이]
내 처지가 반 백수인 관계로 사람이 뜸한 조조할인 시간대에 주로 영화를 관람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큰 이점이라면 영화보다는 먹을거리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영화 시작 후 적당한 때를 봐 좌석을 옮길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작 몇천 원이긴 하지만 저렴한 가격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좋은 점만 있는 건 결단코 아니어서, 가끔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교차상영으로 인해 그 시간대에 배정되지 않거나, 그야말로 진상 관객이 입장했을 때는 불가항력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장단점보다 나를 더 일희일비하게 만드는 건 바로 영화 자체였으니, 부족한 잠을 떨쳐내며 아침부터 출동했는데 시쳇말로 “이건 뭥미?”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영화를 만났을 때의 절망감이란! 지면으로는 옮기기 어려운 육두문자가 입에서 절로 튀어나온다. 물론 아침 댓바람부터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관람하는 시간뿐 아니라 하루가 행복하게 되는 건 당연지사고….
[그을린 사랑]과 [마이 웨이]를 2011년 최고와 최악의 영화로 꼽은 데에는 우선 조조할인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내 경험이 기여한 바가 크다. [그을린 사랑]의 경우에는 개봉관 수도 극히 적고, 무엇보다 일몰 이후 시간대로 집중 편성되어 있어 적잖은 짜증이 밀려왔다. 물론 그 이유가 단순히 상업적인 교차상영 때문이 아님을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에 반해 [마이 웨이]는 ‘이 시간에도 영화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꼭두새벽부터 상영을 시작해, 말이 좋아 당일 상영이지 26시 종료가 뭔 말인지…. 하여간 개봉관 수도 빵빵하고, 상영 스크린 수는 단연 최고였으니 시쳇말로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했고, 조조할인의 선택 폭도 넓다 못해 거의 ‘광활한 만주 벌판’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이유만으로 위의 두 영화를 2011년 최고와 최악의 영화를 뽑았다면 품평은 여기서 끝날 테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이니 차근차근, 잘근잘근 두 영화를 되짚고, 곱씹어 보자.
불타는 사랑도 아니고 그을린 사랑이라니
[그을린 사랑]이 이야기하는 내용만 두고 보자면, 이건 이론의 여지없이 최악의 영화다. 전쟁, 테러, 고문, 살인, 영아유기, 근친상간 등. 살인 하나만 보더라도 암살부터 명예살인, 민병대의 민간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다양하고 사실적이어서 어떻게 저런 이야기를 저리도 천연덕스럽게 읊조릴 수 있을까, 놀라우면서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그런 요소를 희화화하거나 오락적인 요소로 취급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 상업적인 요소를 잉태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 말은 [그을린 사랑]이라는 영화가 재미있어서 또 보고 싶은 영화가 절대 아니라는 뜻,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뜻, 어쩌면 보는 내내 불쾌하고 언짢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관람 이후에도 그 기분 나쁜 잔상이 오래 남는다는 뜻, 되시겠다.
한 여인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눈앞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그 남자의 아들을 낳지만 출산과 함께 아이를 빼앗기고, 다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지만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체포되어 구금된 상황에서 고문과 성폭행을 당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을 임신시킨 고문기술자가 바로 자신이 낳은 아들이었다니!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당하고도 삶의 끈을 놓지 않는 한 아랍 여성의 일생을 차분히 그려낸 이 영화는, 그래서 단순히 반전영화라기보다는 강인하지만 순수한 영혼을 가진 한 인간을 노래한 송시(頌詩)에 가깝다.
이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덕목은 큰 목소리로 휘몰아치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객관적으로 사태의 추이를 따라가는 데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감정이 유쾌하든 불쾌하든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잔상이 오래 남는다는 건 내 영혼을 그토록 심하게 흔들어 놓았다는 말이 되겠는데, 그걸 격정적인 목소리로 선동한 것이 아니라 우수에 젖은 듯 촉촉한 목소리로 노래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을린 사랑이지 뜨거운 사랑이나 불타는 사랑은 절대 되지도, 될 수도 없다.
심신이 약한 노약자나 임산부를 비롯해 많은 분께 이 영화를 추천할 수는 없지만, 세상 쓴맛을 단 한 번이라도 맛보셨던 분들이라면 용기를 내어 한번쯤 보시는 것이 어떨까? 무엇보다 그리스 비극, 콕 집어 이야기하자면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절대 ‘강추’하겠다. 소소한 장치들에 담긴 오이디푸스 이야기와의 연관성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누가 뭐래도 난 내 갈 길을 가겠다고?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제작비! 그러니까 영화를 만들면서 이제까지 한국에서는 써본 적이 없는 돈을 썼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일단 한국 최고다. 거기다 한중일 3국의 유명 배우들이 주조연을 맡았을 뿐 아니라 유럽 출신의 배우와 스텝들까지 이 영화에 참여한 것이 확실해 보이니, [마이 웨이]가 갖는 국제성은 기존의 한국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국제성은 배우들의 국적과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전 세계적이라는 뜻이지, 영화의 완성도나 혹은 감동, 흥행이 국제적이라는 말은 절대, 절대 아니다.
왜 이렇게 말하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나와 같은 한국인 감독이 만든 영화를 봤는데, 같은 국적을 가진 내가 어디서 어떻게 감동해야 할지 알 수 없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세계인들이 이 이야기에 감동할 수 있을까? 그런 의심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하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조선에서 한 청년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게 되고, 이후 소련군과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2차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전사하게 된다는 것. 아니다. 여기서 하나 빠뜨린 게 있으니, 그건 바로 이 조선인 청년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초월적 선’의 소유자이며,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든 언제나 달리기만 한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볼거리를 위해 얼굴도 잘 생기고 몸매도 좋은 주인공이 죽어라 밤낮없이 달릴 수도 있다. 백번 양보해서 영화의 주인공이니 초월적인 선을 가질 수도 있다. 다만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과 자연스럽게 융화되면서 달린다면 뭐라 할 말이 없을 텐데, 주인공은 얼토당토않은 상황에서도 무조건 달린다. 혹한의 추위에서, 그것도 포로의 신분으로 한밤중에 수용소를 자유롭게 달린다는 설정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이건 흔하디흔한 SF영화의 설정보다 더 안드로메다적인 상상력이 아닐까? 초월적인 선도 그렇다. 지금이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초월적 선의 현현이라는 예수마저도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에서 인간적으로 갈등한다는 영화가 나온 이 시대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것도 정치나 종교적 신념도 없이 오직 선을 구현하려는 설정이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든다.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누구이며, 내가 왜 이런 억울한 상황에 놓여야 하며, 이 시련은 언제 끝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아니 그냥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밀쳐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만 했어도 나는 주인공에게 ‘기꺼이’ 감동받았을 것이다.
이런 재앙은 시스템의 부재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감독 한 명에게 절대적 권한이 집중되어 있으니, 감독의 컨디션에 따라 영화가 진행된 것은 아닐까? 시나리오고 연출이고,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단 한 사람이 결정했다는 것은 단연코 축복일 수 없다. 더욱이 이 영화처럼 300억이라는 현실감 없는 자본이 투입된 영화에서는 말이지. 영화 제목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냥 내 길을 가겠다.’는 정도가 아니고, 그야말로 ‘누가 뭐라 해도 난 나만의 길을 달리겠다.’이다.
그런데 [마이 웨이]를 내가 본 2011년 최악의 영화로 뽑으며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단순히 이 영화의 실패가 이 영화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이다. 왜 나는 이 영화를 생각하면 할수록 이토록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생뚱맞은 용어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일까?